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Ⅰ. 오리엔트인들의 복식사1. 이집트인의 복식사① 배경② 복식의 개요③ 이집트 복식의 종류와 세부 내용④ 소결2. 메소포타미아의 복식① 배경② 메소포타미아 복식의 개관③ 복식의 세부내용④ 소결Ⅱ. 크리트인의 복식사① 배경② 개요③ 크리트문명의 복식 세부내용④ 소결Ⅲ. 그리스의 복식① 배경② 그리스 복식의 개요③ 복식의 세부내용④ 소결Ⅳ. 에트루리아의 복식① 배경② 에트루리아 복식의 개관③ 에트루리아 복식의 세부내용④ 소결Ⅴ. 로마의 복식①배경② 로마 복식의 개관③ 로마 복식의 세부내용④ 소결Ⅵ. 이집트의 건축① 이집트 건축의 개관② 분묘건축③ 스핑크스(Sphinx)④ 오벨리스크(Obelisk)⑤ 신전Ⅶ. 그리스 건축①그리스 건축의 개관② 에게시대의 건축③ 그리스 도시④ 아크로폴리스Ⅷ. 로마건축① 로마건축의 개관② 로마의 도시계획③ 로마건축④ 포럼⑤ 신전과 무덤⑥ 극장과 경기장⑦ 공중목욕탕★참고문헌Ⅰ. 오리엔트인들의 복식사1. 이집트인의 복식사① 배경고대 이집트는 세계 4대 문명 발상지의 하나이다. 그들의 복식은 최초로 아우르는 종합적인 문화의 성격을 갖추고 나타났다는 점에서 서양복식사의 시발로 볼 수 있다. 이집트 주민의 대다수가 나일강 유역에 거주했기 때문에, 자연히 복식은 나일강 유역의 뜨겁고 건조한 아열대성 기후에 적응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들의 의복형은 신체의 일부에 간단히 걸치거나 전체에 헐렁하게 둘러입는 식의 밀착되지 않는 형태를 취하여서 체열의 발산을 최대한 크게 할 수 있었다. 소재면에 있어서도 나일강 유역의 진흙의 산물인 마직 리넨을 주로 사용했는데, 이것은 얇고 가벼울 뿐 아니라 통기성, 흡습성이 좋아 그들의 기후풍토에 매우 적합했을 것이다.이집트는 같은 시대의 다른 민족에 비해 장신구의 발달이 현저하였는데 그것은 의복형이 단순하고 노출이 많아서 신체 자체에 장식을 하고자 하는 욕구가 컸기 때문이며, 또한 재료의 종류가 다양하고 양이 풍부했기 때문이다.이집트의 뜨겁고 건조한 기후는 미라나 유물 또는 유적이 보존되기에 적조 투탕카멘 왕가의 분묘에서 2점이 발견되었는데, 아메노피스 3세가 입었던 것은 2.5cm가량의 선장식이 되어 있고, 투탕카멘왕이 입었던 것은 약 7-8cm가량의 넓은 헝겊의 트리밍이 되어 있으며 아랫단에는 사냥하는 장면이 수놓여 있다. 이것은 나쁜 운으로부터 왕의 신체를 보호하는 부적의 뜻을 가졌다.이러한 튜닉형은 이때로부터 1500년 후인 기원후 1세기에 로마의 달마티아지방에서 기독교 신자들이 다시 입기 시작하여 후에 달마티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기독교 신자들이 입기 시작한 달마티카는 이집트의 짧고 넓은 튜닉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라. 칼라시리스(Kalasiris)직사각형의 반투명한 리넨 천을 가운데에 목둘레선을 내고 양 옆선을 앞으로 접거나 앞자락을 뒤로 돌리고 뒷자락을 앞으로 돌린 후 허리띠를 매거나 핀을 꽂아 입은 의상이다. 이 의상은 직조법이 발달된 신왕국 때부터 폭이 더 넓은 스타일로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사용된 천은 얇고 매우 곱게 짠 리넨이었다. 따라서 투명하거나 반투명하여 속의 인체가 아름답게 비치는 효과가 컸기 때문에 미의식이 발달한 이집트인의 취향을 만족시켜 주었을 것이다.마. 하이크(Haik)신왕국 시대 소아시아 지방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몸에 걸치거나 두르는 식의 숄형 의상을 가리킨다. 하이크는 주로 왕족들이 그들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입었기 때문에, 후에 로열 하이크라고 명명되기도 했다. 하이크는 걸치거나 두르는 방ㅇ식에 따라 다양한 형이 연출될 수 있으므로 이집트 의상 가운데 가장 우아한 형태로 독창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이크를 이제까지는 단순히 케이프형으로 생각해 왔으나, 투탕카멘 왕가 분묘의 발견으로 다른 모습들이 밝혀졌다. 스커트 부분을 주름잡은 후 등뒤를 돌아서 스커트의 시작부분과 매줌으로써 스커트에 숄을 걸친 것과 같은 형태, 하이크 중에 케이프형으로는 직사각형의 천으로 양 어깨를 두르고 앞에서 묶는 형태, 한쪽 어깨만을 감싸고 매듭을 반대쪽 가슴 아래에서 묶어 한쪽 유방이 노출되는 형태, 매듭의 위치를크와 리넨 등의 화려한 직물을 의상에 사용했다. 특히 아시리아에서는 기능적이고 다양한 형태의 군복이 발달했으며 이 두 시기의 여성 복식은 잘 알려지지 않는다.페르시아는 바빌로니아나 아시리아의 복식형태를 따르면서도, 메디아의 국민복이었던 캔디스를 입거나 그들 특유의 복식을 착용했는데 튜닉과 더불어 기본복식으로 등장한 바지와, 턱시도 칼라에 쎗인 슬리브가 달린 코트 등은 복식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것으로 그들이 고도의 재단과 재봉법을 사용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것은 현대복장의 재단고 재봉의 기원이라 볼 수 있다.③ 복식의 세부내용가. 수메르의 복식초기 수메르의 남자들은 허리에서 발목길이의 랩 어라운드 모피 스커트를 입었으며 왼쪽 뒤에서 겹쳐서 서너개의 고리나 잠금 장치로 여몄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또 다른 형태는 모피 스커트의 단을 잎처럼 재단하여 훌라 스커트처럼 보이는 것인데, 초기 카파제의 남성 입상에서도 긴 잎 모양으로 끝을 처리한 모피 스커트를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모피가 여러 층으로 늘어져 있는 직물의 복식형태를 카우나케스라고 하며 그 구성방법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다.먼저 이것은 유목민이었던 수메르인들이 직조법이 발달하기 전에 즐겨 사용했던 양털을 당시의 조각가들이 층이 진 모습의 티어드 형태로 표현했다고 보는 견해와 부드럽게 짠 바탕에 술을 덧붙이거나 직조과정에서 장식적인 고리형태를 만들어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 등이 있다. 초기 수메르 여자들의 숄은 왼쪽에서부터 드리워져 앞을 가로질러 오른쪽 팔 밑을 지나고 등을 지나 왼쪽 팔을 덮고 오른쪽 팔을 자유롭게 드러내도록 착용되었다.여자들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터번을 쓰거나 금이나 리본, 루프, 잎, 장미꽃 등으로 머리를 장식한 데 비해 남자들은 컬이 있는 머리와 수염을 잘 정리하는 대신 장신구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나. 바빌로니아의 복식바빌로니아의 복식은 초기에는 수메르식의 스커트와 숄의 형태를 보여주었으나 국가가 성장하면서 새 수메르시대에 라가쉬국가의 지도자였던 구데어의 입상에서 보이는 복식과 거의 는 여러층으로나누어 붙인 형태로서 티어드 스커트의 시원형을 이룬다. 그 위에 에이프런과함께 허리를 꽉 조인 넓은 금속 벨트를 둘러 콜셋 역할을 하도록 했다.남성들은 상체를 완전히 벗고 힙의 곡선을 나타내는 로인 스커트를 입고, 그 위에 여성들처럼 허리를 극도로 조이는 금속 벨트를 착용했다. 그들이 사용한 문야으이 모티프는 섬나라였기 때문에 해파리나 산호, 문어 등 바다의 동식물이 많았고, 장미, 백합, 종려나무 등과 고양이, 새, 소, 토끼 등 자연물 도안을 좋아했으며, 그 외에 줄무늬, 바둑무늬 등의 기하학적 무늬도 있었다.③ 크리트문명의 복식 세부내용가. 로인클로스맨살 위에 입는 기본적인 의상으로, 주로 남성들이 짧은 스커트나 바지의 형태로 입었다. 여성들은 운동할 때만 간단히 로인클로스를 입은 것 같다. 다른 지역에서의 로인클로스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헝겊을 허리에 둘러서 한쪽 끝을 허리선에 끼워 넣거나 끈으로 맨 단순한 것임에 비해, 크리트에서는 이와 같이 다양한 형태가 있었다. 이것은 크리트인들이 나체를 중시하여 의복면적이 가장 적은, 기본형인 로인 클로스에 관심을 많이 가진 데서 비롯된 듯하다. 크리트에서는 콜쎗처럼 허리를 조이는 금속이나 가죽으로 넓은 벨트를 만들어 로인 클로스 위에 착용했다.나. 블라우스초기에는 여성들도 남성들처럼 상체를 벗고 다닌 것 같다. 기원전 1800년 이후엔 상체에 꼭 끼는 블라우스를 입었는데, 짧고 좁은 소매가 몸판에 이어져 붙었고 유방을 완전히 노출시켰다. 블라우스의 앞 모양도 스커트처럼 다양한데, 그 중에서 유방과 미드리프가 모두 노출되도록 앞판이 전혀 여미어지지 않는 형태와 유방 아래부터 허리까지의 미드리프 부분을 끈으로 묶어 내려간 형태가 대표적인 것으로 보인다.국내 논문이나 저서에 소개된 크리트 의상 중에, 블라우스의 뒤판에 프린세스 라인이 디자인되었다는 견해는, 크리트 의상에 대해 정보를 제공해 주는 벽화, 부조, 공예품, 소상 등에서는 증명될 수 없었다. 이 시대에 이미 프린세스 라인과 같은 기교적인 재단법이 챙을 가진 갓형이며 끈으로 턱에서 묶고 사용하지 않을 경우에는 끈으로 고정시켜 뒤에 걸쳐 놓았다. 여자는 거의 모자를 안 썼으나, 햇볕이 강한 날에는 히마티온이나 페플로스를 머리위까지 쓰고 그 위에 솔리아를 썼다. 이것은 좁은 챙이 있고 꼭대기에 작은 원추형의 크라운이 있는 모자이다. 이 외에 여자들은 주로 베일을 많이 사용했는데, 초기에는 단순히 머리 위만을 덮는 작은 것이었으며, 후기에는 얇게 비치는 것으로 머리 주위를 둘러썼는데 어깨까지 내려왔다. 색은 주로 흰색이었으며 상중에는 푸른색이나 붉은 보라색을 사용하기도 했다.바. 신발초기에는 일반적으로 모두 맨발이었으나,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다양한 신의 종류가 나타났다. 처음 나타난 샌들은 파피루스나 가죽으로 구두창을 만들고 가죽끈으로 묶어 전통적인 형태를 만들었다. 철학자들은 장식이 전혀 없는 샌들을 신었다. 남자의 것은 가죽의 자연색이나 검정색, 여자의 것은 붉은색, 노란색, 흰색, 녹색 등의 고운 색상이 많고, 이 위에 여러 가지 색의 자수나 금으로 장식하여 복식 중 값비싼 종목으로 취급되었다.사. 장신구그리스인의 장신구 중 특징적인 것은 피불라 핀과 양산이다. 핀에는 드레이퍼리한 의복을 고정시킴과 동시에 또한 장식효과도 가졌던 브로치의 일종인 피불라와 장식용 핀이 있다. 이 외에 머리빗, 귀고리, 목걸이, 반지, 팔찌 등도 매우 아름다웠다. 목걸이는 섬세한 사슬이나 고리 모양의 긴 끈에 화병 등이 매달린 펜던트형이 많다. 귀고리는 구슬모양에 동물이나 꽃을 조각한 것 등이 주를 이루었으며, 반지는 건강, 사랑, 행복, 부를 주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 즐겨 사용했다.양산과 부채는 주인의 안락을 위해 노예들이 들고 다녔으며, 긴 손잡이에 갈대 양산살이 원형 또는 반원형으로 디자인 되었다.④ 소결예술이라는 것,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의식한 민족이 그리스인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스의 복식연구와 함께 다시 한번 긍정한다. 순수하고 명확한 그리스인의 예술양식을 반영하는 기하학적 황금분다.
서울 1945- 목차 -Ⅰ.여는말 Ⅱ. 해방이후의 상황Ⅲ. 여러 정치세력의 노선과 활동 Ⅳ. 주요 인물의 노선과 활동Ⅴ.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Ⅵ. 닫는말Ⅰ.여는말“해방은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 “참으로 거짓말같이 그날은 오고 말았다”, “아닌 밤중에 찰시루떡 받는 격으로 해방을 맞이 하였소”)모든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해방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하였다. 8월15일은 과연 그날은 그토록 신들린 듯 뛰고 또 뛰어도 좋을 ‘해방의 날’이었나? 그날을 가르쳐 해방의 날이 아니라 ‘분단의 날’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건 단지 결과론일 뿐일까? 그렇기 때문에 해방이후의 미군정기를 두고 여러 의견이 많이 있다. 이는 일제 식민 통치로부터 해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은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였으며, 3년간이나 지속된 미ㆍ소 양군의 분할통치로 인해 민족적 세력의 등장이 외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사실에 기인한다. 특히 38선 이남의 경우, 미군은 소련군과 달리 군정을 선포하고 직접통치의 방식을 취함으로 해서 해방의 의미가 굴절되고 민의가 왜곡되는 현상마저 초래되었다.또한 식민지적 억압기구와 제도에 대한 개혁이 중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통치상의 편의를 위해 이들이 다시 활용됨으로써 해방의 의미가 손상되는 조치가 취해졌던 것이었다. 일제의 유산이 이처럼 온존하고 있어 진정한 해방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그러한 상황이었기에 미군정기의 정치활동은 자연히 일제잔재의 청산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당시 해방은 또 다른 해방을 위한 준비기간으로 여겨졌던 것이다.불완전한 상태의 해방이었기에 미군정기의 정치세력들은 자주정부의 수립을 주요과제로 삼고 제반 정치활동을 펴나갔으며, 이 과정에서 주권회복의 범위와 방법문제를 둘러싸고 각 정치세력 사이에 제휴와 분열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불완전한 해방 상태 그 자체가 정치활동을 제한한데다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내외의 정세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 정치세력은 일관된 정치노선을 견지확한 지식과 정보 및 치밀한 군정실무계획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미군정은 처음부터 시행착오가 많았다.이렇게 시작된 미군정은 일제의 식민 통치에 이바지 했던 모든 식민 친일 관료의 원상 복귀를 명령하는 한편, 남한 전 재산의 80프로를 ‘적산’으로 처리한 후 이를 관리할 책임자로 친일 분자나 친미 인사, 기독교 인사, 일제시대의 관리들을 임명했다. 그렇다면 ‘해방군’으로 들어온 미군은 왜 우리 민족과 민중의 진정한 뜻을 짓밟고 오히려 ‘제거의 대상’이었던 친일파들을 급속히 재등장시키고 육성했는가? 첫째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미군이 한국에 대해 무지한데도 그 원인이 있으나 그것은 기본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 후 전개된 미소의 대립, 즉 사회주의 세력을 대변하는 미국의 대립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세계 자본주의의 최대 강국으로 등장하게 된 미국은, 세계 경제로 진출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우해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와는 적대되는 노동자 중심의 사회인 사회주의의 팽창을 막고, 나아가서는 제국주의의 침략은 물론 어떠한 외세의 간섭도 반대하는 식민지 국가의 민족세력을 세계적 규모로 탄압해야만 했다. 바로 이러한 미국의 정책이 한반도에 적용된 것이다. 이미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부터 한국에 대한 20-30년간의 신탁 통치를 고집해 왔던 미국은, 궁극적으로는 한반도 전체를, 최소한 남한만이라도 자신의 영향 하에 두고자 했던 것이다.그러나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기 전에 전개된 민중을 비롯한 변혁 세력의 자주적 독립 국가 건설 운동과 그 의지는 그러한 미국의 입장이 관철 될 수 없게 했다. 때문에 그들은 대체 세력으로서 친일파와 친미 인사들을 자신의 영향력 하에 광범위하게 포섭하고 그들을 앞세워 민중과 변혁(여기선 주로 좌익세력)의 세력을 부정하고 탄압하여 갔던 것이다4. 모스크바 삼상 회의(1) 삼상 회의제2차세계대전이 끝남과 더불어 우리 민족이 해방의 기쁨 속에서 우리의 국가를 우리의 손으로 수립하는 것그리고 향후에 있을 정식 정부에서의 정권장악을 위해 노력하였고, 자신들에게 부족한 명망과 지도력을 갖춘 이승만 세력과 제휴하게 되었으니, 바로 이승만은 한민당의 조직과 자금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2차 미소공위 때 잠시 참가를 표방함으로써 갈등을 빚은 것 외에는 기본적으로 이승만의 반탁, 단정노선과 함께하였다.한편 한민당은 정부수립 이후에는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야당의 길을 걷게 되었으니 이는 전자는 의회내각제를 지지한 반면, 이승만은 절대권력을 지닌 대통령제를 주장하면서 정치적 기반이 없이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만을 기용한 까닭이었고, 또한 식민지시기 한민당계 인사들이 미국에서 이승만의 동지회에 대립했던 국민회에 참여했던 점과 또한 지도자인 송진우ㆍ장덕수가 피살되는 등의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2. 임정세력 및 한국독립당임시정부는 1941년 11월에 발표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통해 삼균주의에 바탕을 둔 민족국가건설론을 제시하였으니, 그 내용은 의회민주주의의 실시, 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화, 국비의무교육제 실시, 친일파ㆍ민족반역자의 처벌 등이었다. 해방 후, 미국이 그 존재를 부인함에 따라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임정은 우익의 제휴교섭과 좌익의 통일전선 제의에 응하지 않으면서 정세를 관망하였다.이들은 삼상협정이 국내에 전해지자 반탁운동을 주도하는 가운데 취약한 국내기반을 확충하면서 일시 우익진영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는데, 한편 이를 독립운동 시기부터 외교독립론과 국제공동관리 논의를 반대해 왔던 입장의 연장선상에서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임정법통론을 주장해오던 임정세력은 해방 이전에도 민족혁명당 등과 제휴하였던 바가 있고, 또한 그 자신들이 지향했던 정치이념과 민족국가건설론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좌익과의 통일전선 형성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임정 내의 좌익세력이 이탈하고, 김구 등의 인사들이 미군의 자문기관에 참여하면서 임정봉대론의 폐기를 자인한 셈이 되어 이후에는 한국독립당 명의로의 철퇴를 요구하는 데 의견이 일치하였음을 밝혔다.그러나 5월10일 남한 단정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고, 9월 9일 북한이 정부수립을 선포하는 등 통일이 점차 불가능한 상태로 빠져 들어갔지만 통일조국 실현을 위한 그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그가 마지막 맞던 새해, 1949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유일한 최고의 염원은 조국의 자주적 민주적 통일뿐이다. 소련식의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공산 독재정권을 세우는 것은 싫다. 미국식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 해도 독점 자본주의로 무산자를 괴롭힐 뿐 아니라 낙후한 국가를 자기 상품 시장화 하는 데는 찬성할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민족의 영원한 교훈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암살되기 한 달 전 "동족상잔의 유혈과 국토양단의 위기를 방지하고 자주ㆍ민주의 원칙하에 조국의 완전독립을 쟁취하려는 나의 주장과 태도는 변함이 없다"고 소신을 밝히고, 이승만과의 합작은 통일정부가 설 때만이 가능하다고 했다. 통일된 자주적 민족국가수립이 그의 최대의 목표였던 것이다.그러던 중 1949년 6월 26일 집무실인 경교장에서 육군 현역 장교 안두희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장례식은 7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암살사건의 진상은 오랜 기간 규명되지 않고 있었으나, 민간차원의 꾸준한 조사가 진행된 결과 안두희에 의한 우발적 단독범행이 아니라 면밀하게 모의된 정권적 차원의 범죄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 정권적 차원에서 도의적 책임이 있고 사건 뒤처리에서 개입한 것이 확인되었다 한다.(2) 이승만이승만은 식민지시기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내면서 무장투쟁론을 배격하고, 외교지상주의에 입각한 활동을 벌였다. 미국식 민주주의의 신봉자이자 철저한 반소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은 1945년 10월 귀국하면서 대동단결론을 내세웠으니, 정치적 기반이 없었던 그가 내걸 수 있는 유일한 슬로건이었다. 그리고 토지개혁과 더불어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의 선결과제인 친일파ㆍ민족반역자의 처벌을 유보하려는 의도도 또한 작용하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과 한국문제의 유엔이관으로 1947년 12월 6일 해체되고 말았다.(4) 한계와 의의좌우합작운동은 비록 중간세력의 결집을 가져왔으나 좌우익 세력의 지지를 얻지 못함으로써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그 실패 요인으로 국외적으로는 미소 양군의 냉전논리와 자기이익 추구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양국은 어디까지나 자국에 이익이 되는 국가의 성립만을 원했을 뿐이지 진심으로 한반도의 통일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히 이 두 나라의 의견 불일치로 나타났고, 국내 정치 상황도 양분되어 단합되지 못했던 것이다. 국내적으로는 신탁 문제에 대한 찬반논리의 격화로 좌우대립을 심화시켰고, 이것은 결국 중간논리가 설 수 있는 토양을 없앴다는 것이다. 이것은 좌우세력의 경직된 태도를 낳았고 극내 정치는 더 양극화로 치달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 운동은 좌우 대립을 해소하고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으로써 민족의 분단을 막고 민족 자주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는 운동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를 성사시키는 등 한반도 문제해결에 대한 현실적인 시각을 제시하였다. 셋째로 국내 정치의 양극화에도 불구하고 중간세력이 결집되어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완화시켰다. 넷째로 이 운동의 주역들이 남북대화를 열고 오늘날도 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3. 김구, 김규식의 남북협상(1) 남북협상. 민족주의자들의 최후의 선택여운형의 암살로 인하여 좌우합작의 실낱같은 희망도 없어지고, 미소공위도 결렬된 상황에서 한국문제는 1947년 9월17일 유엔으로 이관된다. 이에 유엔 총회는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와 선거관리를 위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설치라는 안을 통과시킨다. 하지만 소련이 유엔한위의 북한입국을 거부함으로써 남북분단의 현실은 점점 가까워지게 된다. 그와 더불어 이승만 세력은 단독정부 실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상황이다. 이런 상황 하에서 1948년 2월 16일 김구, 김규식다.
1. 여운형, 김규식 중심의 좌우합작운동① 좌우합작 운동의 발생 배경대외적으로는 신탁통치안의 발표 및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 결렬과정에 나타난 미국의 대한 정책 변화를 들 수 있다. 신탁통치의 발표는 국내 정국이 찬, 반탁 양 진영으로 양분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은 국내 지도노선에 분열을 가져왔고 좌우합작운동의 필요성을 만들어 낸 가장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이것은 곧 통일정부수립의 필요성과 미소공동위원회 재개촉구운동이 좌우합작운동으로 연결됨을 뜻한다. 그리고 이 시기의 미국의 대한정책은 중간파 지지로 전환되는데 김규식, 여운형 등이 대두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대내적 요인으로는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대립의 심화와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주장을 들 수가 있다. 이런 분열 움직임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좌우합작운동이 필요하였고 이를 통한 통일정부의 성립이 요구되었던 것이다.② 합작운동의 시작 - 여운형과 김규식중도좌파인 여운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서도 나타나듯이, 해방후부터 꾸준히 좌우 정치세력의 연합을 기도하며 민족국가 수립에 매진하였다. 그런 그의 생각은 조선인민당의 정치노선인 좌우익의 정치세력을 연합하는 것이 조선인민당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는 데서 잘 나타난다. 그는 좌우합작운동에 있어서 언제나 그 중심에 서 있었다. 1946년 2월에는 김일성을 이북에서 만나기도 하였는데 이것도 모두 좌우익의 연합을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다.중도우파인 김규식은 민족유일당 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미군정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반탁운동에 선봉에 섰던 임정을 탈퇴하여 좌우익간의 대립 상황에 비켜 있었다. 미소공위 미국측 수석대표를 역임한 아놀드소장은 “한국에 대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헌신적인 지도자는 단지 극소수일 뿐”이며 “그 명단의 제일 꼭대기”에 있는 것이 김규식이라고 하였다.여운형, 김규식의 온건한 정치적 성격과 민족국가를 세우려는 의지와 미군정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좌우합작운동은 시작된다. 하지만 어위가 결렬된 3주후인 5월25일에 이루어졌다. 우측대표로는 김규식, 원세훈이 좌측대표로는 여운형, 황진남이 참가하여 좌우합작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6월 11일에는 모든 민족을 대표할 기관을 설치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역설하며 “진정한 통일정부는 좌우합작에서 설립될 것”이라는 내용의 여운형 담화가 발표되었다. 이는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발언에 대한 공박이 배경이 된다. 이후로 계속 모임을 갖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지가 좌우합작에 대한 지지성명을 발표하여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이어서 이승만, 아놀드 군정장관, 김구의 한독당 등이 지지 성명을 잇따라 발표하였다. 이로써 좌우합작에 대한 민중들의 관심이 높아져 갔다.7월에 접어들면서 합작운동은 여운형, 김규식의 개인적 접촉에서 발전하여 합작 공식기구인 합작위원회를 결성하고 대표단과 비서국을 선출 설치하였다. 이 위원회의 정식회담은 1946년 7월 25일에 시작되었다. 이렇게 조직을 편성하여 실질적인 성과를 보기 위해 회담이 진행되고 있던 중 박헌영)이 이북을 다녀온 직후 조선공산당)의 좌우합작에 대한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조선공산당은 좌우합작에 참여하는 전제 조건으로 5원칙을 내세우는데 이는 미군정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의 것)들이었다. 이러한 내용은 표면적으로 더 이상 좌우합작을 지지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태도의 돌변은 소련의 지시로 인한 것과, 박헌영 자신이 좌우합작을 통하여 좌익 내부의 주도권을 잃을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이에 반박하여 우익은 합작 8원칙을 제시한다. 이는 좌익들에게는 5원칙에 대한 반동으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좌우익의 합작원칙에 대한 대립으로 1946년 말까지 1개월가량 중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실질적으로 좌우익 실세가 불참한 채 중도좌파와 중도우파를 중심으로 꾸려져 나간다. 이는 진정한 의미의 좌우합작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이후 우여곡절 끝에 좌익, 우익의 양보와 타협 끝에 합작 7원칙을군정 사령관은 이에 대해 지지성명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당시 10월항쟁의 여파로 미군정이 궁극적으로 실행하고자 했던 입법기구 창설은 어려움을 겪었다. 1946년 12월 12일 과도입법의원이 개원하면서 입법기구 설치를 추진한 미군정의 의도는 관철되었다. 하지만 좌우합작위원회는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다. 미군정은 입법기구가 설치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실효성이 없다고 보았고, 중도좌파 인사들도 더 이상 실효성이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1947년에도 좌우합작운동은 계속 되었지만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되면서 좌우합작운동은 급속히 위축되어 버리고 결국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과 한국문제의 유엔이관으로 1947년 12월 6일 해체되고 말았다.④ 한계와 의의좌우합작운동은 비록 중간세력의 결집을 가져왔으나 좌우익 세력의 지지를 얻지 못함으로써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그 실패 요인으로 국외적으로는 미소 양군의 냉전논리와 자기이익 추구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양국은 어디까지나 자국에 이익이 되는 국가의 성립만을 원했을 뿐이지 진심으로 한반도의 통일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히 이 두 나라의 의견 불일치로 나타났고, 국내 정치 상황도 양분되어 단합되지 못했던 것이다. 국내적으로는 신탁 문제에 대한 찬반논리의 격화로 좌우대립을 심화시켰고, 이것은 결국 중간논리가 설 수 있는 토양을 없앴다는 것이다. 이것은 좌우세력의 경직된 태도를 낳았고 극내 정치는 더 양극화로 치달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 운동은 좌우 대립을 해소하고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으로써 민족의 분단을 막고 민족 자주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는 운동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를 성사시키는 등 한반도 문제해결에 대한 현실적인 시각을 제시하였다. 셋째로 국내 정치의 양극화에도 불구하고 중간세력이 결집되어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완화시켰다. 넷째로 이 운동의 주역들이 남북대화를 열고 오늘날도 그 의미가 있 인하여 좌우합작의 실낱같은 희망도 없어지고, 미소공위도 결렬된 상황에서 한국문제는 1947년 9월17일 유엔으로 이관된다. 이에 유엔 총회는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와 선거관리를 위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설치라는 안을 통과시킨다. 하지만 소련이 유엔한위의 북한입국을 거부함으로써 남북분단의 현실은 점점 가까워지게 된다. 그와 더불어 이승만 세력은 단독정부 실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상황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1948년 2월 16일 김구, 김규식은 북한의 김두봉, 김일성에게 한반도문제의 자주적 통일을 위한 남북정치회담 제의 서한을 정식으로 발송함으로써 남북협상문제가 수면으로 떠오르게 되었다.남북협상의 문제는 이전부터 논의되어 왔던 것이다. 먼저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중간진영의 연합인 민족자주연맹(이하 ‘민련’)을 구심점으로 활발히 전개하여 나간다. 민련은 그들의 목적인 좌우의 합작, 남북의 합작운동을 추진하여 나갔다. 이러한 움직임에 남로당이나 사회민주당에서도 원칙적으로 지지의사를 밝혔다. 1948년 1월 26일에는 그동안 신탁통치문제로 이승만과 같이 했던 김구도 이승만의 단정운동에 대한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고 남북지도자회담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남북요인회담 제의에 대하여서 당시 유엔한위측도 비상한 관심을 갖고 김규식과 접촉하면서 그 구체적인 방안 제시를 요청하기도 하였다.② 남북협상의 전개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유엔에 의뢰하게 된 현실에서 남한 정국은 남북협상파와 단선단정파로 양분되어 치열한 논쟁을 벌이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일성에게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는 서신을 발송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 북한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북한이 당시 유엔소총회에서의 토의의 귀추를 주시하고, 그 결정에 따라 태도를 정하려고 했었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북한에 서신을 발송한 다음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통일운동을 전개하기 이한 남북통일촉진국민대회를 개최할 것을 준비하였다. 대조적으로 우익진영에서는 한민당)이 남한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하여 중앙정부를 라는 미국안을 가결시켰다. 이에 김구와 김규식은 반박성명을 발표하고 남한 단독선거에 불참할 것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남북문제를 “우리 민족으로 자결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서신을 보낸 지 40여일후에 3월 25일 평양방송을 통해 “남조선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 정당, 사회단체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남북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초청장을 남한의 17개 정당 사회단체에게 발송한다는 내용의 보도를 하였다. 이 내용에는 서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일방적인 통보였다. 이후 27일에 김일성의 밀사가 서울에 와 김일성의 서한을 건네준다. 이에 대한 논의 끝에 김구, 김규식은 참석의 원칙을 세우고 신중하게 진행시켜 나간다. 결국 1948년 4월 19일 김구를 시작으로 평양으로 떠나게 된다.결과적으로 이 남북협상은 실패로 끝나게 된다. 김구와 김규식이 도착 하였을때 이미 4월 19일부터 회의는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남측이 제시했던 남북정치협상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에 김구와 김규식은 연석회의에 얼굴도 내비치치 않았다. 연석회의가 끝나고 4월 27일부터 30일까지 김구, 김규식의 요구로 남북조선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가 개최되었다. 논의 끝에 합의점을 발견하고 공동성명서)를 발표하게 된다. 이 남북요인회담의 결과에 대해 남측은 비교적 만족스러운 반응을 나타내었다. 이후 모든 일정을 마치고 5월 5일 서울로 귀환한다. 그리고 긍정적인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남조선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투쟁위원회를 설치하고 합법적으로만 투쟁할 것을 언약하였다.”라고 이후 정치협상의 실행 방법을 설명하였다. 하지만 5월 10일 미군정은 예정대로 남한 단독선거를 시행하였고 이승만과 한민당이 정치의 주도세력으로 자리매김을 한다. 이에 북한은 2차 남북회담을 제의 하였지만 김구, 김규식은 거절하였고 북한은 월북해 있던 남한 대표들을 모아놓고, 제2차 남북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를 개최하고 9월 9일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
미국에서의 독립운동1. 미주 한인 사회의 성립과 대한인국민회의 결성1) 미주 한인사회의 성립① 1903년 하와이에 노동이민으로 시작되었다. 1905년 일제에 의해 중단될때까지 7226명 이민! - 반노예 생활, 사탕수수농장으로...② 이후 본격적으로 유학생, 상인 등의 이민이 하와이나 미본토로 진행되었다.③ 을사늑약이후로 하와이 이민 급격히 줄어듦. 해방되기 전까지 미국이민자는 1만명 정도.2) 대한인국민회의 결성① 하와이 : 신민회 조직(1903)이후 1907년까지 20여개의 정치단체가 결성.1907년 9월 통합단체인 한인합성협회를 결성.② 미 본토 : 안창호의 주도로 상항친목회가 조직됨(1903)→공립협회(1905)③ 대한인국민회:ⅰ.장인환, 전명운의 스티븐스 처단의거)와 애국동지대표회의 개최로 기운 이 무르익고...1909년 통합단체인 국민회가 결성!!!ⅱ. 1910년 대동보국회와 통합 대한인국민회 출범대동보국회한인합성협회국민회→대한인국민회(1910)공립협회④ 미주 한인 사회의 안녕과 조국독립을 최고 목표로 삼았다. 미주 한인사회 민족운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2. 1910년대 대한인국민회의 국권회복운동1) 일제의 국권침탈 반대운동① 포츠머스 강화회의(1905)에 한국의 독립보전을 위해 인사 파견 하려했으나 좌절.② 1907년 윤병구 송헌주를 헤이그로 파견. 헤이그 특사들의 외교활동 보조.③ 대한인국민회 조직되면서 본격적 전개 - 애국동맹단과 대동공진단의 결성④ 1910년 9월1일 일제의 강제합병에 반대하는 결의를 전 세계에 알리고 규탄함2) 군인양성운동① 박용만이 헤이스팅스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1909)하면서 시작② 멕시코 메리다 지방에서는 이근영을 중심으로 사관양성을 위한 승무학교 설립③ 북미지방총회 : LA부근 클레몬트에 학생양성소를 설치하여 군사훈련. 캔자스시와 와이오밍주 슈페리오에 소년병학원과 청년병학원을 설치.④ 하와이지방총회 : 자체내에 연무부를 두어 군사훈련 실시.3) 외교활동① 1917년 뉴욕에서 개최된 약소국동맹회의)에 박용만을 대표로 파견②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려 했으나 좌절.3. 삼일운동과 미주한인의 독립운동1) 삼일운동후의 독립운동과정① 안창호 선생의 세가지 방향 제시ⅰ 개개인의 독립의 각오와 일치된 행동을 가질 것ⅱ 미국 각언론 잡지나 종교계에 삼일운동소식과 한국내사정을 알려 지지와 도움을 얻을 것ⅲ 북미, 하와이, 멕시코 재류동포들의 재정공급의 책임을 질 것② 대한인국민회는 재정모금 및 공급활동에 중점을 두었다. 활발한 모금활동을 벌였다. 상해임시정부에 40%이상 지출, 기타 구미위원부를 비롯한 외교활동에 지출되었다.③ 이승만이 구미위원부를 설립하여 외교, 선전업무를 담당하고 미주지역의 재정권을 장악하면서 모금활동은 크게 약화되었다.2) 삼일운동 이후의 미주지역 운동양상① 서재필이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시작됨.② 서재필은 한국통신부를 세우고 기관지《한국평론(Korean Review)》을 발간하여 선전활동 개시. 미국내 친한여론의 형성과 일제의 한국지배 부당성을 알림.③이승만은 한성임시정부 집정관 총재로서 구미위원부를 워싱턴에 설치하여 구미지역의 재정과 외교를 담당하였다. 하지만 전권이 이승만에게 집중되고 1925년 상해임시정부가 폐지령과 대통령면직처분을 내렸지만 계속 유지해 나간다. 뚜렷한 활동전개 없음.④ 캘리포니아에 한인비행사양성학교설립(1920)⑤ 워싱턴군축회의)에 이승만, 서재필, 정한경, 돌프를 중심으로 한국 대표단 구성하여 외교활동. 한국문제가 결국 거론되지 않음으로써 실패⑥ 이후 독립운동은 사실상 침체에 빠지고 말았다.4. 한인사회의 통일운동과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결성1) 한인사회의 통일운동① 독립운동의 쇠퇴와 더불어 미주 한인사회도 분열ⅰ 이승만은 하와이 지방총회를 해소하고 하와이 교민단을 만들어 자신의 개인적 기관으로 전락시킴.ⅱ 북미대한인국민회로 개편, 축소되고 여러 단체가 생기면서 분열 됨② 1930년 전후 하와이에서는 다시 한인사회의 통일 여론이 일어남. 하지만 내분이 일어나 미주한인들은 큰 상처를 입음.③ 북미 지역 대부분이 국민회로 외견상 통합됨(1937)
Ⅰ. 들어가는 말현재 우리 사회만큼 교육에 열의를 갖고, 또 문제가 되는 나라를 찾기는 드물다. 또 그 문제가 심각한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교육은 공교육이다. 현대에 쓰는 공교육은 크게 세 가지 의미로 나눠 볼 수가 있다.우선 가장 좁은 의미에서의 공교육은 국가와 공공단체가 설립, 경영하는 국, 공립학교 교육을 의미한다. 여기서 반대되는 의미의 사교육은 민간인이나 민간인의 집단이 자발적으로 설립, 운영하는 사립의 학교에서 실시하는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좀 더 넓은 의미로 볼 때 공교육은 국가수준에서 제도적으로 확립되고 법률의 통제를 받는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의미보다 좀 더 큰 의미로서 국민전체를 대상으로 운영되는 국가 혹은 준국가단체의 통제와 관리로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사립학교는 물론이고 사회교육이나 기업내 교육 등도 공교육 안에 포함 시킬 수 있다.제일 넓은 의미로서, 공교육을 공적 성질을 지닌 교육이라고 한다면, 교육은 그 자체가 공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 내용은 무엇이든 사회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공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으며, 누군가가 교육을 받는다면 그 혜택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전체에 이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교육은 그 자체가 공익이며 공공선이라고 할 수 있다.공교육은 위에서 살펴본 의미 외에도 네 가지 면에서 그 성격을 볼 수 있다. 먼저 공교육은 국가가 제공하는 교육을 의미한다. 두 번째 공교육은 국가가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한 공비로 제공하는 교육을 가리킨다. 셋째 공교육은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다. 넷째 내용적인 면에서 볼 때, 교육을 통해 누구나 알아야 할 보편적인 내용을 전달하고 그것을 통해 사회와 국가를 하나로 통합한다.지금의 공교육의 발달하기 까지 그 기반적 역할을 한 것은 국가주의교육(Nationalistic Education)사상이다. 이것은 19세기에 근대민족국가가 나타나면서 발생한 교육사상이다. 이 사조는 교육의 역할 가운데, 개인의 성장?발급 자제의 중등학교 취학 기회의 제공- 계급간의 대립완화- 긴밀한 사회적 유대*중등교육 - 본래 있었던 김나지움, 실과고등학교, 고등실과학교, 신제 실과고등학교, 독일 상급학교, 아후바우슈레(하층계급의 우수한 자제에게 중등 교육을 실시하고자 한 것)가 신설*직업교육 - 직업학교(定時制학교 - 도제제도)와 밀접한 관련)와 전문학교(全日制학교 - 산업계와 연계, 중등교육을 마친 후 입학)③Nazis 시대29년 경제적 공황 → 무력한 바이마르는 히틀러에게 정권을 넘김→나찌스 시대*나찌스적 인간 배양을 목적나찌스적 인간의 덕목- 독일민족은 타민족에 비해 우월하다는 자신감- 지도자에 대한 절대 복종- 묵묵한 실행과 희생정신의 함양- 용기* 체육과 군사교육을 중시, 인문적 고전적 교양적 교과보다는 역사 지리교육에 중점을 두고 근로봉사 전원학년) 에 주력하였다.* 경제적 공황으로 인한 대량의 학생 실업자를 해결하기위해 정부는 그 이유를 대학교육기관의 확대로 인한 학생 과잉이라 생각하고 이를 막기 위해서 의무교육을 제외한 일체의 대학의 학생 수를 일정 제한해야한다고 규정④2차 세계대전 직후1945년 5월 독일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멸망.(서독중심으로 보겠음)1947년 연합국 점령국 측에서 「지령 54호」를 제정하였으나 순조로운 교육개혁을 이루지는 못함.독일의 공교육*기본 - 만6세부터 18세까지 의무교육을 받아야함. 무상교육①기초영역- 유치원: 유치원 취학은 의무교육에 해당하지 않으며 자유롭게 선택가능. 사립유치원이나 공립유치원이 있으며 여성의 취업률이 높은 관계로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유치원에 다니고 있다.②초등교육 (독일의 어린이는 만 6세부터 학교에 취학할 의무가 있다. 초등교육은 독일의 공교육의 시작이다.)- 기초학교: 입학 전 학교의 의사에게 건강진단을 받음). 학생들이 중등교육에서 받게 될 교육에 필요한 기초전달을 목표. 점수와 석차를 나타내기 위한 시험이 없음.) 4년동안 초등학교 생활을 마치고 나면 중등교육기관인 하우프트슐레, 종합학교로 진학하거나 레알정책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한다.우리나라는 획일적이고 경직되어 한번 선택한 교육의 경로를 바꾸기 어려움.피히테에 대하여피히테(J. G. Fichte, 1762-1814)는 독일의 대철학자이자 19세기 국가주의 교육사상가이다. 1807-1808년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강연을 통하여 자신의 교육사상을 펼쳤다. 그는 당시 전쟁에서 패해 황폐화 된 조국을 재생 시키는 데는 교육이 가장 근본적이고 효과적인 힘인 동시에 방법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피히테의 국가주의적 교육은 첫째로 민족 공동체 의식의 개발과 둘째로 순수한 도덕적 심정의 함양,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인주의적 이해관계의 경쟁을 지양하고 민족 전체의 유기체 형성의 강화를 주장하였다. 구교육이 소수의 특권계급을 위하고 교회의 사업이었던 것에 반하여 그의 교육은 국민, 민중교육과 국가의 사업을 지향하였다.피히테는 아동의 시야확대를 통한 객관적 지식의 습득을 주장했다. 그리고 사회적 도덕인을 길러 국가 속에서 개인의 참 행복을 얻게 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이런 그의 교육관은 스파르타의 국가주의와는 다른, 개인과 국가를 통합한 이상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는 교육방법으로 페스탈로찌의 직관주의를 받아 들였다. 교육에 있어서 아동의 직관과 자기 활동을 중하게 여겼다.그의 교육사상은 도덕적 교육 목적의 확신이었다. 이런 그의 확신은 그 후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한 강대국으로의 발전과 라인강의 기적과 같은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ⅲ. 프랑스의 공교육의 발생과 발달과정가. 프랑스 교육의 기본 골격과 발생프랑스 교육 제도는 1789년의 혁명에서 고취된 핵심적인 원칙을 바탕으로 정립되었다.(1)교육의 자유 (2) 종교의 중립성 (3) 교육의 의무성 (4) 국가에 의한 자격증과 학위수여라는 일반원칙은 모든 수준의 학교에 적용 된다. 또한, 1875년 이래 공립학교 교육에 우선권 정책은 변함없이 지속되어 왔고 교육제도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성격을 띤다.18세기 말에 라 살로테의 『국민교육론』(1763), 탈레랑의 『교육법안』(1교는 거주지 가까운 학교로 무시험 진학하고 중학교는 세분화되어 고등학교는 2학년부터 예비고사(과목별)를 1~3에 걸쳐 치른다. 예비고사의 과목은 공통과 목으로 중요한 것은 철학인데 주관식으로 최대 5시간까지 치른다.(3)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시험은 모두 논술형이고 자기주장이 강한 답안이 상위점을 받는다.(4) 예비고사는 지방에 따라 다르다. 지방별로 출제하고 합격률은 평균65% 정도이며 예비 고사 합격증이 고졸 졸업증보다 더 중요하다. 예비고사 성적과 생활기록부를 참작하여 대학입학을 결정한다.(5) 본인이 원하면 1~3개 대학을 동시에 다닐 수 있다. 모든 대학은 국비가 지원되며 예비 고사 탈락자는 군대나 기술 배우는 학교로 진출한다.(6) 어느 국가보다 다양한 교육 제도가 겸비되어 있다. 전공에 따라 학문과 연구위주의 국 립대학(90여 개)에서 실무와 실기위주의 그랑제꼴, 에꼴 등 특수 교육 기관까지 약 400 여 개에 이르는 대학 기관들이 있다.(7) 교육 기관의 우수성이 높다. 프랑스 교육의 우수성은 정부가 공립교육 기관 전체를 감 독하고 재정지원을 하는 한편, 사립교육 기관들의 조직과 교육과정까지 감독, 인증하고 있다.(8) 저렴한 교육비에 비해 고품격의 교육을 받을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정부가 대부분의 국립 교육 기관, 90여 개에 달하는 국립대학들과 국립 에꼴들의 예산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은 소액의 등록비만 지불하고 완전히 무료인 학비 혜택을 본다. 또한 사 립학교들의 경우도 기업이나 다른 기관들의 재정 지원으로 상당히 저렴한 학비로 학교 를 다니게 된다.(9) 어떤 학생들에게도 동등한 권리를 부여한다. 국내학생이든 외국학생이든지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동일한 등록비, 교통비, 학교식당비 및 사회보장제도의 학생혜택을 받으며 그 외에도 정부가 지원하는 주택보조금(1인 기본 숙소를 기준으로 1/3정도 보조)을 매달 지급 받는다.라. 프랑스 교육의 장점1) 창의력과 논리력을 키우는 교육프랑스에서 역사, 철학, 지리, 프랑스어 등의 대부분의 시험은’은 거의 없거나 드물다. 물론 고등학교에도 교사의 강의를 경청하지 않거나 잠을 자는 학생들이 있다. 학교에서 잠을 자는 까닭은 가족이 해체되는 등의 이유로 자신의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고등학생이 밤에 마땅한 잠잘 곳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수업시간에 잠을 잔다고 한다.3) 학교 폭력어느 나라에서나 이루어지는 학교폭력은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로 중대 문제이다. 학생들 사이의 욕설이나 다툼, 갈취는 물론 교사에 대한 폭력도 자행된다.프랑스는 이런 단순 폭력에서 나아가 더 근원적인 새로운 폭력 양상이 학교에 나타나는 것을 우려한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공격, 즉 인종차별주의, 여성차별주의, 학생들에 대한 성폭력, 파쇼적인 현상이나 난동으로 분출하는 폭력의 집단화 등이다.4) 교육개혁성의 무용성어느 나라에나 있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프랑스도 그동안 교육문제가 정치적인 이슈로 부각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선거 때나 특별한 때가 되면 교육 문제가 진정한 교육문제로서 다뤄져 온 것이 아니라 상당히 정치적인 문제로 다루어져왔고 여러 계층의 이익이 상충되는 문제가 생겼다. 그리하여 실제로 지켜지지 않는 교육 정책들이 논의되는 일이 많았고 기득권층을 위한 교육정책이 세워지는 폐단을 겪기도 했다ⅳ. 영국의 공교육의 발생과 발달과정가. 발생배경- 전통적 보수성으로 인한 국민교육체제 발달이 늦음(전통적 지주계급 강세자유주의적 성향 강하여 국가의 개입에 대한 부정적 태도 완강하게 형성)-영국의 의무교육: 국가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계급갈등의 결과로 나타남(산업화로 인한 아동노동의 폐해들이 많이 들어나 아동에게 의무취학을 시키도록 하는 노력이 노동운동 차원에서 펼쳐짐)-의무취학 단행되어도 전면적 교육개혁 차원으로 공교육 발달 이루어지지 못함(전통적으로 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하여 국가 개입의 소극성으로 인한 중등교육 차원에서 여전히 엘리트적 사립학교의 영향력 강하게 남아있음)1833년 민중의 교육기관에 대한 국고보조금제도가 실시되면서 교육에 대한 국가의 개이 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