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多地廣 중국이라는 나라를 시대별로 조금씩 정리하고 중국인들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측면에서 도표와 자료 등을 다루었다.제목만 보고 글의 내용이 어려울 거라 지레 짐작했었는데 막상 책을 접해보니 알기 쉽게 논리정연하게 서술한 글과 내용들이 책을 단숨에 읽게 하였다.가까이 있는 나라인 만큼 우리나라와 비슷한 문화도 있었고, 그 특유의 독자적인 특징들도 눈에 띄었다.글의 주제는 增加하고 移住하면서 바뀌는 人口와, 家族, 그들만의 民間信仰, 그리고 中國 歷史 속에서 빼 놓을 수 없는 農業, 명?청시대의 商業과 手工業, 새롭게 나타난 社會階層, 사회의 어두운 면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책 표지를 살피며 글쓴이가 누군지에 대해 찾았었는데, 그 이유는 中國에 대해 敍述하는 내용이 지나치게 客觀的이면서도 西歐的인 觀點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었다.예상대로 지은이는 로이드 E. 이스트만 이었고, 이 글을 옮긴 譯者도 그 부분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否定的인 側面에서 바라보았다고 하기에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中國人들은 中國人들에 대해 가장 矛盾的이고, 가장 매력적인 - 이라고 표현한 句節에서 그것이 아님을 알 수 있고, 냉정하게 자신의 意見을 표현했다고 하는 것이 더 適切하겠다.처음에는 中國의 특징다운 人口 이야기가 먼저 나와 그들의 人格的 특성상 個人主義의 發達이 억제되고, ‘他者에 대한 依存性’의 기질이 강화되게 된 과정이 나와 있어서 흥미로웠다.두 번째 주제는 家族과 個人 이었는데,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孝를 굉장히 중시하고, 종족을 중시하여 족보를 만들고 관리, 보전하는 모습을 보이는 한편, 家族이란 의미에 대해서, 社會的 기능, 즉 生産手段으로서 社會再生産 기능에 치중을 둬 진정한 家族愛보다는 아들을 낳아 대를 잇고 자신의 老後에 자식들의 奉養으로 편하게 지내는 것과 死後에 祭祀를 지내는 것에 대해 더 관심이 있는 듯하였다.女性의 지위는 性理學이 確立되는 과정에서 嚴格한 家父長制 중심의 女性 규범이 강화되면서 男性과 지위 격차가 생기고 純潔과 절개가 强調되었다.一時的으로 16세기가 지나면서 女性에게도 敎育機會가 생기지만 제한된 것이었다.또 女性은 어른이 되기 위한 과정의 첫 단계로 전족을 하였는데 당말, 오대의 궁중무희들로부터 전해진 전족은 엄청난 苦痛과 衛生的인 問題에서도 문제가 많았으나 당시의 전족은 교양과 지위, 男性들에게 있어 性的인 매력으로 전족의 인기는 사그라들지 않았고 , 이러한 전족으로 女性들의 行動범위가 좁아지면서 더욱 男性의 지배아래 놓이게 되는 結果를 가져오게 되었다.전족이 性的인 매력이 되었다는 부분에서 신기함과 흥미가 생겼는데 엄지발가락을 제외한 네 발가락의 구부러진 모양새와 심한 악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耽溺하고 좋아했던 男性들, 그리고 그러한 것들에 魅了되어 더욱 더 금련이 되기 위한 노력을 하여 肉體에 苦痛을 가한 女性들이 신기하였는데, 이에 관하여 조금 알아보았더니 전족을 하면 제대로 설 수도 걸을 수도 없는 상태에서 몸을 지탱하면 두 발에 몰리던 힘이 자연 둔부에 몰려 下體가 發達하게 되는데 수십 년을 이렇게 지내오면서 身體 단련을 하는 것 마냥 自然的으로 음부와 엉덩이 筋肉이 發達하여 性行爲時 性的으로 男性의 쾌감을 더해주었다고 한다.그리고 아장아장 걷는 모습이 귀여워 男性들의 변태적 기호에 充足시켜주는 수단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것을 제외하고도 우위에 서고 싶어 하는 욕구와 여자는 고분고분하고 집안일을 해야 하며 바깥을 돌아다니면 안 된다는 생각도 이에 더하여 행해졌던 것 같다.西洋의 코르셋이나 하이힐, 혹은 우리나라의 가채 등도 아름다움의 象徵이 되었으니, 전족도 하나의 風習으로 이해해야할 것 같다.中國에서 男女가 결혼을 하게 되면 시어머니가 主導權을 장악하여 며느리는 대부분 스트레스를 받아 자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家族 간의 位階秩序가 강하고 人間關係에서 精보다는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에 따른 인간관계가 많이 맺어졌다.이러한 것들을 보고 中國人들이 實理的이기도 하지만, 너무 자신의 利益만을 추구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中國人들은 信仰에서도 合理的인 民族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 西歐世界를 變化시킨 宗敎 등에 물들지 않고, 오직 신비한 힘이나 超自然的 현상에 관심을 보였다.신의 能力에 따라 祭祀나 대우도 달라졌으며, 가정에서 또는 밖에서 행하는 제례로 共同體 生活에 活力을 불어넣고 日常生活에서의 피로도 풀었다.부엌신, 토지신, 관제, 관음 등의 여러 등급의 신들이 존재하고 각기 상징하는 바가 달랐지만 마을의 안녕과 개개인의 福을 불러들인다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홍콩에 관광차 갔던 적이 있었는데, 오랫동안 英國의 植民地였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곳곳에 사원들이 즐비하게 있었고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홍콩의 리펄스베이 옆에 있는 틴하우 사원으로 거기에는 책으로만 접해오던 관제를 포함해 관음, 재물신 등의 동상들이 있었고 찾아오는 訪問客 수도 꽤 있었다. 웡타이 사원에서도 사람들이 연신 향을 피우며 소원을 빌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이를 통해서 中國의 民間信仰이 남아있는 모습을 보지 않았나 싶다.하지만 당시 西洋의 制度化된 宗敎와 달리 中國의 民間信仰은 뚜렷한 체계가 부재하였고 19세기 말 청정부의 近代化로 반종교적 폭풍이 불어 民間信仰은 쇠퇴하게 된다.그다음 주제는 農業으로 中國에서 農業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中國에서의 農業은 耕作경제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小規模의 耕地面積을 가지고 必要에 따라 土地를 구입하여 분산적으로 소유하고 있었고, 人力을 많이 사용하여 勞動集約的인 모습이었다. 20c초 農業 農民의 궁핍화 문제에서 自然災害의 빈발이 정치의 붕괴 때문이라는 著者의 말이 인상적이었는데, 害蟲의 방제와 같은 예를 보고 ‘나비효과’ 단어가 떠오르기도 했다.1930년 金融恐慌이 있었는데 특이한 케이스로 中國은 은본위제 덕분에 인플레이션이 오히려 긍정적인 효과를 미쳤고 디플레이션은 불경기, 農村의 手工業 판로가 막히고 토비가 확산되는 否定的 영향을 미쳤다.유교의 영향으로 農業은 근본이 되고 商人은 他人이 生産한 成果를 토대로 부를 증식한 寄生蟲이라는 인식으로 商業은 農業에 비해 발전의 속도가 느렸다.그러나 생계부지와 이익을 위해 당대에는 商業이 이미 번창하고 있었다.19c 후반 운송시스템 관리가 주밀하지 못했고 정부에서 관리도 소홀하여 18c전반의 運送기술과 시장의 기능이 더 效率的인 모습을 보여 운송시스템에 있어서의 逆行의 모습이 있었다. 度量衡도 부정확했고 척도도 복잡하였으며 貨幣사용에 있어서도 地域에 따라 다른 貨幣로 도량형과 같이 마찬가지로 혼란스럽고 복잡하였다.대신 정기 시장이 地方 단위에서의 사회 틀을 만들었다.스키너는 國土가 넓고 地形的으로 分散되어있으며 交通제도가 무척 非效率的이어서 하나의 통합된 시장시스템 구축이 어려워 各各의 自給自足的 자연 경제권을 갖는다고 말한 바 있다.명조 交易은 조공제도 틀에 묵고자 하였으나 海外貿易은 조공 틀 밖에서 이루어져 實質的이었고 후반에 이르러서 대규모 사무역을 인정하여 무역이 발달하게 된다.정부의 ‘행정에 있어서 중개라는 思考方式’은 人口증가에 따른 행정업무량이 왕조정부 행정能力을 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 이러한 중개를 하는 관료기구를 통해 경제 통제가 이루어지고 관리되었던 이유이다.
제 1차 세계대전과 다이쇼 데모크라시목 차-머리말1. 일본과 제 1차 세계대전-(1)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2) 일본의 참전-(3)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세계-(4) 제1차 세계 대전과 일본 경제2. 다이쇼 데모크라시-(1)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제3기-(2)다이쇼 데모크라시의 기폭제-(3)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어둠맺음말머리말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의 승리로 세계 열강의 대열에 오른 일본은 아시아 지역에서의 야욕을 충족 시켰다. 이에 아시아 각국에서는 국내 정치의 개혁과 민족 운동이 불타오르게 되었다. 제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직접적인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고 중국의 산동 반도를 공략하여 독일이 중국에서 소유하고 있던 권익을 그대로 승계하였다. 1915년에는 중국의 실권자 원세개에게 21개조의 요구 조항을 제시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유럽에서의 전쟁을 일본에서는 크게 고마워했는데 유력한 강대국들이 싸우는 틈을 이용하여 자국의 이익을 톡톡히 얻어내자는 것이 일본의 속셈이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데다 쌀 파동과 러시아혁명, 국제노동기구 설립 등의 영향으로 민중의 자각이 높아졌다. 쌀 소동으로 변화를 갈망하는 민중의 에너지가 얼마나 큰 것 이었나가 새삼 드러났다. 다이쇼 시대의 민주주의적 개혁을 요구하는 운동?사조를 일본의 한 사전에선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정의한다. 이 시기에는 메이지 유신(1868) 이후의 거국적인 근대화 작업에서 박탈감을 경험한 계층, 집단을 중심으로 정치적 자유의 확대와 사회 개혁을 향한 요구가 거세게 일어난다.제 1차 세계 대전과 일본을 살펴 본 뒤에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서막에서 종결까지 살펴보도록 하자.1. 일본과 제 1차 세계대전(1)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1914년 (다이쇼 3년) 6월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처가 세르비아의 한 청년이 쏜 총탄에 맞아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세르비아와 보스니아는 모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압박을 받고 진행되었음에도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자 일본 정부는 수정안을 내어 양보하는 등 난항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최후통첩으로 위협한 끝에 수정안에 조인하게 이르렀다. 이 수정안은 전문 16개조로 이루어졌는데 대체적으로 일본의 요구가 관철된 것이었다. 요구를 수락한 5월 9일을 중국에서는 국치 기념일로 하여 배일 운동을 고조시켰다. 나아가 일본은 1916년에 제4차 러?일 협약을 맺어 중국이 다른 열강의 지배하에 놓이지 않도록 하였다. 다음의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은 돤치루이 정권인 베이징 정부에 거액의 차관을 제공하여 혁명파를 압박하였다. 1917년에 일본은 미국의 대독일 참전을 계기로 이시이?랜싱 협정을 맺어 중국에서의 권익을 확보하였다.(3) 제 1차 세계 대전 후의 세계1)파리 강화 회의1918년 11월 11일 혁명 정부는 독일을 대표하여 패전의 책임을 지게 되었고 양측 군대는 적대 행위를 중지하였다. 1919년 1월 연합군 대표들은 파리에 모여 평화 조약 체결을 위한 협의에 들어갔다. 이 협의에서는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 등 5개국의 의견이 강력히 반영 되었다. 강화 회의에서 베르사이유 조약이 조인되어 일본은 적도 이북의 독일령 남양 제도의 위임 통치권을 획득하고 산둥성에 있던 독일의 권익을 계승하였다.강화 회의의 결과 독일에는 식민지 등의 포기와 거액의 배상금이 부과되었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터기 4개 제국이 해체되고,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평화를 위한 14개조의 원칙에 포함된 민족 자결의 원칙에 근거하여 헝가리, 폴란드, 유고 등 동유럽에 많은 독립국이 탄생하였다. 나아가 평화유지의 국제적 기구로서 국제 연맹이 창설되었다. 국제 연맹에서 일본은 상임 이사국의 지위를 얻었지만 미국이 가맹하지 않아 열강간의 협조는 실현되었다고 하기 어려웠다. 강화 회의의 결과, 유럽에서는 영국, 프랑스를 중심으로 세력 균형을 꾀하는 이른바 베르사이유 체제가 성립되었다.일본은 이 베르사유 강화 회의를 계기로 세계 5대 강국의 대열에 끼이게 되었다. 일본은고 한다.(1)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제 3기메이지(明治) 천황 오무로 토라노스케(1850~1912)가 사거한 뒤, 요시히토(嘉仁)가 즉위했는데 다이쇼(大正) 천황 요시히토는 사실 오쿠마 시게노부(1838~1922)의 아들로 그의 정식 이름이 오쿠마 요시히토라고 전해진다. 요시히토 즉위 8년전부터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시작되었는데 그 시작은 바로 러일전쟁 강화 반대운동으로 시민운동 중 하나로 꼽힌다. 그렇게 시작된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3기로 나누어져있다.1) 제 1기 (1904-1914)제 1기인 러일전쟁 강화반대운동은 제국주의와 입헌주의의 이념을 띤 다이쇼데모크라시의 기점이 되었다. 1907-1909년의 군비확장 반대운동, 악세 폐지운동을 거쳐서 1913년 제 1차 호헌운동에 이르는 사이에 제국주의 색채가 약해졌으며 정당을 기반으로 한 정부는 설립되지 못했지만 정치의 민주화는 진전되었다.가. 다이쇼 정변: 1911년 8월 입헌 정우회를 여당으로 하는 제 2차 사이온지 내각이 성립했다. 사이온지 내각은 악화된 재정을 구하기 위해 행정?재정의 정리와 감세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1911년 10월의 신해혁명, 다음 해 2월의 청의 멸망, 중화민국의 성립은 육군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이에 육군은 한국에 주둔시킬 2개 사단의 증설을 요구하였다.내각과 군부가 대립하는 중에 미노베 타쓰키치는 정당내각을 지지하는 헌법론을 공간하여 여론은 입헌정치의 중요성을 느끼고 육군의 횡포에 분노하였다. 또 다이쇼 천황이 즉위하자 국민은 신시대에 맞는 정치의 민주화를 기대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12년 말, 사이온지 내각은 육군의 2개 사단 증설요구로 인해 무너졌다. 사이온지 내각의 방침에 대해 육군 당국은 내각의 결정을 “행정 정리, 해군 확장, 감세 등이 실행 불가능하게 된 죄를 육군에 전가해서 후계 내각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든다“고 하면서 격렬하게 반발했다. 급기야 1912년 12월에는 우에하라 유사쿠 육군 대신이 단독으로 직접 천황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물론 후임 육군 대신을 내지 다.도야 마만을 둘러싸고 있는 우오즈촌 등의 마을에서는 1918년 7월 하순부터 어촌의 부녀자들이 쌀값의 폭등으로 곤궁해지자 이장, 지주, 미곡상 등의 집으로 몰려가 도야마 평야에서 거둔 쌀의 반출 정지와 염가 판매를 요구하였다. 이것을 (8월 5일)이 부인들의 잇키, 높은 쌀값에 참을 수 없어 이사하겠다 고 저마다 외치면서 300여명이 쌀집으로 들이닥쳤다. 고 보도한 것이 전국적인 쌀 소동의 발단이었다.쌀값의 폭등은 전국으로 일어났는데, 그 원인은 상인의 투매와 지주의 매석과 함께 정부의 시베리아 출병 결정이 투기에 박차를 가하였기 때문이었다. 쌀값을 인하시키라는 소동은 교토, 나고야, 오사카, 고베, 도쿄, 요코하마의 6대 도시와 전국의 촌락에까지 퍼져, 1도 3부 38현에 걸쳐서 70만 명이 참가하였다. 중심이 된 것은 공장 노동자, 탄광부, 피차별 부락민, 건설 노동자 등이었다. 정부의 대응이 늦어서 운동의 절정인 8월 중순이 되어서야 정부는 쌀의 강제 매수에 나섰고 도시와 촌락도 쌀의 염매를 시작하였다. 한편 탄압은 엄해서 신문의 보도를 금하고 경찰뿐만 아니라 군대까지 출동하였다. 이런 속에서 언론 옹호와 내각 타도의 여론이 높아져 9월에 데라우치 내각은 총사직하였다.비록 쌀소동은 돌발적이었고 전체를 계획하고 지도할 조직이었지만 신문?잡지를 비롯한 언론계의 보도와 후원으로 커져갔고 지배층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동시에 쌀소동은 노동자 계급을 포함한 일반 민중들에게 스스로의 정치적 역량을 명확하게 인식시켜준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다이쇼 정변에서 드러났듯이 기성 정당의 정치적 지도 아래 움직여왔던 노동자 계급과 민중은 이제 스스로의 조직과 이론으로 전진하기 시작한 것이다.나. 최초의 정당 내각: 쌀 소동은 결국 데라우치 내각을 퇴진으로 내몰았다. 1918년(大正7年) 9월 정당 내각제가 최초로 실시되게 된다. 쌀 소동에서 동요된 원로는 후계수상으로 입헌정우회 총재 하라를 수상으로 밀었다. 하라는 육?해군과 외무대신을 제외한 전 각료를 정당원으로 조합 간부 등, 넓은 의미에서의 사회주의자를 포괄하여 일본 사회주의 동맹 이 결성되었다. 하지만 하라 내각의 유형?무형의 압박으로 다음 해 5월의 대회는 무산되었고, 동시에 동맹 자체가 치안 경찰법에 의해 결사 금지 처분을 받아 해산되었다. 이런 탄압적 국면에서 사회주의자들은 합법주의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며, 내부 논쟁으로서 무정부주의와 마르크스주의(볼세비즘)의 대립이 격화된다. 동맹의 해체 후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을 견지하던 세력은 일본의 혁명을 위해서는 비합법적 혁명 정당의 건설이 시급하다는 인식 하에 1922년 7월 코민테른의 지부로서 일본 공산당을 결성했다. 위원장은 사카이 도시히코가 맡았으며,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던 전체 60명 정도의 각 그룹의 연합체로서 출범했다.1923년 3월의 임시 당 대회에서는 군주제의 폐지 , 보통 선거권 , 노동 조합?노동자 정당의 결사 자유 등의 당면한 요구 조건이 확인되었으며, 결정에는 이르지 못한 강령 초안에는 군주제의 폐지를 비롯한 정치적 민주주의, 농업 혁명과 독점 자본의 억제에 의한 인민의 생활 개선, 외국에 대한 간섭 중지 및 조선?대만의 식민지 해방 등이 언급되었다.다. 우익 사상제 1차 대전 이후 천황 지배의 절대성과 국체 옹호 등의 국수(國粹) 보존 을 주장하는 전통적인 우익 이외에도 새로운 우익의 출현을 낳았다. 그들은 반 기성 정당?반자본주의를 핵심 기치로 내걸고, 현상의 국가주의적 혁신 을 전면에 내세우는 파시즘 운동으로 연결되어 갔다. 기타 잇키(北一輝)?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 등을 중심으로 1919년 8월에 조직된 것이 유존사(猶存社) 이다. 이들은 일본 제국의 근본적 개조와 아시아 민족의 해방을 슬로건으로 삼아, 군인과 청년들 틈으로 파고 들어갔다.특히 신형 우익의 대표적 이데올로기로서 군림했던 기타 잇키는 저서 을 통해 일본 개조를 전제로 하여, 천황 대권의 발동에 의한 헌법?의회의 정지와 천황을 정점으로 한 군사 정권의 수립을 구상했다. 일정 정도 이상의 재산 몰수, 토지 분배,
처음에 제목을 보고 서양인이나 일본인이 책을 냈을 것이라 생각하며 보게 되었는데 너무나 내용이 객관적이어서 글을 읽다가 중간에 글쓴이를 확인하게 되었는데 원저의 글쓴이는 백양이라는 중국의 역사학자로 중국인이었다.이 책은 일본인이 번역한 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했다는 점이 특이하였고 글쓴이 백양은 자국을 ‘된장 항아리’라 표현하고 한자를 바탕으로 한 文化를 통해 중국적인 것이 전파되고 확대되었다고 말한다. 소수민족들의 집합체인 중국은 20개 이상의 소수민족어가 있는데 각각 읽는 방식이 다르고 외국어를 중국어로 표기할 때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 될 수 있는 점 때문에 언어의 수출은 쉬운 반면 수입은 어려운 문제라고 하였다.저자는 민족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스스럼이 전혀 없었다.그것은 책의 제목과 소주제를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자기 나라의 민족에 대해 추악하다는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자질을 갖추고 있음에도 우매함을 보이는 현상에 안타까워하고, 그것을 시정하고자 노력해야한다고 역설한 점에서 중국에 대한 애정도 엿볼 수가 있었다. 또 책을 읽으면서 공감되었던 부분은 내 주변의 사람들과 내가 느끼고 있는 중국인의 특징인 소란스러움과 무질서와 불청결한 점들을 글쓴이는 정말 객관적으로 집어내었다는 것이다. 자국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자기나라의 현실을 피하거나 긍정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현실적인 시각으로 중국을 보려한 저자의 관점에 대해 읽을수록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내부 충돌이 많고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나오면서 선거 유세에 대한 이야기가 잠시 언급되는데 우리나라와 무엇이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자기의 장점과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 중점을 두기보다 서로 헐뜯고 상대를 어떻게 하든 깎아내리려고 하는 모습은 지금 현재의 정치판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문제가 되었던 BBK 사건도 이런 것들의 일부가 아니겠는가..정치판에서 싸우는 모습도 미디어와 인터넷 등을 통해 너무나 쉽게 볼 수 있다.미국에서는 정치가들도 서로의 정책을 인정하고 자신의 추진 정책을 강조할 뿐이지 여만적인 공격을 하거나 상대의 단점만을 찾아내어 밝히고자 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미국에서는 추악한 미국인이라는 책이 나와 큰 반향을 일으키고 국무부에서 중요한 자료로 썼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만약 추악한 한국인이란 표지의 책이 나오면 어떨까?민족주의 애국자는 아닐지라도 아직까지 추악한 한국인의 내용을 곧이 곧대로 믿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책 검색창에 추악한 일본인, 추악한 미국인, 추악한 중국인은 곧바로 뜨고 정보가 많은 반면에 한국인에 대해서는 자료를 찾기가 힘들다.그나마 블로그나 인터넷 까페 등에 작게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고 이를 고치자고 하는 신지식인들도 있으나 이마저도 찾아보기 힘든 사정이다.글쓴이는 미국과 일본을 비교로 하여 자국의 현실을 말하였는데, 중국이 아편전쟁을 치욕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일본은 미국에 의해 문호개방 된 것을 굉장한 이익 그리고 정신적인 분발을 하는데 출발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의 문호개방에 대한 생각과 일제시기에 대한 시각의 편협함을 떠올릴 수 있었다.저자는 중국인들이 현실직시를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고 반성하는 모습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중국인들은 영리하고 총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문화적 습성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그 원인으로 비효율적인 한자사용과 인구과잉으로 인한 내부충돌과 혼란, 빈궁이 심각해지는 점 , 또한 전족과 정장제도, 인육식, 관장, 유교정신의 폐해 등을 논하였다. 서로 눈치만 보고 진실을 숨기고 의심하고 속이려고만 하는 현실에도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내용 중에 인상적이었던 일화가 몇 개 있었는데 케네디 공항에서 글쓴이가 비행기 안에서 잠시 자다 깨보니 비행기가 아직도 상륙전이어서 놀라 주위에 물어보니 파업을 단행중이어서 한 시간 이상을 지체하고 있었다는 내용이었는데, 그 때 미국인들은 화를 내기보다 웃고 농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이 부분에서 한국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났더라면 하고 생각을 해보았는데 결과는 뻔하게 사람들은 빨리 출발하지 않느냐고 소리를 지르고 혼잡해지고 심한 경우 다른 이동수단을 이용하거나 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누가 배려를 해주고 상대적으로 조종사가 파업을 할 수 밖에 없는 입장에서 생각해 주었을까.. 부끄러워졌다.다민족 국가인 만큼 그 도량이 큰 모양이다.또 중국에서는 법률에 대해 자기만 예외라 생각하고 무책임하게 행동하면서 ‘멘쯔’만을 중시한다. 자신의 체면과 존엄만을 생각하고 남을 칭찬해주거나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주는 일은 잘 없다. 그리하여 모든 일들을 그냥 지나치게 되면서 과오를 시정하는 힘을 잃어가고 있다. 글쓴이는 미국과 일본을 예로 들면서 모든 것을 따라 하자는 게 아니라 그 나라의 잘난 점은 본을 받고 칭찬할 것은 칭찬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우리나라도 이와 같은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틀에 박힌 사고에서 벗어나 여러 국가의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부분들을 올바르게 흡수 시킬 수 있는 소화 흡수 능력이 필요할 것 같다.중국이 근대화가 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현대문명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태도, 그리고 애정을 강조하며 그 범위가 무한정 확대되어 있는 기준 없는 체벌, 중국이 가장 강대하고 거대한 나라라고 생각하고 자기만족과 교만에 빠진 사람들, 청결하지 못한 습관들, 웃음이 생활에 배여 있지 않고 늘 무뚝뚝한 표정,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는 태도 등을 꼽았다. 서로 부딪치면 미국에서의 경우처럼 혹은 일본에서의 경우처럼 미안합니다 라고 하기보다 서로 자기감정을 드러내며 싸우기 바쁜 중국인들에게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말할 줄 아는 용기도 필요함을 역설하였다.미국에서는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겠습니까? 라고 실천적인 행동이 포함된 말을 자주하며 이러한 것들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여기에 대해서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우리나라도 아직 진심으로 활짝 웃는 표정이 좀 부족하고 틀에 박힌 사고 방식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나서 조금 씁쓸하였다. 또 책에서 본 일화 중 생각하는 것이 글쓴이가 대북에서 미국 친구와 영화를 관람하던 도중에 관객 한명이 영화를 보다가 쓰러졌는데, 이에 영화관 직원들이 나타나 그 관객을 이동시켰다. 글쓴이는 당연히 병원으로 실려 갔거나 응급치료를 받았겠거니 생각했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가는 길목에 보니 그 관객이 출입구 쪽에 그 상태로 버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이를 보고 도와주려하거나 관계자에게 말하려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정말 충격적인 일화가 아닐 수 없었는데, 이러한 이야기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말할 수 있는 글쓴이의 용기에 한번 더 놀랐다. 우리나라와 비교해서 또 공감이 갔었던 이야기는 줄을 서는 행동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예를 들어 버스를 기다리면서 줄을 잘 섰다가도 막상 버스가 오면 서로 막무가내로 먼저 들어가려고 아등바등한다던지, 좌석에 앉기 위해 무질서하게 행동하는 부분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지금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또 항상 "빨리"가 습관처럼 입에 붙어 있고 생활방식도 그에 맞게 자리해 있다. 지위나 부의 관계 그리고 장래성을 중시하며 사람을 대하는 중국에서는 연회나 장례식 등에 지위가 높은 주빈들 근처에 앉기 위해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다는 말도 조금 공감이 갔다. 그렇게 심하지는 않더라도 사회의 회식이나 소규모 집단의 모임을 보더라도 직위가 높은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아양을 떠는 우리나라의 모습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지금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는 중국이라는 나라는 지리상으로도 우리나라와 가까울 뿐만 아니라 예전부터 우리나라와 함께 길을 걸어온 나라로 서로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다. 중국이 개혁ㆍ개방 경제를 추구하고 한국도 FTA 등으로 국제적인 교역의 증가가 이루어지면서 서로 간 교역도 증가했고. 최근에는 한국의 기업들은 중국 내에 광대한 대지를 근간으로 거대한 시장을 확보하고,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한류 스타 열풍으로 드라마나 사진, 영화 등이 중국에 퍼지면서 예전보다 더 많은 교류가 이루어지고 친밀감이 생기게 되었다. 중국 또한 거대한 인구와 영토에 잠재되어 있는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에 생산되는 물품도 많아졌고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교환학생 제도와 유학의 증가로 한국인은 중국인을, 중국인은 한국인을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밀접한 관계에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거나 놓치고 있는 부분들을 이 책에서 말해주고 있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세계화가 진행되고 특히나 아시아권에서의 생활권 거리가 점점 좁혀지면서 알아야 할 부분에 대해서 하나하나씩 짚어주고 있다.또 내용이 어렵고 까다롭지 않고 생각보다 재미있고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아서 읽으면서 지루해하지 않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찬찬히 살펴본 것 같다.우리나라는 대체로 중국과의 관계에서 오랫동안 사대관계를 유지해 왔고 이것은 중국의 한자와 유교의 사상적인 측면부터 시작해서 문화전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그리하여 우리나라와 비슷한 측면도 무시 못할 정도로 많은 반면, 현재의 중국과 한국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정도의 다른 면모들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물론 엄청난 땅 덩어리 안에 수십억이 살아 숨쉬고 있는 거대한 나라 중국 안에서 중국인들에 대해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고 마찬가지로 그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의 성격 혹은 특징을 잡아 표현하는 것도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연구로 인해 우리는 함께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이 책의 저자는 소노다 시게토로 일본인이었는데 그는 중국을 이해 할 수 있는 키워드를 몇 가지 제시하면서 글을 이어 나갔다.특히 실제 경험과 조사를 통한 풍부한 사례를 통해 이해하기가 더 쉬웠다.처음에 나온 주제는 중국인의 행동 이해하기였는데 다가갈수록 알 수 없는 중국인에 대해 중국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를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갔다.크게 중국인이 행동하는 방식의 주안점을 체면 그리고 사회 내에서의 관계, 인정이라고 분류하고 보았다.목소리도 크고 예외도 물론 있지만 아직까지는 불청결하다고 여겨지는 이해할 수 없는 중국인들에 대한 서술이 첫 부분에 나오고 그런 행동양식들이 왜 나타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살피는 내용들이 뒤를 이어 나오고 있다.학교 수업시간이나 책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서로 간의 관계를 맺을 때에도 상대가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가 안 되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관계를 맺으며 체면 때문에 행하여야 할 일도 무심코 넘어가는 일이 많다.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인간관계를 이용하는 것을 중국어에서는 '관계를 끌어들이다' 또는 '관계를 잘 해 놓다' 라고 하며, 관계의 네트워크를 '관계망' 이라고 한다. 관계망을 잘 이용하는 기술을 배우는 것을 '관계학을 배우다' 라고 말하는데, 이 관계학이야 말로 중국에서 생활하는 데에 필수적인 처세술이자 중국적인 인간관계의 표본이라는 의견이 많다.또 중국 존대함의 자존심을 매우 중요시하여 자신이 속한 그룹이나 자신이 뛰어난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다.지위와 부와 지식의 우선순위로 꽌시를 결정하는 중국인들에 대해 뒷부분에 가서는 체면과 관계를 연결시키는 인정에 주목하고 그 구체적인 작용을 검토해보고 중국인의 행동문법인 관계주의 모델을 제시한다. 또 체면, 인정, 관계를 중시하는 중국인의 행동을 파헤치기 위해서 그러한 특징이 만들어진 배경과 사회적인 특성, 나아가서 사회 정치까지 파헤쳐 봄으로써, 중국인뿐만 아니라 중국이라는 나라의 사회적인 특징도 해석해낸다.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저자가 일본인인 만큼 일본과 중국의 상호 이해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다루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면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이해 할 수 있는 눈이 더 커질 것이다.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수업시간에도 교수님이 말씀하신 적 있지만, 남녀가 함께 밥을 먹자고 하는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별다른 의미 없이 식사 한끼 같이 하는 것이지만 중국에서는 식사를 함께 하자고 하는 것이 남녀 간의 호의를 가지고 만나자는 그런 얘기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나라가 더 개방적인 게 아닌가 싶었다.가까이에 있는 나라이지만 독특한 부분이라 생각되었다.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우연한 기회에 홍콩과 北京을 방문했었던 기억이 났다.한번은 가족들과 고등학생 때 북경을 갔던 일이었고 또 한번은 대학교 3학년에 엄마와 함께 한 홍콩여행이었는데 중국의 수도와 그리고 英國의 지배아래 엄청난 발전을 이룩한 홍콩에 대한 관광시기는 달랐지만 중국인들에 대한 생각이나 인식은 비슷했던 것 같다.넓은 땅과 거대한 건축물, 많은 사람들의 엄청난 자원을 가지고 있음에도 멀리서도 한눈에 알 수 있는 떡진 머리와 옷은 갈아입는 것인지 가까이 가지 않아도 퍼지는 악취, 그리고 주변을 신경쓰지 않는 듯한 행동들.. 물론 홍콩에서는 훨씬 덜했었지만 날씨가 매우 더운 때에 샌들을 신고 있는 여자의 발을 볼 수가 있었는데, 발톱과 발가락에 끼어있는 때를 보고 기겁을 했었다. 청결상태에 있어서는 건강과 위생문제만 보아도 아직 더 노력을 해야 할 것 같다.현실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중국인들에게 아이러니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중국사람들은 체면과 현실 중 어떤 것을 더 따질까? 하는 의문점이 들었는데 그들의 기질로 보아 현실적인 부분을 더 중시하여 선택할 것으로 예상되었다.그리고 ‘추악한 중국인’이라는 책도 읽었었는데 이 책과 비교 하였을 때, 이 책에서는 중국인에 대한 새로운 부분인 즉 인정이라는 모습에 대해 읽으면서 인적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면모를 관찰 할 수 있었다.관계를 지탱하는 감정적 기반으로 친밀함과 소원함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속을 잘 내비치지 않고 의심이 많아 상대방을 쉽게 믿지 못하는 중국인들이 굳이 따지자면 현실적인 새로운 개념의 인정이지만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로 신선하였다.또 이외에도 중국인들은 현실적이고 금전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은 만큼 도박에도 관심을 보이는데 홍콩의 경우 축구와 같은 경기에도 금전거래가 되고 월드컵이나 큰 경기의 경우 걸리는 액수가 더 많다고 한다.지난번의 홈에서 펼쳐졌던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4승을 하였을 때 중국인들은 우리나라 상대편에 돈을 다 걸었다가 돈을 다 잃었다고 한다. 그 때 우리나라의 진가를 알아보게 된 그들은 다음 월드컵에 프랑스와의 접전으로 1:1 무승부 그리고 토고와의 승리 등으로 또 대한민국의 승리를 확신하고 네덜란드와 경기에서 우리나라에 엄청난 금액을 걸었다가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고 하는 재미난 이야기도 들렸다.
- 산미증식계획과 1920년대 식민지 농정 -< 목 차 >Ⅰ. 머리말(연구 성과)Ⅱ. 1920년대 식민지 농정1.1 ? 2차 산미증식계획(1)1차 산미증식계획(1920~25년)① 전개과정② 결과 & 성과(2) 2차 산미증식계획(산미증식 경신계획 : 1926~34년)① 전개과정② 결과 & 성과2. 수리조합사업(1) 수리조합의 등장배경(2) 수리조합사업의 추진과정과 결과Ⅲ. 3차 산미증식계획(전시증미계획)1. 조선증미계획(1940년) & 개정증미계획(1943년)Ⅳ. 맺음말Ⅰ. 머리말 (연구 성과)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경제적 수탈이었다. 즉, 일제는 조선의 경제를 완전히 일본경제에 예속시킴으로써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경제정책은 토지의 침탈로 이루어졌고, 1920년대에 들어오면서 조선으로부터 식량, 특히 쌀을 대규모로 약탈해가는 방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당시 일본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독점자본이 급성장하였고, 일본농촌의 희생이 강요되어 쌀값이 폭등하고 쌀소동이 일어나는 등 일본의 식량문제가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은 일본자본주의 발전에 필요한 저미가 ? 저임금체제의 구축을 위해서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게 되었다.1920년대 일제의 식민지 농업정책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산미증식계획의 문제에 집중되어 이루어졌고, 그중에서도 1?2차 산미증식계획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들 연구의 대부분은 산미증식계획이 기본적으로 일제의 식량문제 해결을 위해 계획, 시행된 식민지 미곡수탈정책이었고, 토지개량과 농사개량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다. ‘임병윤’의 연구가 산미증식계획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 연구인데 그의 연구에서는 한말부터 산미증식계획 기간에 이르기까지 일제가 한국농업을 상업적 농업으로 재편하면서 식민지 농업수탈을 수행한 사실을 실증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신용하’의 연구는 일제에 의한 미곡 수탈량 못지않게 사업 시행과정에서 이루어졌던 노동착취 등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업보조규칙', '조선공유수면매립령'을 공포해 사업의 진행을 뒷받침하여 9만 정보를 개간하려 하였으며, 농사개량부분에서는 종래에 있던 권업모범장)과 종묘장에 대한 시설쇄신과 더불어 조선 풍토에 맞도록 신품종 육성, 장려품종지정, 보조금 지급, 5년 주기 우량종자 보급, 자급 및 판매비료 사용 장려를 통해 9백만 섬의 쌀을 증산 그 중 반을 내수소비하고, 나머지를 일본으로 가져가려던 계획이었다.② 결과 & 성과일제는 1차 산미증식계획으로 15년 동안에 총공사비 2억 4000만 원을 들여 42만 7000정보를 개량하고 연간 약 900만 석을 증수하여 그 중 460만 석을 일본으로 가져가려 하였다. 그러나 1925년까지 공사착수 예정면적의 59%인 9만 8000 정보 가량이 착수되고, 준공 예정면적의 62%인 7만 6000 정보가 준공되었으며, 농사개량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욱이 경종법의 개량, 시비의 증가가 수반되지 않아 공사 완성후의 수확이 예정에 못 미치는 등 실행 상 여러 가지 장애가 있었고 사업의 진전도 기대하는 바와 같이 되지 않았다. 이처럼 계획이 부진했던 이유는 불황으로 사업자금 조달이 어려웠던 점, 특수회사가 설치되지 않은 점, 토지개량에 의한 수익보다 토지 소유에 의한 수익이 높았던 점 그리고 농민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토지개량공사로 하여금 밭을 논으로 전환하는 사업, 관개시설 개선사업, 간척사업 등 소위 ‘토지개량사업’을 할 수 있는 자금을 지주들에게 융통해 주도록 함으로써 쌀 생산을 증가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토지개량사업은 거대한 자본이 장기적으로 필요했고, 자금의 이자율(9.5%~11%)과 소작료율(50~60%)이 높아서 민간자본을 토지개량에 동원하기 보다는 개간된 토지구입에 투자하는 것이 더 유리하였다. 또한 지주에게도 개량보다는 땅을 늘려 소작을 주는 것이 지주에게는 이익이었으므로 지주들의 참여가 저조하였다. 이외에도 전후공황. 물가등귀에 대한 공사비의 증대. 정부알선자금의 절대적 감소, 시중 금리의 상승. 적으로 볼 때 1920년대 후반에는 양호하고 1930년대 전반에는 부진하였던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처럼 1930년 이후 토지개량사업의 실적이 저조해진데에는 한편으로는 공황기의 미가저락으로 인한 수리조합의 경영악화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토지개량사업을 위한 정부알선자금의 공급이 1926~29년 누계 78%에서 1930~33년 누계 56%, 1934~37년 누계 9%로 급감한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이후 정부알선자금의 공급이 부진하게 된 것은 1930년대 초부터 일본농촌사회에서 일어난 조선미 이입반대 움직임과 이에 따른 계획의 중단요구 압력 때문이었다. 계획의 추진기구 자체도 1931년 동척 토지개량부가 폐지되고 1932년 산미증식계획 수행의 특무기관이던 총독부 토지개량부가 폐지된 채 사무는 농림국 소관으로 이관. 축소되었다.제2차 산미증식계획에 의하여 조선미곡생산량은 상당한 증가를 보였고 특히 이 기간 중의 대일본곡수출은 격증했다. 일본의 쌀값 하락과 그로 인한 일본으로의 쌀 이입 통제는 조선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쌀값은 1926년 백미 100근당 35엔에서 1931년 15엔으로 폭락했다. 농업공황으로 인한 쌀값 하락은 농가경제를 어렵게 만들었다. 1929년에 조선총독부가 자소작농. 소작농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조사대상 농가의 75%가 부채농가였다. 소작농민들 가운데서 채무가 누증되어 소작지를 차압당하는 경우가 1930년에는 8,144건, 1931년에는9,991건이나 되었다. 1930년대에 조선농회가 주로 상층농가를 대상으로 실시한 농가경제 조사에서도 대다수의 농가는 적자상태에 있었다. 조선총독부 조사에 의하면 1930년 현재 전체 농가의 절반가량, 소작농가의 70%가량이 춘궁(春窮)농가였다.지주들은 농업공황 타개책으로 소작농에 대한 수탈을 더욱 강화하려고 한 반면, 농민들은 붕괴위기에 놓인 자신들의 경영기반을 지키기 위해 지주의 일방적 수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농민운동이 급속히 고양되었다.과 1937년까지의 증산실적은 총 증수량에서는 계획의 50%에 불과했으나 단보당 증수량에서는 93%의 달성률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물론 예정계획에 비해서는 부진하였지만 1920년대를 통해 어느 정도 진전된 토지개량사업의 성과가 1930년대 중반 이후의 농사개량사업의 성과와 결합됨으로써, 비로소 상당 정도의 미곡 토지생산성의 향상이라는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2. 수리조합사업(1) 수리조합의 등장배경우리나라에 수리조합)제도가 도입된 것은 1906년이었다. 당시 일본인 대지주들은 수리시설이 불안정한 열등지나 미간지를 헐값에 사들여 이익을 꾀하려 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관개수(灌漑水)의 확보가 절실한 문제였다. 이 문제를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일본 대지주들의 개발요구와 일제의 안정적인 쌀 증산의도가 맞물리면서 제도의 도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910년대의 수리조합사업은 일제의 재정부족으로 적극적인 조성책을 펴지 못해 1908~1917년 동안 설치된 수리조합이 14개소에 불과하였을 정도로 부진하였다.)그러다가 1917년 「조선수리조합령」)을 제정하면서 일제는 다시 수리조합사업의 육성을 꾀하기 시작하였다. 수리조합에 대한 관의 영향력을 대폭 강화하여 그 감독을 군수 → 도장관(도지사) → 조선총독이 하고, 감독상 필요한 명령 또는 처분을 할 수 있게 했다. 또 조합장은 도지사가 임명하고 평의원의 선임에 대해서도 도지사의 인가를 받게 하였다. 일제는 수리조합을 철저한 관의 통제와 감독 하에 둠으로써, 사실상 총독부 하급기관으로 전락시켜 식민지 농업정책을 펴나가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다.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일본 내의 쌀 수급불균형 문제가 심각해지자 일제는 산미증식계획을 통해서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논농사는 대부분이 강우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리조합사업을 통한 대규모 토지개량사업이 수반되지 않는 한 쌀 증산뿐만 아니라 일본품종의 보급이나 비료 증시의 농사개량도 기대할 수 없었다. 즉, 본격적인 산미의 증산을 추진확산되면서 사업의 파탄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일제는 수리조합정책을 전면적으로 수정할 수밖에 없었고, 동척의 토지개량부폐지(1932), 산미증식계획 중단(1934), 조선토지개량회사 해산과 불량수리조합의 정리실시(1935) 등으로 이어지면서 그동안 일제가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던 수리조합육성책이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Ⅲ. 3차 산미증식계획1937년 일어난 중일 전쟁으로 인해서 일본의 식량정책이 바뀌게 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부터 전쟁을 위한 군수공업의 활성화로 비료 공급 감소, 군용말 징발, 징병에 의한 농업노동력감소 등으로 인해서 농업생산량에 차질을 빚자 ‘농업생산력 유지 증진’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전시기 미곡 증산정책은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지지만 구체적인 증산 방법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전시기(戰時期)라는 특성상 식민지지주제를 확대 ? 발전시켰던 산미증식계획 때와는 달리 지주들과의 이해관계보다는 효율적인 증산과 군수식량 동원이 주목적이 되어 증산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지주들의 경제력 역시 동원 ? 활용하였다. 또한 토지개량사업과 같은 대규모의 자금과 노동력이 필요한 사업보다는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날 수 있는 방법이 연구되었다.1. 조선증미계획(1940년) & 개정증미계획(1943년)1940년부터 적극적이고 장기적인 미곡증산계획으로서 1940~1945년까지 6개년 계획으로 ‘조선증미계획’을 실시하였다. 조선증미계획은 경종법 개선)과 토지개량사업)을 병행 실시한다는 것을 기본방법으로 설정하였다. 다만 전시 하에서 산미증식계획에서와 같이 대규모 수리사업에 의한 증산은 계획할 수 없었으므로 경종법 개선에 의한 것이 75%, 토지 개량에 의한 것이 25%로 하여 경종법 개선에 중점을 두는 방법을 사용하였다.계획완성년차(1950년)1945년증산목표수량680만석583만석- 경종법개선에 의해- 토지개량에 의해511만석(75.1%)169만석(24.9%)463만석120만석총생산수량3,005만석2,904만석경종법 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