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범종삼국시대 때부터 전성기를 맞이한 불교는 통일신라에 그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그 중에서도 범종이 발달하였는데 이것은 제례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범음구이다. 동종과 철종으로 나누어진다. 종의 구성을 살펴보면 종의 상단부에 있는 용류와 종신으로 나누어진다. 용류는 종을 매다는 용도이고 용머리 형상을 하고 있다. 용류 옆에는 음통이 있어서 종신 내부와 연결이 되어있는데 이것은 음향필터역할을 함으로써, 종소리의 울림, 일명 맥놀이를 하게 하여 종 내부 잡음을 밖으로 뽑아내는 역할을 한다. 종 아ㅐ에 설치된 반향음통이 이것을 보조한다. 또한 이것은 한국 종만의 특징이기도 하다.음통은 용류와 함께 종의 하중을 분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다. 중국의 종은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용류에 쌍용이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의 종은 단룡이지만 음통이 있어서 용이 한 마리만 있어서 오는 치우침을 없애고 효과적으로 하중을 분산한다.종신은 그냥 길쭉한 반원형이 아니고 배 부분이 살짝 튀어나온 수미산의 형상을 하고 있다. 종신의 상층부에는 4개의 유곽이 있고 각 유곽에는 9개의 유두가 있다. 4개의 유곽은 몇 가지 의미가 있다. 사계절을 의미하는가 하면, 고·집·멸·도의 사체를 의미하기도 하고, 난생·습생·화생·태생의 4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유곽마다 9개의 유두는 불계를 제외한 극락의 구품연화대를 뜻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불계는 용류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그리고 그 아래 당좌와 비천상이 있다. 당좌는 종을 치는 자리인데, 이곳은 타종시 현가에 최소한의 힘이 작용하게 하고 소리의 여운을 고려한 지점에 설치된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는 선녀를 그린 비천상은 공양 비천상과 주악 비천상이 있는데 이것은 각각 성덕대왕신종과 상원사동종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대와 하대까지가 종신의 구성요소이다.신라의 동종은 우수한 합금술로 만들어진 기술의 결정체이다. 다른 동종이 구리, 납, 주석으로 만들어지는 반면에 아연까지 함께 주조한 것이 특징이다. 아연은 420도에서 녹고 950도에서 기화하기 때문에 다른 금속들과는 달리 주조하기가 힘들지만, 주조를 할 시에는 부드러운 금빛과, 정교한 세문장식을 할 수 있다. 아연과 청동은 한국 청동기 시대의 특징이기도 하다.대표적인 종으로 국보 36호 상원사 동종과 국보 29호 성덕대왕신종이 있다. 상원사 동종은 현재 알려진 가장 오래된 범종으로써 한국 범종의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용류, 음통, 견대와 하대, 종신에는 유과, 유두, 당좌를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천상은 이후 모든 종에 계승이 되었다.또다른 종으로 에밀래 종으로 잘 알려진 성덕대왕신종이있다. 이 종에 얽힌 설화로 스님의 권유로 어린아이를 너허 주조를 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것은 후대에 유교를 장려하고 불교를 억압하면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라는 불교를 호국불교로써 장려 했기 때문이다. 이 종을 타종을 하면 종소리가 맥놀이를 하며 울리는데, 이 소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뜻한다고 하기도 한다. 이러한 신라 범종은 당시의 합금과 주조 등의 금속금예기술을 총집합한 결정체라고 볼 수 있다.백제의 문화유산백제는 한강유역에서 강을 중심으로 부족국가의 발전을 이루고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최초의 도읍은 B.C18~475년까지의 한성이다. 그 다음 도읍은 475~538년까지의 웅진시대이다. 그리고 백제 문화의 전성기라고 불리는 538~660년까지를 사비시대라 하는데 이 시기에는 장인들의 솜씨가 이전시대에 비하여 비약적으로 상승하여 발달 된 문화를 보여주는데, 부드럽고 온화한 성격을 보인다.백제는 중국 남조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남조 문화란 동진을 중심으로 한 양쯔강 유역의 문화를 말한다.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은 근친들간의 골육상쟁과 이민족의 침략으로 인하여 멸망하게 되는데, 훗날 사마예가 남경에서 동진을 건국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북중국의 유력가문이 대거 남하하게 되는데 이것은 중국 문화의중심이 황하에서 양쯔강으로 옮겨짐을 의미한다. 강남의 아름다운 자연과 지주전호제 등의 사회경제적 발전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귀족적 색채의 문화를 싹 틔운다. 왕희지의 글과 고개지의 여사장도 같은 그림이 이를 말해 준다. 그리고 인생무상과 청담은일의 가치가 존중되어 자연으로의 복귀가 죽림칠현·도연명 등에 의해 대표되었다. 이는 도교사상의 유행과 민중의 체제저항을 의미한다. 또한 불교와의 결합은 백제의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훈구(勳舊)와 사림(士林)의 대립 구도는 성종에서 연산군, 그리고 중종에 이르는 시기에 집중 부각된다. 그리고 명종 대를 마지막으로 훈구는 사라지고 사림이 주도권을 잡는 시대가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훈구세력들은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세조(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을 기점으로 세조를 지지하면서 공을 가진 기존의 집권세력들이었다.세조의 집권을 계기로 형성된 훈구파는 막대한 권력을 독차지하면서 많은 문제들을 야기했다.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양민을 노비로 삼거나 양민의 토지를 빼앗는 등으로 수많은 농민들이 전호(佃戶:소작농)로 전락했으며 훈구파들의 대토지 소유로 중소지주였던 사림파의 지방 기반을 크게 위협했다. 즉 사화(士禍)는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 토지를 둘러싼 투쟁이기도 했다. 그러나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림파는 4대 사화를 극복하고 명종 말엽에 이르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1) 무오사화무오사화는 연산군 4년(1498) 이극돈, 유자광 등이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로 제출한 것을 구실로 일어났다. '조의제문'은 항우가 폐위한 중국 초나라의 마지막 왕인 의제를 애도하는 내용을 적은 글이다. 한마디로 세조의 왕위 승계가 유교적 명분에 어긋난다는 사림의 인식을 반영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이미 죽은 김종직 뿐 아니라, 문인 대부분이 피화를 당하였다. 사초로 일어난 일이어서 무오사화라고도 한다. 무오사화는 김종직 일파와 훈구파 사이의 알력, 사림-언관의 도전에 대한 훈구파의 정조계 노성대신의 대응, 사회경제적 성과로 재지 중소 지주층에서 새로운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이들이 기성의 특권 관료층의 정치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보이면서 일어난 마찰, 삼사의 기능이 증대된것에 때른 일종의 제재 조치, 홍문관의 언관화이후 야기된 정치 구조의 변화에 대한 왕과 재상의 결속에 의한 반동 등 여러 요인이 겹쳐지며 일어났다.2) 갑자사화갑자사화는 연산군 10년(1504)'경국대전'의 법 운용변질과 '능상', 불경죄를 전제로 신료를 탄압하면서 군신 권력 관계의 파탄은 , 이후 신료 주도로 전치를 운영할 때, 철저한 유교 의식과 명분의 반영을 수반하여, 왕권의 위상을 재정립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3) 중종반정과 기묘사화중종반정은 연산군 12년(1506)에 일어났다. 중종반정은 무오, 갑자사화로 생긴 연산군대의 어지러운 정치가 원인이었다. 당시 정치상황으로 미루에 볼 때 반정은 누가 주도하여 먼저 촉매제 역활을 할 것인가 하는 점에 달려 있었다. 이 점에서 중종반정은 그야 말로 옳은 것으로 되돌이키려는 반정이었다. 또 박원종을 비롯, 연산군의 총신들이 주도했던 점으로 볼 때, 당시 신료들 내부에서는 비정을 초래한 군주는 언제라도 변경 할 수 있다는 아ㅏㅁ묵적이거나 공공연한 의식이 퍼져있었다.중종반정은 이 시기에 이르러 군신 권력 관계가 새롭게 변화된 양상을 말한다.중종은 즉위하면서 사람을 다시 등용하고 도학을 숭상하여 유교 정치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중종 10년(1515) 조광조를 등용하면서 신진기예의 사림이 현량과응 통해 대거 진출하였다. 이들은 주로 삼사의 언관직에 진출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이라 내세우며 급진적 개혁을 요구했다. 경연의 활성화, 소격서 폐지, 향약실시, '소학' 의 보급 등을 추진하였다.이러한 정책을 추진하면서 언관권이 확대되고 나아가 '조광조지세'를 형성하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정국공신의 위훈 삭제문제를 계기로 일어난 훈신의 대대적인 반격이 기묘사화였다.기묘사화는 중종 14년(1519) 중종이 밀지를 내려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이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윤자임, 박세희, 박훈, 기준 등을 체포, 구금하면서 일어났다.기묘사화 이후 남곤, 심정, 김안로 등 권신이 집권하였다. 그러나 중종 33년 기묘명현의 소통을 주장하는 유생층의 상소를 계기로 시묘피하인 대부분을 소통하거나 서용하였다. 이로 인해 다시 사림이 등용되었다.4) 을사사화중종 말, 중종의 후사를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었다. 완세자측과 경원대군 측의 갈들이었다. ㅠ전자를 대윤, 후자를 소윤으로 주르는데, 대윤,롯되었다. 이조 전랑은 5품직으로 고위직에 속하지는 않았으나 문무 관원의 인사 행정을 맡아보는 실무직이었다. 또한 이조 전랑 자리는 현임 전랑이 후임을 추천하는 `자대법(自代法)`이 적용되었다. 이조 전랑은 관리 임용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삼사(언론기관)의 언론을 주도하는 등 사림 정치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따라서 어느 파에서 이 자리를 차지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김효원이 이 전랑 자리에 천거될 때 심의겸이 반대하였고,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이 자리에 천거될 때는 김효원이 반대하였다. 이렇게 두 사람의 대립을 둘러싸고 최초로 붕당이 형성되었다. 신진 관료인 김효원의 집에 출입하는 자는 동인이라 하여 유성룡, 김성일 등 주로 퇴계 문인의 영남학파가 이에 속해 있었다. 반면 기성관료인 심의겸의 집에 모여든 자를 서인이라 하여 윤두수, 정철 등 주로 율곡 문인의 기호학파가 이에 속해 있었다.당쟁 초기에는 대체로 동인세력이 정치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동인은 정여립의 모반 사건 이후 남인(온건파)과 북인(강경파)으로 나뉘었다. 임진왜란 직후 북인이 권력을 잡았으나 곧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나뉘어졌다. 광해군시대에는 그의 즉위를 지지한 대북이 정권을 독점했으나 대북은 또 다시 골북(骨北)과 육북(肉北)으로 나뉘어졌다. 북인은 명청교체기에 광해군을 도와 실리적인 중립 외교 정책을 펴나갔다. 그러나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서인의 인조 반정(1623년)이 성공을 거두면서 대부분 역적으로 몰리고 이후 영영 권력의 밖으로 쫓겨났다.한편 남인은 호란 이후 서인정권이 추구한 무리한 북벌운동을 비판하면서 `예송(禮訟)논쟁`(유교적 예절에 관한 논쟁)을 일으켜 서인들과 대립하였다. 이후의 붕당정치는 서인과 남인의 대립으로 이어졌다.효종이 상을 당하여 대비의 `복제(服制, 상복을 입는 기간)문제`를 둘러싼 남인과 서인간의 예송논쟁은 효종이 장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남인은 효종의 어머니인 조대비의 3년상을, 서인은 1년상을 주장하였는데 서년)이 때부터 집권당파가 자기 당파의 영구적인 집권을 위해 상대 당의 재기를 철저하게 봉쇄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전하! 사약을 내리소서`하는 식의 상대 당에 대한 보복이 횡행하면서 여러 당파가 공존하며 공론을 유도하는 붕당의 원칙이 무너져갔다. 숙종 때 다시 집권한 서인은 곧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열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분열도 전혀 정책적인 대립이 아닌,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노장파(송시열)와 소장파(윤증)의 파벌적 대립이었다.이후 서인은 장희빈에게서 난 왕자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다가 왕의 미움을 사서 쫓겨나고 한 때 남인이 다시 집권하였다.(기사환국, 숙종 16년, 1689년) 그러나 왕의 마음이 장희빈에게서 왕비(인현왕후)에게로 돌아가자 다시 서인이 집권했다. 이후 남인의 대부분은 권력에서 멀어지게 되었다.(갑술환국 , 숙종 21년, 1694년)신구 정치세력의 대립, 복제 문제를 둘러싼 정치세력 사이의 분쟁, 왕비와 후궁 쪽으로 나뉘어진 붕당간의 싸움 등으로 이어져 온 붕당정치는 다시 왕과 그 형제, 혹은 왕과 왕자 사이의 대립을 계기로 계속되었다. 숙종 말년에는 소론이 경종을 두둔한 반면 노론은 그의 아우 영조를 지지하였다. 이에 따라 숙종이 죽고 경종이 즉위하자 소론이 집권했고(1721년), 경종이 단명하여 영조가 즉위했을 때에는(1725년) 노론이 정권을 잡았다경신환국 庚申換局개요1680년(숙종 6) 남인(南人)이 대거 실각하여 정권에서 물러난 사건.내용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하며, 이 사건으로 서인(西人)이 득세하였다. 1674년(현종 15) 예송(禮訟)에서의 승리로 정권을 장악한 남인은 현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숙종으로부터는 신임을 얻지 못했다. 이것은 남인끼리 청남(淸南) ·탁남(濁南)으로 갈라져 서로 싸우고, 한편으로는 권력을 장악한 남인 세력에 대한 염증 때문이었다.경신년인 1680년 3월 당시 남인의 영수이며 영의정인 허적(許積)의 집에 그의 조부 허잠(許潛)을 위한 연시연(延諡宴:시호를 받은 데 대한 잔치)이 있.다음달인 4월 정원로(鄭元老)의 고변(告變)으로 허견(許堅)의 역모가 적발되었다. 이른바 ‘삼복의 변[三福之變]’으로, 인조의 손자이며 숙종의 5촌인 복창군(福昌君) ·복선군(福善君) ·복평군(福平君) 3형제가 허견과 결탁하여 역모하였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허견이 복선군을 보고 “주상께서 몸이 약하고, 형제도 아들도 없는데 만일 불행한 일이 생기는 날에는 대감이 왕위를 이을 후계자가 될 것이오. 이때 만일 서인(西人)들이 임성군(臨城君)을 추대한다면 대감을 위해서 병력(兵力)으로 뒷받침하겠소” 하였으나 복선군은 아무 말도 없더라는 것이었다.이들은 모두 잡혀와 고문 끝에 처형되었고 허견 ·복창군 ·복선군 등은 귀양갔다가 다시 잡혀와 죽고, 허견의 아버지 허적은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하여 죽음을 면하였으나, 뒤에 악자(惡子)를 엄호하였다 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써 남인은 완전히 몰락하고 서인들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다.기사환국 己巳換局개요1680년(숙종 6)의 경신출척(庚申黜陟)으로 실세하였던 남인(南人)이 1689년 원자정호(元子定號) 문제로 숙종의 환심을 사서 서인(西人)을 몰아내고 재집권한 일.내용숙종의 계비(繼妃) 민씨(閔氏)가 왕비로 책립된 지 여러 해가 되도록 후사를 낳지 못하자, 숙종은 후궁인 숙원 장씨(淑媛張氏)를 총애하게 되었다. 그러자 장씨의 오라비 장희재(張希載)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폐단이 생겼는데, 조정에서는 이 일을 중요시하여 궁중의 내사(內事)까지 논간(論諫)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차에 장씨가 왕자 윤(臍)을 낳았다. 숙종은 윤을 원자(元子)로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때 당시의 집권세력이던 서인은 정비(正妃) 민씨가 아직 나이 젊으므로 그의 몸에서 후사가 나기를 기다려 적자(嫡子)로써 왕위를 계승함이 옳다 하여 원자책봉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남인들은 숙종의 주장을 지지하였고, 숙종은 숙종대로 서인의 전횡을 누르기 위하여 남인을 등용하는 한편, 원자의 명호를 자기 뜻대로 정하고 숙원을 희빈으로 책봉하.
[한일 관계사의 이해]임진왜란 전의 조?일간의 사상교류- 사야가 김충선의 생애를 중심으로目 次Ⅰ. 序論ⅰ. 임진왜란을 준비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ⅱ. 임진왜란 전의 문물교류 상황Ⅱ. 本論ⅰ. 조선 전기의 사절의 왕래와 문물교류1. 조선과 일본의 사절1) 조선 측의 사절2) 일본 측의 사절2. 문물의 교류ⅱ. 사야가 김충선이란 누구인가?ⅲ. 김충선이 항복한 까닭은?Ⅲ. 結論 - 김충선을 통해본 한일 사상의 교류* 참고문헌(參考文獻)Ⅰ. 序論1592년, 조선과 일본은 7년에 걸쳐 격렬한 전쟁을 치렀다. 이 전쟁으로 인해 그 당시 조선과 일본 각 국은 큰 피해를 입었고, 조선은 전기와 후기를 나누는 분기점이 되었고, 일본에서는 강력했던 히데요시 가문이 멸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어남으로 인해 막부세력의 교체를 일으켜온 전쟁이 되었다.그 격렬했던 전쟁 중에서도 주목할 점은 항왜, 즉 조선에게 항복한 일본 군사들일 것이다. 그 군사들 가운데서도 필자의 눈길을 끄는 사람은 본명이 沙也可인 김충선이라는 인물이다. 이 인물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마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출병시킨 부대의 오른손이었다. 이런 인물이 왜 조선에 투항하였고, 이 인물이 투항하게 되는데 한?일간의 사상적 교류가 어떤 원인을 펼치는지 간단하게 서술하겠다.ⅰ. 임진왜란을 준비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일본의 상황조선왕조의 일본의 대한 전통적인 외교정책은 교린정책(交隣政策)이었다. 이 교린정책은 주로 왜구를 박기위한 회유적인 평화주의에 입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일본이 적극적으로 교섭하여 오지 않는 한 조선왕조는 일본과 외교관계를 가지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귀찮은 존재로 여겼다. 이러한 관계는 세종 때 삼포개항 이후 계속되었고, 특히 양국의 외교관계가 주로 대마도 宗氏를 중계로 하여 전개되어 조선이 종씨에게 세곡미를 하사하고 무역의 특혜를 인정한 관계에서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를 교린이라 하여도 상국으로서 자처하였다. 결국 조선은 일본에 대한 외교는 고식적인 평화를 유지하고 견제하는 정책 하에 이루어졌으며 자기들 국내와 같이 쉽게 될 줄 알았고, 한편 조선은 일본국내의 정세를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전쟁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ⅱ. 임진왜란 전(朝鮮前期)의 문물교류 상황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일본인의 조선인식을 보면 전통적인 한국관을 계승하는 측면과 새로운 변화상이 혼합되는 시기였다. 또 朝廷?公家와 武家幕府, 서국지역의 호족과 상인 간에도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특징으로는 우선 일본 지배층의 국제인식의 빈약성을 들 수 있다. 입점 특히 조정과 공가 등 귀족지배층에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842년 통일신라와의 국교 단절, 894년 견당사 파견 중지에 의해 일본은 동아시아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된 채 14세기 말까지 쇄국상태를 계속하였다. 당연히 폐쇄적 국제인식 속에 외국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결핍되었다. 일시기 일본은 신국사상에 바탕을 둔 일본형 소중화의식(日本形小中華意識)을 강화하면서 조선에 대해서는 ‘신공황후(神工皇后)의 삼한정벌(三韓征伐)’이라는 설화에 연우한 『일본서기(日本書紀)』 이래의 대 조선 우월관념을 침전시켜 갔다.조정과 공가들에 비해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를 비롯한 무가들은 상대적으로 해외에 대해 유연한 자세를 가지고 교섭에도 적극적이었다. 그 당시 무가들은 새롭게 전개되는 국제정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진하여 명 중심의 책봉체제에 들어갔으며 조선에 대해서도 이를 수호할 것을 요청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를 전개하였다.Ⅱ. 本論ⅰ. 조선전기의 사절(使節)의 왕래와 문물교류1. 조선과 일본의 사절1) 조선 측의 사절조선전기의 일본에 파견한 사행의 횟수는 막부장군과 제호족, 대마도주등에대한 사절을 모두 포함하여 총 65회 에 달한다. 이를 파견대상별로 구분해 보면 무로마치 막부 장군 20회, 구주탐제(九州探提) 2회, 대내전 2회, 대마도주 32회, 이키도주(壹岐島主) 4회, 미상 5회이다. 이 가운데는 중복되는 경우도 있지만, 중앙정부의 대표인 막부장군보다 대마도주를 비롯한 지방호족들에게 파견한 사절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약의 체결과 규정 엄수요구, 규약위반에 대한 책망과 범죄 단속요구, 일본 국정과 왜구 정황에 대한 탐색 등 다양하였다.2) 일본 측의 사절조선전기 일본으로부터 파견된 사절은 형식적으로 보면 도항왜인 전부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교역만을 목적으로 온 경우에도 반드시 외교적 절차를 요구받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입국왜사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실정막부 장군이 조선국왕 앞으로 보낸 일본국왕사만도 60여회에 이른다고 한다. 국초부터 규슈지역의 호족을 비롯한 사절이 경쟁적으로 내도하였고, 제추사의 통교가 대마도주의 문인 통제로 일원화 된 이후에도 사송왜인들이 계속 도항하여 절대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경제적 실익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또한 일본에서 사절을 보낼 때 정사(正使)는 주로 교토5산(京都五山)의 승려가 임명되었다. 당시 교토 5산의 선승(禪僧)들은 그 이전까지 외교를 담당하였다 공가(公家)를 대신하는 교양 집단으로서 실정막부의 외교에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다. 일본국왕사를 제외한 거추사나 제추사 같은 사절들은 대부분 교역을 목적으로 하였지만 조선정부에서 반드시 외교적 절차를 요구하였기 때문에 상관?부관 등 체계적인 직책이 필요하였으며, 그들이 서계를 바치고 조선국왕께 숙배(肅拜)하는 등 사절로서의 역할을 하였다.일본 국왕사의 파견 목적은 국교재개와 수호, 회례와 보고, 조선왕실의 경조사에 대한 문위(問慰), 明에 대한 통교 주선 요청, 조선 국정탐색 등 정치적인 것과 함께 대장경 구청(求請), 사원 건립을 위한 재정지원 요구등 문화?경제적인 것까지 다양하였다. 공식적인 사행목적으로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일본국왕사의 경우에도 공무역을 통한 교역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거추사와 제추사의 경우 사행 명목은 왜구 진압 보고, 피로인 송환, 조약체결에 따른 교섭, 대장경 구청 등이 있었지만, 교역이 주목적이었음은 물론이다.2. 문물의 교류조선은 문물교류 면에서는 수입보다는 수출이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고려대장경(八萬大藏經)을 비롯한 불경, 범종, 불었고, 또 내란 중에 소실된 사찰을 재건하는 일이 많았다. 이 경우 그들은 새로운 사찰에 대장경이나 고려범종을 비치하고자 하였다.그밖에 사행원들이 일본에서 습득해온 서적 류 로는 『經史類題』20권, 『百編尙書』등과 일본지도가 있었다. 또 이들 사행원들을 통해 동남아시아 제국에 대한 정보와 중국 물화가 일본 내에서 유통되는 사정등도 알게 되었다. 또 사행무역을 통해 일본 물품 및 동남아 물품도 진상품으로 들어오게 되는 등 동남아제국과의 문물교류의 한 통로가 되었다.이를 통해 일본은 조선을 통해서 여러 가지 불교와 유교의 대한 호기심과 강한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 나갔다고 볼 수 있다.ⅱ. 사야가 김충선이란 누구인가?본관 사성(賜姓) 김해. 자 선지(善之). 호 모하당(慕夏堂). 본명 사야가(沙也可). 1592년 4월 13일, 왜병 3천 여명이 현해탄을 건너 부산포에 상륙하였다. 이른바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왜병의 선발대에 해당하는 이들을 가토 기요마사의 휘하에 있는 왜병들이었다. 이들 3천여 왜병을 지휘하고 있는 사람은 좌선봉장 사야가라는 무사였고 이는 스물 두 살이었다. 사야가는 일본에서 태어난 것을 큰 불행으로 여길 만큼 중국의 문물을 늘 사모하고 있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스스로 모하당이라고 자처하기도 하였다. 왜장일지라도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막상 조선 땅에 상류하고 보니 조선의 문화가 중국 못 지 않게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설사 그가 그리던 중국에는 못 간다 하더라도 중국에 못지않은 조선 땅에 왔으니 일대 전기를 마련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남의 나라에 들어와서 남의 토지를 빼앗고 남의 재물을 탐내서 죽이고 노략질하는 것은 병가에서 가장 금하는 길이다. 너희들은 다만 진세를 바르게 하고 군기를 세우며 기운을 가다듬고 마음을 단속하여 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라.”라고 군진에 명을 내릴 정도였다. 왜병의 장수로는 취할 길이 아니었으나, 사야가는 이런 조처를 취해 놓은 다음 이틀 뒤인 15일에 이르러서는 조선백성들에게도 싸울 뜻이 없다하였다. 이 때 하사한 이름이 김충선이다. 왜장 사야가가 명실상부한 조선인이 되는 순간이었다. 김충선은 이후에도 우병사 김응서 장군과 만나 작전 수립에 지대한 공을 세우게 되어 그 용맹이 날로 더해졌고, 체찰사 유성룡 정승에게도 왜병과 대처하는 방안을 강구해 주기도 하였다. 임진, 정유년의 왜란이 끝나갈 무렵인 1600년(선조 33년)에김충선은 진주목사 장춘점의 따님인 인동 장씨와 결혼을 했다. 장장 7년에 걸친 왜란이 끝나자 김충선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중을 토로하였다.“8년간 나의 일은 거의 끝났다. 그러나 고국은 멀고 친척도 떠난 지라, 나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내가 고국을 사절한 것은 한의 이릉과 같아 돌아갈 수 없어서도 아니요, 조선에 붙어사는 것이 흉노에 잡힌 소무처럼 갇혀서도 아니다. 나라를 떠난 것은 섭섭한 일이지만은 오랑캐를 벗어난 것은 나의 원하는 바라, 남산의 남이나 북산의 북, 어디에 간들 마땅하지 않으리오.”참으로 절절하게 표현된 김충선의 심중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이로부터 김충선은 그를 따르던 무리를 거느리고 우록동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 지금의 대구 근교에 있는 우록동이다. 우록동에서 조용히 기거하면서 슬하에 5남 1녀의 자녀를 두었고, 이후에도 이괄의 난을 평정코자 출병한 일이 있었으며, 병자호란 때도 몸소 출전하여 대공을 세우기도 하였다.ⅲ. 김충선이 항복한 까닭은?1592년 4월. 조선침략을 위해 출병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부산에 상륙하게 된다. 사야가는 바로 그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선봉장이었다. 그는 부산 상륙 후, 경상도 좌병사 박진에게 강화서를 보내, 투항의지를 밝힌다.- 임진년 사월 일본국 우선봉장 사야가는 삼가 목욕재계하고 머리 숙여 조선국 절도사 합하께 글을 올리옵니다.- 이번에 일본이 이유 없이 군사를 일으키며, 저를 선봉으로 삼으매,- 저의 소원인 조선에 한번 나가보고 싶은 생각으로 본의 아닌 선봉이 되어서 군사를 이끌고 본국, 조선에 이른 것입니다.- 다만 저의 소원은 이 나라의 예의 문물과 의관풍 보면
서양의 역사와 문화를 봤을 때 보통 사람들은 뭔가 지적이고 높은 수준의 문화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우리 일반 소시민들이 우러러보고 뭔가 아른한 향수를 가지는 그 서양의 문화는 과거에 중동 지역 ,오리엔트에서 유래한 문화이다.서양문명은 헤브라이즘, 헬레니즘에 뿌리를 두고 있다. 헤브라이즘은 즉 기독교 문명으로 그 기독교의 창시자가 바로 예수이다. 예수 크리스트가 유대인이며 고대 유대인은 동양인의 골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물론 그것이 아니더라도 예수가 아시아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구약성경의 하느님이 유대인의 하느님 야훼(YHWH)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헬레니즘은 과거 그리스의 문명을 말한다. 헬레니즘 문명은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수학, 기하학, 태양력 등 서양의 대표적인 여럿의 학문은 이집트에서 유래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실제로 서양의 학자들은 자신들의 뿌리인 헬레니즘 문명이 이집트에서 유래됐다고 망설임 없이 말한다. 그리고 바로 이 이집트 문명이 수메르 문명을 뿌리로 두고 있다는 것이다.서양의 위대한 점은 기독교 등의 사상이 아닌 수학이다. 계산하고 계측하며 논리적인 결과를 도출하는 방식을 만들어 내고 그것이 지구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수학은 언어와 문화가 다른 외계인일지라도 통하는 근원적 학문이다다. 지구에서 수학적으로 1+1=2가 외계인에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라비아 숫자라고 하는 1,2,3,4,5,6,7,8,9,0는 사실 인도에서 사용 되었다. 인도인이 이란 수 개념을 발견했지요. 하지만 인도의 민족은 아리아 족이고아리아족은 유럽민족을 말한다. 그래서 인도·유럽어족이라고 하여 언어학적으로도 유사성이 많은 것이다.문물적으로 중국·아라비아의 나침반이 대항해시대를 촉발했고, 칭기즈칸의 몽골군대가 세계를 정복할 때 사용한 화약, 그와 더불어 몽골제국이 유럽세계의 대표격이었던 교황에게 보낸 종이 국서(國書)는 종이를 만드는 사업을 번창케 되고 서양사에서 출판기술의 발달로 이 대량으로 인쇄되어 중세 암흑기의 미망에서 깨어나게 된다그리고 중세의 기사들은 그들이 야만인이라 불렀던 훈족 기병이 사용하는 등자를 도입해 생겨난 병종이다.그리고 서양인들의 중요한 가치관은 바로 입니다. 영화 에서 보면 알렉산더가 가우가멜라 전투 전에 부하장군들에게 말한다.“우리의 병력은 적다. 하지만 우리는 이긴다. 비록 적의 병력이 많지만 그들은 왕에게 불려나온 자들이다. 왕을 잡으면 승리와 제국은 우리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전사하더라도 스스로 의지로 계속 싸울 것이다.”대략 이런 말이다. 바로 그리스의, 서양의 민주주의적 가치를 말하는 겁니다. 동양은 왕 아래 모두 ‘노예’이다. 그러나 서양은 민중이 왕에서 통치권을 위임한 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말장난인 것이지만 결국 그것의 차이는 노예인가 자유인인가의 차이로 까지 연결된다. 이런 서양인의 눈에 동방 황제의 백성은 노예인것이다. 노예가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노예는 가축이니까.서양의 모든 문명과 사상의 뿌리가 동방이지만 자유, 평등의 관념은 그들의 것이다. 이것은 사족이지만 나는 미국 물을 먹은 이승만 대통령이 조선조의 왕손을 칼처럼 자른 이유가 바로 그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천황이나 영국의 여왕같이 한국에도 왕가가 살아남아있다는 상상을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이라는 TV드라마도 한국인 왕가에 대한 향수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 왕가의 사람이고 왕족이지만 평범한 시민들처럼 학교를 다니고 평범을 그리워한다.그래서 나는 서양인들이 야만이라 하는 것을 동양인이 왕의 노예 상태에서 만족하는 동양인을 말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정체는 그들이 확립한 시민사회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이다. 스승의 입장에서 제자는 어리석게 보이기 마련이니까요.
2005년에 출시된 영화인 킹덤 오브 헤븐은 십자군 전쟁의 한 순간을 그린 영화이다. 많은 자금이 드는 관계로 영화감독들이 쉽사리 제작하지 않는 십자군이라는 소제를 장대한 스케일로 그렸다는 점이나, 많은 군중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컴퓨터 그래픽의 사용을 최대한 줄이고 진짜 사람들이 연기했다는 것, 그리고 트로이 라는 영화에서 나약한 왕자를 연기 했던 올랜드 블룸이 영웅 역할을 연기해서 다시 또 이미지 변신을 했다는 것 등등 여러 가지를 주목할 만한 영화라는 것 등을 인터넷 검색 등으로 미리 알아본 후에 영화를 봤기에 그런지 영화의 큰 스케일 등이 눈에 들어왔다. 십자군 전쟁에서의 전투의 사실적 묘사나, 올랜드 블룸의 연기 등등이 눈에 뛰었다. 물론 좀 지루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기억에 남을 만한 영화였다.처음 도입 부분에서 주인공인 발리안은 모루에 칼자루를 올려놓고 당금질을 하고 있는 영락없는 대장장이였다. 그런 그에게 부상당한 십자군 기사인 고드프리가 찾아온다. 고드프리는 그에게 자신이 사실은 그의 아버지라고 털어 놓으면서 예루살램으로 가자고 한다. 발리안은 거부 한다. 고드프리가 떠난 후, 대장장이 일을 하고 있는 그에게 아내의 담당 신부가 다가와서 비아냥거린다. 자살을 한 자는 지옥으로 간다는 말을 하면서. 그 와중에 발리안은 그의 목에서 아내의 목걸이를 보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신부를 죽이고 고드프리를 찾아간다.발리안은 고드프리에게 검술, 전술 등을 배운다. 그러다가 고드프리가 죽을 때에 예루살램의 왕 볼드윈 4세에게 충성 서약을 하고 정식 기사가 되고 난 후에 성스러운 도시 예루살램으로 떠난다. 도착한 뒤 오아시스에서 물을 마시다가 아랍인 기사 하나와 그 종을 만나서 전투를 치른 끝에 주인을 죽이고 종의 안내를 받아서 예루살램으로 향한다. 고드프리의 기사들을 만나서 영주로서 인정을 받고 영지에서 주민들의 인심을 차근차근 쌓아간다. 그리고 뛰어난 검술과 용맹함으로 맹위를 떨치며 볼드윈 4세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아버지의 친구인 티아베리스에게 도움을 받아 힘을 키운다.이런 그를 증오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기 드 루시안 이다. 원래부터 고드프리와 사이가 안 좋았던 터 인데 국왕의 신임까지 한 몸에 받아간 것을 보고 그 시기가 더해진 것이다. 발리안을 볼 때마다 대장장이 출신이라며 모멸과 멸시를 주지만 발리안은 이를 모두 참아 낸다. 또한 기 드 루시안은 왕의 동생인 시빌라와 정략 결혼을 할 예정 이었다. 그러나 발리안이 영지로 돌아올 때 시빌라와 발리안은 사랑에 빠져버린다.후에 샤이뇽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해 살라딘이 카락에 침입 했을때의 무리한 원정으로 볼드윈 4세가 임종하기 직전에 발리안에게 시빌라와 결혼해 왕위 계승권을 가지라고 권유하지만 발리안은 이를 거절한다. 국왕 임종후에 시빌라는 기 드 루시안과 결혼해서 왕위 계승권을 루시안에게 넘겨 버린다. 루시안은 왕위에 등극한 후에 기산자를 제외한 모든 이슬람 교도들을 처형하는 등의 행동을 해서 살라딘과 전쟁을 일으킨다. 그리고 성당 기사단을 보내서 발리안을 암살하려 하지만, 발리안을 이들을 물리치고 티아베리스와 힘을 모은다.기 드 루시안은 살라딘과의 전투를 위해 군사를 징병하고 출전을 결심하지만, 발리안이 이것을 반대하며 나타났다. 그 이유는 물 이었다. 사막에서의 전투에서는 물이 중요한데, 살라딘과의 전투를 위해서 앞으로 나아간다면 아군은 갈증을 견디지 못해 틀림없이 패배할거라는 논리였다. 합당한 이유 였지만 기 드 루시안은 발리안의 등장으로 인한 놀람과 그에 대한 적개심으로 인해서 진격을 한다. 티아베리스는 이런 무모함에 원정에서 빠져버린다.진격 끝에 물이 떨어진 기 드 루시안은 살라딘의 공격을 받아 군대를 모두 잃고 자신은 포로로 붙잡힌다. 패전 소식을 들은 발리안은 티아베리스와 예루살램을 방어하려 하지만 티아베리스는 끝내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 버리고, 혼자서 예루살램을 방어하게 된다.전투 씬에서 발리안의 전략을 보고 앞서 쌓였던 지루함이 싸악 날아가 버렸다. 치밀하게 짜여진 계획 하에 살라딘의 사라센인 군대를 차근 차근 막아가는 모습은 정말 장대했다. 발리안의 처절한 저항은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던 살라딘의 전의를 상실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둘은 협상을 해서 예루살램을 넘기는 대신에 예루살램 안에 거주 하던 모든 주민의 생존권을 얻어낸다.유럽으로 넘어간 발리안은 고향으로 시빌라와 함께 돌아가서 대장장이 일을 한다. 그에게 영국의 왕이 찾아와 장군이 되지 않겠냐고 묻지만 발리안은 “저는 대장장이입니다.” 라는 말을 하며 거절한다.여기 까지가 킹덤 오브 헤븐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극장판의 킹덤 오브 헤븐은 솔직히 내가 보기에도 가위질이 많이 된 것 처럼 보였다. 너무 빠른 진행과 매끄럽지 못한 인간관계 등등이 여럿 보였다. 발리안과 기 드 루시안의 대립도 그렇고, 발리안이 고드프리에게 전략 전술등을 배우는 것, 발리안과 시빌라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 등이 너무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느낌이 없잖아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미국에는 감독판이 출시되어 46분이 추가된 무려 191분짜리 감독판이 출시됐다고 한다. 편집된 부분까지 같이 봤다면 두고두고 기억할 영화가 됐을꺼란 느낌도 들었다.영화 첫 부분에 발리안은 아내의 목걸이를 움켜지고 자신의 머리와 가슴 언저리를 가리키며 지옥은 그곳에 있다고 말을 한다. 다른 곳이 아닌. 당시 기독교는 자살을 하면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지옥으로 떨어져버린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 말을 한 건지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다. 대략적으로 생각해 보면, 아내를 사랑했던 발리안이 아내는 다른 곳이 아닌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는 뜻에서 말한 것 같다.또 기억나는 대사 한 가지가 고드프리가 발리안을 기사로 임명하면서 한 말이다. "적 앞에서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 늘 용기있게 선을 행할 것 이며 목숨을 걸고 진실만을 말하며,약자를 보호하고 의를 행하라." 여기 까지 말을 한후 발리안의 뺨을 주먹으로 한 대 치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명심하라는 뜻이다! ". 고드프리가 말할때는 다 죽어가는 와중에 마지막 힘들 다해서 하는 말이라서 그런지 멋있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지만, 후에 발리안이 예루살램성을 수성할 때 무기를 들 수 있는 모든 사람을 기사로 임명하면서 이 말을 할 때는 발리안의 용맹함이 확실히 느껴지는 대사로 탈바꿈했다.또, 살라딘이 예루살램 근처에 진지를 만들고 있을 때 병사들에게 한말이 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통곡의 벽도, 아슬람 사원도, 예수가 죽은 성지도 아닌 이 성안에 살고있는 백성들이다." 백성들을 사랑하는 발리안의 마음이 잘 드러나는 대목인것 같았다. 그러고 전투가 끝나고 살라딘과 발리안이 협상을 하고 나서 발리안이 한 질문. “예루살램은 당신에게 있어서 어떠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까?” 라는 말이다. 살라딘은 “Nothing, Or Everything." 이라고 한다. ”아무 것도 아니다, 또는 전부 이기도 하지.” 라는 뜻이다. 발리안은 이 말을 듣고 흐믓한 미소를 지으며 성안에 들어갔고 잠시 후에 병사들은 환호 성을 지르며 발리안을 환영했다. 살라딘의 이 말이 정말 내 기억에 남았다. 가장 소중하다는 뜻을 이렇게 말 할 수도 있구나... 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