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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윌리엄 포크너의 에밀리에게 장미를’의 분석-소설에 나타난 형식과 상징에 대한 연구
    학사학위논문(심사용)윌리엄 포크너의‘Emily에게 장미를’의 분석소설에 나타난 형식과 상징에 대한 연구Analyses of William Faulkner`sA Rose for EmilyA study of plot and symbols제출자: 조경희2007년도문과대학 서양학부 영어영문학 전공단국대학교학사학위논문(심사용)윌리엄 포크너의‘에밀리에게 장미를’의 분석소설에 나타난 형식과 상징에 대한 연구Analyses of William Faulkner`sA Rose for EmilyA study of plot and symbols【 목차 】1. 서론 -------------------------------------12. 본론 -------------------------------------32.1 남부의 신화와 남부 소설의 특징 --------32.2 형식상의 특징 -------------------------72.2.1 Plot의 특징 ------------------------82.2.2 서술 기법의 특징 ------------------132.3 상징과 묘사 --------------------------153. 결론 ------------------------------------25?4. 참고문헌 --------------------------------27?1. 서론William Faulkner는 20세기 미국의 소설분야 중 남부적 색체가 짙은 남부의, 남부에 의한, 남부를 위한 작가이다. 그의 문학에는 에드거 앨런 포와 마크 트웨인으로 이어지는 미국 남부의 문학 전통이 농밀하게 녹아있다. 즉, 그의 문학은 남부의 전통적인 가치가 급속히 해체되고 사실과 허구가 혼란스러울 정도로 뒤섞인 남부 역사에서 남부의 실체를 포착하기 위한 지난한 작업이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그의 문학에서 그는 모더니즘 작가로서 언어와 시간과 인간의 의식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그 이전의 실존주의적 시각에 의한)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조금 더 난해하고, 다층적 의미의 단어의소였다. 다시 말하면 남부의 지방적 의식이 붕괴하기 시작했던 때였다. 그 이전에는 패배로 시달리던 나라가 지속적인 정열과 열의로 문학에 전념할 수 는 없었다. 또 남부는 스스로의 본격적인 문학전통, 즉 New England의 그것에 필적할 만한 전통이 없었다. 남북전쟁 이전의 남부문학은 대체로 감상에 사로잡혀 미온적이며 평범한 것 이었다. 당시의 재간 있는 남부사람들은 정치나 웅변에 몰두하여 문학 같은 것은 지적능력에 걸맞지 않는 보잘 것 없는 시간낭비라고 여겨왔다.많은 남부작가들에게( Faulkner를 포함한) 환경이 좋았었더라면 쉽게 잊을 수도 있었을 조국의 과거로 달려가게 한 것은 타 지역에서 들어오는 지적인 풍조에 대한 영향이었다. 그들의 문학은 지방사상과 지방을 초월한 시야가 충돌함으로서 생겨나게 되는데 그들은 지방을 초월한 시야의 대표적 인물로 Poe를 뽑았다. Poe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들은 그러기 위해서는 유럽의 문학전통에 대한 지적인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남부의 상상력이 크게 작력하기 위해서는 유럽과 미국 북부의 사상이나 문학풍조에 따라 자극되어야만 했던 것 이다. 지역감정이란 고립하면 과거의 지루한 공상에 지나지 않는 폐쇄성에 물들기 쉽다. 그러나 남부는 이미 외부의 힘에 의해여 붕괴되었지만 아직도 특이한 지역 그대로의 한계에 도달했을 때에는 본격적인 문학을 생산할 수가 있었다.)이러한 이유로 몇몇 비평가들은 Faulkner가 남부의 신화로부터 그의 창작력을 끌어내는 전통적 작가라고 하지만, 앞으로 보게 될 그의 소설에 나타나는 형식상의 실험적 정신은 그와 다르다. 그는 남부의 신화를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거부하면서 쓰고 있으며 그 신화의 박력과 매력을 인정하면서도 그것과 싸우고 있는 것 이다. 그는 작품을 써 내려가면서 남부라는 소재를 더욱 비판하며 과거 유산의 변호 보다는 거부를 일삼았다. Faulkner는 부패한 신화의 잔영을 가지고 작품을 쓰고 있으며 또, 그의 언어는 가끔 비틀리고 강제되며 또 ly 집에서의 악취 사건(4) Emily 부친의 사망(5) 제퍼슨 도로 포장 공사, Homer Baron 과의 교제(6) 쥐약용 비소 구입(7) 제퍼슨 시민들의 Emily에 대한 반감과 침례교 목사의 방문(8) Homer Baron의 귀향(9) 도자기 그림의 지도(指導)(10) Emily의 장례식이 이야기를 순차적 구성으로 풀어 나가보면, 아래와 같다.Emily는 남부 귀족 여자의 딸로 품위를 지키며 혼기가 지나도 독신으로 살아온다. 그녀의 아버지가 사망하고 나자(4), Emily는 북부에서 온 건설 현장 감동 Homer Baron과 사귀게 된다.(5) 사람들은 폐쇄적인 Emily가 사랑을 한다는 것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일부의 사람들은 신분 차이가 나며 귀족적인 것을 지키지 못한다며 두 사람의 사이를 비난하게 된다. 사람들은 Emily를 비난하고 침례교 목사를 그녀에게 보내지만, 목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돌아온다.(7) Baron은 Emily와의 관계를 끝내려고 하고 며칠 동안 사라지게 되고, 그 때 Emily는 독극물을 사고 결혼 준비를 한다.(8) 마지막으로 Baron이 Emily의 집 앞에서 모습을 보이고 마을에서 사라졌을 때,(8) 사람들은 그가 고향으로 떠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후, Emily의 집에서는 악취가 풍기게 되고, 사람들은 동물 시체 냄새라고 생각하여 Emily의 집 근처를 소독하게 된다.(3) 그 이후, Emily는 더욱 바깥출입도 하지 않고 도자기 그림을 가르치는 얼마동안을 제외하고는 사람들과의 만남도 가지지 않고 세상과 등을 돌려 살아간다.(9) Emily가 죽은 뒤, 사람들은 경애심과 호기심으로 장례에 참가하고 누구도 보지 못한 그녀의 집 안을 구경하게 된다.(10),(1) 사람들이 2층의 방문을 열어보니, 그 방은 장밋빛으로 꾸며진 신방이었고, Emily가 샀었다던 선물들과 침대가 있었다. 그 침대 위에는 해골이 누워있었고, 해골 옆에는 얼마 전에 누운 베개자국과 더불어 철회색 머리카락이 남아있었다.스토리에서 이처럼 발생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좀 놀랍다. 더구나 ‘회상’에서 조차도 일인칭 화자가 최후의 권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은 두 마디의 시작하는 말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과 그다음의 콜론 부호가 암시하는 것에 의하여 거리를 둔 채 틀에 끼워져 있다). 작품의 내용은 할아버지의 이야기일 수 도 있다. 그러나 명백히 우리는 이 이야기가 할아버지 자신에 의하여 써진 것이 아니라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청중중의 한 사람 , 즉 아마도 그의 손자에 의하여 쓰여 졌다고 추측할 수 있으며, 이런 구별은 이 소설의 어조를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이런 식으로 직접적인 일인칭 화법이 대체로 부재하고 있음을 발견 하면서도 우리는 간접적으로 말해지는 목소리 spoken voice가 그의 대부분의 소설 속에서 지배적 요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게 된다. 세밀하게 살펴보면, 대부분의 그의 소설은 단 하나의 시점이 아닌 복합적 시점을 가지고 있으며, 더욱이 Faulkner는 많은 경우 이 복합적 시점( 일인칭, 삼인칭, 의식의 흐름, 의식의 집중 등) 을 더 좋아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문제를 보다 분명이 이해하는 방법으로 ‘A Rose for Emily'를 살펴보겠다.작품의 화자는 줄 곧 ‘we’를 사용하면서 Emily 서술하는데, 이를 통해 독자는 화자가 마을 사람들 중의 한명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화자는 그녀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인 견해나 입장은 내놓지 않고 그저 일어났던 사건들을 서술하거나 또는 사람들이 했던 말을 인용하는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는데 그친다. 그러나 작품에서의 사건 제시순서는 원래의 사건 발생순서와 많이 다르기 때문에 독자에게 그는 믿을 수 없는 화자로 남는다. 또한 이러한 교란을 한 눈에 알 수 있기 때문에 독자는 그가 말하는 것이 주인공 Emily를 파악하는 데 충분한 것인지, 안 좋거나 이상한 사건을 말하는 데만 치중한 것인지, 또는 사건을 왜곡한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렇기 때자신이 계획한 대로 사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죽은 Homer와 ‘함께’ 차린 신 혼방은 온통 장미 빛으로 꾸며져 있으니 이것이 그녀의 억눌려있던 성적욕망을 표출 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열정적인 빨강색을 상징하는 장미가 그녀가 죽은 뒤 그녀에게 헌사 되는 것에는 큰 의미가 있다.또 하나의 색상을 이용한 상징은 회색이다. 그녀가 늙어가면서 회색빛의 철회색 머리를 갖게 되는 것에는 그녀가 남부의 상류층 출신인 것과 미국내전 당시 남부군의 전투복 색상이 회색이었던 점을 매치시키면 그녀가 몰락한 남부를 대변한다는 상징을 알 수 있다. 이 회색 역시 대조되는 색상이 있는데 이는 이미지로 변환되어 진다. 텍스트에서의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그녀가 사랑한 Homer Barron은 파랑색을 연상시킨다. 그는 북부에서 온 평범한 일꾼으로서 그를 심상기법으로 떠올리자면 헐렁하거나 헤진 청바지를 입었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파랑색은 역시 북부군의 전투복이었으니 이 이미지기법의 파랑색과 상징적으로 표현된 회색은 작품에서 대조된다고 할 수 있다.회색의 상징성 외에도 미국 남부에 관계된 이미지와 상징은 작품에서 많이 드러난다. ‘cotton gins’는 미국 내전 이후 공업화, 산업화 되는 남부의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의 작은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이 Emily를‘noblesse oblige’라고 부르는 것도 남부 상류층 멤버들이 취해야 했던 위엄성과 명예, 고결함을 나타내는 어휘이기 때문에 이 어휘의 언급만으로도 작품이 남부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위에서 어느 정도 설명하였으나 정작 글에는 등장하지 않는 ‘장미’라는 소품은 작품 내에서 대표되는 중요한 상징으로 작용한다. 우선 주인공인 Emily는 ‘lady’라는 이름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죽어서도 기사도 정신을 가진 신사다운 남성이 그녀에게 장미꽃을 선사한다는 기본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이것은 작품에서의 화자 또는 William Faulkner 그 작가 자체가 여전히 남부의 어요.”
    인문/어학| 2008.01.31| 30페이지| 20,000원| 조회(1,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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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 중세 봉건사회의 형성 과정과 그 해체 -로마말기부터 흑사병 까지 평가A좋아요
    학사학위논문(심사용)서양 중세 봉건사회의 형성 과정과 그 해체로마말기부터 흑사병 까지【 목차 】1. 서론 ------------------------------------------ 12. 본론 ------------------------------------------ 62.1 봉건 사회의 형성 ------------------------------- 62.2 중세의 농업과 장원제 --------------------------- 92.2.1 상업의 부활과 도시의 발전 ------------------ 112.3 봉건제의 위기 --------------------------------- 143. 결론 ----------------------------------------- 17?4. 참고문헌 ------------------------------------- 19?1. 서론독일의 역사가 케라리우스)에 의하면, 서양의 ‘중세’ 개념은 ‘중간시대’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와 근대 사이의 중간시대를 의미한다. 그는 고대를 콘스탄티누스황제 때까지, 중세는 그로부터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때까지, 그 이후를 근대로 구분하였다. 이에 대해서 K.브레이지히는 이 3분법의 앞과 뒤에 두 시대를 더해서 원시 ·고대 ·중세 ·근세 ·최근세의 5시대로 구분할 것을 제창하였는데, 그는 역사의 시간을 달리하는 여러 민족이 이 5단계를 거쳐 왔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3분법은 그 후 수정되어 서양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사에서는 고대를 민족대이동, 또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476)까지, 중세를 그로부터 르네상스 또는 지리상의 발견이나 종교개혁까지, 근세를 그 이후로 구분하고 있다. 또한 근세를 2기, 또는 3기로 다시 나누어 프랑스혁명이나 미국의 성립시기까지를 전기, 그 이후를 후기로 구분하고, 3기로 나누는 경우는 독일제국의 성립, 또는 제l차 세계대전까지를 중기로 해서 삽입한다.이 중 서로마 제국의 멸망(476년)을 기준으로, 흑사병과, 기후조건의 악화, 혹은 기존상업자가 도시로부터 이탈하자 국가는 직업의 고정화와 함께 농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거주이전의 자유를 박탈한다. 이로써 도시 내에서의 상업에 있어 그 생산성은 저하되고, 기술개발도 줄어든다. 이것은 도시사회의 후퇴를 조장하고, 중세도시의 폐쇄성과 연관이 있다.중세 유럽의 형성과정에서 필요한 두 번째 요소로는 ‘초기 기독교’의 역할을 들 수 있다. 3세기까지의 초기 기독교의 포교 과정은 불확실 하지만, 마니교와 아리우스파 같은 초기 교부들의 활약과 초기 교황인 레오 1세의 활약은 지식과 함께 로마문화를 유럽 대륙에 전파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중세 유럽의 형성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게르만족의 등장(375년)으로 볼 수 있다. 로마는 Hun족에 떠밀려온 동고트족이 국경 쪽에 자리를 잡자, 게르만족을 이용 그들의 국경수비에 이용했으나 게르만 족에 대한 과중한 세금부과와 계속되는 Hun족의 압박은 결국 게르만 족이 반란을 일으키게 하여 로마의 멸망을 초래했다.이렇게 로마가 멸망하고, 기독교가 그 로마의 유산을 유럽대륙에 전파했으며, 로마의 자리를 게르만족이 이동하여 차지하게 되자, 중세초의 유럽은 비잔틴제국과 샤를마뉴제국 그리고 이슬람세력에 의해 크세 3등분이 된다. 비잔틴 제국은 기존 로마문화에 동방적 요소가 가미된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여 농업은 테마제도)를 기간으로 상공업이 발달하고 방대하지만 비효율적인 관료 조직 또한 발달한다. 황제 교황주의 (Caesaro-papism)의 종교적 특징과 함께 로마문화를 보존하고 서유럽의 이슬람문화로 부터의 방파제 역할을 했다. 샤를마뉴제국은 북부유럽을 무대로 프랑크왕국의 카롤링 왕조로부터 시작, 샤를마뉴의 제국건설로 그 국가적 경계를 확장한다. 샤를마뉴는 프랑크족의 일원으로써 왕권의 정통성 및 신성(神聖)성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었고, 교황으로서는 무력을 소유하고 있지 못했으므로 현실적인 보호자를 필요로 했기에 800년 서로마제국에서의 대관식을 가지는데 이것은 로마 가톨릭과 게르만족의 결합을 상징한다. 마지막 유럽의 의해 삶을 영위하는 농민들을 구성으로 한 봉건사회가 형성이 되는 것 이다.이러한 봉건사회는 봉건제의 성립으로 그 제도적 기틀을 다진다. 봉건제는 정치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의 구성 요소들로 이뤄지는데, 우선 정치적 측면에서의 구성은 주군(lord)과 봉신(vassal) 사이의 개인적, 상호의무의 관계인 주종관계로 볼 수 있다. 이 관계는 사회 내에서의 상층끼리의 결합으로 봉토를 매개로 하여 충성의 맹세를 함으로써 성립된다.주군은 봉신에 대한 군사적, 법률적 보호와 경제적 부양을 의무로 하고, 봉신은 주군에 대한 군사적 봉사(1년에 40일 정도), 경제적 지원(상속세, 몸값(석방금), 혼인식), 숙식 제공의 의무와 조언 등의 의무를 가진다. 이 주종관계는 피라미드형의 봉건적 계서제를 성립하고 사회를 혼란한 상황으로부터 안정된 사회로 이행할 수 있게 만들어 봉건제가 정착할 수 있게 하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국왕의 지방 전사들에 미치는 영향력은 줄어들게 되는 결과도 초래하였다.봉건제의 사회경제적 측면으로 영주제( 혹은 농노제)를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사회내의 상층과 하층간의 결합으로 전사와 농민 사이의 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농노의 지위는 부자유한 신분으로 그 징표로 인두세, 영주의 직영지에 대한 부역의 의무, 그리고 혼인세 등의 납부의 의무를 가진다. 영주는 지대로서 부역을 받음으로 경제적 권리를 얻게 된다. 경제외적 권리로는 국왕이 가지지 못하는 해체된 국가의 공권력을 소유하게 됨으로써, 시설독점 및 사용권 (banalite), 영주 재판권, 세금 징수권 등을 가진다.) 이들 지방영주들의 권력은 나날이 발전하여 더 이상 그들에게 있어 왕의 존재는 무의미해 지게 된다. 일례로 987년 가장 힘없는 프랑스 백작중 하나인 Capet(Paris의 영주)은 다른 영향력 있는 영주들에 의해 무늬만 왕뿐인 왕으로 선출되었는데, 비록 그 후 300년간 영토를 확장시키는 데에 일조한 카페 왕조이지만, 그 선발 과정에 있어, 영주들 간의 세력 관계에 대해 알 수 있는 실례라고러나 이러한 확대는 무한정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어서 한계지에 도달하게 되면, (즉, 파종량에 비해서 수확량이 못 미치는 척박한 땅까지 개간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경작지는 인구압을 견디지 못해(즉, 경작지에서 생산되는 양으로는 현재의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없게 되어)- 인구는 감소하기 시작한다.-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하면 한 방향으로 방향성을 가지면서 진행된다.(즉,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하면 노동력이 부족해지므로 한계지에서부터 경작을 포기하게 되고 이로부터 다시 인구가 감소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는 끝없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비옥한 토양 만 남을 때까지 진행되면( 인구가 감소할 대로 감소하여 1인당 생산성이 극도로 높아지면)- 인구는 다시 반대방향으로 방향을 튼다.=> 결론적으로 인구는 주기적인 사이클을 가지고 변동한다.(인간과 소의 싸움)장원제도는 영주제와 함께 농노제로도 불린다. 이것은 농노의 지위가 영주의 영지에 한해 부자유적인 신분이기에 가능하다. 부자유한 농노는 그 징표로서 인두세에 직영지 부역, 혼인세 등을 내야 했다. 영주는 그들에 대해 지대로서 부역을 받는 토지소유자로 서의 권리를 가졌다. 그러나 그러한 영주의 자의적 조치를 막기 위해 일종의 장치로서 ‘농민 공동체)’가 생겨났다. 이것은 공동체적 관습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영지 내에서의 관습에 따라 누구나 이것을 따라야 했다. 이 전통은 관습을 중시하는 게르만족의 전통에 의해 만들어 진 것으로 농업 생산성 저해에도 한몫 했다. 예를 들어 땔감을 땔 때, 나무는 영주의 것 이지만 ‘오래된 관습’에 의해 그 채취가 허용된다. 즉 이 관습법이 영주권에 앞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일종의 농민이 가지는 ‘관습적 권리’인 것 이다).2.2.1 상업의 부활과 도시의 발전봉건사회가 안정되면서 상업상의 안정이 확보되었고 이에 따라 상업이 부활하였다. 이는 사회적 무질서와 혼란으로 초래되었던 사회의 농촌경제화와 봉건화가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오히려 봉건사회에 이질적인 요소가 등장하기 있다. 그 구성은 장인(master)- 직인(journeyman)- 도제(apprentice)의 순으로 나열 된다. 제도는 장인(master)을 정점으로 그 밑에 이동 가능한 직공(journeyman)과 제일 하부의 견습공인 도제(apprentice)로 연결되는 수직 조직으로서 도제에서 직공이 되는 데는 최초 7년의 수련기간을 거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중세 도시는 그동안의 영주, 혹은 기사로 대표되는 봉건적 사회에 반대한 비 봉건적 사회세력의 출현을 초래했고, 시장경제의 발달 촉진시켰으며, 사회 내에 계약사상이 출현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지만, 길드의 규제에서 보이듯이 도시 자체는 봉건사회의 일부이며 그들의 자유 또한 집단적 지역적 특권이었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2.3 봉건제의 위기중세의 중반이 넘어 가면서 봉건제는 그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 배경에는 우선 인구 대 토지 비율의 변화, 즉 한계지 감소로 인하여 13세기 후반을 정점으로 하여 인구가 감소한 이유가 크다. 이것은 14세기의 소빙하기에 의한 기후 악화로 인하여 발생한 기근과 함께 인구감소에 영향을 미쳤다.(1315 -17) 또한 그간의 봉건적 생산양식의 한계와 1348에서 1351년 까지 발생한 흑사병)과 백년 전쟁(1337 - 1452)으로 인한 인명 및 재산피해는 중세를 지탱해온 봉건제가 흔들리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이러한 배경은 장원제의 변화를 촉진 시켰다. 그것은 그간의 인구감소에 따라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고, 영주의 사치욕구 및 상업발달에 따라 현금을 요구되어 그동안의 노동지대에서 금납화로 지불 수단이 변화했으며, 한편 토지과다와 노동력 부족은 영주와 농노의 관계에서 영주의 입장을 약화시켰다. 영주는 인구 감소에 의한 곡물수요 감소에 따라 곡가가 하락되자 직영지 경영이 어렵게 되어 직영지를 임대하였다. 이리하여 농민을 인신적으로 구속해야할 필요성이 없어지고, 농노해방을 가져왔다).백년 전쟁은 주종제도의 몰락과 중앙집권적 국가의 탄생의 계기로서 그 있다.
    인문/어학| 2008.01.31| 21페이지| 15,000원| 조회(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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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묵자의 꿈과 현실-기독교, 사회주의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평가A+최고예요
    묵자의 꿈과 현실기독교, 사회주의와의 비교를 중심으로목차Ⅰ.서론 -----------------------------3Ⅱ.본론 -----------------------------31.묵자의 사상적 특색과 한계 와 묵가 집단의 독특한 성격1)묵가와 묵가 집단의 독특한 성격2)묵자의 사상3)묵자의 사상적 특색 4)묵자 사상의 한계5)묵자에 관한 두 권의 책 비교 - 부록 참고.2. 사회주의와 묵자사상1)사회주의(社會主義, socialism)란?2)사회주의적 관점.3)묵가 사상과 사회주의의 유사점4)사회주의에서의 평등5)사회주의가 꿈꾼 평등은 현실 속 에서 어떻게 변화 하는가?6)'평등' 을 통해 본 독일과 스웨덴의 사회주의의 공통점3. 기독교의 ‘사랑’과 묵자의 ‘겸애사상’의 공통점과 차이점1)하나님과 하늘(天)2)이웃사랑과 겸애사상(兼愛思想)Ⅲ.결론 ---------------------------13Ⅳ.부록 -묵자에 관한 두 권의 책 비교Ⅴ.참고 문헌 ----------------------15 Ⅰ.서론묵가는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태어난 민중과 피지배계층에 의한 집단이다. 묵가를 이루는 집단은 주로 수공업자와 노동자, 하급 무사들로 이루어져있었으며, 그들은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당대 주류집단인 유가와 사상적 대립을 이루기도 한다. 그들의 사상은 현대 중국 사회주의의 원형으로 불리기도 하며, 세계 보편적 사상인 서양의 기독교와도 어느 정도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하지만, 묵가는 그 사상의 보편성과, 특이성을 지니고도 결국엔 그 맥이 끊어지고 유가의 빛에 가려지고 만다.묵자의 특징과 그 한계를 알아보고, 묵가사상이 가지는 특징 중 사회주의와 기독교와의 연계성에 관해 알아보았다.Ⅱ.본론1.묵자의 사상적 특색과 한계 와 묵가 집단의 독특한 성격1)묵가와 묵가 집단의 독특한 성격성은 묵(墨)이요 이름은 적(翟)이다. 생존연대는 확실하지 못하나 대체로 기원전 479-381년으로 추정된다. 공자는 초기 周나라 때의 전통적인 제도 예악과 문물을 동경하여 수(公輸)-반전과 평화의 길④ 군사적 방어술 교본 등 (비성문(備城門), 호령(號令))-비성문(備城門)-성문을 지키는 법-호령(號令)-전시에 백성을 올바로 다스리는 법3)묵자의 사상적 특색 사상가로서 묵자는 방법론을 강조한 점이 독특하다 (→ 색인 : 묵변). 그는 판단기준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판단기준은 3가지 검증(三表)과 4가지 기준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가 말한 3가지 검증이란 사상가들이 어떤 명제를 제시할 때에는 반드시 그 명제의 근거(本之), 입증 가능성(原之), 적용 가능성(用之)을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4가지 기준은 사상가들이 어떤 명제를 제시할 때에는 반드시 그 명제가 나라와 백성에게 가져올 수 있는 이익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이익이란 가난한 사람들을 부유하게 하는 것(富), 인구를 늘리는 것(象), 위험을 제거하는 것(安), 혼란을 통제하는 것(治)이다. 그에게 있어 이런 검증과 기준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이었다. 좀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무엇을 좋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우선 그것이 무엇에 좋은가를 분명히 입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묵자의 철학체계를 지탱하고 있는 토대는 보편적 사랑이다. 세계가 혼란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이기심과 편애 때문이고, 따라서 이런 혼란을 없앨 수 있는 치료법은 '편파성을 보편성으로 바꾸는 것'(이것은 그리스도의 박애사상과 놀랄 만큼 비슷함)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남의 나라와 도시를 자신의 나라와 도시로 생각하면 아무도 남의 나라를 공격하거나 남의 도시를 점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과 개인의 행복에도 똑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세계 평화와 인간의 행복은 보편적 사랑의 실천에 달려 있다. 이 새로운 가르침에 대해 실현 불가능하다거나 부모의 특수한 권리를 무시한다는 등의 수많은 반론이 제기되었지만, 그는 보편적 사랑의 원리가 실용적인 정당성과 신성한 구속력을 내포하고 있음을 입증했다. 그는 '보편적 사랑과 상호이익'을 함께 이야기했으며, 이 원칙이야말세기 전반에 유럽에서 등장하였다. 영국의 오언, 프랑스의 생시몽과 푸리에 등은 실업과 빈곤이 없는 사회는 생산수단이 공공의 소유이며, 모든 사람들이 노동에 종사하는 협동사회의 조직과 보급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는데, 그들이 역설하는 협동사회는 현실의 자본주의 사회가 아닌 사람들의 의지에 의해 건설되는 것으로 실생활에서 벗어난 유토피아였다.19세기 중반에 사회주의는 노동자 계급의 해방 운동과 결부되었다. 다양한 사회주의 사상이 나타났으나, 그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마르크스주의였다. 그들은 사회주의를 사회의 발전 법칙, 특히 자본주의 발전의 필연적 결과인 신 사회(新社會)로 규정하였다. 즉, 자본주의에서 사회의 생산력은 급격하게 성장하고 대규모 생산은 사회적인 성격을 띠게 되지만, 여기에는 생산수단의 사유,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 착취라는 모순이 심화되어 빈곤·실업, 주기적 공황을 초래한다. 이 모순은 생산 수단의 사유제 폐지, 국민경제의 계획적·조직적 관리에 의해서만 해결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회주의로의 변혁은 노동자 계급에 의해 달성되는 것이라고 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노동자 계급의 대중적 운동과 결부시키고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인 조직과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혁명을 필요로 하며, 승리한 노동자 계급은 사회주의를 조직하고, 생산력을 급속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국가를 필요로 한다. 그들은 계급투쟁은 혁명 후에도 계속되며, 구지배계급의 저항을 물리치기 위해 이행기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사회의 생산력이 더욱 발전하고 사람들의 도덕 수준이 향상되었을 때, “각자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다.”라는 공산주의의 원칙이 실현되어, 그 때에는 권력조직인 국가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회주의는 역사 및 자본주의 사회·경제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바탕을 둔 것이었으므로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지을 주장하게 된다. 마음껏 일하고 필요할 때 분배받는 사회, 곧 개인에 따른 사회가 아닌 사회에 의한 개인의 모습을 제시한 것이죠.묵자 역시 당시 사회의 혼란을 개인의 이기심으로 보았다. 당대의 사람들이 자기만 생각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타인과의 마찰이 빚어지게 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듯 타인을 사랑하라'는 겸애설을 주장하게 된다. 자기를 사랑하듯 타인을 존중해 준다면 그러한 사회 혼란은 말끔히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4)사회주의에서의 평등평등이란 '기회균등'을 말하는 것인데, 민주주의적 사회주의는 기회균등의 원칙을 '출발에서의 기회균등'과 '삶의 기회균등'의 두 갈래로 나누고 있다. '출발에서의 기회균등'은 전형적인 자유민주주의적 요구로서, '법 앞에 평등'이 필요충분조건이다. 이 원칙은 천부적인 재능의 차이를 존중하는 자연적 순리를 좇으며,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일체의 차별 없이 자유로운 경쟁을 위한 동일한 기준을 만들어주므로 그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상 강자의, 강자에 의한, 강자를 위한 논리와 다를 게 없다. 그리하여 나름대로의 보완책으로서 '삶의 기회균등' 원칙을 제시하는 것이다. 예컨대 사회적 삶을 영위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장을 마련해주는 장치의 하나로 교육 문제를 들 수 있다. 이 교육 문제만 하더라도 '출발에서의 기회 균등'이라는 원칙으로는 충분한 평등이 되지 못한다. 비록 의무교육을 확대하고 학교제도 등을 개혁한다 하더라도 학생 개개인이 처한 기본적 환경 자체가 개선되지 않고서는 그러한 조처가 제대로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균등한 삶의 기회는 균등한 출발 기회의 결과가 아니라 그 전제"가 되어야 한다. 독일의 사회민주당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균등한 삶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첫째, 사회의 가장 약한 자들, 특히 아동, 노인, 장애자들을 위해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삶의 공간 및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다. 둘째, 모든 시민들을대한 이상적 기대는 현실과의 괴리를 통해 보편적이고도, 지배적인 이념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현 중국의 사회주의는 묵자가 평등을 실현하기위해 내세운 혁명적이고, 공리주의적인, 그래서 어쩌면 사회주의적 사상과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그의 사상이 이 현실에서 꿈을 이루지 못한 결과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묵자 사상은 사회주의는 아니지만 사회주의와 많은 유사점이 있었다. 우리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을 보았다. 사회주의는 인간의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면서, 헌신적인 자기희생과 꿋꿋한 도덕성을 바탕으로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인간 내면에는 또 다른 욕구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기심’이다. 사회주의는 강한 조직력과 이성적 판단에 근거하여 지탱되었고, 경험과 실천이 그 사회의 추동력이었다. 그러나 조직력에 틈이 생기고, 그 틈을 이기적인 욕구가 뚫고 나왔을 때 사회주의는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묵자 역시 당시 사회의 혼란을 개인의 이기심으로 보았다. 당대의 사람들이 자기만 생각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타인과의 마찰이 빚어지게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듯 타인을 사랑하라'는 겸애설을 주장하게 된다. 자기를 사랑하듯 타인을 존중해 준다면 그러한 사회 혼란은 말끔히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 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추상적인 겸애사상은 하루하루 전쟁을 피해 먹고살기 바빴던 민중들의 삶과는 괴리(乖離)적 이기도 했다. 이렇게 현실에서 그 필요성에 부정적이었던 그의 사상 (차라리 잘 먹고 잘사는 현실적으로 이익이 되는 방법론을 펼쳤다면 그의 사상은 그렇게 몰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은 현대의 사회주의가 현실 속에서 그들이 추구하는 꿈의 사회를 이룩하지 못하고 그 체제나 노선을 수정, 변경, 혹은 몰락하는 모습을 통해 공통점을 찾을 수 가있다.6) '평등' 을 통해 본 독일과 스웨덴의 사회주의의 공통점독일과 스웨덴의 사회주의는 역사, 사회적 전통 등의 차이에 따라 적용되는 과정에서 다른 점이 있겠지.
    인문/어학| 2008.01.31| 15페이지| 3,000원| 조회(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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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 민족주의 역사학
    민족주의차례1. 민족과 민족주의의 정의2. 민족주의의 발달과정1. 태동기 (1780- 1870)2. 발전기 (1870-1918)3. 극성기 (1918-1950)4. 쇠퇴기 (1950- )3. 민족주의의 형성4. 민족주의의 유형1.민족과 민족주의의 정의1>.민족의 여러 가지 정의들민족에 관한 정의에는 그 의미가 모호함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경계는 1)객관적 정의와 2)주관적 정의로 나누어지는데, 객관적 정의로는 민족의 객관적 구성 요소를 중시하여 혈연, 지연, 언어, 역사, 문화, 경제생활 등의 요소를 기준으로 민족을 구분하는 것을 말한다. 즉, 민족이란 , 지리적 근접성에 기초를 두고 동일한 혈통적, 역사적, 종교적 전통이 같으며,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인 것이다. 두 번째로 주관적 정의로는 민족의식이나 일체감 같은 정신 및 의식적 측면 등의 주관적 요소를 기준으로 민족을 구분하여, 민족이란, 객관적 요소에 관계없이 운명 공동체에 속한다는 공통된 믿음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의 집단 을 말한다. 또한, 주관적 입장에서는 객관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객관적인 요소 중 어느 하나도 필수 조건은 되지 못한다고 말 한다.Joseph stalin은 “민족은 언어, 영토, 경제생활 및 문화 공동체 내에 구현된 심리 구조 등을 지닌 역사적으로 진화한 안정된 공통체”라고 했으며), Hans Kohn은 민족이 형성되는 것은 일정한 객관적 유대(공감)들이 한 사회적 집단의 관계를 규정해줄 때부터이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영토라고 주장하였고, Calton. J. H. Hayes.는 민족은 공통된 언어가 가장 중요 하며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역사적 전통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대다수의 학자들은3)절충설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 입장에서의 민족은 [민족이란 결국 일정한 다수의 인간이 공주 함에 따라 객관적 요소의 전부 또는 그 중의 몇 개를 공유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같은 공동체에 속한다는 의식, 더 나아가서 그 공동체를 보존하 주관주의적 도구론의 방향으로 갈라진다. 전자에는 독일학파 학자들이 그리고 후자에는 영미학파 학자들이 속하게 되는데 이는 민족주의에 대한 연구는 그 연구주체가 속한 민족공동체의 역사적 경험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 민족주의는 ‘민족’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유동성과 변동성에 맞게 역사적으로 변하고 발전하게 된다. 특히 민족주의는 19세기와 20세기 초에 들어 국가의형성과, 전쟁 등 극심한 사회 변동기를 겪었던 유럽에서 각각 그 나라만의 역사와함께 여러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데, 앞으로 볼 자료들은 그러한 민족주의의 형태를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에 나뉘어 있는 연대별로 나누어 조사한 것이다.2. 민족주의의 발달과정민족주의는 서양에서 18세기 후반에 산업적, 정치적 변혁과정에서 등장했다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이 이념은 19세기 초부터 중엽까지 중부 유럽에 전파되었고, 19세기 후반에는 동부 유럽으로 확산되었으며, 20세기 초 부터는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에서도 일어났다. 이 이념이 형성될 수 있는 근거는 자신들이 혈연적, 언어적, 문화적, 종교적, 정치적으로 내적 단일성을 이루고 있다는 감정이나 의식 또는 그렇게 되고자 하는 의지 등 이며, 이를 근거로 하여 구성원들에 대해서 통합적 힘을 발휘한다. 이 이념이 한 민족, 한 국가 구성원들의 일체감에서 나온 것이라 본다면, 그러한 감정과 사상의연원은 고대시기로 까지 올라간다. 즉 유대인들의 선민의식(選民意識))과 그리스인들이 야만인들에 대한 우월의식은 각각 그들 나름대로 종교적 또는 문화적 민족감정으로서 자신들의 일체감을 강조하는 태도였다.중세에서도 초기에 부족사회를 단위로 하는 민족감정들이 언급될 수 있겠으나, 그것들은 지역주의 및 신분질서와 무엇보다도 기독교 보편주의와 결합되어있었으므로 작용력은 미약했다. 중세 말에 들어 ‘백년전쟁’(1337-1452)과 ‘후스전쟁’(1419-34) 을 통해 어느 정도의 민족감정이 드러나긴 했지만, 백년전쟁은 잉글랜드와 프랑스의다.1〉.태동기 (1780- 1870)민족감정이 의식된 범위와 그 표현양식 그리고 지향목표에 있어서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은 프랑스 혁명에서였다. 18세기 후반 동안 제 3신분으로 형성되고 있던 부르주아 계급들에 의해 그들의 개인적 ,국민적 권리요구에서 출발한 혁명은 자신들을 ‘국민’과 동일시하여) ‘나머지 국민’즉 제 3신분아래의 민중들에게 광범위하게 자발적 동의와 참여를 불러일으켰다. 이로써 국민은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과 자신들의 일체감을 새로이 가지게 되었다. 즉, 프랑스혁명과 함께 민족주의의 실제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근대 민족주의’로 지칭되며, 이 민족주의가 이전의 다른 민족감정들과 다른 점은 종교적 감정으로부터 벗어나 ‘세속적’이며 대중을 동원할 수 있는 표현이자 수단이 되었다는 사실들이다. 이러한 태동기의 민족주의는 프랑스 자체의 부당한 신분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사회를 세우기 위한 부르주아들의 의지와 함께 형성된 것이므로, 어디까지나 ‘국내적’이며‘사회정치적’인 성격을 띠었다. 즉, 출발당시의 민족주의에선 우리가 알고 있는 민족주의 내에서의 이민족 배타주의적인 성향이 없었으며, 그들의 민족감성은 국제주의에 대립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근대민족주의가 출발당시에 보여주었던 이상적인 태도와 성격은 ‘계몽사상’의 영향관계 속에서도 찾아질 수 있는데, 프랑스인들의 민족감정이 인권과 자유가 실현되는, 인민들의 평등한 관계를 근거로 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지향했던 것은 ‘자연권 사상’에서, 특히 주권의 경우, 군주가 아닌 인민에게 있으며, 인민이 정부를 정당화 한다는 확신을 제기했던 루소의 정치사상에서 나왔으며, 종교와 교회의 권위주의와 그것이 부과하고 있던 질서를 거부하고 ‘세속적’이였던 것은 ‘합리주의’에서였다. 또한 그들의 감정이 배타적이지 않았던 것은 형제애의 ‘세계시민주의’에서였다. 즉, 태동기의 근대민족주의의 이념은 18세기 계몽사상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고, 따라서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적, 세계 시민 지향적인 정치이념으로서 인식되기 시작되었다.2〉. 발전기 (1870-1918)민족주의는 1870년대 초부터 대공황이 시작되었을 때부터는 귀족을 위시한 보수 세력뿐만 아니라 전통적 수공업자들과 상공계층들로 부터도 지지를 받으면서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국가주의적 정책으로서 변모하게 되었다. 경제위기속에서 민족주의는 더욱더 국가주의적으로 되었고, 노동자들의 국제 연대 운동과 사회주의에 대적하는 수단으로 되었으며, 반 유대인적 사건인 드레퓌스 사건)에서처럼 인종주의적 성향도 드러냈다. 즉 그이전의 사회개혁적인 좌파적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주의는 1848년부터 변질되어갔으며, 1870년대부터 경제위기와 함께 자기중심적이고 폐쇄적, 배타적 성격을 띠게 되었고, 반사회주의적인 우파적 보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1870년대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종말을 고했던 1918년까지는 유럽의 각 민족국가가 자본주의에 의한 세계발전을 추구하여 제국주의적 영토분할과 식민지 공략에 치중했던 기간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유럽 각국의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의 투쟁에서 기원했던 것 인 만큼 , 민족주의는 당시 제국주의의 한 구성요소라 할 수 있다. 19세기말에 등장한 제국주의는 영토 확장과 경제적 팽창을 추구했던 서구열강들에게 국가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보다 우선한다는 국가주의에 탐닉하게 하여 식민지 침탈을 자행 하게했다. 열강들은 민족주의를 최대한 이용했다. 그들에게 민족주의는 대외침략과 제국주의 전쟁을 미화하고, 약소민족에 대한 압제를 합리화하며, 식민지 주민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한 사상적인 근거로 생각되었다. 또한 식민지국가는 민족적 저항의식에 의해 국가 독립과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과제를 스스로 인식하게 되어 ‘저항적 민족주의’를 형성하게 된다. 식민지 민족주의는 먼저 동부아시아에, 또 그곳에서 서남아시아로, 서남아시아에서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로 식민지 ·반식민지 세계의 전역에 퍼져 나갔다. 그러나 식민지 민족주의는 근대 민족주의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었다. 근대 민족주의는 자본주의가 봉통한 사회구조의 급변속에 기존질서와 권위를 유지하고자 할 때 동원되었다. 그래서 제국주의를 민족주의의 한 특수한 현상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3〉. 극성기(1918-1950)제1차 세계대전은 고도로 발달한 왕조주의의 종말을 가져왔다. 1922년 까지 합스부르크가, 호엔촐레른가, 로마노프가, 그리고 오토만가는 사라졌다. 베를린회의 대신에 ‘민족’연맹(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이 나왔다. 이 연맹에서 비 유럽인들은 배제되지 않았다. 이후로 합법적 국제규범은 민족국가였다. 연맹에 잔존하고 있는 제국 세력들도 제국의 제복보다는 민족의 의상을 입고 나타났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이 시도된 국제주의가 실패하는데 에도 강한 작용을 했다. 즉, 전쟁이전의 민족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던 극우적 과격 민족주의 운동인 파시즘과 나치즘이 등장하여 국제연맹이 좌초하는데 역할을 했다. 파시즘은 후진 산업국가에서 사회적 변화로부터 불안을 느낀 세력에 의해 등장한 극우적 민족주의로서 17세기와 18세기의 자연권과 합리주의, 평등과 박애사상을 모두 거부했고, 국제주의를 적대시했다. 나치즘의 히틀러는 자유주의적 시민계급은 경멸되어야 할 계층으로, 노동계급을 국제주의에 의해서 잘못 인도되고 있는 희생물로, 그리고 유대 인종은 국민을 타락시키는 장본인들로 보면서 국민을 ‘민족화(nationalisierung)’ 시켜야 한다고 외치며 국민을 선동했다). 이것이 그에게는 ‘민족’을 위한 것 이었다. 이 작업에 그는 사회주의 개념을 연계시켰으나, 나치즘은 합리적으로 설명되기 어려운 배타적, 인종주의적 극우민족주의였다. 그 외의 제3세계 국가들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기위해 사회적 잠재력을 동원하여 민족주의에 호소했다. 그 결과로 근대화및 정지척 독립을 이루고 비동맹정책 내지 중립노선을 채택하였다.4〉.쇠퇴기 (1950- )민족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이후로 많은 역사가들로부터 격하되었고, 더 이상 미래가 없는 이념으로 간주 되었다. 그런가한다.
    인문/어학| 2008.01.31| 6페이지| 4,000원| 조회(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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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틴 기어의 귀향
    마틴 기어의 귀향 (The Return Of Martin Guerre, Le Retour De Martin Guerre, 1982)감독 :다니엘 빈 (Daniel Vigne)배우 :제라르 드빠르띠유 (Gerard Depardieu-가짜마틴기어/아르노), 나탈리 베이 (Nathalie Baye-마틴기어의 부인/베트랑)영화같은 실화를 소재로한 영화이 영화는 실제 16세기 프랑스 툴루즈지방에서 있었던 사건을 토대로 하고 있으며 당시 재판을 맡았던 재판관 ‘장 드 코라스의’ 실제 기록을 근거로 제작되었다. 이 기록은 16세기 프랑스의 농촌사회의 모습을 드러내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국내에도 번역된 바 있다. 1983년 세자르 영화제 각본, 미술상 수상작이다.93년도에 존 아미엘 감독의 리차드 기어와 조디 포스터 주연의 [서머스비(sommersby)]로 리메이크되었다.마틴 기어의 귀향으로 본 16세기 프랑스 농촌의 모습마틴 기어의 귀향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프랑스 농민의 생활상을 역사적 고증을 통해 표현해 내었다는 것 이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 했으며, 역사학자 이기도한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는 이라는 책 으로 고증을 했는데 그 책은 영화에서 판사로 나오는 실존인물 ‘장 드 코라스’의 재판에 대한 기록 묶음 집 이라고 한다. 이렇듯 이 영화는 충분한 역사적 고증작업을 통해 당시 프랑스 농민들의 종교, 사회,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1. 생활그림 이 영화에서는 16세기 프랑스의 중세 장원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보여 진다.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오며 생긴 삼포제의 모습은 쟁이의 발명과 함께 소를 사용해 밭을 가는 모습으로 표현되며, 자급자족체제를 보여주듯 장원에는 경작지와 방목지, 방앗간, 창고, 교회 등이 화면에 보인다. 마을 여인들은 공동 우물에서 빨래를 하며 큰 창고에는 공동의 곡식들이 보관되어있다. 그들은 폐쇠적 공간속에 사는 이들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가족적 공동체 생활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마틴이 돌아오자 신부, 친척, 이웃할 것 없이 모두들 나와 기뻐해 주고 장님이었던 늙은 할머니가 죽자 모두들 슬퍼하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이것은 당시 잦은 전쟁으로 인해 국가가 더 이상 나라를 보호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장원 스스로 자체방어를 하며 생긴 현상으로 16세기 프랑스의 농촌 사회상을 보여주는 것 이다.2. 종교16세기의 프랑스는 시대의 과도기적인 성격으로 인해 종교, 사회적으로 변화를 겪는 시기기도 했다. 그 변화는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에도 일어 났는데,‘프로테스탄티즘’의 확산이 그것이다.1536년경에 프로테스탄트 전도사들이 프와 백작령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고, 1551년에는 이미 사람들이 파미에나 르 마-다질을 떠나 제네바로 향 하고 있었다. 1561년 르마(Le Mas)는 프로테스탄트였던 어느 백작 부인에게 고무되어 스스로 신교 도 시임을 선언했다. 1563년 “신교도로 의심받는”상당수의 가족들이 있었다. 아르타가에서는 1568년 신교도 병사들과 그 지방의 개종자들이 교회의 “우상들”을 치우고 제단을 파괴했다. 영화의 끝 부분에 나오듯이 재판관인 장 드 코라스역시 마틴 기어의 사건 12년 이후 개종을 한 뒤 사형 당한다. 영화에서 보면, 마틴과 베트랑의 결혼식에서의 주례와 마법 걸린 마틴을 치유하는 역할로 신부가 나오듯이, 생활 속의 가톨릭은 그대로 유지되었던 반면,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은 프로테스탄트적 믿음을 갖기 시작했다.영화속 흥미로운 장면들영화를 보기전에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의 이라는 책을 먼저 읽었는데 책에서 읽은 몇가지 역사적 사실들중에 영화에 나오는 흥미로운 장면들을 뽑아 보았다.1. 샤리바리(charivari)영화 초반부에 마틴과 베트랑이에게서 아이가 없자 동네 청년들이 이상한 분장을 하고 종을 울리고, 칼소리를 내고, 소리를 지르며 게르 집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장면은 ‘샤리바리’라고 한다. 그것은 결혼한 부부가 일정 기간이 지나도 아이가 없으면 그들의 공동체에서 가하던 의례적 행위였다. 이것은 아주 굴욕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독후감/창작| 2008.01.31| 2페이지| 2,000원| 조회(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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