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식의 역사서술과역사인식1. 머리말2. 朴殷植1) 生涯2) 연보3. 저술목차1) 朴殷植의 著述目錄2) 韓國通史 目次3) 韓國獨立運動之血史 目次4. 朴殷植의 歷史認識1) 陽明學 受用으로 인한 歷史認識變化2) 고대사에 대한 歷史認識3) 英雄주의적 歷史認識4) 國魂론적 歷史認識5. 맺음말1. 머리말白巖 朴殷植 선생은 근대 한국의 위대한 민족사상가, 언론인, 교육자, 漢學문장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역임한 독립운동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근대사를 최초로 개척하고 체계화한 역사학자였다. 백암은 이미 구한말에 해박한 역사지식에 기초하여 국민계몽운동을 위한 수많은 역사논문과 평론을 신문잡지에 발표하였다. 그는 1911년 국외에 망명한 후에도 쉼 없이 역사서와 논문들을 집필하였다. 백암이 저술한 역사책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저작이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라고 말할 수 있다. 백암의 이 두 저작은 실로 한국근대사를 최초로 체계화한 한국 학계의 古典이 된 작품이다. 이에 우리는 민족사상가인 박은식의 생애와 그가 저술한 역사서와 논문 등을 통해 박은식의 역사인식과 당시대의 역사인식까지 엿보려 한다.2. 朴殷植참고문헌 한영우(韓永愚)/한국민족주의역사학(韓國民族主義歷史學)이만열(李萬烈)/ 30. 20021) 박은식의 생애박은식(1859~1925)은 19세기 중엽 황해도 황해군 남면의 바닷가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字는 聖七, 號는 처음에 謙谷이라 하였다가 뒤에 白岩이라 하였다. 1910년 국치 후에는 朴箕貞이라는 별명을 쓰기도 하고 太白狂奴 혹은 無?生이라는 별호를 즐겨 썼다. 본관은 조선조 大姓의 하나인 密陽이나 그의 직계선대는 벼슬아치가 없었고 조부 박종록이 ‘力農治産’하여 부농으로 성장한 듯하다. 그러나 부친 박용치가 서당의 훈장을 지낸 것으로 보아 농업과 儒業을 겸업한 서북지방의 전형적 토착양반임을 알 수 있다. 부친이 과거출사를 하지 못한 것은 경색된 세도정국하에서의 서북인 차별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박은식은 부친의 서당에서 漢學(朱子기거한 것도 우연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 박은식이 단시일 내에 위에 소개한 여러 사론들을 집필할 수 있었던 것은 윤세복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박은식은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활동무대를 확대시키고 그 연대성을 높이기 위해 복경 상해 남경 등지를 순력하면서 많은 망명지사들과 협력하여 同濟社? 博達學院 등 단체를 조직하고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언론? 교육사업에 종사하는 한편으로 우리나라 망국의 역사를 정리하여 『한국통사』를 간행하였다. 이 책에서 그가 교훈을 찾고자 한 것은, 개화?계몽운동의 기본방향을 긍정하면서도 일본에 이용당한 비주체성과 민중적 기반의 취약성, 그리고 근대운동의 조급성 등 방법론의 미숙을 반성하기 위함이다. 통사의 출간과 유포는 총독부 당로자에 큰 충격을 주어 일제는 1916년에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를 조직하고, 어용학자들을 대거 동원하고, 100만 엔의 거액을 투자하여 巨秩의 『朝鮮史』를 편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만큼 이 책은 1910년대 항일운동의 큰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1918년에 그는 60세의 노구를 이끌고 소련의 雙城子와 블라디보스톡에 들어가 언론 교육활동에 종사하고, 1919년 4월에는 漢城임시정부의 評定官으로 임명되었으며, 8월에는 상해임시정부를 후원하면서 독립운동 관계 자료를 수집하여 1920년에 『韓國獨立運動之血史』상해에서 간행하였다. 이 책은 앞서 편찬한 『한국통사』의 자매편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일제의 탄압 및 동화정책에 맞서서 투쟁하는 국내국외의 민족운동의 실상을 보고하고 일제의 패망과 독립성취의 필연성을 예고하였다.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국혼 유지를 위한 역사를 강조했다.박은식은 일제의 패망을 낙관적으로 전망한 이유는, 우리 민족의 저력에 대한 신뢰와 더불어 러시아혁명과 3?1운동 등을 통해서 민중의 힘이 전 세계적으로 솟아나고 있는 데 대한 믿음이 깔려 있는 까닭이었다. 그는 한말이 이미 강유위의 대동사상의 영향을 받아 유교적 이상사회를 선망한 일이 있는데, 1917년 러시아혁명에 자극을 받아 진보적 성향독립신문사상해大東民族史1914~상해李雋傳(이준전)1918.9연해주金史(한글역술)1918.9연해주渤海史(한글역술)1918.9연해주醒世小說英雄淚(성세소설영웅루)鷄林冷血生(계림냉혈생)1910년대?서간도?韓國獨立運動之血史박은식1920유신사상해① 「겸곡문고」 : 구한말 당시 선생의 각종 글들을 선생 자신이 정리해 둔 것으로 보이는 친필유고집이다. 그 내용은 각종 서간문과 정부에 제출한 의견이라 할 각조의 書와 議를 비롯하여 각종의 說, 誡, 箴, 錄, 卦, 序, 記, 祭文, 傳 등을 차례로 모은 것으로, 일정하게 문집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② 「학규신론」 : 광무 8년, 작은 저술집으로 교육에 관한 13개의 논설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본문은 전 종목에 걸쳐 일관하여 종래 성리학적 교육전통을 비판하고 양명학적 교육사상에 입각하여 근대서양교육사상에 접근하는 논리로써 펼쳐져있다.③ 「왕양명선생실기」 : 왕양명의 생애와 사상을 한말의 현실적 과제와 직결시키면서 체계적으로 서술했다.④ 「고등한문독본」 : 박은식의 의도에 따라 역대의 중요 문자 중 가려 뽑았다.⑤ 「몽배금태조」 : 박은식이 망명하던 해 10월 3일 날 단군 개천절 기념식을 마친 저녁 꿈에 백두산 정상에 올라 金太祖를 알현하고 한국멸망과 부흥에 관한 소견을 서로 문답하는 형식으로 서술했다.⑥ 「천개소문전」 : 고구려의 연개소문이라고 하는 천개소문을 한국사에서 웅대한 국혼을 발휘한 민족영웅으로 부각시켜 투쟁적 민족정신교육의 교본으로 제시하고 있다.⑦ 「대동고대사론」: 우리 韓民族을 포함하는 고대 동방민족의 원류를 ‘大東民族’이란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고 그를 역사적으로 실증하려 한 것이다.⑧ 「명림답부전」 : 명림답부를 尙武의 자주독립국인 고구려의 수많은 인물 중에서도 ‘만고조요(萬古照曜)’한 대표적인 인물을 평가하여 조국독립을 위하여 혈투하는 망국민의 애국심 함양을 위한 역사교육의 본보기로 史籍의 殘缺을 무릅쓰고 편찬한 위인전기라 할 수 있다.2) 한국통사(韓國痛史) 목차序緖言揷畵第一編第一章 地理之大綱第二章 歷史之大槪여러 개혁정치에 대해서는 긍정적 평가를 하였으나, 서세동점의 시기에 국가를 개방하지 않은 것은 한국이 중흥할 기회를 잃게 만든 것이며, 여기서부터 한국의 통사(痛史)가 시작되었다고 평가하였다. 이어서 민씨정권의 문호개방, 임오군란, 제물포조약, 청·일 양국군의 국내 주둔, 구미 열강과의 조약체결, 갑신정변, 동학혁명, 청-일전쟁, 갑오개혁, 민비살해, 의병운동, 아관파천, 열강의 이권쟁탈, 대한제국 성립, 독립협회의 활동, 일본의 경제침략, 러-일전쟁 발발, 일제의 통신기관 강점, 일본 선박의 내해 항해 자유권 획득, 황무지 개간 요구와 이에 대한 반대운동, 압록강변의 삼림채벌권, 광산채굴권 장악, 경찰권 박탈, 고문정치, 러-일전쟁과 강화조약, 애국자와 매국노 서술, 을사조약 강제 체결 경위, 일본의 이권침탈 및 문화재 약탈상, 일본천황에 보낸 항의문, 황성신문의 폐간과 장지연의 활동, 을사조약 반대 운동, 애국지사의 순국, 최익현의 격문, 일제가 한국 병탄시 이용한 한국인, 1910년 국권상실, 105인 사건, 동양척식회사의 농토 약탈, 헤이그밀사 파견, 고종의 퇴위, 정미7조약, 군대해산과 박승환의 순국, 군대해산 후의 의병운동, 일제의 한국인 탄압상, 애국지사의 의거 활동, 기타 국권 상실 이후의 여러 가지 사실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3)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목차韓國獨立運動史 序序韓國獨立運動之血史 上編緖言第一章 民族之略曆第二章 甲申獨立黨之革命失敗第三章 甲年東學黨之大風雲第四章 日人殺俄國母儒林學義第五章 獨立協會之運動第六章 日人之侵奪利權及勒約六條第七章 國民大哭於保護條約第八章 萬國平和會議之密使第九章 伊藤逼帝禪位勒約七條協約第十章 伊藤盡汰軍隊參領朴勝煥自殺第十一章 各地義兵之略史第十二章 伊藤廢陸軍司法兩部第十三章 震動世界之義俠聲第十四章 國倂後之殉節諸人及志士團第十五章 百二十人志謀殺寺內案第十六章 總督之貪暴行政第十七章 司法制度之非法第十八章 憲警機關之擴大第十九章 憲警之蠻暴不法第二十章 各官署之排斥韓人第二十一章 東洋拓植會社第二十二章 抑壓韓人之企業第二十三章 監視쟁의 지도자로서 국권 회복을 위하여 노력한 애국자였다. 그의 역사인식은 그의 행적에서 볼 수 있듯이 개혁이념에 투철하고 제국주의의 침략에 적대적이었다. 이러한 박은식이 근대 역사학에 있어서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저술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1910년 국치 이전의 박은식의 역사인식은 기본적으로 유교적인 애국사상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당시의 교과서류에 반영되었던 일반적인 역사인식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191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치에 대한 發憤이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중시켰다는 이유와 좀 더 직접적인 것으로 대종교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 만주 및 중국본토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새로운 역사경험으로 인해 그 방향은 급속도로 바뀌게 되었다.1) 양명학 수용으로 인한 역사인식변화백암은 당대 名儒였던 운암(雲菴) 박문일(朴文一)과 성암(誠菴) 박문오(朴文五) 형제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들 형제들은 위정척사론의 대가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인들이었다. 선생은 이들로부터 강론을 받으며 주자학에 심취하였고, 또한 위정척사 사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虛文을 徒尙하고 武事를 賤視하여 虛弱之極을 馴致한 結果 ”)라 하며 유교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범위에서 유교를 개양구신(改良求新)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첫째, 주자학은 支離汚漫)란 반면에 양명학은 簡易直截)한 법문인데 복잡하고 智力과 光陰이 有限한 오늘에는 簡易直截한 양명학이 더 적합하며 둘째, 오로지 유학만을 추구해 활발한 뜻을 펴지 못하고 士氣와 人文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것을 변화시켜 새롭게 하며 셋째, 일반민중이 定向)을 찾은 양명학으로 衆志를 모으고 넷째, 도덕을 밝히고 人極을 유지하며 生民의 행복을 위하고자 良知의 學인 양명학에 의거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특히 백암은 양명의 致良知說), 知行合一說)에 근거하여 儒敎求新(유교구신))을 기약하고 智力의 虛費(허비)를 막고 士氣를 振作하고 도덕을 함양함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백암은 유교구신론에하였다.
2007-04-05- 위진 남북조 사학개관 -1. 위진 남북조의 사학1) 사학이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위진남북조 시대는 한말 황건적의 난부터 수가 중국통일을 할 때까지 거의 400년에 가까운 시기로서, 서진(西晉)만이 잠시 동안 통일된 시기였고, 대부분은 분열된 혼란의 시대였다. 일반적으로 정치적으로 분열되고, 경제적으로 파괴되고, 문화적으로도 허무적인 암흑의 시대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시대는 분열과 혼란 속에서도 사학이 크게 발전하였다. 우선 간접적인 원인으로는 정치적으로 북방 5호의 침입과 여러 왕조의 분열 및 흥망성쇠가 사가들의 주목과 관심을 끌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경제적으로 화폐가 폐기 될 정도로 자연경제가 강화되었으나 사회 발전을 정체시키고 후퇴시키지는 않았다. 특히 남방의 경제는 신속하게 개발되고 발전을 거듭하여 중국 경제의 중심이 남방으로 전이되는 기초를 잡았다. 북방은 전쟁기간에 크게 파괴되었으나 후기에 들어와 안정되면서 중원의 한민족 경제와 북방 소수 민족 경제가 혼합되어 사회발전의 새로운 경제구조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경제 발전은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는 전제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또한 종이 제조 기술의 발전과 보급이 보편화 되면서 대량의 저서와 책의 유통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미 서진시대에 )‘낙양지귀(洛陽紙貴)’라는 은어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종이가 죽백(竹帛)을 대신하게 되었으며 누런색으로 하였던 것도 벌레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 민족 사이의 투쟁과 융합이 이루어지고, 중국과 외국 문화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종교와 문학사상은 물론 예술 분야에까지 크게 발전하여 중국문화사상 중요한 시기를 맞게 되었다. 이처럼 위진남북조 시대의 특성은 사학이 발전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제공하였다.직접적인 원인으로는 통치자들이 사학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사학이 더욱 발전 될 수 있었다. 즉 통치자들은 사서를 중시하여 병서와 함께 읽도록 권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서의 편찬을 장려하여 그 일을 맡을 사관을 위(魏)에서 설치하였다데 모두 과두문으로 되어있었다. 무제 때 20년에 걸쳐 이를 순서대로 정리하여 다시 금문(今文)으로 정리하였다. 그런데 그 양은 고서 16종 75편에 달하였다. 다섯째, 위진남북조시대에 이르러 사학은 경학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었으며, 그 위치는 경학 다음가는 자리를 잡았다. 즉 동진 시대에 도서를 정리하면서 오경을 갑부(甲部), 사기를 (乙部), 제자서를 병부(丙部), 시부(詩部)를 정부(丁部)로 하여 종래 세 번째 순서(경학과 제자서 다음에)에 넣었던 것을 두 번째로 넣었다. 전한 유흠의 『칠략(七略)』에서는 도서를 6부로 분류하였으나 사학은 독립되지 않아 경학의 부용으로 취급되었고, 서진시대 비서감 순욱(荀勖)이 정부의 도서를 관리할 때 『중경신부(中經新簿)』를 펴냈는데 갑을병정의 4부 분류법을 채택하였고, 병부에 사가, 구사(舊事), 황?부(皇?簿), 잡사(雜事) 등을 포함시켜 처음으로 분리되었다.2.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후한 말 이래 정통을 계승한 것이 조위정권인가 아니면 한의 유민으로 자칭하는 촉한인가에 관한 쟁론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삼국의 통치자들은 자기들의 업적을 드러내 놓기 위하여 각자 자기 나라의 역사를 편찬해야 하였다. 위를 계승한 서진이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삼국의 정통론은 직접 사마씨의 진과 관련 있게 되었다. 따라서 서진 초에 삼국의 사서를 통합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였다. 때문에 서진의 정치적 입지를 위하여 진수(陳壽)가 위를 정통으로 보는 간단하면서 요점을 정리한 『삼국지』를 펴내게 되었다.그러나 정치적 대립은 사라졌지만 시기적으로 가까워 편견이 남아 있어 서술이 어려웠으며 황건적의 난 이후 사회가 혼란스럽고 전쟁이 빈번한데다 나라마저 분열되었기 때문에 사료의 수집이 쉽지 않았다. 다행히 위와 오의 역사가 쓰여 진 것이 몇 종 있어서 이를 이용할 수 있었다. 진수가 『삼국지』를 편찬하는 데 기본적으로 이용한 자료는 왕심의 『위서』와 위소의 『오서』, 어권의 『위략』이었다. 특히 위는 삼국 가운데 강역이 가장 넓고 인복되는 것을 피하였다. 예를 들면 적벽전의 경우 이것이 조조와 유비, 손권에게 있어 대단히 중요한 전쟁이었지만 「주유전」에 집중적으로 서술하고 조조나 유비의 기사에는 간략히 전쟁이 있었다는 것만을 서술하였다. 넷째, 문장이 간결하고 사건이나 인물의 서술이 생동감이 있었다. 특히 전기문학 방면에서 역사가가 문학적 재능이 없으면 훌륭한 역사서를 쓸 수 없다는 면을 보여 주었다.* 배송지(裵松之)의 삼국지주(三國志注)유송(劉宋) 문제(文帝)인 유의륭(劉義隆)이 삼국시대의 異同을 모아 진수(陳壽)의 《三國志》를 주석하라고 명하여 배송지가 완성한 해설서이다. 배송지는 전기(傳紀)를 수집해 이문(異聞)을 널리 모아 완성하고는 헌상했다. 이에 황제는 이를 예람(叡覽)하고는 “이야말로 불후(不朽)라고 할 만하다”고 배송지를 상찬했다. 이 당시 배송지가 올린 표문에는 이런 말이 있다. “陳壽의 책은 볼 만한 일을 嚴選했으나 간략함이 지나친 단점이 있고 누락된 곳이 여러 곳이 됩니다. 臣은 성지(聖旨)를 봉하여 상세함을 갖추어 철저함을 기해 기록해야 하지만 진수가 기재하지 않은 사실은 남김 없이 채록했습니다. 같은 사건에 대해 기록이 모순되면 사건의 출처가 달라 판단할 수 없는 경우에도 모두 요약해서 함께 이문을 고(固)하게 했습니다.”주라는 말 자체가 글이나 말의 어떤 부분에 대하여 그 뜻을 자세히 풀어 주거나 보충 설명을 더하여 주는 글이나 말이라는 뜻이다.3.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1) 범엽의 사상범엽이 살았던 위진남북조 시대는 진(秦)·한(漢)과 수(隋)·당(唐)의 두 통일기를 잇는 정치적 분열시기이고, 문화적으로는 다양하면서도 통일성이 있는 특유한 성격을 지닌 시대이다. 송 문제는 불교를 숭배했으며 그의 신하들도 모두 불교를 숭배했다. 따라서 불교는 당시 크게 성행하고 있어서 "황제에서부터 서민까지 귀의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불경의 가르침이 충실해지고 그 해설이 심화되어서 하나의 학문 분야를 이루고 있다. 시대상황이 이러했지만 범엽은 오히려 불교미신에 반대서이다. 기원 5세기경에 쓰인, 중국의 산천하류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한 이 책은 지금까지도 아주 높은 과학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 3세기 초 중국학자 상흠(桑欽)은 자신의 지리학 저서 『수경』의 집필했다. 책에서 저자는 137갈래에 달하는 중국의 주요 하류의 물길 상황에 대해 서술했는데 내용이 간단하고 체계성이 결여되며 물길의 형성원인 및 경유지의 문화, 지리 상황에 대한 기재가 아주 적었다. 그 후 5세기 때 역도원의 등장으로 『수경』은 더욱 더 발전돼서 『수경주』라는 책으로 탄생하게 된다.1) 『수경주』의 등장배경역도원은 기원 5세기, 중국북위 시대 사람으로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일찍 그의 조부, 부친은 모두 관리를 지낸 적이 있으며 역도원 역시 성인이 된 후 국가의 공문서를 관리하는 등 중앙과 지방의 관리직을 맡기도 했었다.역도원은 어린 시절부터 지리학에 남다른 흥미를 가졌다. 그는 관광을 즐겼고 특히 각지의 수문지리와 자연 경치에 대한 연구를 아주 좋아 했었다. 역도원은 각지에서 관리를 지내는 기회를 충분히 이용하여 실지 고찰을 진행했는데 그가 다닌 곳은 지금의 화북지역과 동북지역의 많은 곳들이다. 가는 곳마다 그는 현지의 수류지세에 대해 고찰하면서 고금의 물길 변화 및 하류의 발원지, 경유지 등에 대해 많은 정확한 자료를 얻었다. 뿐만 아니라 과외 시간을 이용해 대량의 고대 지리학 저서인 『산해경(山海經)』, 『수경(水經)』을 탐독하는 것으로 풍부한 지리 지식을 습득하기도 하였다.그는 자신이 직접 접한 지리현상과 고대 지리저서에 쓰인 부분과의 대조, 비교를 통해 지리 현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주 큰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만일 제때에 이런 지리 현상의 변화를 기록하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이 그동안의 지리 변화를 알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역도원은 『수경(水經)』을 원본으로 해석을 더하는 형식으로 완전한 지리저서를 집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책이 바로 종합성 지리 저서인 『수경주』입니다.2)『수경주』는?32만자에 , 위치, 부근의 건물과 풍경, 절에 대한 설명, 그 절과 관련된 인물이나 역사적 사실, 전해지는 이야기 등을 순서대로 기술하고 있다. 특히 권5에는 가 기록되어 있어 서역 가는 길의 여로와 서역의 풍습, 부처가 남긴 유적과 그에 얽힌 사연들을 알 수 있다. 덧붙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옮긴이의 해제와 함께 '북위 세계도', '낙양가람기 기사 연표', '6세기 남북조(북위·양) 지도', '낙양가람도' 등을 수록하였다.6. 농업과 음식의 생활사 연구 자료- 『제민요술(齊民妖術)』농업 생산 기술이 관한 저서는 이미 진한 이전에 있었기 때문에 『한서』「예문지」의 제자류에 농가 항목을 넣어 전국시대부터 전한시대까지 9종의 저작 114편을 수록하고 있다. 따라서 후한시대에는 더 많은 것이 있을 것으로 보이나 전해오는 것이 없다. 현재 볼 수 있는 것으로 가장 오래되고 완전하다고 보이는 것이 『제민요술』이다.『제민요술』은 가사협(賈思? ,6세기)이 지은 것으로 그는 북위 말, 산동 익도 사람으로 고양태수(산동임치)를 역임하였다는 것 이외에 자세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이 책에는 산둥 성을 비롯한 화북지방에서 행해진 밭농사 기술을 중심으로 농산가공, 저장, 조리기술까지 매우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내용을 보면 6세기 이전의 농업기술에 관한 문헌을 망라하였고, 절반 이상의 문장에 인용문헌이 덧붙여져 있어 매우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토양과 경작기술로 북방 가뭄 지역을 경작하기위하여 20여종의 농기구를 소개하였다. 그리고 작물의 재배와 관리 기술에 대하여도 씨앗의 선택과 파종, 수확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특히 파종에서 씨앗의 질을 중시하여 이는 생산량의 증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설명하였으며 성장에 따라 적당한 농기구를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수확의 중요성을 반복하여 강조하였다. 또 약초자원의 채취와 재배, 가공법의 원형태를 찾아볼 수 있어 고대 본초 연구측면에서도 반드시 참고해야할 문헌이다. 본문은 모두 92편으로 전문이 대자(음.
어두운 사회의 촛불 같은 사람, 전태일60~70년대는 우리 사회의 민주 암흑기였다. 군사 독재 앞에서 민중들은 숨통을 조이며 소리도 없이 지내왔으며 정권에 맞서 당당히 제 소리를 해야 할 언론조차 권력 앞에서 무너져버렸다.세계가 놀랄 만큼 우리의 경제 성장 속도는 눈부시게 발전해나갔고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왔다. 하지만 그 뒤에는 피 땀을 흘린 많은 노동자분들이 있었다. 사회가 급속하게 산업화함에 따라 노동자의 수도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그러나 산업화의 과정에서 저임금이 지속되었고 이를 토대로 경제 성장에만 치중해 왔다. 그 노동자들의 최소한의 인권보장과 생계보장을 위해서 힘쓴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분들 가운데 우리가 흔히 아름다운 청년이라 말하는 전태일이 있었다.스물두 살, 젊은 나이를 스스로 태워버린 전태일 열사의 기일이 35주년을 맞았다. 그가 타오르고 난 지금도 우리 노동자들은 아직도 기본 생계를 위해 투쟁을 버리고 있다. 역사를 배우는 학생으로서 그가 살았던 배경을 생각하며 읽었지만, 읽을수록 전태일이라는 인간에게 빠지기 시작했다.전태일은 1948년 8월 26일 대구의 가난한 집 장남으로 태어나 1954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1960년 남대문초등학교 4학년으로 편입하였으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그 마저 다니던 학교를 중퇴하고 이 때부터 동생과 함께 동대문시장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었다. 1965년 아버지에게 배운 재봉기술을 토대로 평화시장의 피복점 보조로 취업해 하루 14시간씩 힘겨운 노동을 하고 일당으로 당시 차 한 잔 값인 50원을 받았다.그가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65년 이듬해 직장을 옮겨 재단사로 일을 시작하면서 어린 소녀들이 일당 70원을 받으며 점심도 굶은 채 고된 노역에 시달리는 것에 가슴 아파하면서이다. 특히 이 무렵 같이 일하던 여공이 계속된 힘든 일로 인해 폐렴 3기 진단을 받고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강제 해고되었고 사업주의 노동착취와 비인간적인 행위가 계속 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뒤, 자신도 여공들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부당한 일을 당했다. 그러한 상황들이 젊은 전태일을 분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68년 우연히 아버지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인 노동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혼자의 힘으로 공부를 하여 근로기준법 내용을 이해한 뒤, 이 때부터 평화시장 재단사들을 중심으로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모임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6월 드디어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창립한다. 자신의 최저 근로 보장도 알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는 바보라는 의미에서........... 회원들과 평화시장 여공들에게 근로기준법의 내용을 알려주면서 근로조건의 부당성을 외치는 한편, 설문을 통해 평화시장 내 노동실태를 조사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실패로 끝나고 평화시장에서도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게 된 전태일은 한동안 공사판을 전전하며 막노동을 한다.70년 9월 평화시장의 노동환경 개선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하고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그는 재단사로 일하면서 이전의 바보회를 발전시켜 ‘삼동회(삼동친목회)’를 조직한다. 그 뒤 노동실태 설문지를 돌려 노동청에 진정서를 내거나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하는 등 그들은 노동운동을 끊임없이 실천 해나갔다. 그칠 줄 모르는 그들의 운동에 이 즈음 정부의 태도도 바뀌어 회유를 통해 일을 무마하려는 쪽으로 돌아섰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이후에도 몇 번에 걸쳐 노동문제 해결을 위한 약속을 하였으나, 번번이 지켜지지 않는다.이에 따라 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은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기로 결정하고 플랜카드를 준비해 노동환경 개선과 인권보장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당시 평화시장 주변에는 시위 소식을 들은 많은 노동자들이 모여들었고, 경찰들은 평화시장을 에워싸고 있었으며, 사업주들은 노동자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삼동회 회원들은 주위를 향해 소리 높여 그들의 요구를 외쳤으나 플랜카드는 경찰에게 빼앗기고, 시위 역시 경찰의 방해로 인해 결국 무위로 끝나갈 즈음 전태일은 온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분신자살하였다.법이 있어도 그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군사권력 앞에서 단지 종잇조각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빠른 경제성장을 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여성들과 어린 학생들이 좁고 빛도 들어오지 않는 작은 지하 단칸방에 갇혀 일을 하였다. 하루 반나절이 넘는 시간을 일을 하고도 그에 해당하는 충분한 보수는 받지 못하고 애꿎은 병만 얻어 당장 해고되고 그에 대해 억울함을 표하는 직원들에게 문전박대를 가하며 법을 들이 대었다.
한국사회의 윤리적 병폐, 한국병1.들어가는 말우리나라는 눈부신 속도로 경제 성장을 하였고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내었다. 산업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짐에 따라 우리 문화도 그에 맞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대가족의 형태가 핵가족의 형태로 되면서 가족관의 유대감이 사라지고 이혼이 늘어나고, 학교 내의 왕따가 급증하여 언론의 먹잇감이 되는 등 우리 사회는 점점 메말라가고 냉정해져 가고 있다.2. 한국사회의 병폐들을 말하다.한국사회를 더럽히고 있는 윤리적 병폐 중에 먼저 학연, 지연을 너무 중요시 하는 점을 꼬집고 싶다. 분명, 학연과 지연의 순기능 부분이 있다. 수업 중에 교수님이 말씀하셨듯이 학연과 지연을 잘 발달해서 그 사회의 기부 문화를 창출하고 그 문화가 지속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순기능 속에서 우리사회에서는 역기능이 더욱 일어나고 있다.학연, 지연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역기능 중에서 선거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아마도 이틀 전에 우리 학교에서 대표를 뽑는 선거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나라를 대표하고 이끌어가야 할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 그 사람의 능력적인 면이나 가망성을 따지기 보다는 어디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가 선거의 기준점이 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이 주인임을 알 수 있는 선거에서, 가장 정직해야 할 유권자의 태도에 한국병이 작용하는 것이다.학연, 지연의 병폐는 선거에서 그치지 않는다. 실력위주 사회가 아닌 학벌과 지연으로 인력을 고용하는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에서 훌륭한 인재를 뽑는다고 하지만 그 사람들의 실질적인 능력이 아닌 이름만 높은 대학을 나왔는지를 따진다. 명문대를 졸업하지 않은 사람들은 원서접수에서 제일 먼저 제거되어 버린다. 아무리 그 사람의 능력이 좋아도 다른 사람의 배경에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는 사람이 버티고 서 있다면 능력과 실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배경이 좋은 사람이 입사하게 된다. 실력위주가 아니라 그 사람의 태어난 배경, 학벌에 따라 우리는 일자리를 할당하는 사회인 것이다. 고대~근대의 우리나라의 계급사회를 답사하고 있는 꼴인 것이다.그런 길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구조의 변화라고 생각했다. 요즘 기업들의 독특한 면접 방법이 화제가 되고 있다. 면접을 통해서 그 사람의 다양한 면을 파악하고 가망성과 능력을 중시하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의 학연, 지연을 베일로 감사고 공정하고 확실한 절차로 고용한다면 이와 같은 문제점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다른 방법은 학벌표시제를 폐지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름보다도 사회에 나가면 따라 붙는 이름표가 어느 대학 출신인지를 묻는다. 학연지연에 앞서 학벌사회인 우리나라의 문제점이 드러나는 대목인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기틀에는 어떤 정보가 자신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 모르는 원초적 입장에 서있어야 된다. 원초적 입장에 서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무지의 베일을 설치하는 일과 같은 것이다. 고향과 학교를 무지의 베일로 감싸 판단을 하거나 결정하는 사람을 냉정하고 공평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이해서는 사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국민을 가장 현혹시키는 언론매체를 통해 국민들을 혼란시키지 말고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두 번째로 내가 본 한국의 문제점은 직업의식, 사명의식의 부재다. 싸이의 앨범을 들어보면 사회를 비판하는 내용이 많다. 그 중에 공감했던 것이 현재 우리나라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 사는 국회위원들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9시 뉴스의 하이라이트인 국회위원들의 패싸움, 좋은 양복을 차려 입은 사람들이 텔레비전 안에서 ‘네가 잘했냐!, 내가 잘했지!’ 잘난 척을 하거나 ‘제가 아닙니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제 잘못이 아닙니다. 로 일관하며 자신의 죄를 회피 하고 있다. 국회위원들이 해야 하는 일은 각 사회의 문제점과 국민생활의 안정과 국가 발전을 우해 하루하루를 힘써야 하거늘 그들은 자신들의 뒷돈 챙기기 바쁘며, 어떻게 해야 좀 더 많은 돈을 감출 생각 밖에 없는 것 같다. 뉴스를 가득 장식하는 국회위원들의 로비사건들, 병역 기피 문제......... 9시 뉴스를 시청하는 국민들의 눈살이 찌푸려지고 안방에서는 한숨과 욕들이 뱉어지는 것이다.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들은 정말 그들만의 자부심도 강하지만 그 자부심만큼 행동하지 못하고 있다. 다 죽어가는 하나의 생명이 드디어 빛을 발견했지만 돈이 없다는 이유로 돈 많은 이들에게 먼저 그들의 빛을 주어 버린다. 환자를 살려야 하는 그들의 사명감이 아니라 돈의 노예가 되어 그들에게 주어져야 할 빛을 신이 아닌 같은 인간이 가로 채어 나누어 주고 있는 비참한 현실 인 것이다. 산부인과에서는 그들의 이익을 위해 생명의 탄생이라는 경이로움을 저 버리고 불법 낙태시술을 하거나 자연분만을 해도 되는 상황이지만 의사의 말 한 마디로 중절 수술로 이어져 더 큰 이익을 챙기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을 다루는 직업에서 조차 이루어지는 윤리적 병폐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들은 누가 말을 안 해도 알아서 열심히 하고 처리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모두가 그런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자신들의 직업에 애착감이나 사명감이 없다고 생각했다. 현재 우리가 대학을 나와서 자신이 전공한 과목과 관련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경제의 불안정으로 인해 고용의 위기를 두려워하는 청년들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고 있다. 국가에서 이러한 청년들의 취업 문제를 중요시해서 자신이 원하는 직업에 종사하여 최선을 다한다면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열심히 일을 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학마다 취업률 보도에 거품을 빼고 실질적인 취업 시스템을 고려 방안 하는 것이 우선시 된다고 생각한다.그리고 평가 시스템 설치를 확산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평가 시스템이 확산되어 있지 못 한거 같다. 그리고 제대로 작동 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같은 월급을 받고 일을 하는 데 누구는 열심히 일을 하고 누구는 시간만 때우는 식이면 당연히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억울하고 자신도 일이 하기 싫어 질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다들 열심히 한다면 그리고 그에 따라 자신의 승진이 좌우된다면 서로 라이벌 관계가 되어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 할 것이다. 그러면서 직업윤리의식 강화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것이다. 과다한 경쟁의식은 사회를 메말라가게 하는 주요 원인이 된다. 그런 부수적인 문제점을 예방하기 위해서 동료들 간의 모임 형성을 권장하거나 복지를 증진시키는 방안이나 정기적인 윤리 강의를 통해 그들에게 부재된 직업의식을 불어넣어주는 것이다.마지막으로 모든 한국인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이라 볼 수 있는 안전 불감증이다. 우리 주변에 화재사고나 교통사고 등 사고는 끊임없이 일어나며 수많은 소중한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 ‘설마 나한테 일어나겠어!’, ‘설마 여기까지 피해가 오겠어!’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딱 그 짝인 것이다. 2년 전 온 국민을 눈물바다로 만들게 했던 사건이 있었다. 대구 지하철 참사 사건............. 하지만 지금 그 일을 기억하고 안전사고에 대비하고 있는 사람들은 몇이나 되며 지하철 직원들은 안전사고에 대비하여 얼마나 철저히 준비하며 예방 하고 있을까? 또 여기서 드러나는 한국인의 냄비 근성이다. 그때 시민들이 사고 대처법에 대해 조금이라도 숙지하고 있었더라면 지하철 내의 안전에 신경을 곤두 세웠다면 조금이라도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사고현장의 모습을 본 국민들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가슴 아픈 사연들로 눈물을 지새우며 유가족들을 위한 모금운동을 시작하며 안전사고에 대해 숙지하는 캠페인을 벌이는 등 그 사건에 대해서 언론이 힘을 모아 국민들을 선동했다. 하지만 2년 후인 지금 우리 여전히 그 운동이 지속되며 안전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다’라는 선인의 말에 수긍할 뿐이다.
고르바초프의 정치개혁과 소연방의 해체20050168 사학과윤 정 미1. 서론소연방의 붕괴는 과거 역사에 걸쳐 있어 왔던 한 국가(또는 왕조)의 생성 및 소멸 과정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소연방은 외세의 침략에 의해 멸망된 것도 아니고, 내적인 봉기나 반란 또는 혁명에 의해 붕괴된 것도 아니다. 국제사회에서 특히 핵으로 무장된 (군사적 의미에서) 초강대국이 생존을 보장하고 보다 더 발전하려는 몸부림이 붕괴를 초래하였다. 소련의 붕괴는 그 충격성과 흥분으로 인해 사건직후의 기간에는 일반적으로 표피적 현상에 대한 시각에서 평가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실천은 그 이상과 배치되는 덧이 일반적이다. 소련의 와해를 공산주의의 실패로 받아들여 자유민주주의 승리와 이데올로기 대결의 종언이 호언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비민주적으로 전개된 볼세비키적 실천의 좌절을 곧바로 사회주의의 실패로 보 는 견해에 부정적인 측도 있다. 즉 소련은 사회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반사회주의적인 형태, 전체주의의 지배를 받았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과연 소연방의 정체성이 존재했었다고 할 수 있는지, 또는 어떠한 정체성을 갖고 있었기에 스스로 붕괴되었는지 커다란 의문이 아닐 수 없다.2. 고르바초프의 정치 개혁고르바초프가 1985년에 물려받은 유산은 결코 탐낼 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당시 상황은 그의 표현을 빌자면 위기의 전 단계였던 것이다. 경제는 활력을 상실해 갔고 사회는 무기력에 빠져 있었으며 한 때 완벽을 자랑하던 중앙의 통제는 말뿐으로 점차 정책의 집행조차 어렵게 되었으며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도 이념적 쇠퇴와 함께 사실상 그 힘을 잃고 있었다. 특히 경제난이 심화되었다. 소련 경제는 1950년대에 연평균 6%의 성장을 기록했으나 그 뒤로 점차 둔화되어 1980∼1985년 까지는 거의 성장을 멈추게 되었다. 국민 총생산(GNP)에 있어서 소련은 미국을 따라잡은 것은 고사하고 일본에도 뒤지게 되었다. 소련 시민의 1인당 생활수준은 1976년 세계 56위에서 1982년에 계속해 오고 있다.고르바초프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체제의 민주적인 개혁의 내용은 여러 가지 측면으로 나눠서 살펴볼 수 있으니 가장 총체적인 수준에서는 소비에트 정치체제의 개혁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고르바초프는 소비에는 사회주의 체제의 건강성의 회복을 이룩하는 일이 가장 궁극적인 과제라 말하며 소비에는 사회주의 체제가 안고 있는 가장 커다란 병폐는 스탈린적 유산을 뽑고 이 유산을 효과적으로 제거하는 일 그 자체가 바로 체제개혁의 가장 커다란 과제라고 보고 있으며 또 이렇게 현존체제에서 스탈린적인 유산을 제거시킨 그 상태를 확립하는 것이 바로 현재 그들이 추진시키는 체제개혁의 목표이기도 하다고 본다.스탈린적 유산의 내용이라는 것은 크게 보아 명령 중심적, 행정 중심적 내지는 관료 중심적인 체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며, 이 같은 현상을 내용으로 하는 경직된 체제가 바로 스탈린적인 체제의 전형적인 내용이라는 것이면 따라서 이 같은 스탈린적인 모습을 그를 체제의 내용에서 제거하고 그들 체제를 민주적 관리구조로 전환 시키는 것이 바로 체제개혁의 내용일 수 있다고 본다.이렇게 볼 때 고르바초프는 그를 체제가 아직도 내포하고 있는 명령 중심적, 행정 중심적, 관료 중심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갖가지 일이 바로 페레스토로이카의 구체적인 개혁의 내용일 수 있으며, 이러한 체제개혁을 위한 포괄적인 노력을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견제와 균형의 사회주의 체제를 구현하려 하고 있으며 이러한 노력은 1988년 12월 1일의 헌법개정에서 구체화되었다. 이렇듯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소련체제의 비스탈린화를 겨냥하면서 진행되고 있는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개혁은 이를 다시 몇 가지 부문으로 나눠서 살펴볼 수 있다.1) 민주 집중제의 신장고르바초프에 의해서 추진되고 있는 정치개혁의 내용은 소련 공산당의 지도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 집중 체의 원칙을 다시 정화하여 그 본래의 의미를 신장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1988년 6월 고르바초프는 제 19차 당 협의회 보고에서, 당의 대신에 민주주의적 당내 다원주의 원리를 당 조직 원리로서 규정하자는 주장까지 대두되었다.이리하여 1990년 7월 제28차 당 대회에서는 당 조직 원리로서 민주 집중제의 공식적인 폐기가 이루어졌다, 동 대회가 채택한 「인도적, 민주적 사회주의를 향하여」라는 강령적 선언은 다음과 같이 명시하였다. "행정적, 명령적 체계의 조건에서 조성된 민주집중제와 준엄한 중앙집권화를 단호히 거부하고, 민주주의 원칙을 옹호한다." 고르바초프는 제1차 인민대의원대회에서 민주주의사회는 의견의 단일성과 태도와 이해의 동일성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것은 반드시 의견의 다양성과 다원주의로 특징지어진다고 강조하였다. 더 나아가 당내에 있어서 의견의 다원주의란 당연히 의견을 달리하는 분파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내 분파의 인정은 의견의 다원주의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 다원주의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하다. 기본적으로 의견의 다원주의 즉 토론과 비판의 자유가 분파의 자유를 의미하지 않으며, "공산당 내에서의 분파의 허용은 당의 종말을 가져온다."는 입장이 견지되었으나, 당내 분파가 인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화되어 수많은 분파가 형성되어 다원적인 이해가 표출. 집약되었다. 결국 의견의 다원주의는 당내 분파의 허용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복수정당제로 연결되었던 것이다.2) 정치적 다원주의 (복수정당제)복수정당제에 대한 고르바초프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부정적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정당이 여러 개 존재하여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또한 민주주의는 정당의 수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며 다당제를 주장하는 정치적 투기를 비난하였다. 또한 "소비에트 정치제도의 틀 속에서 민주화와 글라스노스트에 입각하여 다양한 견해의 가장 광범위한 비교 검토, 다양한 관점에 기초한 일치된 해결책의 작성"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이와 같이 소련공산당의 공식 입장은 정치적 다원주의를 배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88년 가을 사회주의적 다원주의에 관한 원탁회의에서 의견의 다원주의가 행동. 조직의 다원주의로 그고르바초프와 같이 인민대의원 대회에서 간선으로 선출될 수 있다. 대통령은 매년 인민대의원 대회에 보고를 행하며 소련의 국내외 정책과 관련한 중대 사안에 대해 최고회의에 보고한다. 그는 수상과 기타 주요한 정부 직책의 임명권을 가지며 대통령의 직접 통치를 실시할 수 있다. 이외에도 대통령은 소연방의 수장으로서 15개 공화국 대통력으로 구성되는 신설 연방위원회를 주재하며 역시 신설 대통령 위원회의 의장이 된다. 이렇게 새롭게 도입된 소련의 대통령제 정치적 의미는 페레스토로이카의 추진 과정에서 많은 법률이 채택되었으나 이들이 거의 제대로 실시되고 있지 못한 데서 그 중요한 원인의 하나를 들 수 있다. 즉 과거에는 강력한 힘을 가진 당 관료제가, 정부의 기구에 앞서 정책을 집행해 왔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개혁이 본격화되어 가면서 당기구가 행정으로부터 손을 거의 떼고 있으며, 정부 또한 골격한 남아 있는 상태에서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정책의 원활한 집행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때문에 페레스토로이카의 손발을 제대로 가동시키기 위해서도 보다 강력한 권력이 필요했고, 그러한 권력도 전래적인 당 기구의 강화를 통한 것이 아니라, 국가 측에서 그러한 제도의 창설이 요청되었고, 대통령제가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3.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와 소연방의 해체이상에서 살핀 일련의 정치 개혁과 고르바초프의 권력 강화에도 불구하고 집권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체제는 급속하게 불안정에 빠져 들기 시작했으며 급기야는 1991년 8월 보수 세력의 불발 쿠데타 이후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와 아울러 소연방 자체가 해체되었다. 이러한 불안정은 체제의 쇠퇴에 수반되는 불가피한 현상일 수도 있을 것이나 이와 함께 고르바초프의 개혁으로 더욱 심화되었던 것이다. 그의 집권 중 경제는 급속히 악화되었으며 정치 개혁은 억압되어 있던 사회적 불만과 소수민족의 민족주의 열망을 걷잡을 수 없이 분출시켰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붕괴와 아울러 소연방의 해체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몇 1980년대 중반에 소련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었으며 고르바초프 집권 중 점차 정치단체로 탈바꿈을 하기 시작했다. 이 집단의 상당수는 개혁 세력에 속하고 있으며 이러한 분파 현상은 소연방 위회의 인민대의원 대회에서 소유서와 지역 간 그룹 등으로 갈리는가 하면 공산당도 이와 비슷하게 보수, 혁신 대립에서 어느 편을 지지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결론적으로 소련에서는 고르바초프 집권 오래 전부터 서서히 시민사회가 대두되기 시작했으며 그 이후 개혁에 힘입어 소련정치에 있어서 주역의 하나로 급속히 부상했으나 이들 체제 밖 세력은 불행히도 구심점을 잃은 채 주로 경제적 어려움을 배경으로 반 체제화 되고 있었다.3) 소수민족 공화국의 도전소련에서 이와 같이 인민이 점차 정치의 주역으로 부상한 것과 함께 민족의 역할이 부각하기 시작했다. 특정한 문화와 역사, 정치적 동질성을 갖추고 있는 민족은 다민족 국가인 소련사회의 주요한 구성 요소로서 이들 민족의 자주권 요구는 체제에 대한 또 하나의 심각한 도전으로 되어왔다.이들 소수 민족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의 분규와 같은 민족 갈등분만 아니라 중앙, 즉 소연방으로부터의 자주권의 확대를 요구하거나 다 나아가 발틱 공화국들과 같이 독립을 주장하여 왔다. 소련에서 소수 민족 운동은 이미 1960년대 말 모스크바의 러시아화 정책에 반발하여 이들 민족 고유의 언어와 종교를 지키거나 다른 민족의 이입을 막는 등의 형태로 전개되었으며 이는 급기야 고르바초프 집권 하에 민족 자결을 요구하는 데까지 발전하여 왔던 것이다.이와 같이 민족 자결 운동이 고르바초프 집권이후 가열 되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잠재되어 있던 민족주의의 열망이 무엇보다도 그의 민주화 개혁으로 쉽사리 활성화되었던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이러한 기대를 고취하여 왔으나 소수민족의 열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방안을 제도화하지 못함으로써 소수민족의 이반을 촉진시키게 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4) 보수 쿠데타와 지배 엘리트의 분열경제 침체와 사회 근대화 등 체제의 안정에 영향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