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대장의 연구현황과 과제1. 호적대장의 연구현황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민을 대상으로 각종 역을 부과하기 위해 3년에 한 번씩 호적대장을 개수하도록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명시되어 있었다. 호적은 호구단자(戶口單子), 호적대장(戶籍大帳 ), 준호구(准戶口)의 세 가지 형태로, 국가정인 행정문서였다. 민들은 자가(自家)의 호구 상황을 호구단자에 적어 보고하였고, 관에서는 이를 토대로 착오 여부를 확인하여 호적대장을 작성하였다. 호적대장에는 각 주호(主戶) 또는 솔거인의 직역, 성명, 나이, 본관, 사조의 직역과 성명, 가족의 직역, 성명과 나이 그리고 노비에 대한 사항 등이 상세히 기록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호적대장은 당시의 가족구성, 인구, 신분, 혼인 등에 대한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여러방면 연구에 활용될 수 있다.그동안의 연구에서는 호적대장을 신분 관련 자료로 주로 활용하였으나 최근에는 일부 연구자에 의해 호적대장을 기층 민중의 생활사 자료로 활용하려고 시도하는 등 여러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에는 호적대장의 주호 직역(職役)만을 단순히 신분별로 통계 처리하여 조선후기 변동 양상을 밝히고자 하는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다.1) 1970년대까지의 호적대장 연구 동향조선후기 호적대장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는 사방박에 의한 대구부 호적대장 분석이었다. 그는 1690년부터 1858년까지의 대구부 호적을 50년 단위로 하나씩 선정하여 전체 호구 중의 각 신분별 변화상을 추적하였다. 그는 먼저 각종 직역을 상세히 검토하여 14개 부류로 나누고 이를 양반?상인?노비의 세 신분으로 분류하여 호주의 신분 변화를 추적하였다. 이를 통해 후대로 내려올수록 양반호가 증가하는 한편 노비호가 소실되고, 평민호도 19세기부터 격감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사방박의 이 연구는 비록 ‘이조사회의 붕괴에 관한 근본문제’를 규명하기 위한 궁극적인 의도를 가지고 출발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후 호적대장 분석의 중요한 기준을 제시하였다.1960년대 들어 김용섭은 18세기 전반기 후 ‘양반 인구수의 격증?상민 인구수의 격감?외거노비수의 실질적인 소멸?솔거노비의 절대수의 감소 속에서의 계속적인 존속’이라는 현상이 나타났음을 계량적으로 밝혔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일성록(日省錄)』?『우포청등록(右捕廳謄錄)』 등과 같은 각종 사료를 함께 이용하여 이러한 신분제 동요의 실상을 보여주고, 이것은 조선후기 농업생산력의 발전에서 야기된 당시의 사회 경제적 변동에 기인하고 있음을 밝혔다.김영모는 조선후기의 신분 변동양상은 중간층에서의 상향 이동이 특징적이었음을 확인하였다.) 다만 이 시기 신분변동이 모든 신분에서 확인되는 것은 아니고 통혼권(通婚圈)은 신분내혼(身分內婚)이 지배적이었으며 도시와 농촌 지역 간에 변동의 차이가 적지 않음을 지적하여 기존의 조선후기 신분 변동 이해에 다소 의문을 제기하였다.이와 함께 기존 연구를 통해 나타난 조선후기 신분의 상향 이동 현상에 대한 부분적인 이견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1972년 Susan Shin은 하버드 옌칭도서관에 보관된 1672년 금화(金化) 호적을 분석한 결과 일반적인 경향과 달리 이 지역에서는 신붠 하락의 경향이 압도적이었음을 밝혀 임진왜란 이후 신분의 상향 이동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는 통설에 최초의 의문을 제기하였다.) 또한 Edward Wagner도 같은 학술지에 수록된 논문에서 1663년 서울 북부장 호적을 분석하여 양반에서 양인으로, 그리고 양인에서 노비로 전락하는 하향적 이동의 비중이 상당히 컸음을 밝혔다.)조선후기 신분변동이 일반적으로 상향적이었다는 연구 경향에 대한 국외의 문제 제기는 국내 연구자들에 적지 않은 자극을 주었고,) 이와 비슷한 분석을 내놓은 연구 성과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와 관련한 연구가 주로 17세기의 자료를 이용한 것들이었기 때문에 기존 학설에 대한 근본적인 수정을 가하기는 어려웠다.)2) 1980년대 이후의 호적대장 연구 경향과 특징1980년대는 호적대장 연구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된 시기였다. 대표적인 예로 새로운 호적대장의 발굴과 영인 출간연구자에 의해 다양한 분양의 접근이 가능하게 되었다.새로운 호적대장의 공개와 출판으로 이를 이용한 연구가 활기를 띠게 되면서 관련 연구는 크게 몇 가지 방향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하나는 기존의 연구 방식인 주호의 직역을 추출하여 이를 신분 분류표에 따라 분류한 후 이를 통해 1970년대까지의 통설로 인정된 조선후기 신분변동설을 재확인하는 연구 경향이다. 직역으로 신분을 분류하고 이를 통해 신분 구조 변동을 확인하는 연구 방법은 직역과 신분이 가지는 상관성이 떨어진다는 계속되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연구방법론이 나타나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최근까지 그대로 이용되고 있다.)다음으로 신분 변동을 재확인 하는 기존의 연구경향과 함께 연대기 자료 등을 통해 확인된 각 신분과 계층의 실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소적대장을 활용하는 연구가 나타났다. 서한교는 납속(納贖)을 통해 신분을 상승한 납속인의 존재 양상을 단성호적을 통해 확인하고 납속이 조선후기 상민의 양반 신분 상승에 주요한 수단이 되었음을 주장하였다.)특히 신분상으로 중간 신분에 속하여 하위 신분의 편입이 보다 용이하면서 동시에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여 양반 신분으로의 편입도 용이한 향리 계층의 신분 변동 양상을 호적대장을 통해 분석하여 조선후기 신분 구조 양상을 확인하고자 하는 연구가 다수 제출되었다.) 이를 통해 향리층의 신분상승 경향이 적지 않았음이 규명되었다. 최근에는 부족한 향리를 보충하기 위해 관노비 등 하위 신분에서 선발된 ‘가리(假吏)’의 사회적 지위 등을 호적대장을 통해 분석하여 조선후기 신분변동의 일 양상을 밝힌 연구도 주목되고 있다.) 여러 직역 중에서 향리층이 우선적인 검토대상이 된 것은 이들이 양반과 상민의 중간 계층으로 상하 신분 변동의 양상이 잘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향리는 세습 직역인 까닭에 다른 신분에 비해 각 식년별 호적대장 상에 가계별로 시계열적인 추적이 용이하였기 때문이다.호적대장에 나타난 특정 계층의 가계 추적을 통해 신분 변동 양상을 연구를 진행하여 왔다.) 이 결과 이들 신분층의 일부에서 직역을 유학 등 양반층의 것으로 상승시킨 경우가 있지만 이들이 양반층으로 신분을 상승시킨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준호구를 이용한 사례 연구를 통해 평민층들은 지속적으로 신분 상승을 모색하였으나 19세기 후반까지도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음을 밝히고 있다.)또한 사방박 이래의 기존 학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연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호구단자 등 한 가문에 소장된 일련의 고문서를 활용한 최승희의 향리 가문 신분 변동 사례연구는 대표적인 성과이다.) 이 연구는 호적대장을 이용한 것은 아니지만, 호적대장에 기록된 주호의 직역만을 통계적으로 처리하여 조선후기 신분 변동을 확인하던 기존 연구 방법을 실증적으로 비판하고 가문별로 그 변동 양상을 추적한 선구적인 성과였다. 최승희는 향리 가문 분석을 통해 이들의 신분 변동은 오히려 하강 이동의 양상을 띠고 있음을 밝혀 통설을 비판한 것이다. 이후 그는 호적대장 등에 나타난 각 직역의 신분적 지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와 사회적 변동에 따라 변화될 수밖에 없음을 밝혀 논지를 보강하였다.)이준구는 최승희의 연구를 계승하여 직역은 개인의 신분을 판정하는 유력한 수단이지만 신분과 통시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고 항상 시대 및 사회 상황과 유기적으로 관계하면서 변천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다른 연구들이 대부분 호적대장 상의 변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과는 달리, 이준구는 호적대장 분석과 함께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 등 다양한 사료를 아울러 활용한 점은 그의 연구가 지니는 또 하난의 장점이었다. 최근 그는 향리, 백정 등 일부 계층에서는 고착화 된 세습성을 보임으로써 신분 지속성의 경향도 있음을 지적하고 있으나, 대세는 신분직역의 상향 이동에 의한 중세적 신분 질서의 해체라는 점을 다시금 확인하고 있다.)이상과 같이 그동안 호적대장을 이용한 연구는 대부분 신분, 직역 변동 여부를 규명하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이와 달리 1980년대 중반 이후 각 군현의 호정을 반영하는 자료로 이용할 수 있는 연구의 실마리를 제공하였다.최근 역사학 분야에서는 호적대장을 민중 생활사를 재구성하는 자료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심재우와 임학성은 단성 지방에 정배(定配)된 정배인의 존재 양상을 단성호적을 이용하여 밝히고 있다. 그동안 유배생활에 대한 연구가 그다지 활발하지 않은 상태에서 호적대장을 이용한 이들의 연구는 호적대장 활용의 외연을 넓힌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편 정지영은 조선후기 과부와 그 재혼의 실태를 단성호적을 통해 확인하는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이와 함께 서양사하계 미시사, 특히 역사 인구학 연구의 영향을 받은 백승종은 각 개인을 중심으로 하여 호적대장의 관련 기록을 총망라하여 분석하는 새로운 연구방법을 도입하였다. 그는 1678년부터 1789년까지 단성호적에 나타난 사노(私奴), 흥종(興宗), 흥룡(興龍) 일가를 중심으로 하여 그들과 관련을 맺고 있던 노비, 평민, 양반들의 일상적인 삶 자료를 통해 민중의 생활을 복원하는 종합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함을 역설하였다.)호적대장을 새로운 측면으로 이해하거나 새로운 연구 방법론을 도입하여 분석하는 연구가 점차 활발해짐과 함께, 1990년대 들어서면서 기재상의 특징 등 호적대장의 기록자체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호적대장 자체에 대한 검토는 이를 활용한 보다 정치한 연구를 위해서도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임학성은 호적대장에 양반가의 솔거노비 가운데 상당수가 다시 독립호로 기재되는 이중등재 현상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는 주인호의 별가 등에 거주하는 노비를 기록하거나 혹은 통수(統首)의 직임을 기피하려는 양반층이 자신의 솔거노비를 통수르 올리기 위해 모록(冒錄)하는 양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전경목은 19세기말 남원 둔덕방의 호적중초를 분석하면서 가좌(집자리 순서)에 따라 작통(作統)하도록 규정된 법전의 내용과는 달리 무순(無順)으로 작통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밝혔다.) 이러한 현상은 정진영의 단성호적 분.
일본의 식민지배와 사회경제적 특질[목차]Ⅰ. 서론-서구 제국주의 식민통치의 두 가지 유형Ⅱ. 일제식민통치의 성격1. 조선총독의 지위2. 내지연장주의Ⅲ. 식민통치의 성격변화1. 무단통치의 탄압2. 문화정치의 실상3. 침략전쟁기의 수난Ⅳ. 열강의 이권침탈과 경제의 예속화 과정1. 열강들의 이권쟁탈2. 이권수호운동3. 일본에 의한 경제의 예속화 과정4. 경제침탈 저지운동Ⅴ. 일제하 농업정책과 식민지주제의 전개1. 일제하 농업정책의 사회경제적 배경2. 식민지 농정체제의 구축3. 식민지주제의 강화Ⅵ. 일제의 상공업정책과 상권수호운동1.일제의 상공업 정책2. 상권수호운동3. 정책이 가져온 상공업의 문제점Ⅶ. 일제하의 문화정책1. 교육정책2. 언론정책3. 종교정책4. 친일파 양성정책Ⅷ. 결론Ⅰ. 서론 -서구 제국주의 식민통치의 두 가지 유형유럽의 신대륙발견이후 약 3세기에 걸쳐 전개된 유럽인의 아메리카대륙 점령과 이주 중심의 식민의 역사는 19세기 이후 새로운 양상을 보이게 된다. 즉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주 무대로 하는 유럽열강들의 세계분할이 불과 수십 년 동안 급속히 진행되면서, 그 내용도 이전의 이주식민지형에서 이민족지배형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일제 식민정책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이민족지배형 식민지배의 두 전형으로 일컬어지는 영국의 자치방식과 프랑스의 동화방식을 살펴보며 일본식민지배의 특질을 고찰하는데 비교대상으로 삼고자 한다.1. 영국의 자치방식제국주의 단계이전에 이미 전세계에 걸쳐 광범한 식민제국을 형성하고 있던 영국은 그 지역에 따라 통치방식을 달리했다. 이주식민지의 경우 유럽인의 이주과정이 곧 본국의 법과 제도의 이식과정이었다. 본국과 거의 동질적인 사회를 만들어 낸 것이다. 정치적인 면에서도 본국의 직접적 통제를 최대한으로 억제하고 식민지에 책임 내각제를 성립시켰다. 식민정부는 본국이 아니라 선출된 식민의회에서 책임을 지는 자치령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이민족지배형의 식민지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간접통치이질적인 사회를 통치하는 데에는 기존사회의 다. 요컨대 조선총독부의 행정권은 입법권가 분리되어 있지 않고, 사법권의 독립도 허용하지 않아 조선 내에서는 총독의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수단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조선총독의 지위저하란 본국정부와의 관계에서의 변화일 뿐 조선 내에서의 총독의 절대 권력에는 변함이 없었다.2. 내지연장주의-하라의 내지연장주의하라는 기본적으로 제도 전반을 일본과 동일하게 실시하는 내지연장주의를 주창했지만, 일본과 차이가 나는 조선의 문명, 생활상태 등을 이유로 ‘점진적’인 동일시책의 실시를 역설했다 또한 자치와 참정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 이라고 적극 부정하고 일본의 시정촌제와 유사한 제도를 실지해 점차 부현제에 이르도록 할 것을 제안했다. 하라의 내지연장주의의 본질은 본국 중앙정부 수준의 참정과 구미제국의 식민지 자치와 같은 홈룰(home rull)방식의 자치제를 부정하고 조선을 일본의 부현과 동일한 하나의 지방으로 제도화 시키는데 있었다.-사이토의 내지연장주의1919년 9월 3일 제 3대 조선총독으로 첫 등장한 사이토는 ‘훈시’를 통해 새로운 시정방침을 밝혔다 그것은 일시동인의 취지를 언급한 천황의 [총독부관제개혁 조서]에 기초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문화적제도의 혁신을 통해 조선인을 가르치고 이끌어 그 행복과 이익을 증진하고 장래문화의 발달과 민력의 충실에 따라 궁극적으로 정치상, 사회장의 대우도 내지인과 동일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즉 장기적인 전망 속에서 점진적으로 식민지 조선을 일본의 한 부분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하라의 “조선통치사견‘에 기초한 이른바 문화정치를 실시하면서 직접 체험하게 된 조선사회의 본질과 총독정치의 실상을 통해, 총독 취임 시 천황의 조서에 입각해 받아들였던 소위 내지연장주의의 원론에 입각한 조선총독정치의 지배관을 정립했다. 그 핵심은 조선인을 제국의회에 참석시켜 참정권부여를 실체화 하는데 있었다. 그것은 당시 논의되던 자치주의나 하라의 내지연장주의와는 구별되는 사이토의 조선지배 장침이라 본래 민족해방운동의 한 방법론이 아니라 ‘문화정치’시기 민족분열정책의 한 변형이었음을 알 수 있다.3. 침략전쟁기의 수난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식민지 통치체제는 ‘문화정치’의 기만정책 시기가 끝나고 파시즘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는 일본 본국의 정국도 소위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가 끝나고 파시즘 체제로 전환되어가는 때였다. 세계공황의 여파로 궁지에 몰린 일본 독점자본주의가 그 돌파구를 찾기 위해 대륙침략을 본격화해가던 시기이기도 했다.-식민지 파쇼체제본격적 대륙침략의 계기를 ‘만주사변(滿洲事變, 1931)에서 연 일본은 이후 다시 중일전쟁(中日戰爭, 1937)으로, 마침내 태평양전쟁(1941)으로 그 침략전쟁을 확대시키면서 철저한 군국주의 파쇼체제로 바뀌어갔다. 따라서 그 식민지 조선은 일본 본국보다 더욱 심한 파쇼 통치체제 속으로 들어갔다.식민지 파쇼체제의 강화는 먼저 군사력과 경찰력의 증강에서 시작되었다. ‘문화정치’시기에 2개 사단이었던 조선주둔 일본군은 ‘만주사변’ 후 곧 1개 사단이 증가되었다. 중일전쟁기를 거쳐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약 23만 명의 일본군이 조선에 배치되어 전국토를 완전 장악했다. 한편 경찰병력도 ‘만주사변’ 후에 2948개 관서(官署)에 2만 229명으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3212개 관서에 3만 5239명으로 증가하여 파쇼통치체제를 강력히 뒷받침했다. 파쇼체제 강화의 또하나의 방법은 철저한 사상통제로 나타났다. 민족해방운동자 중심의 치안유지법 위반자를 감시하기 위해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만들었다. (1936.12)태평양전쟁을 준비할 무렵에는 ‘사상보국연맹’을 개조하여 ‘야마또쥬꾸’를 만들고 (1941.1) ‘사상범’으로 지목된 사람을 모두 가입시켜 ‘사상전향’을 강요했다. 1943년 현재 야마또쥬꾸는 91개 지방에 회원이 5400명이었다. 한편 태평양전쟁을 준비하면서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을 공포했다. (1941. 2) 태평양전쟁중에는 사상통제가 한층 더 강화 되었다. 전시임을 내세워 형량을 크게 높인 조선전시형 중추원의 대신급 인물 11명의 천거에 의한 새 개혁정부수립요구에 직면하고 있던 중에 민영기 등 수구파들은 군대로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킬 것을 권고·주장하였다. 고종은 러시아와 일본공사의 반응을 타진한 뒤 12월 23일 시위대에 의한 만민공동회의 해산을 명하였고, 25일 11가지 죄목을 들어서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를 불법화시키고 해체령을 포고하였으며 430여 명의 지도자들을 체포·구금함으로써 42일간 철야시위로 전개된 만민공동회는 외세를 업은 친러수구파의 탄압으로 해산 당하였다.3. 일본에 의한 경제의 예속화 과정-관세일제의 관세정책은 식민지를 본국과 공통의 관세체계 속에 두는 방식을 지향했다. 다만 조선합병 시에 구한국과 외국 간에 맺은 조약은 무효화된 반면, 종래부터 실행되고 있던 외국과의 불평등한 협정 관세율에 대해서는 향후 10년간 그대로 둘 것을 선언하였다. 당시 일본이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의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1911년의 조약개정으로 겨우 관세자주권을 회복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과의 관세율도 종래대로 유지되어 1920년까지 조선 관세는 식민지화 이전과 실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1920년 본국과 식민지간의 관세를 통일한다는 방침에 따라 일본의 관세관계 제법이 조선에 시행되어 외국에 대해서는 통일된 관세체계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때 조선과 일본 간의 관세는 일본 측은 철폐하였으나 조선 측은 재정상의 이유로 당분간 남겨두기로 했기 때문에 일본으로부터의 이입품에는 이입세가 부과되었다. 1923년에 주정, 주정함유음료, 직물의 3품을 제외하고는 모든 이입세는 철폐되었고, 1941년에 3품의 이입세 마저 모두 철폐되었으며, 사실 이 기간 동안 세율이 인하되는 바람에 양 지역 간의 관세장벽은 이미 없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한편 일본은 관세자주권을 회복한 뒤 산업보호를 위한 관세개정을 거듭하여 유세품(有稅品)의 세율이 크게 인상되었는데, 이 개정관세율이 식민지에도 적용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본국에 대해서는 무관세의 상태였기 때문에 식민지의 민족의 규제 · 간섭 조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품종 규정 : 일본 품종을 경작토록 하며 (구체적으로 품종을 지정하기도 함)? 시비 규정 : 시비를 충분히 하도록 하고(판매 비료의 사용, 시비 회수까지 규정하기도 함) 그 비용은 원칙적으로 소작인 부담으로 한다.? 수리 규정 : 관개 · 제방의 관리를 철저히 하되 그 비용은 원칙적으로 소작인이 부담한다.? 소작쌀의 건조 · 조제 · 포장 규정 : 건조 · 조제 상태를 검사한 뒤 소작료를 수잡하며 벼가 불량할 때에는 다시 건조케 하거나 할증료를 거둔다. 가마니 규격과 중량을 지정하기도 한다.⑤ 기타 경종법 · 농기구 이용에 대한 규정 : 소갈이 · 씨뿌리기 · 못자리 · 모내기 · 김매기· 피뽑기 · 수확 등 경작법 개량과 개량 농기구의 이용 등을 규정하였다.)위와 같은 관행은 점차 조선인 지주계급에게로 확산되어 갔다.‘일본의 지주 , 특히 대지주 중에는 상세한 계약서를 작성하는 자가 많고, 조선인 지주 역시 이것을 본받는 자가 적지 않다’든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농장, 일본인 지주와 조선인 지주 중에 신시의 소작계약서를 사용하는 자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총독부 권력도 지주 · 소작인간의 분쟁을 막고 농사개량상의 장래를 제거하기 위하야 증서계약을 적극 권장하였다.-기구의 강화생산력 발전에 따라 쌀의 생산은 증대하였다. 문제는 증가된 생산물을 어떠한 방식과 구조로 분배하느냐 인데 생산물의 분배문제는 곧 지대문제로서 식민지하 조선농업의 성격논쟁에서 논란의 초점이 되었던 것이다.)토지조사사업의 시행과 더불어 지세(地稅)의 지주 납부원칙이 정해지자, 지세의 소작인 납부방식이 행해졌던 삼남(三南)의 소작관행에서는 변화가 일어났다.일례로 전라도 지방에서는1910년대 중반에 이르러 종래 삼분법(三分法)으로 통용되던 도지법(賭地法, 전라도 이외 지방의 집조법과 같음)이란 용어가 집조법이란 용어로 통일되어 갔는데, 이와 동시에 소작료 율이 1/2수준으로 증가하였다. 이 같은 변화는 징수방법상의 다.
양세법농민에게 토지를 균등히 분배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조용조를 할당한다는 당조의 재정원칙은 토지겸병의 가속화로 점차 사회변화에 맞지 않게 되었다. 이미 개원연간의 전성시대(720년)에도 균전법에 배치되는 대토지 겸병이 진척되어 이에 따라 유망하는 농민들이 증가하고 있었다.안사의 난 이후에는 본적지를 떠난 농민이 점점 많아지고 더불어 번진이 할거하여 하북 삼진과 같이 호구를 신고하지 않고 조세를 상납하지 않는 곳이 생겨났다. 그래서 정부가 파악할 수 있는 호구는 740년대의 불과 1/3의 수준 밖에 되지 않아 조용조로는 더 이상 재정을 꾸려나가기 힘들어졌고 780년, 조용조를 폐지하고 양세법이라는 새로운 세법을 시행했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①단세의 원칙으로 세율과 징세시기가 다른 조용조 외의 여러 세목을 일체화 해 양세 이외의 징수를 엄금했다. ②2회 징수의 원칙으로 하세는 6월, 추세는 11월을 기한으로 했다. ③로를 대상으로 하고 액수는 자산에 대응하는 것을 원칙으로, 농민은 소유지의 면적을, 도시민은 자산에 따라 과세했다. ④양출제입의 원칙으로 세출예산을 산정해 세액을 결정했다. ⑤전액전납의 원칙으로, 당시 화폐경제의 발전에 대응하는 조치였다. ⑥거주지 등록ㅇ듸 원칙으로 토착민과 거류민의 여부에 상관없이 그 지역의 현재 거주자를 대상으로 과세하였다. 이 세법을 통해 그 때까지 본적지를 이탈하여 탈세를 꾀하던 유산의 객호 180만을 납세자로 편입할 수 있었다.
원대 사회와 문화의 특징원은 1279년 남송을 멸망시키고 북방 유목민족으로 전 중국을 직접 지배하는 최초의 정복왕조를 이룩하였다. 쿠빌라이는 광대한 영토와 다양한 문화를 가진 다민족을 통치하는데 극소수의 몽골인들에게 극단적인 특권을 부여하는 몽골인 지상주의를 확립했다. 원은 통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특수한 관계와 반항세력을 억제하고 강력한 정치체제를 형성하기 위해 엄격한 민족차별과 계급정책을 실시해 민족을 4등급으로 구분하였다.제 1등급은 국인인 몽골인이고 제 2등급은 이슬람 계통의 색목인으로, 이 두 계급은 사회 지배층을 형성하고 정관에 진출했다. 제 3등급은 한인과 요인, 제 4등급은 남인(남송의 통치 하에 살았던 사람들)으로 이루어진 피지배 계층이었기 때문에 요역과 조세를 부담했지만 정관에 진출할 수 없었고 그들이 맡은 관직은 정원을 채운 적이 없다고 한다.이는 원조의 민족차별 정책을 관리등용에 있어서도 엄격한 차별을 적용해 과거제도 대신 문벌주의를 채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원의 관리등용은 조정과의 관계가 중시되는 문벌귀족제의 성격이 강하였다.원대는 관영 수공업이 크게 발전하였던 시기였다. 국내외 정복전쟁으로 인한 군수품 수요와 귀족계층의 사치품 수요 증가로 인해 포로와 장인들을 관영공장에 배치시켜 생산 활동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장인에 대한 예속관계가 엄격해 모두 별도의 장적에 등록되었고 이는 혈통에 의해 세습되었다.원조는 수공업의 발달을 기반으로 상업을 크게 장려해 대도를 중심으로 한 상업 도시가 출현하였으며 화폐를 유통하여 강제적으로 사용하게 했다.
유럽의 출현과정을 논하시오.오늘날 유럽이라는 대륙에 살고 있는 다양한 종족들은 어떤 계기로, 언제부터 그 대륙을 통틀어 ‘유럽’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불과 10세기까지도 스스로를 로마인이라 여기던 유럽에 사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바꾸어 놓은 요소들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해서 유럽의식이란 단순히 지리개념만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한 언어와 세계관처럼 삶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결합된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요소들이 유럽의식으로 고착화되는 과정을 치밀하게 살펴본다면 유럽의 출현과정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제 종족왕의 역사와 유럽인들의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끼친 각각의 요소들에 대해 역사의 흐름을 따라가며 살펴보겠다./ 유럽 땅에서 힘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서유럽으로, 로마인에게서 게르만인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은 800년경에 이르러서이다. 바로 이때가 크리스트교를 바탕으로 로마의 문화 요소와 게르만의 문화 요소가 하나로 통합되어 다른 문화와 구별되는 서유럽 문화가 형성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중세 초 정치사의 중심은 메로빙 왕조사와 카로링 왕조사인데, 이들 왕조의 통치력의 중심지, 곧 중세 초기 힘의 중심지는 샤를마뉴 제국이 위치한 라인강 유역이다. /이제 더욱 자세히 종족왕 역사의 시작을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창시자인 클로비스로부터 시작하여 샤를마뉴에 이르기까지 크리스트교와의 관계와 결부시켜 살펴보겠다. 클로비스는 프랑크족만의 강력하고 독특한 정체의식을 창조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로마와의 공통성을 강조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479년 프랑크족이 클로비스에 의해 크리스트교로 개종함으로써 이후 여러 게르만족들의 개종을 촉진 시켰다. 이는 로마와의 연합 체제를 구성하기 위함이었고 실제로도 로마 귀족들의 협조를 확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클로비스의 사후 그의 세 아들은 분할상속제에 의해 종족왕위와 영지를 분배 받는다. 이 후 부르군드, 네우스트라이사, 아우스트라시아의 세 왕국으로 나뉘어 각기 메로빙거 왕가의 의해 통치되다가 8세기 초 통합된 프랑크 왕국이 다시 유럽의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732년 프와티에 전투에서 이슬람 군을 격파한 카로링거 가문의 영웅 샤를 마르텔에 의한 것이었다. 샤를 마르텔의 아들 피핀 2세는 메로빙거 왕조의 무력한 왕을 수도원에 가두고고 스스로 권력을 차지한다. 그리고 적절한 질서유지를 위해 실권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교황의 승인을 얻게 되어 귀족회의에서 왕으로 선출되고 주교 보니파키우스에 의해 도유되었다.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 때에는 교황과 프랑크 왕국과의 유대관계가 더욱 강화된다. 그 배경은 800년 12월 24일에 로마의 베드로 성당에서 거행된 카로링거 가문의 찰스대제 황제대관식이다. 이는 황제 없이는 교황이 있을 수 없고 황제가 가는 곳에는 반드시 교황이 있음으로써 황제와 교황이 대등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의미이다. 요컨대 ‘황제의 선택자는 교황’이고 반대로 ‘황제는 로마교회 조직의 보호자’가 되겠다는 일종의 동맹이었으며 이를 통해 샤를마뉴는 신의 선택자 위치에서 유럽세계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샤를마뉴에 이르러 그의 정복지는 유럽이라는 지리개념으로 정착되었고 이후 그 계승자의 정복지역까지도 유럽이라는 지리개념으로 포함하게 되었다. /하지만 프랑크 왕국의 카로링거 왕조에 의해 수립된 평화와 통일이 바이킹족, 슬라브족, 마자르족의 침입과 아랍인들의 지중해 공격으로 인하여 와해되면서 베르덩 조약(843)과 메르센 조약(870)으로 프랑크 왕국의 3분화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후에도 샤를마뉴 때에 정착된 유럽의 지리의식은 퇴색되지 않았다. 유럽의식은 다양한 종족구성원의 자율의식으로 구성되나 샤를마뉴의 프랑크 왕국 영역을 떠나서는 그 의미를 찾기 어려운 것이다./ 10, 11세기 전후의 유럽사회에는 바그다드의 유대계 학자들에 의해 라틴어가 유입된다. 이때부터 유럽인들은 라틴어 알파벳을 토대로 자신들의 언어관습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유럽인들이 라틴어 알파벳을 낯설지 않게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것은 라틴어의 수용과정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중세 유럽에는 법정이 개설되었는데 법정에서 재판을 할 때 로마의 사법사례 모음집을 토대로 법정을 운영하였다. 그리하여 재판에 가야 할 문서들과 법정 용어들은 전부 라틴어로 표기를 해야만 했다. 이러한 관습은 16세기까지도 지속되어 일반사회에 널리 보급되면서 라틴어 해독력은 시민으로서의 어떤 소양을 갖춘다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까지만 해도 입말만 존재하던 종족언어를 알파벳에 담아 글말로 표현할 수도 있게 되었다. 바로 종족언어 계약관습과 라틴어 계약관습이 일치하게 되는 과정과 성문 법률 관습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라틴어 관습이 쉽게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라틴어 철자관습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종족의식을 버리고 크리스트교의 보편의식을 실천하게 만든 도구였다. /마지막 유럽 출현의 배경이 되는 요소는 12세기 르네상스이다. 당시 유럽사회의 전체를 구성하는 세 개의 큰 동아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종족왕 중심의 수도자 동아리(권력), 로마 교황청 중심의 교황동아리(종교), 수도자 동아리 내의 학문동아리이다. 이 와중에 개인의 이익단체가 발생하게 되어 사회구조가 개인 동아리로 재편되면서 발생하는 것이 르네상스이다. 르네상스의 배경은 고전의 부활, 즉 고전시대 제작물의 재생이다. 바그다드에서 편집된 그리스 고전시대 저작물은 스페인의 토리도와 세비예의 고등 번역소에서 유대인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된다. 그 저작물의 중심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물인데 이것이 유럽의 곳곳으로 확산되면서 인간이 만든 책(라틴어로 제작된) 속에 담긴 내용을 인간이 실천하는 인문주의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물이 확산되면서 이전까지 크리스트교의 교리에 따라 세상이 신의 뜻으로 움직인다는 세계관이 자연법칙 중심으로 바뀌게 된다. 르네상스를 계기로 문화와 개인이라는 개념이 출현하였고 보편주의 세계가 성립되고 사회가 다원화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랜 역사 동안 축적된 유럽인들의 라틴어 철자관습과 성문 법률관습, 수도자동아리의 역할 등이 유럽인들의 공감대를 형성시키는 매개체가 되었다. 그 후 십자군 원정을 통해 유럽인들의 지리개념이 더욱 확대되어 유럽이라는 하나의 대륙 개념을 정립하게 되었고 종족의식과 지방의식을 바탕으로 한 유럽인의 동질의식이 더욱 고착화됨에 따라 그들은 개인주의와 합리주의의 원리를 표방한 유럽의식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