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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나일본부설
    임나일본부설1. 임나일본부설이란?지금 일본의 중고생들이 배우고 있는 일본 역사교과서에는 "당시 조선반도에는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라는 3 나라가 있었는데 대화정권(大和政權)은 임나(任那)라는 땅을 식민지로 만들고 그곳에 일본부(日本府)를 두었다", "삼국시대에 한반도에는 일본의 식민지인 임나(任那)가 있었다", "변한(弁韓:가야) 지방에 진출한 왜인(倭人)은 대화정권(大和政權)을 배경으로 한반도 경영에 나서 김해가라(금관가야 지칭)를 근거지로 하여 낙동강 유역을 공략하여 임나(任那)를 세웠다", "이곳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에는 대화정권으로부터 파견된 역인(役人:官人)들이 주재하여 군정(軍政)을 폈다", 등등의 내용이 적혀 있다.위 왜곡된 역사교과서는 일본의 우익 역사학자들이 주장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근거로 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마치 고대에 왜(倭)가 한반도 남부지방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만들고 그곳에 군정기관(軍政機關)인 일본부(日本府)를 두었던 것처럼 왜곡한 것이다.(일본의 역사교과서 역사부도에는 한반도 남부 지방이 가라(임나)로 그려져 있고, 일본이 고대 신공황후 시대에 한반도 남부지방을 점령하여 그곳에 식민지를 두고 경영하였는 것처럼 왜곡되게 그려져 있다.)2.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의 근거가. 출선기관설(出先機關說)출선기관이란 출장소(出張所)와 같은 뜻이다. 이 학설은 일본이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약 2백년간 한반도 남부지방을 점령하여 그곳에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두고 식민지로 경영하였다는 견해이다.임나일본부 학설 중 가장 먼저 나온 학설로 일본이 천황주권국가를 표방하던 20세기초에 칸마사토모 쯔다소우키치 이케우치히로시 등에 의하여 확립되고, 1949년에 발표된 쓰에마츠야스카즈의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이 학설은 1960년대 말까지 일본 사학자들의 통설적 견해였다.이 학설은 임나일본부의 성립시기에 대한 근거를 일본서기 신공황후기(神功皇后紀)의 신라 정복 기사나 가라 7국 평정 기사에 두고 며, 5세기 초에는 그의 자손인 응신천황(應神天皇)이 북큐수에서 기나이(機內)로 진출하여 야마토(大和) 왕조를 창시한 후, 일본열도를 통합하고 한반도 남부지방을 경영하다가, 7세기 중엽 이후 손을 땠다는 견해이다. 이 학설은 왜가 한반도 남부지방을 경영하였다면 신라가 가야 지방의 소국(小國)들을 정복할 때 왜(倭)가 왜 가만히 있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만약 임나일본부가 가야지방에 둔 왜의 식민지 통치기관이었다면 신라가 가야 지방을 정복할 때 왜(倭)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다. 가야(伽倻)의 왜설(倭說)출선기관설에 대하여 비판이 제기되자 이를 대신하기 위하여 나온 수정론 중 하나이다. 스에마쓰에 의하여 학문적으로 정립된 임나일본부설은 오랫동안 일본 고대사 연구자들 사이에 정설로 인식되어 왔으나, 1960년대에 북한의 역사학자 김석형이 분국설(分國說)을 발표하여 기존의 일본고대사 학설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자 그 충격에 의하여 1970년대 이후로 일본 사학계에서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재검토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노우에는 이전에 발표된 출선기관설의 신빙성에 의문을 품고 출선기관설은 상당 부분 사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사서에 근거도 없는 상상으로 이루어진 학설이므로 믿기 어렵고, 광개토왕(廣開土王) 비문(碑文)에 나타나는 4세기 말의 왜(倭)나 흠명천황기(欽明天皇紀)에 나타나는 6세기 전반의 임나일본부에 관한 기록은 신뢰를 둘 수 있지만 이들도 야마토왕조에서 파견한 것이 아니라는 견해이다.이노우에히데오는 임나일본부에 관한 일련의 논고를 통하여 선사시대부터 가야 지역과 일본열도의 교류는 활발하였으며, 그 결과 일본열도에 한반도의 주민이 이주하였던 것처럼 가야 지역에도 왜인들이 이주하여 거주하게 되었는데, 임나일본부는 가야 지역에 거주한 왜인들 또는 왜인과 한인과의 혼혈인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왜가 가야지방에 설치한 행정기관으로 영사관(領事館)과 비슷한 성격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임나일본부를 대화정권(大和政權)의 통제를 받는 출선기관이 아니라 가야군사령부설은 천관우(千寬宇)씨가 제기한 학설로,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 관련 기사 중 일본이 주체로 묘사되어 있는 것을 백제로 주체로 바꾸어 놓으면 사리에 맞는 것이 적지 않다고 전제하고, 신공황후기에 왜가 가라7국(加羅七國)을 점령하였다는 기사는 실은 백제의 가야 제국 정복이며, 6세기 중반에 보이는 임나일본부는 실은 임나백제부로써 백제가 가야 지역에 설치하였던 군사령부와 같은 성격을 가진 기구였다고 주장하였다. 이 학설은 일본서기나 삼국사기에 적혀 있는 내용과 전혀 다른 주장이다.바. 외교사절설(外交使節說)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일본부 관련 사료에 일본부가 통치나 군사적 역할을 한 흔적이 나오지 않은 것에 주목하여 제기한 학설이다. 이 학설은 부(府)는 기관이나 관청이 아닌 사신에 해당하는 것이며, 임나일본부는 대화왜가 임나에 파견한 사신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견해는 1970년대부터 스즈키야스타미 우케다마사유키 오쿠다쇼우 키토우키요아키 등에 의하여 확립되었고, 한일 고대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학설이다.이 설을 주장한 스즈끼는 1996년에 발표한 "고대왜국과 조선제국"에서 6세기 전반 왜 왕권은 한반도의 금속. 문물을 수입하는 대신에 백제에 병사파견, 무기공급과 같은 군사력을 제공하였으나 이를 백제의 용병으로 볼 수는 없고 자립한 왕권 사이의 동맹관계였다고 한다. 그러나 백제가 왜왕에게 볼모를 보내고 왜군의 파견을 구한 시기는 왜국이 주(主)이고 백제는 종(從)인 종속적 동맹관계에 있었다는 것이다. 또 안라(安羅)에 있었던 일본부 즉 왜왕이 파견한 군사력을 가진 제왜신은 왜왕의 통제아래 있었고, 왜 왕권이 안라의 군사.외교에 관여한 흔적이 있으므로, 왜 왕권과 안라와의 관계는 종속적 동맹관계에서 진일보한 종속형태였으며, 6세기에 30여년동안 백제와 안라(安羅)는 왜국에 종속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설은 흠명천황기에 나오는 아라(安羅)를 경상도 지방에 있었는 아라가야로 해석하고 있으나, 삼국사기에 의하면 경상도 지방에 있었는 아라가야는 6세기 초에 신라에 합 그러나 임나는 대마도이고, 가라는 변두리 지역이라는 뜻으로 고대에는 경상도 가야 지방 외에 대마도나 일본열도도 가라라 불렀다.앞에 나온 일본서기 문구에 임나는 축자국(筑紫國:북구주)에서 2천여 리 떨어져 있다고 적혀 있는데, 아래 나오는 수서(隋書)나 위지(魏志) 문구를 보면 축자국에서 2천 여리 떨어져 있는 곳은 대마도이다.「왜국(倭國)은..중략..삼천리 대해(大海) 중에 있다.」隋書 倭國傳「전략..군(郡)으로부터 왜(倭)에 이르기까지는..중략..구야한국(狗耶韓國:김해 방면)에 도착하게 되니 7천여 리이다. 거기서 비로소 하나의 바다 천여 리를 건너서 대마도에 이른다. 또 남쪽으로 하나의 바다를 천여 리 건너는데 이름을 한해(澣海)라 하고 일기국(一岐國)에 이른다. 또 하나의 바다를 천여 리 건너서 말로국(末盧國:북구주)에 이른다.」魏志 倭傳[김해-1천리-대마도-1천리-일기도-1천리-북구주]위에 나온 수서나 위지 문구에 왜국은 삼천리 대해 중에 있다고 적혀 있는 것은 김해에서 북구주까지 거리가 실제 3천리라는 뜻이 아니고 그 당시 사람들이 관념상으로 김해에서 북구주까지 3천리로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나. 임나(任那)와 임나연정(任那聯政)이 모두 임나로 적혀 있자 임나와 임나연정을 혼동임나연정(任那聯政)은 광개토왕(廣開土王)이 대마도왜(對馬島倭), 일본열도왜(日本列島倭), 백제(百濟), 신라(新羅), 가야(加耶)를 복속시킨 후 복속지를 통제하기 위하여 A.D 400년에 요지(要地)에 있던 10개국으로 만든 연립정부(聯立政府)이다. 이 연정(聯政)의 치소(治所)는 임나(任那:대마도)에 있었다. 그 때문에 이 연정(聯政)을 임나연정(任那聯政)이라 불렀다.고기(古記)에는 임나연정(任那聯政)도 임나(任那)로 적혀 있다. 대마도를 뜻하는 임나와 임나연정을 뜻하는 임나는 의미가 전혀 다르므로 꼭 구별을 해야 한다. 아래에 나오는 임나는 대마도라는 뜻이 아니고 임나연정 또는 임나연정 지역이라는 뜻이다.「일본에는 옛날에 이국(註 이세, 대화 방면의 대화왜 지칭)이 있었다.400년)에 3가라가 모두 고구려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모든 왜인들은 모두 임나(註 임나연정)에 통제되었으니 열나라로 나누어 통치하면서 연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속하여 열제의 명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任任那者本對馬島西北界北阻海有治曰國尾城東西各有 落或貢或叛後對馬二島遂爲任那所制...永樂十年三加羅盡歸我自是海陸諸倭悉統於任那分治十國號爲聯政然直割於高句麗非烈帝所命不得自專也」桓檀古記 高句「흠명천황(欽明天皇) 23년(A.D 562년) 춘 정월 신라(新羅)가 임나(任那)의 관가(官家)를 쳐 없앴다.(一書에 말하였다. 흠명천황 21년(A.D 560년)에 임나(任那)가 망하였다고 한다. 통틀어 임나(任那)라고 하고, 세분해서는 가라국(加羅國), 아라국(安羅國), 사이기국(斯二岐國), 다라국(多羅國), 졸마국(卒麻國), 고차국(高嵯國),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걸손국(乞飡國), 임례국(稔禮國) 합해서 10국이다. 三年春正月新羅打滅任那官家一本云二一年任那滅焉總言任那別言加羅國安羅國斯二岐國多羅國卒麻國高嵯國子他國散半下國乞飡國稔禮國」 欽明天皇紀 23年條 [註 흠명천황 23년(A.D 562년)은 고령가야가 신라에 멸망한 해이다. 일본서기에는 고령가야가 멸망한 시기가 A.D 562년 정월로 적혀 있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A.D 562년 9월로 적혀 있다. 일본서기 저자가 흠명천황기 23년조에 신라가 고령가야를 멸망시킨 연도에 맞추어 "신라가 임나(任那)의 관가(官家)를 쳐 없앴다"는 문구를 집어 넣은 것은 흠명천황 23년까지 고령가야가 마치 대화왜(大和倭)의 속국이었는 것처럼 왜곡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령가야는 A.D 522년에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고 그 해부터 신라의 세력권으로 들어갔으므로, 대화왜는 신라의 세력권으로 들어간 고령가야에 관가를 둘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그 뒤 백제.왜 연합군이 신라를 공격하였을 때 고령가야 방면에서 공격하지 못하고 옥천 방면에서 공격하였다. 위에 나온 임나(任那) 10국 중 사이기국은 .
    사회과학| 2007.07.14| 11페이지| 3,000원| 조회(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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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 익산천도설의 문제점
    백제 익산 천도설1. 사실의 혼란최근 백제의 익산 천도설은 새로운 모습으로 주장되고 있다. 백제의 익산 천도 문제에 대해서 그동안 학계의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랜 기간에 걸쳐 비교적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그러나 백제의 익산천도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받아들이려는 일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학계의 대세는 그렇지 못하였다. 좀 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그런데 2003년에 들어와서 이러한 분위기가 갑자기 크게 바뀐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마한 백제문화연구소에서 출간한 ?익산의 선사와 고대문화?와 그와 비슷한 시기에 열린 학술회의인 ?익산 문화권 연구의 성과와 과제?를 통해서 그러한 흐름을 쉽게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관세음응험기?의 익산 천도 사료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실려 있는 천도 기록의 사료적 신빙성에 보다 많은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들 사료를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기존의 천도설이 가지고 있던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이에 백제의 익산 천도 사실은 이제 더 이상 주저할 것 없이 확신을 가져도 될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었다. 이 점에서 백제의 익산 천도설을 새롭게 주장하는 근거들을 구체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2. 새로운 해석?관세음응험기?에는 백제 무왕대의 익산 천도와 관련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백제 무광왕(무왕)이 지모밀지(익산)로 천도하여 새로이 사찰을 경영하였다. 정관 13년 기해 11월에 하늘에서 큰 뇌우가 내려 제석정사가 재해를 입었다.이러한 사료를 바탕으로 백제의 익산 천도설을 주장한 기존의 연구는 무왕이 정관 13년, 즉 그의 재위 40년(639)에 익산으로 천도하였다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삼국사기? 백제 본기 무왕 31년(630) 기사가 무왕이 사비궁을 중수하고 이후 사비궁에 머물고 있음을 말하고 있어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몇 년 후에 부여에서 익산으로 천도를 중수 기록에 주목하고 있다. 무왕이 사비궁 중수 이전에 이미 사비성이 아닌 다른 지역에 거처했음을 시사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삼국유사? 기이편 무왕조의 기록 역시 미륵사 창건 이전에 무왕이 익산에 이미 도읍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무왕의 거소가 사비성이었다면 원거리인 익산의 사자사에 왕비와 함께 행차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시기를 구체적으로 확정하지는 않았지만, 무왕은 즉위 후인 전반기의 어느 때 익산으로 천도하였으며, 630년에 사비궁을 중수한 후 익산에서 사비로 다시 환도하였던 것으로 정리하였다. 익산 천도설을 새로이 주장하는 이러한 해석은 무왕대에 부여에서 익산으로, 익산에서 부여로 백제가 두 번이나 천도하였음을 말하고 있다고 하겠다.3. 익산 천도의 가능성그러면 무왕 말년이 아니라, 무왕 전반기에는 익산으로 천도할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관세음응험기?의 기록을 그와 같이 새롭게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백제의 익산 천도, 제석사 경영 및 제석사의 재해사실이 무왕 즉위 초부터 무왕 말년에 이르기까지 시간적인 폭이 상당히 큰 것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때 익산천도와 제석사의 경영이 맞물려서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석사의 경영과 재해는 그 시간적인 간격이 크지 않은 일련의 연속적인 사건을 말해주는 것으로, 그것이 압축되어 기록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된다.이 점과 관련하여 미륵사지와 왕궁리에서 출토된 간지명 명문기와가 주목된다. 미륵사의 착공시기가 언제인지를 알 수 없지만 무왕 초기에 완공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4개의 간지명 인각와 가운데 무왕대에 해당되는 것은 정해명(627)과 기축명(629) 뿐이다. 이에 금당과 강당 및 승방에 기와가 입혀진 것으로 추정되는 무왕 30년(629) 기축년에 미륵사가 완공된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왕궁리 유적에서는 5층 석탑에 인접하여 새로이 발견된 백제 탑의 유적에서 일반적인 설명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이밖에 최근의 논의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관계를 새로운 요소로 설정하고, 이를 통해 천도문제를 설명하고 있어 주목된다. 천도와 관련해서는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익산 천도를 위해서 중요한 요소로 설정한 익산에서 부여로의 환도와 관련된 설명을 통해서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익산에서 부여로 다시 환도하게 되는 배경을 백제와 신라와의 전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찾고 있다. 익산이 넓은 평야를 끼고 있었지만, 동란의 시기일수록 비중이 클 수밖에 없는 방어기능이 상대적으로 취약하였다는 것이다. 즉 익산은 신라의 침공위협에서 자유스럽지 않은 일종의 포위 공격권 안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신라와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사비성이 가지고 있는 방어적 기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는 것이다. 이에 익산으로부터 부여로의 환도가 이루어졌다고 한다.이와 같이 익산의 방어기능이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설명은 기존의 해석과 커다란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비시대 익산의 지역적 기능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언급이 나와 있다. 그 결과 익산은 사비도성의 방비에 가장 중요한 교통 및 군사상의 요충지로서 강조되어 왔다. 때문에 백제가 가야지역으로 적극적으로 진출하는데 매우 중요한 군사적인 거점이었다. 또한 신라가 전라도 지역을 통해 부여에 이르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요지이기 때문에 사비도성의 방비에도 익산이 그만큼 중요한 지역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때 이러한 설명이 새로운 해석 보다 설득력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한편 익산에서 부여로의 환도에 대한 설명을 그대로 따른다면 부여에서 익산으로의 천도는 무왕이 당시 백제와 신라의 전쟁이 격화되지 않은 상황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미 지적되고 있듯이 위덕왕 25년(578) 신라가 익산까지 침공해온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무왕이 그러한 사실을 무시하고 즉위 초에 익산으로 천도하였다는 것은 조금은 무리한 설명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점은 무왕대 백제와 신라의 관계를 고려할이러한 점에서 630년 익산에서 부여로의 재천도가 백제와 신라의 악화된 상황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는 해석은 그대로 따르기 어렵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백제와 신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설정한 익산 천도설 역시 성립될 수 없을 것 같다.4. 도성체제의 문제익산 천도설은 익산의 왕도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서 익산의 금마저와 부여의 사비성, 이 2개의 도시를 모두 왕도로 하는 도성체제를 유지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구당서? 등에서 사비시대 국왕의 거소로 언급한 ‘동서 양성’ 기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거론되는 사비성과 웅진성을 비판한 것이다. 웅진성은 방군성제가 시행됨에 따라 백제 왕성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이에 익산이 그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여와 익산이 동서의 모양보다는 남북으로 위치하고 있다는 점은 문제가 된다. 또한 이러한 동서 양성체제에서 부여와 익산의 상호관계에 대한 설명이 미진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익산으로 천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여를 구도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면서 부여의 위치를 여전히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여가 익산보다 수도로서 기능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그런데 사비시대 백제의 왕들의 거소로 언급된 곳은 부여 이외에 익산이 아니라 웅진이었다.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받아 도피한 곳은 웅진으로, 웅진성은 5방의 하나로서 사비성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놓여져 있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왕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비궁의 중수를 위해서 무왕이 임시로 머문 곳은 웅진성이었다. 이에 대해서 익산 천도설은 사비성 중수를 위해 무왕이 웅진성으로 거소를 옮긴 것에 대해서 무왕이 사비궁 중수를 몸소 지휘하기 위해 익산에서 웅진성으로 거소를 옮긴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그것은 어딘가 어색한 해석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부여로의 환도 이후에도 여전히 익산을 왕도로서의 비중과 격조를 견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점도 역시 그러하다.한편 의미하는 ‘수부’의 경우에도 사비시대 백제의 그것보다도 백제 멸망 이후의 관청의 존재를 말해주는 견해도 찾아진다. 뿐만 아니라 사비시대로 추정되던 왕궁리의 석축 성벽 역시 고구려 유민인 안승 집단의 보덕국과 관련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도 지적해야 할 것 같다.이와 함께 익산 지역이 새로운 천도 후보지로서 개발되고, 실제로 이루어졌다면 사비도성에서 보이는 정연한 도로망이나 사원 등의 정연한 배치 등 도시계획의 흔적이 일부나마 확인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도 검토되어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특히 사비천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던 나성이나 산성 등과 같은 방어시설의 축조노력이 익산지역에서는 두드러지지 않는 점이 그러한 가능성을 더욱 높여주기 때문이다. 즉 사비도성과 비교할 때 익산지역은 도시계획이라는 관점에서는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왕도로서보다 지방도시로 운영되었을 측면이 보다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익산 지역이 천도의 후보지로 개발되어 실제로 천도하였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표시된다. 때문에 문헌사의 입장과 달리 고고학 연구자들은 백제의 익산천도 문제에 오히려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익산 천도설은 실제로는 증명이 불가능한 학설로 어디까지나 하나의 설에 불과할 뿐이라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5. 사료의 재검토익산 천도설은 ?관세음응험기?에 그 내용이 기재됨으로써 나름대로의 의미를 인정받아 왔다. 익산 천도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에도 무왕이 익산으로의 천도계획을 세워 추진하였으나 천도 자체는 단행하지 못했던 것으로 사료적 가치를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세음응험기?의 천도관련 사실의 사료적 가치에 대해서는 새로운 검토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왜냐하면 천도를 했다고 하더라도, 언제 왜 그것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 현재로서는 합리적인 설명을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도를 계획하였다 단행하지 못했다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세력에 의하다.
    사회과학| 2007.07.14| 7페이지| 2,500원| 조회(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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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문화와 일본문화의 비교
    *일본문화1. 일본의 온천일본열도는 화산섬으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에 온천은 일본전국 북쪽에서 남쪽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분포되어있다. 대략 14,000개의 작은 온천을 포함하는 150여개의 커다란 온천지가 존재한다. 이러한 자연의 선물은 단지 의학적 치유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쉼터의 기능을 해 왔다. 이러한 온천의 기능을 통해서 일본의 많은 문화적 요소들이 생성되어왔다. 최근에는 현대의학의 치유법 중에 하나로 온천이 사용되어진다.2. 일본의 음식문화한국이나 일본 모두 바다로 에워싸인 입지조건은 비슷하므로 해산물이 풍부하다. 또한 사철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농작물을 손에 넣을 수가 있기 때문에 요리의 재료는 거의 같다. 한국과 일본의 주식은 쌀이며 밥과 반찬, 국 등이 올라오는 것도 비슷한 점이다. 그러나 비슷한 재료를 사용하더라도 맛은 아주 다르다. 또한 식사법이나 그릇 등에서도 차이가 많다. 이처럼 여러 면에서 비교해보다 보면 미묘하고 흥미로운 유사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음식을 통해서도 일본의 문화를 볼 수 도 있을 것이다.3. 일본의 의복문화일본인의 전통 의상인 기모노는 값이 비싸고 활동하기 불편하기 때문에 일상생활에는 거의 입지 않고 결혼식이나 성인식, 입학식이나 졸업식 등의 격식을 갖추어야 하는 자리에 입는다. 기모노를 입고 위에 오비를 맨다. 기모노와 비슷한 유카타는 여름 축제나 목욕 후 입는 간편하고 목면 옷이다. 기모노를 입은 경우에는 양말과 신발을 신지 않고, 나무로 만든 굽이 높은 나막신이나 목면 또는 가죽으로 만든 굽이 낮은 샌들을 신는다. 그리고 샌들이 끈에 맞도록 엄지발가락과 둘째 발가락 사이가 갈라진 특별한 버선을 신는다.4. 일본의 차 - 다도다실을 꾸미고 다도구를 준비하여 차를 만들어 마시는 일체의 과정을 말하며 다도의 예법은 감상가치가 있는 독특한 찻잔에, 향기 짙은 차를 끓여 손님에게 권하는 방법, 손님이 이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모양보다도 마음을 존중하고, 자기 자신의 정성을 다해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 다도의 마음이라고 한다.◎차의 종류1). 센차: 찻잎을 잘게 썰어 말린후 뜨거운 물에 우려마시는 차를 말하며, 일본차의 약 80%가 이 센차이다.2). 교꾸로: 그늘에서 비료 등의 영양공급을 충분히 하여 키운 고급 녹차이다. 값도 비싸고 맛과 향이 강해서 적은 양을 마신다.3). 맛차: 찻잎을 곱게 갈아 뜨거운 물에 풀어 마시는 차로, 찻잎을 함께 먹는다.4). 반차: 오래된 큰 찻잎으로 만든 차이며, 중가급품의 차를 의미한다.5). 메차: 센차나 교꾸로를 만들면서 새 싹(芽)을 가려내어서 만든 차이다. 맛과 향이 강하며 카페인 등 자극성분도 많다고 한다.5. 일본연극오랜 역사를 지닌 무악을 비롯하여 노·교겐·인형극·가부키, 각종 민속예능 등 전통예능과 신파·서구식 오페라·발레·대중연극·소녀가극 등의 현대 연극, 나아가서는 학교연극·아동극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특히 무악, 노·교겐, 인형극, 가부키 등은 그 고전적 무대양식과 함께 전통적 연기·연출이 잘 계승되어 온 일본의 독특한 연극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연극은 오랜 역사 속에서 한국을 비롯한 중국 기타 여러 외국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혼합 발달하여 온 것이므로 순일본적인 요소와 외래적인 요소를 구별하기란 매우 어렵다. 적어도 일본의 연극사는 6, 7세기를 정점으로 한국과 수·당나라 등으로부터의 문화유입과,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친 서양 문예·연극의 유입이라는 2대 지주를 기초로 결정적인 혁신과 확대를 이루어왔다. 한편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일본적인 기풍으로 개량 육성시켜 독자적인 연극의 세계를 이룩한 점이 일본연극의 특성이다.*중국문화1. 자전거문화도시나 경제가 발달하여 오토바이가 더 보편화되거나 중경같이 길이 가파른 일부 도시를 제외하면 중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자전거로 '중국서민의 발'이 되고 있다. 중국 사람이 자전거를 많이 타는 이유는 대중교통 수단의 낙후성과 중국인들의 경제수준, 자동차산업의 열악함, 그리고 평탄한 지형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북경 같이 좋은 도로기반시설을 갖춘 도시에서도 출퇴근 시간에는 자전거 때문에 거리 질서가 혼란하며, 게다가 교통 질서의식이 부족하여 교통사고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소득수준이 증가하여 차량소유가 날로 증가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머지않아 주요도시의 거리는 자동차로 교통체증이 심화될 것이다.2. 차문화중국인은 하루도 차 없이는 못 사는 민족이다. 벌써 4천년의 역사를 가지며 어느 공공장소에 가더라도 차 잎만 있으면 언제든지 차를 마실 수 있도록 끓는 물이 준비되어 있다. 중국인이 기름기 많은 음식을 많이 먹는데도 살이 찐 사람이 적은 것이 차를 마셔 단백질과 지방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동남아에서도 마시는 인구가 계속 늘고 있기도 하다. 중국의 차는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다. 또한 중국지역을 이동하다 보면 기타의 서비스는 수준 이하지만 더운 찻물을 제공하는 서비스만큼은 수준급이다. 아무리 작고 후미진 곳을 가도 더운 찻물을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는 중국인들의 식생활과 건조한 대륙의 공기나 날씨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겠지만 현대 중국인들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 바로 차다.3. 의복문화한족을 제외한 55개 소수민족은 대부분 전통의상을 입고 생활한다. 지역에 따라 또는 경제적 수준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소수 민족 여자들은 대부분 민족의 전통의상을 입고 장식을 단체 생활을 하며 남자들은 평상복을 많이 입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역과 민족의 특성에 따라 의복구조는 천태만상이나 그 중 대변하는 것이 치파오와 중산푸가 있다.4. 음식중국요리의 특징으로는 재료의 선택이 자유롭고 다양하기 때문에 지상에 있는 것은 거의 모든 것이 재료로 활용될 수 있다. 그리고 색과 향을 매우 중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인들은 음식의 3대 요소인 색·향·미의 조화를 중시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색과 향신료를 많이 사용함으로써 중국 요리의 독특한 맛을 내고 있다는 것이다. 또, 조리의 기구가 비교적 간단하고 사용하기 편리하며 조리법과 그 과정이 다양하다는 점이다. 기름을 많이 사용하지만 방법이 합리적이기 때문에 자주 먹어도 쉽게 물리지 않고, 음식의 수분과 기름기가 분리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녹말을 많이 사용한다. 중국 요리의 특징 중 특히 조리법이 다양한 반면에 조리기구가 간단한 까닭은 현실을 중시하는 실용성과 합리성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식생활 역시 무조건 겉모양이 아름답고 맛이 섬세한 것에 주목하기보다는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재료에 따라 조리법을 다양하게 개발하고, 가능한 한 칼로리와 양에서도 양에서도 실속 있는 요리를 선호한다.
    생활/환경| 2006.12.26| 3페이지| 3,000원| 조회(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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