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줄거리-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고 있는 영화의 주인공인 찰리채플린은 공장에서 나사조이는 일을 하고 있다. 빠르게 움직이는 기계들 때문에 찰리에게 잠시의 짬도 나지 않는다. 기계처럼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찰리도 기계화 되어 나사처럼 생긴 모든 것들을 조여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빠져 버린다. 강제로 정신병원에 보내어 졌다가 퇴원했지만 이미 공장에서는 해고되어 일자리를 다시 찾아야 했다. 거리를 방황하던 그는 우연히 파업 데모대의 무리 속에 섞이는 바람에 주모자로 오인되어 감옥에 갇히고 만다. 몇 년 후 석방되어 조선소에 취직을 한 찰리는 완성되지 않은 배를 진수시키는 바람에 도망치게 되는데 마침 선착장에서 빵을 훔치다가 들킨 아가씨를 도와 함께 달아난다. 아가씨와 단란한 가정을 꿈꾸며 여기 저기 일자리를 찾아 헤매지만 여의치 않았다. 쫓는 사람들과 도망치는 찰리는 이런 저런 소동에 휘말려 번번이 직장을 잃게 되고 결국 아가씨와 함께 떠돌이가 되어 길을 떠난다. 그러나 그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들이 가는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희망을 찾아가는 것은 분명했다.소감 및 평가-노동자들이 공장으로 출근하는 모습을 축사로 끌려 들어가는 양떼처럼 표현한 것은 자기 자신의 의지로 출근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자본가의 의도에 따라 또는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공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노동자의 권위나 권리가 없음을 미묘한 방법으로 표현하였다. 자본가는 커다란 스크린으로 노동자들을 감시하고 또 감시한다. 공장 내부의 모습을 감시와 속박, 노동자의 절대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장소로 부각시키는 수단으로 감시 스크린을 사용한 것 같다. 요즘 시대를 생각해 보면 도난이나 불의의 사고를 방지한다는 목적으로 사무실과 복도 등, 빌딩 자체에 무인 카메라를 시스템을 설치하고 일하고 있는 근로자들을 지켜보는 일부 기업들의 모습을 80년 전에 벌써 우려의 눈빛으로 걱정했던 것이 아닐까? 최소의 시간에 최대의 생산을 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숨쉴 틈조차 주어지지 않았고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체크를 받아야 하는 모습, 화장실에서 담배라도 한 대 피우려 하면 한쪽 벽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서 자본가의 불호령을 치는 모습은 그 시대의 노동자들과 자본가들과의 관계, 즉 감시와 속박, 억압을 상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점심시간에 사용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자본가는 작업 중에 급식을 할 수 있는 기계를 설치하고 채플린을 시험대상으로 하는 장면에 있어서는 인간의 도구화와 존엄의 상실을 또한 비추고 있다. 자동 급식기계는 고장이 나고 광폭 해져 채플린에게 음식물을 집어 던지고 그를 폭행하기도 하는데 이는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에게 속박당하는 모습을 단적으로 암시한 것이다. 또한 채플린이 기계의 기억 속으로 먹혀 들어가는 모습은 이 영화의 포인트라 할 수 있는데 전체적인 현대 산업 속의 노동자들의 모습을 강하게 대변한 것이 아닐까. 자동화되는 일터는 실직자를 대량으로 생산해 내고 공장 밖에서 대기하던 노동자들은 기계들에게 자신의 일터를 잃어가는 사회의 모습을 지적하였고 그들은 노동자의 인권과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시위를 벌이게 된다. 굶주림 때문에 빵 하나를 훔치는 사람도 있고, 시위를 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 이들도 잠깐씩 보이고 있다. 그러한 일들 때문에 거리에는 경찰관들이 자주 보인다. 이런 장면은 자본가와 정부가 결탁되어 노동계급들을 억압한다는 점을 묵시적으로 암시하는 장면으로 지금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된다. 예전에도 몇 번 본 영화이지만 계속 봐도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그 시대상이 잘 나타나있는 영화이다.
3. 유랑가족 감상문유랑가족은 가난한 평민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가난 때문에 돈을 벌기위해서 다른 지역으로 가고 노래방에서 도우미로 일하기도 한다. 죽음이라는 벼랑 끝에 떨어지기도 한다. 이 소설은 1970년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유랑가족은 가을의 정취, 가리봉 연가, 그들의 웃음소리, 남쪽바다 푸른나라, 먼 바다 이렇게 5개의 각기 다른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하지만 전혀 다르지 않고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서 함께 돌아간다. 서로서로의 이야기는 사진작가 ‘한’이라는 중년 남성에 의해 하나의 필름처럼 이어나간다. 유랑가족의 첫 이야기는 ‘가을의 청취’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야기는 사보에 실을 사진을 찍기 위해 학원도 없고 컴퓨터도 없는 시골마을 신리로 간 사진작가‘한’에 의해서 시작된다. 배 사장에게 배신을 당하고 허승희라는 이름으로 노래방에서 일하며 사는 장명화, 장명화를 따라 돈을 벌겠다고 나선 서용자, 돈을 벌겠다는 명목으로 나와 서용자를 찾는 그녀의 남편 김달곤, 김달곤을 따라 서울로 올라와 공사판을 전전하고 있는 명화의 남편 기석, 장명화를 찾아 서울로 온 그녀의 원래 남편인 조선족 남자 용철, 용철은 또한 기석과 같은 공사판에서 일을 하고 있다. 이러한 기괴한 인연으로 이들은 맞물려 간다. 가을의 정취와 가리봉연가는 이러한 모자이크 구성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서로 다른 이야기지만 모아서 보면 서로 이야기는 이어간다. 이 소설은 헤피 엔딩이 아니다.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대로 살아간다. 문제만 찾고 그 해결점은 찾지 않는다. 노력을 하다가도 이내 포기하는 듯 하다. 희망 없는 가난한 농촌 사람들, 희망을 찾아 도시로 떠나지만 더 큰 절망의 굴레에 빠져드는 사람들, 제멋대로 방치되는 아이들, 돈 벌러 온 중국여성, 폭력 남편, 수몰지구 주민들, 소각장 반대 운동을 벌이는 도시 사람들. 소설의 인물들은 생동감이 없다. 유랑가족을 재밌게 읽었지만 가슴이 답답해진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말하지만 그냥 그게 잘못됐다고만 말할 뿐이다. 치열하게 밀고 나가지 않는다.유랑가족에서 말하는 가난은 후기산업사회의 피폐한 농촌과, 농촌사회의 해체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도시빈민의 삶, 거기에 얽혀 든 동포와 외국인들의 가난이다. 이러한 가난은 병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가난이라는 것은 더럽고 게으른 사람들이 가지는 병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가난이라고 하면 치를 떨 정도로 거부감을 보인다. 언제부터 우리가 가난을 거북스럽게 느껴왔는가. TV를 포함한 대중매체에서는 가난한 사람보다는 부를 가진 대기업의 사장의 자식들이 주인공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난한 사람보다는 부자와 잘되길 바라고 부자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존경을 받는다. 요즘 사람들은 먹고 살기가 넉넉함에도 불구하고 불우이웃돕기의 성금에는 인색하다. 자기들의 미용에는 돈을 흥청망청 쓰는 반면에 거지들이 구걸을 하면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 사람들이 못 먹고 못사는 것은 자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살기도 빠듯한데 다른 사람 입까지 챙겨야 하냐는 것이다. 가난한자는 고개를 숙이고 부자는 고개를 들고 어깨에 힘을 준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네 번째 이야기인 남쪽바다 푸른나라는 영주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한이 취재하다가 알게 된 영주는 소년가장이다. 한의 아내는 자기의 자식이 병원에 있는데도 오지 않는 한이 야속하다고 한다. 영주는 할머니와 같이 살고 있었지만 위암말기로 인해 갑자기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없는 집에 혼자 남겨 진 영주를 딱히 여긴 한이 부인에게 같이 살면 안 되냐고 했더니 우리가 먹고살기도 힘들다며 역정을 낸다. 이것은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대하는 일반적인 태도이다. 딱한 사정은 알지만 그렇다고 피도 섞이지 않은 아이를 어떻게 키울 수 있냐고 한다. 어렵사리 수소문한 끝에 영주의 고모인 김귀옥의 주소를 알아내어 영주는 고모와 같이 살게 된다. 몇 년 후 한은 취재 때문에 섬으로 가게 되는데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영주를 보기위해서 학교로 찾아간다. 거기서 교장에게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된다. 태풍으로 인해 배가 뒤집혀 사람들은 죽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주의 행방은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영화, ‘괴물’‘괴물’은 의외로 시시한 영화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어설퍼 보였다. 보통 괴물은 덩치가 크고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며 사람이 상대도 하지 못하는 그런 무시무시한 존재이다. ‘괴물’에서의 괴물은 컨테이너 박스의 크기도 채 되지 않고, 기껏해야 한강에서 돌아다니는 사람을 잡아가고 죽이는 것뿐이다. 눈이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를 참 희한하게 생긴 괴물은 사람을 입속에 넣고는 유유히 사라진다. 또, 꼬리에 사람을 감고 말이다.이 영화는 긴박한 장면에서 웃기게도 뽕짝이 나오는가하면, 클래식이 나오고 어울리지 않는 음악이 나온다. 병원 주차장에서 쫒기는 장면은 뽕짝이 크게 흘러나오는데, 코미디가 아닌가 하고 의심도 해보았다. 극적인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음악이 서로 만나면 더 긴박해 보인다는 감독의 의도였을까.주한미국 용산 기지의 영안실에서 독극물을 무심코 하수구에 버리면서, 한강의 돌연변이가 생긴다. 그 돌연변이가 이 괴물일지는 잘 모르겠지만(그 과정을 보여주지 않았으니), 짧은 기간에 급속도로 커진 괴물은 자기의 모습을 너무나 빨리 보여준다. 원래 괴물이 나오는 영화라면, 관객들의 궁금증을 유발하고 중반부쯤에 나와야 정석이다. 꼭 정석이라기보다는 이때까지 그래왔다. 봉준호 감독은 이 룰을 깼다. 괴물보다는 괴물을 맞서 싸우는 가족들에 더 초점을 둔듯하다. 가족이라는 이름은 아주 강하다.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 고모는 현서를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어둡고 음침한 한강으로 향한다.영화는 괴물이 나온 이후로 계속해서 비가 내린다. 이 비는 기쁨의 비도 아니고, 슬픔의 비(어떻게 생각하면 슬픔의 비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도 아니다. 이 영화에서 끊임없이 내리는 비는 괴물과도 어울린다. 음침하고 어둡고 눅눅하기 까지 하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한강의 모습은 밝지 않다. 양지가 아닌 음지에서 카메라는 돌아간다. 어둡고 습하고 냄새가 여기도 날 것 같은 하수도는 이 영화에서 딱 어울리는 장소이다.현서가 살아있다는 전화를 받은 강두는 경찰에게 현서가 살아있다고 하지만, 경찰은 절대로 믿지 않는다. 아무도 강두의 말은 믿지 않는다. 외국인 의사가 강두에게 현서가 살아 있다고 물었을 때, 외국인 의사는 강두의 뇌 속에 바이러스가 침투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웃긴 것은 그 뒤에 의사의 말이다. 기밀사항이라고 말한 얘기는 바이러스는 아무데도 없다는 것이다. 바이러스도 없는데, 사람들은 격리하고 환자취급을 하는 것이다.괴물이 한강에 나온 직후에 방송 된 뉴스들은 괴물과 접촉한 사람들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고 쉽게 단정 짓는다. 이에 사람들은 쉽게 바이러스라고 생각한다. 언론이 사회를 좌지우지 한 것이다. 용산 기지의 영안실의 하수구에 버린 독극물로 인해서 생겨난 돌연변이는 자기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사회가 버린 쓸모없는 것이 만들어낸 괴물이다. 사회가 낳은 생산물이 사회를 휩쓴다. 쓸모없다고 버린 아주 위험한 독극물이 괴물을 만들어낸 샘이다. 현서의 삼촌은 믿을만한 사람의 도움을 받아 현서의 위치를 알아내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삼촌의 목에 달려있는 현상금을 가지기 위한 계략이었다. 믿을만한 형을 돈에 눈이 먼 사람으로 만든 이 사회는 너무나 추악하다. 꼭 다리 밑의 하수도 같이 말이다. 삼촌이 노숙자에게 병이 필요하다며 가방과 병을 주섬주섬 챙길 때, 그 노숙자는 병으로 머리를 힘껏 때리며 일어서서 말한다.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아?’ 이제 봉준호 감독이 사회를 비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의사, 119랑 경찰 죄다 데리고 올게’라고 말하고는 현서는 괴물에게 잡아먹힌다. 권력을 지고 있는 특권자들은 이 영화에서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전혀 쓸모없는 존재들이다. 괴물을 잡으러 가지도 않으며, 괴물을 잡기위해 목숨을 버려가며 쫒지 않는다. 아주 나약하고,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안이한 태도를 보인다.괴물은 총을 맞아도 죽지 않는다. 더 분노하며 사람들을 죽인다. 하지만 모든 괴물영화가 그렇듯이 마지막에는 괴물이 죽는다. 영화 ‘고질라’는 어렵게 고질라를 죽인다. 많은 병력을 투입하고 온 세상이 발칵 뒤집힐 정도로 떠들썩하다. 하지만 영화 ‘괴물’에서는 정부가 앞장서서 한다는 느낌은 받지 못한다. 사람들을 격리시키고 대비시키기에 바쁘며, 출입을 금지시키기에 급하다. 괴물을 죽이는 데에 노숙자가 큰 공헌을 한다. 권력자들이 사회의 쓰레기라고 불리는 노숙자가 말이다. 권력자들이 버린 것들로 인해서 생겨난 생산물을 쓰레기라고 불리는 노숙자가 해치우다니. 마지막장면에 강두와 남자아이가 매점에서 밥을 먹는다. TV 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아이는 뉴스가 재미없다고 끄라고 한다. 뉴스가 재미없다고 하는 아이는 그 나이 또래는 그렇듯이 아주 순수하다. 순수한 아이의 눈으로 본 뉴스는 재미가 없는 것이다. 뉴스는 볼거리가 없는 것이다. 사실만을 전하는 뉴스는 이 사회에는 존재 하지 않는다. 사실에 필요 없는 군더더기를 자꾸 붙여 말을 만든다. TV를 보고 있는 시청자들이 관심을 가져 시청률을 올리려는 오락프로그램처럼 보인다. 권력자들은 무관심하고 언론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우리는 태어나면서 처음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가족이다. 처음에는 그리 화목한 가족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매점을 지키는 강두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어리버리한 면이 있고, 삶에 의욕이 없어 보인다. 그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매일 나무라며 못마땅해 한다. 평범해 보이는 가족이 괴물을 죽이고, 영화의 주인공이 된다. 요즘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많이 파괴가 되었다. 대가족에서 핵가족화가 되면서 가족이 쪼개지더니 점차 혼자 살게 된 사람도 많아지고, 이혼하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강두의 아버지는 괴물에게 잡혀가기 전에 알 수 없는 미소를 띠며 손을 흔든다. 그렇게 괴물에게 죽임을 당한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우리사회에서 슬픈 존재이다. 가족의 가장임에 동시에 회사에서는 종노릇을 한다. 가정에서는 왕이 되고 회사에서는 신하가 된다. 하지만 요즘에는 남여 평등이다 머다 해서 가정에서 조차 여성과 같은 자리이다. 요리도 해야 되고 설거지도 해야 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느껴진 것은 부성애이다. 강두는 현서를 찾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목숨보다 아끼는 딸을 위해서 끝까지 찾아 나선다. 부성애는 모성애보다 절대 약하지 않다. 봉준호 감독은 ‘살인의 추억’을 찍은 감독이다. 잊혀져간 연쇄살인 사건을 들추어내 영화를 만들었다. 거기에서도 감독은 사회를 비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1. Cover letter 66-6 Yeongsan3-dong Yeongdo-gu Busan, KoreaA phone number:016-XXXX-XXXXNovember 24, 2006Mrs. HwangDong-A University Dear, Mrs. Hwang I want to enter school in a design school subject industrial Dong-A University. I kenw that Dong-A University want a new student to internet. I think that Dong-A University is well reputed college in Busan and especially, artistic college is famous. Therefore, I was applied to this college. I did a drawing in an institute for 2 years. I often won a prize in art contests and I got a gold statue at the art contests that supported in Dong-A University. Dong-A University needs an efficient person, and need a person abundant in experiences. I enjoy a challenge and work hard to attain my goals. Constant communication with all levels of management has strengthened my interpersonal skills. I will contact you next week to inquire about the possibility of an interview. Once again, thank you for your time and hel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