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성의 슬픔?전족(纏足)의 역사(1) 전족이란?전족이란 관습은 여성의 발을 옥죄어 기형적으로 작게 만드는 것으로서 10 세기 후반 중국사회에 도입된 이래 20세기 초까지 존속했다. 처음에는 지배계층의 일부에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후대가 되면 일반 농민층에까지 파급되었다. 전족은 통상 대여섯 살 어린아이 때 시행하는데 그때의 고통이란 이루 형언할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런 고통을 거쳐 여성의 발은 10cm 도 채 안 되는 앙증맞은 크기로 자리 잡게 된다. 전통시대의 지식인들은 전족에 대해 최고의 상찬을 보냈다. 전족을 묘사하는 문학작품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허다하다. 이러한 전족의 습속은 작은 발을 아름답다 여기는 미 감각으로 부터 연원한 것이었다. 여성에 대한 성적인 차별과 사회적 제약도 전족이 확산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9 세기 이후가 되면 전족에 대한 반대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학교와 교회, 그리고 일부 지식인들이 중심을 이루었던 이 운동으로 말미암아, 20 세기 전반기에 들어 거의 천 년여에 걸쳤던 전족의 시대는 마침내 종언을 고하게 된다.(2) 들어가며10 세기 무렵 중국사회에 전족이란 기괴한 관습이 도입되었다. 여성의 발을 옭아매서 비정상적으로 작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습속이 처음에는 무희와 가기(歌妓)로부터 시작되어 이윽고 상류층의 규방(閨房)에 침투하고, 마침내 명청시대(明淸時代)가 되면 농민층에까지 파고들었다. 전족이 행해지던 시대, 어머니들은 자신이 전족을 하지 않아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한탄하고, 울며 괴로워하는 어린 딸들을 다그쳐 전족을 시켰다. 전족은 극심한 고통과 불편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세간에는, ‘두 쪽의 전족이란 한 단지의 눈물로 만드는 것(小脚一雙 眼淚一缸)’이라는 속담까지 생겨났다. 이 어처구니없는 풍속은 그 출현 이래 20 세기 전반까지 중국여성의 생활을 지배했다. 전족의 역사는 무려 지난 천 년여에 걸쳤던 것이고, 또 그것은 동시에 중국여성들의 기록에서 전족여인이 등장하는 사례는 전무하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남송시대의 지식인도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다.2) 뿐만 아니라 당대 이전의 조각이나 회화, 그리고 고고학적 출토물에 이르기까지 전족의 존재를 증명하는 자료는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다.3) 이러한 사실은 송 대(宋代), 특히 원 대(元代) 이후가 되면 회화나 조각 등에 묘사된 여성의 대부분이 전족을 하고 있는 점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미 한대이래로 작은 발(小足)을 아름답게 여기는 미 감각 자체는 분명히 존재했다. 예컨대 후한 후반기의 민가(民歌)인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에서, ‘가냘프게 내딛는 작은 발의 발걸음, 정묘(精妙)하기가 세상에 견줄 데 없도다(纖纖作細步 精妙世無雙)’라고 노래하는 것은 그 단적인 사례이다. 그러한 관념은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더욱 일반화되어, 남북조를 거쳐 당대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귀족층 사이에 소족(小足) 추구의 풍조가 확고히 자리 잡게 된다. 당시 시인들의, ‘발아래의 금빛 작은 신(足下金薄履, 張華 「輕薄」)’이라든가, ‘여섯 치 아담한 발의 고운 자태(六寸膚圓光致致, 韓螟 「珖子」)’라 하는 등의 소족 상찬이나, 남조 제(齊)의 동혼후(東昏侯)가 금(金)으로 연꽃을 그린 후 작은 발을 지녔던 반귀비(潘貴妃)로 하여금 그 위를 걷게 한 후 ‘발자국마다 연꽃이 생기는도다’라고 희롱했다는 일화 등은, 그러한 당시의 분위기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마침내 오대(五代)에 이르러 전족의 출현을 보게 된다. 유명한 풍류가이자문학가이기도 했던 남당(南唐)의 황제 후주(後主) 이욱(李煜)의 조정(960 년대)에서였다. 후주는 6 척 높이의 금연(金蓮)을 만들어 온갖 보화로 장식한 후, 후궁인 요랑(檗娘)으로 하여금 비단으로 발을 졸라매고 그 안에서 춤추게 했다. 이때의 풍경이 너무도 인상적이어서 당시의 후궁과 무희들이 다투어 이를 모방했고 이로써 전족의 풍조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전족이 출현했다 해도 오대까지는 처리해야 하는 그들에게 있어 전족은 이만저만한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었다. 요컨대 전족은 10 세기말에 최초로 등장하여 시간의 추이와 더불어 갈수록 확산되어 갔다. 처음에는 궁정의 후궁과 무녀(舞女)들이 전족을 시작하였고, 그것이 수도의 상층 부녀자에게 전파되었다가, 점차 지방도시의 지배계층 부녀자들에게, 그리고 원대를 거쳐 명청 시대가 되면 지배계층 뿐만 아니라 일반민에게까지 확산되어 갔다. 청대의 인물인 전영(錢泳)이, ‘사대부 가문으로부터 편호소민(編戶小民)에 이르기까지 전족하지 않는 이가 없다. 전족은 용모단장의 한 요건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명청 시대 그와 같은 전족풍조의 확산 내지 전족에 대한 관념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할 것이다.(4) 여성의 사회생활과 전족전족은 통상 4~5 살의 나이에 시작된다. 네댓 살이라 해도 아이의 발은 상당히 자라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발을 베로 칭칭 동여매어 그 성장을 억제하고, 나아가 자란 뼈마저 뒤틀어버린 다음 거기에 붙어있는 살을 고름으로 녹여버리는 것이었다. 심지어 세간에서는 ‘썩어 문드러지지 않으면 발이 작아지지 않는다. 문드러질수록 더욱 예쁜 발이 된다(不爛不小越爛越好)’고까지 일컬어졌다.8) 그러다가 때로 발가락이 하나 둘 떨어져나가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 처음 전족을 하게 되면 예외 없이 살이 헐고 고름이 줄줄 흐르기 때문에 봄과 여름을 피하여 될 수 있는 대로 늦가을이나 겨울에 시작해야만 했다. 전족을 시작하면 대략 사흘에 한 번씩 헝겊을 풀어 고름을 닦아내고 소독한 다음, 다시 힘껏 동여맨다. 더욱이 처음에는 아무리 통증이 심할 지라도 억지로 많이 걸어 다녀야만 한다. 그래야만 전족이 완성된 후 조금이라도 보행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때 통증이 심하다 하여 앉아만 있다가는 훗날 전혀 거동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이러한 일을 여자라면 누구를 불문하고 겪어야하는 것이다. 전족을 시작할 때의 고통은 너무도 극심하기 때문에 누구라도 울지 않는 아이가 없었다. 그런데 된 것, 이를테면 궁혜(弓鞋)와 잠신(睡鞋)까지도 성적인 의미를 띄었다. 색주가(色酒家)에서 기녀의 신발을 벗겨 술잔으로 삼는다든가, 혹은 한량들이 성적인 희롱으로서 궁혜를 훔치는 행위 등이 바로 그것이다. 심지어 전족은 여성의 보행을 불편하게 하여 불가피하게 엉덩이 근육을 발달시키고 이로 말미암아 성행위시의 성감을 증폭시킨다고도 생각되었다. 전족은 총체적으로 성을 직접 연상시키는 매개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양자의 관련성에 대해 청대의 인물인 이어(李漁)는, 가냘프기가 형체조차 없는 듯 하여 보면 볼수록 애처로워 진다. 이는 한낮의 쓰임새이다. 부드럽기가 마치 뼈가 없는 듯 하여 가까이 할수록 더욱 어루만지고 싶어진다. 이는 밤중의 쓰임새이다(瘦欲無形 越看越憐惜 此用之在日者也, 柔若無骨 愈親愈耐撫摩 此用之在夜者也).9)라고 말하고 있다. 비록 점잖은 어투이기는 하나, 전족이란 밤의 용도로 더할 나위 없는 생김새를 지니고 있음을 웅변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전족이 성적인 상징물로 자리 잡으면서 남성이 여성의 발을 애무하는 것은 성행위의 직전단계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어떠한 여성이 남성에게 발을 내맡긴다는 것은 바로자신의 육체 모두를 허용한다는 의미가 된다. 『금병매』와 『육포단(肉浦團)』을 위시한 명청 시대 대중소설 내지 도색소설에서 전족의 관찰이나 애무가 일반적으로 성적 희롱의 첫 단계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 그러한 사례이다. 이를테면 『금병매』에서 서문경(西門慶)은 반금련(潘金蓮)과 수작을 시작할 때 짐짓 젓가락을 탁자 아래로 떨어뜨렸다가 그녀의 발을 슬그머니 꼬집어 의사를 타진하고 있고(『금병매』 제 4 회), 맹옥루(孟玉樓)와 초대면할 때에도 다름 아닌 그녀의 작은 발을 살펴보며 만족감을 표시하고 있다(제 7 회).한편으로 전족은 신분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전술했듯 여성의 활동력과 노동력을 박탈하는 전족은 그 만큼 당사자가 생산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용모야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선천적으로 주떨어지듯 / 달에 새싹이 돋은 듯 / 가냘프고 부드러운 비단 수(繡)에 꽃이 가득 하도다 / 헤어진 후 그대를 다시 보지 못 했네 / 한 쌍의 물오리 언제 다시 얽히리 / (다시 만나거든) 허리를 잡고 어깨 위에 무등 태우고 / 손으로 받쳐 등에 업어주리.” 앞서 든 소동파의 「영족」이 전족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비교적 명징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 당인의 작품은 동일하게 전족을 찬미하면서도 에로틱한 분위기가 다분하다. 송 대에 비교하여 명청 시대에 들어서면, 전족에 대한 관념이 심미적인 것보다도 성적인 함의가 농후한 것으로 변모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전족에 대한 찬사와 탐미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강렬하여졌다. 이러한 풍조는, ‘전족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 품위있는 선비이고, 반면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시골의 속물이다’라는 자기합리화까지 제기될 만큼 공공연한 것이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명청 시대가 되면 전족애호가임을 자임하고, 또 전족의 품격을 논하는 논객들까지 출현하게 된다. 그런 논객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청대의 방현(方絢)이다. 그는 유명한 전족 찬양론자로서 전족의 미와 품격에 대해 나름대로 정밀한 논구를 진행하여 『향련품조(香蓮品藻)』라는 논술을 남기고 있다. 여기서 그는 아름다운 전족이라면 비(肥)?연(軟)?수(秀)라는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만 한다고 지적한 후, 마른 즉 차가우며 강한 즉 교만하다. 이런 발들은 도저히 치료할 방도가 없다. 반면 통통하면(肥) 그윽하고 윤택이 나며, 연(軟)하면 부드럽고 아리따우며, 빼어나면(秀) 비로소 빛나고 우아하다. 그러나 살쪘다 하여 통통한 것은 아니며, 옥죄었다 하여 연해지는 것이 아니고, 신발을 잘 골랐다 하여 빼어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통통함과 연함은 혹시 모양으로 판별할 수 있을지 모르나 빼어남은 마음으로 읽어내야 한다. 고 말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전족의 모양새란 그 당사자의 인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또한 전족은 심미의 대상일 뿐더러, 그 올다.
티벳 전통의 혼인유형 분석과 군혼문화의 형성배경*Ⅰ. 서론중국의 소수민족정책은 국가의 균형발전이라는 보편성 속에 해당민족에 국한되는 특수성을 포함한다. 특히 이러한 특수성에는 해당민족이 역사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전통과 문화를 와해하고 분산하려는 목적이 의도되어 있다. 현재적으로 중국의 소수민족 중 가장 그 분포와 체적이 광대하고 독립의 의지가 고조되어 있는 티벳은 점차 중국 정책의 의도 속에 고유의 전통과 문화가 파괴되면서 그 정체성과 전통문화의 말살 위기를 맞이하였다. 중국 정책의 진행 과정 속에서 티벳의 정체성은 이미 다양한 측면에서 희석되어 있으며, 이러한 기로에서 티벳의 전통문화를 통한 정체성에 대한 고찰은 현상을 주시하고 그 변화의 요인을 이해하기 위하여 주요한 과제일 뿐만 아니라 티벳의 정체성과 전통의 지속적인 생명력이 중국의 개발정책과 가지는 상관성을 파악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작업이다.따라서 본고에서는 이상의 목적을 토대로 티벳의 정체성과 저력을 혼인문화특히 계층에 따른 혼인유형 분석과 군혼문화의 형성배경의 전통을 통하여 고찰할 것이다.혼인은 가정의 구성을 전제로 하며, 역사적으로 한 가정의 형태는 이에 상응하는 혼인의 유형을 수반하고 있다. 따라서 전통적인 혼인문화는 인류의 주요한 문화현상이다. 인류의 초기는 모계사회이며, 모계사회의 특징을 혼인의 형식으로 국한하자면 일처다부 등의 군혼문화를 지적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혼인형태는 티벳에 지금까지 존재한다.) 현재적으로 티벳에는 여전히 일부일처를 비롯하여 일부다처(대부분이 姐妹共夫의 형태)?일처다부(대부분이 兄弟共妻의 형태) 등의 다양한 결합형식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일처의 형태를 제외한 군혼의 전통은 외부의 주의를 집중할 수 있는 티벳 혼인문화의 전통적인 특징임에 틀림없지만 이는 결코 단순한 엽기 또는 야만을 토대로 형성된 문화현상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이 티벳에서 자생하여 계승된 문화의 일면임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평면적인 현상에 대한 고찰이 아닌, 이러한 혼인문화를 생산한 인문적의 주요한 구성조건이 사회권력과의 연계이기 만큼, 중국 정부의 흡수시기인 1940-1950년대에는 약 30여개가 있었다. 그 중 일부의 ‘미찰가정’은 기본적으로 당시 티벳의 재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예를 들면 ‘夏?’?‘擦絨’ 등과 같은 가족이다. 특히 이와 같은 ‘미찰가정’ 역시 가족의 지속을 위하여 이혼?재혼?데릴사위?양자 등의 결합형태를 사용할 수 있었으며, 가족의 연속과 가족 내의 남성계승자 유무에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남성계승자가 있다면 이 계승자의 직위 상승을 통해서 그 가족의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었으며, 이러한 과정을 이용하여 가족의 사회적 지위 또한 제고할 수 있었다.) 결국 ‘미찰가정’의 혼인 상황을 미루어 볼 때, 토지의 보유정도가 티벳 귀족가정의 지위와 개인의 운명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귀족계층 사이에는 일부일처 이외에도 일부다처의 형식과 일처다부의 형식과 같은 혼인유형이 당시 공존하였음을 이해할 수 있다.2. 농노계층의 혼인문화농노계층인 ‘미새’는 티벳 전체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상층농노인 ‘차파’와 하층농노인 ‘퇴군’?‘낭생’ 등으로 구분된다. 전자인 차파는 ‘納稅人’이며, 후자인 퇴군?낭생 등은 모두 ‘小戶人家’인데 이 중 주요 계층은 ‘퇴군’이다. 정치권력이나 실제세력과 같은 사회적 지위를 통해서 본다면 차파는 비교적 그 입지가 높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는 계층이다. 차파는 각각 가족의 명의로 협동화된 가정단위를 조직한다. 각각의 차파는 지주로부터 승인받아 상당한 경지의 면적을 관리한다. 또한 이러한 토지들은 계승방식에 따라 자손들에게 세습이 가능하다. 따라서 모든 차파의 가정은 서면화된 토지계약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규정된 각 항의 의무 내용을 철처히 이행해야 하며, 규정 내용을 위반할 경우에는 지주에게 추방당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차파는 그들이 계약한 토지에 구속되어 직접적으로 또는 영구적으로 계약한 토지를 이탈할 수 없다. 차파는 그들의 토지 또는 지비율을 차지한다. 이에 본고에서는 현재까지도 혼인의 전통으로 계승되고 있는 이러한 특수 혼인유형에 대해, 그 형성배경을 이상에서 고찰한 사회구조적 층위와 수요에 따라 자세히 파악하였다. 그러나 본고는 이상에서 도출한 결과에 대해 충분히 긍정하지만, 결국 티벳 전통 군혼문화의 주요원인은 사회구조적인 요소의 수용에 우선하여 관념적 요소가 토대가 되고 있음에 주의하였다.따라서 본고에서는 티벳이라는 고유의 인문지리 환경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은 티벳사회의 독특한 관념을 생산하였고, 이것이 군혼문화의 형성을 자생하게 하는 배경에도 작용하였음을 전제하였다. 특히 이와 같은 배경은 토지 중심의 사회구조 속에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취지와 부합하여 군혼문화가 티벳 전통의 혼인문화로 정착되는데 일조하였을 개연성에 주목하였고, 이를 위하여 티벳 군혼문화의 형성배경을 환경에 대한 순응, 종교의 초월의식, 경제적인 이익추구로 구분하여 분석할 것이다.Ⅲ. 군혼문화의 형성배경티벳의 지리와 환경은 기타의 지역과 비교할 때 태생적으로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티벳을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문화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리 요소에 대한 파악이 선행되어야 한다. 부여된 자연과 그 속에서 적응하고 단련하는 인간에 대한 조화는 환경에 생활이 일치하는 특징은 물론 이로부터 생성되는 독특한 관념과 사고를 형성한다. 특히 티벳은 지형과 지리 환경에 의해 폐쇄되고 고립되어 일종의 문화가 자생 또는 유입된 경우 그 원형이 철저히 보존되었다. 결국 본고에서는 티벳에 현존하는 군혼문화의 형성배경이 토지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농노제 사회구조에서 출발한 혼인의 전통임을 감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군혼문화 형성의 주요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볼 수 없으며, 이에 우선하여 군혼문화의 형성을 거부하지 않고 수용할 수 있는 관념적 배경이 기존했을 것으로 인정하였다.따라서 본고에서는 군혼문화의 형성배경을 이에 대한 관념적 사고의 형성을 주요한 원인으로 간주하여, 먼저 자연과 본성을 수용하는 숙명론을) 토대로 월한 행복을 기원하며 쉬지 않고 염불한다. 또한 자신의 소견을 대신할 수 있는 초월세계를 갈구하기 위해 성지순례를 떠난다. 티벳인들은 평생 친절한 종교 생활로 만족과 희망을 동시에 병행한다. 이러한 티벳불교의 평화성은 초월의식에서 비롯한 것이다.이상과 같이 티벳불교에서 비롯한 초월의식은 물질문명에 대한 초월, 이념과 사상에 대한 초월, 국가에 대한 초월, 삶과 죽음에 대한 초월, 성과 생식에 대한 초월의식을 유도하였고, 이러한 초월의식은 티벳사회의 주요한 관념으로 자리하였다. 결국 성에 대한 초월의식은 티벳사회에서 전통적인 축제를 통한 남녀의 야합과 응집을 수용하는 적절한 토양이 되었으며, 이는 역사적인 군혼문화의 실천에 대한 거부감을 일소하고 수용하는 데 있어 적극적인 인식으로 작용하였다.3. 경제적 이익추구이상에서 언급한 환경에 대한 순응에서 기인하는 개방적 사고와 종교의 초월의식은 티벳사회에서 성숙한 의식으로 정착하였고, 이러한 배경에서 형성된 티벳사회의 관념은 ‘계층구조에서 기인한 경제적 이익도모를 위하여 성사되는 군혼문화’ 역시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사고의 출발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티벳사회의 군혼문화는 일차적으로 이를 수긍할 수 있는 사회적 관념의 만연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어떠한 경제적 이익이라도 그것이 사회적인 기본인식의 호응과 인정으로부터 거부된다면 한 사회의 문화적인 기조로 정착되어 지속될 수 없다.결국 티벳 군혼문화의 형성배경은 역사적으로 티벳사회에 견고한 사고로 자리한 환경 순응에서 출발한 개방적 사고와 밀교의 초월의식에서 비롯한 것이며, 이러한 관념을 기초로 경제적 이익추구를 위한 사회구조의 요소가 부가된 것임을 알 수 있다.본고에서 전통적인 혼인유형을 고찰하기 위한 티벳 전통사회의 계층 골격과 이 중 개방적인 사고와 초월의식을 토대로 군혼문화를 유지하였던 계층과 그 원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승려계층비승려계층귀족계층(급이파)아계제본 또는 제본미찰미찰농노계층(미새)상층농계층 : 차파하층농계층퇴군간두낭생천민계층이와 같은 티벳사운 인식을 바탕으로 사회문제와 여성의 욕구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서 사회복지 차원에서 노력하는 것이 여성복지이다.) 이 논문도 이와 같은 입장에서 보호가 필요한 여성들에 대한 여성복지정책이 아닌 일반적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여성복지정책을 논의하려고 한다. 또한 중국에서의 여성복지의 대표적인 대상은 여성노동자를 들 수 있다. 따라서 주로 여성노동자에 대한 복지정책을 중심으로 살펴본다.본 연구는 첫째, 중국의 여성복지정책)을 성 관점, 즉 성 인지(性認知)적 관점)을 가지고 여성복지정책에서 양성평등이 완전히 실시되고 있는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최근 여성정책에 대한 학자들의 관심이 고조되면서 실질적인 양성평등사회 실현을 앞당기기 위한 성인지적 정책형성과 관련된 정책연구가 활성화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성 관점을 가지고 여성복지정책을 실질적으로 성 분석(gender analysis)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주의 시각)에서 중국의 여성복지정책이 성 관점을 반영하고 있는가를 분석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둘째, 중국의 사회주의체제를 통한 양성평등 전개과정과 사회보장제도에서 여성들에 대한 복지는 어떻게 전개되고 있으며, 중국여성복지정책의 환경을 법과 제도, 국가, 시장, 사회?문화적 가치로 나누어 중국여성이 복지정책에서 어떻게 규정되며, 이러한 규정성은 중국여성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분석하려고 한다.셋째,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아직도 유교의 가부장적인 요소가 남아 있다. 따라서 정책상으로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가족 내에서는 남녀 불평등현상이 나타나는 가족 이데올로기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에 의해 주도되는 중국의 가족주의 복지정책은 도시와 농촌에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넷째, 여성복지정책의 현황을 통하여 중국의 여성단체들의 여성지위향상에 관한 노력은 어떠하였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중국은 넓은 나라이므로 한 성(省)을 중심으로 즉, 강소성(江蘇省) 부녀연합회)를 통해 여성단체의 활동과 그 단체들이 국가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
《시스코시스템즈의 인수합병을 통한 지속가능한 성장》1. 회사소개 및 사업현황시스코시스템즈는 1984년에 스탠퍼드 대학교의 전산실에서 근무하고 있던 레오나드 보삭과 샌디 러너 부부가 창업한 회사이다. 이 부부는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서로 떨어져 있는 컴퓨터를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였다. 시스코시스템즈는 2008년 포춘誌가 발표한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에 6위로 선정, 1998년 이후 11년 연속 영예의 기록을 세웠다. 또한 포춘지가 선정한 2008년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에서 업계 1위로 선정되었다. 존 챔버스(John Chambers) CEO는 2008년 배런스 위클리(Barron’s Weekly)가 발표한 ‘세계 최고의 CEO 3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현재 시스코시스템즈의 총 임직원 수는 67,318명(2009년 1월 기준)이며 전 세계 54개국에 지사를 두고 있다. 이 업체의 주된 사업은 네트워크 사업인데, 다양한 협력사를 대상으로 한 기술이전 교육, 유지 정비 기술 교육에 힘쓰고 있다. 시스코시스템즈는 핵심 장비인 라우터, 스위치뿐 만 아니라 네트워크 보안, 스토리지, 무선랜, 광, 그리고 IPCC(IP컨택센터)를 포함한 통합 커뮤니케이션 등 네트워크 전반에 걸친 모든 사업 분야에서 네트워크 일등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시스코의 연간 매출액은 1990년 상장한 당시 6,900만 달러에서 2007 회계연 도에 349억 달러를 기록, 17년 만에 거의 500배 이상의 성장을 보였으며, 2008 회계연도에도 359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 높은 매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시스코는 연간 45억 달러 이상을 연구개발에 투자해오고 있으며, 전 세계 10여 개의 주요 연구소에서 22,000여명의 엔지니어들에 의해 연구개발이 이루어 지 고 있다. 이에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5,000여건의 특허가 시스코 발명가들 (Scientific Atlanta 및 Webex 포함)에 의해 출원된 바 있다□ 시스코는 세계적인 네트워킹 솔루션진출- 인터넷 상의 비디오 콘텐츠 재생기기를 제조하는 덴마크의 KiSS Technology와 셋톱박스 제조업체인 Scientific Atlanta사를 인수하여 Linksys에 편입- 2009년 10월, 비디오콘퍼런스 기업인 탠드버그를 30억 달러에, 무선이동통신 장비업체인 스타렌트 네트웍스를 29억 달러에 인수□ 소비자 VoIP 시장의 성공으로 인해 소비자 시장에서 자신감을 획득- VoIP 서비스에 VoIP 전화기까지 판매하여 기존의 통신기기 제조업체들(아바야, 노텔)을 제치고 VoIP 시장의 선두자리를 고수- VoIP 시장 진출 9개월 만에 200만 명 이상의 가입자 확보하여 시스코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의 성장을 달성, 관련 기술 및 제품 개발, 파트너쉽 체결 등 VoIP 사업화 노력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둠□ 시스코의 자회사인 Linksys는 가정용 라우터 포함, 네트워크 엔터테인먼트 시장 등 신규 사업영역을 개척- 향후 디지털 제품들이 연결되어 정보를 주고받는 것이 핵심 트렌드가 될 것으로 판단☞ 네트워크 엔터테인먼트 시장이 2004년 39억불에서 2010년 161억불로 급성장 할 것으로 기대- 2006년 1월 CES에서 DVD 재생기능을 갖춘 홈 네트워크 허브를 출시☞ TV와 떨어진 곳에서도 TV에 영상을 무선으로 전송할 수 있고 HDD를 탑재하 여 DVR 기능을 하며 음악, 사진 등 여러 형태의 콘텐츠를 저장, 전송 TV튜너 와 인터넷 연결만 더해지면 IPTV의 셋톱박스 기능을 구현2. 시스코의 인수합병 전략? 자체개발과 M&A를 병행하여 첨단기술을 확보한다.IT시장의 변화 속도는 너무나 빠르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모든 기술 혁신을 달성할 수 없다. 따라서 시스코시스템즈는 초기에 타당성 조사를 실시하여 제품을 자체적으로 개발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기업을 인수하여 첨단 기술을 확보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한다. 여기에 사용되는 핵심적인 도구 중 한 가지가 계획수립매트릭스이다. 이 매트릭스에서 각각의 업종에 대하여 경영 혁신의 방법별로 각각 가로 세로 칸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비슷한 규모의 기업은 합병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이 경우 시스코의 기업문화를 상대기업에 전파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인수 대상 기업은 반드시 6개월 이내에 상품화할 수 있는 탁월한 기술력을 보유해야 한다는 등의 구체적인 기준역시 있어야 하며 기업이 '정직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인수하지 않는다.이러한 기준에 의해 인수하는 과정에서 시스코의 특이한 점이 또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인수대상기업의 오너와 임원진까지 인수한다는 것이다. 이는 시스코가 직원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도 있지만, 자신들이 필요한 기업을 정확히 파악한 후에 물색하여 M&A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엔 임원진의 필요까지 파악되어 있기 때문이다.? 첨단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수한 인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시스코가 아주 좋은 조건으로 한 기업을 인수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계약을 포기한 일이 있었다. 이유는 상대방 기업의 제품을 일단 시스코의 제품 생산라인에 흡수하고 나면 상대방 기업의 직원들이 더 이상 필요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례들이 시스코의 진정성을 믿었고, 해당 기업의 직원들도 인수전이나 인수 후에도 불안해하기 보다는 자신들이 주어진 일에만 매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자율적인 경영 팀과 각종 프로그램에 집중하여 인수된 기업의통합속도를 가속화한다.시스코가 인수 후에 직원들을 잔류시키기 위해서 쓰는 전략이 '조기 적응 프로그램' 과 '자율적인 경영 팀 조직'이다. 조기 적응 프로그램은 이미 인수대상기업의 직원으로써 인수를 경험한 직원들과 새롭게 인수된 직원들은 멘토-멘티로 연결하여 새롭게 인수된 직원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서 신속하고 정확하게 대처하여 이들이 빠르게 프로젝트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율적인 '경영 팀 조직' 역시 새로이 인수된 기업의 직원들은 그 부서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기존 시스코 직원들과 함께 장기적인 성과를 분명히 제시한다.4. 시스코의 인수합병 사례 분석① 1993~1998년 인수합병 사례시스코는 1993년 9월 Crescendo Communications사를 인수함으로써 수많은 인수합병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시스코가 매출이 약 1,000만 달러밖에 되지 않았던 Crescendo를 고액에 인수했을 때 엄청난 판단착오라는 비난이 많았으나, 이 인수는 2년 만에 시스코에 5억 달러에 달하는 매출을 안겨주었고, 그 후 스위치 시장에서 시스코가 강점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시스코는 시장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인수합병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왔으며, 1996년 4월 StataCom사를 약 46억 달러에 인수하여 WAN스위치 시장에 진출함으로써 공중/사설/혼용 네트워크 모두에 걸쳐 엔드 투 엔드(End-to-End)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는 기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② 1999년 인수합병 사례시스코는 1999년 총 18개 업체를 인수합병 하였다. 1999년 인수합병 사례를 살펴보면 특히 광 인터네트워킹 업체에 대한 인수합병 추세가 상당히 강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케이블 모뎀 관련 기술과 DSL 장비 등 가입자망 분야 기술에 대한 인수합병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 이외에 콜센터 소프트웨어 분야 기술을 강화하였으며, 무선 LAN 분야의 인수합병에도 많은 비용을 지불하였다. 시스코는 1999년 4월 OC-48, OC-192이상의 초고속 데이터를 처리하는 고집적, 고성능 세미컨덕터를 제조하는 실리콘 기술업체인 StratumOne Communications를 4억 3,500만 달러에 인수하였다. 이후 시스코는 총 74억 달러를 들여 광통신 장비업체인 Cerent사를 69억 달러에, Monterey Network를 5억 달러의 주식교환방식으로 각각 인수하였다. 두 기업을 인수함으로써 시스코는 미래의 차세대 네트워크 인프라에 필요한 광전송 시장에 진입하였으며, 광통신 기반에서 음성?데이터 통합 기술을 확보하여 기존의 업체와의 경쟁에 본격적으로 바 있다. 또한 시스코는 스토리지 네트워크와 IP 네트워크를 연결시켜주는 기술을 보유한 NuSpeed Internet System사를 4억 5000만 달러에 인수합병 하였다. NuSpeed는 1999년 설립된 소규모 신생업체로, 단일 시스템을 통해 데이터와 스토리지 네트워크를 통합하여 저장된 정보에 대한 접근을 더욱 용이하게 만드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시스코가 생산하는 장비들이 주로 IP표준을 기반으로 하는 반면 NuSpeed사가 보유한 SAN(Storage Area Network)장비는 주로 광 채널 표준을 사용한다. 시스코는 SAN 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일 목적으로 NuSpeed를 인수하였으며, 2000년 6월 Brocade Communications사와 제휴를 보완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파악된다.④ 2001년 인수합병 사례시스코는 경기하강에 따른 감축경영과 구조조정으로 인해 2001년 7월 2개의 기업만을 인수합병 하였다. 시스코는 2002년 대도시 광 네트워크 분야에 필요한 실리콘 기술 개발업체 AuroraNetics사와 가상사설망 기술을 개발하는 인터넷 보안 솔루션 개발업체인 Allegro System사를 인수 하였다. 시스코가 초당 2.5Gbps의 실리콘 기술을 보유한 반면, AuroraNetics는 초당 10Gbps를 처리할 수 있는 실리콘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⑤-1 최근사례통신장비 업체 시스코가 그간 주력해온 통신사업자와 기업 시장의 테두리를 벗어나 일반 개인 및 가정을 정조준하며 전체 사업방향의 궤도를 수정했다.시스코는 네트워크를 개인 생활 속에서 배우고 즐기기 위한 하나의 플랫폼으로 정의했다. 전화, 텔레비전, 컴퓨터, 등 모든 가정용 전자제품을 IP네트워크로 통합하는 솔루션을 앞세워 이제부터 네트워크 배후가 아닌 전면에 직접 나서겠다는 포석이다.기술과 시장을 선도해온 세계 최대 통신장비 업체가 이처럼 전략을 바꾸면서 대기업 수요에 치우쳤던 국내외 통신장비 시장 전반에 변화를 몰고 올 전망이다. 손영진 시스코시스템즈코리아 사장은 “최근여준다.
중국의 주거형태와 건축양식1 . 건축과 중국인의 의식세계중화사상 북경의 한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명청 ( 明淸 ) 시대 황제들의 자금성 자금성을 통해 중국은 “ 한 가운데서 화려하게 빛나는 세계의 중심 ” 이라는 연상이 가능함 폐쇄적 / 내향적인 중국인 고공기 ( 考工記 ) 에 나타난 건축에 대한 중국인들의 이상 “ 천자의 도성은 중앙에 왕궁이 있고 왕궁의 동쪽은 종묘 , 서쪽은 사직 , 앞에는 정부관서뒤에는 시장을 배치하도록 되어있다 . 그리고 도시 전체를 성으로 둘러싼 후 각 변에 3 개씩 문을 설치하고 , 성 안에는 동서방향과 남북방향으로 각각 9 개씩 간선도로를 설치한 구조다 .” 중국의 역대 도시를 보면 모두 도시 전체를 성곽으로 둘러싸서 외적의 침입에 대비 , 폐쇄적이고 내향적인 중국인들의 의식세계를 의미 건축과 중국인의 의식세계 중화사상 그리고 내향적인 중국인2 . 중국 건축양식의 특징중국 건축양식의 특징 궁전건축을 중심과제로 발달 대부분의 건축물이 목조 본위의 건축물 평면 구성이 단순하여 대부분 직사각형이나 정사각형 건물들을 좌우 대칭으로 배치 지반 위에 기단을 높이 쌓고 그 위에 주춧돌을 놓으며 ,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는 구조형식 개개의 건축물에는 각각 독립된 지붕을 씌움 매우 뛰어난 채색장식 중국 건축양식의 7 가지 특징3 . 중국의 주거형태중국의 주거형태 중국 전통가옥의 전형 “ 사합원 ( 四合院 )” 크고 작은 방들이 가운데 정원을 둘러싸고 있으며 , 방과 정원 사이에는 방들을 연결하는 중랑이 있어 전체적으로 사각형의 평면을 형성 중국인들의 가장 전형적인 주거형태인 사합원 집안의 주인이나 웃어른의 일상적인 거처가 중심이 되며 , 집안의 사당이나 , 집안 어른들이 모여서 회의하는 방으로 구성 주택 내외부의 구분이 엄격하며 공간적 위계질서 존재 대문은 풍수설의 영향으로 축 선상에 있지 않고 남동쪽 구석에 위치 주 건물의 양쪽에는 세로로 두 개의 건물이 마주보고 있는데 , 이곳에 자녀나 아랫사람들이 거주 주 건물과 마주보는 쪽에 건물이 배치되지 않은 구조도 있는데 이를 삼합원이라 칭함사합원 전경과 대문 중국 전통가옥의 전형 “ 사합원 ( 四合院 )” 중국의 주거형태 베이징 전통가옥 사합원의 내부 구조중국의 주거형태 휘주 ( 徽州 ) 의 민가 강남 ( 江南 ) 특유의 공간구조를 갖고 있는 매우 독자적 주거형식 중국주택의 전형적 구성 원리 ( 내향적 , 폐쇄적 , 위계적 , 축적 ) 반영 천정 ( 天井 ) : 여름의 심한 일교차를 극복하고 적절한 채광을 확보 하려는 합리적 이유에서 파생 좌우대칭의 축적 구성이지만 , 중앙의 당 ( 堂 , 堂屋 ) 을 중심으로 양측에 한두 개의 와실 ( 臥室 ) 이 배치 휘주 민가의 정경중국의 주거형태 황토고원 지대의 동굴 주택 요동 ( 窯洞 ) 산서 , 섬서 , 감숙 , 하남 등 황토고원 지대에 분포 시베리아로부터 세찬 바람에 실려 온 누런 흙들이 쌓여서 이루어진 황토고원으로 부터 황토를 파서 집 을 건설 자연절벽에 횡혈을 파서 주거공간을 형성하는 고산식 요동 평탄 대지에 사각형 굴 ( 수혈 ) 로 인공절벽을 만든 후 수평의 굴을 파는 하침 식 요동 황토고원 지대의 요동의 전경중국의 주거형태 객가 ( 客家 ) 의 방어용 주택 토루 ( 土樓 ) 주로 복건성 서남지역과 광동성 동북지역에 분포 높은 토담에 푸른 기와지붕이 겹쳐 있는 거대한 건축 군 외지에서 오거나 타향에 사는 사람들을 뜻하는 객가인의 주거형태 타민족으로부터 집단 방어하기 위해 조성한 토성과 각진 주거형태 일족 ( 一族 ) 인 대가족을 수용하는 거대한 집합주택 지진과 방화에도 견고하며 통풍 채광에도 뛰어남 3~5 층으로 이루어져 외벽은 흙으로 구조된 두터운 토벽이며 , 내부는 목조 주택으로 구축 객가의 방어용 주택 , 토루중국의 주거형태 객가 ( 客家 ) 의 방어용 주택 토루 ( 土樓 ) You Tube http://www.youtube.com/watch?v=aTM-7ITddU0 eurl=http%3A%2F%2Fwww%2E790713%2Ecom%2F2510893 feature=player_embedded4 . 중국 내 소수민족의 주택중국 내 소수민족의 주택 소수민족의 주 택 몽고족 – 이동이 편리한 “ 겔 ” 내 몽골 자치구를 비롯한 서북 지역과 동북 지역의 몽고족 유목 생활에 편리한 ‘겔’이라고 부르는 이동식 가옥에 거주 높이는 대개 2~3 m, 둘레는 13 cm 유목 생활을 하는 다른 소수 민족에까지 전파 키르키르족 , 타지크족 – “ 양털 자루 속 ” 서북지역의 유목민족 : 하사크족 , 타지크족 , 키르기즈족 , 위꾸족 몽골족의 겔보다 이동이 더욱 편리한 4 인용 텐트와 같은 구조 여름에는 이동 설치하기에 편리 하지만 겨울에는 부적절중국 내 소수민족의 주택 소수민족의 주 택 어룬춘족 , 윈크족 – “ 태양의 집 ” 내몽골 자치구와 흑룡강성의 어룬춘족 , 원큰족 원시적인 수렵 생활에 편리한 주거 생활 야생 동물 가죽으로 만든 둥근 모습의 “ 쎈런쭈 ” 라는 텐트형 아미족 – “ 잠잘 때는 문 앞에 보초를 !” 대만 지역에는 난여도라는 작은섬에 사는 아미족 해풍을 피하기 위해 해안의 경사지에 땅을 파고 돌담집 건설 과학적인 건축 양식을 건축가들이 연구하여 학회에 발표 옛날 서로 약탈해 가는 풍습 때문에 아직도 문 앞에 보초를 세움중국 내 소수민족의 주택 소수민족의 주 택 다이족 – “ 윗층엔 사람 , 아랫층엔 가축 ” 운남성 광서성의 소수 민족 지역에서 보편적 인 ‘깐란 ’이라는 가옥 일종의 커다란 원두막 같은 가옥 수이족 – “ 자연과 어우러진 가옥 구조 ” 자연과 어우러지게 흙과 나무를 사용해 지은 ‘투장팡’이란 가옥 나무 기둥을 만들고 , 벽은 나뭇가지를 엮어 붙인 뒤 그 위에 고령토 같은 진흙을 반죽하여 붙인 집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5 . 중국 주거 공간의 구성중국 주거 공간의 구 성 건물 중앙에 있는 공간이 측면 공간보다 우위를 점한다 중정을 향해 좌측 공간이 우측공간보다 우위를 점한다 중앙 공간은 공적 영역으로 , 좌우공간은 사적 영역으로 사용한다 . 따라서 공적영역은 중앙과 전면에 , 사적영역은 측면과 후면에 자리하게 된다 . 남자의 공간은 항상 중앙과 전면에 , 여자의 공간은 후면과 구석 에 자리한다 . 첫째 아들은 정방의 좌측에 있는 상방에 , 둘째 아들은 우측 건물에 , 셋째아들은 바깥쪽 중정에 면하는 좌측 건물에 , 넷째는 그 맞은편 건물에 기거한다 . 남자아이의 방은 좌측이고 , 여자아 이의 방은 우측이다 . 주택에서는 축을 따라 전면에서 후면을 향해 위계적 질서체계가설정된다 .Reference 참 고 문 헌 세계의 주거 문화 . 윤복자 지음 깊게 본 중국의 주택 . 손세관 지음 중국문화 오디세이 . 강윤옥 지음 WWW.NAVER.COM WWW.GOOGLE.COM http://www.youtube.com/watch?v=aTM-7ITddU0 eurl=http%3A%2F%2Fwww%2E790713%2Ecom%2F2510893 feature=player_embeddedF o r y o u r I n t e r e s t ! THANK U{nameOfApplication=Show}
諸子百家 文學觀春秋戰國時代의 특징(1) 일대 변혁의 시대춘추전국시대는 정치?사회?경제?문화 모든 면에 걸쳐 큰 변혁이 있었던 시대였다. 서주(西周) 봉건제도의 바탕을 이루었던 엄격한 사회계급이 겸병전쟁을 통하여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왕실의 권위가 약화되어감에 따라 제후들은 대부(大夫)들의 힘을 빌어 자기 영토와 세력을 키우기에 여념이 없었고, 대부들은 다시 사(士)의 힘을 빌어 자기 세력을 확장하고 온갖 수단을 다하여 나라의 권세까지 장악하려 하였다. 이처럼 제후들이 서로 싸우고 대부들이 서로 다투는 사이에 이들은 유능한 사의 가치를 알게 되어 사를 존중하게 되었기 때문에 사의 활동이 늘어났다. 왕후의 맏아들만이 영원히 왕후가 되고 대부의 맏아들과 왕후의 자식들만이 대부가 되던 제도가 무너져 버리고, 사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된 것이다. 이에 자신의 경륜을 체계화하여 세상을 올바로 이끌어 보려는 제자도 출현하게 된 것이다. 제자란 모두 이때 사회계급 중 벼슬할 수 있는 계급으로서는 가장 낮은 ‘사’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2) 봉건제도의 붕괴겸병전쟁을 통하여 많은 종족들이 멸망함에 따라 새로 가족이 생겨났고, 또 수많은 사들이 지배계급으로 오르고 자기 나름대로의 활동을 하면서 더욱 가족제도가 발전하였다. 경제면에서 이를 보면 영주(領主)는 줄어들고 지주(地主)는 늘어났으며, 공전제(公田制)가 없어지고 세묘제로 바뀌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서민들 중에도 개인재산을 잘 관리하여 부자나 지주가 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러한 변화는 지역에 따라 달랐고, 같은 사회 안에도 서로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여러 계층이 생겨났다. 이러한 서로 다른 지역적인 특성과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사회계층을 대변하기 위하여 여러 제자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이들은 자기 사상을 선전하기 위하여 학문을 체계화하였고, 자기와 자기가 대표하는 계층의 이익을 위하여 여럿이 모여 학파를 이루게 되었고, 다른 학파와 다투느라 이론이 더욱 발전하였다.(3) 서민 세력의 확대와 상업의 발달서민)는 진시황제 밑에서 재상을 지낸 이사(李斯)와 함께 순자의 제자였다. 한비 는 순자의 성악설에 기반을 두면서도 성악설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사람이 아무리 배운다고 해도 그 성정을 고칠 수 없다고 보았다. 한비가 파악한 인간은 각자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는 이기적 존재이기 때문에 군주의 입장과 신하 및 백성의 입장도 불일치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 때문 에 군주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엄격한 법질서와 형벌, 권모술수 등이라고 여겼다.② 비운의 사상가 한비한비의 고국 한나라는 주변 강대국들의 위협에 늘 시달렸고, 한비는 부국강병책을 주장했지만 받 아 들여지지 못했다. 한비는 강화사절로 진나라를 방문했다가 억류되어 감옥에서 독을 마시고 죽 었다. 진나라의 당시 왕으로 훗날 시황제가 된 정(政)은 진작부터 한비의 글을 읽고 느낀 바가 많았지만, 한비와 동문수학한 재상 이사가 한비를 모함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던 것이다. 이후 기 원전 230년에 한나라는 진나라에 의해 멸망당하고 만다. 한비의 사상에는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 에 놓인 고국 한나라의 현실이 잘 반영되어 있다.③ 도덕보다 법을 높여라!한비의 사상은 {한비자}에 잘 나타나 있는데, 총 55편 가운데 한비 자신의 저작이 아닌 것으로 의심할 수 있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한비의 사상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전반부에는 도가 사상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후반부에는 순자의 성악설에 바탕을 두고 법(法)과 술 (術)을 강조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사람의 성정은 철두철미하게 이기적이어서 그대로 놓아두면 반드시 혼란에 이르며, 때문에 사람을 다스리려면 법과 술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한비가 보기 에 유가가 말하는 도덕에 의한 정치는 인구가 적고 사회가 복합하지 않았던 상고 시대에서나 가 능한 일이다. 인구가 증가하고 경쟁이 극심해진 시대에는 도덕은 쓸모없고 오직 법을 통해서만이 제대로 다스릴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에 대처하는 방식도 달라야 한다는 입장에 바탕을 두고 있다不避大臣, ?善不?匹夫。xingguobubidachen,sh?ngshanbuyip?f?죄를 벌하는 형은 대신이라고 하여도 피할 수 없고, 상을 주어 착한 일을 포상하는 것은 필부라고 하여 누락하지 않습니다.故?上之失, ?下之邪, 治???, ???非, 一民之?, 莫如法。guji?oshangzh?sh?, jiexiazh?xie, zhiluanjuemiao, chuxianqif?i, y?minzh?gu?, moruf?고로 윗자리에 있는 사람의 잘못을 바로잡고 아랫사람의 사악함을 꾸짖고 얽힌 것을 풀고 어그러진 것을 끊고 넘치는 것을 물리치고 바르지 못함을 가지런하게 하여 국민이 지켜야 할 규범을 하나로 하는 데에는 법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官威民, 退淫殆, 止??, 莫如刑。sh?gu?nw?imin, tuiyindai, zh?zhawei, moruxing관리를 독려하고 민을 위압하고 단정치 못한 자를 물리치고 속임수를 못 쓰고 그치게 하는 데에는 형벌만한 것이 없습니다.刑重, ?不敢以?易?; 法?, ?上尊而不侵,xingzhong, zebug?ny?guiyijian; f?sh?n, zeshangz?nerbuq?n형이 무거우면 귀한 자라고 하여 함부로 신분이 낮은 자를 얕보지 못하며, 법이 분명히 심사하면 윗자리가 존엄하여 침해를 받지 않습니다.上尊而不侵, ?主强而守要, 故先王?之而?之。shangz?nerbuq?n, zezh?qiangersh?uyao, guxi?nwangguizh?erchuanzh?윗자리가 존엄하여 침해를 받지 않으면 군주의 위세가 강하여져서 그 요긴한 것을 잘 지킬 수 있습니다. 고로 앞의 임금님들이 귀히 여겨 전한 것입니다.人主?法用私, ?上下不?矣。renzh?shif?yongs?, zeshangxiabubiey?그러나 군주가 법을 버려두고 사사로움을 따른다면 상하의 구별이 없게 될 것입니다.(2) 묵가(墨家)사상의 근본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이며, 많은 사상들과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으나 유가와는 달리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사랑해야 백성들이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들은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셋째, 구체적인 정책이나 제도를 통해 어떤 효용이 나타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이다. 이 기준들은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으 며, 피지배 계층의 입장에 판정의 토대를 두고 있다. 묵자는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하늘 의 뜻을 끌어왔고, 무차별의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현실적 힘인 강력한 통치자의 규제를 요청하 기도 했다. 즉 가장 현명한 사람을 뽑아 천자를 삼으면, 천자는 온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 이 될 것이고 그가 진정 현명하다면 그의 뜻은 하늘의 뜻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복종해 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묵자의 사상은 중앙 집권의 강화를 통해 전국시대의 혼란을 종식시켜 보려는 바람이 있었고 이로 인해 ‘집단주의’ 라는 비판을 받았다.④ 반전평화론 (反戰平和論)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은 이기심에서 초래했다. 이기심은 본질적으로 차별적인 사랑을 낳으며, 묵 자는 지배 집단의 차별적인 사랑 때문에 생긴 전쟁의 물결을 거슬러서 무차별적 사랑에 기초한 전쟁 반대론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전쟁을 반대한다고 외치는 것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 각하여서 방어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고, 방어를 위한 무기도 새롭게 만들어 내기도 하였 다. 묵자가 전쟁을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전쟁이 파괴적이고 비생산적이며, 개인의 사욕을 채우 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⑤ 꿈으로 남은 묵자 철학묵자 철학은 중국 고대 철학 가운데 피지배 계층의 입장에 가장 가까이 선 철학이었다. 하지만 묵자 철학은 지배층의 소외와 통일의 기운으로 인해 점점 설자리를 잃게 되었고, 마침내는 소멸 되었다. 묵자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집단을 만들었고, 강자에 맞서 싸우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묵 자는 혁명을 꿈꿀 수 없었다. 그것은 공격전쟁을 야기하고 공격전쟁은 겸애에 어긋나는 것이니 스스로 자기 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점이 묵 자 집단이 소멸된 내부적 요인인 것이다. 하지만 더 큰(推移) 등 자연현상의 법칙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나, 반면 이 법칙을 인사(人事)에 관련시켜 인간생활도 이에 따르지 않으면 재해(災害)를 입게 된다는 등 미신적 요소가 강하다.① 음양우리는 보통 음양오행설이라 붙여 일컫지만, 음양 사상과 오행 사상은 별도의 시기에 성립되었 다. 음양 사상의 성립 시기를 정확히 가늠하기는 힘들지만, 전국 시대 중기 이후로 추정하는 학 자들이 많다. 또한 오행 사상은 음양 사상보다 조금 뒤에 성립되었다고 본다. 음양 개념을 대략 적으로 설명하면, 외양적이고 밝고 높고 확산하며 활동적이고 단단한 기운을 양이라 하고, 내향 적이고 어둡고 낮고 움츠러들며 정지해 있고 부드러운 기운을 음이라 한다. 세계 혹은 우주의 양 상과 그 변화를 음과 양이라는 두 가지 성질로 설명하려는 노력인 셈이다.② 오행오행은 잘 알려져 있듯이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를 말한다. {서경}의 홍범(洪範)에 처음 본격적 으로 등장하는데, {서경}에는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물질적 기초 정도의 의미를 지니지만, 세월 이 지나면서 우주만물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오행에서 중요한 것은 오 행 사이의 관계다. 이에는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이 있는데, 상생은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 生土),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 수생목(水生木)으로 그 순서는 목화토금수이다. 상극 혹은 상승(相勝)은 수극화(水剋火), 화극금(火剋金), 금극목(金剋木), 목극토(木剋土), 토극수(土剋水)를 말하며 그 순서는 수화금목토이다.③ 음양가의 대표 인물 추연제자백가 가운데 음양가의 대표 인물인 추연(鄒衍: 혹은 騶衍)은 맹자와 거의 비슷한 시기 혹은 그보다 약간 늦게 등장하여 활동했다. 제나라 출신으로 제나라의 직하에서 활동했으며, 와 등의 저서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직하에서 활동할 때 맹자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세계 혹은 우주의 운행과 세 계의 구성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의나 군신 관계 등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