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사람들은 성장해 가면서 눈물을 더 많이 흘리게 될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나의 경우, 어린 시절보다 성장 해가면서 눈물을 흘릴 일이 더 많아진 것 같다. 기억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4살 무렵부터 되돌아보면, 나는 항상 눈물을 참고 있었다. 맏이라는 위치는 부담스럽게도 항상 정형화된 모습이 강요되었다. 그때는 눈물이 나약함의 상징인 양 여겨졌고, 부모님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힘든 상황에 처해 있음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웠다. 남들 앞에서 강한 척 해야 했던 나는, 강해 보이기 위한 수단으로서 눈물을 참았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 정말 그렇다. 때로는 사람의 행동이 그 사람의 감정을 좌우하기도 하는 것이다. 눈물을 참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졌던 나에게 영화나 문학작품을 읽고서 감동을 느끼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내 삶 이외의 이야기들에 흘릴 눈물은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나에게 있어 눈물은 단지 나약함의 상징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변했다. 20살을 기점으로, 눈물이 많아져 버렸다. 슬픈 음악, 슬픈 영화, 슬픈 소설에도 눈물을 흘렸고, 힘들 때는 자연스레 눈물도 났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다. 내 마음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그건 알 수 없지만, 확실한건 눈물만 많아진 것이 아니라 감정도 풍부해졌다. 웃음도 많아졌고 좋다, 싫다는 표현도 확실하게 할 수 있게 됐다. 울거나 웃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아이로 돌아간 것만 같다. 이제서야 나는 눈물이 인간의 감정과 이어진 자연스러운 행위임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눈물이 많아지면서 내 자신에게 솔직해져갔다. 내 자신에게 솔직하게 되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솔직할 수 있게 되었다.눈물과 우정고등학교 때였다. 친하게 지내던, 아니, 친하게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던 친구와 다투게 되었다. 그 친구는 내가 늘 어느 정도의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늘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생각해 보면 그 때 뿐만은 아니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그 무렵까지 내 주위엔 늘 친구들이 많았다. 그러나 새로운 학년에 올라가거나, 새로운 학교에 가고 나면 또다시 새로운 친구들이 생겼다. 그 관계가 오래 유지되는 법은 없었다. 생각해보면 친구들과 늘 함께 웃고 떠들고 즐거워했지만, 함께 슬퍼했던 일은 결코 없었던 것 같다. 나 스스로가 다른 사람에게 눈물, 슬픔이나 괴로움을 내비치는 일도 없었을 뿐더러, 다른 사람의 눈물을 보는 것조차 부담스럽게 여겼었다.내 생애 진정한 의미의 친구는 고등학교에 올라와서야 생겼다. 아직까지도 여전히 내 곁에 있어주는 친구 J양. 그녀는 중학교 3학년 때도 같은 반 급우였고, 같이 어울려 다니던 친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에 올라와서야 친구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 때 비로소 서로의 눈물까지도 닦아 줄 수 있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등학교 1학년 때, 우리는 서로 다른 반이었고, 어울려 다니는 친구 무리도 달랐다. J양과 함께 울던 그 날이 있기 전까지,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가진 마음속의 그늘에 대해 터놓고 얘기해 본 적이 없었다. 혼자 짊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고, 이 세상에 그런 상황에 놓인 이는 나뿐이라 여겼기에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수치스러웠다.그 날, 우리는 우연히도 집 근처에서 만났다. 그리고 나는 그 즈음 가정불화로 몹시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다. 그리고 패스트 푸드점에서 마주 앉아 수다를 떨었다.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는 조심스럽게 서로의 이야기를 꺼내려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지만, 서로가 같은 처지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울었다. 같은 고민을 해왔기에 J양 내 앞에서 보이는 눈물도 낯설거나 부담스럽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눈물을 통해 ‘교감’을 했고, 친구가 되었다. 그 날의 ‘눈물’이 없었다면 우리는 둘 다 진정한 의미의 친구를 얻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그 날의 눈물을 통해 내가 10년 가까이 유지해왔던 ‘비밀스런 고민’이 실제로 많은 또래들이 겪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후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도 여럿 생기게 되었다.눈물과 사랑, 그리고 이별그와의 시간을 돌이켜보면, 정말 짧았다. 헤어지던 그 순간은 얼굴도 똑바로 쳐다보기 싫을 만큼 미웠다. 그러나 그를 생각하며 흘렸던 눈물이 아깝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부끄럽게도 생각되지 않는다. 살면서 누군가와 이별한다는 것은 앞으로도 나에게 예정되어 있을 일이기에, 한 번 이별을 선사해준 그에게 고마움마저 느낀다. 지금은 그 때를 떠올려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 허전함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지금 나는 이별을 후회하지 않고, 많은 눈물을 쏟아낸 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나는 한번 사랑을 했고, 또 다른 사랑을 시작했으니까. 한 번의 이별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래서 온 마음으로 사랑을 하게 됐으니까.겉모습과는 달리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에 나도 모르게 마음을 빼앗겼었다. 계산되고 치밀한 말보다는 어떻게 보면 어리다 하고 싶을 정도로 순수하게 다가온 그. 그와는 말이 잘 통했다. 그와 얘기하면 하루도 모자라고, 밤도 모자랐다. 짧은 시간동안 우리는 많은 것을 공감하고, 많은 부분을 공유하게 되었다. 난생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와 한없이 가까워지고 싶은 욕구를 느꼈고, 내 생활의 모든 중심이 그에게로 옮겨졌을 때, 나는 사랑이라는 것의 신기한 힘을 처음 맛보았다. 그가 가을이 좋다고 했을 때, 나도 가을을 좋아하게 되었다.그때,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랑에는 때로 냉정함이 필요하다는 말이 싫었던 나는 내 마음이 따르는 대로, 내 열정만을 쏟고 싶었다. 그는 아니라고 했지만, 나는 한 없이 가까워지는 것이 사랑이라 믿었다. 그런데 그가 옳았다는 것을 느낀 순간 이별이 왔다. 사랑에는 자존심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내가 쏟는 사랑의 대가를 바라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내 지나친 열정만큼 그에게 바라는 것이 많아져갔다. 그는 우리 사이에 거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헤어지자는 말을 꺼낸 것은 결국 나였다. 사랑은 끊임없이 가까워져 가는 과정이라 믿었던 당시의 나에게 거리를 두자는 말은 사랑의 끝을 선언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나를 설득했지만 나는 완고했다. 그를 사랑했던 만큼 배신감이 더 컸기에, 잡아주기를 바라는 만큼 더 쌀쌀하게 대했다. 그는 친한 사이로 지내자는 말로 내 이별에 응했다.그의 대답을 들은 나는 헤어지는 순간까지 초연했다. 친구로 지내자는 그의 말이 더 화가 났기에, 그에 대한 나의 마음은 미움과 집착일 뿐, 이미 더 이상의 감정은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일주일이 그냥 지나갔다. 밥은 먹었는지, 잠은 잤는지, 수업은 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멍하니 지냈던 것 같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정말 하나도 이별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했던 것 보다 아무렇지 않은 내가 기특했고, 그에게 이런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까지 했다. 친구들은 다행이라고 했다. 차라리 잘되었다고도 했다. 친구들에게 나의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왠지 모를 뿌듯함마저 느꼈다.
이 작품은 직장 여성의 성 역할을 사이에 두고 일어나는 등장인물 간의 갈등과 대립을 그리고 있으며, 거기에 대한 개개인의 성장과 각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저는 이 작품의 갈등 구조를 중심으로, 작품 속에서 이러한 갈등의 원인을 무엇이라 보고 있으며, 또 그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풀어나가고 있는지, 제시된 해결책은 근본적인 것인지에 중점을 두었습니다.이 소설에서 직장장 명옥이 각성하는 과정에는 어떤 모순이 자리하고 있는가? 선애와 정남의 에피소드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 작품이 간과하고 있는 직장 여성들에 대한 억압은 어떤 것인가? 이 작품 속에 제시하고 있는 해결책은 과연 근본적인 것인가?하는 논제를 놓고 토의해 보고자 합니다.1. 이 작품 속에서 일하는 기혼 여성이 직면하는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기혼 여성이 받는 사회적 억압의 문제는 없는가?작품 속의 명옥이나 탄실과 같은 기혼 여성은 직장에서는 매우 우수한 인력이다. 그런 이들이 겪는 어려움은 집안일과 가정 내에서의 불화에만 그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받는 사회적 억압의 문제는 없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2. 선애와 정남의 에피소드는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옥의 대사와 독백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선애와 정남의 일에 대해 명옥이 어떠한 입장을 취하는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집, 부모라는 울타리에서 독립 된 개인으로서의 여성을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북한도 7,80년대의 남한 사회처럼 혼인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고, 여자는 집에서 살림만 해야 한다는 부모의 사상을 강요받기도 했을 것이다. 이러한 부모 시대의 발상은 여성이 사회로 진출하여 사회발전의 주체가 되는 데 걸림돌이 되는 부분이다. 즉, 선애와 정남의 에피소드는 이러한 구시대적인 발상에서 벗어나 독립된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될 것을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라 생각된다.그런데 여기에서도 모순은 있다. 이 작품에서는 또한, 남편과 집안일에서는 독립되지 못한 여성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독립된 개인으로서의 여성이라는 의미는 “사회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에서는 독립되고, 전체 속의 하나에 포함 된 여성을 의미하는 편파적 의미인 것이다.3. 탄실을 설득하는 명옥의 대사에는 어떤 모순이 있는가?- 전업주부를 매도하고 있다.- 북한 사회 자체가 여성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육아시설과 같은 복지가 잘 되어 있는데 왜 일하지 않는가?”“일하지 않는 여성은 안일하다.”4. 명옥의 각성의 모순.- ‘여기에는 우리 녀성들 자신의 강한 의지와 남편들의 리해와 적극적인 도움이 있어야 한다.’ 라고 하면서도 ‘잠깐이라도 집에 들러 아이들에게 저녁 먹을 차비를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부분에서 정작 ‘남편의 리해와 적극적인 도움’을 요구하지 못하는 모습.- 결국은 “집안일하는 여성”이라는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에 감사할 따름.→ 결국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이 아니라 명옥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던 불만이 일시적으로 사라지고 사고방식이 바뀐 것뿐이다.
일본역사 속에서의 천황, 천황제ㅡ◎ 개요 ◎Ⅰ. 서론Ⅱ. 본론1. 천황의 의미2. 천황의 기원 - 고대3. 천황의 몰락 - 중세, 근세4. 신권 천황제 - 근대5. 상징 천황제 - 현대Ⅲ. 결론Ⅰ. 서론오늘날에도 일본은 특유의 천황제로 국가시스템을 운영해오고 있다. 일본의 국민들은 천황제 존속에 대하여 높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아사히신문의 여론 조사에 의하면 1945년도 조사 때 상징 천황제 지지율이 78%, 폐지하자는 의견이 5%로 나타났으나, 30년 후인 1975년에는 지지 73.3%였고, 1986년에는 지지 72.4%, 폐지 5.6%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처럼 천황제에 대해 70%의 높은 지지율을 보이던 것이 최근에는 오히려 그 지지율이 80%대로 뛰어 올랐다.최근의 MBC에서 광복 60주년 특집으로 방영한 다큐멘터리 "천황의 나라 일본"을 보면 현대 일본 사람들이 천황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 수 있다. 현재까지도 되풀이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나, 과거 일본의 식민지배, 침략전쟁, 민족차별 등의 뿌리를 일본 천황제에 두고 있는 견해도 있다. 전 일본 총리의 "신국(神國)"발언, 히노마루·기미가요의 법제화, 야스쿠니 신사 특수법인화의 움직임, 그리고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역사교과서에서의 천황신화 부활과 천황신격화의 집필자세 등은 여전히 천황이나 천황제가 일본 내셔널리즘에서 불가결한 존재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천황이라는 존재가 일본국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외부의 시작에서 보기에는 이해하기 힘들다. 1988년 9월 19일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다량의 피를 토하고 쓰러지자 일본 국민들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수많은 인파가 천황이 거주한 곳 앞에 모여 그의 쾌유를 빌었고, 각종 축제들은 모조리 취소되었다. 결혼식을 앞둔 남녀들이 날짜를 연기했음은 물론, 정치인들의 집회와 백화점의 바겐세일마저도 '자숙(自肅)'이란 이름으로 시행이 보류됐다. 한 공산당 시의원의 질문에 '천황에게 책임이 있다'고 답변한 다. 태어난 아기는 몇 kg이다.'이러한 일까지 언론에서 보도하고 국민들은 그러한 사실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고 한다. 또한 일본의 총리가 외국을 방문 할 때 보다 천황이 방문할 때 더 극진한 대우를 받는 것 같다.이러한 일련의 이해하기 힘든 현상들을 보면서, 일본 국민들에게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며 사회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천황의 존재와 천황제는 일본 국민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마사유키 스즈키’ 저 「근대 일본의 천황제」와, [일본 역사 교육자 협의회]가 쓴「천황제 50문 50답(日本歷史と天皇 : 古代から現代まで50問50答)」을 참고로 하여 알아보고자 한다.Ⅱ. 본론1. 천황(天皇)의 의미천황은 일본의 군주에 대한 공식적인 칭호로서, 도교에 말하는 ‘천황대제’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천황은 오늘날에는 ‘てんのう(텐노)’라고 음독을 하지만, 고대에는 ‘すめらみこと(스메라미코토)’라 했다. 언제부터 ‘てんのう(텐노)’로 발음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본에서 천황이라는 칭호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공식 명칭으로서 제도화된 것은 7세기 말엽이다. 천황이라는 칭호가 제정되기 전에는 군주는 ‘(오오키미)’라고 불렀다. ‘(오오키미)’가 천황으로 바뀌게 된 것은 율령국가체제의 확립과 왕권의 강화를 배경으로 한다. 천황이라는 칭호가 등장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샅은 중국풍 칭호인 황제천자 등이 공식적으로 함께 쓰이다가. 1936년에 이르러서 천왕으로 통일되었다.2. 천황의 기원 - 고대일본 천황의 역사는 꽤 오래 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옛 역사를 담은 고사기(712년 편찬)와 일본서기(720년 편찬)에 B.C. 660년 초대천황인 진무(神武)천황이 즉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고대 천황제의 모습이 갖추어지기 시작한 것은 4~5세기 경, 일본이 고대국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면서부터일 것이다. 5~6 세기에 걸쳐서 일본은 공동체의 수장들이 연합체를 형성하여 고대국가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천황은 이 시기다. 이에 의하여, 종래 귀족과 호족의 사유이던 토지?인민이 공지?공민으로서 천황의 지배아래 들어가고, 귀족들은 단순한 천황의 관리가 되어, 여기에 천황 지배의 통일 국가가 이룩되었다. 그런데 율령제 아래의 천황은 중국 황제와 비슷하지만 기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천황은 특정한 가계가 세습하고 천황가의 조상신를 비롯한 일본 고유의 모든 신들을 제사지내는 제사장이었던 것이다. 천황에게 정치적 책임을 묻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3. 천황의 몰락 - 중세, 근세중,근세 천황제는 급성장한 무사계급에 의해 수립된 1192년 가마쿠라 막부 개설로부터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왕정복구가 되기까지의 천황제를 말한다.중세에 들어서서 천황의 지위는 급락하게 된다. 중세 막부시대에는 장원이 생기면서 무사 계급, 무사 단위가 나타났고, 그 들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천황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다이라 정권은 1156년, 헤이안 천궁을 야습하여 무사 시대를 열었고 12세기말 미나모토 세력이 다이라 정권을 밀어내면서 무사단위로는 새로운 사무라이 정권을 성립한다. 미나모토는 천황으로부터 장군의 직책을 임명받음으로써 막부시대를 열었다. 이렇게 자리 잡은 막부는 몽고의 침입에 따른 막대한 군사비 지출을 위해 백성들을 수탈함으로써 민심의 반발을 사게 되고, 후반부의 가마쿠라 막부가 이로 인해 흔들리자 다시 천황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권력을 쟁취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얼마가지 못하고 무로마치 막부에 의해 다시 흡수된다.또한 14세기에는 천황가가 남북으로 갈라져 약 60년간 항쟁했던 내분이 있었는데 이것은 천황의 권위에 치명적인 손상을 끼쳤으며 이 무렵을 전후하여 천황은 몰락하게 되었고 하극상이 난무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전국 시대에는 천황가의 경제적 궁핍이 극에 달하여 그에 대한 역사적 실례는 15세기 중엽부터 막부 권력의 쇠퇴로 인해 의례에 대한 경비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어 황실 제사의 중심을 이루는 신상제가 중지되었다는 사실과 120여 년간 제사장으로서의 천황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다는 전통적으로 막부의 수장들이 받았던 ‘동위대장군’이라는 관위에도 별로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고 한다. 종래 동위대장군이라는 관위를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천황이 그나마 대접을 받을 수 있었는데 오다 노부나가는 흥미조차 보이지 않았을 뿐더러 그 스스로가 지상의 신이라 거들먹거렸다고 한다. 당시 천황의 사회적 위치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비록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경우는 막부를 개설하지 않고 간바쿠라는 지위에 올라 천황의 권위를 이용하여 천하를 호령했으나 이 역시 도요토미가 조정의 권위를 인정했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의 출생 배경에 대한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황의 권위를 이용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도요토미 이후 일본 천하를 움켜쥐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천황을 정치적으로부터 격리시켜 학문에만 전념케 하는 방침을 세워 만석의 정액을 주었을 뿐이었다. 도쿠가와 막부 체제 아래 일반 다이묘가 쇼군(동위대장군)에게서 만석 이상의 영지를 받는 무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천황에 대한 예우가 얼마나 형편없었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따라서 이 시대에는 조정과 막부 간의 권력 투쟁은커녕 막부의 의지 여하에 따라 천황좌의 존폐까지 걱정할 정도였다고 할 수 있다.4. 신권 천황제 - 근대일본의 근대 이후의 천황제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대일본제국헌법](1889∼1947)의 신권천황제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국헌법](1947∼현재)의 상징천황제이다.근대 천황제는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패전까지의 천황제로 신도를 국교로 한 정교일치국가 체제 아래 신성시되던 천황 체제를 말한다.근대 이전, 즉 1192년 가마쿠라 막부 개설에서부터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일어날 때까지 약 700여 년 가까이의 천왕은 정치적 권력과는 먼 존재였다. 관위 수여와 연호 제정의 형식적 권한을 갖는 것 외에는 일체의 정치활동과 무관했던 천황이 다시 정치적 발언을 할 기회를 갖게 된 계기는 막부 말, 외교 문제에서 비롯된다.본의 정치적 ㆍ 사상적 중역으로 선택한 메이지 유신 정부는 진무천황의 건국 정신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일신화하여 일본의 고유 신을 섬기는 일과 제정일치 정치를 수행한다고 발표한다. 이는 일본의 사상적 중핵으로 자리하던 천황의 전통적 가치를 정치적 상징 가치로 제도화한 국가 신도를 국교화 하겠다는 뜻이 분명하게 담겨있는 선언이었다. 제국 헌법아래의 일본에서는 일본은 신국(神國), 천황은 신국 일본을 통치하는 현인신(現人神)으로 받들었으며 일본인은 천황의 적자로 천황을 위해서는 기꺼이 죽을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를 전 국민에게 주입시켰다.이렇게 천황이 국가 최고 권위자로서 국가와 사회에 군림할 수 있는 근거는 천황가가 일본의 태양신 아마테라스오미까미의 직계로서 만세일계의 혈통을 이어왔다는 주장이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화를 바탕으로 이 주장을 내세우며 메이지 유신 정부는 국민 모두에게 신화를, 그것도 자기 구미에 맞게 가감된 역사를 사실처럼 믿도록 강요한다. 즉 천황에 대한 맹목적이고 무한정한 외경심을 요구하는 정책을 그대로 밀고 나가 천황이 신의 자손이라는 것, 인간이 된 현인신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면 불경죄로 몰아붙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천황은 국민들에게 절대자로서 떠받들어지는 현인신으로 변모해 갔다.5. 상징천황제 - 현대현대 천황제는 1946년 현 일본헌법이 공포된 이래 오늘날까지의 천황제로서, 천황은 국가와 국민의 상징으로만 규정된 체제이다. 1945년 8월 일본을 점령, 통치한 연합국총사령부는 신도지령을 내려 정교분리정책을 실시하여 신도를 국교로 하는 제도를 폐지한다. 이후 권력과 권위가 집중되었던 천황에게서 전통적 권위만이 남게 된다.천황제를 좀 더 이해하려면 일본의 정부 구조를 알아봐야 한다. 대통령제인 우리나라와는 달리 일본은 의원내각제로써 행정에 관한 모든 권리는 총리에게 위임 되어 있으며 천황은 국가에 그 어떤 사안에도 권력을 가질 수 없다. 이는 일본 헌법에도 잘 나와 있다.1889년 발표된 ‘대일본제국헌법’에는 제1장 천황에 관.
북한에서 본 남한의 문학- 「남조선문학을 론함」을 통해… -Ⅰ. 서론Ⅱ. 북한의 문예이론Ⅲ. 북한에서 본 남한의 문학1. 인물 창조2. 형식주의 순수문학에 대한 비판3. 남한의 7·80년대 현실 참여 문학Ⅳ. 북한의 남한 문학 비평이 안고 있는 문제점Ⅰ. 서론모든 문학은 자신이 속해 있는 고유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광복 이후 양분된 남북한은 서로 다른 정치노선을 기반으로 하면서 또한 문학사적 분단이 이루어 졌다.「남조선문학을 론함」에서는 남조선 문학을 ‘형식주의 순수문학의 미학’에 치중해 있으며, ‘외세의 강점을 벗어나지 못한 식민지 문학’이며, 읽는 이로 하여금 ‘허무주의에 빠지게 하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1960~70년대의 남조선 현실 참여 문학과 저항문학, 민중문학과 사실주의적 민족 문학은 진보적 문학이라 하여 높이 평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이처럼 북한에서 남한 문학을 평가 하는 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북한 문학의 특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 또 그 특징적 시각으로서 남한 문학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Ⅱ. 북한의 문예이론 - 주체적 문예관, 당성·노동계급성·인민성, 수령형상창조북한 문학은 북한이라는 특수한 사회 체제가 요구하는 형식을 바탕으로 한다. 북한의 문학은 결코 순수한 것,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다. ) 그렇다면 북한에서는 문학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남조선문학을 론함」에서 ‘문학은 산 인간을 그리며 인간에게 복무하는 인간학’이며, ‘인간 성격을 창조하고 그것을 생활발전의 논리에 따라 진실하고 생동하게 형상화 하는 데 그 생명이 있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북한문학의 창작원리와 창작지침을 살펴보면 크게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주체적 문예관의 확립으로, 주체사상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주체적 인간학을 내세우는 것이고, 두 번째는 당성·노동계급성·인민성을 구현하는 것이다. 당성은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강조하는 데 지나지 않으며, 등장인물의 대화를 통해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말 가운데 하나이다. 또, 계급성을 내세워 인민성의 의의는 주체사상이 ‘사람 중심의 세계관’임을 자랑하려는 데 있다. 세 번째는 수령형상을 창조하는 것이며, 이는 주체사상을 창시한 김일성의 혁명위업을 강조하는 것으로 북한 사회의 궁극적인 목표가 문예이론으로 나타난 것이 ‘수령형상창조’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문예이론을 보면 그들의 왜 인민대중을 혁명의 주체로 만드는 주체의 인간학을 강조하는지 알게 된다. 물론 그것은 종국에는 수령형상 창조로 이어지지만 중간 단계로써 당성?노동계급성?인민성의 구현을 통해 그들을 자주적인 주체로 형상화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북한 문학의 또 다른 특성은 정치와 나란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일성1인체제가 수립되기까지 많은 정치인들이 숙청되었던 만큼 문인들에 대해서도 대대적으로 숙청이 이루어진 것처럼 북한의 문인들은 예술인인 동시에 정치인이기도 하다. 또한, 문학을 정치사상적 도구로 사용해야 함을 공공연히 교시하고 있을 정도로 의도적으로 문학 속에 사상적인 면이 반영되고 있다.때문에 이념적 주제가 문학 속에 다분히 등장하게 되는데 북한 문학이 다루고 있는 주제 역시 사회주의 건설의 이념성 추구 내용, 당과 김일성을 찬양하는 내용, 항일 빨치산 이념 계승의 내용, 남한 혁명과 조국통일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Ⅲ. 북한에서 본 남한의 문학1. 인물 창조북한 문예이론의 핵심중 하나는 ‘주체적 인간학’을 내세우는데 있다. 여기에서 인간은 주체적이고 현실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이렇게 북한의 소설문학에서는 인물의 사상 감정을 구체적으로 깊이 있게 그리는데 중점을 둠으로써 산 인간의 생동한 형상을 창조하게 되는 것이다.)북한 문학에서의 인물창조는 북한 사람들의 삶의 총체로서의 인물 전형이 아니라 당의 문예정책에 따른 인물창조이고, 소설 속의 현실도 북한 사람들의 삶을 반영한 현실이 아니라 당의 주도하에 삶의 부정적인 면은 의도적으로 빼버리고 자신들의 체제만을 옹호한 현실이다.) 또한 북한의 주체문학은 개인의 (사상적인) 성장 소설적 경향을 띠는 것이 많기 때문에 인물에 대한 설정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따라서 이러한 북한 문예의 입장에서 봤을 때, 남한 문학에 등장하는 ‘개인적인 취미에 의해 고안된’, ‘속된 생활과 기구한 연정문제로 고민하는’ 인물들은 부정적 시각에서 바라봐 지는 것이다.특히 인물 구조에서도 북한문학의 특징적인 면을 볼 수 있는데, 영화 ‘꽃 파는 처녀’나 소설 ‘대학시간’에서 볼 수 있듯, 인물의 성격 대립이나, 갈등 구조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꽃분이네 가족과 지주와의 갈등구조, 정옥이와 호남 간의 사상적 대립이 그렇다. ‘꽃 파는 처녀’를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주와 일제를 욕하고 꽃분이를 동정할 것이다. 또한, ‘대학시간’에 등장하는 호남은 현재의 만족에 안주하는 인물로서, 작품 중반부에 가서는 정옥에 의해 비난받는다. 이 부분 역시 누구나 동감할 만하며 작품을 다 읽고 나서는 정옥이와 강좌장의 사상과 행동에 큰 감화를 받게 된다. 이처럼 긍정적인 인물과 부정적인 인물간의 갈등구조를 뚜렷이 드러냄으로서 긍정적 인물에 대한 깊은 감화를 유도하는 것이다.이에 비해 남한 문학에서의 인물 간 갈등 구조는 양립하기 보다는 다양한 양상을 띠고, 갈등 양상이 겉으로 드러나기 보다는 은밀히 표출되는 경향이 강하다. 또한 갈등의 원인이나 내용이 모두가 겪고 있는 민족적인 것이기 보다 개인이나 어떤 특정한 집단에 국한된 경우가 많다는 점이 북한이 지적하고 있는 남한 현대문학의 인물 창조상의 문제점이다.2. 형식주의 순수문학에 대한 비판「남조선문학을 론함」에서는 남한 문단의 형식주의 순수문학에 대해 문학의 사상성과 예술성을 분리시키고 문학의 형식과 기법을 절대화 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한의 현대문학은 민족 주체의 민족문학의 견지에서 볼 때 ‘분렬 문학’이라고 말한다.바야흐로 ‘주체의 문학은 그 본성과 사명감으로부터 출발하여 또 현시대의 절실한 요구로부터 출발하여 그 사상적 내용에 있어서 인민대중의 삶과 그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 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대중의 투쟁을 그려야 하며 그 형식에 있어서 민족적인 것을 옹호함으로써 민족문학의 형성과 발전에 적극 이바지 하여야’) 하는데, 남한의 문학은 그 자체에서 민족적인 시대적 요구와 사상성을 배제하여 당장의 우울증과 권태증을 달래는 데만 치중하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문학이라는 것이다.또한 남한의 현대문학이 응당 행해야할 ‘일제 군국주의와 미 제국주의에 대한 매도와 비판’을 하지 않는 것은 곧, 미국, 일본의 정복과 약탈, 그리고 민족문화 말살을 합리화 하는데 기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암흑의 핵심 - Heart of Darkness유람용 범선 넬리 호는 잦아든 밀물 때문에 닻을 내리고 조수가 바뀌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가 지고 강 위에 어둠이 깔리자, 선원들 중에서 아직도 유일한 사람인 말로우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말로우는 가정에 머무르기를 소망하는 일반 선원들과는 다르게 천성이 뱃사람으로 배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을 즐기는, 선원으로서는 완전히 다른 유형에 속하는 사람이었다.말로우는 어릴 때부터 지도를 좋아하고 탐험의 위업에 매혹되어 있었다. 그에게는 모든 지구상 공백의 지역에 마음이 끌렸고, 실제로 가보기도 했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크고 가장 많은 공백이 있는 곳이 있었다. 그곳은 그가 어린 시절에 지도에서 본 큰 뱀이 누워있는 형상을 한 콩고강이었다. 그는 마치 뱀이 새를 홀리듯이 콩고강에 홀려 들어갔다. 그래서 그는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그곳에 꼭 가야겠다고 생각해 친척들을 졸랐다. 그리하여 당대 유력자였던 숙모의 도움으로 콩고강을 오르내리는 증기선의 선장이 된다.그리하여 이곳 저곳을 거치던 중에 그는 원주민을 ‘적’이라 표현하며, 원주민이 살고 있는 대륙에 무차별 폭격을 가하는 등 백인들의 횡포를 보며 환멸마저 느낀다. 지겨운 항해를 시작한 지 30일이 지나서야 그는 비로소 콩고 강의 하구에 닿아 관청소재지 근처에 정박한다.거기서 다시 스웨덴 선장의 증기선을 타고 강 상류에 있는 주재소로 향하는데, 가는 도중에도 백인들의 수탈에 저항하지 못하며 심지어는 죽임당하는 숱한 원주민들을 보게 된다.그는 주재소에서 열흘 간 기다려야 했는데, 하루는 회계주임이 오지로 더 들어가면 반드시 커츠를 만나게 될 라며 커츠에 관한 얘기를 해준다. 그의 말에 의하면 커츠라는 인물은 주목할 만한 인물로, 그 고장에서도 가장 오지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다른 모든 교역소에서 수집한 상아를 목두 합친 것만큼 많은 상아를 그것도 혼자서 보내오고 있다는 것이다. 또 그는 머지않아 회사의 행정처에서 상당한 인물이 될 것이며, 유럽에 있는 회사의 이사회에서 그를 요직에 앉히려 한다는 말도 들려준다.다음날 드디어 말로우는 주재소를 떠나 50명의 사내들로 구성된 대상과 함께 200마일 길을 도보로 나서게 된다. 그 과정에서도 그는 사람들이 버리고 떠난 거주지, 이마에 총을 맞고 죽은 한 중년 흑인의 시체, 스스로 오솔길의 보수를 책임지고 있다는(그러나 실제 길은 이렇다 할 만 한 보수가 없는 오솔길이었다.) 백인을 만나게 된다. 일행 중에는 백인 동행도 있었는데 몸이 약해 자주 쓰러지곤 했던 그가 마침내 열병에 걸렸다. 그로 인해 많은 운반원들이 탈주하는 파탄지경의 상황에서 보름 째 되던 날, 그는 다시 그 큰 강에 보이는 중부 주재소로 들어가게 되었다.그곳에서 그는 그가 타야할 배가 암초에 부딪혀 침몰했다는 얘기를 듣고, 기선을 물 속에서 건지는 작업에 착수해야만 했다. 자기 배를 보기위해 배가 있는 곳으로 간 그는 그 곳 지배인에게 주재소 한 곳에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으며, 그곳 소장인 커츠씨가 와병중이라는 소문이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또, 기선의 수리가 석 달이나 걸린다는 얘기를 들은 말로우는 다음날 바로 일에 착수한다. 그러던 어느 날 셀 수 없는 물건들이 가득히 들어있던 초막 한 채에 어이 없이 불이 붙고 만다. 그 날 지배인과 함께 말을 주고받던 일급 회사원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 지배인의 방에 있는 유화가 커츠라는 사람이 그린 그림이라는 말을 듣게 되고, 전에도 회계주임과 지배인으로부터 두 번이나 들은 적이 있는 커츠에 대해 묻는다. 그러자, 내륙 주재소의 소장이라는 말부터 시작해서, 천재이며, 연민과 과학과 진보의 사도이며 아주 특수한 존재로서 여기에 와 있다는 말을 한다. 대화를 끝내면서 말로우는 그에게 배를 고치는데 필요한 대갈못을 구해 줄 것을 부탁한다.그러나 3주 뒤에 도착한 것은 필요한 대갈못이 아니라, 엘도라도 탐험대였다. 그들은 원주민들을 마치 동물처럼 부려먹으면서 오지로부터 온갖 보물들을 착취해 오는 길이었다. 주재소 지배인의 숙부가 엘도라도 탐험대의 지휘자였다. 어느 날 저녁, 말로우는 기선의 갑판 위에서 누워 있다가, 지배인과 그의 숙부가 산책을 하며 나누는 얘기를 우연히 엿듣게 된다. 자세히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들의 의도는 커츠를 음해하려는 것 같았다. 그 며칠 뒤, 엘도라도 탐험대가 밀림 속으로 들어가자, 밀림이 그들을 삼키듯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 때 말로우는 머지않아 커츠를 만나게 될 거라는 느낌에 흥분하고 있었다.말로우 일행이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던 항해 길은 눈을 가린 사람이 험한 길에서 화물마차를 몰고 가는 것과 같았다. 말로우 일행은 도중에 식인종 원주민들을 선원으로 고용하기도 했다. 이따금 마주친 주재소의 백인들은 기선이 자기네가 원하는 무언가를 획득할 수 있게 되길 바라는 곳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르나, 말로우의 생각에 배는 오직 커츠를 향해 가고 있을 뿐이었다. 증기 파이프가 새기 시작해 배의 속도는 떨어지고 새로운 풍경이 말로우 일행 앞에 전개되었다가 등 뒤로 사라지곤 했다. 그들은 암흑의 핵심 속으로 깊이 침투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배가 강의 한 만곡부를 돌 때면 강둑에 서서 손뼉을 치거나 발을 구르는 원주민들을 만나게 되었다. 내륙 주재소에서 하류 쪽으로 50마일쯤 떨어진 곳에서는 갈대 오두막 한 채를 보게 되었고, 깔끔하게 쌓아놓은 장작더미에서는 등의 말들이 적힌 문구를 보게 된다.이튿날 저녁, 커츠의 주재소에서 약 8마일 쯤 떨어진 곳에 이르렀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강 가운데에 배를 정박했다. 해가 뜨고 안개가 깔렸다가 걷히기 시작했을 때, 비명을 선두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 원주민들의 화살 습격을 받게 된다. 화살과 창이 빗발치는 속에서 말로우는 키잡이 보조 한명을 잃게 되고, 말로우는 그에게 꽂힌 창을 모질게 뽑고는 냉정히도 그의 주검을 강에 던져버린다. 함께 탑승했던 식인종 원주민이나 순례자들은 그를 비난했으나, 말로우는 식인종에게 먹히느니 급류에 휘말려 가는 편이 죽은 이를 위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말로우는 이 때, 식인종 원주민들이 검둥이 키잡이의 시체를 먹고 싶어 하면서도, 백인 순례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을 통해서, 식인종들조차 꺼리는 백인들의 검은 속을 느끼게 된다.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주재소에 이른 말로우 일행은 커츠의 마지막 제자라고 하는 러시아 청년과 만난다. 그는 커츠가 너무 깊은 오지로 들어갔으며, 빨리 그를 데려 가야 한다고 한다. 커츠는 많이 쇠약해 져 있는 상태였지만 삼림 속 깊은 곳을 혼자서 계속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또 청년은 커츠에 대해 놀라운 얘기를 하는데, 커츠는 병세가 나날이 악화되어 가는 와중에 깊숙한 오지에서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또한 커츠 그 오지에서 토착민들의 숭배를 받고, 그들 위에 군림하고 있으며, 근래에 들어서는 모든 것을 증오했다는 것이다. 청년이 그에게 떠나자고 제의하면 커츠는 떠나겠다고 했다가도 다시 남아있고, 또 상아 사냥을 떠나서는 몇 주일 동안은 보이지 않고는 하는 것이었다. 원주민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잊고 있었다는 것이다. 말로우가 “그렇다면 그가 미쳤군요”라고 말하자 청년은 화를 내며 커츠씨가 미쳤을 리는 없다고 항의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