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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후감]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
    [ 독 후 감 ]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 일국사를 넘어선 동아시아 읽기조선과 중국은 가까운 지역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달한 국가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나라를 비교해서 본다면 역사적으로 동일한 상황은 없을지라도 유사한 상황은 찾아낼 수가 있다. 특히 조선과 중국의 역사를 풀어 가는데 제 3국인 일본인이 이 책을 집필했다는 점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 일본은 우리나라와도 인접한 국가일 뿐만 아니라 중국과 전쟁이 빈번해 그들 눈에 비쳤던 한국이나 중국의 모습이 매우 궁금했기 때문이다.하지만 통사적 느낌이 강해 색다르게 다가오진 않았지만, 몇 가지 내가 알고 있던 그리고 아직 우리나라 학계에서도 논의가 나오고 있는 조선의 양반을 신분으로 볼 것인가 문제에 대해 일본인 저자의 시각이 어떤지에 대해 다루고 있어서 알 수 있었다.역사교과서 왜곡이라고 해서 한,중,일 3개국 나라가 연합해 역사교과서를 집필한다는 말이 나왔었고, 지금도 추진 중인데 좁고, 협소하게 보는 일국사를 넘어서 서로 다른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어떻게 융합하고 역사를 읽어 내려가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1. 동아시아 세계의 지각변동동아시아 전역을 표시한「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만들어지면서, 종래의 나타나지 않았던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 유럽까지 부정확하지만 표기가 되면서 지역의 확대가 나타났다. 또한 이 시기 동아시아로부터 유럽에 걸쳐 넓은 영역을 가진 몽골제국의 성립 되었다. 몽골의 성립으로 인해서 서아시아의 발달한 상업·금융·교역의 노하우를 들여왔다.오래 지속되면서 부패가 일어나고 각지에서는 불만이 쌓여 다른 왕조가 설립되듯이 원 말기에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1368년 대도를 점령해 원의 황실을 북방으로 쫒아내 명 왕조가 중국을 통일했다. 원 말기 무렵 고려에서는 공민왕이 즉위하는데 중국에서 원의 통치가 흔들려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의 소식을 듣고, 공민왕은 100여년 가까이 지속되었던 원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반원운동을 전개한다.데 대표적으로 정화가 이끄는 남해 원정을 들 수 있다. 그의 원정은 7회에 걸쳐 동남아시아에서 아프리카 동해에 이르는 30여국을 원정하여 명나라의 국위를 선양하였고, 무역상의 실리를 획득하였으며, 중국인의 남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원정은 대규모의 해외 경제 전략인 동시에 관무역의 성격을 띠고 있다. 영락제의 대외 확장 정책은 홍희제가 즉위하면서 홍희제가 오이라트와의 전투에서 자신이 포로가 되면서 끝이 나게 된다. 이 후 몽골과 티무르 제국과의 전쟁을 통해 명은 수세에 빠지고 대몽골 정책은 만리장성을 건설 하는 등 수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명 중기의 국가와 사회는 태평성대의 시기로 경제면에서는 민중생활이 안정되고, 대외관계에서는 15세기 후반은 방어책으로 시종일관 국가적인 위기는 없었다. 중앙관제와 지방 행정제도도 정비되고, 과거를 통해 인재를 등용했다. 이렇듯 2장에서는 명 제국의 확대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었다.3. 양반의 세기 - 16세기 조선여기에서는 유희춘이 쓴 「미암일기」를 바탕으로 16세기 조선의 사회모습을 전개해 갔다. 「미암일기」는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6~1938년에 조선총독부 내에 있던 조선사편수회에서 「미암일기초」라는 책을 간행했는데, 「미암일기」는 저자인 유희춘이 유배지 충남 은진에부터 그가 사망하기 이틀 전까지 11년 간 쓰여진 일기다. 「미암일기」는 현존하는 사료가 적었던 16세기 조선의 사회상황을 전해주고 있어 조선의 모습을 살펴보기에 좋은 자료이며, 조선왕조실록이외 조선사회를 정부고관이었던 유희춘을 중심으로 여러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생각된다.유희춘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지만 을사사화 때 유배되어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현재남아 있는 「미암일기」는 은진유배 이후에 쓰여진 것이다. 「미암일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당시 인간관계를 엿보기에 더없이 좋은 자료를 제공한다. 인관관계는 크게 네 부류로 나누어진다. 제일 많이 등장하는 사람으로 유희춘의 친척,로 이루어졌던 사회였던 것이다.4. 후기 명제국의 빛과 그림자16세기 중반부터 중국은 급격히 변화해 갔다. 중국뿐만 아니라 16세기는 세계사적으로 보았을 때 격동의 시대로 유럽이나 아시아에서 국가·지역 간의 분쟁이나 통합, 신흥세력의 발흥, 도시의 발달, 사람과 물질의 유동화, 사회불안과 종교적 혁신, 질서의 근원을 추궁하는 새로운 사상 등이 나타났다.이러한 시기에 명은 북방의 군사비를 증대해야 해야 했으나 명초기 재정은 현물주의로 세금의 대부분을 점유하는 토지세는 쌀이나 보리로 납부하는 것이 원칙이라 불편함을 느껴 북방방어용 군량의 은 납부가 시작되어 은 재정으로의 전환을 시도하였다. 전국 토지 소유자들은 은을 입수해서 세금으로 지불하게 되었고, 북방에는 해마다 거액의 은이 운반되어 그 때문에 국내에서는 심각한 은 부족 상태가 되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일본 은으로 일본의 은 1530년대에 조선과의 무역에서 등장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황당선의 표착에 관한 기록이 보이는데 이러한 황당선의 출현은 중국 남부와 일본과의 무역이 활성화되었던 것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명의 해금령으로 민간의 해상무역은 금지되었다.하지만 여러 외국 은이 대량으로 유입됨으로써 중국 국내의 운 부족은 해결되지 않고, 16세기 말에도 여전히 많은 지식인들은 은 부족을 개탄했다. 그것은 세금으로 전국에서 징수된 은이 국가재정에 기생하던 관료나 상인들에게 들어가서 그들의 부를 채우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부를 채운 자들은 도시상업에 투자하는 풍조를 만들어내 도시와 농촌간의 경제 격차를 더욱 심화시켰다. 이때 토지에 투자를 피했던 것은 농촌은 불경기로 곡물가격은 하락하고 땅을 소유해도 세금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촌사람들은 수공업으로 생계를 꾸려갔지만, 도시의 호경기와 농촌의 불경기의 극심한 차이로 농촌에서 도시로 나가는 사람들의 흐름이 나타났다. 이러한 사회에서 민란이 명말에 발생하는데 당시 민란에 참여한 도시주민들은 사료 안에 시민, 시인 등으로 불렸고, 더 나아가 민란 각광받았다. 청 태조 누르하치는 이러한 특산품의 루트를 장악해서 상업 이익을 취했다.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전반에 걸쳐 동아시아 해상무역에서 최대의 이익을 가져온 것을 중일무역이다. 하지만 일본의 침략성에 대한 경계로 해금정책을 해제했지만 중국 상인이 일본에 직접 내항해서 교역하는 것은 인정되지 않았으며 그 사이 포르투갈이 중일무역에서 많은 이익을 얻었다. 포르투갈 상인은 중국 연안에 안정된 거점을 확보하고, 이후 본격적인 대일 무역을 하지만, 16세기 말 무역과 선교사의 포교활동이 연결된 포르투갈은 일본정부의 탄압이 시작되면서 우위를 상실하고, 새롭게 동아시아 교역에서 중국 본토와의 관계가 그다지 없던 타이완으로 네덜란드가 거점을 얻게 되었고, 중국 상품 공급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 상인을 파트너로 삼아야 했다. 중국 상인인 정지룡과 네덜란드가 연합하면서 중일무역을 장악하게 되었다.6. 조선 전통사회의 성립조선 건국이후에도 조선과 여진과의 관계는 각별하였다. 그러나 여진이 성장하고 명의 국력쇠퇴로 인해 조선은 위기의식을 갖게 되는데, 이 때 광해군은 명과 여진 사이에서 중립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퇴위하고 인조는 반 여진정책을 펼치면서 그 결과 후금은 3만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공격했다.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결국 강화를 맺고 전쟁을 끝냈으나 조선이 금과 맺은 강화를 지키지 않자 1636년 청은 재차 조선을 공격했고,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조선군의 주력은 서울 남방에 있는 남한산성에 들어가 철저 항전을 꾀했지만, 청군의 병력에 어이없게 패배하였다. 결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에 인질로 보냈다. 이러한 두 차례의 전쟁은 조선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를 계기로 한동안 소중화사상이 싹트게 되었다.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친 정치사는 당쟁으로 대표된다. 당쟁이란 양반?지식인들이 당파로 나뉘어 정계의 주도권을 다투는 현상으로 이것은 사림파의 정권 장악 이후, 공론을 중시하게 되어 정치 참여층이 확대되고, 과거 합격자 수가 점차 증가했음에 조선의 농업을 최고봉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네덜란드 인이 본 17세기의 조선을 통해 제 3자의 입장에서 조선을 관찰하고 있는데, 네덜란드인이 바라본 조선 모습은 충격적이었다.7. 청 왕조의 평화17~18세기는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중상주의 정책을 취해 국내 상업을 보호하기 위해서 무역을 제한한 시기로 청 왕조의 경우 무역제한은 국내 상업을 보호하기 위한 경제적 의미라기보다 오히려 해상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치안 유지면의 의미가 강했다. 이것은 청대 중기까지 중국이 무역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다.중일 무역의 중요성은 점차 약화된 반면 남양무역의 비중이 높아졌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전반은 구미선의 활동도 활발하지 못했고, 일본선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으나, 동중국해?남중국해는 거의 중국선의 독무대였다. 이 시기는 중국 범선의 남양무역 황금기였다. 1644~45년 본토 정복 시점에 청 왕조의 지배영역은 명대에 정비된 장성보다 훨씬 북방으로 퍼져 시베리아의 무인지대까지 이르렀다. 청 왕조는 러시아와 부딪히게 되고, 그 후 네르친스크 조약이 맺어지는데 이것은 최초로 외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체결한 조약이라 할 수 있다.청 황제인 강희제는 그의 남다른 우수한 능력과 노력으로 중국황제와 북방 민족의 한이란 두 얼굴이 구체적인 인격 아래 확고하게 통일시켰다. 강희제는 만주인?몽골인의 전통으로서 사냥?무예에도, 중국의 전통적 통치학인 유학에도, 게다가 서양과학에도 관심을 가지고 각각 상당한 소양을 보였다.옹정제는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적인 인물이었지만, 역사상 보기 드문 철저한 독재 군주였다. 옹정제는 과거 자격을 등에 지고 엘리트인 체하며 우월의식을 가진 관료들에게 적개심을 감추지 않고, 고전 학문에 입각해 세속에서 벗어난 정론을 내세우는 관료보다 분골쇄신하고 실무를 성실하게 처리하는 관료를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옹정제의 실력주의는 엄격한 상하관계의 윤리와 표리일체를 이루고 황제일원주의가 밑바탕이 되어 있다.18세기에는 중국체제에 대해 유럽사상가들이 깊은 관심을 기울이기 .
    독후감/창작| 2011.04.11| 8페이지| 2,000원| 조회(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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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학의 흐름과 변화양상
    유학의 흐름과 변화양상朝鮮時代를 이끌어온 것은 儒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性理學인 것이다.儒學은 2500년 전 중국의 노나라에서 출생한 공자에 의하여 그 이전에 있었던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역사 등을 종합 정리한 것으로서 중국을 비롯하여 韓國, 日本 등 한자문화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상이다. 韓國에서는 高句麗 소수림왕 2년(372년)에 太學을 세워서 자제를 교육하였다고 기록이 되어있으며 儒學思想은 이보다 훨씬 이전에 들어와서 三國時代, 統一新羅時代, 高麗時代에 이르기까지 종교적으로는 佛敎의 영향아래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儒學의 이념을 실현하였다. 朝鮮時代에 들어와서는 정교의 양면에서 민족사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우리에게 영향을 주었던 儒學思想에 대하여는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평가가 되어왔다.이러한 儒學은 한마디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인간의 삶을 대상으로 인간을 중시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점은 기독교와 비교를 하면 그 차이가 뚜렷하다. 기독교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든 이론이 전개된다면 유학은 사람을 중심으로 모든 이론이 전개된다. 유학의 핵심개념의 仁은 사람의 기본적인 존재구조인 너와 나라는 인간관계를 뜻하는 글자로 즉, 인간의 가치를 고양하고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것이 儒學의 근본정신이다.지금부터 조선시대전반에 걸친 유학의 변화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1. 조선 유학의 흐름(1) 성리학의 정착.성리학은 고려 말의 개혁과 조선을 건국하는 데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으나 이를 수용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신진 사대부 사이에 입장의 차이가 나타났다. 15세기 조선 사회가 당면한 문제는 고려 시대부터 누적되어 온 대내외적인 모순을 극복하고, 왕조 교체에 따른 새로운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부국강병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정도전, 권근 등 관학파로 불리는 이들은 성리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한.당 유학, 불고, 도교, 풍수지리 사상, 민간 신앙 등을 포용하여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으며, 특히 주례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대외적 모순과 농장의 확대와 불교 교단의 폐해, 민생의 피폐 등으로 인한 대내적 모순을 극복하면서 성장하였던 신흥사대부는 불교에 대항하는 개혁사상으로서 성리학을 수용하였다. 성리학은 당시 송에서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던 불교와 도교를 철학적으로 극복하고 성립한 새로운 유학이었다. 이기론(理氣論)은 성리학 전체의 기본이었고, 이에 바탕을 두고 인성론(人性論))과 수양론(修養論)이 체계화되었다. 그리고 성리학의 이상을 현실사회에 구현하는 방법이 예(禮)였다. 여기에 여러 정치, 사회, 경제 정책들이 성리학의 기본 이념에 입각하여 구체화되었다. 말하자면 성리학은 중세사회의 모든 분야를 규정하고 영향을 미치는 이데올로기, 즉 지배 사상이었던 것이다. 한편 성리학은 명분론을 가졌다. 명분론은 그 이름에 따라 상하, 존비, 귀천이 정해진다고 보고 거기에 나타나는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나아가 이 차별은 지주와 전호 관계뿐만 아니라 군신, 부자, 부부관계 등에 모두 적용되었으니 그것이 곧 사회윤리였다. 여기에 왕도정치와 민본사상은 성리학이 기본적으로 갖는 계급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역사에서 긍정적 기능을 하게 하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다.원으로부터 고려사회에 도입된 성리학은 주로 북방의 한인 유학자들이 남송의 성리학을 수용해 관학화(官學化)한 것이었으나 성리학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다양한 사상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신흥사대부 사이에서는 입장의 차이가 나타났다. 길재, 정몽주 등의 온건개혁파는 인간의 본성과 성리학 본연의 왕도에 충실하였으며, 따라서 이들은 고려의 지배체제는 그대로 둔 채 제도운영상의 문제점만 개혁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정도전, 권근 등의 급진개혁파의 사상은 「주례」를 중시하며 제도개혁과 왕도, 패도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때문에 역성혁명론에 입각해 왕조도 바꿀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조선의 건국은 바로 이들, 급진개혁파에 의해 이루어졌다. 건국세력들은 관심분야가 성리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한당유학과 기타 다른 학문에도 관심을 보였다. 나아가 불교와 도교 제시하였다면, 정도전이 왕자의 난으로 제거된 뒤 온건개혁파였던 권근은 조선 초기의 성리학을 종합적으로 체계화하고, 그 속에 이기론, 사단칠정론, 수양론 등 이후 사상계의 쟁점이 되는 주제들을 모두 포괄함으로써 조선에서 성리학이 뿌리내리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의 사상은 인간의 심성에 대한 관심과 수양의 요체로 경(敬)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권근 이후 중앙의 사상계를 주도한 것은 김반, 변계량, 허조 등 그의 문인들이었으며 여기에 조용 및 그 문인, 김숙자 등이 참여 했다. 그 후 김시습은 성리학에 학문적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도 도교, 불교 등을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 16세기 중반 이후 하나의 사상적 조류를 이루는 삼교회통(三敎會通)사상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김굉필, 정여창 등 영남학자들과 교류를 가지며 서로 영향을 미쳐 그 뒤 조선 성리학에서 의리와 도덕성이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며 강조되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했다.성종대에 들어서면서 고려 말 온건 개혁파로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재야로 남은 세력들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는 영남사림이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다. 김종직을 비롯한 신진사류들은 형정(刑政)보다는 교화(敎化)에 의한 통치를 강조하였으며 훈척의 비리와 전횡을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비판하고 당시의 사회 모순을 성리학적 이념과 제도의 실천으로 극복해보려고 했다. 이들은 특히 성리학의 수신서인 「소학」을 중시하였다. 김굉필은 평생토록 「소학」만을 읽었으며 스스로 ‘소학동자’라 칭하기까지 하였다.그 결과 이 시기는 성리학에서 도덕적 실천을 강조하는 도학적(道學的)성격의 강화와 함께 또 다른 특징은 주자 중심, 의리 중심의 도통론(道通論)이 확립되기 시작했다.② 조선 중기 유학16세기 조선의의 성리학은 이론적 쟁점의 심화를 통해 성리학을 본격적 수준에 올려놓았다. 이 시대 성리학을 대표하는 두 거장(巨匠)으로는 영남지방의 이황(李滉, 退溪)과 경기 서울 지방의 이이(李珥, 栗谷)이다. 이들의 성리학적 쟁점은키는 것에 반대하고 기의 작용을 강조하며 리의 자발성을 부정하였다. 반면 서경덕과 기대승의 영향을 받은 이이는 성혼(成渾)과 토론하면서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은 같은 감정으로서 다만 사단(四端)은 착한 감정만을 가리킨 것이라 하여, 언제나 기(氣)가 능동적으로 발한다 하여 이(理)의 동성을 부정하는 기승이발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였다. 또한, 이들은 욕망에 근거한 인심(人心)과 성품에 근원한 도심(道心)의 관계를 두 가지 상반된 근원의 마음으로 볼 것인가 하였다. 서로 변환될 수 있는 한 마음의 두 상태인가에 관한 논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이황은 주자의 학설에 입각해 있으면서 현실적 필요성에 의해 이기의 분리와 리의 운동성을 강조하는 주리론(主理論)의 입장에 선다면, 이이는 이(理)의 근원성을 인정하지만 기(氣)의 법칙으로 규정하여 일원론적 경향을 보임으로써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하였고, 주자성리학 자체에 충실하려고 함으로써 당시의 문제를 풀어 나가려 했다. 이황과 이이는 조선시대 성리학에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대표적인 두 학통을 열어줌으로써 성리학의 한국적 전개를 가능하게 하였다.③ 조선 후기 유학임진왜란이 끝나고 17세기부터 조선사회가 후반기로 접어들자 초반부터 주자 중심의 성리학뿐만 아니라 서경덕, 조식의 사상, 양명학, 노장사상, 삼교회통사상 등이 부각되면서 다양한 사상 조류들이 전개되었다. 이는 서경덕학파, 조식학파로 구성된 북인정권의 성립과 광해군의 즉위가 촉진시켰다고 볼 수 있다.16세기에 이황과 이이의 성리설이 정립되자 17세기에는 이를 토대로 행동양식으로서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의례적 절차를 밝힌 주자(朱子)의 《가례 家禮》를 중심으로 예학(禮學)에 대한 논쟁이 활발하게 전개되며, 의례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논리의 치밀성을 가지고 논쟁을 따져나가는 유교철학의 새로운 전개양상을 보여준다. 또한, 1636년 만주족 청(淸)나라의 침략으로 치욕을 당한 이후로 유교이념의 중심논리는 조선사회의 유교문화(中華)를 높이고 침략세력인 성품과 사물의 성품이 같은지 다른지를 검토하는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을 제기하였다. 먼저 정경세(鄭經世)와 김장생(金長生)은 각각 이황과 이이의 성리설을 지지하여 학파적 차이를 분명히 하였고, 이현일(李玄逸)은 이이의 성리설을 조목별로 철저히 비판하여, 이황의 이원론적 주리론을 계승하는 학파를 정립하였다. 이와 더불어 영남의 장현광(張顯光)은 이황의 성리설이 지닌 문제점을 인식하고, 기호의 김창협(金昌協)은 이이의 성리설에서 문제점을 제시하면서 이른바 절충론적 입장을 전개하였다.다음으로 18세기 초에 기호학파에서 권상하(權尙夏)의 제자인 충청남도 아산의 이간(李柬)과 홍성의 한원진(韓元震) 사이에서 인간의 본성과 동물(혹은 사물)의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의 문제, 즉 인물성동이론 대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이간 등은 인간이나 사물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아 타고나는 성품은 모두 ‘이(理)’로서 같다고 보는 인물성구동론(人物性俱同論)의 입장을 주장하였고, 한원진 등은 인간과 사물이 타고난 성품에는 ‘기(氣)’도 내포되어 있으며, ‘기(氣, 기질)’가 다른 존재는 성품도 다르다고 보아 인물성상이론(人物性相異論)을 주장하였다. 이간의 ‘인물성구동론’에 동의하는 학자들은 서울 근교에 많이 살기에 낙론(洛論)이라 하고, 한원진의 ‘인물성상이론’에 동의하는 학자들은 충청도에 많이 실기에 호론(湖論)이라 하여, 이 논쟁을 호락(湖洛)논쟁이라고도 한다.이간의 인물성구동론에서는 ‘성즉리(性卽理)’의 논리에 따라 ‘성(性)’을 바로 본연지성(本然之性)으로 파악하여, 인간과 사물의 성품이 일치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한원진의 인물성상이론은 ‘성(性)’이란 ‘기(氣)’에 내재된 뒤에 붙은 명칭으로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 규정하며, ‘성(性)’을 기질과 관계 속에서 ‘성3층설’(性三層說)을 제시하여, 첫째, 기질을 초월한 ‘성(性)’은 태극이요 인간과 사물이 공유하는 것이며, 둘째, 기질에 원인하는 ‘성(性)’은 기질에 따라 인성과 물성이 다르게 되며, 셋째, 기질에 섞인 ‘
    인문/어학| 2008.07.16| 5페이지| 2,000원| 조회(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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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구려시대 임진강 유역의 성곽 역사적 의미
    高句麗時代 임진강 유역의 城郭 역사적 의미Ⅰ. 序 論Ⅱ. 本 論1. 임진강 유역의 고구려 유적 현황.2. 임진강유역의 고구려 유적.1) 호로고루2) 고성산보루3) 무등리보루군4) 당포성5) 은대리성6) 덕진산성3. 유적을 통해 본 고구려의 관방유적.Ⅲ. 結 論Ⅰ. 序 論.“DMZ” 라는 이곳은 자연생태계의 보고로 불릴 만큼 생태적가치가 높은 지역이 라고 판단되기 때문에 생태계의 보전 및 복원을 통해 생태학습장, 생물다양성 보전지역으로 다양한 동식물의 서식처가 조성되어야 한다는 중요성이 인식되어오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겨레를 갈라놓고, 국토를 양분하고 있는 곳이며, 한민족에게 한없는 슬픔과 고통을 안겨준 한국 전쟁을 상징한다. 더불어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던 동서 양 진영이 격돌하여 2차 세계대전이후 최대의 물적, 인적 피해를 기록하고 있는 동서냉전의 유적지이기도 하다.이러한 DMZ에는 우리들의 손길과 관심이 미치지 않은 유적지도 많으며, 수많은 성곽들이 남아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는데, 이로 인해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하여 임진강유역 일대의 중요성도 가름해 볼 수가 있다. 고구려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던 경기도내의 유적 중 전쟁을 대비해 건설된 관방유적의 현황과 특징을 임진강유역일대로 살펴보고자 한다.Ⅱ. 本 論.한강유역에 자리 잡은 경기도 지역은 평야와 교통로가 잘 발달되어 있어 예로부터 농경과 교통, 교역의 중심지로 부각되었고, 경기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이는 일도 빈번했다. 고구려는 한강유역을 확보한 뒤, 한강 이남과 한반도 남부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경기지역 곳곳에 산재한 고구려 성곽에서 그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1. 임진강 유역의 고구려 유적 현황.『삼국사기』에는 임진강을 ‘칠중하(七重河)’, ‘호로하(瓠蘆河)’, ‘표천(瓢川)’, ‘표하(瓢河)’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명칭은 강의 구비가 심하여 이런 이름으로 부른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며, 임진강 전체의 이름이라 군사상, 행정상 등으로 중요한 지54km이며, 하구로부터 80km 떨어진 고랑포까지는 내륙수운이 발달했다. 강폭은 하류는 200m를 넘기도 하나, 대개 50m 안팎으로 좁다. 임진강 유역은 침식이 쉬운 현무암지대로 하류지역의 양안(兩岸)은 높이 10m정도의 단애(斷崖)를 이루어 천연적인 방어선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곳은 남방세력과 북방세력 양쪽이 공격하는 기지이거나 침공하는 적을 견제 수비할 수 있는 요새인 것이다. 이러한 지리적인 특성 때문에 삼국시대 이래 임진강을 중심으로 한 국경이 형성되면서 이곳을 둘러싼 전투는 매우 치열하였다.먼저 임진강 상류에는 강서리보루, 고성산보루, 무등리 1,2보루, 우정리보루 등과 한탄강유역에 은대리성이 위치한다. 한탄강과 상류가 합류하는 중, 하류 유역에는 당포성, 아미리보루, 호로고루(瓠蘆古壘), 두루봉보루, 덕진산성, 조랑진보루 등의 성곽과 천보산맥 일원으로 이어지는 교통로에 아미성이 배치되었다. 특히 이들은 임진강 상류의 서안을 따라 남북방향을 중심축으로 삼았으며 한탄강과 임진강 중, 하류 유역은 북안을 따라 북동-남서방향을 중심축으로 하였다.2. 임진강유역의 고구려 유적.임진강유역뿐 만 아니라 이 지역일대에는 무수히 많은 고구려 유적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 중에서 임진강유역을 중심으로 하여 몇 가지 유적을 살펴보자.1) 호로고루(瓠蘆古壘)호로고루(瓠蘆古壘)는 임진강 북쪽 강안의 현부암 수직단애 위에 형성된 삼각형 대지에 입지하고 있다. 이곳은 임진강 하구쪽에서 보면, 배를 타지 않고 강을 건널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이다, 때문에 삼국은 이곳을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호로고루(瓠蘆古壘)를 기록한 최초의 문헌은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이다. ‘호로고루는(瓠蘆古壘) 부의 동쪽 32리 호로탄(瓠蘆灘) 위에 있다. 그 동쪽은 적성현과 경계이며,두개의 누(壘)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잇는데, 석벽으로 인하여 견고하다. 전하기를 삼국시대의 둔수처(屯戍處)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강 양안에 북안성과 남안성의 2개로 이루어져 있어 이잔미성()라고하고, 남쪽의 것은 이잔미성(二殘眉城)이라 구별하여 부른다.지표상 수습유물은 고구려 기와가 주종을 이루고 있어 고구려 성으로 추정되지만, 성의 축조방식은 백제계, 고구려계, 신라계가 각각 엿보여 이 지역의 복잡한 세력 교체상을 알려준다. 임진강 일대의 도하세력을 방어하기 위한 전초기지의 기능을 가지며 고구려와 신라, 신라와 당의 전투시 최전선의 요충이었다.2) 고성산보루(古城山堡壘)고성산보루(古城山堡壘)는 연천군 고성산 정상에 자리잡고 있다. 고성산은 해발 150m로 그다지 높지는 않으나 주변을 조망하기에 충분하다. 보루의 전체적인 형태는 원형이며, 가운데에 깊이 180cm 정도의 웅덩이가 있다. 석축 성벽을 쌓았는데, 석축은 정연하지 못하고 많이 무너졌으며 현재 5~6단 정도가 노출되어 있다. 고정산보루(古城山堡壘)는 1995년 처음 알려지게 된 유적으로 육군박물관에서 조사한 보고서에서는 고려시대 이전에 사용된 봉수대로 추정하고 있지만,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의 조사단은 봉수대로 추정하는 근거가 되는 시설들에 대해 한국전쟁이나 그 전후에 축조된 군사시설로 보고 봉수대일 가능성은 배제하고 있다. 유적 정상부의 웅덩이에서 고구려토기편이 채집되어 고구려의 보루로 추정하고 있다.3) 무등리보루군무등리보루는 남쪽에 있는 1보루와 북쪽의 2보루라 칭하는 두 개로 나누어져 있다. 보루가 위치한 곳은 해발 100m로 나지막한 봉우리이나 주변에서는 가장 높은 곳을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한다.1보루는 임진강과 접해 있어 강 건너 군내면 방면의 움직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반면, 북고남저의 지형에 축성하여 강 건너편에서 성내부를 관측할 수 있는 단점도 있다. 정상부에는 산불감시초소가 설치되어 있고, 외곽에는 성벽을 따라 군용 참호가 폭 2m, 깊이 1m 정도 크기로 조성되어 있다. 동벽과 북벽은 군사용 참호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상당부분 훼손되었고, 현재는 노출된 성벽 30~40m정도의 할석을 이용하여 축성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2보루는 무등리 1보루가 있는 장대봉에서 는 해발 100m 내외의 높이에 축조되었으며, 볼 수 없을 정도로 흙 속에 묻혀있다. 성의 남쪽과 동쪽은 거의 수직단애에 가깝게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부분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편이다. 성내에서는 토기편과 와편, 그리고 철제 화살촉과 탄화미 등이 발견되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유연진은 마전현과 연천을 잇던 나루였는데, 이 나루를 지키고 마전방향으로 이어지는 육상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축조 된 보루로 추정할 수 있다.4) 당포성이 성은 임진강과 임진상의 지류가 형성한 삼각형의 단애 위에 축성되었다. 평면형태는 삼각형이고 동서 길이 200m, 남북 실이 50m, 잔존성벽의 높이는 6m이며 성벽의 하단으로는 10m가 넘는 단애가 있다. 입지와 평면 형태에서 호로고루나 은대성과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성벽 상단부위에 이른바 ‘구멍기둥’들이 확인된다는 점, 성벽에 일정한 간격으로 수직홈이 파여져 있고 그 끝에 동그랗게 판 확(確)돌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 등이 고구려의 축성술과 매우 유사하여 앞으로 남한지역에서의 고구려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이용될 것이다.수직홈은 동벽의 조사시 발견되었는데, 이러한 수직혈은 중국 집안의 환고산성, 패왕조산성), 흑구산성 등 여러 곳의 고구려 산성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다.5) 은대리성(隱垈里城)은대리성(隱垈里城)은 한탄강과 차탄천이 합류되는 지점에 위치하는데 두 하천에 의해 침식되어 형성된 삼각형의 대지 위에 축조된 성이다.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은 토기편이고 철제 유물도 소량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성에서 흔히 출토되는 기와가 단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다는 특이한 점이 나타난다.은대리성(隱垈里城)과 유사한 형태로 축조된 호로고루나 당포성의 경우 호로고루와 당포성의 동벽의 축조방식을 각각 석축, 판축) 위에 석축을 취한 것에 비해 은대리성(隱垈里城)은 석심토축)을 하였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는 양식적으로 한강유역 출토품과 유사한 것이 대부분이다.6) 덕진산성(德鎭山 문산읍 장산리 일대의 조망이 매우 용이하여 북진을 막고 남진에 필요한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에 매우 유리한 입지를 점하고 있다. 덕진산성(德鎭山城)은『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 처음으로 기록으로 등장한다. ‘덕진고성(德鎭古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석축 성으로 산을 자르고 임진강을 누르는 형세를 지니고 있으며, 오래 전에 허물어져서 성 둘레는 알 수 없고 광해군 때 이서(李曙)가 수축하였으나 다시 허물어졌다‘라고 기록되고 있다.덕진산성(德鎭山城)은 강이 굽이쳐 단애를 이루는 고지상에 축조되었으며, 내성과 외성의 이중구조를 하고 있다. 내성은 수내나루 방향으로 뻗은 능선과 봉우리를 둘러싸고 있고, 외성은 내성과 연결되어 초평도 쪽의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다. 석축 성벽은 고구려 석축 성벽의 주요 특징으로 거론되는 굽도리식) 기초를 하고 있다.이밖에도 상서리보루, 우정리보루, 광동리보루, 아미리보루, 두루봉보루, 조랑진보루, 대전리산성, 전곡리토성, 아미성, 육계토성, 이잔미성, 칠중성 이 임진강유역에서 발견되었다.3. 유적을 통해 본 고구려의 관방유적.경기지역의 고구려유적은 임진강유역뿐만 아니라 한탄강유역과 양주분지일원 그리고 한강유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이 지역에 유적의 분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지어졌는지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건설되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성곽의 배치를 가지고 기본적인 틀을 찾아보는데서 시작할 수 있는데 이것이 관방체계라고 한다.특히 임진강 유역에서 고구려 성곽의 배치를 분석하여 관방체계를 살펴보면, 우선 임진강 상류는 서안을 따라 고성산보루(古城山堡壘), 무등리보루군, 우정리보루 등의 고구려성곽이 남북방향으로 형성되어 있다. 무등리보루군은 각각 둘레 200m 내외로 장대봉의 능선에 약 500m 거리를 두고 위치하는데, 서안에 접하여 남북으로 연결되며 북쪽으로 약 1.5km 지점에는 둘레 30m 정도의 고성산보루(古城山堡壘)를 배치하였다.) 이곳에서 남쪽 1km 거리에는 당포성과 연결되는 교통로 상에 우정다.
    인문/어학| 2008.07.16| 6페이지| 1,500원| 조회(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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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평]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
    [ 서 평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 目 次 -1. 작가소개- 이민원2. 本 論① 삼국간섭과 명성황후시해사건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② 아관파천 이후에 전개되는 러,일의 타협3. 結 論1. 작가소개- 이민원청주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했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역사학과 석사·박사과정 졸업했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연구위원과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상임이사를 지내고 있다.저서로는『한국의 황제』, 『명성황후시해사건』가 있으며, 논문으로는 대한제국의 역사적 성격, 독립협회에 대한 열국공사의 간섭, 대한제국의 성립과정과 열강과의 관계가 대표적이다.2. 本 論19세기말의 한국사에 대해서 살펴본다면 왜 고종은 강력한 통치력으로 국가의 자주권을 확립하지 못했을까?, 개화파는 신속히 서양 문물을 수용하여 개혁을 추진하지 못했을까? 혹은 왜 의병은 계급적 한계를 극복하고 효율적으로 전략을 구사하지 못했으며, 농민군은 조직적 투쟁으로 일본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지 못했느냐는 것 등이 흔히 비난의 대상으로 입방아에 오르고 있다. 당시는 제국주의 시대, 약육강식의 시대였고, 국가의 인적자원, 재정능력, 군사력은 열강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19세기말의 사회를 격은 사람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00년 전의 한국사에 대한 많은 이들이 냉혹하리만큼 비판적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아마도 무엇인가 할 수 있었는데 못했고, 그래서 나라를 잃었다는 분노와 회의에 대한 표현으로 여겨진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사이의 10년간은 만주와 한반도를 둘러싸고 세력균형이 이루어졌고, 그래서 한국이 회생할 가능성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일 것이다.그러나 냉정히 따져 보면 당시의 세력균형이란 러, 일 양국에나 해당하는 것이었지, 한국의 군주나 관료가 그 덕분에 아무런 구속 없이 부국자강을 이룰 기회를 잡았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때문에 19세기말, 특히 청일전쟁 직후의 한국사에서 정책결정자인 고종의 주변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 책에선 쓰여 외국공사관으로 피난한 참담한 사건도 그렇고, 그 직전의 왕비의 피살과 곧 이어 실시된 강요된 단발령(斷髮令)), 이어 모스크바를 방문한 민영환)특사(閔泳煥特使)의 고립무원한 외교, 나아가서 러, 일의 대표가 은밀히 한국분할을 흥정하던 모습이 한편의 드라마 같다. 그러니까 국내적으로는 을미사변(乙未事變)), 단발령(斷髮令), 아관파천(俄館播遷)), 환궁(還宮) 등이 발생했고, 국외적으로는 하관조약(下關條約)), 삼국간섭(三國干涉)) 등이 발생하고 있었다.이 책의 저자는 정치외교사를 중심으로 19세기말에 발생한 사건들을 재조명하고자 하였다.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근접했던 때인 만큼 한러관계를 축으로 국제관계와 한국 내정의 연관성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19세기 말 한국을 둘러싼 러, 일의 갈등과 음모, 또 그로 인한 한국내정의 파행과 집권자들의 대응을 살펴볼 수가 있었다.① 삼국간섭과 명성황후시해사건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이를 알아 보기 위해선 하관조약과 삼국간섭에 비친 러,일의 한국에 대한 인식, 한국 궁정에 등장한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의 내막, 왕비시해의 과정과 배후 구도, 열국외교관계의 대응과 각국 정부의 반응을 알아봐야 한다.시배리아횡단철도의 착공이래 동북아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기본 방침은 만주의 안정과 한반도의 현상유지였다. 그러나 하관조약을 통해 일본이 요동반도를 할양하고 나아가 한국의 자주독립을 침해한 것은 만주의 안정이라는 러시아의 기본방침을 정면으로 거스른 것이었을 뿐 아니라, 그의 부차적 전제였던 한반도의 현상유지까지도 허구화 한 것이었다. 한반도 내에서 각종 이권의 획득을 꾀하던 알렌 등 서구외교관들의 협조도 웨베르)를 중개역으로 하여 깊숙이 내재해 있었다.삼국간섭 직후 한국에서 러시아의 기반은 공고한 것은 아니였다. 청국에 대한 차관제공 문제로 러, 불로부터 소외된 독일이 이탈하면서 삼국간섭의 위력은 약화되고 있었는데 이 상황에서 일본이 러시아에 반격을 가한 것이 명성황후시해인 것이다. 이 사건은 왕비를 앞세워 일본공사를 견제하여 한국을 삼국간섭 이전 일본 위세하의 상황으로 복귀시키려한 것이다.② 아관파천 이후에 전개되는 러,일의 타협, 그리고 한국정부의 외교적 대응은?이를 살펴보기 위해선 아관파천의 진행과정, 서울에서 진행된 러,일의 협정, 모스크바에서 펼쳐진 러, 일의 협정), 민영환 특사의 대러시아 교섭 등을 상호 연관 지을 필요가 있었다.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피신은 이범진)과 이완용) 등 ‘친미친러파’인사들의 주도와 웨베르의 협조 차원에서 진행된 것이다.아관파천에 대한 러, 일의 태도는 상호 위장적이었다. 먼저 러시아정부는 사전에 이에 관한 아무런 인지(認知)가 없었으며, 다만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피신을 추진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일본 역시 러시아의 그런 주장에 대해 아무런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한걸음 나아가 이를 인정한다는 태도를 취하였다. 러시아는 한국의 현상유지를 희망한 반면, 일본은 삼국간섭 이전 상황으로 복귀하고자 하였다. 이런 배경 하에 1차적으로 러,일 사이에 서울에서 타결을 본 것이 였다. 그것은 아관파천을 인정하고 한국 내에서 양국 군사의 충돌 가능성을 피해보자는 하원의 타협이였다. 그 뒤는 러,일간에 한국 군사, 재정문제 등에 관한 처리를 놓고 상호 타협한 것이다.청일전쟁의 종결과 함께 만주와 한반도를 둘러싸고 본격화된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은 이후 러일전쟁까지 약10년여 간 지속되었다. 그중 삼국간섭부터 약 3년간은 러시아가 만(滿), 한(韓) 양 지역에서 우세한 가운데 주로 한국문제가 러, 일 간의 쟁점으로 부각되었던 때이다. 그에 따라 아관파천(俄館播遷) 전후의 수년간은 열강 중에서도 특히 러시아의 한국에 대한 영향력이 막강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한국사를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한러관계에 대한 연구가 깊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아관파천 전후의 한국사를 한러 관계를 축으로 접근하는데, 이 시기에 잠시나마 한국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고 있던 것은 러시아였던 만큼 한러관계에 초점을 둘 때 한국의 내정문제를 보다 정확히 진단해 낼 수 있으리라 생각검토 할 수 있다.3. 結 論이상에서 아관파천 전후의 한러관계를 중심으로 19세기말 한국과 만주를 둘러싼 러,일의 갈등과 한국의 내정문제를 연관 지어 살펴보았다. 종래 일본이나 구미의 학자들, 그리고 국내 일부 연구자들이 흔히 주장해 왔듯 19세기말에 한국 내에서 빈발한 각종 사건은 언뜻 보기에 국내 집단간의 당파싸움이나 정쟁이 주요 원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시야를 동북아로 확대해 보면 그런 사건이면에는 러,일의 역할이 깊숙이 개입되어있었고, 영,러 대결의 여파도 작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삼국간섭에서 아관파천까지는 한러관계가 급속히 접근을 보게 된 시기였으며, 아관파천 이후 환궁까지는 민영환특사의 대러교섭을 통해 상호인식의 괴리가 정확히 드러난 시기였다. 환궁 이후로는 러시아의 과도한 간섭에 대한 한국 측의 반발과 일,영 측의 대응에 의해 결국 러시아군사교관, 재정고문 및 한러은행의 철수로 재조정되어 간 시기이다.이 시기에는 한국은 러시아가 일본의 한국지배기도를 저지해 줄 견제 세력으로 보고 전폭적인 지원을 기대하였으나 러시아 역시 한반도가 만주와 함께 러시아의 동아시아 전략에 중요한 지역으로 보고, 일본의 군사적 영향력확대를 경계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한국의 군사, 재정적 지원요청에 대해서는 적극적 지원을 기피하면서 가급적 현상유지 혹은 영토보전에 만족하였다. 그 이유로는 시베리아횡단철도가 완공되지 않은 당시로서 일본의 반발을 피하려는 러시아의 정책적 고려, 나아가 영국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러시아의 입장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아관파천을 전후한 시기의 한국 내정에는 러시아는 물론, 일본측의 역할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고, 영국의 역할 등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다음으로 왕비시해와 아관파천을 전후한 시기에 나타난 한국사의 중요한 몇 가지 특징이 있다.첫째, 한국문제의 국제적 성격이다. 이 시기 러, 일의 갈등 하에 펼쳐진 한국의 내정문제는 단순히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러, 일의 대립을 축으로 러, 불, 독국 조정에 팽배했던 인아거일, 왕비시해, 단발령, 아관파천, 고종의 환궁 등이 이 모든 것과 관련된 것이었고, 1897년의 러시아군사교관, 재정고문의 고빙문제, 1898년 초 러시아가 군사교관과 재정고문, 한러은행을 철수한 것 등 거의 모든 국내사건이 또한 그러했다.둘째, 그 당시 한국 측의 러시아에 대한 불균형적인 인식과 외교력이다. 고종의 아관파천 당시 한국 측이 러시아에 군사, 경제적 지원을 기대하고 이를 호소한 것은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정세를 고려할 때 러시아로부터 만족할만한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당시 정부 외교당국자들은 웨베르 등 서울현지 러시아외교관 등에 대한 과도한 신뢰로 인해 러시아에 대한 기대 역시 과도히 부풀어 있었다. 그 결과 기대만큼 실망 역시 컸고, 러시아에 대한 종래의 신뢰 역시 지나치게 급격히 추락하였다.셋째,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이다. 양국은 한국문제에 관한 협상을 전개하면서 ‘한국의 정쟁이나 외교적 신용의 결여’등을 과장하고, 이를 협상의 구실로 내세우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지도력의 부재 등 한국 내부에 문제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을미사변, 단발령, 아관파천 등에서 보이듯 많은 문제들이 사실상 러,일에 의해 유발되고 있었음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넷째, 당시 세계의 초강대국 영국의 영향력이다. 당시 일본은 러시아와의 협상 추진 과정에서 꾸준히 영국의 의향을 타진하고 있었고, 마치 영국의 조언과 후원을 구걸하면서 협상을 전개한 듯 하였다. 그 점은 사토우 주일영국공사의 보고와 기록에 무엇보다도 잘 드러난다.결론적으로 19세기말 한국정치외교사의 모습을 파행으로 치닫게 한 결정적 요소는 와압인 것이다. 흔히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사이의 10년 동안은 만주와 한반도를 둘러싸고 세력균형이 이루어졌으며, 그래서 한국이 회생할 가능성이 있었다고도 하지만, 그런 해석은 역사적 상황과는 동떨어진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고종이나 왕비, 대신 등 당시의 집권자들이 유능했다고는 볼수한다.
    독후감/창작| 2008.07.16| 5페이지| 1,500원| 조회(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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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1. 영화의 시대, 사회적 배경.이 시대는 1861년~65년에 걸쳐 미국의 북부와 남부가 벌인 내전(內戰)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남북전쟁의 원인은 매우 복잡하고 그 배경도 극히 광범위하다. 그러나 전쟁의 직접적인 동기는 주(州)가 연방으로부터 분리 탈퇴한다는 것이 헌법에서 인정되고 있는가의 여부에 관한 헌법해석의 문제였다. 이 밖에 이 문제를 유발시킨 노예제도 시비, 그리고 이와 관련된 동서남북 각 지역간의 이해 대립 등 실로 많은 문제가 얽혀 전쟁의 원인을 이루었다.사회적 배경으로 나오는 북부와 남부는 서로 다른 사회기반의 근대와 중세를 의미한다. 북부는 공장, 산업적 시설 등 근대적인 산업기반 사회이므로, 노예제도 반대 등 인간평등 사상을 당연시하는 전형적인 근대의 모습을 띄고 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남부는 목화농사를 대표적인 작물로 하여 농사를 짓는 농업기반 사회이다. 농업시설도 낙후되어있고, 인간의 노동력을 많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노예제도를 필요로 했다.2. 영화의 주요내용."그곳은 신사도와 목화밭으로 상징되는 곳이었다. 이 아름다운 지방은 기사도가 살아있는 마지막 땅으로, 용감한 기사와 우아한 숙녀, 그리고 지주와 노예가 함께 존재하는, 책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꿈처럼 기억되는 과거가 오늘로 살아있는 곳. 문명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일까(A Civilization Gone With Wind...)."남북 전쟁 전의 미국 남부는 새로운 문명과는 단절 된 채 옛 관습과 전통에 묻혀 살아가는 아름다운 땅이었다. 북부가 노예 제도를 폐지하고 남부에도 이를 강요하자 남부는 연방을 탈퇴, 남과 북은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전쟁에 나섰던 남부의 청년들이 점차 돌아오기 시작하는데, 찰스의 형 카네기도 돌아와 스칼렛에게 구애를 하지만 그녀에게는 여전히 애슐리 뿐이었다. 스칼렛은 세금 300달러를 내지 못해 고난을 겪고, 이때 전쟁 때문에 큰 돈을 번 레트가 군 형무소에 있다는 사실을 안 스칼렛은 그를 찾아가지만 또다시 그의 빈정거림만 받으며, 이에 스칼렛은 동생의 약혼자인 프랭크 케네디와 결혼하여 세금을 해결했다. 전쟁이 끝나고 그녀는 프랭크의 자금으로 제제소를 운영하는데, 여자가 사업을 하는 것에 대한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돈을 버는 일로 열의에 차 있었다. 프랭크와 애슐리는 정치 모임에 나갔다가 kkk단의 일원에 의해 프랭크가 총에 맞아 죽고, 애슐리는 다행히 레트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스칼렛은 결국 돈 많은 레트의 구애를 받아들여 결혼식을 올린다. 레트는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음을 알지만 결혼 생활에서 점차 자신을 사랑해지기를 기다리며 그녀를 위해 많은 돈을 쓰지만 애슐리를 연모하던 스칼렛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해가자 스칼렛과 레트는 연일 싸움이 그치지 않고, 레트는 오직 딸 보니가 커 가는 것을 위안으로 삼아 살아간다.스칼렛은 애슐리와 있는 것을 주위 사람들도 알게 되어 곤경에 처하게 되는데, 자신과 애슐리의 관계를 냉철히 알고 호되게 질책하는 레트에게 점차 이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진심을 미처 깨닫지 못한 레트는 보니를 데리고 여행을 떠나 스칼렛을 실망시켰고, 스칼렛은 그가 돌아왔을 때, 그토록 싫어하던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지만, 레트는 이것마저 진심으로 봐주지 않았다. 결국 스칼렛은 계단에서 떨어져 유산되자, 레트는 자신의 잘못을 슬퍼하지만 이후에도 자존심 때문에 두 사람의 다툼이 계속된다.여기에 그토록 아끼던 보니가 말을 타자 떨어져 죽자, 레트는 더 없는 실의에 빠진다. 더구나 두 사람을 항상 위로해 주던 멜라니도 쓰러진 후 결국 숨을 거두자, 스칼렛은 커다란 슬픔을 겪게 되고, 애슐리가 정말로 사랑했던 사람은 자신이 아닌 멜라니임을 안 스칼렛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레트임을 아고 그에게로 달려오지만, 레트는 미련 없이 그녀 곁을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속마음은 레트를 보낼 수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뇌와 절망, 그리고 슬픔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 아버지와 애슐리, 그리고 레트의 음성이 들여온다. 타라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여기서 이 영화의 명대사 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나온다."타라, 오 내 고향, 타라에 가자. 거기에 가면 그이를 되찾을 방법이 생각날 꺼야.결국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테니깐(After All Tomorrow Is Anther Day)."이 작품의 궁극적인 주제 혹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는 불굴의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이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강인한 정신으로 가족과 농장을 이끄는 젊은 여인의 모습을 그린 삶은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남북전쟁이라는 작가가 의도한 인간의 시련 속에서 작품 안의 주인공들은 나름대로 시련의 생존 투쟁 속에 깊숙이 뛰어들어 살아남고자 하는 각자의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남북전쟁으로 인해 사라져 버린 남부의 낭만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게도 한다.영화의 첫머리에서 말 한대로, "모든 문명은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 좀 더 겸손하고 얌전해 져야 해. 남자들이 이야기할 때 설령 그들이 너보다 수준이 다소 낮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나서서는 안된 단다. 신사들은 잘난체하며 나서는 여자들을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거든" (엘렌 )" 젊은 아가씨들은 그저 눈을 다소곳하게 내리뜨고 ' 예 알았어요. 그 말씀이 옳아요' 하고 말해야만 해요" (마미)또한 영화 중간에 이 대사는 미국의 그 당시 요구되는 여성의 모습을 대변하는 대화로써 여성은 단지 남성의 보조적인역할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영화 안에서 주인공인 스칼렛은 앞의 엘렌과 마미와는 대조적으로 그 시대의 지방적 전통에서 이탈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스칼렛은 현실에 안주하면서도 때로는 저항하는 이중적인 태도가 보이기도 한다.3. 영화 대 역사.일단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작가의 자전적인 내용이 다분히 녹아있는 영화로 작가 자신이 애틀란타 출신의 백인 지주 계급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바람과 사라지다는 사라진 남부의 좋은 시절에 대한 향수가 짙게 배어 있는 성격의 영화가 되었다. 이런 이유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영화로 나왔을 때 당시 그 드라마틱한 이야기에 이끌려 엄청난 인기몰이가 되기는 했지만 이 영화에서 지나치게 남부를 미화 시킬 뿐 아니라, 편향된 인간이해 라는 모습을 그리는 것 등에 대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일단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매우 남부를 사랑하고, 좋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작가의 심리가 반영되었다.당시 흑인들의 사회적 신분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짐승 같은 취급을 받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악독한 주인을 만나 짐승 같은 대우를 받은 흑인들도 있었지 만은 대부분은 어느 정도 흑인들의 생명을 존중하는 정도의 대우는 이뤄지고 있었다. 물론 교육의 기회나 삶의 질 문제에서는 터무니없을 만큼 열악한 환경에 있기는 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흑인들의 권익을 위한 흑인들만의 노동조합 같은 것이 결성되기도 하는 등 처우개선을 위한 노력들은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있던 노예 제도나 중세의 농노들이 받았던 대우와 비슷했다고 볼 수 있겠다. 남부의 백인들에게 뿌리 박혀 있던 북부에 대한 반감과 멸시가 역시 흑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물론 역사는 언제나 승리한 자의 편이기에 북부의 노예해방은 지극한 선으로 이야기되고 남부는 노예의 피를 빨아먹는 악덕 노예상들로 그려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북부와 남부를 좋은 편, 나뿐 편으로 가를 수는 없다고 본다. 이건 당시 정치적 상황이 만들어낸 결과였을 뿐이다.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된 남북전쟁은 노예 해방 전쟁이었던 것처럼 미화되어 있지만 사실은 공업 중심적인 북부와 농업 중심적인 남부의 이해가 충돌해서 빚은 전쟁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남부 지주는 농업에 의존했고 특히 면화생산이 중심이었는데 대농장 경영에 의한 대량생산과 염가의 노동력에 의한 생산가 절하가 가장 중요함은 물론이었으므로 이것을 위해서는 노예제도가 가장 편리했다. 남부는 영국에서 온 귀족 후계가 많았고, 그들과 노예제도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생산을 보장해줄 뿐만 아니라 생활의 모든 면에서 필수적인 부속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프리카로부터 무제한 흑인을 데려왔고 미개지 개척이 진전됨에 따라 이들의 수도 급속하게 늘어서 1790년에는 70만 명이었던 것이 남북전쟁의 승리로 노예 해방령을 발포한 1865년에는 4백 50만 명이어서 남부 제주 인구의 2분의 1을 점하고 있었다.
    인문/어학| 2008.07.16| 4페이지| 1,500원| 조회(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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