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
Bronze개인인증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9
검색어 입력폼
  • SSM 정책시행에 대한 보고서
    Super Super Market,누구를 위한 제도이며,규제는 합당한가.< 목 차 >Ⅰ. 서론------------------------------------------------------------------ p.21. 연구목적2. 문제제기Ⅱ. 본론------------------------------------------------------------------ p.31. 등장배경 및 확산과정---------------------------------------------------- p.31) 개념 및 정의2) 확산과정2. SSM의 특징------------------------------------------------------------ p.41) 점포 및 운영특징ⅰ. 규모의 경제(Economies of Scale)ⅱ. 경험곡선(Experience Curve)ⅲ. 상품전략(Merchandising Strategy)ⅳ. 정보기술(Information Technology)3. SSM 성장 현황 및 시장에의 파급효과-------------------------------------- p.51) 성장 현황과 파급효과2) SSM에 대한 정부의 규제 도입 과정ⅰ. 갈등의 확산ⅱ. 규제의 필요성과 도입과정4. 규제 실시 후, 유통업체들의 매출증감률 현황--------------------------------- p.85. 입장에 따라 다른 견해-------------------------------------------------- p.101) 기업의 입장2) 중소상권의 입장3) 소비자의 입장4) 정부의 입장6. SSM 규제에 대한 입장-------------------------------------------------- p.11Ⅲ. 결론----------------------------------------------------------------- p.13Ⅳ. 참고문헌----------------------------------------------공급하는 종합소매점의 형태로 운영되는 SSM이 증가하는 추세이다.)2) 확산과정SSM의 확산은 2008년부터 촉발되었다. 2006년도에 대형마트) 점포수는 대형마트의 포화시점으로 간주되던 300개 점포가 넘어섰으며, 2007년도에는 377개, 2008년에 487개, 2009년 7월 현재 594개로 집계되어 SSM의 급격한 시장 확장이 이루어 졌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2007년 말부터 대형마트를 소유하고 있는 대기업은 기업 성장의 견인차 역할로서 중소형 매장의 SSM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이며, 2008년도부터는 이러한 전략을 실행화 시킨 것으로 보인다.) SSM의 도입 및 성장과정?연 도내??? 용1993년새로운 형태의 소매점으로서 대형마트가 우리나라에 처음 개점됨.(이마트 창동점)1996년1996년 유통시장의 개방으로 외국계 할인점이 우리나라에 진출, 이후 대형마트는비약적으로 성장함.2003년매출액과 점포수의 증가세가 둔화, 유통대기업들은 SSM 사업에의 적극적인 진출로활로를 모색.2007년상위 3사(롯데쇼핑, 롯데마트), 삼성테스코(홈플러스 익스프레스), GS리테일(GS슈퍼)에 의해 본격적으로 진행된 출점 경쟁으로 SSM 점포수는 급속하게 증가. SSM 매출액 및 점포수 추이출처 : 국회입법조사처(2009). 대규모 소매점에 대한 규제: 쟁점과 대안 , 현안보고서, 제41호, pp. 3,에서 볼 수 있듯이 2006년 이후 SSM은 급격히 증가했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SSM이 소비자에게 다양한 편익을 제공하여 기존의 대형마트들 보다 소비자의 효용에 만족감을 주었다. 한편, 소비자를 대기업 중심의 대형마트로 발걸음을 옮기게 함으로써 주변 중소상업권을 악화시켜 많은 중소 상인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2009년에는 중요한 사회적 이슈도 대두되었다. 최근 SSM의 급증은 저렴한 가격에 좋은 질의 제품을 제공하여 소비자들의 효용과 후생을 증가시켜주고 있지만, 반대로 중소 상업권의 경제력을 쇠퇴시키는 요인이 되어왔다.2. SSM장을 운영하고 있다.(이마트는 이들이 시장에 진출하기 이전부터 대형마트로서 존재해 왔다.) 이들 3사가 운영하고 있는 SSM 수는 400개정도로써 SSM 시장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 SSM은 2000년대 초반만 해도 그 수가 미미한 상태였다. 그러나 홈플러스 익스프레스가 SSM 확장대열에 가세한 2006년 이후로는 급격히 점포수가 신장되었다. 점포수의 갑작스런 확장과 함께 중소유통업체들의 반발을 거세졌고 2009년 이후 SSM 문제는 사회이슈도 대두되어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SSM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이유는 취급하는 품목이 생필품 또는 식료품이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당장 내일 없으면 안되는 물품들이 주류를 이루는 SSM은 이제 더 이상 먼 곳에 존재하지 않고 근린 상권 내에 입지함으로써 기존의 전통시장에서의 질보다 저렴하고 깔끔하게 제공된다. 게다가 여러 가지 품목들이 서비스로 몇 배로 제공되기도 한다. 소비자들은 단연 새로생긴 대기업형 슈퍼마켓으로 몰린다. 적어도 대기업 제품들은 그 이름에 상응하는 적어도 본전은 한다는 굳건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엄청 싱싱한 것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기한이 지난 것은 결코 팔려고 두지 못하다는 것을, 눈 가리고 아웅하기도 하는 전통시장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소비자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생필품이 주요 품목을 이루고 있는 SSM을 이용하는 소비자들은 가끔 구매하는 비싼 품목이 아닌 조금씩 자주 구매해야하는 식료품 및 생필품을 사기위해 조금 더 믿음직스러운 기업형 슈퍼마켓을 찾고 있다.소비자들의 이러한 심리와 이를 간파한 대기업간의 판매 전략은 서로 맞물려 전국 몇 백 개의 SSM을 등장시켰으며 이는 기존에 자리 잡고 있던 상권을 모두 몰살시켰다는 항의를 받고 있다. 또한 기존에 어마어마한 평수를 차지하며 조금 떨어진 곳에 존재했었던 SSM이 이제는 평수를 줄이고 근린시장에 침투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는 중소유통업체들의 강한 반발을 사고 있으며 대기업의 진출은 내수시장에서 역시 빈익빈 부익부를 부추기는 결과를 가 유통업체 매출 증감률 현황출처 : 지식경제부(2012), 「주요 유통업체 매출동향」, 주요 유통업체 매출 증감률 현황출처 : 지식경제부(2012), 「주요 유통업체 매출동향」,주요 유통업체 매출 현황 지표 개념 및 의의는 아래와 같다.와 은 주요 유통업체(백화점.대형마트 각 3사)의 소비동향 파악을 목적으로 매월 이들 업체의 물가상승분이 반영된 경상 매출액을 기준으로 조사.분석한 것이다. 는 의 수치를 그래프로 나타낸 것인데 여기서 말하는 대형마트 3사는 롯데마트, 홈플러스, 이마트를 백화점은 롯데, 현대, 신세계를 나타낸다. 그 중에서 백화점보다는 대형마트를 눈여겨 보도록 할 것이다. 여기서 나타내는 수치는 물가상승분이 제거된 불변가격지수가 계절 조정된 지수를 사용하는 통계청 수치와는 다소 상이할수 있다.주요 유통업체 매출 현황 의의 및 활용도로서는 주요 백화점 및 대형마트 각 3사의 매출액의 증가율 및 전망, 상품군별 매출액과 소비자 구매패턴을 분석하여 매월 조사ㆍ분석 결과를 정책자료로 활용하고, 정보를 제공하며, 지식경제부 보도자료에 배포하고 있다.2012. 4월 주요 유통업체 매출동향을 보면 대형마트·백화점 모두 전년 동월대비 매출이 감소된 것을 볼 수 있다. 전년 동월대비 매출증가율은 대형마트는 2.4%, 백화점은 3.4% 감소하였다.대형마트는 미국 소의 광우병 발병과 수산물 가격의 상승, 의무휴업 실시 등에 따른 영향으로 매출 2.4% 감소되었고, 백화점은 주5일제 수업에 따라 아웃도어 및 스포츠용품 판매는 신장되었으나, 전년대비 높은 평균기온과 윤달의 영향으로 의류 부문과 혼수용품(가전제품)의 판매 부진이 매출의 3.4% 감소를 초래했다. 대형마트 상품군별 매출증감률 추이출처 : 지식경제부(2012), 「주요 유통업체 매출동향」,대형마트의 주요 상품군별 동향을 살펴보면 와 같다. 상품군별 동향은 대형마트만 살펴보기로 하겠다.스포츠(4.1%)의 매출을 제외한, 가전문화(△6.1%) · 잡화(△4.7%) · 식품(△3.3%) · 의류(△1.7%) ·다.6. SSM 규제에 대한 입장IMF 이후 대형 할인마트에 밀려 몰락했던 대형 슈퍼마켓이 장기 불황 속에 주부들의 알뜰 소비패턴에 맞춰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다. 과거 주로 아파트 지하상가에 있었던 소규모 슈퍼마켓은 상당수 퇴출되었지만, 대기업들이 운영하는 SSM들이 안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대형마트와 편의점 사이의 틈새시장을 파고들고 있다.기업형 슈퍼마켓인 SSM은 대기업이 가진 고급스럽고 안정적인 이미지를 통해 소비자들에게 다가가 그간 쌓아왔던 고객과의 신뢰도를 바탕으로 조심스레 시장에 진출해갔다. 소비자들은 수시로 애용하고 장을 보아야 하는 생필품과 식료품의 품목을 주로 마트에서 이용하기 때문에 기업형 슈퍼마켓은 빠르게 자리잡을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매장 크기와 다양하게 진열되어있는 많은 양의 제품들은 소비자가 한 곳에서 필요한 제품들을 다량으로 구매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소비자들을 위한 할인이라든지 바우처, 적립, 넓은 주차공간 등의 서비스를 골고루 제공하고 있다. 또한 SSM 공간을 위한 건물에는 그 외의 다양한 업체들이 즐비하여 이용을 더 간편하게 하고 있고 그 안의 업체들도 함께 공생하여 이익을 취하고 있다.그러나 SSM이 물론 소비자들에게 편익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기존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여러 가지 중소유통업체들은 이러한 SSM이 들어서는 것에 골머리를 앓고 있으며 그들이 미칠 영향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높고 저항심 또한 강하다. 유동인구가 많고 근린상권에 위치하여 대기업 브랜드라는 신뢰감을 통한 후광효과, 규모의 경제를 이용한 질 좋고 저렴한 가격 경쟁력, 정보 분석에 기반한 상품 등 SSM가 가진 특성은 기존의 작고 허름한 동네의 슈퍼나 가게, 편의점 등에 비해 보다 높은 인지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부분들이 어우러져 SSM의 시장진출을 더욱 확대시키고 작은 기존의 가게들보다 월등한 편익을 제공하고 있다. 이들은 대기업을 등에 업고 중소유통업체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이다.
    경영/경제| 2012.09.23| 16페이지| 2,000원| 조회(295)
    미리보기
  • 일본의 10분류 역사
    10분류 방식에 의한 ① (기원전 1만 3천 년 경부터 기원전 300년)② ③ ④ (奈良時代, 710년-794년)⑤ :(平安時代, 794년-1185년)⑥ (1185년 ~ 1333년)⑦ :⑧ :⑨ :⑩ :① (기원전 1만 3천 년 경부터 기원전 300년)석기 시대의 구분으로는 중석기에서 신석기에 이르는 시기에 해당된다. 지역에 따라 생활 전략은 다르나, 풍부한 자연환경의 혜택을 최적화하여 수렵과 채집을 기초로 한 사회로서 다양성과 상징성이 풍부한 토기문화를 발달시켰다. 유적의 수와 토기형식의 다양성으로 보면, 조몬 문화는 일본 동부에서 더욱 번영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삼림의 생산성과도 관계가 있다고 여겨진다. 교정탄소연대에 따르면 가장 오래된 토기는 16,000년 전 정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얀가도리아스기를 지나고 토기의 형태가 다양화하여 전형적인 조몬 문화가 발달하였다. 수렵과 채집을 기초로 한 사회로서 활과 화살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지면을 50-60 정도 파서 주위에 여러 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덮어 만든 수혈식 주거가 일반적이었고 4-5명에서 10명 정도가 생활 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여 가족이 공동체를 형성해 공동생활을 하였다. 산나리 마루야마가 대표적 집락유적이고 굴장의 풍습을 지니고 있었다.② 기원전 3 세기 경이 되면, 고도의 농사 기술이 필요한 쌀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경문화가 북부 규슈 지역에서 시작되어 전 열도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이 시기에는 도구도 목기와 석기 대신, 금속기로 대체되어 청동기 제품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북규슈 지역에서 출토되는 반월형석도, 유단석부 등의 간석기와 민무늬 토기도 한반도 남부 지역과 동일하다. 이렇게 일본 열도에 초기 농경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고도의 농업 기술이 갑자기 나타났다. 새로운 문화는 벼농사와 금속기의 사용을 특징으로 하며 고온에서 소성한 얇은 적갈색 경질 토기가 나타난다. 벼농사는 규슈 북부에서 시작되어 급속하게 확산되었으며 채집하던 단계에서 계획적으로 생산하는 지의 약 400년을 가리킨다. 고분은 가운데 열쇠구멍처럼 생긴 구멍이 있는 봉분 주위를 해자(垓子)로 둘러싸고 있다는 특징이 있고, 분구(墳丘)의 형태에 따라 원분(圓墳), 방분(方墳),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으로 구분한다. 원분은 고훈시대의 전기에, 방분은 후기에, 전방후원분은 중기에 주로 축조되었다. 또한 전기는 야마토 조정의 발전기, 중기는 중흥기, 후기는 쇠퇴기에 상응한다는 점과 처음에 야마토에서 발생하여 점차 주변지방으로 파급되어 갔다는 점에서 볼 때 야마토 조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훈시대에는 철기가 보급되고 관개(灌漑) 기술이 발달하면서 벼농사의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계급의 분화가 촉진되었다. 이중 사제 역할을 하던 수장이 정치적 지배자의 지위를 얻어 소국가의 지배자로 성장했는데, 이들이 바로 거대한 고분의 주인들이다. 남아있는 고분의 규모와 출토된 유물로 보아 당시 일본사회가 많은 노역자를 동원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지배자가 있는 조직된 사회였고, 이 지배자는 기마무사들로 지금 왕실의 조상으로 추측된다. 대표적인 출토유물은 토기 하니와(埴輪), 칼, 곱은옥, 청동거울, 무기, 갑옷·투구, 마구(馬具), 장식품 등으로 전·중·후기마다 각각 출토된 유물이 다르다. 8세기 초부터 점차 7, 8미터나 되는 높은 분구를 쌓을 노동력 문제와 화장풍습의 일반화에 따라 고분은 거의 소멸해 버렸다. 이로써 고훈시대도 막을 내렸다.④ (奈良時代, 710년-794년)나라 시대는 넓은 의미로는 710년 겐메이 천황이 헤이조쿄(平城京)로 천도한 때부터 794년 간무 천황이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할 때까지의 84년의 기간을 말하고, 좁은 의미로는 710년에서 784년에 간무 천황이 나가오카쿄(長岡京)로 천도할 때 까지이 74년의 기간을 가리키는 일본역사의 시대구분의 하나이다. 헤이조쿄는 중국의 수도 장안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도시로, 공무원이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정치도시였다. 헤이조쿄로 천도하는 데는 후지와라노 후히토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는데, 이 문화를 쇼무 천황 때의 연호를 따서 덴표 문화(天平文化)라고 하고 나라 시대는 이 문화가 개화한 시기이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이 시기는 이른바 율령시대(律令時代)의 최성기에 해당하여 중앙집권적 정치제도가 완성되었다. 문화적으로는 백제(百濟)와의 교류가 가장 왕성하였고, 또 백제 멸망 후 그 유민(遺民)의 유입과 전후 여섯 차례에 걸친 견당사(遣唐使)의 파견 등으로 백제 및 대륙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 시기이다. 그런 반면 거국적인 조사 조불(造寺造佛)의 대사업은 국민생활을 도탄에 빠뜨리고 국가재정을 파탄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⑤ :(平安時代, 794년-1185년)교토에 세워진 헤이안쿄가 가마쿠라 막부가 설립될 때까지 정치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헤이안 시대라고 한다. 헤이안 초기에는 천황의 통치가 이루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귀족, 승려의 세력이 커지면서 후지와라씨 정권에 의한 부패가 횡행했다. 정치에 불만을 가진 하급귀족의 반란이 일어나고 도적들이 설치는 시대가 되고 있었고 이들을 제압하려 커진 정치세력이 무사 계급이다. 귀족들을 대신해 무사의 정치가 시작되었고, 이런 상황은 다음 시대로 이어졌고 세기 후반부터 중세부담을 피하기 위한 농민의 유랑이 증가하였다. 칸무(桓武)천황은 794년에 헤이안쿄로 천도하고, 율령제 재건을 위해 12년마다 반전(班田)을 시행하고, 잡요를 경감하였다. 또한 농민병사를 폐지하는 대신 호족 자제들로 군대를 편성하고, 동북지방을 점령하였다. 헤이안(平安)천도부터 9세기말까지, 헤이안 전기에는 대학 기숙학교들과, 서민교육기관이 만들어졌으며, 한시문집과 관찬역사서가 계속 편찬되었다. 불교계에도 새로운 풍조가 일어 사이쵸(最澄)가 천태종(天台宗)을, 쿠카이(空海)가 진언종(眞言宗)을 열었으며, 신불습합(神佛習合)이 진행되어 신사의 경내에 신궁사(神宮寺)가 만들어졌다. 천태종과 진언종의 영향으로 산악가람이 늘어났으며, 나무하나로 만드는 불상조각이 유행하였고, 부처의 세계를 특이한 구도로 그린 만다라(曼茶羅)가 유행하였다시기이다. 무사계급이 천황, 귀족계급과 분리된 새로운 지배체제로 봉건정치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 시기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무신정권이 존속한 시대이기도 하다. 봉건정치는 그 후 에도 막부가 막을 내리는 1868년까지 계속된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헤이시(平氏)를 멸망시키고 일본 최초의 부케정권(武家政權)인 가마쿠라 막부를 창립한 1180년대부터 가마쿠라 막부가 망한 1333년까지의 약 150년간을 막부가 있던 소재지의 이름을 따서 가마쿠라시대라고 부른다. 다만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연대에 대하여는 학자에 따라 약 10년의 차이가 있다.이 시대는 정치적으로는 교토(京都)의 구게정권(公家政權:왕이 있는 조정의 정권)과 가마쿠라의 부케정권이 대립하는 가운데 점차로 후자가 강대해졌다. 사회 ·경제적으로는 전시대부터 내려오는 장원제도(莊園制度)의 테두리 안에서 지방관직인 지토(地頭)를 비롯한 지방의 무사들이 귀족과 사찰 등 장원의 영주와 대항하면서 그 봉건영주적인 지배세력을 확장 강화시켜 나간 시기이다. 문화면에서는 왕조와 귀족을 지지층으로 하는 구불교와 신흥무사 ·농민층에 기반을 둔 신불교와의 대립이 단적으로 나타내듯이 신 ·구 문화의 2원적 대립으로부터 점차 소박한 현실주의적 ·사실주의적 ·개성화적 경향이 출현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대외적으로는 고려(高麗) ·송(宋)나라와의 교역이 빈번하였으나 후에 원(元)나라가 건국되자 복속을 요구해 왔으며, 이를 거절하자 원나라는 두 번이나 침공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 시대는 다음 시대인 무로마치(室町)시대 ·센고쿠(戰國)시대와 함께 일반적으로 중세(中世)라고 하며, 또 에도(江戶)시대를 후기 봉건사회라고 부르는 데 대하여, 전기 봉건사회라고 부르기도 한다.⑦ :1336년 일본의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겐무정권(建武政權)을 쓰러뜨리고 정권을 잡은 때부터 1573년 아시카가막부(足利幕府)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멸망될 때까지 약 240년간의 시대를 일컫는다. 교토(京都) 무로마치(室町)에 궁전드는 시기까지를 무로마치시대라고 한다. 전대인 가마쿠라(鎌倉)시대까지는 천황을 받드는 구게(公家) 정권과 막부 정권이 양립하는 2원정치였으나 아시카가시대는 구게 정권을 물리치고 무가(武家)에 의한 단독정권을 수립한 것이 특징이다. 정치적으로는 고다이고 천황의 친정을 내세우는 남조에 대하여 고묘천황을 옹립하고(북조) 남조를 굴복시킨 권력의 확립기, 최성기, 쇠퇴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무로마치시대는 왜구(倭寇)가 가장 많이 발호하던 시기로 일본 서해안의 무사(武士)나 어민들이 선단을 만들어 우리나라와 중국 연안에서 해적행위를 자행하였다. 세종 때 쓰시마섬을 정벌하여 왜구 침범을 응징하고 매년 50척의 무역선 내조를 허용하여 공식적인 통상관계가 수립되었으나 왜구는 근절되지 않았다. 3대 쇼군 요시미쓰 때는 중국 명나라에 내조(內朝)하여 명나라로부터 처음으로 ‘일본국왕’의 칭호를 받았으며, 명나라와 교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문화적으로는 교토 기타야마[北山]에 세운 긴카쿠지[金閣寺]를 대표로 하는 기타야마문화[北山文化]와 히가시야마[東山]에 세운 긴카쿠지[銀閣寺]를 대표로 하는 히가시야마문화[東山文化] 등 무가문화가 개화하였고 동시에 서민계급의 대두에 따른 서민문화가 형성되었다. 오토기조시[お伽草子]·교겡[狂言]·렌카[連歌] 등 다소 외설적이지만 생기발랄한 문화였다.⑧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를 중심으로 도호쿠와 규슈에 이르는 지역을 평정하였고, 천하통일을 완수하였다. 그리고, 중세적 지배체계·지배세력을 배제·억제하는 데 노력하였고, 태합검지를 통하여 기존의 토지제도인 장원·공령제를 없앴다. 전국이 통일되면서 정치와 경제는 안정되었고, 다이묘와 무사가 중심이 된 모모야마 문화가 꽃을 피우게 된다. 또한 문란해진 신분제도를 재확립했으며, 실권자인 간바쿠(關白)에 오르게 되었다. 이러한 중 도요토미 히에요시는 영토확장에 꿈을 두어 임진왜란을 일으키지만, 전쟁기간 중 생을 마감하였고,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퇴하였다. 이후 도요토미 정권내의 실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다.
    인문/어학| 2012.09.23| 6페이지| 1,000원| 조회(89)
    미리보기
  • 학생인원조례
    질서와 자유, 책임의 사회- 학생 인권 조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서론 : 학생 인권 조례에 대한 상반되는 의견본론 : 조례의 내용과 이에 대한 의견-체벌 금지와 정책 참여결론 : 양날의 면을 지닌 조례와 우리의 행동새로운 교육감이 선출된 뒤로 학교에 많은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학생 인권 조례안을 제정하고, 무상급식제도를 시행하면서 여러 논란과 갈등의 불씨가 커지고, 특히 체벌금지제도가 성립되면서 갈등은 고조되었다. 혹자는 학생 인권 조례가 정식적으로 확립되고 실시되면 교사의 교권이 흔들려 학생들의 지도가 자유롭지 못해 학습에 방해가 될 우려도 있다고 말한다. 또 다른 혹자-주로 학생들은-는 학생 인권 조례가 그동안 다소 강압적이었던 학생들의 인권과 자율성에 대한 새로운 돌파구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제정된 안이라기보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소통이 원활한 수평적 관계로 전환될 수 있는가, 아니면 학생 인권 조례안이 악용되어 교사와 학생 간 수직관계의 변화로 교사의 권위가 땅으로 추락해버리고 말 것인가의 문제의 미묘한 갈림길에 봉착해있다.학생 인권 조례에 대해 간략히 설명을 하자면, 이는 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이를 타인이 침해할 수 없도록 명확히 규정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내용은 체벌 금지와 두발 및 복장 규제 제거, 야간 자율학습 폐지 및 자율화, 종교의 자유 보장, 학교 운영 정책 제정 시 학생 참여 보장 등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이는 학생들의 자율성과 학교의 주인으로서 책임감을 갖게 하기 위한 항목들이다. 조례에 포함된 내용은 모든 학교가 따라야 하며, 이는 국회가 법으로 막지 않는 한 공포된 지역에서는 의무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몇 백 년 전 미국과 프랑스가 자유를 위한 전쟁을 겪으며 만든 문서에도 '모든 인류는 침해할 수 없는 권리와 자유를 지니며, 이는 타인에게 양도하거나 타인이 빼앗을 수 없다.' 라는 내용이 들어가 있는 만큼, 학생들의 인권을 인정해주는 것은 물론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소위 인원의 존중이라는 명목 하에 얼마만큼의 관용을 베풀 것이며, 또 얼마만큼의 통제를 가할 수 있는가. 즉, 범위를 내리기에 모호한 부분이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물론, 지나친 억압이나 강요는 질풍노도의 시기인 청소년들에게 반항심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통제하는 수단으로서 존재하는 ‘체벌’이라는 것이 ‘폭력화’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이 제정안의 한 부분이겠지만, 생각해보면, 학생 인권 조례라는 복잡, 미묘한 제도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무모하고,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학생위주의 제정안인 것 같다. 그렇게 따지면, 교사 인권 조례도 함께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학교 측이나 교사를 문제 삼고 학생들의 인권을 보호해주려 제정된 법안이라면, 힘없이 따라야 하는 교사들의 인권은 왜 무책임하게 외면하는 것일까.가장 우려되는 항목은 체벌 금지에 관련된 사항이다. 학생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교사는 학생들에게 경우와 필요에 따라서 체벌을 해왔다. 때때로 잘못이 없는 학생이 체벌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겠고, 오해가 부른 잘못된 체벌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일이든 장단점이 있기 마련인 것처럼, 오해로 인한 체벌이 설령 있었다하더라도, 오해의 체벌보다는 필요한 처벌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필요한 처벌로 인해 학생을 통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체벌을 하지 말라는 조항을 보고 느낀 것이 하나 있다. 체벌을 하지 못하게 법으로 지정해버린다면, 체벌 이외의 교사로서 내세울 수 있는 통제안도 함께 지정해 줘야한다. 일종의 대체제의 개념인데 이를 마련해주지 않은 상태에서 금지령부터 내리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는 대체에너지를 개발해놓지 않고, 석유를 고갈시켜버린 것과 비슷하다 생각한다. 그것의 악영향의 예가 바로 교사에 대한 몇몇 몰지각한 학생들의 희롱이나, 업신여김이다. 교사는, 이를 보고도 조항 때문에 체벌을 가할 수 없다. 교사의 권위가 없고, 교사의 위엄을 느낄 수 없는 곳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배울 수 있다는 걸까. 배움터의 의미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체벌의 대체방안을 마련해주든가, 아니면 교사에 대한 경각심과 존경심을 뼛속 깊게 새겨주든가, 이 방안이 통과 되어 버린 시점에서 학생들뿐만이 아닌 교사들에게도 인권조례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다. 배움을 위해 배움터에 왔지만, 그들이 만약 준비되지 않은 학생들에게라면, 인권조례도 쓸모없는 제정안이 아닐까.당연한 말이지만 학생 인권 조례안에서도 받아들여야 할 사항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학생들이 학교 운영 정책 제정에 참여하는 것을 보장하는 내용이다. 학생들은 학교의 주인이고, 주인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생활 터전에 대해 결정하고, 적어도 이에 대해 의사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학생들은 학교생활에 불만을 가지게 될 것이고, 더 이상 올바르고 성실한 학교생활을 해 나갈 수 없게 될 것이다. 학생들이 학교 운영 정책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게 된다면 학교는 학생들에게 보다 더 만족스럽고 자신들이 만들어낸 자유와 질서에 책임을 지는 법을 배우는 곳이 될 것이다. 조례의 받아들일 부분이 있는 만큼 약간의 개선해야할 부분도 필요한 것 같다. 조항만을 제시하는 것은 조금 무모하고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고, 조금 완화하거나 대책을 마련하는 쪽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인문/어학| 2012.09.23| 2페이지| 1,000원| 조회(84)
    미리보기
  • 친미냐 반미냐 서평 평가A+최고예요
    우리는 미국문으로 나와서 미국문으로 다시 들어간다.한국사회에 친미와 반미는 늘 공존해왔다. 어느 나라 건 양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희한한 것이 일본은 미국에 대해 꾸준히 친미적이었다. 하물며 전 세계를 반미로 몰고 갔던 이라크 전쟁에도 반응하지 않고 일본에 대한 친미의식은 높은 퍼센트를 차지했다. 일본이 다소 다른 나라들 특히 아시아 국가들 중 미국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저자는 점령기에서부터 고도경제성장기까지에 초점을 맞추면서 막말에서부터 1970년대까지 일본에서의 ‘미국’의 수용과 반발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1910년대까지 ‘미국’은 근대일본의 입장에서는 외부의 존재였다. 그것은 때로는 ‘자유의 성지’로 때로는 ‘대치하는 열강’으로 간주됐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미국’은 다이쇼초기까지 일본 사회 내부의 존재라기보다는 타자로서의 존재였고, 사람들의 일상을 작동하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1920년대 이 후 변화가 생긴다. 미국의 다양한 문물들이 다량 도입되었고, 그것을 차차 자신들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계층이 일본에서도 제법 등장하게 되었다. 그 후 등장하게 된 논단에서는 타자로서의 미국이 아닌 내부의 ‘미국’에 대해 재조명하게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바로 미국의 전부가 일본의 뇌리에 하나하나 침투된 것은 아니고, 무서운 위력으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힌 것은 바로 전후, 점령기 이후의 일이었다. 이 때 내부의 타자로서의 ‘미국’은 내부의 폭력으로서 먼저 눈에 보이는 형태로 존재하였고, 보이지 않는 시선으로서의 형태로 양면성을 가지고 접근해왔다. 전자는 무엇보다 미군 기지의 존재로부터 다가왔는데 기지 주변의 매춘문제를 수반했다. ‘팡팡’이라는 매춘부들의 존재가 당시 일본인들에게 현실 자각의 실마리를 주었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점령의 사실적 인정의 간접적 수단이 되었다. 이는 대부분의 일본 남성들에게 지켜줄 수 없는 분노로 채찍질 되었고 “겁탈당하는 일본”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면서 동시에 전후의 새로운 내셔널리즘이 구축되기도 했는데, 포스트 점령기의 좌익의 반미운동은 점령기의 여성들에 대한 인상과 “일본이 겁탈 당한다”는 담론에 뒷받침되었다. 하지만, 미국은 기지 외의 젊은이들에게 대중문화를 전파함으로써 새로운 문화의 구축의 발판으로써 젊은이들을 포섭해간다. 일본의 대중문화의 생산이 이 안에서 육성된 것이다. 새로운 대중문화의 생산에 힘입어 미국은 기지의 존재와 폭력으로서의 면모는 망각시킨 채 일본에 녹아들게 되고 ‘팡팡’의 피해자적 문화는 즐기는 도시문화로 탈바꿈 되어 기억의 소거를 용이하게 했다.보이지 않는 시선으로서의 ‘미국’은 좀 더 자신을 ‘점령자’로서의 지위를 지우려 주의를 기울였다. 1945년 9월 27일에 촬영된 천황과 맥아더의 회견사진에서 일부 일본인들은 이를 굴욕적으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지만 미국은 이를 점령자의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일본을 보호할 의지가 있다는 약간은 조작된 의도를 밝힌다. 여기서 미국식 생활양식의 사물들이 일본의 거실이나 부엌에 침투하여 여성들의 ‘주부’로서의 주체화를, 남성들에게도 기술적인 주체화를 권유하며 아이덴티티를 재구축한다.일본도 역시 친미와 반미를 함께 형성시켜왔다. 막말에 미국은 이상화였으므로 명백한 친미의 물결을 탔으나, 천황제 국가체제의 확립 시에는 잠시 멀어져 태평양을 사이에 둔 ‘적국’으로서 인식되었다. 그러나 다이쇼 데모크라시에서는 다시 문화의 침투로 동조하고 즐기는 친미적 성향을 띄게 되었다.일본은 미국에 원자폭탄 세례를 맞고, 종전을 맞는데, 당시 피해자로서의 의식이 강했던 일본에게 미국은 ‘적’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이런 당시 미국을 친미로 인식시킨 좋은 계기에는 미·일안보체제와 함께 자민당 정권 아래의 고도성장이 존재한다. 일본은 자연스레 경제적 번영을 미국의 덕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은 일본이라서가 아니라 중국의 공산주의 선언 때문에 아시아의 중추를 일본으로 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미국에게 일본은 그리고 일본의 발전은 공산주의 침공을 막을 군사적 방파제이며, 아시아의 개발경제 지탱의 중추에 적합했던 곳이었다. 그래서 군사적 역할은 오키나와를 비롯한 주변 국가로 분산하고 일본에는 경제적 부흥에만 전력을 쏟아 붓게 된 것이다. 경제적 부흥의 뒷받침으로는 55년 체제, 도쿄 올림픽, 오사카 박람회가 있었고 이들은 일본 고도성장에 큰 발판이자 버팀목이 된다. 미국은 군사적 역할을 담당시켰던 ‘오키나와와 주변 국가들’과 일상의식과 정체성을 재편시키려는 일본에게 확연히 다른 이미지를 보여준다. 결국, 일본은 미·일 안보에 의거하여 군사적 면으로도, 고도 경제 성장과 풍요로움의 경제적 면으로 ‘친미’를 지향하게 된다.1970년대 이후 일본에서 ‘미국’은 더이상 타자로 인식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 시점까지 일본 사회는 ‘미국’을 자신의 내부에 끌어들이는 동시에 ‘일본’자신을 타자화 했다. 그러면서 이 시점에서 일본 안의 ‘미국’은 낮선 타자가 아닌 익숙한 자신처럼 녹아들어 ‘미국’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고 자연스레 친미의 물결로 흘러가게 되었다. 1970년 대 말 이후 일본인의 거의 70퍼센트가 ‘미국’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이는 안정적인 친미사회의 모습이 분명하다. 이는 한국과 대만처럼 강요된 친미와는 확실히 맥락을 달리한다. 일본은 2000년 부시정권의 전쟁의 강행에도 이라크에 자위대를 파병했고, 미·일 동맹을 보다 강하게 재편했다. 점점 글로벌하게 재편되는 군사체제 속에서 일본은 미국에 대한 군사적 종속을 더 견고하게 하고 있다. 세계정세에 반미의 기운이 확산되고 있는데, 그동안 손잡고 서로를 감싸며 은폐해오던 미국과 일본의 과거 문제점에 대하여 그들은 더 이상 감추고 외면하지만은 못할 것이다. 이제는 서로가 감추고 있던 문제를 직시하고, 맞대고 반성의 기회를 가지는 것이 좋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생긴다.“나이키 신발을 신고 MP3에서 흘러나오는 팝을 들으며 피자를 먹으며 코카콜라를 마신다.” 우리의 일상적 모습이다. “이 발표의 펙트는 이것이고 컨퍼런스는 이것을 인용했어.” 우리가 자주 쓰는 용어다.우리는 미국 메이커를 신고 미국 노래를 듣고 미국 음식을 먹으면서 미국 언어를 섞어 쓰며 대화를 나눈다. 이런 미국문화와 미국언어의 범람 속에서 너무나도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하다는 듯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이젠 그것들을 빼놓고의 생활은 상상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지금 미국의 그늘에서 미국을 듣고 보고 먹고 마시며 근접해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미 자연스러운 미국의 사회화 문화와 정서의 홍수 속에서 한국에서의 미국의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 굳이 따져 친미일까 반미일까의 흑백논리로서는 분명 오류가 존재한다. 미국은 한국의 우방 국가임은 분명하고, 도움을 준 국가임에도 확실하다. 그러나, 한국이 미국의 우방국가인가라는 물음에는 확신할 수가 없다. 단지 놓치기 아쉬운 존재인지,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나라인지 그것에 대한 확신은 없다. 미국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은 아마 친미일 것이다. 친미일 수밖에 없으며 친미이여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식적인 입장을 제외하고 친미와 반미의 문제는 선택권의 문제도 답이 있는 문제도 아니다. ‘미국’이라는 거대사회는 이미 우리가 통찰을 시도도 하기 전에 우리 안에 파고들어 둥지를 틀었기 때문이다. 이미 이성적 통찰보다는 감성적인 시선으로서 미국은 우리의 감정선 상에 무의식적으로 파고들었다. 2002년 파주에서 여중생 두 명이 미군의 장갑차에 깔려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대규모의 촛불시위가 열렸고, 국민의 감정의 상당수는 ‘반미’로 치우쳐있었다. 광우병 파동 때도 미국산 수입 쇠고기에 대해 어마어마한 반대가 있었고, 대통령이 수입 허가를 내리자 ‘반미’는 물론이거니와 대통령에 대한 불신도 높아져 갔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일상생활 속에서는 팝을 듣고 랩을 하고 영어를 혼용한 언어를 사용하며 햄버거와 피자를 먹고 있었을 것이다. 약간의 보이콧이 진행되는 것 같았으나 그것은 얼마가지 못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를 범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좋든 싫든 이미 우리의 뼛속깊이 미국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힘의 논리상 미국은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임이 확실하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힘으로 전쟁이 끝났고, 경제발전의 측면에 미국이 기여한 부분이 적지 않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자국의 이익 없이 힘없는 작은 나라를 도와준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불 보듯 당연한 일이다. 미국을 업고 얻은 상당한 부분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잃은 것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미국의 힘 덕으로 끝난 전쟁에 우리나라는 반으로 갈렸고,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두 학생에 대한 미군의 인도적인 죗값도 치르게 할 수 없었다. 비인도적인 전쟁에 한국 군인들이 동원되었고, 그로 인한 한국 민간인의 피랍과 참사도 피할 수 없었다. 북한으로부터의 보호를 명분으로 들어와 있는 주한미군의 주둔이유는 중국과 러시아 세력의 견제 때문임을 우리는 알고 있을 것이다. 알지만 우리는 인간적인 것을 잃어가면서도 미국이라는 거대국가를 버릴 형편이 되지 못한다. 결국 약자의 비난성 화살은 미국도 미국이지만, 결국 내부인 한국 정부에게 쏟아진다. 정부대책의 책임이라는 피할 수 없는 수많은 화살들의 공격을 받게 된다. 결국 한국 사회에서 미국은 ‘친미’와 ‘반미’의 이중성이 공존 하고 있다. 결코 떼려야 뗄 수없는 관계인 셈이다.
    독후감/창작| 2012.09.23| 4페이지| 1,000원| 조회(120)
    미리보기
  • Making connections The Teenage Brain
    Making connectionsThe Teenage Brainp. 216-2186-2 청소년기의 뇌사람들은 청춘의 매우 긴 시간을 보낸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어린시절에서 어른시절로 가게되고 사람의 뇌는 계속해서 발달한다. 부모님, 선생님, 그리고 과학자들은 청춘과 청소년기, 자주는 어른들이 하는 것보다 더 많은 다른 상황에 대한 반응과 정보를 갖고 있다. 청소년들은 아마 더 감정적이고 때때로 판단이 약하다. 최근까지 과학자들은 호르몬의 단계안의 극적인 변화가 청소년 행동의 원인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새 발견은 단지 호르몬만의 이유가 아니라고 밝혀졌다. 새 기술은 우리에게 뇌와 그것의 활동의 이미지를 좀 더 명확하게 해준다. 이 이미지들은 청소년의 뇌는 어른의 뇌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차이는 왜 어른과 청소년의 행동이 다른지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뇌 연구에서 청춘시기에 뉴런성장의 폭발이 있다고 밝혀졌다. 그러나, 이 성장은 오직 뇌의 몇 부분에서만 발생하는 것이다. 언어, 시각, 공간 능력을 제어하는 뇌엽 안에서의 발달은 이미 이 시기에 완성된다. 대조적으로 집행, 판단, 감정 반응을 제어하는 뇌의 부분은 여전히 성장한다. 예를 들어 청소년들은 종종 먼저 생각하지 않고 행동을 먼저 취한다. 이것은 특히 긴장 많은 상황에서 나타난다.뇌 연구는 십대들의 감정적 반응이 그들의 뇌 발달과의 연관이 있다고 제안한다. 청소년들은 그들의 감정의 이해를 잘하지 못한다. 한 연구결과에서는 어른과 십대들의 얼굴그룹을을 나눠 반응을 요구했다. 그들은 만약에 사람이 행복하고 화나고 슬프고 우울한 반응이 있다면 얼굴에 보여야만 했다. 청소년들은 어른들과 비교하여 이 시험에서 나쁘게 수행되었다. 그 과학자는 어른과 청소년 뇌의 MRI 이미지를 이 연구에서 조사하였다. 그들은 두 그룹이 그들의 결정을 내릴 때 각기 다른 부분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청소년들은 감정과 관련된 뇌를 많이 사용하는 반면에 어른들은 판단과 집행부분의 뇌를 많이 사용한다. 과학자들은 이것이 청소년들이 때때로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오해를 하는 이유라고 믿는다. 그들은 말한다. “나의 선생님이 나를 미워해요” 또는 “ 내 남자친구가 나에게 화났어요” 이것들이 비록 진실이 아닐지라도.어린이가 어른이 되므로 그들은 독립을 하고 익숙치 않은 상황을 겪고, 새 경험을 하는것이 매우 중요해진다. 그러나 때로 이것은 청소년들이 위험한 행동에 몰두시키기도 한다. 세계의 모든 부모님들은 그들 청소년들이 언제나 좋은 판단을 하지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부모들은 종종 그들에게 “무슨 생각으로 그 일을 한것이니?” 라고 묻는다. 청소년이 좋은 판단을 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의 불완전한 뇌의 발달 때문이다. 청년기때 다른 이유는 호르몬의 중요한 증가가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호르몬의 높은 레벨이 때때로 청소년들에게 위험하거나 위기의 상황을 지도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어렵고 익숙치않은 상황에서 수행하고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불행하게도 이 능력을 청소년의 뇌는 아직 완전히 발달된 형태로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다른 사실은 청소년들이 좋은 판단을 할 수 없는 이유가 수면부족이라는 것이다. 청소년들은 종종 늦게 잠을 자고 이는 다음날 아침 일어날 수 없다는 결과를 가져온다. 과학자들은 청소년과 어른은 생물학적 시계가 다르다고 밝혀왔다. 매일 밤, 우리의 화학적으로 안정을 취해야 하고 이는 우리를 잠들게 한다. 화학작용은 청소년기 때는 더 늦게 방출되기 때문에 그들은 어른들이 잘 때 졸리지 않는 것이다. 대신, 밤 11시에 그들은 종종 일반적으로 깨있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날 아침 학교를 가야하므로 일찍 일어나야만 한다. 불행하게도 그들의 뇌는 빠르게 발달하고 있어서 그들이 어른보다 더 많은 잠을 필요로 한다. 많은 청소년들은 충분한 잠을 취하지 않아서 그들은 언제나 피곤하다. 그것은 잠의 부족이 기억, 판단, 그리고 배움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명확하진 않지만 과학자들은 거의 그것들의 영향은 긍정적이지는 않다고 확신한다.
    인문/어학| 2011.12.27| 2페이지| 1,500원| 조회(233)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1
1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1
  • A좋아요
    0
  • B괜찮아요
    0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02일 토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7:54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