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종교개혁과 서구 자본주의의 기원 문제(A. 근대적 가치관 내지 세계관의 형성. B. 막스베버의 논의를 중심으로)막스베버는 서구 자본주의의 기원을 종교개혁을 불러일으킨 칼뱅의 프로테스탄트주의에서 찾았다. 베버는 남부유럽의 카톨릭 국가보다 서부의 프로테스탄트 국가에서 산업혁명 및 자본주의 발전이 더 빠르게 진행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트 정신의 연관성을 이야기했다.중세 말에 이르러 교회가 세속화되고 부패함에 따라 교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종교개혁을 주장한다. 루터에 이어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칼뱅이 예정설을 주장하며 새로운 논란을 낳게 된다.예정설이란 인간의 구원여부가 신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행을 한다고 해서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냥 자기가 맡은 직업에 근면하게 종사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칼뱅은 직업을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라고 규정했다. 이는 전통적인 직업관에 대한 혁명적 변화로서 직업의 귀천의식을 약화시켰다. 종래에는 경제적 소득과 대가를 목적으로 하는 노동은 부정적으로 인식해왔으나 칼뱅의 종교윤리를 통해 이것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어떤 직업이든 최선을 다해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며, 나아가 직업에서의 성공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증거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이것은 노동은 신성한 것이며, 이윤추구는 합리적인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카톨릭이 금지하던 개인재산을 허용하는 것이기도 했다.당시의 교회는 필요이상의 자본 소유를 경계했다. 이에 따라 가장 많은 비난을 받는 사람은 고리대금업자였다. 당시의 생각으로 생산하지 않는 자가 열매를 먹는 것은 매우 불합리 한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교회의 논리는 장사로 돈을 버는 상공 시민계층이 매우 탐욕스럽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종교적 가치관에 의해 산업화 초기단계에 새롭게 성장하던 도시의 상공업자들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었다. 교회와 자본주의는 양립하기 어려웠다.이 때 등장한 칼뱅의 주장이 상공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은 그들은 직업적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신 신성한 의무이며 그들이 부여받은 소명이었다. 이것은 자본가들에게 청렴하며 양심적인 기업 활동을 하는 기회가 되었고, 그들은 근검, 절약, 정직 등의 생활윤리를 실천했다.칼뱅의 사상은 자본주의의 싹을 틔웠고, 유럽 근대사회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그러나 칼뱅주의가 가장 발달했던 스위스와 스코틀랜드의 경제가 발달하지 못한 것을 보면, 베버의 논리는 부분적으로만 옳은 것처럼 보인다. 칼뱅주의가 서유럽인들이 자본의 재생산에 나서는 동인이 되며 자본주의의 발달을 도왔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베버는 칼뱅이 사유재산을 인정하면서 상업정신을 고취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사유재산을 인정한 것은 맞지만 칼뱅은 부의 축적을 배격했다. 칼뱅이 주장한 부의 목적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다. 그는 부자들이 소유한 부가 빈자들을 위해 쓰여야 할 재화라고 말했다. 그래서 칼뱅이 주장한 것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 제 3의 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3. 절대주의 체제의 사회, 정치적 배경절대주의는 말 그대로 왕이 자신의 나라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절대주의는 봉건사회의 해체와 더불어 성립되었다.봉건사회에서는 농노의 노동에 의해 장원이 경영되고, 농노는 장원을 소유한 영주에게 복속되어 있었다. 장원은 정치적 권력의 기반이었다. 왕은 장원의 크기나 혈통에 있어 다른 영주보다 우세할 뿐, 실질적으로 정치권력을 소유하지는 못했다.십자군 전쟁이 수행되는 동안 봉건사회 내부에는 도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도시에 수공업과 상업이 발전되고, 화폐경제가 보급되었다. 이에 따라 무역이 발전되고 도시민들은 더욱 더 많은 부(富)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장원제 사회에서는 영주만 잘살고 보통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생활을 했는데, 도시에서는 평민인데도 귀족보다 더 잘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면서 장원에 속해있던 농민들의 상대적 빈곤감이 커졌다. 상공업 발달은 상인들에게 막강한 힘을 부여했고, 지속적인 물가상승을 가져왔다. 이로 말미암아 봉건영주의 경제사정은 악화된다. 영주들은 농민들에게 부역을 강요했고, 농민들의 불만은 고조되었다.흑사병이 전 유럽을 휩쓸게 되면서 유럽인구의 어마어마한 수가 감소했다. 이것은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임금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이렇게 되자 많은 농민들이 장원을 이탈하여 돈을 벌려고 도시로 향했다. 이러한 현상을 막고 억누르려던 영주들에 의해 농민들의 불만이 더욱 증폭된다.농민들이 장원을 이탈하게 되면서 영주들은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점차 잃어가고, 장원제도가 해체되었다. 이에 따라 다수의 독립적인 권력이 존재했던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이름뿐이던 왕의 권력이 커지기 시작했다.십자군 원정 이후 르네상스라 불리던 문예부흥 운동이 여러 도시로 퍼져나갔다. 이에 힘입어 종교에도 새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당시 교회는 이미 하나의 커다란 정치 권력이 되어있었고, 개개인의 사생활까지 간섭했다. 이에 대한 불만과 종교가 봉건영주에게 부여한 불합리한 지위에 대한 반발로 종교개혁운동이 시작된다. 자유로운 활동을 원하는 시민계급은 교회세력의 구속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과 함께 막강한 권력의 중심에 있던 교황의 권위가 흔들린다. 반면 교황과의 권력적 대립구도에 놓인 왕의 상대적 지위가 향상된다.같은 시기, 중앙집권화를 통해 왕권강화를 꾀하려던 왕과 상공업을 통해 부를 축적해오던 시민계급의 결탁이 이루어진다. 상공업자들은 더욱 쉽고, 안정적이며, 효율적인 상행위를 하기 위한 국가의 지원이 필요했다. 반면 왕은 국가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경제적 뒷받침이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민계급은 조세를 납부하는 행위를 통해 왕을 지원하게 되고, 왕은 그들의 경제적 능력을 통해 자신의 힘을 증가시킨다.왕은 상비군과 관료제를 조직했다. 관료들은 왕의 의사를 충실히 반영해주는 행정을 펼쳤고, 상비군은 국내 치안유지와 대외적으로 외부의 침입을 막았으며, 언제나 왕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관료에게 주는 봉급과 군대 유지비는 시민 계층의 주머니에서 나온 조세를 통해 충당되었다. 왕은 이를 바탕으로 중상주의 정책을 펼치며 자국의 경제활동을 보호하고 육성시켰다.왕의 정책들이 시민계급의 부 축적을 돕게 되면서 부르주아라 불리던 당시 시민계층의 사회적 비중은 더욱 커졌다. 그들은 국가 내 경제력을 좌지우지 했고, 그들의 힘은 왕의 정치기반을 유지시켜주었다. 부르주아는 당시 정치 메카니즘을 움직이는 힘이기도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주도권을 가진 쪽은 왕이었다. 왜냐하면 시민계층은 치명적인 콤플렉스를 하나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여전히 귀족들에게 대접받지 못하는 ‘상인’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시민들의 세력 확대에도 불구하고 사회에는 아직 기득권을 고수하는 귀족세력이 존재했다. 왕은 공존하는 두 세력 사이의 팽팽한 갈등을 적절히 이용하고 조율시키면서 자신의 권위를 신장시킬 수 있었다.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왕은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되고, 절대왕정의 시대의 막이 열리게 되었다.4. 산업혁명의 근대적 의미(사회 정치적 영향 혹은 결과 )18세기 후반 영국으로부터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농업사회가 산업사회로 탈바꿈하고, 토지를 소유한 자에서 자본을 소유한 자로 권력이 이동했다. 이것은 ‘혁명’이라 불릴 정도의 굉장히 커다란 변화를 사회에 가져왔고, 이 후 여러 가지 현상들이 나타나게 된다.
당신에게 드리는 가을의 세레나데대전 문화예술의 전당, 이름부터가 대단했다. 음악회를 위해 부산히 기숙사를 나섰던 내가 마주한 대전 문화예술의 전당 또한 대단했다. 엄청난 크기의 건물은 위압감을 주기 충분했고, '예술'이라는 범접하기 어려운 분야의 무게를 다시 한 번 느끼게 했다.예술이라고는 손톱만치도 관련이 없었고, 더군다나 예술의 전당 근처는 얼씬도 해보지 못한 터라 나는 예매한 티켓을 받는 것부터가 어설펐다. 하지만 안내하는 분들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티켓을 품에 안고 자리로 이동할 수 있었다.7시 30분, 공연 시작 시간이 되자 커다란 종소리가 전당 안에 울려 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정 정장으로 깔끔하게 차려입은 대전 시립교향악단이 입장했다. TV에서만 보아왔던 오케스트라, 그리고 나의 첫 번째 음악회 방문이 이렇게 멋지게 시작되고 있었다.음악이 시작하기 전에 클래식 라디오 프로그램의 DJ인 장일범 씨가 나와 좀 더 흥미롭게 연주를 감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나의 첫 번째 음악회, 거기에서도 나의 첫 번째 감상곡은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 중 '몰다우'라는 작품이었다.몰다우는 스메타나의 고향인 체코의 어머니와 같은 강이다. 스메타나는 처음에 교향시 '나의 조국'을 3부로 완성할 생각이었으나 작품이 진척되는 동안 조국에 대한 사랑이 용솟음쳐 3곡을 더 추가시켜 마침내 6곡의 교향시를 완성했다고 한다. '몰다우'란 곡은 이 6개의 교향시 가운데에서도 가장 유명한 곡이다.체코는 최근 내가 즐겨봤던 '프라하의 연인'이란 드라마로 인해 굉장히 익숙했다. 드라마를 통해 아름답고 낭만적인 도시로 내 기억 속에 자리 잡은 프라하, 그리고 그 곳을 흐르는 따뜻한 강 몰다우.음악의 시작은 조심스럽게 강을 탐색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 음악 속에는 소설에서처럼 '화자'가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내가 상상한 이 작품의 화자는 초록색 옷을 입은 강 속의 작은 말썽꾸러기 남자요정이었다. 실제로는 스메타나가 보트로 강을 여행하면서 지은 곡이지만, 나는 보트를 탄 스메타나가 아닌 말썽꾸러기 남자요정의 여정을 상상해보았다.강 속에서 헤엄쳐 나와 몰래 인간의 보트에 올라탄 요정은 강을 타고 기나긴 여행을 시작한다. 작은 수원에서 시작한 강은 점점 커지고, 점점 강해진다. 요정도 강을 타고 내려가면서 보이는 아름다운 모습들에 놀라움과 신기함을 금치 못한다. 부드러운 강의 물결을 타고 요정이 본 것은 강물에 반사되어 아름답게 반짝이는 햇빛, 그 향기를 보여주는 짙푸른 나무들, 따뜻함과 정겨움이 배어있는 숲속의 작은 시골마을과 그 곳에 살고 있는 인정 많은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몰다우 강을 가본 적은 없지만, 스메타나의 이 곡을 통해서 나는 그러한 모습들을 상상해보았다.강의 아름다우면서도 도도한 모습들은 순조로움과 평탄함을 지나 곡의 중간 부분에서 급히 흐르는 듯 보이다가 이내 다시금 평안을 되찾는 방식으로 진행되면서 마무리된다.내가 들은 첫 번째 음악이어서도 그랬지만, 아름다운 몰다우 강과, 스메타나의 애국심이 반영된 곡이어서 그런지 가슴 뭉클하면서도 이번 음악회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겨준 곡이었다.두 번째 곡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플룻과 하프 협주곡'이었다.이 곡은 외교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귀족인 기네 공작의 딸의 결혼식을 기념하여서 작곡된 곡이라고 한다. 모차르트는 하프연주 실력이 뛰어나지 않았던 그녀를 위해 다장조로 이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이 곡의 연주를 위해 플루티스트 박민상 씨와 하피스트 김은경 씨가 멋진 드레스를 입고 무대로 나왔다. 플룻과 하프의 협주곡인 만큼 오케스트라보다는 이 두 분의 연주에 좀 더 초점을 맞춰 지켜봐야할 듯 싶어 나는 몸을 좀 더 곧추세웠다.기네 공작에 대한 작곡가의 불편한 마음과 좋지 않은 감정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굉장히 밝고 명랑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플룻을 연주하던 박민상 씨의 리듬을 타던 경쾌한 몸동작은 그러한 분위기를 더 잘 실감하도록 도왔다.독주악기인 하프와 플룻에 화려한 장식음이 가미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곡의 분위기는 굉장히 색채적이었는데 이것은 두 악기가 내는 고음과 그들이 연주하는 단순한 가락 때문이었다.세 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악장의 길이가 다른 곡들에 비해 길어 다소 지루한 느낌을 받기도 했지만, 하프와 플룻의 아름다운 연주로 눈과 귀가 즐거웠던 곡이었다.세 번째 곡은 안토닌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 제 2번' 이었다.어렸을 때 나는 피아노를 배웠었는데, 그때 '유모레스크'라는 곡을 배운 기억이 난다. 아름답지만 애수를 자아내기도 하던 만인의 곡인 유모레스크를 통해 알려진 드보르작은 나에게 그다지 생소한 작곡가는 아니었다.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에 대해선 전에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작곡가에 대한 나의 신뢰는 많은 기대를 안은 채 이 노래를 감상하도록 만들었다.슬라브 무곡은 세르비아 지방의 무곡을 바탕으로 하여 작곡된 곡이다.이 곡은 굉장히 슬픈 분위기로 시작을 하게 된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뒤로한 채 떠나야만 하는 한 아름다운 여인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그러나 중간부분의 사장조 부분은 앞과는 전혀 다른 밝고 명랑한 분위기를 연출해낸다. 곡이 시작될 때 나타나지 않던 '무곡'의 냄새는 중간부분에 가장 깊숙이 서려있다. 이 곡의 끝자락에서는 시작과 같은 애처로움과 중간부분에 나타난 사장조의 밝은 선율이 번갈아 드러난다.네 번째로 듣게 된 연주는 죠르주 비제의 '아를르의 여인' 모음곡 2번에 있는 '파랑돌'이라는 곡이었다.해설을 맡으셨던 장일범씨가 '아를르의 여인'에 대한 간략한 줄거리 설명을 해주셔서 이야기를 상상하며 곡을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파랑돌'은 손을 이어 잡고 추는 남프랑스 지방의 춤곡이다. 나는 프랑스의 전통춤은 들어본 적도 본적도 없지만 이 곡을 듣는 내내 아마도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며 마음속으로 신나고 경쾌한 춤을 추어 보았다.다섯 번째 곡은 에드워드 엘가의 '사랑의 인사'였다.이 곡은 나에게 굉장히 친숙하면서도 사랑스러운 곡이었다. 나는 고등학생 때 '검은 건반 위까지 올라와라'라는 청소년 영화에서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소녀의 연기를 한 적이 있다. 피아니스트를 꿈꾸던 소녀가 불의의 사고로 팔을 쓰지 못하게 되는데 '사랑의 인사'를 흥얼거리는 작은 꼬마아이를 만나 다시금 날고 싶다는 희망의 꿈을 꾸게 되는 그런 내용이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시작되자 그 때 내가 영화 속에서 웅얼거리던 허밍이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왔다.이 노래는 엘가가 그의 아내와 약혼을 하면서 바친 노래라고 한다. 그가 작곡가로서 대성할 수 있기까지 아내 앨리스는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이에 대한 그의 고마움과 사랑의 마음이 표현된 것이 바로 이 곡이다.해설자로부터 이러한 아름다운 사연을 듣고 울려 퍼지는 사랑의 인사는 예전에 듣던 그 어느 노래보다도 더없이 아름답게만 들렸다. 그 당시 유명하지 않았던 불투명한 미래를 가진 엘가를 사랑했고 믿었던 그의 아내와 훌륭한 작곡가로 거듭나서 그녀에게 기다림에 대한 사랑의 보답을 전하는 순수하고 예쁜 그들의 사랑이 바로 이 명곡을 탄생시킨 것이다.나는 이 곡이 끝날 때까지도 이 곡의 사랑스러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나뿐 아니라 엘가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와 이 노래를 전해들은 전당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을 것이다.크리스마스가 한달 앞으로 성큼 다가와 버렸는데, 눈이 내리는 그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다시금 이 노래를 듣고 싶다.여섯 번째 곡은 프란츠 슈베르트의 '세레나데'였다.‘세레나데’는 원래 밤에 사랑하는 사람의 창가에서 부르는 사랑의 노래를 의미하지만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는 그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다른 작곡가들이 쓴 사랑의 노래인 ‘세레나데’가 따뜻하고 희망에 넘치며 사랑스러운 것이라면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는 비통한 분위기의 곡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시작되면서 느낄 수 있었다.세레나데의 시작은 굉장히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곡이 점점 진행될수록 그것은 아련한 슬픔의 모양을 한 채 가슴을 아프게 한다.이 곡은 슈베르트가 친구들과 카페에서 시를 읽다가 만든 곡이라고 한다. 악상이 떠오른 그는 급히 계산서를 뒤집어 오선을 그리고 그곳에 이렇게 미묘하면서도 아름다운 곡을 술술 그려낸 것이다.일곱 번째로 연주된 곡은 아람 하차투리안의 ‘스파르타쿠스’모음곡 2번 중의 ‘스파르타쿠스와 프리지아의 아다지오’이다. 장대한 영웅의 이야기를 담은 대형 발레곡인 ‘스파르타쿠스’ 중 가장 아름다운 장면에 사용된 이 곡은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아름다운 아내 프리지아가 사랑에 찬 ‘파 드 되’를 출 때 연주되는 곡이다.
같이 수업을 듣는 윤미와 함께 대전 시립미술관에 전시회를 보러 갔다. 시립미술관은 처음이었는데 그 거대한 모습과 우아한 내부 자태에 알 수 없는 경건함부터 느꼈다.우리가 들어간 첫 번째 전시실은 지난 금강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았던 박경범 작가의 작품들을 전시해 놓았다. 작가는 그림에 대한 각각의 이름을 붙이지 않은 대신, 정해진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느낌들을 여러 점의 그림들로 완성시켜 놓았다.우리가 만난 박경범 작가의 첫 번째 주제는 ‘향기로운 휴식’이었다. 삶에 혹은 다른 무언가에 지친 한 여인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을 향기로운 배경 속에 담은 작품이었다. 이 작품들 모두가 형형색색의 다양함으로 우리의 눈을 현란하게 만드는 것이 분명하나, 그것이 전혀 여인의 휴식을 방해하는 것 같지가 않다. 즉, 다채로운 색상들이 수식하고 있는 것은 ‘휴식’이 아니라 ‘향기로운’일 것이다. 때문에 작품 속의 배경은 ‘꽃’으로 표현되었다. 배경에 담긴 꽃 외에 기하학적인 형태로 표현된 것은 아마도 그 꽃이 피어내는 편안한 향기인 듯하다. 그러다가 다시 감상의 중점을 쉬고 있는 여인에게로 돌리게 되면 작품의 배경은 꽃이 아닌 몽롱한 이상세계의 모습이 되어버린다.이렇듯 ‘향기로운 휴식’에서는 복잡한 현실로부터 도피하여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싶은 작가의 모호한 바람들이 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롭게 드러나 있다.‘나의 살던 고향은’은 우리가 만난 박경범 작가의 두 번째 생각이다. 우리는 힘든 일이 있거나 지쳐 쉬고 싶어질 때 고향을 그리고 어머니를 생각한다. 작가의 첫 번째, 두 번째 주제에서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그건 아마 그가 휴식이 필요한 듯 싶다는 것이다.이번 주제에서는 그가 사는 고향의 모습이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첫 번째는 봄과 여름, 두 번째는 가을, 세 번째는 겨울의 모습을 표현하였는데, 겨울을 표현한 작품은 작가가 앞에서 표현한 고향의 모습과는 다르게 마을의 외부모양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다음으로는 작은 액자들이 한데모아 펼쳐져 있는 벽이 보였는데, ‘풍경 및 인물 시리즈’라고 이름 붙여진 박경범 작가의 작품 120여점이었다. 인물 그림은 죄다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그린 것이었는데, 현대 여성들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하는 완벽한 몸매를 적나라하게 파헤쳐주었다.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표정은 모순되는 두 가지 기분을 들게 했다. 하나는 남자를 도발하는 것과 같은 섹시한 눈빛이요, 다른 하나는 말 못할 아픔을 간직했음직한 애절함이다. 박경범 작가의 풍경시리즈는 이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습을 보다 순수하고, 자연친화적인 모습으로 북돋워주는 역할을 해주었다. ‘풍경 및 인물 시리즈’의 마지막엔 웨딩드레스를 입고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인의 그림이 있었다. 여성의 아름다움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결혼하는 날의 신부의 모습이 전시실의 마지막에 기다리고 있음으로 해서 박경범 작가의 ‘풍경 및 인물 시리즈’ 꾸러미는 최적의 배치, 최적의 구성이었다는 소견을 보태본다.우리는 2006 금강미술대전에 출품되었던 작품들을 만나러 다음 전시실로 자리를 옮겼다.전시실 첫 번째에 위치하고 있었던 현민우 씨의 작품 는 다른 그림과는 달리 작은 구멍이 송송 뚫린 천 위에 그림을 그려 눈에 띄었다.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숲은 검정색으로만 표현되어 있어 숲 속 밤의 모습이란 생각이 먼저 들 법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슬픔이라는 감정이 앞서 나타났다. 채색되지 않은 숲의 하얀 바탕 부분이 내게는 숲 속 외로운 영혼들의 울부짖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강현주씨의 라는 작품에서는 현대 직장인의 모습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작품 속의 ‘그’는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 검은 정장바지를 입은 전형적인 회사원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셔츠의 팔 부분은 팔꿈치까지 걷어 올라가 있고, 그의 목을 옥죄고 있는 넥타이는 헐렁해져있다. 하늘을 쳐다보는 그의 눈빛과 한숨은 풍요로운 나날들을 기대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내적여유가 좀 더 행복한 것은 아닐까 하는 심리적 고민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한 그에게 평온한 휴식을 가져다주는 것은 다름 아닌 늙은 나무 한그루이다.삼성, 맥도날드, 국민은행의 로고를 그림 속에 넣음으로써 나에게 친근하게 접근하던 작품이 있었다. 바로 홍원석 씨의 이다. 그림 속에는 커다란 가방을 멘 청년 한명이 도로 위에 덩그마니 남겨져 있다. 제목에서 말하고 있는 ‘우연한 만남’이란 작가가 그의 작품세계에서 청년과 만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청년이 도심과 만나는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그것이 둘 다 잘못된 추측이라면 혹시 그림의 뒷부분에 그려진 수많은 경찰차가 그 해답을 줄지도 모른다. 청년은 지금 안내 화살표와는 반대방향인 길이 아닌 길로 가려고 하고 있으니까.
영화을 보고..청나라는 영국에서 들어오는 아편과 그에 대한 대가로 지불되고 있는 엄청난 양의 은괴로 인해 오랜 기간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금연령을 내린지 109년이 흘렀지만 백성은 물론 관료들까지 아편중독자는 늘어만 갔고, 독성이 강하고 끊기 힘든 아편은 영국의 불법상인들과 부패한 관리들에 의해 여전히 거래되고 있었다.이러한 상황을 우려하며 상소를 올린 호광총독 임칙서를 불러들인 황제는 그에게 아편을 근절시키라는 특명을 내린다. 이에 임칙서는 여러 가지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흠차대인이 되어 광주로 부임하게 된다.광주에 도착한 임칙서는 영국 상인들에게 가지고 있는 아편을 모두 내놓으라고 하며 그들이 묵고 있는 건물을 포위하여 한 명도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한다. 그러던 가운데 영국인 신부가 백기를 들고 임칙서를 찾아왔다. 신부는 임칙서에게 아편반대는 찬성하나 식수와 식량의 단절은 비인도적인 처사라며 비난한다. 그러나 임칙서는 아편으로 중국인들이 가산을 탕진하고, 수천 명이 죽었다며 양인들의 양심은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는 거냐며 강하게 반발한다. 신부는 포위망을 풀지 않으면 자신들이 단식투쟁을 시작할거라고 협박하고, 임칙서 또한 자신도 단식을 하겠다며 강력 대응한다.한편, 아편중개업 때문에 감금되어 있던 익화행의 주인 하경용은 임칙서에게 익화행의 18년 동안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장부를 내놓는다. 그 장부에는 뇌물을 바친 자들의 이름과 액수가 적혀있었다. 그 장부를 본 임칙서는 관리들을 모두 모아놓고, 6시간 동안 앉아 버티기를 시킨다. 이미 심한 아편중독자가 된 관리들은 점차 금단현상이 나타나면서 고통스러워한다. 임칙서는 관리 중에 아편중독자를 골라내고 자신과 뜻이 같은 청렴한 관료와는 아편금연의 대업을 이루고자 손을 잡는다.그러던 중 영국 상인들의 집에는 영국의 통상장관 엘리엇이 등장하게 된다. 그는 영국 상인들에게 아편 값을 영국정부에서 보상해주도록 해주겠다고 하며 수중에 있는 아편을 중국정부에 내놓으라고 한다. 이에 따라 영국 상인들은 자진해서 아편을 중국정부에 내놓게 되고, 황제는 아편이 근절되었다며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중국정부는 20일에 걸쳐 엄청난 양의 아편을 석회, 소금과 섞어 바닷물에 버린다. 황제는 영국 상인들에게 이러한 조치가 아편금지를 위한 것이지 무역의 금지는 아니라고 이야기한다.이러한 중국의 조치를 지켜본 엘리엇은 상인들에게 보상해주겠다는 약속을 지킨다며 중국인이 영국정부의 물건을 불태웠다는 서신을 보낸다. 영국과 청나라 사이의 이러한 상황을 보고받은 영국 여왕은 이러한 사례를 바탕으로 다른 나라들이 자유무역을 거부했을 때, 섬나라 영국에게 닥칠 위기를 걱정하며 자유무역 질서를 해치는 어떠한 것도 용납하지 못한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통해 발전하고 있었으며, 거대한 땅과 엄청난 인구의 중국은 당시에도 최대의 시장이었으므로 중국의 소유는 19세기의 소유를 의미했다. 결국 영국국회와 여왕은 중국과의 피할 수 없는 전쟁을 선포한다.1840년 6월, 영국군이 중국에 도착하였다. 임칙서는 영국과의 전쟁을 미리 예상하고 준비하였으나,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영국군은 북상하고 있었다. 당시 너무나도 유약했던 황제는 아편근절의 신념을 꺾고, 임칙서에게 모든 탓을 돌리며 그를 파직한다. 그 대타로 기선대인이 임명되었으며, 중국은 그를 통해 전쟁중지를 요구한다. 당시 중국인들은 3백만냥을 주며 돌려보내려 하였으나 영국인들은 6백만냥의 배상과, 중국 다섯 개 항구의 개항, 그리고 홍콩의 할양을 원했다. 땅을 중요시하게 여기던 중국인으로서 홍콩할양은 절대 응할 수 없는 조항이었으므로 그들은 다시금 영국과의 전쟁을 시작한다. 그러나 청나라 대포의 사정거리는 너무나도 짧았고 결국 광주성 전투는 실패로 끝난다. 영국은 중국에게 불평등 남경조약에 동의하게 함으로써 전쟁을 끝냈고, 1997년이 되어서야 중국은 영국으로부터 157년 만에 홍콩을 되찾는다.
1. 삼국시대고조선이 멸망한 후 그 지역은 중국왕조의 군현이 됨으로써, 삼국은 그 외곽에서 차례로 국가를 건설하였다. 고구려와 신라왕조는 그 기원을 하늘에서 찾아 천손임을 자처하는 독자적인 건국신화를 가졌고, 백제는 부여와 고구려에서 그 기원을 찾았다. 고구려가 고조선 지역을 차지한 것은 고조선 멸망 후 4백여년이 흐른 뒤였고, 그 무렵 삼국은 서로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 과정을 통해 삼국은 이미 각기 독자적인 기원신화를 지녔기 때문에 단군신화는 그 현실적 기능과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고조선에 대해 삼국 모두에게 어떤 뚜렷한 계승 의식을 찾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단군신화는 단지 고조선 지역 주민사이의 민간 신앙형태로 이어졌고, 고조선은 옛적에 있던 나라 정도로 막연하게 인식되었다.2. 고려시대고려전기까지 단군신화는 민간에서 전해지는 신앙 정도로만 인식되고, 고려인들의 역사의식 속에서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12세기 편찬된 삼국사기에 고조선에 대한 언급이 없는 이유도 당시 사람들이 우리 역사의 기원을 삼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러다가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바뀐 것은 고려 후기에 접어들면서이다. 장기간에 걸친 대몽항쟁 속에서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재인식을 하게되었고, 그것이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반영되었던 것이다. 단군이 고조선의 시조일 뿐 아니라 민족의 시조라는 인식은 고려말로 오면서 더욱 확산 되었다.하지만 아직도 단군 인식에 상당한 혼란이 있었다.* 구전되어 오다가 기록하였기 때문에 개인적 시각에 의해 선택적으로 기록되어 다른점들이 존재한다.아래 표는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 비교유사 운기표기 재단 단 박달나무 단계보 부계 모계즉위연대 요임금 즉위 50년 요임금 즉위 원년3. 조선시대조선 개국 직후, 단군은 조선왕조가 중국의 분봉지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독자적으로 시작된 국가라는 자주의식을 뒷받침할 수 있는 좋은 수단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적 가치관이 팽배했던 지배세력들은 단군신화가 너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절충안을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