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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성생명 sfp 인턴 합격 자기소게서
    1.인턴십에 지원한 동기와 목표저는 군복무를 마치기 전까지 전형적인 ‘문돌이’로 살아왔습니다. 친구들과 역사, 사회와 같은 학술적인 주제로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고 독서도 인문서적만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면서 저는 실용적인 사고의 측면에서 부족한 면을 보였습니다. 결국 전역 후에 취업, 장래와 같은 현실이 저에게 성큼 다가오자 이렇게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지식과 삶의 방식을 많이 익히려고 노력해왔습니다. 특히 이전까지 소홀히 하던 신문의 경제면을 애써 읽으려하는 등 경제와 금융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접한 것이 삼성생명 sfp 인턴십에 관한 정보였습니다. 저는 이 인턴십을 통해서 아직까지 저에게 남아있는 ‘꽉 막힌 문돌이’의 허물을 벗는데 있어 결정타를 날려보려 합니다. 이러한 실용적인 지식과 스킬을 배움과 동시에 저의 인문학적 소양을 응용하여 저의 역량을 크게 키우는 것이 이 인턴십에서의 제 목표입니다.2.타인과 차별화된 자신의 강점과 사례저는 타인의 가치관이 저와 상이할지라도 그것을 이해하고, 타인이 처해있는 상황에 대해서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강점을 가졌습니다. 이는 제가 인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 생각합니다.저의 이러한 점 때문에 많은 후배나 친구들이 저에게 상담을 많이 요구합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귀찮아하기보다는 정말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조언해주기를 좋아합니다. 실제로 지난겨울에 공인영어성적이 낮아 고민을 하는 친구가 저에게 상담을 청했는데, 저는 그 친구에게 간단한 문법 테스트를 보게 하여 그 친구가 어느 정도의 수준을 지니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그 친구의 수준에 맞는 공부 방법과 수업을 추천해 주면서 조언을 해준바 있습니다.이러한 저의 장점은 고객에게 어떠한 금융, 보험상품이 필요한지에 대해 면밀한 고찰을 하고 그들에게 조언해주는 업무를 하는 삼성생명 sfp에 있어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3.주변에서 만류하는 분야에 도전하여 성공한 사례저는 군복무를 하던 시절에 컴퓨터 관련 시설과 부대 웹사이트, 전산 행정시스템 따위를 관리하는 전산기운용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상부에서 부대 웹사이트를 새로 제작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이에 제가 있던 전산부서에서는 이 일을 외부 민간업체에 맡길지, 부서 내에서 자체제작을 할지에 대해 논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포상휴가에 목말라 있던 저는 제가 어떻게든 제작해보겠다고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장교들은 제가 원래 전산관련 지식이 없는 문과생이라는 점을 들어 허락하지 않았지만 저의 긴 설득으로 인해 저에게 웹사이트 제작을 맡기게 되었습니다.이후 저는 웹사이트 제작, 홈페이지 디자인과 관련한 서적들에 파묻혀 살다시피 했고 제 능력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컴퓨터 전공자 병사에게 협조를 구해 진행했습니다. 결국 저는 새로운 웹사이트를 완성해냈습니다. 이 경험으로 저는 제 전공과 관련이 먼 영역에 있어서도 굳은 의지만 있다면 큰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취업| 2013.01.01| 2페이지| 3,000원| 조회(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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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작권법과 디지털컨텐츠 불법공유연구
    2007년도 2학기 법사회학 소논문저작권법과 디지털컨텐츠 불법공유 연구Ⅰ 연구배경과 목적인류의 주요 물질생산방식이 농업에서 산업으로 변화된 지 약 200년의 시간이 흘렀다. 수공업을 대체하는 공장생산을 낳아 산업사회형성에 큰 원동력이 되었던 테크놀로지는 다시 교통과 통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산업사회를 다시 새로운 사회 - 정보화사회로 이끌었다. 정보화시대의 원동력인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은 원자로 이루어진 현실공간(Real Space)과는 다른 0과 1의 디지털 정보로 이루어진 가상공간(Cyber Space)을 만들어냈다.그리고 인간의 기억, 언어, 문자로써만 존재하던 정보가 가상공간에서 디지털정보로 환원되었는데 이에 따라 현대에는 현실공간의 물질이 상품이 될 뿐만 아니라 가상공간의 정보 역시 상품화가 되며 정보의 상품가치는 물질상품의 그것만큼이나 중시된다.) 정보의 상품화의 대표적인 예로 영화, 음악 등의 컨텐츠산업이 있는데 이는 수많은 정보의 결집물이다.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컨텐츠상품은 물질상품과 달리 디지털 데이터로써 존재하기 때문에 순식간에 복제가 가능하다. 이는 물질상품처럼 상품을 복제해내는데 막대한 원료, 기계, 노동력도 필요치 않는다. 즉 누구든지 판매자가 정식으로 판매하는 상품을 구입하지 않아도 복제를 통해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인터넷에 의해서 전세계의 퍼스널 컴퓨터(Personal Computer)간의 정보교환이 자유로운 현재, 인터넷에 의한 컨텐츠물 불법공유문제는 간과하기에 너무도 심각하다. 이러한 불법공유로부터 컨텐츠산업을 보호하는 법률이 저작권법인데 현재 저작권법은 제대로 그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주변에서는 너무도 쉽게 컨텐츠물 불법 다운로드를 접할 수 있으며 불법공유는 이미 인터넷사용자들의 일상이 되었다.이러한 세태로 인해 음반 산업은 심각한 위기를 맞았고 영화산업 역시 불법복제, 다운로드로 인한 피해를 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작권법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으며 왜 불법공유를 막지 못하는지, 불법유통 단속결과를 보면 2003년 상반기에 3만 4,941건이던 것이 2004년 상반기에는 6만 5,454건으로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p2p 및 웹저장 사이트수 역시 21개 사이트에 불과하였으나 2004년 상반기에는 38개로 증가하였으며 7월에는 56개 업체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또한 2003년 한 해 동안 불법영상물로 인한 피해액은 300억 원에 달하며, 각 매체별로 2003년 한 해 동안 불법영상물로 인한 피해액은 300억 원에 달하며, 각 매체별로는 p2p 사이트에 의한 피해액이 168억 5,000만 원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웹저장공간이 115억 3,000만 원, 와레즈가 9억 원, 동호회 및 카페가 7억 6,000만 원 순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의 수치는 한국영상협회 온라인 검색팀에 의해 검색 및 적발된 손해액이고 검색팀이 모니터링 할 수 있는 범위를 전체 온라인 불법 복제시장의 20-25%라고 추정한다면, 전체적인 피해액 산정은 전체 시장 규모의 15-18%인 연간 1,200억-1,500억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추정 된다.)온라인 검색 및 적발을 통한 손해의 산정(2003. 1. 1-2003. 12. 31)(단위; 횟수/천원) 자료 : 한국영상협회컨텐츠물 중 가장 용량이 커서 불법적인 루트로 구하기 가장 어려운 영화산업의 피해가 이렇게 막심하다면 그와 비슷한 게임이나 훨씬 용량이 작은 음반산업의 불법공유의 심각성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Ⅲ 법의 불법공유 제재1.저작물 불법공유 시 처벌조항저작권법 제97조의 5항 (권리의 침해죄) 부분을 보면 저작재산권 그 밖의 이 법에 의하여 보호되는 재산적 권리를 복제, 공연, 전시, 전송,[배포],2차적 저작물 작성의 방법으로 침해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거나 이를 병과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수년전만 하더라도 저작물을 디지털화하여 제3자에게 제공하는 행위가 저작권침해에 해당하는가는 분명치 않았다.) 왜냐하면 저작권법은 전통적으로 책이나 음반작권자에게 미치는 경제적 손실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작권법 사적복제허용 조항에 의하여 모든 저작물공유가 불법인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다.그러나 사적복제의 허용 때문에 불법공유와 합법공유의 경계선이 애매해 질 수 있다. 예를 들자면 A라는 이가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인터넷상에서 자신에게 자료를 요청한 B에게 자신이 구입한 저작물을 복제, 전송해주는 경우는 위법인가? A와 B는 가까운 사이인가? 굉장히 애매하다. 가까운 사이 혹은 사적인 관계와 그렇지 않은 관계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A와 B가 운 나쁘게 적발되어 저작권자에게 고소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이들은 서로 알고 있는 가까운 사이었다고 말하면 처벌을 면할 수 있다. 또한 현실적으로 이렇게 사소한 개개인의 공유를 막을 수 있는 방안도 없다. 그렇다면 주요 저작물 공유방법들 중 어떤 것이 불법이고 어떤 것이 합법인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이하에서 논의하겠다.3.주요 공유방법과 그 위법성한때 소리바다라는 P2P프로그램이 음반협회와의 갈등으로 우리사회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컨텐츠물이 수많은 개인에게 확산되도록 도와주는 매개체는 역시 P2P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주요 공유방법은 특정업체에서 운영하는 웹저장공간인데 특정업체가 운영하는 서버에 업체의 회원인자가 자신이 원하는 파일을 올릴 수 있고 제3자가 그 파일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이때 파일을 다운로드 받는 제3자는 업체에 다운로드 이용료를 지불한다. 보통 디지털컨텐츠의 공유는 이 두 가지 방식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문제는 이 두 가지 방식이 불법이라는 것이다.디지털 컨텐츠물을 합법적으로 구입한 이는 저작권법의 사적복제허용조항에 따라 제한된 영역 내에서 복제, 전송이 가능한 사실은 이미 위에서 언급했다. 그렇다면 P2P프로그램 업체와 사용자들은 이 조항을 언급하면서 저작권위법사실을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 P2P프로그램을 통한 자료공유는 명백히 가정 및 그에 준하는 한 사례이다.(1)메신저 등 특정한 친분, 연락이 있는 개인들끼리만 접촉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통한 공유.(2)PC간 직접 네트워크 연결을 이용한 공유.(3)직접 CD등 저장매체를 이용해 복제 후 친분이 있는 자에게 전달.단 위의 사례들이 합법공유가 되려면 공유의 대상이 되는 컨텐츠물이 합법적으로 구입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위의 공유방법에 해당하는 경우라도 복제, 전달대상인 컨텐츠물의 출처가 대부분 P2P와 웹저장공간을 통한 불법 다운로드인 경우가 대다수이다. 이 경우 친분이 있는 자들끼리 컨텐츠물을 공유하더라도 이는 저작권법에 위반된다.Ⅳ원인 연구필자는 “왜 불법공유가 성행하는가?” 에 대한 두 가지 가설을 설정하였다. 첫 번째 가설은저작권법이 오프라인상에서의 불법거래는 어느 정도 물리적인 제재를 가할 수는 있으나 개인과 개인 간의 온라인 공유는 제재가 불가능한 점을 원인으로 보는 것이며 두 번째 가설은 개개인의 법의식과 법 간의 괴리가 커서 법을 지키지 않아도 문제가 없는 사회분위기가 조성되기 때문에 법이 지켜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1.첫번째 가설 조사(법적 처벌현황 조사)조사 결과 가설과는 달리 불법공유와 관련한 법적 처벌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최근 사설 법무인에 의한 불법공유 고소사례들이 있었다. 자신의 저작물의 보호를 원하는 저작권자들은 사설 법무인에게 보호를 의뢰하는데 법무인은 저작권자로부터 저작권을 위임받고 단속활동을 한다. 이들은 주요 불법루트인 P2P프로그램, 웹저장공간 등을 돌아다니며 불법으로 업로드 되어있는 의뢰인(저작권자)의 저작물을 찾고 다운로드 하면서 스크린샷을 이미지파일로 저장하여 증거자료로 삼은 후 P2P프로그램, 웹저장공간 등의 회원정보를 통해 업로더의 신원을 알아내어 고소장을 보낸다. 고소 후 보통 합의가 진행되는데 지금까지의 사례를 보았을 때 합의금은 대략 80~200만원선으로 보여진다.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러한 처벌은 업로드에만 국한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처벌사례들을 살펴본 결과 다운로드와 관련된 처벌은 찾아 볼 수. 어쨌든 설문조사이전에 이미 예상한 바이지만 조사결과에 따르면 PC와 인터넷을 향유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불법자료공유의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6번 문항에서 불법다운로드의 이유를 물었는데 가장 많은 답변이 '자료공유의 일상화' 로 141명중 129명으로 91%였다. 중복체크를 허락한 문항이었는데 그다음으로 많은 답변이 '금전문제'로 141명중 129명으로 69%였으며 이 인원 중 대부분이 '자료공유의 일상화'를 중복체크 했다. 업로드의 이유에서도 가장 많은 답변이 '자료공유의 일상화'였으며 39명중 30명으로 77%를 차지했다. 이렇듯 불법공유는 이것이 불법행위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우리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버렸다.3)개개인의 저작권법 의식5번 문항의 답변결과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작물 다운로드가 불법행위인지 인지하면서 행하고 있었다. 150명중 141명인 98%의 인원이 저작권자의 허락 없는 저작물공유가 불법행위인지 알고 있다고 답하였다. 또한 다운로드, 업로드를 하면서 죄책감을 어느 정도로 느끼는지 묻는 문항에는 두 문항 모두 "약간 느낀다."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고 그다음으로 "전혀 느끼지 않는다."라는 답변이 많았다. 마지막으로 저작권법의 처벌법안에 대한 생각을 묻는 문항은 "정당하지만 너무 엄격하다"라는 문항이 55%로 가장 많았고 "정당하다"라는 답변은 25%로 두 번째로 많았으며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답변은 17%, 그리고 기타의견이 3%로 뒤를 이었다. 마지막문항의 답변결과에 의하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저작권법이 정당하고 지켜져야 할 것으로 여기고 있다. 처벌의 완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역시 저작물이 보호받아야 한다는 사실에는 이의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8,9번 문항결과에 의하면 사람들은 불법공유를 하면서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경향이 컸고 느끼더라도 자신의 불법행위에 내적통제를 가할 정도로 강하게 느끼지는 않고 있었다.4)잘못된 개개인의 법의식과 그 원인사람들은 저작권자의 허락 없는 컨텐츠물 공유가 불겠다.
    사회과학| 2013.01.01| 11페이지| 1,500원| 조회(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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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크르고프 서양중세문명 서평
    서양중세문명 서평1. 서론 - 아날학파와 물질문명, 그리고 심성사르네상스 이후 여러 학문들이 신학의 속박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정치적으로는 자유혁명들과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인류사는 현재에 이르렀다. 즉, 중세의 그림자를 완벽하게 걷어낸 순간 인류는 현재의 세계에 도달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사람들은 중세를 그저 낯설고 기괴한 시대로 치부해왔다. 이성이 종교 가치관의 그늘에 가려진 시대, 정체되어 있는 시대, 찬란했던 고대와 다시 빛을 발하려는 르네상스시기 사이에 불편하게 끼어있는 암흑시대... 이것이 보통 전형적인 유럽 중세에 대한 이미지일 것이다.자크 르고프 역시 이러한 전형적인 중세사에 대한 이미지에 크게 반대하지는 않는 듯하다. 다만 그는 우리가 보지 못했던 부분들, 아날학파의 주요 연구대상인 심성사와 물질문명사를 통해 중세를 훨씬 정교히 파악하려한다. “나폴레옹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교황을 압박하였다.”, “진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한 후 북방이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축조했다.” 자크 르고프의 아날학파적 저술들을 읽고 있자면 이러한 말들이 정말 옳은 서술인지 재고하게 된다. 과연 나폴레옹 혼자만의 의지로 알프스 산맥을 넘은 것일까? 교황에게 한방 먹여주겠다는 프랑스 민중들의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만리장성 축조는 오직 진시황제 한명의 의지만으로 이뤄진 것인가? 북방이민족에 대한 중국인들의 공통된 두려움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아날학파적 시각에서 보자면 그러한 사건들은 한두 명의 엘리트들의 의지와 능력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시대 대다수 사람들의 공통된 망탈리테와 그것을 야기 시켰던 장기 지속적 사회구조가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아날학파는 엘리트들의 역사만이 아니라 평범한, 사실 그 시대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인간 군상들의 역사를 면밀히 탐구한다. 또한 소외되었던 소수집단들의 역사까지도 놓치지 않는다. 이 책의 백미는 후반부인 2부이다. 자크 르고프가 스스로 프롤때는 절대 느끼지 못할 아날학파의 역사학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 할 수 있겠다.그리고 그의 이러한 저술은 중세에 대해 두루뭉술하게 품고 있던 허상과 같은 이미지를 좀 더 정교한 실체로 다듬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나타난 중세사의 실체는 중세가 겉으로는 고대보다 낙후된 모습을 보일지라도 근대로 나아가는데 없어선 안 됐을 필수불가결의 시대, 그리고 고대의 유산들을 품고 근대를 준비했던 시대였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2. 이성이 퇴보된, 환상이 지배하는 시대자크 르고프가 서술한 중세서구인들의 망탈리테와 물질문명들을 읽고 있자면 중세가 얼마나 이성적 사고가 지양되고 종교적 사고가 지배하던 시대였는지 새삼스레 더욱 구체적으로 깨닫게 된다. 사실 중세를 지칭하는 표현들은 여러 가지일 수 있겠다. 기사도의 시대, 분열의 시대, 암흑시대... 나는 자크 르고프의 저술들을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중세는 종교와 환상의 시대라고 지칭되어야 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현대 대중문화들을 보면 사람들이 서구 중세에 대해 자주 환상적인 이미지를 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성들과 마법, 마녀와 사탄숭배자, 그리고 동화에 나오는 영주와 공주, 기사들은 전부 서구중세에 존재했던 것들 아닌가? 그렇다면 이런 판타지들이 왜 유독 서구 중세에서 비롯된 것들의 비중이 상당한 것일까?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고 있듯이 종교에 의해 이성이 속박된 시대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그 답이 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양상으로, 얼마나 심하게 종교는 중세서구인들의 이성적 사고를 방해했는가? 그에 대한 답은 중세인들의 생활상과 망탈리테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자크 르고프의 저술들은 매우 구체적으로 중세인들의 세계관과 가치체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이해하면 어째서 서구 중세가 환상의 시대였는지, 또 얼마나 그 정도가 심했는지 알 수 있다.수많은 이단논쟁과 종교회의를 거쳐 이단들과 비정통 사상들(물론 로마 교황청의 입장에서...)을 제압한 후 서유럽의 메는 그 비중이 매우 컸다. 카톨릭 수도사들과 접촉하는 것이 식사를 하는 것만큼이나 익숙했던 시대였다. 그러니 얼마나 중세인들의 사고가 기독교적 세계관에 속박되어 있었을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자크 르고프는 중세인들의 기독교적 사고관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대표적인 예시들을 나열한다. 성유골 숭배, 성인 숭배, 기적 숭배와 신적 개입에 대한 의존들, 농민들의 일상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천국과 지옥, 천사와 악마들의 존재... 이러한 것들이 매우 당연시 여겨지던 시대를 상상해보면 중세인들의 삶을 한층 더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중세인들의 심성을 한층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나니 중세를 배경으로 어떤 환상과 판타지가 존재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느껴진다. 중세는 그야말로 판타지의 시대였다. 르네상스 시기 인문주의자들이 중세를 폄하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중세는 그야말로 이성이 종교에 속박되어 인간들의 지적수준이 유아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아니 유아수준으로 퇴보했던 시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3. 그렇다면 중세는 퇴보의 시대였나?강력한 통일 국가는 전설이 되어버렸고 남은 것은 수많은 영지들과 봉건제도였다. 설비는 빈약했고 기술은 수준이 낮았으며 경제는 자연경제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돌의 문명은 나무의 문명으로 바뀌었다. 금화는 은화로 도시사회는 농촌사회로 격하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성이 퇴보하여 종교의 그림자에 가리었다.사실 이러한 퇴보의 원인과 배경을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또한 논쟁이 치열하기에 경솔하게 결론지을 수는 없으나 원인이 어떻든 간에 중세가 근대 유럽을 낳았다는 사실만은 엄연한 사실이다.그러나 상식적으로 고찰해 볼 때 진보라는 것은 보통 직선적인 발전을 특징으로 하지 않던가. 왜 찬란했던 고대 문명이 굳이 암흑중세로 퇴보했다가 다시 근대로 발전해 나간 것인가? 그 답은 중세가 겉으로는 퇴보적인 역사의 진행으로 보였으나 근대의 자양분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퇴보도 사라진 것이 아님을 저술한다. 고대의 사상과 지식들은 기독교의 교리에 반(反)하지 않기 위해 자신들의 모습을 재주조했다. 또 그리스 로마의 문화와 사상들이 요약, 분해되었다. 때문에 고대 그리스 로마 지식들의 심오한 학문적 가치들이 훼손되고 왜곡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지적 흐름들은 대르네상스 시기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지적 퇴보로 여겨져 왔다.그런데 이러한 고대 지식들의 퇴보들은 그 지식들이 소멸되지 않기 위해, 그리고 당시 상황에 적응하는데 필요한 조건이었다는 점을 자크 르고프는 강조하고 있다. 즉, 인문주의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그것들은 단순한 퇴보가 아니라 도약을 위한 잠깐의 발돋움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맥이 끊어지지 않은 고대 그리스 로마사상들이 여러 번의 르네상스에 의해 결국 화려하게 다시 부활했으며 근세유럽을 형성하는데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더 이상 서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또한 중세유럽의 가장 큰 특징인 장원과 봉건제도만이 유럽의 사회체제는 아니었다. 도시사회 역시 장원과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로마를 장식했던 도시문명은 게르만족의 유입과 함께 파괴되어 사라져가는 듯 했으나 얼마가지 않아 다시 중흥기를 겪기 시작했다. 그런데 중세의 도시들은 고대의 도시들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고대의 도시들의 정치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면 중세의 도시들은 상업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보통 서구 중세를 얘기할 때 봉건제와 장원 그리고 농촌사회가 강조되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도시가 있었고 상업경제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자크 르고프는 중세에는 중세적인 퇴보적인 요소들과 진보적인 요소들이 공존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하다. 서양문명의 외관은 봉건제도와 장원, 그리고 자급자족의 농촌경제였으나 그 이면에는 도시문화와 상업경제가 존재하고 있었다. 중세의 공식 신분질서인 3위계(싸우는 자, 기도하는 자, 일하는 자)에 포함되지 않은 부르주아들 역시 존재하고 있었다. 물론 중세인들에게 도시와 부르주아는 그 시대의 이단과 같은 것으로것들은 근대를 불러 온 것이 아니라 시대를 ‘중세말기’로 나아가게 하고 있었다.5. 중세의 단절성 비판모든 학문들이 다 그렇겠지만 특히 인문학만큼 전시대의 학자들이 남겨놓은 텍스트가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학문은 없을 것이다. 역사학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전의 역사학들은 사실 권력의 유지에 초점을 두어왔다. 학자들은 어떻게 권력이 집중되고 여러 권력들이 어떻게 충돌을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권력이 몰락하고 새로운 권력이 등장하는지 그 과정을 탐구해왔다. 즉, 그것은 주로 그 시대의 주류 상류층들의 삶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학문적 경향이 그르다고만은 할 수는 없으나 그러한 사관을 견지할 경우 인지하지 못하고 놓치는 여러 사실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중세의 단절성 역시 그러한 학문적 경향에서 도출된 것일 것이다. 인문주의자들과 부르주아들이 보기에는 대르네상스 시기부터 세상이 급변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르네상스 이전의 세계는 침체되어있고 활기 없고 이성이 빛을 발하지 못했던 시대... 그러나 자신들의 시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양하는 카톨릭적 가치관이 지배하던 시대를 폄하하고 자신들의 시대와 경계를 그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자크 르고프는 중세가 활발한 운동으로 활기를 띠었던 시대라 평가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인문주의자들이 르네상스로 인한 시대의 격변을 강조하는 것과 반대로 자크 르고프는 르네상스가 중세를 근대로 전환시켰던 큰 사건이 아니라 중세 내내 중세를 특징지었던 것이라 본다. 르네상스는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 지속적으로 중세에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 외에도 중세는 계속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킬 여러 가지 내부적인 요인들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는 대르네상스 시기와 흑사병 이후에도 중세적인 특징들이 매우 강하게 유럽사회에 남아있었다는 점을 얘기한다. 부르주아들과 인문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세상이 변했을지 모르나 평범한 농민과 민중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다지 그 이전과 삶이 달라진 것이 없었던 것이다. 대르네상스 시.
    독후감/창작| 2013.01.01| 5페이지| 1,000원| 조회(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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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비박스사의 십자군 요약
    1. 소집십자군 소집과 그 배경7세기 마호메트가 창시한 이슬람교는 기독교세계의 심각한 경쟁자로 급부상하였다. 그들은 지하드를 외치며 불신자와 유일신을 거부하는 자들을 정복하기 시작했고 서유럽은 공공의 적인 이슬람세계를 향해 큰 적대감을 품기 시작했다. 기독교세계와 이슬람세계의 갈등은 셀주크 투르크족이 소아시아의 비잔틴령을 침공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비잔틴 제국의 알렉시우스 1세는 비잔틴 제국의 쇠락을 막기 위해 서유럽 세계에 원조를 요청했다. 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사절을 보냈다.그레고리우스 7세는 비잔틴 제국의 원조요청을 교황권을 강화시킬 기회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독일의 하인리히 4세와의 성직 서임권 다툼에 정신이 팔리게 되어 그의 십자군 구상은 그의 대에서 실현되지 않았다. 그의 뒤를 이은 우르바누스 2세는 그레고리우스 7세의 구상을 이루기 위해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명연설과 함께 십자군 원정을 선포했다. 그는 비잔틴 제국이 잃은 소아시아의 재탈환 보다는 성지 팔레스티나의 해방을 강조하고 성지순례의 개념과 결부시키는 교묘한 수를 써서 십자군 원정에 대한 큰 지지를 얻어내었다.십자군의 참가 동기십자군은 종교적인 원동력보다는 세속적인 욕망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으나 그것은 재고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조너선 라일리스미스 같은 학자들이 십자군 원정 관련문서들을 계량 분석해본 결과 십자군 전쟁의 참가 동기는 주로 종교적 신앙심에 의한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세속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참가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십자군의 주요 참가 동기는 그리스도의 땅을 이교도들로 해방시키고자 하는 종교적 열정이었다.2. 제 1차 십자군 원정은자 피에르는 유럽을 돌아다니며 설교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십자군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십자군 참가의 동기부여를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앞장서서 민중 십자군을 조직했다. 그들의 십자군의 공식 출정 날짜가 되기 훨씬 전에 원정길에 올랐다. 프랑스의 귀족 고티에도 피에르의 민중 십자 십자군예루살렘 왕국의 탄생과 정착강력한 이집트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진격중인 상황에서 그들은 도시와 주변영토의 수비를 지휘할 통치자가 필요했다. 레몽과 고드프루아간의 왕위를 둘러싼 갈등 끝에 결국 고드프루아가 예루살렘 왕국의 왕관을 쓰게 되었다. 십자군은 아스칼론에서 이집트군대를 격파했고 당분간 십자군은 성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고드프루아가 사망한 후 고드프루아의 동료들은 에데사의 보두앵을 불러 왕위에 오르게 했다. 교황의 특사인 다임베르트 총대주교는 교회가 예루살렘 통치권을 가지길 바랐으나 어쩔수 없이 보두앵 1세의 왕위 등극을 인정해야 했다.왕위를 고드프루아에게 뺏긴 레몽은 항구도시인 트리폴리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끝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레몽의 사촌 기욤과 레몽의 아들 베르트랑 다툼 끝에 결국 베르트랑이 보두앵 왕의 봉신으로서 트리폴리를 소유하기로 결정되었다. 결국 트리폴리 공략은 성공하여 예루살렘 왕국의 영토로 추가되고 이후 1110년에 보두앵 1세가 시돈과 베이루트를 장악하면서 예수살렘 왕국의 온전한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보두앵 1세는 팔레스티나 연안을 거의 다 정복했고 이슬람 인접국에 맞서 변경을 굳건히 정비했다. 그리고 1118년 이집트 원정 중에 병에 걸려 사망했다.보두앵 1세가 죽고 에데사의 통치자 부르의 보두앵이 왕위에 올랐다. 이듬해 안티오크의 루지에로가 알레포를 공격하다가 격파 당하여 안티오크와 에데사가 이슬람세력에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보두앵2세는 교황에게 도움을 청했다. 예루살렘 왕국은 1122년에 베네치아 십자군의 도움을 받아 어느 정도 회복을 하고 티레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티레까지 정복함으로써 예루살렘은 명실상부한 중동의 신흥 국가로 거듭났다. 예루살렘의 십자군은 더 이상 원정군이 아니었다. 이제 팔레스티나는 그들의 고향이었다. 이후 팔레스티나에서 기독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은 2백년 가까이 이웃해서 살게 된다. 그 두 집단 간에는 상당한 문화 교류가 이루어 졌으며 기독교와 이슬람교 필리프 2세는 프랑스 영토 내에서 형식상 리처드의 주군이었는데, 사나이답고 열정적이고 명망 높은 리처드에 비교되어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필리프는 십자군 원정 내내 리처드와 반목하다가 결국 귀국해 버렸고, 본국으로 달아가서는 프랑스 내 리처드의 영토를 삼키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리처드는 본국으로 돌아갈지 계속 살라딘과 싸워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살라딘에게 1193년 부활절에 돌아와서 전쟁을 끝내자는 약속을 남기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3차 십자군은 끝났다.비록 리처드가 예루살렘을 수복하지는 못했지만 많은 해안 도시들을 되찾고 함락될 위기에 처한 여러 도시들을 구해냈으며 결과적으로는 이슬람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리처드는 레반트의 기독교도들을 되살려 놓은 셈이었다. 이러한 리처드의 업적으로 인해 3차 십자군은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5. 제 4차 십자군1198년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인노켄티우스 3세는 아직 수복되지 않은 예루살렘으로의 새로운 십자군 원정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세속의 군주들은 자신들의 국내 사정에 정신이 팔려 십자군원정에 참가할 의지가 없었다. 교황의 중재로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휴전 협정을 맺으면서 새로운 십자군 원정의 희망이 보이는 듯했으나 리처드가 1199년에 화살에 맞아 사망하면서 십자군원정에 대한 희망은 사라져갔다. 이때 풀크의 열정적인 설교로 인해 다시 십자군들이 귀족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했고 상파뉴 백작 티보, 그의 사촌인 블루아 백작 루이, 그리고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이 십자군 원정에의 의지를 강하게 비춤으로써 제 4차 십자군이 결성되었다.그러나 제 4차 십자군이 베네치아와 무리한 계약을 하게 되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4차 십자군의 대표단이 베네치아의 도제였던 엔리코 단돌로와 만나 계약이 이뤄졌다. 계약 내용은 십자군이 8만 5천 쾰른 마르크를 베네치아에 주는 조건으로 베체니아는 십자군에게 1년분의 식량과 기사 4천 5백명 및 그들의 말, 종자 9천명, 보병 2만명을 수송할 선박을 제공하는 것이 백작들은 알비파를 억제,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1194년 레몽 6세가 툴르즈의 새로운 백작이 되자 그러한 노력들은 아예 중단 되었다. 그는 알비파의 교리에(대놓고 신봉하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마음이 끌린 것이다. 이제 랑그도크 지역의 많은 귀족들이 알비파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레몽 6세는 은근히 알비파들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 결국 인노켄티우스 3세는 레몽 6세를 파문하고 이단들을 멸하는 전쟁을 촉구하게 되었다. 인노켄티우스가 이 십자군을 동방 십자군과 동일시했기에 프랑스 영주들에게 이는 가까운 곳에서 십자군의 은사와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기회였다. 알비파를 목표로 한 십자군이 결성되자 레몽은 교황에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빌었고 십자군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 가지 않아 알비파의 편으로 돌아섰다.시몽은 레몽 주변의 영역들을 점령하여 레몽의 툴루즈 지역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한편 스페인의 아라곤 왕국은 국토회복운동의 선봉이면서도 툴루즈 백작 레몽의 후원자였으며, 또한 톨루즈의 알비파 영주들을 자신의 보호령으로 두고 있었다. 그러나 시몽이 아라곤 왕국의 보호령들을 이단이라는 이유로 차례차례 뺏어가자, 아라곤 왕국의 왕 페드로는 레몽과 동맹을 맺고 3만의 군사로 시몽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이것이 바로 뮈레 전투이다.시몽의 군대는 아라곤 왕국군으로부터 승리를 거두었고 시몽의 십자군은 레몽의 영지를 거의 점령하였다. 그러나 랑그도크 지역 주민들은 레몽을 지지하고 시몽을 경멸했다. 결국 여러 도시들에서 반란이 일어나 시몽은 보케르와 툴루즈를 잃는 지경에 처했다.시몽은 툴루즈를 포위 공격 하던 중 사망했고 그의 아들 아말릭은 툴루즈에서 물러나 카르카손까지 후퇴했다. 그러나 1225년 부르주 공의회에서 교회는 아말릭의 편을 들어 레몽을 이단자로 선언하고 그의 영지를 몰수한다고 밝혔다. 프랑스 국왕인 루이왕도 교회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으므로 레몽은 자신의 왕과도 싸워야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그는 평화협상을 시작했고 영지를 자신의 후손에게 물려 공의회에서 새로운 십자군의 청사진이 그려졌다. 이 공의회에서 발표된 교서들은 십자군의 권리와 특권을 확대하여 십자군 참가 인원수를 늘리려 했다. 십자군에 참가하면 세금면제 등의 여러 특권을 누릴 수 있었고 결국 유럽은 다시 십자군의 열의에 휩싸였다.십자군이 다시 결성되어 아크레에 도착했다. 십자군은 이집트 나일 강 삼각주에 위치한 다미에타를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십자군은 살라딘의 후계자들 간의 분열 덕에 비교적 손쉽게 다미에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 기세를 몰아 나일강 중류의 만수라를 공략하려다가 알 카밀의 나일강을 범람시키는 계략에 전투불능상태가 되어버렸고 이슬람 군대에게 포위당하게 되었다. 그들은 항복을 했고 그 대가로 다미에타를 다시 알 카밀에게 돌려줘야 했다. 5차 십자군은 이렇게 아무런 이득 없이 끝났다.5차 십자군 실패의 원인으로 프리드리히 2세가 참가하지 않은 것이 큰 문제로 제기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과 다른 영주들로부터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꼭 십자군 원정을 가겠다고 약속하나 계속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인내심이 바닥나 그를 파문한다. 프리드리히 2세는 파문되고 나서야 십자군을 일으켰으며 아이유브 왕조의 알 카밀이 내란을 겪는 상황을 이용하여 외교 정책으로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수복이 아니었다. 예루살렘에 살던 이슬람 주민들은 계속 남아있으며 별도의 사법체계를 시행하고 독자적인 이슬람 관리가 남아있는 이른바 반쪽 자리 수복이었다. 여러 성전들 역시 기독교도의 것이 아니라 이슬람의 것이었다. 이 조약으로 인해 프리드리히는 물론이고 이슬람의 지도자 알 카밀 역시 그들의 세계로부터 성지를 팔아먹었다는 거센 비난을 받아야했다.8.성왕 루이의 십자군1239년에 프리드리히 2세가 맺은 강화조약이 만기가 되면서 예루살렘은 다시 이슬람교도들의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 아이유브 왕조가 시리아와 이집트로 분열되어 있던 상황을 이용하여 샹파뉴의 티보와 콘월의 리처드가 예루살렘을 된다.
    인문/어학| 2013.01.01| 9페이지| 1,000원| 조회(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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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생애 평가A+최고예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카이사르의 초기생애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속한 율리우스 씨족은 오랜 기간 고위 공직자를 배출하지 못하면서 카이사르의 대에 이르러서는 다른 유력 씨족과는 달리 공화정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하고 있었고, 다른 씨족에 비해 공화국 역사에 미친 영향은 적지만 율리우스 씨족이 매우 전통 깊은 씨족이라는 사실만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다. 그의 인척 중 가장 유력한 인물은 무려 7회나 집정관을 역임했던 고모부 마리우스였다.카이사르의 아버지는 그가 16세 되던 해 사망했고 가문을 책임지게 된 카이사르는 킨나의 딸, 코르넬리우스와 혼인했다. 당시 킨나는 로마 최고의 권력자였다. 그러나 마리우스의 평민파를 제압하고 원로원 귀족파의 술라가 로마를 장악하면서 상황은 급변하게 되었다. 술라의 잔혹한 숙청이 카이사르에게도 위협으로 다가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이는 카이사르가 일찍이 원로원으로부터 반체제 성향의 위험한 인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일단 그는 마리우스와 친척관계가 있었으며 그를 지지하는 발언을 자주했는데 이는 원로원 귀족들의 신경을 거스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또한 그의 특출한 재능과 큰 야망, 그리고 난잡한 여자관계로 인한 스캔들은 그의 이채로운 구석을 더욱 부각시켰다. 때문에 술라파가 마리우스파 잔당을 숙청하기 위해 작성한 살생부에 카이사르의 이름이 올랐고 카이사르는 위기에 처한다. 술라는 관용을 베풀어 카이사르에게 마리우스와 관계가 깊었던 킨나의 딸과 이혼하면 살려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를 거부했고 술라의 위협은 점점 심해졌다. 결국에는 카이사르에게 체포령이 내려졌다. 카이사르는 망명을 택했으나 이내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뇌물을 통해 겨우 방면되었다.카이사르는 술라에게서 벗어난 직후 외국으로 떠났는데 그 과정에서 당시 지중해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해적들에게 피랍되고 말았다. 카이사르는 비록 포로 신분이었으나 도리어 해적들을 부리거나 조롱하는 등의 당당한 태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한편 카틸리나라는 인물이 로마 공화정을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세우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는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빚이 많았는데, 한때 그는 술라의 휘하에서 대숙청 기간 동안 벌인 잔인한 행적으로 인해 카토에 의해 고소당했으나 무죄 선고를 받았었던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집정관 선거에서 실패하면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빚이 불어났고 채권자들이 그에게 빚을 독촉했는데, 이 때문에 그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무력 쿠데타를 벌이려고 한다는 소문이 퍼졌던 것이다. 실제로 로마 외부에서 카틸리나의 동료가 군대를 이끌고 진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카틸리나는 로마를 떠나 그의 동료에게 합류했다. 그러나 공화정은 카틸리나와 4인의 공모자를 체포했고 이들에게 어떤 처벌을 내릴지 토론이 벌어졌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카틸리나 일당에게 인도적인 처벌을 하자고 옹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바로 카토는 이를 반박하며 카틸리나와 카이사르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했다. 그러나 증거 불충분으로 카이사르는 무사할 수 있었고 카틸리나 일당들은 처형되었다.이후 그는 대신관과 법무관을 동시에 역임했는데, 이때 호민관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 제출하는 급진적인 법안을 지원했다. 카이사르는 이 법안의 제창자이자 지원자로 활동했다. 이 두 사람의 합심은 원로원의 큰 경계를 불러왔고 결국 원로원은 두 사람의 국무집행권을 박탁했다. 그런데 카이사르가 집행권을 박탈당했음에도 계속 법정에서 판결을 내리려하자 원로원은 이를 무력으로 제압하려했고 결국 카이사르는 스스로 은퇴한다. 그러자 수많은 시민들이 카이사르에게 몰려와 본래의 관직으로 복귀하라고 촉구하는데 카이사르는 이들을 진정시켜 돌려보냈고 원로원은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다시 그를 복직시켰다. 이는 그 당시 카이사르가 민중들에게 얼마나 큰 인기를 끌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일화다.법무관을 역임한 뒤에 그는 서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했다. 히스파니아에서 그는 총독으로서 활발히 활동하여 부대를 증강하고성사시키기 위해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 협력하였던 것이다.한편 스파르타쿠스의 난 진압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던 로마 최고의 거부 크라수스는 동부 징세업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동부 징세업자들은 로마에 납부해야할 세금의 액수를 줄여달라고 원로원에 요구하고 있었으나 원로원은 이를 거부하고 있었다. 때문에 크라수스는 징세업자들이 납부할 세수를 감면하기 위해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동맹에 합세한다. 삼두정치는 세 사람이 모두 같은 정치적 이상을 갖고 결합한 것이라기보다는 각자의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는 야합(野合)이었다. 카이사르는 집정관에 취임하여 행정력을 구비하고자 했고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카이사르를 통해 각자 앞서 설명한 불만사항을 해결하고자 했다. 즉,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무기이고,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카이사르의 지원자 역할인 것이었다.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지원 덕분에 집정관 선거에 당선된 카이사르는 취임하자마자 모든 토론내용을 포룸에 공고토록 하여 시민들에게 공개했다. 그리고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토지법을 개혁과 징세 할당량 감소를 위한 법안을 제출ㆍ통과시켰다. 이로 인해 폼페이우스의 퇴역병들은 농토를 지급받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카토의 방해로 원로원에서의 의사진행이 힘들어지자 카이사르는 법안들을 민회에 직접 제출하여 통과시켰다.또한 그는 술라의 원안을 개선하고 구체화하여 속주 총독의 행동을 제한하는 법을 제정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자신의 딸인 율리아를 결혼시킴으로써 혼인동맹으로 삼두정치를 더욱 강화했다.일련의 정책들을 시행하는 동시에 카이사르는 갈리아 속주, 일리리쿰의 통치권과 4개 군단의 사령관직을 총독에게 5년간 부여하는 법을 통과시켜 집정관 임기 후의 갈리아 정벌을 준비했다. 그리고 이전에 자신의 전 부인인 폼페이아의 애인이었던 클로디우스를 호민관에 당선시켜 자신이 통과시킨 법안의 적법성을 유지토록 하고 키케로를 비롯한 원로원 세력을 견제토록 하는 등 정치적 안정성을 꾀하였다.이러한 카이사 로마에 대항할 것을 주장한다. 이는 상당한 효과를 보아 카이사르의 갈리아평정 사업에 지대한 걸림돌이 되었다. 베르킨게토릭스의 범갈리아 연합론은 이제까지의 카이사르의 정복사업을 수포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베르킨게토릭스의 등장 이후 카이사르에게 우호적이었던 부족들과 그에게 평정 당했던 부족들이 다시 카이사르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던 것이다.베르킨게토릭스는 청야전술(주변에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로 로마군에 대항했다. 이는 원로원과 폼페이우스의 견제 때문에 본국으로부터 물자 지원을 받기가 힘들어 주로 현지조달에 의존하던 카이사르군에게 큰 타격을 안겨주었다. 이에 카이사르는 전쟁이 장기전으로 갈수록 불리해진다는 것을 깨닫고 베르킨게토릭스의 본대가 있는 게르고비아를 공격하여 전쟁을 신속히 마무리 지으려한다. 그러나 게르고비아는 베르킨게토릭스의 본대가 주둔하고 있는 만큼 방비가 철저했고 지형적으로도 천혜의 요새였다. 게다가 카이사르는 군대의 4할을 다른 부족 제압에 투입한 상황이었기에 6할의 군대만으로 게르고비아를 공략해야 했다. 결국 게르고비아에서 카이사르는 패배하여 병력의 손실만을 입고 퇴각하게 된다.승리의 기세를 몰아 베르킨게토릭스는 성 밖으로 나와 퇴각하는 로마군을 쫓아 격파하려 한다. 기병들은 기동력을 살려 로마군을 앞질러가서 행군중인 로마군을 좌우와 앞의 세 방향에서 공격하고, 베르킨게토릭스가 직접 이끄는 8만 명의 보병은 로마군의 후방을 차단하는 완벽한 포위전술로 임했다. 그러나 회전(會戰)에 익숙한 카이사르의 군대는 수적, 전술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베르킨게토릭스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고 베르킨게토릭스는 크나큰 병력손실을 입고 알레시아로 도망간다.카이사르는 알레시아 주변에 2중 성벽을 쌓아 베르킨게토릭스를 철저하게 고립시킨다. 베르킨게토릭스를 구원하기 위한 갈리아원군이 도착하여 베르킨게토릭스와 로마군을 앞뒤에서 공격했으나 카이사르는 구축해둔 방어시설을 이용하여 이들을 막아냈고 결로마와 이탈리아를 손에 넣었다. 이탈리아를 손에 넣은 카이사르는 독재관로 임명되어 집정관 선거를 주재하여 스스로 집정관이 되었다. 이후 카이사르는 집정관의 권한으로 일련의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첫째는 기원전 52년에 폼페이우스가 쫓아낸 사람들을 귀국시키는 것이었고, 둘째는 술라에게 처형된 이들의 자손들에게 정치적 복권 조치가 내려진 것이었다. 셋째로는 경제 개혁이 있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해 일부 재산 가치가 폭락했고 카이사르를 지지하던 많은 사람들이 부채를 탕감할 것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완전 탕감이라는 과격한 방법보다는 타협책을 제시하여 모든 재산을 전쟁 전의 가치로 환산하여 빚을 갚도록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1만 5천 데나리우스 이상의 재산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부활시켜 경제를 활성화시키고자 했다.로마의 본토인 이탈리아와 갈리아가 카이사르의 손에 있었지만 그는 방심할 수 없었다. 카이사르의 세력은 갈리아와 이탈리아 반도에 미치는 정도였으나 그 외의 지역인 발칸반도, 소아시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이베리아는 모두 폼페이우스의 세력권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카이사르가 어물쩍거리는 사이에 폼페이우스가 본격적으로 모든 세력을 규합해오면 당해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카이사르는 11일 만에 독재관직을 사임하고 폼페이우스의 세력권에 군사행동을 펼친다. 그의 계획은 3개 군단을 편성하여 각 군단이 이베리아와 북아프리카를 평정하고 아드리아해의 재해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특히 폼페이우스가 있는 발칸반도를 평정하려면 이탈리아와 발칸반도사이에 있는 아드리아해의 재해권 장악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했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이끄는 제 3군단의 이베리아 평정만이 성공하고 나머지 계획은 모두 실패하게 된다. 아드리아해의 재해권 장악 실패는 이후 발칸반도에서 카이사르가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병력을 지닌 폼페이우스와 힘겹게 싸워야했던 원인이 되었다.이베리아가 평정되고 한 달 뒤인 BC 48년 1월 4일, 카이사르는 본격적으로 폼페이우스와 대다.
    인문/어학| 2013.01.01| 9페이지| 1,000원| 조회(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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