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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과 중국의 경제관계
    한국과 중국의 경제관계1. 한중 경제교류의 역사(1) 한중 경제외교의 역사(2) 1992년 한중 수교(3) 90년대 후반 이후2. 한국의 중국 진출 기업 사례3. 위안화절상과 한중 경제(1) 최근 환율전쟁 쟁점(2) 위안화 절상이 우리나라 경제에 미치는 영향4. 결론1. 한중 경제교류의 역사(1) 한중 경제외교의 역사역사적으로 한국은 아시아 교역 네트워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지금은 세계에 대한 선진적인 정보를 주로 서구사회를 통해 유입하지만 당시 중국은 세계에 최고의 문명국으로서 세계 각국에서 온 문물과 지식정보가 집적되어 있었다. 한국은 고대부터 동북 지역의 내륙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바닷길로는 서해안과 중국 동부 해안 사이의 루트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오는 세계의 문명을 접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길을 통해 한국은 비단, 도자기, 차 등의 교역품과 아울러 지식, 종교, 문화예술, 과학기술 등을 유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하지만 한국은 조선 중기 이후 급변하는 세계의 흐름에 뒤쳐지기 시작했으며, 유럽과 아메리카가 참여하는 전 지구적 차원의 문명교류가 진행되는 시점에서 조선은 스스로 중국 이외의 루트를 통해 세계를 접할 수 있는 길을 차단하여 중국에 편중된 주변부의 위치로 전락하고 말았다. 조선 정부는 16세기 이 후 서양이 동아시아에 빈번히 출몰하여 마카오와 나가사키가 국제 교역항으로 개방된 상황 하에서도 보수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결국 서양이 산업혁명을 거쳐 근대사회를 이룩하고, 일본이 18세기 중국제품 기술대체화에 성공하여 근대를 준비하는 동안 한국은 세계 문명 교류의 주변부에 머물다 자기개발이 늦어져 식민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어 동서냉전체제하 중국은 1949년 정부를 수립한 후 모든 친미국가를 적성국으로 간주하는 외교정책을 펼쳤다. 또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으로 한국과 중국은 거의 30년동안 단절의 벽을 쌓고 지냈다.)(2) 1992년 한중 수교1) 중국 내 환경 요인모택동 사후 중국에서 전개되어 온 탈 모택동화와 탈 이데올로기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적극적인 북방정책을 추진해 왔다.경제 및 인적 교류의 급진적 발전은 한중 수교의 필요성을 증대해 왔고 또 중국과 의 수교에 가장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온 한국의 제6공화국의 퇴진에 따른 한국의 정치 일정도 중국의 조기 수교결정에 중요한 작용을 했다.4) 한중수교의 의의1992년 8월 24일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외교관계 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에 양국 대표가 서명함으로써 40여 년 간 냉전적 갈등으로 점철되어온 한중 관계는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었다. 한국과 중국 양국에게 국교 수립은 한중 양국의 쌍무적 이익의 차원을 넘어서 동북아 정치·경제질서에 매우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 올 것이라는 점에서 초점이 되어 왔다. 한중 수교에 부여하는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지금까지 민간차원에 머물러 있던 한중 간의 경제 관계를 정부간 수준으로 공식화하여 중국 시장에 본격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국과 중국은 이미 서로 가장 중요한 교역상대국이며, 앞으로 중국의계속되는 개방과 고속 성장, 발전 가능성은 한국이 지속적으로 중국시장에 투자를 확대하게 할 것이다.중국의 입장에서 한-중국교정상화는 전방위 개방실리외교의 한 전형이자 완성이었다. 중국은 한·중수교로 인해 한반도의 남과 북 모두에게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고, 아시아 지역의 주요 경제국의 하나이면서 전략적 요충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한국과 수교함으로써 동북아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한중 수교는 한국과 중국 모두에게 외교적 실리획득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양국간의 경제교류와 경제 협력의 전망을 밝게 해주었다. 그리고 양국정부는 한중 수교가 동북아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 그리고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서 순기능을 할 것으로 내다보는 데 있어서 일치하였다.한중 수교는 대한제국 멸망으로 공식 외교관계가 끊어진 지 근 100년 만에 새롭게 외교관계를 수립한 정치적인 사건이다. 경제적으로 볼 때에 한국이 중국을 무대로 하는 글로벌 분업 시스템에서 정비 제도, 한국 투자 확대, 무역 투자 환경 개선 등을 논의 해 왔다. 2010년 10월 20일 최근 톈진에서 열린 제6차 한중재계회의에서는 한국과 중국의 경재계가 한중 교역규모 2천억 달러 조기 달성을 위해 상호 무역, 투자환경의 획기적 개선과 상호 윈-윈하는 방향으로 한중 FTA 협상이 조속히 이뤄질 수 있도록 적극 협력해 나가기로 합의했다.)2) 수교 후 18년, 현재우리나라가 중국과 국교를 맺은지 18년이 흘렀다. 그 동안 양국은 북핵 문제를 비롯한 국제 현안에서 공동 보조를 맞추고 있다. 경제와 무역 부문의 협력은 갈수록 밀접해지고 있다. 한류(韓流)와 한풍(漢風)이라는 이름으로 문화 교류도 어느때보다 활발하다.현재 중국에는 약 4만 3천 여 개의 한국기업이 진출해 있다. 그리고 외국 투자 가운데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5년에 2.8%. 2000년에 3.7%수준이다가 2003년에 8.4%, 2005년에 8.6%를 기록하여 2000년 이후 평균 7~10%대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아직 가공무역 위주의 진출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한국의 10대 대중국 수출품이 컴퓨터 부품, 무선통신기기부품, 데이터디스플레이장치, 자동차부품, 메모리반도체 등의 부속품과 반제품이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1992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은 이래로, 두 국가 간의 무역은 큰 성장을 하였다. 실제 1992년 63억달러 수준이었던 양국 간의 무역액은 2009년 1409억 달러로 무려 22배 급증했다. 지난해 한국의 대중 무역 의존도는 20.5%였다. 또 중국은 2001년 우리의 제2위 수출 대상국, 최대 투자대상국으로 부상했으며, 2003년에는 미국을 제치고 한국의 최대 수출대상국이 됐었다. 이듬해인 2004년에는 미국을 제치고 우리나라의 최대 교역국으로 부상했다. 2007년부터는 수입 규모에서도 일본을 제치고 최대 수입대상국으로 자리잡았다. 1992년 63억7900만 달러에 불과했던 양국 무역규모는 금융위기가 강타한 2009년에도 1409율이 높았던 “협력업체와의 동반진출”(16.6%), “인건비 등 비용절감”(16.2%)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다. 또 향후 경영 계획 면에서 내수시장 진출 추진전략여부를 묻는 질문에 이미 “적극 추진 중”이라고 답한 기업이 56.3%를 차지했고 “향후 추진예정”이라고 응답한 기업도 16.1%를 기록했다.코트라는 중국 내수시장을 겨냥한 투자가 확대되고 있는 배경에 기업의 성장성 및 투자동기성취도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있다고 해석했다. 설문에서 향후 5년간 성장성 및 동기성취도전망에 대해 “만족” 또는 “매우 만족” 응답비율(42.8%)은 “불만족” 또는 “매우 불만족”(21.6%)보다 높게 나타났다.)앞으로는 현재 중국에 진출한 기업 중, 성공한 사례와 실패한 사례에 대해 각각 알아보기로 한다.(2) 한국기업의 중국 진출 성공 사례1) 현대·기아자동차① 성공 사례2002년 설립된 베이징현대는 설립한지 2년 만에 15만대를 생산·판매하여 중국 승용차 판매의 10위권 안에 들었고, 2006년에는 29만대의 판매량으로 승용차 판매 순위 5위권에 들어 “베이징현대 스피드”라는 명성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제품도 초기의 중고급형 소나타 한 모델로부터 중급의 엘란트라, 소형의 엑센트, SUV 투싼 등으로 비교적 완벽한 제품 시리즈를 형성하였다.30만 대의 생산능력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2006년 베이징현대는 120억 위안을 투자하여 2공장과 연구 개발 센터의 건설을 시작하였다. 준공된 2공장의 제1기 생산능력은 20만대, 제2기 생산능력은 10만대로 모두 완공되면 베이징현대의 총 생산능력은 60만대에 도달하게 된다. 이렇게 베이징현대는 그동안 꾸준히 중국내 자동차생산능력을 확대하여 2008년에는 85만대에 도달하였다.)이렇게 베이징현대는 꾸준한 성장을 이루게 되었고, 올 9월 13일에 이르러 연 40만대 규모의 중국 제3공장을 추가로 짓기로 베이징 시와 계약을 맺게 되었다. 그렇다면 '연산 100만대' 시대가 도래 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베이징현대는 기존 1·2공장 6베이징현대의 핵심차량인 소나타는 차량 지상고를 중국 현지 도로에 맞게 특별 제작했다. 엘란트라 역시 중국 현지의 도로 상황과 연료 품질, 소비자 취향에 맞게 차량 내외관 및 엔진과 변속기 등을 개조했다. 베이징현대는 중국인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중국 내 주요 대학 디자인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했다.여러 자문의 결과 그들이 내세우게 된 것은 바로 ‘글로컬(Glocal)’이다. 이는 글로벌화(Globalization)와 로컬화(Localization)의 합성어로, 품질과 디자인은 글로벌화를 지향했지만, 마케팅과 영업 전략은 철저히 현지화 했다는 이야기다.또한 소비자의 베이징현대에 대한 인식도 성공에 큰 역할을 하였다. 베이징에서 만난 일부 소비자들은 베이징 현대차를 한국 현대자동차이기보다는 중국 자동차(베이징기차)로 인식하고 있었다. 즉 세련되고 고급스런 이미지를 찾는 소비자는 수입차(현대)로 이미지 메이킹이 되어 있으며, 보수적이고 애국주의 사고를 가진 이들은 중국 자동차사(베이징기차)가 한국(현대차) 기술을 도입하여 만든 중국차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이징 현대는 앞서 거론한 양쪽 소비자에 대한 브랜드 포지셔닝을 잘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최근에는 부유층 바링허우(1980년대 이후 출생자) 세대를 겨냥한 마케팅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베이징 현대는 2009년 9월 i30 출시 행사에서 광고모델로 발탁된 한국 연예인 이효리의 미니콘서트 행사를 기획했다. 이효리는 대만 스타인 판웨이보와 광고 삽입곡 를 부르고 함께 촬영한 뮤직비디오도 공개했다. 인기스타를 초청해 i30 출시 분위기를 띄운 것은 타깃 소비자인 20~30대 젊은 층과 가까이 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수립하자는 취지였다. 그 결과 자동차 전문지뿐만 아니라 연예매체 등이 그 행사를 주요 뉴스로 다루었고, 뮤직비디오는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면서 i30는 인기 모델 반열에 진입했다.)2) 파리바게뜨① 성공 사례파리바게뜨(SPC)는 2004년 9월 중국 상하이(上海)에 1호점(구베이(古北))을 시작으로 .
    경영/경제| 2011.04.27| 13페이지| 3,000원| 조회(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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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대장정 (모택동의 리더십에 근거하여)
    중국 대장정 감상기- 모택동의 전술적 리더십에 근거하여 -나는 학창시절 때부터 역사를 좋아하였고, 결국 대학의 진로를 선택하게 해준 것도 역사였다. 이렇게 역사를 좋아하다 보면, 자신만의 관심 분야가 생기기 마련이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역사는 당연히도 우리의 역사인 한국사이고, 그 다음이 바로 중국사이다. 중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진 첫 번째 이유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러하듯이 어린 시절 영향을 받았던 삼국지·수호지·초한지 등의 중국 고서들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삼국지는 책 이외에도 컴퓨터 게임을 통해 전술을 짜고 전쟁을 하는 것이 정말 재밌었다. 두 번째 이유는, 중국은 현재 우리나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나라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며칠 전 수업에서 현대의 중국을 만드는 데에 큰 일조를 하였다는 ‘중국 대장정’ 에 대한 비디오 감상을 하게 되었다. 복학생이어서 그런지 비디오에서 알려주는 정보를 최대한 놓치지 않기 위해 노트북으로 열심히 필기하여, 수업이 끝난 후에 손목이 아려오던 당일의 기억이 생생하다. 감상문을 쓰기 시작한 오늘은 대장정에 대해 기록한 노트북 필기를 한 번 살펴보고, 도서관에서 대출한 몇 권의 책들과 인터넷을 살펴보았다. 대장정에 대한 단순한 줄거리 설명이나 요약이 아니라, ‘감상문’이기 때문에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추어 글을 쓸까 고민을 해보았다. 불현 듯 며칠 전 수업 할 때 들은 교수님 말씀과, 비디오 영상의 나레이션이 떠올랐다. 절대적 열세의 공산당 소속 홍군이 대장정을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모택동의 전술적인 리더십’ 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릴 적 삼국지와 초한지 등에서 매력을 느꼈던 영웅들의 전략에 대한 관심을 대장정의 모택동에 대입을 시켜보았다.1. 군사 수의 극단적 차이 임에도 불구하고 대장정을 성공한 홍군1934년 10월 15일 밤, 중국 남부 장시(江西)에서 약 8만 명의 남자와 35명의 여자들이 길을 나섰다. 이들은 공산당 지도부가 결정한 ‘작전상 후퇴’를 단행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겉보기에는 도망자 행렬이나 다름없었다. 이들이 바로 368일에 이르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믿기 힘든 여행을 해낸 중국 홍군이다. 총 9654킬로미터, 그것도 지구상에서 가장 험준한 지역을 걸었다. 산 열 여덟 개를 넘었고 강 스물네 개를 건넜으며 초지와 늪지대를 가로질렀다. 국민당군의 계속되는 추격과 기습, 끊임없는 폭격 그리고 허기와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하루 평균 26킬로미터를 행군한 것이다.) 반면, 이들을 쫓았던 국민혁명군은 370개의 정규사단(正式師), 46개의 신사단(新編師), 12개 기병사단(騎兵師), 8개 신기병사단(新編騎兵師) 그리고 13개의 예비사단(預備師)등 으로 구성되었고 연인원 430만 명이었다.) 장개석의 국민혁명군은 50배가 넘는 군세로도 모택동의 홍군을 섬멸하지 못하였다. 어떠한 차이가 이런 결과를 만들어 냈을까? 이것은 모택동의 전쟁의 흐름을 읽는 능력과 특유의 전술, 그리고 그의 리더십의 영향이 상당했다.2. 모택동의 전술적 리더십그렇다면 모택동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술을 사용하여 국민당의 압박을 견뎌냈을까? 그는 자신의 부하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리더십이 있었으며, 게릴라 전술(유격 전술)과 특유의 정보망을 이용하였다. 수업에서 본 비디오에서 나왔던 사건만 보아도, 평화적인 방법으로 폭력적인 로로족을 포섭하였고), 쇠사슬로 이루어진 루딩교의 전투에서는 22명의 결사대를 보내 도하에 성공하였으며, 대장정 후반부에서는 4500m의 대설산을 건너가는 데에 성공하였다. 특히 대설산의 결단을 보았을 때, 다소 무모해 보이기도 하였지만,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아주 열악한 환경 내에서도 결국 이루어낸 것을 보면, 이 모든 것은 모택동 특유의 리더십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더불어 대장정 이전에, 모택동은 홍군의 작전원칙을 미리 정하기도 하였다. 토지혁명이 시작된 후 모택동은 홍군을 이끌고 정강산으로 들어가 장시 루이진을 중심으로 한 혁명근거지를 구축하였으며, 국민당의 세 차례 ‘섬멸작전’을 이겨냈다. 이러한 과정에서 모택동과 주덕 등은 ‘유격전쟁 16자 전법’을 홍군의 작전원칙으로 정하고 이를 성공적으로 운용하였다. 이 ‘16 전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적이 진격하면 아군이 후퇴하고[敵進我退], 적이 주둔하면 아군이 괴롭히고[敵駐我撓], 적이 피로하면 아군이 공격하고[敵疲我打], 적이 후퇴하면 아군이 추격한다[敵退我追].” 이 전법의 기본정신은 적이 강대하고 아군이 약소한 실제상황에서 출발하여, 농촌지역의 정치·경제 및 지리적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고,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숨겨 민첩한 기동으로 자기 보존과 발전을 추구하며, 점차적으로 적과 아군의 역량 비율을 변화시켜, 적을 섬멸하고 최후의 승리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보았을 때 마치 삼국지에서 제갈량 그리고 초한지에서 한신이 전략을 짜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무기가 현대식으로 변했다고 하더라도, 전쟁의 기본적인 전술 흐름은 비슷한 것 같다.또한 모택동은 장개석과는 달리 정보의 소중함을 알고 매우 유용하게 잘 이용하였다. 비디오에서 나왔듯이, 그는 꼬마 연락병을 이용하여 다른 곳들과 교신을 하였고, 또한 지역 신문과 농민을 이용하여 국민당의 정보를 획득하였다. 덕분에 친수이강에서 국민당을 따돌리는 성공하였다.한편, 그는 농민들을 포섭하는 데에도 능숙하였다.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 에 따르면, “이상의 이유들 말고도 대중과 전투원들 사이에 일체감이 형성돼 있었기 때문에 유격전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으며, 유격대가 불패의 전투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홍군 유격대원들은 단순한 전사가 아니라 정치선전원이며 조직가이기도 하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혁명의 메시지를 날라다 주었다. 놀라운 인내력을 가지고 농민대중에게 홍군의 진정한 사명을 설명해 주었고, 오로지 혁명을 통해서만이 그들의 소망이 실현될 수 있으며, 공산당이 바로 혁명과정에서 그들을 지도할 수 있는 유일한 정당임을 납득시켰다.”)3. 손자병법에 영향을 받은 모택동이러한 모택동의 전술적 리더십 중에는 과거에 손자(孫子)가 저술한 손자병법의 영향이 있었다. 모택동의 혁명적 군사전술의 원리가 되는 「게릴라」전의 기본적 모체는 손자병법 이래 통용되어온 16자전법인 바 「敵進我退, 敵駐我擾, 敵疲我打, 敵退我追」에 일차적으로 표기되어 있다.)한편, 모택동이 대장정을 결심한 계기도 손자병법에서 얻었다. 장시(江西) 제 3차 ‘섬멸작전’을 맞이한 홍군(紅軍)은 근거지 후방으로 극단적 퇴각을 단행하게 되는데, 이는 당시 국민당 병력이 홍군의 10배를 초과했기 때문이다. 손자(孫子)가 이르기를 “적의 예기(銳氣)를 피하고, 그 태만함을 공격하라” 한 것은 적이 피로하고 사기가 저하되기를 기다려 아군의 우세를 확보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손자의 말씀은, 비단 전쟁뿐만 아니라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마케팅 협상을 할 때에도 적용되는 자세인 것 같다.4.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결정적 차이모택동이 “대장정은 열한 개 성, 2억에 달하는 인민들에게 홍군이 걷는 길만이 해방을 향한 유일한 길임을 알리는 일이었다. 대장정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렇게 빨리 홍군이 이루려는 위대한 진리가 무엇인지 인민들에게 알릴 수 있었겠는가?” 라고 평가했듯이, 대장정은 중국공산당이 인민을 만나고, 온몸으로 설득하고, 끝내는 인민의 지지를 끌어내는 과정이었다. 그즈음 국민당의 장개석 군대는 수많은 농민들이 처한 현실을 방치한 채 공산당을 섬멸하는 일에 전력을 쏟았다. 무려 9십만 명의 친위대와 3백여 대의 폭격기를 가진 막강한 군대를 두고도, 그것을 자국민을 보호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수많은 인민들을 학살하는 데 동원했다. 공산당을 섬멸한다며 다섯 차례에 걸쳐 ‘포위 토벌’ 작전을 펼치는 동안, 군대가 지나가는 지역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집, 농작물, 가축, 심지어 사람들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농민들이 홍군 유격대들에게 도움을 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국민당 기관지는 국민당 군대가 장시 소비에트를 탈환하는 과정에서 백만에 달하는 인민들이 살해당하거나 굶어 죽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니 홍군을 만나기 전까지 농민들은, 구내 하면 으레 약탈과 살인, 간음과 방화를 연상할 정도였다. 그러나 공산당은 적어도 이 점에서는 분명하게 달랐다. 대장정 기간 동안 중국공산당은 홍군에게 다음과 같은 행동 지침)을 전달하고 실천했다.)
    인문/어학| 2011.04.27| 4페이지| 2,000원| 조회(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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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과 대만의 경제협력 (차이완)
    1. 차이완의 어원‘차이완(Chiwan)’은 중국과 대만의 경제분야 협력 가능성을 상징하는 용어로 한국 언론이 만들어낸 조어(造語) 중 드물게 국제적으로 널리 인용된다. 대만 민진당의 8년 집권을 끝내고 취임한 국민당 마잉주(馬英九) 정부가 들어선 2008년 3월 한국에서 먼저 제기됐다.2. 중국과 대만의 협력배경양안 간 대화채널은 이미 1990년대 초 일종의 반관반민(半官半民) 기구인 대만의 해협교류기금회와 중국의 해협양안관계협회의 발족으로 가동되기 시작했으며, 1994년 중국정부가 ‘대만동포투자보호법’을 제정함으로써 대만기업들의 중국투자 붐을 이끌어냈다. 대만기업들의 중국진출이 광범위하게 진행될수록 경협 확대론은 세를 얻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덩휘 총통의 방미(1999년), 중국정부의 반국가분열법 통과(2005년 3월: 대만의 독립시도를 비평화적방법으로 제동을 걸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음) 등 정치적 암초를 만날 때면 여지없이 ‘중국 흡수’를 경계하는 여론이 득세하는 패턴을 답습해왔다.최근 양안의 경협 움직임은 그러나 두 가지 면에서 과거와 차원이 다른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 대만의 경협에 대한 의지가 과거 어느 때보다 강렬하며 경제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대만 독립을 주창하는 민진당보다 국민당이 ‘친중(親中)’ 기조를 유지할 것은 누구나 예상해왔다. 마잉주 정부는 여기에 더해 경제교류와 통일논의를 당분간 분리하자는 정경분리 원칙을 들고 나왔다. 중국과의 통일이나, 대만 독립 같은 민감한 정치적 이슈를 분리하고 나면 경제교류는 자연스럽게 중국시장이나 자본을 활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을 수밖에 없다.한국과 함께 아시아의 신흥공업국(NIES)으로 발돋움 했던 대만은 마잉주 집권 첫해인 지난해 0.1%란 저조한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지구촌경제가 몸살을 앓은 올해엔 -4.1%까지 떨어질 것으로 정부2 스스로 전망하고 있다. 같은 기간 세계 최고의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는 중국은 차치하고서라도 한국경제의 2.2%, -0.6%(LG경제연구원 전망치)보다도 크게 저조한 실적이다. 이는 주로 대만경제의 성장동력인 수출이 지난해 3.6% 성장에 그친 데 이어 올해 -32.8%(1-7월누계)까지 급락한 때문이다. 올 7월 실업률은 6.1%로 2000년대 들어 최고치로 치솟아 비관적인 심리가 팽배해있다. 국민당 정부로선 파격적인 자구책을 꺼내 들 필요가 생겨났으며 그 자연스런 귀결로서 중국의 광대한 시장과 자금력을 활용하려는경협확대를 들고 나온 것이다.둘째는 중국 당국의 유연성이다. 중국 정부는 5월 세계보건기구(WHO) 회의에 대만 대표단이 ‘Chinese Taipei’란 명칭으로 참여하는 것을 사실상 묵인했다. 대만이 유엔 산하 기구 회의에 대만 지명을 걸고 참석한 것은 1971년 유엔에서 밀려난 이후 처음이다. 이어 9월 초 티벳의 망명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대만 법회 개최에 대해 ‘분리책동’이라는 익숙한 반박 성명만 내놓았을 뿐 별다른 보복에 나서지 않았다.정경분리는 사실 중국 정부가 더 선호하는 ‘메뉴’다. 미국과 함께 ‘G2’의 영광을 코앞에 둔 중국으로선, 정치적 걸림돌만 제거한다면 양안 간 경제적 정합성(整合性)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다. 양안이 경제적으로 강고히 묶인 뒤 정치적인 통합논의가 제기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 될 터이다. 대만의 대중(對中) 수출액이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0%(올 1~7월 기준)이지만, 중국의 전체 수입액에서 대만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8.3%(올 1~8월)에 그치고 있다. 아울러 중국에 대한 외국직접투자액(FDI)에서 대만이 차지하는 비중 역시 2%(올 1~7월)까지 떨어졌다.경제규모 격차를 감안할 때 향후 양안 경제관계가 다시 냉각될 경우 그 여파는 대만 경제엔 A급 태풍으로 미치겠지만, 중국 경제엔 화남지역에 머물다 갈 열대성 강우 정도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 정부가 대만의 국제적 존립 공간을 조심스레 열어주면서까지 대만 발 경협 훈풍을 소중히 지키려는 것은 이 같은 전략적 우위를 감안한 결정이다.3. ECFA(Economic Cooperation Framework Agreement)그래서 탄생한 것이 ECFA(Economic Cooperation Framework Agreement) 이다. 중국과 대만 간 준 자유무역협정인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이 올해 중순에 들어서 발효되기 시작하였다.한국경제에 따르면, ECFA는 수백 종의 제품과 서비스 관세를 줄여 궁극적으로는 이를 완전히 철폐하는 것이 목표이다. 중국과 대만은 이번 협정에서 관세 폐지 또는 감면을 거쳐 2년 안에 관세 폐지에 이르는 조기수확 대상 품목(Early Harvest Program: EHP)에 대만산을 539개, 중국산을 267개 포함. 대만이 혜택을 입는 조기수확 대상 가운데 108개 품목은 ECFA 발효 직후 무관세 혜택을 보게되며 나머지는 2년 동안 3단계를 거쳐 관세가 철폐된다.4. ECFA가 한국에 끼치는 영향양안간 (가능한) 관세인하 프로그램 적용이 한국에 어떤 파장을 미치는지 살펴보기에 앞서 현재 중국 수입시장에서 대만과 한국 상품 간 경합관계를 살펴보자.위 그림은 중국시장에 수출하는 한국 대만 일본 3국의 상품을 크게 14개 군으로 나눈 뒤, 임의 두 나라간 수출경합도 추이를 나타낸 것이다. 한국 대만 간 경합도는 1990년대 후반 이후 전반적으로 상승하고 있으며 3국 사이에서도 가장 치열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대만과 일본의 경합도는 2003년 이후 급격히 내려가고 있다. 중국 시장에 서 대만 일본 수입품은 보완재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는 두 나라간 국제분업이 더욱 활발해졌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경영/경제| 2011.04.27| 3페이지| 1,000원| 조회(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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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고대 국가 부흥에 공헌하였던 소서노에 대한 조명
    한국 고대의 사상과 문화- 한국 고대의 국가 부흥에 공헌하였던 여성에 대한 조명 -1. 개관그동안 역사를 배워온 바에 따르면, 역사의 중심에 서있는 인물은 대부분 남성이었다. 역사 속 남성들은 국가를 세웠으며, 영토를 확장하기도 하였고, 무언가를 발명하는 등 역사의 흐름을 만드는 데 일조해 왔다고 알려졌다.하지만, 나는 역사를 그저 외우는 것만이 아닌 그 때 그 시절 자체의 역사를 바라보는 것을 원하는 입장에서,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의문을 품어왔다.‘역사 속에서 왜 남성들만 이런 역할을 해낼 수 있었을까?’ 나는 알려지지만 않았을 뿐, 여성들도 분명 역사의 흐름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분명히 여성들은 자신들이 한 역할에 비해 인정받지 못한 것이었다.이런 생각을 해오던 중 교수님의 수업을 듣게 되었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일 시조동명성왕과 백제본기 제일 시조온조왕조’ 부분을 공부하던 중 ‘소서노(召西奴)’라는 이름을 발견하게 되었다. 뒷부분에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소서노는 주몽에게 인정을 받은, 고구려 건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여인이었다.) 그 순간 그동안 해왔던 생각들과 맞물리며 그녀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우선은 소서노에 대한 인생을 나누어 첫 번째로 ‘주몽을 만나기 전 무렵’, 두 번째로 ‘고구려 창업 무렵’, 세 번째로 ‘고구려를 떠날 무렵’, 그리고 마지막으로 ‘백제 건국 무렵과 그 이후’ 로 조명한 후 ‘왜 그녀에 대한 평가가 오늘날 우리에게 와 닿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도 알아보기로 한다.2. 주몽을 만나기 전의 소서노당시 소서노는 졸본부여의 계루부 족장의 딸로서 오녀산성)에서 영향력 있는 여성이었다. 당시 졸본부여가 계루부를 비롯한 다섯 부족의 연합형식으로 나라가 이루어진 점을 감안한다면 소서노의 위치는 상당한 것이었다. 정치지도자인 아버지 연타발)은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용맹스러운 딸에게 말을 타고 나가 자연을 느끼게 하고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의 위험을 극복하는 방법과 타인을 내 사람으로 만드는 법 등을자인 우태)와 결혼을 하였지만, 그는 일찍 죽었다. 사위에게 양위를 하는 풍습이 있었지만 그가 죽었기에 소서노는 연타발이 생각한 제 1순위의 후계자였다. 덕분에 그녀는 여성 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지위는 상당히 높았으리라 생각된다.3. 고구려 창업을 도운 소서노이렇게 소서노가 자신이 머물고 있는 영토에서 확실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을 때, 주몽은 막 동부여에서 도망쳐 나와 소서노의 지역 근처에서 나라를 세우려 동분서주 하고 있었다. 이 부분에서 하나의 궁금증이 밀려나왔다.‘그렇다면 과연 주몽이 소서노에게 먼저 접근을 하였을까? 아니면 소서노가 주몽에게 먼저 접근을 하였을까?’ 아마도 주몽이 소서노에게 먼저 접근을 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몽은 자신의 정치적인 기틀을 다지기 위해 그 지역의 토착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연타발은 계루부의 지도자이기도 했지만 장사 수완이 비상하게 뛰어난 상인이기도 했다. 그는 젊어서부터 남북 갈사(曷思)를 비롯한 주변 여러 나라를 오가며 사업을 벌여 수많은 재물을 모은 거부였다. 자연히 주몽으로서는 연타발의 재산과 명성, 계루부의 세력에 의지하여 지지기반을 확충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 곳에서 만난 신하들은 분명 주몽에게 소서노에 대한 정보를 주었을 것이다.물론 소서노에게도 주몽은 매우 매력적인 배필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미 소서노의 지역인 비류수와 졸본천 주변에서 빼어난 인품, 준수한 용모 그리고 백발백중하는 활솜씨로 명성이 자자하였다. 또한 그녀는 토착세력의 기득권으로 주몽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 자신이 토착세력의 대표 연타발의 딸이었지만 정체된 현실에 만족하는 기득권자의 시각이 아니라 졸본의 변화를 추구하는 도전자의 시각으로 주몽을 바라보았다. 졸본의 변화를 추구하는 소서노에게 중요한 것은 토착세력이냐 이주세력이냐 여부가 아니라 능력이었다. 소서노는 편견을 걷어내고 주몽의 능력을 바라보았다.)기원전 37년, 결국 주몽과 소서노는 결혼을 하게 된다. 비록 주몽에게는 그전에 동부여에서 결혼하여 자신이 도망쳐 나올 때에 임신可)들의 추대를 받아 대왕위에 올라 고구려 개국을 선포했다. 추모대왕은 자신이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했으므로 본성이 해씨(解氏)였겠지만 새로이 나라를 열었으므로 높고 넓고 크다는 뜻에서 고씨(高氏)로 창씨하고 이를 왕성으로 삼았다.)‘『삼국사기』 백제본기 제일 시조온조왕’ 조에 따르면 소서노는 이 때 정비로 지칭되고 있다. 주몽이 소서노와 결혼해 졸본에 처음으로 정착하게 된 이 때를 뒷날 고구려 왕국에서 건국의 해로 인정하는 것도 그 때의 소서노의 위치나 역할을 알 수 있게 한다.) 주몽은 그녀를 특히 우대하였고, 그녀의 자식들도 마치 자신의 자식처럼 대하였다.)「시조 비류왕은, 그 아버지는 우태로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로 졸본 사람 연타발의 딸이었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 건소 2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4. 고구려를 떠나는 소서노앞서 본 바와 같이 소서노는 두 아들과 함께 주몽을 도와 고구려가 부흥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다. 더불어 자신의 장남인 비류가 이 왕조를 계승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난관이 발생한다. 기원전 19년 부여에서 주몽이 부인 예씨에게서 낳은 아들 유리(琉璃)가 주몽을 찾아오게 된 것이다. 주몽은 부여에서 도망쳤을 때 예씨에게 “일곱 모난 돌 위의 소나무 아래 감춘 유물을 찾는 자가 내 아들이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로써 유리가 유물을 찾고 주몽에게로 온다. 주몽의 뒤를 이어 왕조를 계승하게 될 인물은 바로 유리였다.「유리가 산골짜기에 가서 칼을 찾다가 못 찾고 피곤하여 돌아왔다. 하루는 그가 칼을 바쳤다. 왕이 자신이 가졌던 부러진 칼을 내어 맞추어보니 완전한 칼이 되었다. 왕은 기뻐하며 그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이때 소서노는 분명히 주몽에게서 심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고구려는 예씨와 유리가 아니라 자신과 두 아들인 비류, 온조가 함께 세운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후계자는 유리가 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소서노는 소후(小后), 곧 제2부인으로 강등 당하였다. 소서노와 두 아들은 배신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으면서도 그 와중에서도 살 길을 구상하였을 것이다. 아직은 주몽이 살아있으니 당장 죽이지는 않겠지만, 뒷날 주몽이 죽게 되어 유리가 왕위를 이으면 소서노와 두 아들의 목숨은 어찌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소서노와 두 아들은 남하를 결심하게 된다.「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유리)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오자 우리 어머니께서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대왕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라가 유류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우리들은 그저 군더더기 살처럼 답답하게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드디어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와 대수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살았다.)」이 때 소서노와 비류 온조 형제를 따르는 무리들은 상당하였다. 오간, 마려, 을음, 해루, 흘우 등 열 명의 신하와 그 일족, 그리고 자신의 부족인 계루부의 수많은 백성이 소서노의 뒤를 따랐다. 이것만 보아도 그 때의 소서노 세력이 막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추측컨대 이 때의 소서노의 나이는 만 48세였고, 그녀가 주몽을 만난 30세 이전에 과부가 된 사실로 미루어 추산하면 당시 비류와 온조의 나이는 각각 30~25세 전후였을 것이다.)5. 백제 건국의 역할을 한 소서노단재 신채호는 그의 『조선상고사』 제 2장 3절리면 드라마의 영향 때문인지 ‘주몽의 연인’ 혹은 ‘남장’을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그녀의 진정한 역사적 의의는 ‘고구려를 건국하는 데 큰 일조를 했을 뿐만 아니라, 백제 건국에도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것에 있다.소서노와 그 무리는 환인지역을 떠나 낙랑사군을 거의 거치며 남하했다. 대방에 이르러서는 주변에서 공격을 많이 받아 한강변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만든 것이 바로 위례성이다. 위례산에서 위례의 어원은 『주서(周書)』에서의 왕을 뜻하는 어라하에서 찾는다.) 이 때 소서노는 어라하(於羅瑕, 왕)였다.「『주서』에서 왕을 뜻하는 ‘어라하’라는 어휘가 있다 소서노가 백제를 세운 후 주몽은 ‘어라하’라는 책호를 보냈다. 백제 위례성의 위례의 어원도 어라하에서 찾고 있다. 어라하와 위례는 음형이 비슷하고 재구된 고대한자음의 두 표기자도 서로 비슷하다. 위례의 재구음(再構音)은 십제의 ‘十’,‘j?r?'과도 비슷하다.)아마도 소서노는 고구려를 떠나 백제를 건국하기까지의 기간 동안 왕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이후 소서노의 사망 시점, 정확한 사망의 이유, 그리고 비류와 온조의 분기(分岐)시점 등은 여러 책을 살펴 본 바 제각각 다르고 소서노의 ~~~에 집중을 하려 했기에 이만 줄이도록 한다.7. 마무리소서노는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를 보여주는 몇 없는 자료 중 하나인 『삼국사기』 에 이름이 올라와있는 여성이며 단재 신채호 선생도 그의 책에서 그녀에 대한 언급을 했을 정도로 역사의 흐름에 큰 영향력을 끼친 위인이었다. 그녀의 도움으로 주몽이 고구려를 창업할 수 있었으며 그녀의 아들들이 백제를 건국할 수 있었다.하지만 그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어떠한가? 그녀는 남편인 주몽의 이름에 가려졌으며 아들인 온조의 이름에도 가려졌다. 즉, 그동안의 역사기술이 남성사가들에 의한 남성중심의 역사서술 방식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또한 신라중심의 역사관이나 승리자 중심의 역사 서술방식에서 자연스레 그녀는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또한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는 열녀나 효.
    인문/어학| 2011.04.27| 5페이지| 2,000원| 조회(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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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이 맺은 FTA 현황 및, 체결에 따른 장단점 평가A+최고예요
    ‘한국과 FTA로 관련된 국가, 그리고 FTA 체결에 따른 장단점에 대한 조사’2006313944 정인성1. FTA에 대한 개관FTA는 'Free Trade Agreement' 의 줄임말로, 자유무역협정을 의미한다. 회원국 간의 상품 서비스 투자 지재권 정부조달 등에 대한 관세 비관세 장벽을 완화함으로써 상호간 교역 증진을 도모하는 특혜무역협정이다.자유무역협정(FTA)은 발효시기 별로 살펴보면, 70년대 이전 4개, 70년대 11개, 80년대 9개에 불과하였던 것이 90년대에 이르러서는 59개, 2000년대에 183개가 발효되어 최근 지역주의의 확대를 보여주고 있다. 2007년 기준 세계 총 무역 중 지역협정내의 무역비중이 50%를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2. 한국의 FTA 체결현황한국의 FTA 현황은 발효, 서명/협상타결, 협상 중, 협상준비공동연구로 나누어진다.첫 번째로, 발효된 국가는 칠레, 싱가포르, EFTA, ASEAN, 인도가 있다.칠레와의 FTA는 2002년 10월 25일 타결되었고 우리나라의 첫 FTA 이며, 칠레는 우리나라의 지구 건너편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우리 기업의 활동변경을 넓히고 수출시장을 다변화 하는데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싱가포르는 우리나라가 두 번째로 FTA를 체결한 국가로, 동아시아의 주요인접 교역국과의 본격적인 FTA 추진을 알리는 서막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세 번째 FTA 대상은 스위스,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리히텐슈타인 등 서유럽 4개국의 경제연합체인 유럽자유무역연합(EFTA)로, 2005년 12월에 정식으로 서명이 되었다. 칠레, 싱가포르와 비교하여 FTA의 경제규모도 크고 지역블록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향후 EU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여건을 개선하는 효과가 있다. 다음 FTA 발효 대상은 ASEAN이다. ASEAN은 우리나라의 5대 교역국으로, FTA 경제적인 효과 면에서 더욱 큰 실질적인 혜택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010년 1월 1일 인도와의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CEPA))가 발효되었다. 신흥 거대경제권과 타결하는 최초의 FTA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두 번째로, 서명/협상타결 된 국가는 미국, EU, 페루가 있다.미국과의 FTA 서명은 2007년 6월30일에 이루어졌다. 미국은 우리나라의 2대 수출상대국이며, 총 수출의 약 20%를 차지하는 매우 중요한 시장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2010년 10월 6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우리나라는 EU 와의 FTA에 대해 서명을 하였다. EU는 세계 최대의 단일경제권이자, 우리나라의 제 2 교역상대 및 제 1의 투자파트너로서, 국익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유럽과 동아시아, 그리고 미국을 연결하는 ‘글로벌 FTA 허브국가’로 부상할 수 있다는 전망이 있다. 페루와의 FTA 타결은 2010년 8월 30일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11월 중에 서명을 할 예정이다. 페루와의 FTA는 이전의 칠레와의 FTA와 함께 우리나라의 남미지역 진출 확대를 위한 교두보 확대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세 번째로, 협상 중인 국가는 캐나다, 멕시코, GCC), 호주, 뉴질랜드, 콜롬비아, 터키가 있다.네 번째로, 협상준비공동연구인 국가는 일본, 중국, 중국일본, MERCOSUR), 러시아, 이스라엘, SACU), 베트남이 있다.3. FTA 체결에 따른 장단점1) 장점 (필요성)① 경제통합에 의한 회원국 사이에 경제적 사회적 비용이 감소된다.② 보다 적극적인 측면에서, 능동적인 시장개방과 자유화를 통해 국가 전반의 시스템을선진화하고 경제체질을 강화할 수 있다.③ 우리나라는 수출이 교역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수출 주도형 국가이기 때문에 관세 등 각종 장애물이 뚫리게 되면, 수출이 증가할 수 있다.2) 단점① 지역주의가 확대될수록 다변주의가 축소됨으로써, 무역우회와 원산지 문제가 야기된다.② 경쟁력이 약한 산업은 생산이 감소하여 일정 기간 구조조정이 불가피해진다.③ 산업의 효율성이 증진되면서 비숙련 단순노동의 수요가 감소하여, 숙련노동과 비숙련노 동 사이의 소득격차가 확대된다.④ 인적자본의 수준이 높은 국가는 무역자유화를 통해 기술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고 경제적 이익을 흡수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국가는 경제적 이익을 거의 누리지 못할 수도 있 다.3) 한국 · 미국 FTA 찬반론 4대 쟁점우리나라와의 FTA 협정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되었던 국가는 바로 미국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과의 FTA 협정을 둘러싼 4대 쟁점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① 한국이 제 2의 멕시코가 된다?- FTA 찬성입장· 한국과 멕시코는 기본적으로 경제규모와 구조, 경쟁력, 기술수준에 큰 차이가 있다.· FTA 발효 직후 멕시코의 경기침체는 열악한 제조업 경쟁력 등으로 인한 내부 문제였음- FTA 반대입장· 고용창출 효과 미미, 임금불평등 · 지역 간 불균형 등 사회 양극화 심화, 경제 성장률악화· 장기적으로 미국경제에 종속② 개방하면 국내 취약산업 붕괴?- FTA 찬성입장· 국내 취약산업은 개방 대상에서 제외하거나 장기간 개방을 연기· 유통산업 등 시장 개방 후 경쟁력이 강화된 사례가 적지 않음- FTA 반대입장· 경쟁력이 취약한 농수산업, 금융서비스, 제약 산업 등은 압도적인 경쟁력 우위를 가진미국 과의 FTA 체결로 존립 기반 붕괴
    경영/경제| 2011.04.21| 3페이지| 1,000원| 조회(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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