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과 양명학-유학의 시대적인 변천사에 대하여1. 序유학은 국가의 통치이념이나 정신적인 이념으로서 중국과 한국을 포괄하는 2천 5백여년의 세월을 아울러 왔다. 덕(德)과 인(仁)을 기본골자로 하여 주로 현실적인 정치와 ‘군자(君子)’라는 완성된 인간형을 제시하여, 정도(正道)를 향한 학문적 수양을 강조하던 유학은 점차 딱딱해져갔고, 각종 학파로 분열이 되면서 그 성격 또한 ‘학(學)‘의 개념에서 ’교(敎)‘개념으로 판이하게 달라져 갔다. 나는 이 글을 통하여 초기의 공자의 유학과 후대의 나뉘어진 학파의 성향을 송대의 성리학과 명대의 양명학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그 차이점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설명해보고자 한다.2. 공자의 유학유교(儒敎)는 공자(孔子)에 의해 개창되어 한자문화권에서 수천 년 동안 주류를 이루었던 종교·철학사상이다. 공자는 스스로 “전술하기만 하고 창작하지 않았다”고 겸손하게 말하였지만, 그 이전의 문화를 집대성하고 체계화시킴으로써 유교의 기초를 정립하였다. 공자 이후 유교는 공자가 가르친 “옛 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알아내는” 방법에 따라 시대적 변화에 조응하여 그 가르침을 보완하는 역사를 이루게 된다.공자는 『중용(中庸)』에서 “공자께서는 요임금과 순임금을 으뜸으로 계승하시고 문왕을 본받아서 그 법도를 밝히셨다”고 적고 있듯이 위와 같은 전대의 문화를 집대성하고 체계화시켜 유교의 기초를 정립하였다. 공자는 중심 사상으로 인(仁) 창도해 사랑을 강조했고 문화 현상으로 예(禮)를 일으켜 사회 질서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치를 맡은 자는 덕(德)을 베풀고 믿음(信)을 지켜야 한다는 덕치주의(德治主義)를 내세우기도 했다. 각계 각층의 사회 구성원 각자에게 부여된 이름과 분수를 지켜야 안정과 평화·화합 그리고 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는 정명사상(正名思想)을 강조했고, 인간은 누구나 교육을 받아야 평등을 누릴 수 있고 정의를 분별할 수 있으며 새로운 역사의 창조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견지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제자를 가르치는 데는 육예(六藝)(曾參) 등이 뛰어났는데, 증삼에 의해 자사(子思)에게 도가 전해졌다.공자에 의해 개창된 유교의 근본사상은 인(仁)이다. 그런데 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일정하지 않았다. 공자는 제자들의 물음에 각기 달리 대답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즉 질문하는 제자의 자질·처지·이해 능력에 따라 그 깨우침을 열어주는 방향으로 대답을 해 주었던 것인데, 제자들이 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물었을 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愛人)”,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이다(己所不欲 勿施於人)”, “사사로운 욕심을 이겨내어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克己復禮)”라고 한 것이 그 예이다.즉, 위에서의 내용을 종합해 보아, 공자의 유학은 바로 어짊을 통한 만민의 사랑과 그것을 바탕으로한 덕치 국가의 건설이념이라고 말할수 있다. 하지만 공자의 유학은 후대로 내려올수록 다른 사상과 합쳐지면서 다양한 형태를 가지게 된다.3. 훈고학(訓?學)훈고학(訓?學)은 말 그대로 ‘옛 문장을 읽고 밝힌다는’ 뜻으로서, 한대(漢代)에 이르러 크게 발전하였는데, 훈고학이 한나라 시기에 크게 대두한 이유는 다름아닌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가 그 직접적인 원인이라 할수 있다. 진시황은 분서갱유를 통해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축적된 고서들을 다수 폐기해버렸고, 한자 자체의 변혁이 있어. 고서를 해독하는데 어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그로인해 한나라의 초기까지 상당한 시간동안 문학상의 큰 단절이 존재했다.그로인해 등장한 새로운 학풍의 학문이 훈고학이다. 훈고학은 주로 고서의 자구(字句)를 바로 이해하고 그 주석을 붙이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훈고학의 최초의 문헌은 한나라 초기에 집대성된 자서(字書)로서 십삼경(十三經)에 하나인 『이아(爾雅)』이다.하지만 송대 이후 성리학이 대두함으로서 훈고학은 일시 쇠퇴하였는데, 청대에 이르러 ‘고증학(考證學)’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타났고, 고증학의 발달로 새로운 고대어 주석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철저한 고증에 의하여 경의學), 명학(明學), 정주학(程朱學), 육왕학(陸王學), 성리학(性理學), 이학(理學), 도학(道學), 심학(心學)등으로도 불리우며, 그것은 다만 세분될 경우 이중의 송학,정주학, 성리학, 이학, 도학이 한계통으로 간주되고, 명학, 육왕학, 심학이 다른 한계통으로 분화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성리학(性理學)이라는 용어가 즐겨 사용되어 왔듯이 정주계(程朱界)의 이학이 크게 발달하였다.성리학(性理學)이라는 용어는 ‘성명의리지학(性命義理之學)’의 줄임말이다. 이 용어의 의미로도 짐작할수 있듯이, 성리학은 심성의 수양을 과거 어느 유학보다도 철저히 하면서, 동시에 규범 법칙 및 자연법칙으로서의 이(理) 혹은 성(性)을 깊이 연구하여 그 의리(義理)의 의미를 완전하게 실현하려는 유학중에 하나이다. 한마디로 하여 존심양성(存心養性)과 궁리(窮理)를 지극히 중요시함으로서, 종래의 유학을 형이상학적으로 재구성, 발전시킨것이다.성리학은 사상적으로는 도(道)와 불(佛), 특히 불교의 영향을 받고 그 불교를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발흥하였기 때문에, 배척대상인 불교적 철학 경향과 은연중에 체계가 닮은 성격의 유학이라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나 불교와 대비될때 유학의 강점으로 내세우는 예설(禮設)이나 경세설을 그 이전의 유학보다도 철학적으로 더 강하게 뒷받침하면서 역설하는점도 불교극복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불교와의 상이성(相異性), 즉 성리학의 특징이다.5.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이해성리학에 대한 시대적인 변화의 나열을 늘여놓자면,인간 본성에 대한 학문으로서 주자학파·육왕학파(陸王學派)가 주역을 수행했다. 본성론은 선진시대(先秦時代)에 크게 토의되어, 맹자의 성선설이 근세기 본성론의 정통지위를 차지하였다. 북송시대에 정호(程顥)·정이형제가 나타난 뒤에 성리학이 부흥했으며, 그것을 집대성한 것이 남종의 주희(朱熹;朱子)였다.주희는 《중용(中庸)》 앞머리의 과 맹자의 을 연결하여 성전의 보편적 근거를 천명(天命)에서 찾았고, 인간의 본성이 선한 것은 만인이 항거 불가능한 선천적 사실성을 두려워하여, 마음을 제어하는 본성에서 이(理)를 보였던 것과는 달리 육왕학에서는 마음이 본래 완전함을 각성시키고자 하였다.성선(性善)이란 자기 힘에 의한 자기구제 가능성을 말하며, 성리학이란 그 원리와 방법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성리학은 중국에서는 명나라 말기에서 청(淸)나라 초기까지 사상계의 주체였다. 한국에서는 역사적으로 정·주계(程·朱系)의 이학(理學)이 발달하고 육·왕계(陸·王系)의 심학(心學)은 별로 발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성리학이라 하면 대부분의 경우는 정·주계의 이학을 지칭하는 데 그친다. 여기서 성리학의 한국적인 특색이 드러난다.같은 정·주계의 이학이지만 한국에서는 이학이라는 용어보다는 성리학이라는 용어를 더 즐겨 써왔다. 이 점도 중국과 조금 다른 점이다.성리학이 중국에서 일어나게 된 까닭은 안녹산(安祿山)의 난 이후 많은 민란에 의해 당(唐)나라의 폐쇄적인 귀족사회가 허물어지면서 야기된 혼란을 계기로 관료학자(사대부)인 유학자들이 그 혼란과 모순을 불교와 도교의 사상적 약점에 돌리고, 그 극복을 유학의 재건·부흥을 통하여 이루려는 데에 있었다.당시 유학자들의 판단으로는, 불교나 도교가 지닌 현실 대응상의 약점은 무엇보다도 가정과 사회를 멀리하며, 심지어 국가생활조차 가볍게 보는 점이었다.도교의 은둔경향과 불교의 초속적(超俗的) 출가의 경향이 그것이었다.특히 당·송나라의 유학자들의 눈에 비친 불교는 개인의 안심입명(安心立命) 위주의 수행을 위해 출가하는 것이고, 그로 인하여 가정과 사회·국가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었다.이것이 바로 불교가 당시의 사회에서 혼란을 일으키는 원인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였다.한편, 성리학은 불교·도교의 영향을 받기도 했는데, 우주·자연 및 인성(人性)에 대한 본체론적 형이상학 탐구가 깊어진 것과 심성수양(心性修養)의 철저화 경향이 바로 그것이다.성리학에서는 본체론적 형이상학을 매우 깊이 파고드는 성향이 강하여, 천명·대극·천리(天理)·성명(性命)·의리(義理)·이(理)·기(氣)·음양·심(心)·성(性)·정(情)·인심()·법계(法界) 등의 깊은 형이상학과 참선 같은 수행이 있음을 깨닫고, 그런 것이 유학에도 갖추어져 있음을 과시하려 했던 노력의 결과라 할 수 있다.성리학이 송나라 때에 신유학으로 지칭될 만큼 이전의 유학 경향과는 판이하다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그리고 불교와 대립하여 불교의 철학이나 수양에 맞선 유학의 형이상학적 이론과 수기(修己)의 이론이 유학경전, 특히 《논어》 《맹자》 《중용》 《대학》에 많이 담겨 있기 때문에 성리학자들은 이 네 경전을 유학의 가장 주된 기본 경전으로 보게 되었다.이른바 사서(四書)라는 명칭이 이런 시각에서 생겨나게 된 것이다. 조선왕조가 기틀을 완전히 잡은 15세기 중엽부터 약 100년간에 걸쳐 사림파(士林派) 학자들이 성리학의 드높은 의리만을 실천에 옮기려던 경향을 흔히 사림파정신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 나름의 연유를 가진 것이기도 하다.6. 양명학(陽明學)송대에 확립된 정주이학(程朱理學)과는 대립된 성격을 가지고 있어 육상산(陸象山)의 철학과 함께 심학(心學)으로도 불린다. 왕양명은 초기에 이학(理學)을 공부하다가 주자(朱子)의 성즉리(性卽理)와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에 회의를 느끼고 육상산의 설을 이어 심즉리(心卽理) ·치양지(致良知)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주창하고 나왔다. 즉 원리와 원리 실현의 소재[氣]를 엄격히 구별하여, 마음은 기이고 마음이 갖춘 도덕성 등의 이치는 이(理)라고 한 주자의 견해에 대하여, 만물일체와 불교의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입장에서 마음이 곧 이(理)라고 주장하게 되었다.이에 따라서 객관세계에 실재하는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지식을 이룩하는 이론적 방법으로도 대학의 격물치지를 해석한 주자의 입장에 반대하고, 외재사물(外在事物)을 문제삼으려면 이미 마음이 발동해야 하므로 물(物)을 마음이 발동하여 이룩한 사(事)로 해석하고, 밖에 있는 이치의 파악 이전에 파악하는 주체로서 마음의 선천적인 앎의 능력인 양지(良知)를 이룩하여 사물을 바르게 하는 방법으로 양명은 확정했다.따라서 그에게는 인식과 실천이 것이다.
동북공정에 대하여.-목차-1. 서문2. 동북공정이란 무엇인가?.1) 동북공정이란 명칭2) 동북공정의 변천사와 현재3) 도대체 왜 동북공정인가?3. 고구려에 대한 중국측 입장4. 동북공정에 대한 한국측 입장1) 고구려는 중국에서 발생한 지방정권인가?2) 평양천도 이후의 고구려사도 중국사의 포함되는가?3) 고구려는 역대 중국왕조에 신하를 자처하였는가?4) 고구려와 수·당간의 70년 전쟁은 내전인가?5) 고구려의 유민들은 한족과 융화되었는가?6)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였는가?5. 북한의 고구려사에 대한 인식6. 동북공정에 대한 한국의 대응과 대처방안을 통한 마무리7. 그리고 도움이 되어 준. 참고문헌들,..1. 序文최근 한국과 중국은 전쟁아닌 전쟁을 치루고 있다. 다분히 국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중국에 의하여 도발된, 이른바 문제로 인하여 한국-중국 양국은 역사전쟁이라 불리워도 될 만큼 치열한 학문적 전쟁에 돌입했다.우리는 역사를 배우는 사학도들이다. 우리야 말로 중국과의 역사전쟁에서 우리의 역사와 옛 강토에 스며든 우리 조상들의 얼과 땀. 그리고 한맺힌 울부짖음을 대변해야할 전위부대임을 인식하고 그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수 위해서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과연 무엇이며,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측의 대응은 과연 어떠한지를 알아야할 필요성을 가지고 이 글과 발표를 준비했다. 또한 이를 통해서. 모든 것을 표현할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 자신이 우리의 역사를 알아가고, 의식속에 담아두기 위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2. 동북공정이란 무엇인가?.1)동북공정의 명칭발표에 들어가기전에 우리가 제일 먼저 인식해야 하는 개념이 있다. 그것은 ‘과연 중국의 동북공정이 무엇인가’라는 동북공정의 정의를 말한다. 우리가 동북공정에 대하여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 정확한 명칭과 그 대략적인 시간적인 흐름에 기댄 약사(略史)에 대하여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동북공정(東北工程)의 정식명칭은 ‘동북변강 역사와 현상계열 연구공정’이다. 여기서 ‘동북(東北)’은 중국의 동북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실재로 200억위안(약 3조원)의 거금이 투입되어 5년간 예정으로 2002년 2월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으나, 그 추진계획은 훨씬 이전부터 추진되었다.이미 중국은 80년대에 이르러 동북지방에 대한 ‘고구려사로의 편입’을 위한 계획을 추진하였는데, 『東北歷史疆域史. 張博泉등. 1981』나 『東北地方史硏究. 孫進己. 1985』,『東北民族原流. 孫進己. 1987』등이 그 당시에 나온 문헌들이다. 특히 이 시기를 전후하여 우리는 『한국사』(1975-1981)와 『조선전사』(1979-1983)가 출간되어 고구려를 한국사의 일부로 공식 확인되었다.이에 고구려사를 중국소수민족의 지방정권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중국은 북한의 『조선전사』를 번역(1985)하여 북방변경사에 대한 중국측 입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쳐 90년대 이르러 중국은 고조선· 고구려· 발해사를 포함하여 동북지방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본격적 연구로 ‘한국 고대사의 중국사로의 편입’에 박차를 가한다.이와같은 과정을 거쳐 90년대 말부터 구체적인 맺음이 보이기 시작하여 2000년대 초에 『高句麗 歷史 與文化 .耿鐵華. 2000』와 『古代 中國 高句麗 歷史 叢論. 馬大正등 .2001』이 발간되어. 그간의 연구성과를 구체화시켜 고구려를 ‘중국 고구려’라 명명하였다. 또한 이러한 학문적 성과를 정리하여 『古代 中國 高句麗 歷史續論. 馬大正등. 2003』을 출간하였다.3) 도대체 왜 동북공정인가?.그렇다면 중국이 이처럼 중앙정부 차원에서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의 역사왜곡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중국은 1980년대 개혁· 개방을 추진하면서 ‘통일 다민족 국가론’을 내세워 소수민족 정책에 각별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통일 다민족 국가’란 한족(漢族)을 포함해 56개의 민족이 ‘중국’이라는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8%에 불과한 소수민족이 중국전체 영토의 60%를 점유하고 있어 중국은 개혁· 개방이 본격화될 경우 소수민족들의 분리독립가능성을 우려하지 송화강, 흑룡강, 요하는 우리 민족의 활동문제였다. 동이족과 고조선의 역사는 고구려와 발해로 이어져 내려왔고, 이후 동이계인 거란 , 여진, 몽골족이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반만년의 역사중 우리 민족이 간도를 영유한 것은 3천3백년에 달하며 비한족계민족(요, 금. 원. 일본)이 638년을 지배하였으며. 한족은 5백년이 채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지역은 한족(漢族)과는 별개의 지역이었으며 한(韓)민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곳이다. 또한 고려때 서희가 요나라 장수 소손녕과 담판지어 간도지방의 영유권을 인정받았고. 조선에 이르러서도 이성계의 요동공략과 김종서의 6진개척에 이은 강북의 여진족의 내부(內附)로 사실상 우리 민족의 영역이었다.게다가 현재에 이르러서도 전통적인 우리민족의 정서와 정체성을 지닌 조선족 동포 또한 중국 정부로서는 껄끄러운 존재라 할수 있다. 설혹 간도지역을 확보하더라도 그 지방의 거주민인 조선족을 한족(漢族)으로 동화시키지 않고서는 불안한것이다. 그러한 현실에 미루어볼때 조선족을 한족화시키고 정체성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간도지역의 역사를 왜곡해야할 필요성을 중국정부는 가지고 있었을것이다.동북공정의 역사왜곡은 일본의 교과서 왜곡사건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이다. 일본의 교과서문제는 교과서중 하나인 ‘새로운 역사 교과서’가 문제가 되었지만, 동북공정의 경우는 중국정부가 깊숙이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한국뿐만 아니라 북한과의 공조가 최선의 대응방법이다. 중국이 우리 역사를 자기의 잣대로 왜곡해온다면, 남북공조만이 최선의 대응방법이 될것이다. 북한에 남아있는 고구려 유적- 즉 고분군등-과 유물의 정보를 공유하고 미발굴된 고구려 유적을 남한이 지원하여 발굴해야한다.또한 정부가 나서서 전담기관을 만들어 고구려사를 중국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적극적으로 세계에 알리는 ‘국제화’도 중요하다 할수 있다. 독도문제에서도 오듯이, 국제 사회의 인식은 선점(先占)한 쪽이 유리하다.왜 지금 고구려인가? 고구려는 고려가 되었고. 고려는 지금의 한국 K 일부는 중원. 돌궐. 발해등으로 들어가 모두 중국의 각 종족에 융화되었다. 대동강 이남의 일부 고구려인들만 신라로 넘어갔다. 오늘날 한(韓)민족의 선조는 주로 고대 삼한(三韓). 곧 신라인이고 조선반도로 옮겨간 중국의 각 종족도 상당수 섞여있다. 고구려의 후예는 극소수이다.넷. 수. 당과의 전쟁은 중국내의 내전이었다.고구려가 자리한 지역은 1000년간 (낙랑군+기씨·위만조선) 중국 한족이 지배하던 곳이기 때문에 수-당이 고구려를 친 것은 중국 국내 민족간의 전쟁이었다. 또한 같은 민족 내부의 통일 전쟁이었으며 고구려가 낙랑군을 차지한것도 같은 맥락에서 오는것이다.다섯. 왕씨 고려는 고씨 고려를 계승한 국가가 아니다.왕건은 신라의 장군이었고. 신라를 멸한후 고려를 건국했다. 왕건은 신라의 김씨 계통으로 고구려 고씨의 위(位)를 계승한 것이 아니다. 왕씨 고려는 대동강 이남만 차지했다. 수도 개성은 신라의 옛땅이지. 고구려의 땅이 아니었다. 따라서 왕씨 고려는 한(韓)민족에 의해서 건국된것이지만, 고구려는 중국 각 민족의 선조가 세운것이다.여섯. 한반도 북부의 지역도 중국의 역사다.한반도가 오늘날 한(韓)민족의 거주지가 된 것은 15세기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5세기의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것을 놓고 조선이라는 국가가 생겼다고 봐서는 안된다. 15세기 이후의 조선과 기씨, 위씨 조선은 모두 조선이라 불리웠으나 만족구성과 국가 귀속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로 보아선 안된다.그러므로 이씨 조선은 한(韓)민족의 역사로. 기씨. 위씨 조선은 중국의 역사로 보아야 한다.4. 동북공정에 대한 한국측 반박1) 고구려는 중국에서 발생한 지방정권인가?‘예맥’이란 명칭은 선진(先秦)시대부터 요하 동쪽에 거주하며 농경을 영위하던 '예족(濊族)‘에 대한 일반적 범칭이다. 고구려를 이룬 주민집단은 본래 한반도와 만주에 거주하던 예멕족의 일원이었으며, 기원전 2세기이후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했다.그로인해 고구려를 건국한 집단은 한족(漢族)과 명확히 구분될수 있을뿐만 아니라. 동만주 일대다.3) 고구려는 역대 중국왕조에 신하를 자처하였는가?고구려와 부여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대회’를 열었다는 위서 동이전의 기록은 중국의 통념상 제후는 하늘에 제사를 지낼수 없고, 오직 천자만이 그것을 행할수 있다는것에 미루어 봤을때 그들 역시 고구려를 독자적인 정치체제를 지니고 있었음을 인정했다고 봐야한다. 또한 고구려가 쌓았던 천리장성은 중앙정권과 지방정권간의 경계가 아니라 국가- 국가의 경계를 나누기 위함이었다.에는 고구려가 현도군과 요동군을 공격한 기사가 여러차례 등장한다. 중국측은 고구려와 한의 관계가 예속-종속관계임을 주장하기 위해 전쟁기사만 추출하여 후한 180여년중 전쟁은 10여차례이며, 기간으로 10년에 불과하였다고 강조한다.하지만 고구려가 국가체제를 정비하던 1세기 중후반에는 후한에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고, 오히려 주변세력을 복속시킨 다음 2세기초반에 이르러 현도군과 요동군등 한군현을 공략했기 때문에 후한의 현도군은 서쪽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건국이후 한(漢)에 예속되어 있었다는 주장은 억지이다.중국학계에서는 ‘책봉’이란 단어에 의미를 부여할뿐 책봉의 의미와 그 안에 내포된 상황을 인정하지 않는다. 조공-책봉의 관계는 당시의 외교적인 한 방법이었으며, 중국은 고구려뿐만아니라 백제. 신라 , 왜 등과도 그러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들의 역사는 모두 자주적인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는 동북방의 패자였음으로 주변의 부족들에게 중국의 조공-책봉방식을 차용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이는 중국의 신속국으로는 감히 상상도 할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비나 중원고구려비의 예에서도 보이듯이 고구려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고, 오히려 문화적 동질성을 지닌 신라를 속민으로 설정했다. 이는 독자적인 천하관과 실력의 자신감의 발호였다.4) 고구려와 수·당 간의 70년전쟁은 내전인가?는 당고조 이연이 622년 고구려 영류왕에게 보낸 공문편지에서 ‘이제 우리 두나라거 서로 화평하게 되었으니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때 잡힌 포로들을 송환해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