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있어서 종교는 어떤 의미일까? 인간에게 있어서 종교는 절대적인 신의 영역이다. 사람들은 신에게 나의 어려움과 아픔을 호소하고 그것을 더 알아주길, 더 나은 상황을 가져다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 신전(교회나 성당, 절 등)을 찾는다. 신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나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깊이 알고 있고, 심지어 나를 만든 존재이며, 절대 선의 존재로서 절대 악과 대항하는 완전무결의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꽤 많은 사람들이 믿는 신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특히 그 세력과 신도수로 보았을 때 절대적으로 막강한 기독교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기독교의 신은 아마도 절대 선을 뛰어넘는 존재일 것이다. “믿음, 소망, 사랑. ” 이것이 교회도 다니지 않는 내가 아는 기독교의 중요개념이다.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도 내어주어라. “, “원수를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여겨라.” 이 모든 것이 하나같이 현실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신과 인간의 연결고리 정도로 생각되는 성직자들은 또 어떠한가? 과연 이들은 신의 존재를 잘 대변하고 있는가? 바티칸 공화국에서 조차 그렇지 않을 것이라 예상한다. 진정 그들의 신을 대변하기 위해서는 황금 수가 놓여진 옷 대신 비루한 거적대기 옷을 입고, 금가락지 은가락지 대신 더 많은 사람의 손을 잡아주어야 할 것이다. 방탄용 차를 구입할 돈으로 끼니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할 것이고, 더 화려한 건물을 지을 일이 아니라, 당장 잘 곳 없는 사람들의 쉼터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위의 내용은 기독교의 신이 정말 나눔을 강조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는 그들의 종교는 어떻게 되는가? 마빈 해리스는 책에서 그들의 신이 사실은 그다지 평화주의적이지 않았다고 서술한다. 특히 복음서의 모순성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그 내용의 폭력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 아느냐? 아니다, 도리어 분쟁케 하러 왔노라. (눅 12:51)파괴의 신인 시바도 아니고 나눔과 베품, 사랑, 용서를 이야기하는 신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는 구절이다. 칸 영화제 수상작인 밀양을 보았을 때의 충격이 다시금 떠오른다.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자신의 자식을 유괴하여 죽인 살인자를 용서할 마음을 먹고 교도소에 찾아간다. 둘이 만난 자리에서 살인자는 평온한 얼굴로 자신은 하느님을 만났으며 그분이 용서해주셨다고 말한다. 아이를 죽인 사람을 누군가가 용서해 주고 덕분에 살인자는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한다면, 그보다 더 폭력적이고 비정상적이고 악한 것이 어디있을까? 과연 그것이 신의 역할인 것인가? 세상의 이치를 모르는 무지한 인간이기 때문에 신의 영역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신이 꼭 절대 선의 존재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신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다만 자신이 원하는 것과 자신의 신이 원하는 것이 같은 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작년 11월 일본 후생 노동청에서 우리나라 근로정신대 할머니들께 연금 탈퇴수당으로 99엔, 우리 돈으로 약 1300원을 지급했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끌려간 소녀들이 강제노역을 한 대가로 65년 만에 받은 돈이 자장면 한 그릇 값도 안 되는 것이다.99엔을 지급하기로 한 전범회사는 마쓰비시 중공업으로 당시 10만 명이 넘는 조선 사람을 징용하였고 13~16세의 소녀들을 근로정신대로 끌고 갔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수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에 의해 핍박 받고 죽임을 당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좋은 것은 모두 빼앗아 자신들의 것인 양 가져가고 나쁜 것은 마치 원래 우리의 것 인양 우리에게 심어 놓으려 했다. 비인도적 방법으로의 탄압과 수탈을 수없이 자행하였으며 특히 나라를 되찾으려는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잔혹한 만행들을 멈추지 않았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이후 1945년 광복까지 35년 동안 일본은 조선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일제 강점기 때에는 일본이 우리 문화를 말살하고 민족의 자존감을 낮추기 위해 우리의 고유 문화를 파손시켰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 이후 남은 흔적이라고 하면 식민지 수탈을 위해 건설한 철도나 탄광 등 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 서대문 형무소는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그 치욕의 역사를 기억 할 수 있는 좋은 역사체험학습의 장소이다. 나 역시 일제 강점기를 되돌아 보고 느껴보는데 서대문 형무소가 가장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장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서대문 형무소는 서울의 안산과 인왕산의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으로 인왕산 서쪽으로 안산 북쪽으로도 산줄기가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 터져있다. 형무소가 바로 산 골짜기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 더 춥고 습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서대문 형무소에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중앙사와 제 9, 10, 11, 12옥사와 지하감옥, 공작사, 한센병사, 사형장 인데 이 건물들 중 정남향으로 지어진 건물은 하나도 없다. 1934년 당시의 배치도에서도 끼어있는 형태로 빛과는 거리가 먼 구조이다. 건축물의 방향은 건축물을 판단하는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조망이 좋고 따뜻한 남향을 주로 선호하고 좋은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이것은 일본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서대문 형무소는 우리나라를 본격적으로 식민통치하기 위해 일본인이 설계하고 건축한 근대적 건축물이다. 일부러 감옥으로서의 용도에 따라 조망과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건물을 배치하고 감옥을 얼마나 더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더 많은 죄인을 수감시킬 수 있는지에 따라서 건축했기 때문에 이런 형태로 건축했을 것이다. 근처의 경복궁과 비교해도 그 차이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산기슭이라는 위치와 이런 건물의 방향은 건물을 더욱더 음침하고 추울 수 밖에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형무소의 건물들은 전체적으로 바깥세상을 절대 내다볼 수 없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물론 전망이 좋은 형무소 따위가 있지는 않겠지만 건물들의 높이가 다 비슷하게 높고 서로가 서로를 막는 배치로 설계되어 있어 더 압박적인 느낌을 받게 한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는 당연히 사방이 모두 높은 벽으로 막혀 있었다. 거기다 건물들끼리도 서로를 막아 그 안에 수감된 사람들은 몸이 갇혀있으면서 창 밖을 내다 봐도 바깥 세상은커녕 하늘도 거의 볼 수 없고 붉은 벽만 볼 수 있을 뿐이라서 심리적으로 더 압박감을 느꼈을 것 같다.형무소에 들어가자 마자 처음에 느낀 것은 바로 춥다는 것이었다. 어떤 옥사를 가던지 항상 한기가 돌았고 감옥이라는 특수한 분위기와 맞물려 더 춥게 느껴졌다. 사람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한 옥사 전체에 혼자 있을 때 재현용 마네킹에서 소리가나거나 움직일 때는 정말 놀라고 무서워서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은 겨울에 대부분 동상을 피할 수 없었다. 보온 장치 하나 없는 냉방에 갇혀 영양결핍에 갖은 고문을 받았으니 동상에 걸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방문했던 날은 요 근래 가장 기온이 올라갔던 날이었고 바람막이 야상을 입고 있었는데도 낮으면 사람이 심리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위축되어 더 쉽게 자백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로 심문을 하거나 자백을 받아낼 때 일부러 온도를 낮추는 방법으로 사람의 신경을 자극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잡아 가두었던 용도에 알맞기 짝이 없다고 느껴졌다.현재 보존되어 있는 건물은 7개 동으로 이전에 15개의 약 반이 남아있다. 그런데 1934년의 배치도를 보았을 때 중앙사를 중심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욱일승천기와 형태가 비슷해 보였다. 특히 형무소 전체로 보았을 때 지금 역사관이 있는 출입문 쪽 반보다 그 위쪽 반은 중앙사에서 건물들이 손가락을 핀 것처럼 서로 이어져 있어 방사형의 욱일승천기와 더욱 닮은 것처럼 느껴졌다. 1996년 김영삼 정부가 일제 강점기의 잔재인 중앙총독부를 폭파시킨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중앙총독부가 조선을 식민 통치하는데 사용되었던 주요 건축물인 것 외에 이 건축물 자체가 일(日)자를 본 따 만들었고 서울 시청 건물이 본(本)자 그리고 청와대의 전신인 경무대는 대(大)를 본 따 만들어 일제가 서울에 대일본(大日本)을 심어 놓았다는 주장도 있었다. 또 부산에도 이와 같은 비슷한 일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항공사진을 보면 용두산에서 시내를 조망할 때 옛 부산교도소(현 서구 대신동 삼익아파트)에 ‘大’자가, 경남도청(현 동아대 박물관)에는 ‘日’자, 부산부청(현 부산롯데월드 부지)에는 ‘本’자가 각각 드러나도록 건물이 디자인 돼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일본인데 본격적으로 침략을 자행하기 위해 만든 형무소를 욱일승천기 모양으로 설계했다고 보는 것이 나만의 억측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중앙사의 영상실에서는 애국지사들의 육성 증언을 볼 수 있었는데 곱게 나이 드신 이병희 애국지사께서 “우리는 죽음 같은 건 두려워하지 않았다. 목숨을 앞에 두었으면 그런 일 못한다.”고 하신 말씀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독립운동가들은 자신이 고생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때있을 수 있는 거라고 입으로는 쉽게 이야기해 왔지만 그분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게 되고 또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내가 나라를 잃는 상황에 처해지면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 생각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지금의 나라면 분명 다른 사람들이 앞장서 독립운동을 하면 뒤에서 따라다니며 함께 할 수는 있겠지만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고 앞장서거나 끝까지 고문을 견디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우지는 못할 것이다. 이곳에서 계셨던 나라를 위해 민족을 위해 싸우셨던 수많은 분들께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면서 다시는 이런 비극이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운 사람들이 있어 우리민족이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던 반면에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는데 앞장선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우리나라가 그 과거를 아픈 역사라고 여기고 되풀이 하고 싶지 않다면 그것을 깨끗이 청산해야 하는데 그 사람들의 자손들은 여전히 그때 손에 쥔 것을 이용해 지금까지도 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독립 운동가의 자손들은 국적도 없이 떠돌거나 가난을 대물림 받으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어쩌면 독립운동을 함으로써 민족의 영웅이었던 자신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원망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상황이 일어나는 까닭은 친일파들이 사회지도층에 있고 고위관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자신들의 조상이 나라를 팔아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고 말할 리도 없고 스스로 반성하며 재산을 환원하거나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정부의 친일파, 독립군 후손의 처리 문제에 대한 태도는 당연하거니와 일본에 대한 태도와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근로정신대 할머니들에게 99엔이 지급된 비슷한 시기에 일본의 또 다른 한 전범기업인 “니쓰마쯔 건설”이 중국의 강제 징용자들에게 2억 5천만엔, 우리 돈으로 32억 원이라는 보상금을 지급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중국인 피해자와 유가족들에운데는 많은 수의 한국인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인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았다. 물론 보상으로 그들이 저지른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의 징용자들이 32억 원의 보상을 받는 동안 우리나라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은 그 존재조차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 60여 년에 걸친 한을 풀어주기는커녕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감추려 하는데 우리 정부는 그에 대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부는 보상금으로 99엔을 지급하겠다고 나서는 일본 정부에게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국익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정부라서 국익을 이유로 일본에게 ‘감히’ 따져 묻지도 못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치욕스러운 상황에도 어떤 정치인 하나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에게 관심을 갖거나 강제 징용을 당했던 분들의 한과 울분을 풀어 주기 위해 앞장서려고 하지 않는다.국민은 나라 없이 존재 할 수 없고 정부는 그 나라의 국민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정부가 국민에게 힘이 되어주기는커녕 이렇게 안일한 태도를 보인다면 국민은 절망할 수 밖에 없다.서대문 형무소에 있는 가로등 마다 ‘경술 국치 100년’이라는 작은 현수막들이 매달려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조선 500년 왕조가 끊김과 동시에 암흑의 일제 강점기를 지나 분단과 비극적 전쟁을 겪고 민중의 피로 일구어낸 혁명 그리고 그 후에 이루어낸 눈부신 발전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의 세월이 정신 없이 흘러갔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새롭게 다시 도약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헤아릴 수 없는 과정들이 쌓이고 서로 결합되어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나도, 이 사회도 독립을 이루어내려고 노력한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희생과 독립운동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서대문 형무소는 ‘사적 324호’ 로써 온 국민에게 역사를 기억하고, 그 의미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이었는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문화재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그 역사를 잊지 않고 극복해 나가며 그때 그 사람들이 지키.
2010문화관광 축제조사-경주 술과 떡 잔치과목: 축제와 문화교수: 박지선학과: 중국어중국학학번: 12063303이름: 이자인1. 축제 개관 (2010년 기준)(1)이름: 2010경주 술과 떡 잔치(2)주제: 술 익는 마을∙떡 빚는 고을(3)소개:-『2010 경주 술과 떡 잔치』는 유규한 역사와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통해 세계 속의 역사도시 경주의 이미지를 알리고 지역경제 활성화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화관광축제로 승화시킴-전년대비 장단점을 보완하여 다양한 종류의 술과 떡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으며 술과 떡으로 표현되는 여러 가지 컨텐츠를 국∙내외에 알리어 대한민국 최고의 문화 브랜드로 자리매김(4)기간: 2010년 4월 17일(토)~ 2010년 4월 22일(목) [6일간](5)주최/주관: 경주시/(재)경주문화관광축제조직위원회(6)후원: 문화체육관광부, erido GyuongBuk, 한국관광공사, 경북관광개발공사(7)장소: 경주시 황성동 실내체육관(8)목적-「2010경주 술과 떡 잔치」는 2009년 구조개선과 축제의 변화를 통하여 얻은 장∙단점을 더욱 발전시켜, 행사장 전체를 콘텐츠별로 나누어 구역∙특성화 시킴 (ZONE별)-선덕여왕 선발대회를 통해 여왕을 선출하여 행사장내에 퍼레이드 포토존(연회식, 즉위식 검토)∙움직이는 술차운영을 통하여 다양한 볼거리제공 및 무료시음 기회 제공-방문객들에게 경주지역의 다양한 관광자원을 소개 및 홍보하는 「경주 100배 즐기기」라는 프로그램 구성으로 축제를 통해 경주를 널리 알리고 체류를 유도함으로써 지역경제 활성화 추구-축제를 생방송으로 중계(인터넷 방송)하여 간접적인 홍보와 체험으로 다음해 술과 떡 잔치 참여 의욕을 상승 시킴-술과 떡의 기본 바탕이 되는 농촌 체험마당 운영2. 축제 내용「경주 술과 떡 잔치」는 신라 천 년의 고도라 불리는 경주에서 1998년 한국 전통주와 떡 축제 를 개최한 것에서부터 시작된 축제이다. 그 이후 00년 한국의 술과 떡 잔치, 02년 경주 한국의 술과 떡 잔치로영은 지역의 교동법주, 경주법주, 신라주·황금주를 비롯한, 전국의 20여 개 업체가 참여한 ‘술나라’와 시의 여성자원봉사단체와 임가공협회가 참여한 ‘떡나라’가 국내외의 각종 술과 떡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방문객들에게 제공하였다.이 축제는 단순히 술과 떡을 모아놓고 맛보고 즐기기만 하는 행사가 아니라, 창작 떡 만들기 대회, 떡메치기 등과 같은 참여행사와 떡 만들기 교실, 술 만들기 교실, 신라문화 체험교실, 전통놀이, 도자기 빚기 등의 체험행사 등을 함께 접목시켜 구성되어 있다.축제 기간 동안 매일 오전 10시부터 11시까지 한 시간 동안 서러벌 풍물단이 행사장 전역에서 길놀이 난장을 진행하고 날짜에 따라 희망누리 떡메치기, 막걸리 트랜스포머, 어울마당 JS힙합스쿨, 전통연희 한마당, 술차 퍼레이드, 술떡잔치 레크레이션, 줄타기 공연, 판소리 민요한마당, 선덕여왕 행차 등 여러 이벤트와 체험행사들이 행사장 곳곳에서 개최된다.대형 주제체험관에서는 `신라오(五)떡 만들기’ 와 `가양주 만들기’ 체험을 운영했는데, 일반인들이 쉽게 접해보지 못했던 술과 떡을 직접 만들어 봄으로써, 색다른 체험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 제공했으며, 가양주 만들기 체험에서는 누룩, 고두밥 그리고 각종 약재를 고루 섞어 직접 술을 만들어 볼 수 있는 이색적인 체험을 제공했다.주제전시관에서는 등을 전시했고, 특히,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전임 노무현 대통령까지, 즐겨 드시던 술과 음식을 전시해 방문객들의 관심을 모았다.이번 축제에는 처음으로 를 열었는데 여타 미인대회와 달리 수영복 심사나 드레스 심사가 없고 ‘지혜롭고 덕이 넘치는 선덕여왕’의 이미지에 맞는 우승자를 순수한 한복심사만으로 선발한다. 대회는 선덕여왕·미실·천명을 각 한 명씩 선발했으며, 이들은 선덕여왕 행차 재현 등 1년 동안 경주시를 대표하는 얼굴이 된다. 또 천안함 침몰사고로 연예인 초청가수 공연을 취소하고 전통 연희한마당 및 국악공연, 전통 줄타기 공연으로 대체하였다.20일에는 를 개최해 서울·부산·경기 등, 전국물 공동브랜드인 이사금, 경주시 보건소의 건강증진·식중독 예방 홍보, 경주경찰서의 음주운전 근절 캠페인 등 시민들에게 유익한 각종 홍보의 장을 마련했다. 또한 이사금 쌀을 이용한 막걸리 칵테일 및 가래떡 구워먹기 체험도 펼쳐졌다. 특히, 경주의 자랑인 가 큰 인기를 끌었다. 좋은 술과 좋은 안주를 즐길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여, 많은 사람들의 미각을 충족시켜 주었으며, 경주지역의 호텔이 참여한 축제식당은 깨끗하고 정갈한 음식으로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노력했다.지역의 황남빵, 경주시의 우호·자매도시(익산·부여) 및 동주도시(진주 외 5개 도시)의 특산물을 홍보·판매할 수 있는 자리도 마련했으며, 경주시 관광기념품 및 실라리안(경상북도 특산품), 우리 농산물 판매 및 농촌체험, 해외자매도시 및 경기도 초청 떡집의 판매부스도 연일 북새통을 이룰 정도로 많은 관심을 모았다.특히, TPO-UNWTO(아시아태평양관광진흥기구-세계관광기구)의 인사들과 해외자매도시의 사절단이 방문하여, 세계적인 역사문화도시 경주시와 축제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3. 유사축제와 비교 후 시사점경주에서 우리나라 전통주와 떡을 주제로 축제를 열고 있는 것과 유사하게 독일과 중국의 청도에서는 매년 맥주축제를 개최하고 있다.독일 바이에른 주 뮌헨에서는 맥주를 주제로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2주 동안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 Oktober 10월 + Fest 축제)를 개최한다. 이 축제는 1810년 바이에른 왕국의 황태자 루드비히와 작센의 테레사 공주와의 결혼을 축하한 경마 모임에서 비롯되었다. 현재는 기타 유럽 국가를 비롯 전 세계에서 매년 약 600여만 명의 맥주 애호가가 축제 기간 중 모이며, 이 기간 중 소비되는 맥주는 약500만 리터(생맥주 500㏄로 1000만 저그), 닭은 65만 마리, 소시지는 110만 톤이나 되는 세계 제1의 맥주 축제가 되었다.대회장이 되는 테레지아 구릉에는 맥주 회사가 설치한 대형 텐트들이 있는데 그 안에는 남녀, 인종 구분 없이 수백 명, 수천 명. 밤이 되어야 대중음악도 연주할 수 있다. 이는 옥토버페스트가 가족과 노인들도 거부감 없이 방문할 수 있고, 전통적인 분위기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중국 청도는 옛날에 독일의 조차지로 독일이 청도에 맥주 공장을 만든 것이 중국 맥주 산업의 시작이다. 독일인이 건설한 맥주공장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청도를 점령하여 일본 맥주회사가 매수했고, 2차 대전이 끝난 뒤 중국이 맡게 되었다. 청도 맥주는 상쾌한 향과 깔끔한 맛이 조화를 이루어 많은 한국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받고 있다. 청도 맥주 맛의 비결은 깨끗한 물에 있다고 한다. 청도에 있는 라오산(Laoshan)은 신선이 산다고 일컬어지는 청도 최고의 명산으로 오염 없이 잘 보존된 자연을 자랑한다. 라오산의 깨끗한 지하수와 청도에서 생산한 질 좋은 호프, 호주와 캐나다에서 들여온 최고의 효모와 발효 시스템을 이용해 만들어 낸 것이 청도 맥주이다.청도맥주축제는 1991년에 처음 조직된 이 축제는 그 후 매년 7월 8일에 시작해서 2주간 지속되고, 대규모 개막 의식은 물론, 중국 드럼 콘서트와 불꽃 놀이, 다양한 민속 예술 공연들이 펼쳐진다. 또한 세계 곳곳에서 초청된 많은 맥주 브랜드들이 선보인다. 청도의 맥주 축제는 맥주를 매개체로 삼아, 여행, 무역, 문화, 과학 기술, 체육 활동 등이 융합된 행사이다.규모 면에서 보자면, 1991년 제1회 행사에 30여 만 명이 참여했던 것에 비하면 갈수록 그 참여인원이 늘어나서 100만 명을 훨씬 뛰어 넘고 있다. 중국내의 수십 개의 맥주 업체뿐만 아니라 일본, 미국 등 세계의 유명한 맥주업체가 참여하고 있다.형식과 내용 면에서는 회를 거듭할수록 특색 있는 문화, 오락 활동이 선을 보이고 있는데, 예를 들면 1회 때에는 패션쇼, 2회 때에는 대형 수상공연, 5회 때에는 전국 비치 발리볼 대회, 7회 때에는 에어로빅, 유도 등의 행사가 개최되었다. 이렇듯 단순히 맥주에만 제한되어 있지 않고 문화 예술, 오락, 경제 교류, 기술 제휴 등의 성격도 강해서 여행객과 맥주업계의 특별한 대외적 이미지나 정체성이 없었던 것에 반해 이 축제를 통해 국내를 넘어 국제에서도 지역 이미지가 상당히 상승시킬 수 있었다.이 세 축제는 모두 술을 테마로 하고 있지만 뮌헨 옥토버페스트는 전통과 산업의 융합으로 축제를 발전 시켰고, 청도 맥주 축제는 지역 산업을 기초로 축제를 구성해나가고 있다. 그리고 경주 떡과 술 잔치는 지역적 특색을 이용해 국가의 고유 음식을 대표로 축제를 구성하고 있어 비슷한 주제로도 다양한 컨셉과 방식의 축제를 운영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 결론경주시는 신라 천 년의 고도라 평가 받으며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히는 유명한 역사 도시이다. 경주에는 불국사, 석굴암, 분황사 등 명승고적이 많아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이러한 역사와 전통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경주에서 전통 식∙음료를 주제로 하는 축제가 바로 「경주 술과 떡 잔치」이다. 경주에는 물론 우수한 관광지가 많이 있어 관광산업이 비교적 많이 발달한 지역이지만 관광자원이 대부분 구경하고 답사하는 것에 치중해 있어 다소 지루하거나 지역민에게는 새로운 흥미를 불러일으킬만한 요소가 부족하고, 지역 외의 사람들과 외국인들도 찾아오도록 하는 현대적인 요소가 부족했다. 그러나 현대인들도 많이 즐겨먹는 떡과 전통주를 이용해 외부에 지역을 홍보하고 지역민들이 축제에 참여하고 이로 인해 지역에 새로운 흥미를 찾고 자부심을 갖게 했다.또 축제 행사 중 하나인 선덕여왕 선발대회는 기존의 미인선발대회를 벗어나 경주가 가진 특수하고 고유한 역사인 신라에 어울리는 선덕여왕 선발대회를 개최해,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선덕여왕의 역사를,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축제를 통한 지역 이미지 상승에 이바지하고 지역민들의 흥미도 성공적으로 이끌어 냈다고 할 수 있다.술은 우리나라에서 옛날부터 대대로 집안마다 제각기 고유의 대물림 기법으로 빚어져 내려오며, 조상에게 제사를 올릴 때나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 정성을 다하여 만들어 내어놓던 것이 바로 전통주이며,09
언론의 사전적 정의는 ‘매체를 통하여 사실을 알리거나 여론을 형성하는 활동’이다. 우리는 언론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기도 하고 정부의 정책이나 법안을 국민에게 알리거나 반대로 정부에 국민의 의사를 전달하기도 한다. 또 언론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정부를 감시하고 정치 권력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언론은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중요한 구성요소 중에 하나이다.세상 모든 것들이 다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언론은 잘 쓰면 약이 되지만 잘못 쓰면 치명적인 독이 된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언론사들은 언론의 본래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언론은 객관성과 공정성이 생명으로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 언론이 편파성을 갖게 되면 사실과는 점점 거리가 생길 것이고 국민들도 처음에는 무방비상태로 받아드리더라도 나중에는 점점 언론을 믿지 못하게 될 것이다. 물론 국민이 시간이 지나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알고 있더라도 개선할 의지나 능력 또는 상황 받쳐주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더욱 문제가 크고 미래가 어두울 것이다.언론은 사람에 의해 쓰여지고 편집되는 것이기 때문에 주관적일 수 있으나 최대한 중립성을 유지하려고 노력 해야 한다. 그러나 또 이것은 말이나 글로써 전달하는 것이라서 얼마든지 쉽게 조작이 가능하다. 그것이 정치계이든 경제계이든 간에 이해 관계 또는 다른 어떤 이유로 인해서 언론이 정보나 수치를 부풀리거나 축소시키는 등의 조작을 통해 가짜 여론을 형성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언론은 일반인들보다 항상 정보를 선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므로 그것이 훨씬 쉽다. 이러한 언론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그 사회를 조종할 수 있을 것이다.언론의 통제는 국가나 사회의 이익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볼 수도 있다. 특히 기자들이 취재는 하되 정해놓은 시점까지 보도를 하지 말자고 서로 약속하는 엠바고 같은 경우에는 국가의 대내외적 정책에 유용하게 쓰여 그 사회에 이익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일반화 되어 언론은 언제든지 필요에 따라 통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든 것을 경제학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생기는 오류일 것이다.사람들이 모인 사회라면 여론은 반드시 형성되고, 사회가 있으면 권력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나타나게 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목적이 좋은 것이었든 나쁜 것이었든 권력에 의해 여론을 형성하거나 조정하는 일은 계속 있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언론의 자유를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자기가 언론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언론 매체에서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거기에만 기대기보다는 스스로의 주관을 가지고 정보를 가릴 줄 아는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아마도 자신만의 꿈이나 분명한 인생의 목표를 갖고 있는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항상 바쁘다. 각자 바쁜 이유는 모두 다양하지만 다들 항상 무엇인가에 바빠서 정신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그리고 왠지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덜 바빠 보이거나 나만 놀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면 불안하고 어떤 때는 죄책감이 들기도 하며, 나도 바쁘게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 없이 무조건 남과 경쟁하고, 뚜렷한 목표보다는 남들이 하는 것을 쫓아서 하며 이른바 대세를 따르는 것이 무조건 옳은 길인 것으로 생각한다.모두 이렇게 바쁘게 살아가지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뭔지 확신하지 못하고 가끔은 자기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우울해지기도 한다. 대학에 들어오면 꿈을 향해서 달려가는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여전히 꿈을 찾느라 바쁘다. 학점, toeic, 각종 자격증 등 좋은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서 이른바 스펙을 높이는데 정신 없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에 대해 생각하기가 어렵다. 자신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대부분 졸업 후에 어떤 회사에 취업할 것인가에 대한 것뿐이다.나 역시 다를 바 없다. 누가 나 자신의 생각을 물어보면 항상 곤혹스럽다. 나에 대해서든 다른 것들에 대해서든 진지하고 깊게 생각해 보는 습관이 많이 부족한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한참 애벌레이다. 자기 안에 나비가 있는 줄 모르는 애벌레이다.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괴롭고 쓸데없는 고민이고 번잡스러울 뿐인 생각이라고 느끼게 되어서 점점 하지 않게 되었다. 특히 더 이상 내가 어릴 적 생각 했던 것처럼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고 느끼게 되면서 내 생각이나 개성 같은 것은 그다지 가치 없는 것처럼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작가의 말처럼 내 생각이 틀렸거나 완벽하지 못하더라도 그 과정만으로도 스스로의 내면을 성장 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