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날의 검, 銀-『쾌락의 혼돈』을 읽고-서론인간 사회는 마치 안개 낀 강을 따라 흘러가는 위태로운 배와 같다. 강의 끝에 낙원이 있을지 천길 낭떠러지가 있을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즉 어떤 현상이 가져올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실패작이나 사회악으로 평가되던 것들이 결국에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게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것들이 결과적으로는 파멸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 파급효과는 후자의 경우가 전자보다 크다. 한족의 전성기를 구가한 명나라도 이러한 법칙에서 예외 일리는 없었다.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거래를 바탕으로 한 물질적 이익을 배척하고 농업을 통해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이상적으로 여겼다. 반면에 유교적으로 직업을 구분한 사농공상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인들에게 상업은 모든 직업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상인은 사회 구성원들로부터 환대를 받지 못했었다. 하지만 명대가 들어선 이후 홍무제의 폐쇄적인 농촌사회를 구현하려는 정책은 도리어 많은 잉여생산물을 발생시켰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급증한 자신의 잉여생산물을 시장에 내다 팔고 다른 사람의 잉여생산물을 구입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시장의 역할이 증대되는 상업화가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 정부의 은 본위 정책과 스페인, 포르투갈 등 서방세계로부터의 대규모 은의 유입을 통해 명대의 상업화는 절정을 달리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의도치 않게 시작된 명대의 상업화가 대량으로 유입된 은에 의해 급속도로 발달하기 시작한 것이다.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 사회에서 발생하는 현상의 결과를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은의 유입은 명나라 사회의 경제를 급속도로 성장시켰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본고에서는 은의 유입이 결과적으로 명나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고자 한다.명대 전기 상업의 발달명대의 지방 관리 장타오에게 고요하며 정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깊은 사고를 할 수 있던 겨울은 를 실시했다. 이갑제는 지방행정구역을 간소화 하였으며 공동체의 수를 100명 정도로 국한시켰고, 또한 공동체끼리의 교류를 제한했다.하지만 인위적인 방식으로 공동체 사이의 교류를 제한하는 이갑제를 유지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우선 인구가 전 국토에 골고루 분포될 수 없었다. 당시 황하 북쪽은 몽골 등 이민족의 세력이 명의 안보를 호시탐탐 위협했기 때문에 매우 위험했다. 그렇기 때문에 명나라 전체 인구의 90%가 비교적 비옥하고 안전한 황하 이남에서 살았다. 한정된 구역에 전체 인구의 90%이상이 거주했으니 균일한 인구로 구성된 공동체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존재할 수 없었다. 공동체는 점차 거대해졌고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의 교류는 활발해졌다. 자연재해와 기근, 과도한 조세정책 역시 이갑제를 유지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었다. 해마다 발생하는 자연재해와 기근으로 고된 삶을 살고 있는 당시의 백성들에게 과도한 조세는 삶을 더욱 어렵게 하는 요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되도록 가족의 수를 줄이거나 일부 가족 구성원을 호적에 등재하지 않으려 하였고, 심지어는 인구조사를 할 수 없는 산간이나 행정구역의 경계 지역으로 도망가기도 하였다. 당시의 인구조사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수많은 사람들이 이갑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였고, 결과적으로 이갑제는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즉 상업의 발달을 제한하는 요인이 유명무실하게 된 것이다.잉여생산물의 증가는 자연스럽게 시장 거래로 이어졌다. 농산품뿐만 아니라 직물, 도자기, 과실수, 화초 등 다양한 생산물이 자급자족을 넘어 시장에서 거래 되었다. 항구, 대도시 등지에는 점차 대규모의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이는 다시 인구의 유입을 유발했다. 또한 기근이 발생할 때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설치된 예비창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자 상인이 저렴한 가격에 쌀을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상업이 발달하고 점차 경제 부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 신흥 상인계층의 지위 역시 높아졌으며 전통적인 사농공상의 신분체계가 흔들리게구 반대편 유럽에서는 신대륙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15세기 이전에도 중국과 유럽 사이의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유럽이 무리한 십자군 전쟁에서 패해 육로를 통한 동방무역로가 막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지중해 무역에 참여하지 못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대서양을 가로지르려는 시도가 시작된다. 포르투갈에서는 황제의 후원 하에 바스코 다 가마가 출항하여 인도에 도착하였고, 스페인에서는 이탈리아 출신인 크리스토퍼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였다. 또한 마젤란의 항해로 인해 동방무역로에 필요한 항로들이 개척되어 동서방 무역로가 확대되었다.당시 명나라의 시장 경제가 형성되고 있었다고 해도 사적인 해상무역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인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먼 해상에서 대규모 밀수를 시도했다. 상인들은 필리핀, 인도네시아, 일본 등지까지 배를 띄워 무역을 했는데, 중국 상품이 인기가 좋아 국내에서 거래하는 것보다 두 세배 이상의 가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상인뿐만 아니라 어부, 심지어는 정부 관리까지 밀무역에 뛰어들었고, 결국 대규모 밀무역 선단이 구성되기에 이른다. 이에 명나라 조정은 해상무역 금지조치를 해제하였고, 이를 계기로 하여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선두로 서구 상인들이 중국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1554년에는 포르투갈 상인들이 마카오를 기점으로 하여 중국과 해상무역을 재개하였고,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정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페인 또한 마닐라에 정착하여 중국과의 간접 무역을 시작했다. 이들은 중국에서 귀금속, 직물, 도자기, 가구, 향신료 등을 구입하였고 이를 유럽으로 가져가서 되팔았다. 당시 유럽의 귀족들은 중국 상품에 열광하고 있었기 때문에 몇 배에 달하는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유럽의 상인들이 중국의 상품을 구입할 때 지불한 수단은 은이었다.유럽 상인들은 중국에 은을 지불하기 위해 먼저 일본을 활용했다. 당시 일본은 조선에서 전해진 연은분리법을 통해 은의 생산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켰고, 또한 전국 시기에 막대한 양의 은이 유입되자 명나라의 상업은 더욱 발전하였고, 경제는 번영을 누렸다. 명나라 상업의 중심이었던 강남으로 유입된 은은 전국 곳곳으로 유통되었고, 조정은 무역을 통해 대량으로 유입된 은의 전국 유통을 바탕으로 은 본위제를 실시할 수 있었다. 명나라는 은 본위 제도를 도입하여 각종 세금을 은으로 받거나 관료, 군사들의 임금을 은으로 지불하기도 하였다.4. 부작용유럽과의 무역을 통해 남미의 은이 대량으로 유입되어 은 본위 제도가 도입되고 상업이 활발해져 경제가 성장하였다. 하지만 경제가 성장한 것 이상으로 명나라는 과도한 재정지출로 위기를 맞기 시작하였다. 16세기에 들어서자 몽골족, 여진족 등 북방 민족이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여 명을 위협하였고, 이에 명나라는 북방 세력을 막기 위해 거두어들인 세입의 2/3 이상을 국방비로 지출하게 된다. 또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며, 1596년에는 자금성에 대규모 화재가 발생하여 이를 복구하는데 천문학적인 은이 소요되었다. 당시의 황제였던 신종제는 천문학적인 재정지출로 허덕이는 상황에서도 황실의 권위를 세운다는 명목 하에 황세자의 혼례를 호화롭게 치러 재정 악화는 더욱 심각해졌다. 아무리 외국에서 유입되는 은의 양이 막대하다 할지라도 천문학적인 재정지출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다.교역을 통해 유입된 은을 바탕으로 명나라 경제가 발전하였지만, 동시에 수입되는 은에 지나치게 의존적인 것이 당시 명나라의 문제점이었다. 더 이상 은이 유입되지 않으면 경제에 큰 혼란을 일으킬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곳곳에서 흘러 나왔고, 이러한 걱정은 곧 사실이 되었다. 명나라와의 대외무역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스페인의 무적함대 아르마다가 영국함대에게 패배한 것이다. 아르마다를 통해 전성기를 누리던 스페인은 점차 몰락하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중국과의 무역 규모가 점차 축소되었다. 또한 일본은 은의 대중국 유출을 줄이는 정책을 시행한다. 일본 역시 중국과의 교역으로 막대한 양의 은을 유출시켰는데, 관들을 시켜 온갖 명목으로 백성들이 보유한 은을 수탈하는 이른바 광세지폐를 시행하였다. 광세지폐로 인하여 민간의 모든 농토가 은광으로 간주되었고, 관리와 농민, 수공업자까지 상인으로 간주되어 세금을 수탈당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환관들은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수탈하였다. 백성들은 은 부족으로 인한 물가 상승과 환관들의 수탈,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을 견디지 못하고 저항운동을 일으켰고, 저항의 물결은 전국으로 퍼져나가 점차 조직적인 세력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또한 은 본위제로 인하여 당시의 병사들은 은화로 임금을 받았었는데 은의 유입이 급격하게 줄어들자 정부는 병사들에게 임금을 지불할 여력이 없었다. 은 유입의 감소로 인한 만성적 재정적자, 기근과 환관들의 살인적인 수탈로 인해 발생한 전국적인 반란, 임금 체불로 인한 병사들의 사기 저하와 불만 증가 등으로 인해 명나라의 국력은 급격히 쇠약해져갔고 결국 후금의 세력을 막아내지 못하고 멸망하였다.5. 결론명나라 초기, 잉여생산물의 증가 및 다양한 제도적, 사회적 요인으로 인해 시장 경제가 형성되었고, 해상 무역 금지 조치가 풀린 뒤 시작된 유럽과의 교역을 통해서 유입된 막대한 양의 은은 시장 경제를 더욱 활성화 시켰다. 전국으로 유통되기 시작한 은은 명나라가 은 본위제도를 시행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고,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외부에서 유입되는 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재정적자가 심해졌고, 결국 스페인의 몰락과 일본의 정책 변화로 인해 은의 유입이 급격하게 줄자 명나라 사회는 큰 혼란을 겪었다. 명 왕조는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재정 적자를 줄이거나 물가를 안정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살인적인 수탈을 감행하여 민심을 잃게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병사들의 사기가 저하되는 상황에서 명나라는 후금의 공격을 방어할 능력을 상실하였고 결국 멸망하게 되었다.물론 은만이 유일하게 명나라의 경제와 사회에 영향을 끼친 요인은 아니다. 각종 제도적, 사회적 요인.
영화 에 드러난 1920년대 중국 사회의 병폐와 혼란서론는 6세대 감독 강문(姜文)이 2010년도에 제작한 영화로 1920년대 중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는 1920년대 사회 격변기의 어두운 모습을 지나치게 진지한 태도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특유의 해학과 위트를 적절히 사용하고 있다.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중화민국 8년, 즉 1920년대이며 장소는 가상의 지방인 아성현(鵝城縣)이다. 매관매직을 주업으로 하는 탐관오리 마방덕은 거금을 들여 현장자리를 사서 부인, 비서와 함께 군졸들의 호위를 받으며 아성으로 부임하러 가고 있었다. 물론 매관 매직의 주요 목적은 아성의 세금을 거두어 크게 한몫을 챙기는 것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주변 일대의 이름난 비적인 장곰보에게 습격을 당하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장곰보에게 현장자리와 아내를 넘겨주게 된다. 마침내 도착한 아성에는 마약, 인신매매 등 온갖 불법적인 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사병(私兵)을 부림으로써 아성을 장악하고 있는 지역 엘리트 황사랑이 버티고 있어 긴장이 유발되고, 자존심이 강한 가짜 현장 장곰보와 지역 엘리트 황사랑은 서로를 제거하기 위해 온갖 계략싸움을 벌인다.이러한 내용의 영화가 만들어 질 수 있었던 것은 1920년 중국 사회의 특징 때문이다. 매관매직을 하는 마방덕, 비적 장곰보, 새로운 성격의 지방 엘리트 황사랑. 이들 중 어느 한 요소만 빠지더라도 이 영화는 제작될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1920년대 격변하는 중국 사회의 혼란 속에 발생한 어두운 면을 대표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에서 찾아볼 수 있는 1920년대 중국 사회적 병폐 및 혼란과 이를 유발한 원인들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1900년대 초 중국 사회의 혼란1911년 신해혁명 직후 중국 대륙을 뒤덮은 전쟁과 폭력, 정치적 불안은 중국 경제를 초토화 시켰으며 수 많은 사람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했다. 청조 말기부터 시작된 행정의 부패와 공권력의 붕괴는 더더욱 심해져 이 시기에는 극에 달하 대대로 관리 되던 농업 시설들은 점차 파괴 되었고, 이로 인해 약간의 기상이변만 발생해도 농업 생산량은 크게 손실을 입었다. 청 말기 이후로 과거 당, 송 시기에 비해 자연재해가 크게 늘었는데 이는 행정의 붕괴로 인해 농업 시설들이 제대로 보수 되지 못한 이유가 크다. 이와 같이 정치적인 혼란으로 농업 생산량이 크게 줄어 농민들이 굶주림에 시달렸지만 국가는 이를 개선하고 빈민들을 구제하려는 의지와 능력이 모두 부족했기 때문에 농민들은 과거 강력한 왕권이 유지되던 시기보다 더 큰 고통을 받게 되었다. 또한 중국사회의 유교적 가치를 유지하고 강화 시키던 과거제도의 폐지, 열강의 침략과 외국 문물의 도입 등으로 인해 사회적인 변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요인으로 인해 다양한 사회적 병폐가 발생하고 혼란이 가중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현상으로는 군벌의 등장, 매관매직의 성행, 비적의 급증, 새로운 지역 엘리트층의 대두 등을 들 수 있다.2.1 군벌위안스카이, 장제스, 펑궈장, 장쉰 등의 초법적인 군벌들은 대륙 곳곳에서 할거하며 끊임 없이 전쟁을 일으켰다. 위안스카이의 사망 이후에는 더 많은 군벌들이 패를 가르고 나와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북양 군벌은 안휘파, 직예파, 봉천파 등으로 갈라졌고, 지방에는 산서 군벌, 서북 군벌, 신강 군벌, 운남 군벌, 사천 군벌, 계(桂)계 군벌 등이 있었다. 권력과 부는 모두 총을 가진 군벌의 손으로 들어갔고, 이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끊임 없이 전쟁을 일으키고 불법적인 행동을 일삼았다. 1912년부터 1923년 사이에 매년 평균 7개의 성이 전쟁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그 뒤 6년 동안에는 14개 성으로 확대되었다고 한다. 특히 여러 군벌을 제치고 실권을 장악한 돤치루이는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과 손을 잡는다. 일본 역시 돤치루이를 이용하여 중국에 괴뢰정권을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데라우치 내각은 돤치루이에게 엄청난 금액의 차관을 제공하였고, 돤치루이는 이 때 지원받은 차관으로 자신의 군대를은 1950년대까지 지속된다. 군벌에게는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대의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회개혁이나 경제건설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농민은 세금과 병력을 뽑아내는 존재였을 뿐이다. 에서는 영화 극 초반에 군벌의 한 무리가 마방덕을 호위하다가 비적이 나타나자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몰살 당하는 장면으로 등장한다.매관매직, 예징(豫徵)국가의 행정력이 무너진 틈을 타 군벌은 부를 축적하는 방법 중 하나로 매관매직도 일삼았다.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의 벼슬 자리를 돈을 받고 판 것이다. 의 마방덕 같은 자들이 매관매직의 수요자였다. 그들이 벼슬 자리를 원한 것은 명예에 대한 집착도 있었겠지만 금전적인 목적이 가장 컸다. 영화 초반 마방덕과 장곰보 사이의 대화를 살펴보면 마방덕은 관직을 사는데 20만이 들고 일년, 운이 좋으면 반년이나 한달 만에 두 배를 벌 수 있다고 한다. 또한 한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년에 두 번씩 8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매관매직을 했다고 한다. 물론 영화이기 때문에 과장된 측면도 있겠지만 당시의 매관매직이 성행했음을 유추할 수가 있다.그렇다면 그들은 투자한 금액을 어떻게 회수 했을까? 대부분의 성에서 농민들은 정규적으로 토지세를 내야 했는데, 군벌이나 관직을 산 관리들은 정규세에 부가세를 추가하였다. 이러한 부가세는 정규세의 몇 배에 달했으며 사천 지역에서는 다음 해의 부가세를 미리 받는 경우가 생겨나기 시작하는 예징(豫徵)이 등장하게 된다. 예징은 점점 정도가 심해져서 수십 년 후의 부가세를 미리 받는 경우도 있었다. 에서도 이러한 예징에 대한 언급이 있다. 장곰보가 현장으로 부임하자 마방덕은 곧바로 부가세를 걷기 위해 세금 장부를 조사하게 되는데 곧 전임 현장이 90년 후, 즉 2010년의 부가세까지 받아간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실제로 사천의 일부 군벌들 가운데는 2008년의 토지세를 징수한 경우도 있었다.비적행정력의 붕괴와 정치적 불안은 비적의 급증을 불러일으켰다. 지방 행정관들은 비적이 활동해도 방관하거나 혹은 비적과 결탁하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비적은 쉽게 근절되지 않았다. 또한 자연재해로 인한 농업 생산량의 감소와 군벌 및 행정관들의 살인적인 세금 징수로 인해 굶주림에 시달린 젊은 농민들 중 다수가 비적이 되었다. 비록 비적은 수세기 동안 중국에서 활동한 존재였지만 1920년대에는 그 수가 급증했다. 1928년 기근 때 하북성의 인구 20%가 비적으로 살아나갔다. 1930년대 초 산동과 만주에서는 100만 명이, 사천에서는 150만 명이 비적이었다고 한다. 이들 중 대부분은 경제적인 필요에 의한 계절적 비적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필요가 충족되면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영속적, 반영속적인 비적도 존재했다. 또한 비적 중에는 하층 엘리트 출신도 존재했는데 지주나 부농의 자식, 몰락귀족, 상인, 장교 등등 출신 성분이 다양했다. 하층 엘리트 출신의 비적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등 어떠한 이유로 출세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비적으로 편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의 장곰보는 바로 이러한 하층 엘리트 출신의 반영속적 비적이다. 그는 원래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권총부대의 장교로 있었지만 모시던 장군이 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해 사망한 뒤 군벌들의 파벌싸움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결국 비적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장곰보의 아들들(친자는 아니지만) 역시 비적이 되기 전에는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2.4 새로운 지역엘리트청 말기 1905년에는 수세기 동안 유지되어 왔던 과거 제도가 폐지된다. 과거 제도의 폐지는 단순한 제도의 폐지로서 끝난 것이 아니라 중국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유교적 이데올로기에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과거제도가 유지될 때의 지역 엘리트들은 유교의 도덕적,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지역의 어려운 농민들을 위해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그들은 유교적 가치로 무장하고 지역의 비공식 정부로 활동하며 농민들의 어려움을 완화시켰다. 하지만 과거 제도의 폐지로 인해 지역 엘리트들은 사회적 리더십을게 되자 그 자리를 새로운 층의 지역 엘리트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들은 주로 상인, 도적 두목, 고리대금 업자 등으로서 유교적 소양이 아닌 재력, 무력 등으로 지역을 장악했다. 기존의 유교적 소양을 갖춘 지역 엘리트들이 지역 공동체와 농민을 위해 언제나 자비롭고 도덕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지역 엘리트들은 이러한 자비와 도덕이 애초부터 결여되어 있었다. 그들은 권력과 부가 없는 계층에 대해 더욱 착취적이었고 냉담했다. 그렇기 때문에 농민들의 삶은 더욱 어렵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의 황사랑은 이런 상황 속에서 등장한 새로운 계층의 지역엘리트이다. 황사랑의 가문은 대대로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기존의 지역 엘리트가 사라진 자리를 차지했다. 그들은 마약매매, 인신매매, 외화밀수 등등 온갖 불법적인 행위를 통하여 부를 축적하였고, 청조의 무과 출신 교관을 필두로 하는 사병집단까지 거느리고 있다. 유교적 소양 대신 부와 무력을 갖춘 황사랑에게 공권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현장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으며, 지역민들은 착취와 지배의 대상일 뿐이다.결론청조 멸망 이후 중국 사회는 급격한 사회적 변동을 거치면서 온갖 병폐와 혼란을 경험하게 되었다. 공권력의 붕괴와 유교적 가치의 훼손으로 인해 군벌이 등장하여 전국은 전쟁에 휩싸이게 되었고 예징을 동반한 매관매직이 성행하게 된다. 또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비적이 급증하게 되고 유교적 지역 엘리트가 떠난 자리는 부와 무력을 앞세운 탐욕스러운 자들이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경제는 더욱 어려워졌으며 사회는 각박해졌다. 과거 왕조시대가 경제적으로 풍요롭다거나 농민들에게 안전한 사회였다고는 할 수 없지만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존재했던 반면 이 시기에는 농민을 위한 안전장치가 사라졌으며 과거보다 더욱 착취적인 사회로 변모했다. 이러한 사회적 병폐와 혼란은 이후로도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다. 1920년대 중국 사회의 이러한 어두운 측면을 묘사한 영화 는 비록 풍자와 해학에 초점을 맞춘 블랙코미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중국 통일 왕조로서의 원나라에 대한 인식과 그에 대한 비판서론현재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중국의 역대 왕조는 간략히 살펴보아도 하, 은, 주부터 시작하여 춘추, 전국, 진, 한, 위진남북조를 거쳐 수, 당, 오대십국, 송, 원, 명, 청까지 이어진다. 이와 같이 수 천 년 전부터 끊임 없이 이어져 내려온 위대한 중국 통일 왕조들의 존재를 통해 중국인들은 자국의 유구한 역사 및 이와 더불어 발전한 찬란한 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본다면 위에 언급한 통일 왕조들이 과연 모두 진정한 중국의 통일 왕조라고 할 수 있을까?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살펴본다면 원나라와 청나라는 각각 중국 대륙의 변방에서 자신만의 역사를 이어가던 몽골족과 만주족이 흩어진 세력을 규합하고 중원의 한족이 세운 왕조를 정복하여 세운 국가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원나라와 청나라 시기는 중국이 이민족의 정복을 받아 비중국의 세계로 편입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들 두 국가가 중국의 통일 왕조로 인식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보고서에서는 원나라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현재 원나라가 중국의 왕조로 인식되고 있는 이유와 이에 대한 비판을 제시하고자 한다.본론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인 쿠빌라이 칸은 수도를 몽골 고원의 카라코람에서 현재의 북경인 대도(大都)로 옮기고 중국 지배에 적합한 여러 제도를 도입한 후 국호를 대원(大元)이라고 칭하였다. 몽골 고원에서 중원 대륙으로 천도하고, 중국식 제도를 도입하였으며, 국호를 중국식으로 지은 것과 같은 역사적인 사실로 인해 그 동안 많은 사학자들은 원나라가 기존의 중국 통일 왕조의 맥을 잇는 왕조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당시의 관점으로 생각해본다면 원나라의 초대 황제인 쿠빌라이 칸이나 후대 황제들은 자신을 역대 중국 통일 왕조와 맥을 같이 하는 제국의 군주라고 생각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파악해 봄으로써 분명하게 알 수 있다.거대한 몽골 제국을 형성하기 이전에도 복을 이루어냈다.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하기 전의 몽골인들은 당시의 중국 왕조들에 예속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북방의 넓은 초원에서 다른 독자적인 역사를 이어갔다. 즉 몽골 제국과 이전의 중국 왕조들은 전혀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가진 별개의 종족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칭기즈 칸의 후예인 쿠빌라이 칸이나 후대 칸들은 비록 현재 북경인 대도에 수도를 건설하고 국호를 대원이라고 칭했지만 원제국이 유라시아를 정복한 사상 초유의 대 제국인 대몽골 울루스를 지배하는 대칸의 울루스라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지 결코 역대 중국 왕조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알 수 있다. 당시 드넓은 유라시아를 정복한 대칸이 지니고 있는 대몽골 울루스에 대한 자부심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엄청났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굳이 스스로를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중원 대륙에 한정되어 있는 중국의 왕조로 격하 시킬 리가 없는 것이다. 몽골제국은 중국의 영토를 정복하려고 한 것이지 결코 중국의 역사 속에 대몽골 울루스를 편입시키려고 정복한 것이 아닌 것이다. 수도를 대도로 옮기고 국호를 대원이라고 칭한 것은 통치의 편의성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원나라는 스스로 중국 통일 왕조의 맥을 잇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역으로 이는 당시의 한족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춘추 전국 시대를 이후로 중국인, 즉 한족을 지배한 사상 중의 하나는 중화사상 혹은 화이사상이었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중원의 한족들은 오랜 시간 동안 자신과 주변의 이민족들을 철저하게 구분하여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고 나머지 민족들은 오랑캐로 취급하였다. 이러한 사상이 지배적인 시대에 살던 한족들이 오랑캐로 취급하던 몽골인들에게 정복을 당했으니 그들의 절망감과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몽골 제국의 정복 활동 당시 무수한 한족들이 몽골인들에 의해 살육 당하였고 정복 후에도 이러한 살육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국호를 대원으로 정한 후에 로 생각할 수 있었을까? 원나라에 충성을 바친 한족도 분명 일부 존재하긴 하였지만 대부분의 한족은 무기를 박탈당한 채 강력한 원나라의 힘 앞에 숨죽여 있었던 것이지 몽골인에 의해 정복당한 자신들의 운명에 순응하고 원나라를 자신들의 나라 즉 중국 통일 왕조로 인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당시의 한족에게 있어 원나라는 중국을 빼앗은 이민족의 나라이자 한족의 힘을 모아 중국 대륙에서 축출해야 할 대상이었다. 당시 한족들이 가지고 있던 원나라에 대한 인식은 지배층의 분열과 알력다툼으로 인해 원나라의 군사적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러한 반란 세력을 규합한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하자마자 원나라를 중국 대륙에서 몰아내는 북벌을 행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알 수 있다. 가난한 농부 출신이자 도적 패거리의 수장에 불과했던 주원장이 순식간에 한족을 중심으로 하는 반란군의 지지를 얻은 것을 보면 당시 한족들이 얼마나 오랑캐의 나라인 원나라를 축출하고 한족의 나라를 다시 세우고 싶어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당시 원나라도 스스로를 중국의 왕조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당시의 한족들도 원나라를 중국의 왕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현대의 중국인들은 원나라를 중국의 역대 통일 왕조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원나라를 중국 통일 왕조로 인식하는 중국인들의 태도는 그리 오래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우선 원나라를 중국 대륙에서 축출한 명나라가 원나라를 역대 중국 통일 왕조로 인정 했을 리 만무하다. 명나라에 있어 원나라는 대륙에서 축출해야 할 오랑캐, 즉 몽골인의 나라였다.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도 원나라를 기존 중국의 통일 왕조로 인식했을지는 미지수이다. 청나라 역시 원나라와 마찬가지로 한족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이민족(만주족)이 중국 대륙을 정복하고 세운 국가이기 때문이다. 만주족이 몽골족을 동족으로 인식하거나 몽골족을 중국인으로 인식하지 않는 이상 청나라가 원나라를 중국의 역대 왕조라고 인식했을 확률은 결코 높지 않다.청나라도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청나라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강경한 자세를 유지했다. 이러한 자세는 결국 청을 자극하여 병자호란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이러한 굴욕을 만회하고자 청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북벌을 준비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볼 때 당시 청나라 스스로는 물론이고 그 주변국들은 청나라를 중국 통일 왕조로 인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을 미루어보아 청나라에게 있어 원나라는 자신들과 관련이 별로 없는 몽골인들의 나라였을 뿐일 것이다.청나라 말기를 시작으로 중국 대륙은 외세의 침입과 국공내전 등으로 수 십 년 동안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게 된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는 전국민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역사적 인식이 생겨났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현재 대다수의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원나라가 중국 통일 왕조라는 인식은 중국의 혼란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이후, 즉 1948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이후에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은 과거와 달리 56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표면상의 통일적 다문화국가를 표방하고 있다. 다시 말해 과거의 중화 즉 한족만을 중국인으로 간주하고 나머지 민족은 오랑캐로 간주하고 배척하던 태도에서 벗어나 중국대륙에 존재하는 다양한 민족들을 중국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영역으로 편입시킨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전적으로 평화적인 수단을 통해서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영토의 확장과 그에 따른 막대한 양의 지하자원의 확보를 위하여 군사력을 동원한 것이다. 예를 들어 티벳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독립을 선언했지만 중국은 1950년 전 세계의 이목이 한국전쟁에 쏠린 틈을 타서 기습적으로 인민해방군을 이끌고 티벳을 침공한다. 또한 이에 앞서 1949년에는 당시 독립국가였던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을 침공하여 신장위구르자치구로 편입시켰다. 이렇게 강제적으로 편입된 소수민족들은 끊임없이 독립을 주장하고 유혈사태를 일으키며 통일된로 포함시키는 프로젝트를 진행 하였다. 즉 중국이 진행하고 있는 동북공정, 서북공정 등등의 각종 프로젝트들은 이러한 소수민족들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에 포함시켜 장기적으로 소수민족의 독립의지를 저하하고 현재 차지하고 있는 영토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결론적으로 현재 중국이 원나라를 자국의 통일 왕조로 인식하고 있는 이유는 현재 중국이 지닌 역사관이 위와 같은 실리적인 원인들에 기반하였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소수민족인 몽골족의 역사도 곧 중국의 역사가 된다. 그렇기 때문의 몽골족이 지배계층이었던 원나라도 이러한 논리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중국의 역사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는 발해나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 혹은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관점과 유사하다. 또한 원나라를 자국의 통일 왕조의 역사에 포함시킴으로써 스스로 멸시했던 오랑캐에 정복을 당하고 한세기 가까이 통치 당했다는 수치스러운 역사의 기억을 유라시아를 제패한 위대한 제국의 역사로 대치할 수 있게 되었으며 동시에 당시 원나라가 정복한 영토에 대한 역사적인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결론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당시의 원나라는 대몽골 울루스를 지배하는 대칸의 울루스였다. 비록 현재의 북경인 대도에 수도를 정하고 국호를 대원이라 칭했지만 원나라의 몽골족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정체성은 결코 중국 통일 왕조의 연장선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의 정체성은 유라시아를 정복한 위대한 몽골족의 후예였다. 당시의 한족 및 주변국들도 원나라를 중국의 왕조로 인식하지 않았다. 현재 널리 퍼져있는 원나라가 중국 통일 왕조의 하나였다는 인식은 1948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이후 대륙 내 여러 소수민족을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인 불안을 해소함과 동시에 이민족에 정복당한 굴욕적인 역사를 어떻게든 자랑스러운 역사로 가리려는 노력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일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현재의 중국이 처한 상황을 배경으로 발생한 것이지 실제적인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01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은 가짜다- 괴짜경제학을 읽고 -인문학도에게 경제학이라는 학문은 언제나 낯설었다. 경제원론, 미시경제학 등의 수업을 들었지만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라든가 무차별곡선, 각종 복잡한 수식 등등은 오히려 경제학에 대해 실생활과 별로 상관 없는 어려운 학문이라는 인식을 갖게 했었다. 또한 경제학자들은 앞으로의 경기를 예측한다든가 이자율을 변동, 환율 변동 등 뭔가 돈과 관련된 분야만 다루는 것 같았다. 하지만 “괴짜경제학”은 경제학과 경제학자에 대한 나의 생각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괴짜경제학”의 저자인 스티븐 레빗은 하버드 경제학과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고 MIT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할 만큼 대단한 경제학자이지만 그가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주제는 일반적인 경제학자들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다른 경제학자들과는 달리 수학에 소질이 없지만 통계학적인 분석을 활용하여 특정 사회 현상과 인과관계나 상관관계에 있는 요인을 파악해내는 능력이 있다. ‘퍼블리셔스 위클리’에서 언급했듯이 레빗의 모든 연구 주제의 기저에는 적절한 관점을 발견하기만 한다면 아무리 복잡한 현상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고, 레빗은 그러한 원칙을 우리의 일상생활과 결부시키는 재능을 가진 경제학자이다. 이러한 평가에서 알 수 있듯이 레빗은 비도덕적인 교사와 스모선수들의 부정행위, KKK단과 부동산 중개업자의 공통점, 마약판매상과 범죄율 분석, 부모의 역할 등 경제학자가 관심을 갖지 않을 법한 주제를 연구하여 훌륭한 해답을 제시한다. 이제 스티븐 레빗이 연구한 주제들을 간단히 살펴보겠다.일반적으로 부동산 중개업자는 고객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보다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더 중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이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상황에서 객관적인 증거를 찾기 위해 스티븐 레빗은 중개업자가 고객의 집을 팔 때와 자신의 집을 팔 때를 비교해 보았다. 역시 중개업자들은 자신의 집을 팔 때 평소보다 더 오래 시장에 내놓고 좋은 조건의 구매자가 나타났을 때만 부동산을 팔았다. 같은 수준의 고객의 집이 30만 달러에 팔린다면 그들의 집은 31만 달러 혹은 그 이상으로 팔리고 있었다. 만약 30만 달러의 집을 판다고 가정해 보았을 때 중개업자 자신의 집을 팔 때 더 많은 신경을 써서 31만 달러에 판다면, 1만 달러는 온전히 중개업자의 수중에 떨어진다. 하지만 고객의 집을 팔 경우 보통 집값의 6%의 중개 수수료는 판매자의 중개업자와 구매자의 중개업자가 나누어 갖는다. 여기에 수수료의 절반을 회사에 떼어주고 나면 중개업자에게 돌아가는 몫은 집값의 1.5% 밖에 되지 않는다. 31만 달러에 팔기 위해 노력하여도 중개업자에게 돌아오는 돈은 1만 달러의 1.5%인 150달러 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중개업자들에게는 집값을 최상으로 받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 거래를 빨리 추진시켜 최대한 많은 거래를 성사시키는 것이 유리하다.다음으로 스티븐 레빗은 시카고 지역의 교사들이 부정행위를 일으키게 되는 이유를 조사해 보기로 했다. 시카고에서 학생들의 성적이 교사들의 평가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시카고의 일부 교사들은 학생들의 정답지를 조작하는 옳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에 레빗은 학생들의 시험 성적 데이터만으로 교사들의 부정행위를 추적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고 시카고 교육청에 요청해 시험 성적 데이터를 얻었다. 그리고 성적 데이터를 살펴봄으로써 부정행위를 통한 시험 성적들은 특정 패턴을 보이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렇게 조작된 답안지는 전체 답안지에서 5%나 발견되었으며 이 사실을 접한 시카고 교육청은 부정행위 교사들을 적발하기 위해 레빗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결국 답안지 패턴이 의심스러운 지역을 포함해 몇몇 학교에서 재시험이 치러졌다. 정직한 교사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성적이 지난 시험과 거의 동일한 반면, 부정을 저지른 교사들의 학생은 성적이 현저하게 감소하였고, 결국 교육당국은 부정행위를 한 교사들을 해고했다.레빗은 일본 스모계의 승부조작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일본 스모선수들은 보통 한 대회에서 15번의 경기를 치르게 되고 8경기 이상을 승리한다면 개인 순위가 상승하고 반대의 경우 순위가 하락하게 된다. 이러한 경기들에서 레빗은 선수들이 8승 이상을 거두기 위해 승부조작이 일어 나지 않을까 의심스러웠고,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여 그가 원하는 답을 찾았다. 7승7패 선수가 8승 6패 선수와 대결해서 시합에서 이길 확률은 79.6%였던 반면 평상시에 이길 확률은 48.7%에 불과했다. 실제로 두 명의 전직 스모선수들이 스모계에 널리 퍼진 승부조작, 성추행, 야쿠자와의 결탁 등을 폭로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이는 레빗의 결론이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했다.마약 판매상이 왜 어머니와 같이 사는지에 대한 연구도 있다. 수디르 벤카테시가 위험을 무릅쓰고 얻은 장부를 살펴본 결과, 마약 판매조직은 단순한 범죄자집단이 아니라 맥도날드와 매우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수익의 대부분은 보스가 가지게 되어있었고 이 수익을 이사회에 일정부분 상납해야 했다. 반면 맥도날드의 지점에서 일하는 수많은 아르바이트생들이 적은 임금을 받는 것처럼 마약 판매조직의 최하급 계층인 판매상들에게는 시급 3.3달러라는 적은 임금이 지불되었고 언제나 죽음과 체포의 위협 속에서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언젠가는 보스가 되어 부자가 되길 바라면서 가난과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한편 범죄율이 감소한 이유를 기존의 범죄학자의 관점과는 다른 곳에서 찾기도 하였다. 1960년대 미국 국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던 높은 범죄율은 1990년대 들어 놀라운 속도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놀랍고 갑작스런 변화에 여러 학자들은 경제회복에 의한 결과 혹은 혁신적인 치안정책이 성공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빗은 낙태의 합법화가 범죄율이 감소한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했다. 연구에 의하면 낙태가 합법화된 후 낙태된 태아들이 만약 세상에 태어났다면 빈곤한 삶을 살아갈 가능성은 평균보다 50%, 편부모 아래에서 성장할 가능성은 평균보다 60% 높다고 한다. 그리고 빈곤한 삶을 살거나 편부모 아래에서 성장할 경우 이 아이가 나중에 자라서 범죄를 저지를 확률은 평범한 삶을 산 아이보다 2배나 높다. 이에 레빗은 미국에서 범죄율이 감소한 이유로는 여러 정치, 사회적인 요인이 있겠지만, 낙태가 합법화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낙태를 통해 잠재적 범죄자의 수를 크게 줄임으로써 범죄율을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떨어뜨렸다는 것이다.이 외에도 스티븐 레빗은 좋은 부모가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이나 KKK단의 흥망성쇠 등등 다양한 사회적인 현상들을 특이한 관점으로 재해석하였다.이 책에는 하나로 통합된 중심 주제가 전혀 없다. KKK단에서 마약상, 부동산 중개인, 스모선수,좋은 부모까지 같은 책으로 묶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연구들이 계속해서 나열되어 있다. 하지만 이렇게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주제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점이 존재한다. 바로 인센티브이다. 사람은 그것이 경제적이든 윤리적이든, 혹은 다른 이유든 인센티브에 반응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행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에서 벌어지는 다수의 현상들은 그 현상과 관련된 인센티브를 연구함으로써 인과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행위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과연 어떤 인센티브가 있을지를 생각하고 가설을 설정한 뒤,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행위와 인센티브의 관계를 밝혀내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어떤 사회현상의 통념과는 다른 새로운 해석을 내놓을 수 있게 된다. 물론 그 새로운 해석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어 세간의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경제학은 현실을 다루는 학문이기에 윤리를 고려하기보다는 분명한 현실을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영문학서설 2013-1소설 『The horse-dealer's daughter』와 『Boys and Girls』의 딸들1. 서론수업시간에 다룬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사회와 각자의 가정환경이 그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또한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저항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했으며, 그러한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소설 『The horse-dealer's daughter』와 『Boys and Girls』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비록 각자가 처한 상황이 상당히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 당시 시대에서 사회적으로 약자의 입장에 있던 여성이자 한 가정의 딸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The horse-dealer's daughter』와 『Boys and Girls』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이 처한 상황과 그들의 행동을 비교함으로써 이 두 소설을 이해하고자 한다.2. 본론2.1 가정과 사회『The horse-dealer's daughter』의 주인공인 Mabel에게 한 때나마 사랑이 존재했고 부유했던 가정은 세상의 전부이지만 결국은 그 안에서 인생의 본질적인 것을 모두 잃어버렸다. 사랑하던 어머니는 그녀가 14살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재혼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형제가 셋 있지만 그들은 집안이 파산한 상황에서 자신의 안위에만 관심을 갖으며 Mabel에게는 진정한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들은 Mabel을 이해하고 진정한 대화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를 하며, 스스로 만족할만한 답변을 듣기 위해 그녀를 다그친다. Mabel에게 형제들은 가족으로서 의지하는 존재가 아니라 감정을 공유하지 않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인 것이다. 형제들이 그녀를 ‘불독’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그녀가 형제들에게 아무런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언제나 굳은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별명이며 이를 통해 Mabel과 형제들의 무미건조한 관계를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또한 “She did not share the same life as her brothers.”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다른 형제들과 아무런 감정을 공유하지 않으며 타인과의 사랑이 없는 무미건조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사회 역시 그녀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당시 사회에서 상류층에 속하지 못한 여성인 Mabel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언니 집에 얹혀살거나 부엌데기로 들어가기, 혹은 잘해야 간호사가 되는 길 뿐이었다. 이러한 희망 없는 삶이 계속되자 Mabel은 감정과 사랑을 주고받는 기능이 퇴화된 것처럼 보인다. 더군다나 유일하게 버팀목으로 존재했던 집안의 재산마저 모두 사라진 상황에서 그녀는 감정변화와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이 절망감으로 점철된 반복적인 일상을 버텨내고 있다. 그저 거의 유일하게 사랑했던 죽은 어머니의 비석을 닦고 주어진 시간을 소모하며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Mabel의 상황을 ‘sullen-looking’, ‘neutral’, ‘impassive’, ‘unchanged’와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여 묘사함으로써 무미건조하고 희망이 없는 답답한 분위기를 표현해낸다.반면 『Boys and Girls』의 화자가 처한 경제적인 상황은 『The horse-dealer's daughter』의 Mabel보다는 나아 보인다. 하지만 화자는 전통적인 여성상과 현대적인 여성상의 과도기를 살면서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을 느낀다. 화자는 성역할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하고 싶지만 화자를 제외한 주변의 모든 인물들은 아직 전통적인 여성상에 매여 있는 것이다. 우선 화자의 남동생의 이름인 Laird는 Lord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소설 속 배경이 되는 1940년대의 사회에서 무의식적으로 만연했던 남녀차별 혹은 남아선호 사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동시에 이를 통해 성역할에 대한 부모와 사회의 인식 및 남성과 여성이 각자 수행해야 하는 역할이 달랐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즉 남성은 집 밖에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거친 일을 해야 하며 여성은 집안일을 하는 것이 덕목인 사회였던 것이다. 화자의 어머니는 이러한 전통적인 여성상에 부합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일을 하는데 할애하며 웬만해서는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햇빛을 보지 못해 창백한 안색과 집안일을 하느라 늘 젖어 있는 앞치마 등 화자의 어머니를 표현하는 것들은 결국 당시 여성들이 처한 상황을 표현하는 것들이다. 어머니는 당시 여성에 대한 인식에 저항하거나 개선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에 순응하는 인물이며 딸 역시 자신과 같이 여성스러운 행동을 하도록 바라고, 남자처럼 행동하려는 화자의 신체적인 능력을 무시한다. 화자는 아버지를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고 실제로 동생보다 더 많은 일을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Wait till Laird gets a little bigger, then you’ll have a real help”와 같은 말을 함으로써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바깥일 하는 것을 좋아하는 화자를 무시하는 것이다. 화자의 할머니 역시 당시 사회가 여성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할머니는 남자처럼 행동하는 화자에게 “Girls don’t slam doors like that.”, “Girls keep their knees together when they sit down.”, “That’s none of girls’ business.” 등등의 말을 함으로써 화자를 당시의 여성상에 맞게 억압하고 있다.2.2 저항과 변화『The horse-dealer's daughter』의 Mabel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자신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을 처절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녀는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형제들이 제시한 진심이 담기지 않은 해결책들을 모두 무시하고 오직 자신만을 신뢰한다. “She would follow her own way just the same. She would always hold the keys of her own situation.” 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가정 내에서 형제들을 대할 때는 굉장히 소극적인 면모를 보이지만 대조적으로 자기 자신에 관련된 것에는 자주적인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절망적인 현실에서 살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돌아가신 어머니가 있는 영광된 자리에 나아가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절망적인 현실에 대한 저항인 것이다. 하지만 수영도 못하는 Jack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 더러운 연못에 뛰어든 사실을 알고부터 갑작스러운 감정의 기복을 경험한다. 자신의 죽음을 막은 Jack에게 어떤 이유가 존재하고, 그 이유는 자신에 대한 사랑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잭은 단지 자신의 목숨만을 구한 것 뿐 만 아니라 영혼까지 구원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Mabel과는 달리 잭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태도에 당황하며 혼란스러워 한다. “He had ever intended-wanted to love her.”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처음부터 그녀를 사랑하고픈 마음이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에서 탈피하고 싶지 않고 싶지만 동시에 사랑을 갈구하는 그녀를 끌어안고 그녀가 받은 상처를 보듬어 주기를 바란다. 이는 “He very much wanted to go upstairs to get into dry clothing. but there was another desire in him.”이라는 문장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욕구 사이에서 계속해서 갈등하던 잭은 결국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욕구에 굴복하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러운 사랑의 감정에 빠지게 된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사랑과 희망을 갖게 된 Mabel은 가장 아름다운 검은 드레스로 갈아입고 잭의 앞에서 수줍은 모습을 보인다. 비록 머리가 아직 더러운 연못의 물로 젖어 있고 지독한 냄새가 나는 것처럼 객관적인 현실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희망과 감정이 없는 삶을 살았던 그녀가 변한 것이다. Mabel은 젖은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것처럼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