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중서(董仲舒)Ⅰ. 서론동중서는(董仲舒B.C 176~104) 한나라 초기의 사상계가 제자백가의 설로 혼란하고 유교가 쇠퇴하였을 때, 도가의 설을 물리치고 유교 독립의 터전을 굳혔다. 한나라의 통일 과업을 이루는 데에 유교를 중심으로 힘을 기울였으며, 유교를 한나라의 공식 이념으로 확립시키려고 노력을 하였다. 유교의 정통적 권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제도적 기반 마련에도 힘을 기울였던 그의 저서로는『春秋』를 전문적으로 연구하여,『춘추번로(春秋繁露)』,『동자문집((董子文集)』,『천인삼책(天人三策)』등이 있다.Ⅱ. 본론ⅰ.동중서(董仲舒)와 유교 국교화한나라는 정치적으로 진나라의 가혹한 법치의 유산을 이어받아서 초기에는 국가 부흥을 위해 휴식 위주의 정책을 펴고 도가의 무위(無爲)정치를 기본으로 한 소극적 정치를 시행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가 안정되어 감에 따라 농업 생산력도 회복되고 경제가 부흥되면서 무위의 정치보다는 의례를 중시하는 유가의 정치이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미 한 고조 유방이 예악을 받아들여 엄정한 법의 통치를 유학으로 장식하는 것을 선호했고, 무제는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구축해 감에 따라 그것을 사상적으로 지지해 주었다. 그리고 국가의 권위와 위엄을 갖추어 줄 기반을 유학에서 구하는 상황이었다.그리고 한 무제는 어렸을 때 유가사상을 배워 충분한 지식이 있는 유가에 속한 사람이었다. 이러 부분에서 다시 한 번 당시 제자백가 사상 가운데서도 유가가 왕궁에서 교육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그로 미루어보아 유가는 이미 백가 중에서도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러한 배경 속에서 한 무제는 여러 관리들과 많은 답문을 했다. 그 과정 속에서 한 무제는 동중서의 사상에 유가사상이 깊이 온축되어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한 무제는 그를 매우 중시하여 국정에 대한 그의 의견을 듣고자 했다. 동중서는 무제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책략을 많이 상주하였는데 그는 책략을 상주할 때마다 모든 제자백가의 이론을 배척하고 오직 유가사상에 기하고 보니 그 시대에 알맞고 사회와 대중을 이끌어 갈 수 있는 학술 사상이 필요하게 됨에 따라서 역사의 교훈을 더듬으며 찬술한 것이 6만여 자에 달하는 『춘추번로(春秋繁露)』인 것이니 그의 나이 56세인 B.C.120년의 일이다.-춘추번로의 내용『춘추번로』는 총 17권 82편으로 이루어졌다. 이 책은 전국시대의 혼란기에 수많은 사상가들이 글자 그대로 백가쟁명(百家爭鳴)의 혼란스러운 주의주장이 가라앉고, 진(秦)나라는 억압정치로써 짧은 시기에 망해버리고, 이어서 한(漢)나라의 등장과 함께 새 시대를 이끌어 가려는 의지 속에 지나간 역사의 흐름을 교훈 삼아 새로운 역사의 발전의식에 음양오행사상을 결합하고자 시도한 저술로서 분열되었던 넓은 국토와 분열되었던 백가의 사상을 대일통(大一統)으로 한나라 426년간의 기간을 이끌어 온 정치논리이며, 음양오행설에 의거한 재이설(災異說)과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 그리고 사관(史觀)을 정립(定立)한 역사철학서(歷史哲學書)이다. 또한 공자에 대한 신성화(神聖化)를 시도하였고, 유교를 종교화 시켰으며 지배자의 통치논리를 체계화 시켰다.)첫째, 동중서는 교육을 통해 개혁해야 한다는 취지를 내보였다. 그러한 개혁의 방법으로 대학을 장려하여 인재를 배양해 그들을 등용하고, 공로가 있는 관리는 모두 발탁하여 공자의 학설로 백성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방안을 내며 건의하였다. 즉, 이는 유교 교육 기관인 태학(太學)을 설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한 무제는 동중서의 이러한 건의를 받아들여 한나라에 대학을 설치하여 수재(秀才), 효렴(孝廉) 두 종을 신설하였다. 그리고 유교의 고전인 역(疫),서(書),시(詩),예(禮),춘추(春秋)의 오경에 대해 각각 전문적인 박사를 두고 제자들을 교수시켰으며 제자들 중에서 성적이 우수한 자를 낭중(郎中)으로 발탁하였다. 또한 지방의 군국(君國)에서 유교의 덕목인 효행이나 청렴한 행위를 실천한 사람을 한 명씩 천거시켜 선발을 거쳐 낭중에 임명하는 ‘효렴제’라는 관리 등용법을 개설하였다.둘째로, 천인감응론(天人感應論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이 무제의 생각이다.무제가 공식적인 책문을 통해서 천인관계에 대한 이론을 요구할 정도로 천과 인간의 관계지움은 당시의 일반적인 이해였다. 무제의 이러한 요구는 당시 거의 모든 분야, 예를 들면 자연과학 ? 의학 ? 천문학뿐만 아니라 유가 ? 도가 등의 사상계에까지 광범위하게 陰陽五行說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이다. 다만 사상계에서 그 관계를 정확한 근거를 통해서 논리적으로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무제는 신뢰할 수 있는 經典에서 천인관계의 이치를 도출하고, 그 출처를 분명하게 밝힐 것을 요구했다. 이것이 동중서가 『춘추』라는 절대 권위를 가진 경전을 연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당시의 일반적인 사고체계인 음양오행설을 흡수하여, 정치철학으로써의 춘추학을 제시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2. 天人感應論을 통한 天과 君主의 관계지움동중서는 황제지배체제의 확립을 통해서 왕조의 정통성과 군주권의 절대화를 이루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천인감응론을 바탕으로 춘추학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마련했다. 세밀한 논증 작업을 통해서 구축된 그의 천인감응론은 비록 내용상으로 음양오행설을 흡수함으로써 정통 선진유학의 틀에서 벗어났다는 비판을 받기는 하지만, 세밀한 논증 작업을 통해서 논리적 정합성을 구축하여 선진유학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의미의 학문을 이루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漢初의 우주론은 하늘과 인간은 같은 종류로써, 氣의 작용에 의해서 서로 같이 움직인다는 것이 기본 구조이다. 당시에는 음양오행설의 영향 하에 기가 세계를 성립시키는 기본 물질로 인식되었으며, 기의 작용은 인간의 性命 ? 언어, 심지어 정신이나 인식 등 모든 인간의 작용을 이해하는 데 사용되었다. 동중서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一元論的 기의 작용에 의해 同類가 서로 감응한다는 단순한 기계론적 우주관에 신비화되고 인격화 된 천의 존재를 설정하여, 의지와 의식뿐만 아니라 목적을 가진 초월적이고 의인화 된 실체로 천을 파악하였다. 이처럼 동중서의 천인감응론 속에는 어떠한 인격도 라를 이끌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결국 수명의 증거는 군주가 개혁 작업을 통해서 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과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형식적인 장치에 불과하고, 모든 것은 군주의 강력한 의지와 추진력에 달려 있다는 것이 동중서의 주장이다.② 災異說『춘추』의 정신인 ‘撥亂反正’에서 ‘亂’은 곧 인간 윤리의 파괴이자 올바른 정치의 실패를 의미한다. 『춘추』속에 기록된 천재지변은 바로 이러한 ‘난’이 천의 의지에 의해서 자연현상으로 드러난 災異이다. 따라서 ‘正’ 곧 대일통적인 통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천의 의지인 재이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발생했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를 분석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동중서는 이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춘추』에 기록된 각종 재이에 대해서 역사적 사실과 자신의 논리에 입각해서 철저하게 분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천인감응론과 결합시켜 자신만의 독특한 재이의 이론을 이끌어내어, 현실의 정치이론에서 군주의 역할을 규정짓는 춘추학의 이론적 근거로 활용했다.동중서는 천재지변의 변고에 대해서 질문한 무제의 책문에 대해서 우선 개괄적으로 재이의 의미를 이야기했다. 단, 여기에서 끌어들여 근거로 삼은 텍스트 역시 『춘추』이다.신이 삼가『춘추』의 내용을 검토하여, 이전 세상에서 이미 행해진 일을 살펴서 하늘과 인간의 서로 간여하는 사이를 관찰했는데, 매우 두려워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국가가 장차 도리를 잃어 패망하려 하면 하늘은 먼저 재해를 내보내어 꾸짖고 경고합니다. 스스로 반성할 줄 모르면 또 괴이를 내보내어 놀라고 두렵게 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바뀔 줄 모르면 피해와 패망이 이릅니다. 이로써 하늘의 마음은 군주를 사랑하여 그 혼란을 그치게 하고 싶어함을 볼 수 가 있습니다.재이 현상은 군주의 失政에 의해서 초래되는 것인데, 천인감응이라는 구조 속에서 천이 인간의 행동에 응해서 내리는 재이는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 있다. 항상 ‘異’가 먼저 발생하고 ‘災’는 異에 대한 군주의 반응에 따라서 결정된다. 즉 경고의 의미인 괴이한 현상에해서는 당연히 잘못된 정치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그것의 결과인 재이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춘추』는 이러한 재이를 매우 중요하게 여겨서 그것이 발생할 때마다 반드시 기록해 두었다. 『춘추』는 잘못된 정치의 전형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천재지변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 천인감응의 증거와 천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춘추』는 군주가 정치의 근본으로 삼아야 할 표준이자 인간과 하늘을 관통하는 이치를 담고 있다. 특히 선악의 극단이 하늘과 감응을 보여준다는 천인의 관계에서 포착해야 할 점은 하늘의 감응이 군주의 행동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다. 자연현상으로 드러난 재이는 하늘의 의지의 표현이지만, 그 의지는 결코 하늘의 독단에 의해서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 군주의 극단적인 행동에 대한 감응의 형태로 표출되는 것이다. 극단의 선에 대해서는 상서를, 극단의 악에 대해서는 재이를 보여줌으로써 일정한 감응의 패턴을 유지하고 있다.결국 동중서가 제시한 목적론적 천 개념은 천이 인격과 의지를 가지고 인간 세계를 지배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군주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라는 의지를 가지고 기에 의한 기계적 감응을 주재하는 존재로 설정된 형식적인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하늘의 의지의 표현인 재이는 정해진 규칙이 있기 때문에 군주가 그 패턴에 맞추어 행동을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천의 의지의 표현인 재이의 중요성이 아니라 군주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자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김춘봉에 의한 재이설의 의의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재이가 형식상으로는 天意의 표현이지만, 천은 자기의 감정에 따라서 임의로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군주의 행위에 따라서 기계적이고 필연적으로 감응이 결정된다. 따라서 천의 능동적이고 주재적인 작용은 크게 제한되고, 오히려 군주의 역량 ? 작용 ? 지위 등 주관능력 작용에 대한 중시와 강조에 의의가 있다.”『춘추』에서 재이를 많이 기록한 것은 군주로 하여금 그것을 단서로 삼아서 하늘의 뜻과 그 의지가 표출되는 였다.
샤를르 드골[1890.11.22~1970.11.9]1. 비시정부)와 자유프랑스제2차 세계대전, 독일군은 6월 5일 공격을 재개하여 1주 이내에 파리를 함락시켰다. 무솔리니는 6월 10일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하고 남프랑스에 침입하였고, 6월 16일 프랑스는 항복하였다. 휴전조약은 1918년 독일이 항복할 때 사용된 열차 칸에서 1940년 6월 22일 체결되었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1차 대전 때 베르뎅 전투의 영웅이었던 84세의 페탱이 이번에는 휴전조약에 서명한 당사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페팅은 항복조건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프랑스 국토의 5분의 3은 나치 점령 하에 들어갔으며 프랑스군 포로는 독일에 그대로 수용되었다. 프랑스는 점령지역과 비점령지역으로 구분되었다. 비점령지역인 동남프랑스 지방 비시에 프랑스 정부가 들어섰다. 페탱의 비시정부는 파시스트와 전통 우익이 결합한 연립정부로서 1942년 11월 독일이 프랑스 전체를 점령할 때까지 나치의 괴뢰가 되었다.한편 드골은 런던으로 망명하여 자유 프랑스 정부를 수립하고 연합국에 가세하였다. 망명 드골 정부의 상징은 수세기전 프랑스를 해방시키려는 전투에서 잔다르크가 사용했던 로렌 적십자였다.페탱은 새로운 체제의 기초가 ‘일, 가족, 조국’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고,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1789년의 ‘자유, 평등, 박애’는 비시가 표방하는 소위 ‘민족혁명’의 훨씬 소박한 세 기둥에 의해 대체되어야 했다. 비시 정부는 분파적이었고 타락한 정부였으며,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숙원 해결에 소모하였다. 이런 숙청을 통해 비시는 프랑스를 더욱더 전통적이고 가부장적이며 권위주의적인 가치 위에 다시 세우기를 원했다.파업과 노동조합은 금지되었고, 언론과 출판의 자유는 억압되었다. 체제는 재향 군인 연맹을 통해 여론과 접촉을 유지하려 했지만, 단 한 번의 선거도 치러지지 않았고 심지어는 정치 체제의 인정을 묻는 국민 투표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국가의 모든 기관에서 낙하산 인사가 선거를 대신하였다. 강제 노역으로부터 탈출하기를 원했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 반대 세력을 형성하였다.초반기에 비시 반대파들은 산발적이고 소규모적이며 개인적인 방식으로 활동했다. 그러한 분위기는 대부분의 레지스탕스들이 처해 있던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 레지스탕스)는 거듭되는 시도와 실수 속에서 즉흥적으로 배워 나갈 수밖에 없었다. 레지스탕스 운동은 모든 분야의 정치적 스펙트럼으로부터 충원되었다는 점에서도 새로운 것이었다. 비시 정부가 지배하던 남부 지방에서는 전통적인 엘리트들이 체제에 연루되어 있었고, 따라서 레지스탕스는 일반적으로 좌익 성향이었지만, 북부 레지스탕스 운동은 정치적으로 훨씬 광범위한 세력을 포괄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단체는 강력한 상징적 요소를 갖고 있었다.1941년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공한 이후 공산당의 열렬한 투사들이 복귀하였고, 이로써 노동 계급 중 가장 열성적이고 헌신적인 투사들이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겉보기에는 대부분의 레지스탕스 조직망이 소지역 단위로 형성되고 한두 개의 중지역에 제한된 듯이 보였지만, 공산당 계열의 ‘민족전선’ 조직망은 그 범위를 확장해 나갔고 결국 전국적인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레지스탕스 조직은 독일이 프랑스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속박을 강화해 나가던 1942년과 1943년에 걸쳐 세력을 더욱 확장하였다. 무장 행동도 빈번해졌다.그러나 이처럼 점점 더 많은 지지를 받았던 다수의 레지스탕스 조직에게 부족했던 것은 총체적인 조직력이었다. 결국 이 조직력은 외부로부터, 즉 전직 전쟁 차관이었던 샤를 드골로부터 왔다. 드골은 1940년 5월에서 6월 사이 패배의 와중에 영국으로 탈출하여, 6월 BBC라디오 연설을 통해 항전을 계속할 것을 호소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많은 정신적 지지를 얻었을지 모르지만, 이 단계에서 그를 드러내 놓고 지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처칠이 비시 정부에 대항하는 무장투쟁을 이끈 프랑스 군대의 지도자로서 인정을 받았던 반면, 드골은 프랑스에서 거의 무시되었다. 매우 적은 수의 재외 프랑스정치적 분열을 극복해 냈고 1943년 5월 통괄적인 중앙 조직을 만들어 냈다. 물랭 자신이 전국의 주요 조직을 포괄하는 레지스탕스 전국 평의회의 의장직을 맡았다. 조르주 비도는 물랭이 하던 일을 이어받아, 레지스탕스 평의회가 단순한 군사 위원회에 머무르지 않고 권력의 이양을 위한 조직의 기초가 될 수 있도록 힘썼다. 평의회에는 모든 노동조합과 정당들의 대표가 들어와 있었다. 정치적 조율은 까다로운 임무였다. 드골 역시 레지스탕스 조직망에서 대세를 이루었던 정치적 입장에서 볼 때 구식의 정치가였고, 그의 주변인물들 대부분 역시 전전의 우익 출신이었다. 그러나 비시의 몰락 이후 레지스탕스 평의회가 요구한 ‘진정한 경제적 민주주의’는 드골도 받아들일 수 있는 성격의 것이었다.1944년까지 드골은 자신을 결코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자유 프랑스 위원회가 1944년 6월 6일의 역사적인 상륙 작전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크게 분개하였다. 드골과 국내의 레지스탕스는 나름대로 작전을 펼쳐 갔다. 레지스탕스는 8월 19일, 20일 동안 파리에서 독일 주둔군을 몰아내고자 봉기를 일으켰다. 연합군 사령관은 압력에 굴복하여 8월 25일 파리 수복 때 르클레르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를 포함시키는 것을 허가하였다. 이때 프랑스군의 비율이 더 높았던 라트르 드 타시니 휘하의 프랑스?미국 연합군은 프로방스에 상륙하여 이미 론 강의 계곡을 따라 진격하며 도시들을 해방시키고 있던 중이었다. 그 동안 레지스탕스 군은 전선의 후방에서 연합군과 공조하며 작전을 마무리하였다.1944년 8월 26일 드골은 파리의 샹젤리제)로 개선할 수 있었다. 이 전통적인 개선 의식은 공화제로 전통에 각인되어 있던 정치적 상징들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프랑스 국민에게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드골은 연설을 통해 파리가 “프랑스의 혈맹국 군대들의 도움으로, 파리 시민의 힘에 의해 해방되었다고.”는 사실을 역설하였다. 드골이 확연히 다른 비중을 가진 두 개의 요인을 통해, 요구하는 공산당의 요구를 물리치기 위해 사임하겠다고 위협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12월에 그는 국방비를 삭감하려는 사회당의 요구에 분개하였다. 1947년 1월에 그는 실제로 대통령직을 사임함으로써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그는 얼마 안 있어 자신이 국민의 환호 속에 다시 권좌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주요 정당들은 드골과 같은 권위주의적인 인물이 정부를 떠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드골은 그 후 10년 이상 정권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그러나 드골은 1958년 알제리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제4공화정이 붕괴될 위기에 몰리자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고, 그는 그의 인생을 걸고 전후 유럽을 재건하고자 하였다. 특히, 프랑스 역사상 누렸던 영광과 위대성을 다시 찾는 동시에 파괴된 유럽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프랑스가 제1의 서열을 확보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그는 전후에 유럽의 상황을 고려할 때 기본적으로 '함께 뭉친 유럽' 또는 '단결한 유럽'을 구상하고, 미국은 유럽으로부터 배제하고 러시아는 유럽의 일원으로 파악했다. 1940년대에 유럽재건에 대해 그는 국가들이 구성요소가 되고 국가들의 독립을 엄격하게 존중하는 국가 연합적인 조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에 드골은 1958년 재집권하면서부터 통합과 초국가성에 입각한 유럽적인 조직은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지 반대하고 유럽을 조직화하는데 있어서 국가의 독립과 안보를 해치지 않는 방향에서 추진하고자 했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와 유럽방위공동체를 공격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그의 원칙에 근거한 것이다.그러나 드골은 1961년 2월 당시 외상인 푸세를 중심으로 하여 특별위원회를 결성, 유럽의 정치적 동맹을 유도하려는 의도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것은 외무장관들의 주기적인 회합을 위한 정치적 기구를 만들어서 회원국가들의 유럽정치를 조정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발효할 경우 3년 후에는 통일적인 외교정책을 수립하고, 점진적으로 연합 속에서 기존의 유럽공동체를 이에 집중시키는 기구를 구성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성립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보았지만, 한편으로는 독일점령정책을 엄격하게 유지하였다. 그는 독일이 다시 중앙 집권화 된 제국으로 탄생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그것이 매우 원만한 관계를 가진 소국들로 형성되는 국가연합으로 유지되기를 바랬다. 이러한 그의 구상은 전후 독일이 다시는 유럽의 이웃나라들을 위협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3. 드골의 미국에 대한 외교정책드골은 미국의 물질적 힘의 지배와 주요 유럽 국가들 사이의 힘의 상대적 결핍은 프랑스가 세계 서열에 들어서는 것을 어렵게 할 것이라 생각했기에 미국 산업사회의 물질적 가치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드골의 미국에 대한 비판·저항은 미국의 헤게모니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그것을 약화시켜 프랑스의 독립적 행동을 확보하고 그 위에서 독립적인 유럽을 구상하려고 한 것이었기에 근본적이기보다 전략적인 것이었다.드골의 이러한 경향 때문에, 그를 믿을 수 없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취급했던 루스벨트는 북아프리카 공격에서 드골의 참여를 배제시켰고 이는 결정적으로 양자 사이의 긴장을 초래하였다. 루스벨트의 평화전략은 미국 자신이 평화의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며 동시에 일단 패배한 국가들은 미국의 전략적 구조에 복종해야 하며, 그래서 프랑스가 미국을 구원자 및 중재자로서 인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항하여 드골은 영·미의 전략적 계획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영·미 군대가 프랑스의 저항운동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여 남부 프랑스 공격에서 프랑스 군대를 사용하지 못할 것을 매우 두려워했기에 드골에 대하여 유화적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드골은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프랑스의 영광과 위대성에 집착하였고, 특히 자유프랑스의 위치를 손상시키지 않으려 했던 골리즘을 전시외교에서도 견지하였다.1958년과 1959년 사이의 8개월은 전후 유럽을 재건하고 프랑스의 독립외교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프랑스와 미국간의 관계를 재정립하는데 매우 중요한 시기로, 드골의 기본입장은 프랑스가 '미·영·프'로 구성되는.
웰컴 투 동막골 (Welcome To Dongmakgol, 2005)소개영화 은 장진 감독의 히트 연극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당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발 비껴간 두메산골 ‘동막골’이란 마을을 무대로, 이곳에 들어온 국군과 인민군, 그리고 연합군이 한데 모여 갈등하고 화해하는 웃음과 감동의 전쟁 드라마이다. 일본의 유명 영화음악가 히사이시 조가 음악을 담당했으며, 2004년 8월부터 강원도 평창에 대규모의 동막골 세트를 제작, 시작해, 이듬해 8월 개봉되었다. 연출은 옴니버스 영화 의 편을 인상적으로 연출한 박광현 감독이 맡았는데, 이번이 첫 장편영화 데뷔작이다. 훌륭한 원작에 판타지한 상상력을 첨가한 이 영화는 연극배우들로 구성된 주,조연진의 호연, 실력 있는 신예감독의 연출력이 한데 어울려, 전쟁이라는 긴박한 분위기에서 연출되는 아이러니한 상황과 구수한 사투리 대사들이 상당한 웃음을 주며, 산골 마을 사람들의 순박함이 긴 여운을 선사한다. 순제작비 77억이 투입된 이 영화는 전국 관객 800만을 동원하는 흥행 성공을 거두며, 역대 한국영화 흥행 순위 4위에 올랐다.시놉시스영화는 머리에 꽃을 꽂은 채 관객을 향해 활짝 미소 짓는 백치소녀 여일(강혜정)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여일 주위를 날아가는 나비 떼가 사라진 후, 공중으로부터 추락하는 미군 전투기와 동막골에 떨어진 전투기의 굉음이 잇따른다. 추락한 전투기 안에는 연합군 스미스(스티브 태슬러)대위가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이 미군 장교를 구출해 보살펴 준다.한편, 동막골 주민 중 한명인 여일은 산골로 숨어든 인민군 리수화(정재영) 일행을 만나게 되고 그들을 동막골로 데리고 온다.바로 그때, 작전 중 피난민을 죽게 했다는 죄책감으로 부대를 탈영한 국군 표현철(신하균)과 위생병 문상사 역시 서로 조우하고, 깊은 산 속 동막골의 마을까지 찾아 들어오게 된다.이렇게 세 부류의 사람들(국군, 인민군, 연합군)이 서로 맞닥뜨려 대치하게 된다. 초반에서 이들은 마을 주민들을 사이에 두고 대립, 갖합군 스미스까지 포함하여 새로운 대안 “연합군”을 구성된다. 자체 결성된 연합군 가운데 동막골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겠다는 결단을 먼저 내린 인물은 표현철로 영화는 그를 중심으로 동막골 주민을 살리고자 하는 일에 동참하게 된다.장애물영화 초반에 국군은 대표하는 표현철과 문상경, 인민군을 대표하는 리수화와 장영희, 서택기는 각기 다른 이념과 목표를 가지고 동막골로 흘러 들어가게 되며 서로의 존재가 장애물이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결코 어울릴 수 없는 그들은 동막골이라는 공간 속에서 융합의 모습을 보여주며 결국 영화의 후반 동막골에 동화되어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이러한 그들에게 장애물은 연합군의 공습이다. 강원도 산간에 위치한 동막골은 전쟁을 수행하는 중요한 요새로 점쳐지고, 실종된 전투기 조종사를 찾아 나서려는 연합군은 이제 인민군과 국군 표현철과 문상경에게까지 장애물로 다가온다.전제와 오프닝전제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한 민족이자 인간으로서 동의하고 공감할 수 있는 순수한 마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상처입은 영혼들의 소통과 치유, 그리고 화해이다. 적군과 아군이라는 각기 다른 처지에서 만난 그들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통합이 아니라 희생을 감수하면서 화합을 도모하는 ‘범민족적 화해의 메시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 오프닝의 한 부분으로 리수화(정재영)가 부상당한 부하들을 이끌고 연합군을 피해 퇴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리수화의 부관은 부상당한 병사를 이끌고 퇴각할 수 없음을 주장하나, 대장인 리수화의 시선으로는 전쟁으로 인해 처참하게 상처받은 그들을 그냥 버려둘 수 없음을 보여준다.주요 긴장과 절정과 해결동막골에서 결코 어울릴 수 없는 국군과 인민군 그리고 연합군은 순수한 동막골 사람들에게 동화되어 간다. 그러나 전쟁의 긴장은 동막골까지 덮치고 만다. 동막골에 추락한 미군기가 적군에 의해 폭격됐다고 오인한 연합군이 마을 공격을 결정한 것, 정찰기에서 국군과 연합군이 동막골로 들어와 동막골 주민을 위협하는 일이 발생하고, 이제 표현철과, 가진 사람들이 한국전쟁의 그 속에 있었다. 아니면 그런 순수하고 맑은 마을을 위해 마을 사람들도 모르고 역사도 모르게 조용히 지켜준 사람들이 있었는지도 모른다.캐릭터의 성격묘사-인민군 장교 부상자를 사살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동막골로 도망치게 된 인민군 장교 ‘리수하’는 책임감이 강하고 겉은 무뚝뚝하지만 인정이 많은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실제로 동막골내에서 부락민들에게는 피해를 끼치지 말자며 국방군에게 먼저 제의하는 등 책임과 정의가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별히 리더십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동막골의 촌장에게 그러한 질문을 하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현재 우리들이 원하는 참된 지도자의 상에 대해서도 한번쯤 생각해보게끔 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국군 장교 한강 다리 폭파명령을 거부하고 탈영한 국군 장교 표현철은 전쟁에 대한 큰 두려움과 거부감으로 사람에 대해 경계심을 갖는 인물이다. 하지만 지도력과 전술에 강하고 마찬가지로 책임감과 인정이 넘치는 청년으로 그려지고 있다. 전쟁의 아픔으로인해 동막골내에서 마음을 잘 열지 않았던 인물이지만 결국 그들의 순박함과 온유함에 마음을 열고 동막골을 지켜내기까지 자신을 희생하는 캐릭터이다.-미친년 진정한 평화를 상징하는 동막골의 미친년 여일은 말 그대로 정신을 놓아버린 소녀역할이다. 하지만 그녀를 통해 사람을 경계하던 군인과 인민군들의 마음이 열리고 특별히 소년 ‘택기’는 사랑을 경험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의 천진난만함은 부락민들의 순박함을 대표하는 상징이며 진정한 화합과 결속은 오직 그녀의 모습을 닮은 평화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캐릭터이다.-인민군하사관 인민군 장교 를 따라 동막골까지 오게 되는 인민군 하사관의 역할이다. 그는 옆집 아저씨같은 특유의 사람좋음을 보여주는 캐릭터로서 국군임에도 불구하고 형이라 부르며 잘 따르는 김상상을 자신의 친 동생처럼 예뻐하고 아끼는 모습을 보여준다.-국군 위생병 국군 위생병 김상상, 그에게는 전쟁도 이념도 필요없다. 오직 전쟁이 끝나고 신나게 한바탕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또 다른 한 병사가 총으로 자기 목을 겨누고 있다. 죽으려 하고 있다. 건빵을 먹던 병사는 물을 먹으려 했다는 것도 잊어버린채 그 사람을 살리려 뛰어간다. 그리고 가까스로 그에게 다가가 소리를 치며 건빵을 튀긴다. 둘은 모두 남한군인걸 확인하고서 길을 나선다. 그러다가 왠 한 사람과 마주친다. 처음으로 등장한 동막골 사람이자 이들이 동막골의 마지막 세번째 손님들이다.영화의 중반부에 해당하는 멧돼지 사냥 장면은 이 영화의 큰 반전이다. 피투성이인채로 날만 세우던 서로가 (피난을 가던 이들에게 가장 큰 아픔이었던 한강대교를 폭파하는 일을 맡아 거기에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표현철. 고향으로 꼭 가게 해주겠다며 약속했지만 결국 모든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리수화.) 그 날을 접고 서로의 피를 닦아주게 되는 장면인 멧돼지 사냥 장면은 이 영화의 주제이기도 하다.느린 슬로우 모션으로 그려지고 있는 이 장면을 통해 관객은 웃음과 감동을 동시에 얻게되고 이들 또한 멧돼지사냥으로 하나가 된다.서로 적이었던 그들이 어느새 연합군이 되어 평화의 상징이자 유토피아인 ‘동막골’을 지키게 된다. 전쟁을 위해서도 이념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들은 단지 순박하고 인정 많은 동막골을 거대 세력으로부터 지키고 싶을 뿐이다. 장렬하게 함께 전사해가면서 그들은 그 의미없는 전쟁 속에서 사람과 평화를 지켜낼 것이라는 자신들의 신념을 자랑스럽게 여긴다.아이러니국군과 인민 그리고 연합군(스미스)이 처음 만나 서로를 겨누고 있었을 때 내린 빗 속에서 택이는 자신의 얼굴을 닦아주던 연이를 보고 반하게 된다. 그리고 택이가 연이를 볼 때마다 웃거나 얼굴을 붉히는 등의 모습에서 관객은 택이가 연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누설) 관객들은 여일이에 대한 택이의 풋풋한 감정을 등장인물 우위에 위치해서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등장인물들이 택이가 비오는 날 연이에게 인공기를 주는 모습을 보고 택이의 마음을 눈치 채게 된다.(인식)악몽을 꾸거나 탈영이란 말을 듣고 광분한 영화 중간 중간에 잠깐씩 보여 지던 나비는 맨 마지막에 여섯 마리의 나비가 날아오르는 엔딩장면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나비가 마을의 수호신, 순수한 영혼을 지닌 평화의 수호자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처음엔 별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던 나비가 점차 대단히 중요한 존재였음을 관객들에게 드러냄으로써 씨뿌리기와 거둬들이기가 잘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미리 알려주기와 예상하게 만들기국군과 인민은 각각 동막골 사람을 만난다. 근처에 부락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동막골로 향하는 장면에서 이들이 곧 동막골에서 서로 만나게 될 것을 관객에게 미리 알려준다.국군을 동막골로 안내한 달수는 아픈 양반이 있어서 약초 캐러 바깥에 나왔다는 말을 하는데 여기서 관객은 그 아픈 양반이란 자가 비행기 사고 난 스미스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아이러니) 그와 동시에 국군과 스미스가 서로 만나게 될 것이라는 걸 관객에게 미리 알려주게 된다.연합군 사령부에서 대령과 몇 명의 참모들 그리고 한국군 장교가 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과 지도에 폭격기 모형을 붙이며 작전을 설명하는 소령, 특수부대원등은 앞으로 이들이 동막골을 위협할 것을 관객들이 미리 예상하게 한다.개연성그 시대에 전쟁이 터진지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마을이 있을 수 있는지, 지주도 소작농도 없이 평등하게 일하고 분배하는 공동체의 존재가 가능한지, 그처럼 타지인에 대한 경계심이 전혀 없을 수가 있는지, 옥수수 창고에 수류탄을 터뜨리면 팝콘이 쏟아져 나오는지 등등 영화는 아무 의심 없이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마을을 펼쳐놓는다. 이렇게 개연성이 부족하긴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할 건, 이 영화가 관객들이 개연성을 따지지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 남한군, 북한군 모두 전투에서 많이 죽고 소수만 살아남았다. 그들이 동막골이라는 마을에서 또 마주쳐 총부리를 겨눈다. 그들이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고, 마을 사람들의 희생은 더더욱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양쪽 군인들이 싸우지만 않는다면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평화와 평등의 마을이어야 한다. 같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우리나라에서도 사랑받는 영화 는 미국 영화사상 가장 인기 있는 영화로 자리 잡고 있다. 지금까지 남북전쟁에 관한 가장 영향력 있는 해석판인 이 영화는 대중을 위해 이 전쟁의 성격을 규명 ? 정의해왔다. 그래서 '미국 남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 마가렛 미첼의 이 불멸의 이야기는 너무 낭만적이다. 아직도 소설과 영화로 남북전쟁을 접했던 많은 사람들은 ‘남부가 전쟁에 이겼더라면…’ 하는 감상적인 생각을 한다.또한 역사적 정확성을 주장하기 위해 주요 장면마다 날짜와 역사 자료를 끼워 넣은 이 영화는 이른바 ‘역사’를 이용함으로써 과거 플랜테이션 시절에 대한 할리우드식 해석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영화 속 인종 관계에 대한 묘사가 그러하다.즉, 는 백인, 그것도 남부의 백인 지주들의 시각으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이야기 주인공이 남부의 백인 지주층이고, 당시 실제로 남부의 지주층은 그녀와 같은 생각과 행동을 했겠지만, ‘남북전쟁’과 ‘노예제도’에 대한 한 쪽 측면만을 보여준 것은 분명 비판해야 할 점이다. 앞으로 이러한 문제점을 하나씩 짚어가며 이 영화를 비판해보고자 한다. 먼저 222분의 이 영화의 줄거리를 살펴보도록 하겠다.-북부가 노예 제도를 폐지하고 남부에도 이를 강요하자 남부는 연방을 탈퇴, 남과 북은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조지아주 타라 농장의 장녀 스칼렛 오하라는 빼어난 미모와 늠름한 성격으로 청년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스칼렛이 사랑하는 남자는 애슐리 윌크스 뿐. 그 무렵 그녀 앞에는 영국 출신이면서 행실이 나쁘다고 소문난 험상궂고 남성다운 레트 비틀러가 나타나자 거만한 스칼렛은 그를 미워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이끌려간다. 하지만 애슐리가 그녀의 착한 사촌 멜라니와 결혼하자 스칼렛은 홧김에 동생 인디아와 결혼하기로 되어있던 멜라니의 남동생 찰스와 결혼해 버린다. 그러나 찰스는 입대하자 마자 전사하고 만다.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데 전황은 점차 남부에 불리해져 조지아주 애틀란타까지 북군이 쳐들어온다. 겁에 질린 스칼렛은 멜라니의 출산이 임박하자 계속 머물게 된다. 스칼렛은 멜라니가 아이를 낳고 전쟁의 불길이 거세지자 레트의 마차로 죽음의 고개를 넘고 넘어 고향으로 피난한다. 레트는 갑자기 마음을 바꿔 전쟁터로 향한다. 기진맥진한 멜라니와 도착한 고향은 어머니의 죽음과 실성한 아버지, 그리고 혹독한 가난만이 기다린다. 하지만 스칼렛은 이를 헤쳐나갈 것임을 하나님께 맹세한다.북군으로 인해 남부의 점령지는 수난을 겪한다. 전쟁에 나섰던 남부의 청년들이 점차 돌아오기 시작하는데, 찰스의 형 카네기도 돌아와 스칼렛에게 구애를 한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여전히 애슐리 뿐이다. 스칼렛은 세금 300달러를 내지 못해 고난을 겪고, 이때 정신이 나갔던 아버지가 말을 타다 떨어져 죽는다. 이때 전쟁 때문에 큰 돈을 번 레트가 군형무소에 있다는 사실을 안 스칼렛은 그를 찾아가지만 또다시 그의 빈정거림만 받는다. 이에 스칼렛은 동생의 약혼자인 프랭크 케네디와 결혼하여 세금을 해결한다. 전쟁이 끝나고 그녀는 프랭크의 자금으로 제제소를 운영하는데, 여자가 사업을 하는 것에 대한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돈을 버는 일로 열의에 차 있다. 프랭크와 애슐리는 정치 모임에 나갔다가 프랭크가 총에 맞아 죽고, 애슐리는 다행히 레트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다. 스칼렛은 결국 돈 많은 레트의 구애를 받아들여 결혼식을 올린다. 레트는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음을 알지만 결혼 생활에서 점차 자신을 사랑해지기를 기다리며 그녀를 위해 많은 돈을 쓴다. 하지만 애슐리를 연모하던 스칼렛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해가자 스칼렛과 레트는 연일 싸움이 그치지 않고, 레트는 오직 딸 보니가 커가는 것을 위안으로 삼아 살아간다. 스칼렛은 애슐리와 있는 것을 주위 사람들도 알게 되어 곤경에 처하게 되는데, 자신과 애슐리의 관계를 냉철히 알고 호되게 질책하는 레트에게 점차 이끌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의 진심을스칼렛을 실망시킨다. 스칼렛은 그가 돌아왔을 때, 그토록 싫어하던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지만, 레트는 이것 마져 진심으로 봐주지 않는다. 결국 스칼렛은 계단에서 떨어져 유산되자, 레트는 자신의 잘못을 슬퍼한다. 하지만 이후에도 자존심 때문에 두 사람의 다툼이 계속된다. 여기에 그토록 아끼던 보니가 말을 타자 떨어져 죽자, 레트는 더없는 실의에 빠진다. 더구나 두 사람을 항상 위로해 주던 멜라니도 쓰러진 후 결국 숨을 거두자, 스칼렛은 커다란 슬픔을 겪게 된다. 그리고 애슐리가 정말로 사랑했던 사람은 자신이 아닌 멜라니임을 안 스칼렛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레트임을 알고 그에게로 달려오지만, 레트는 미련 없이 그녀 곁을 떠난다 -미국 남북전쟁과 전후 재건기간까지의 조지아 주를 중심으로 한 전쟁과 사랑을 그린 영화의 프롤로그엔 다음과 같이 남부에 대한 향수를 예고하고 있다.남북 전쟁 이전의 남부라고 불리는 기사들의 땅과 면화농장이 있었다. 용맹스러운 행위는 여기 이 아름다운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답례를 받았다. 여기 기사들과 그들의 요조 숙녀들,주인과 노예의 마지막 모습이 있다. 기억나는 꿈에 지나지 않기에 책에서밖에는 찾아볼 수 있는 문명은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남부에 대한 향수가 짙은 까닭이 원작 소설의 작가 마거렛 미첼이 남부 조지아 주 애틀랜타 사람이기 때문일까. 어찌됐든, 노예들도 이것을 같은 시각으로 바라볼지 여부는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이처럼 영화는 면화 농장의 상류층 생활이 노예들의 강제 노동의 피땀으로 유지되었다는 불편한 사실은 회피하고 있다. 오히려 영화는 노예 제도가 저지른 모든 범죄보다도 스칼렛의 어여쁜 작은 손에 못이 박혔다는 사실을 더욱 동정한다.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면, 무조건 노래를 흥얼거리는 흑인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할까. 원작 소설과 같이, 감독 역시 초점을 맞춘 대상은 흑인들이 아니라 백인 관객들이었다. 수십 년이 지난 후 말콤 엑스는 극장에서 처음으로 이 영화를 보면서 한없이 위축됐었다고 한다.이렇게 동시대 지 않고,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흑인 관을 보여줬다는 점이 이 영화의 문제점이다. 주인님에게 충성하는 낙천적인 흑인 노예들. 포크의 우스꽝스러운 언행이나 빅 샘의 충성심, ‘아이 낳는 것에 대해서는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라는 말을 항상 입에 달고 다니는 프리시의 아둔함, 그리고 유모 매미의 헌신성은 할리우드의 인종적 정형화를 그대로 보여준다.노스캐롤라이나의 어느 편집자는 "남부 인들이란 절반은 꿈으로부터 절반은 중상모략으로부터 창조된 여전히 전설적인 땅에 살고 있는 가공의 국민들"이라고 쓴 바 있다. 남부인들 자신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남부에 관한 일련의 근거 없는 통념과 편견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통념은 로 인해 더욱 짙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가 말하는 남부란, 가부장적인 백인 플랜테이션경영주 및 그 가족이 이끌어 가는 안정적인 농경사회이며, 그들은 흰색 기둥들이 즐비한 대저택에서 살고 공동체 내에서 덕성과 재능을 가진 "자연스러운" 귀족계급을 대표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에 의하면 남부 인들은 그들의 노예들에게 친절했으며 신사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다음은 제재소에서 스칼렛이 흑인은 인건비가 비싸기 때문에 죄수들을 인력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애슐리와 스칼렛의 대화이다.애슐리 : 나는 남을 착취해서 돈 벌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어.스칼렛 : 그런데 어떻게 노예들을 부렸죠?애슐리 : 그건 좀 달라. 사실 학대하지도 않았고.당시 참으로 신사적인 남부 인들은 실제로 이렇게 생각했으며, 영화 역시 그러하다고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말이 안 되는 얘기지만 당시에는 이러한 견해가 대부분이었다. 남부는 농업에 의존했고 특히 면화생산이 중심이여서 대농장의 경영에 의한 대량생산과 염가의 노동력에 의한 생산가 절하가 가장 중요한 농업 수입이므로 노예 제도가 가장 편리하였다. 그래서 남부는 노예제도와 불가분의 관계였던 것이다.영화에서 애슐리 집안의 농장과 스칼렛 집안의 농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남부는 대농인 노예들, 이렇게 두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영화는 백인 지주들은 신사숙녀로 이루어진 예의 바르고 똑똑한 집단이며 흑인 노예들은 가난하고 무지하며, 지주의 도움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는 집단으로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서는 어느 백인도 노예제도를 반성하거나 깊게 생각하려 하지 않으며, 그것을 자유와 인권이란 이름으로 노예해방을 말하는 북부 사람을 ‘어리석은 양키’라고 여긴다.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부상당하고 죽은 병사들과 이들을 잃은 남부 인 가족들의 슬픔을 보여준다. 또한 다시 타라로 돌아온 스칼렛에게 하인들은 북부인들이 헛간마저 땔감으로 썼으며, 양탄자나 심지어 어머니의 묵주까지 빼앗고, 실컷 배불리 먹고 남은 건 전부 다 말에다 싣고 갔다고 얘기한다. 북부 인들이 전적으로 모든 걸 빼앗고 태우고 없애는 가해자로 비추어지고 남부 인들은 이를 모두 당한 피해자로 비추고 있다.공업 중심적 북부와 농업 중심적 남부의 이해가 충돌하여 빚은 전쟁이고, 이는 양쪽 모두에게 피해를 주웠음에도 철저하게 남부의 피해 모습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남북전쟁의 수많은 희생자가 모두 남부 인은 아닐 텐데 말이다.그리고 영화에서는 전쟁 후, 어느 흑인도 해방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자유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버지의 죽음 후 스칼렛이 충성스런 노예에게 아버지의 시계를 보답으로 준다든가, 해방된 노예가 ‘우린 당신들 친구이고 당신들은 투표권이 생기니까 우리가 시키는 대로 찍기만 하면’ 사십 에이커의 땅과 노새를 주겠다는 약속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모습이나, 뜨네기에 지쳤다며 빅 샘이 ‘타라’로 돌아가게 된 것에 감사하다고 하는 등의 모습 따위만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영화는 그 시절의 인종 투쟁에는 일체 관심이 없다. 물론 노예 해방되었을 때 당장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서 다시 주인에게 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 않는가. 자치권을 획득하려는 흑인들의 구체적이고 명백한 도전은 이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가 남북전쟁과 그 이전적으로
도라도라도라(Tora! Tora! Tora! / トラ?トラ?トラ!)대공황으로 인한 불안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탈리아에는 무솔리니, 독일에는 나치의 등장으로 유럽을 포함한 전 세계가 혼란에 빠졌다. 특히 아시아의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한국침략과 만주사변, 그리고 이어 중일전쟁까지 일으켰다. 미국은 이러한 일본을 견제하였고 일본의 군부세력이 정권에 나오면서부터 전쟁을 예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첫 공격지점이 어디일지가 고민이었고 필리핀 쪽을 먼저 공격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러한 긴장감속에서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이 일어난다.이 영화의 제목은, 진주만을 공습한 일본 전투기 비행사가 작전 성공을 알리는 암호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영화는 다큐멘터리와 같이 진주만 공습을 두고 미국과 일본 양 진영의 상황을 교차 편집하여 보여준다. 그런 까닭에 진주만 공습직전까지 느껴지는 팽팽한 긴장감은, 오히려 공습 장면에선 지루함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영화는 질서정연하게 서 있는 일본 해군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전쟁에 반대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육군의 미움을 받아, 이에 살벌한 도쿄를 피해 연합함대 사령관으로 취임하여 온 장면이다. 일본과 미국, 육군과 해군, 장교와 장군들 모두의 각각의 에피소드를 집어넣어 진주만 피습과 그 직후까지의 모습을 70년대의 영화라고 믿지 못할 만큼 잘 담아내고 있다. 이렇게 처음부터 영화는 진주만 공습이 진행되기까지의 배경과 흐름을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보여주고 있다.이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미국은 전함 8척과 군용기 300대, 2300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 이런 결과로 인해 일본의 공격에 대해 미국 정부는 안이하게 대처했다는 비난에 더해 음모론이 대두하게 되었다. 영화에서 야마모토는 ‘일본이 미국에 대항해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면…’이라고 계속하여 말한다. 전쟁을 강요당하는 듯 한 그의 말은 지금까지도 논의가 많은 음모론을 생각해보게 한다. 여러 정황을 살펴보아, 미국이 일본의 공격을 유도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 음모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일본은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석유 때문에 가능한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고 싶어 했다. 한편 미국은 일본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새로운 해군의 건설을 발표한다. 또한 미국 정부는 샌디에이고에 주둔하고 있던 미 태평양 함대를 진주만으로 이동시켜 일본군의 말마따나 ‘목에 칼을 대고’ 있다. 점점 일본을 경제적으로 압박하고 있던 미국은 미국 내의 일본 자산을 동결하고 석유의 대일 수출을 전면적으로 금지한다. 이후 중국에 대한 원조 포기와 미 ? 일 통상관계의 정상화라는 일본의 최저요구사항에 미국은 중국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의 일본군의 철수, 3국 동맹의 해체 등을 제시한다.이미 미국은 매직 도청기로 당시 일본정부와 주미 일본대사관 사이의 암호전보문을 해독하고 있었으므로 미 ? 일 교섭이 파국에 이르리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미국을 일본 침략의 희생자로 보이게 함으로써, 국내 반전여론을 무력화시키고 국민을 단결시키기 위해 필요한 건 일본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미국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전쟁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이러한 음모론은 아직까지 많은 논의가 되어오고 있다. 영화는 매직 도청기로 얻은 일본의 비밀 전문 정보를 하와이의 장교들에게 전송하지 않았다는 음모론을 인정하는 듯 해보였으나, 이는 곧 당시의 미국은 일본의 선제공격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언제, 어디일지를 몰랐다는 것과 미국인들의 관료주의와 융통성 없는 행동에 묻히고 만다.또한 영화는 철저히 일본과 미국만을 보여주고 있다. 아시아에서의 잔인한 만행은 전혀 언급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일본인은 위계질서하고 대단한 전략가로 그려진다. 그들의 진주만 공습은 파일럿이 국기가 그려진 띠를 머리에 매는 모습처럼 애국심으로 묘사될 뿐이다.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내세운 그들의 아시아 침략에 대한 야욕이 보기 좋게 포장되어, 영화엔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다.이렇듯 영화는 일본의 잔인무도한 일들을 보여 주기는커녕, 그것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안 나온다. 일본의 야욕이 강경한 군국주의자인 육군들만의 이야기 마냥, 미화되었다는 것도 비판의 여지가 있다. 마치 미국 때문에, 육군 때문에 진주만공습을 하게 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야마모토가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였고 워싱턴 주재 일본대사관에 무관으로 근무하여 미국의 저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전쟁을 반대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전쟁 방침이 결정되고부터는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미국에 선제공격을 가해 단기간에 미국 본토 서부해안을 공격 범위 안에 넣어 협상을 이끌어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선제공격의 목표는 미 태평양함대기지인 하와이제도의 진주만으로 정했던 것이다.그러나 마치 육군 때문에 미국에 공격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진주만을 공습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었다고 보여주는 것은 분명 일본의 침략 정책을 야마모토를 내세워 미화시켰음이 분명하다. 육군이 자신과의 상의 없이 인도차이나 점령을 결정했다는 것에 ‘평화는 물 건너 갔군.’ 이라고 말하는 야마모토는 영화 내내 평화를 지지하고 탐욕 없이 청렴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평화라는 것이 다른 나라를 잔인하게 수탈하고 강제 침략하는 것도 포함한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무튼, 올곧은 영웅처럼 그려진 야마모토는 진주만 공습에 앞서 미국에 최후 통첩을 해야 한다고 했으나, 공습이 있고 나서 전해졌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는 이 일로 미국을 크게 자극했다. 잠자는 거인을 깨워 끔찍한 결과를 낳을 것이 나는 두렵다.’ 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어떠한 죄책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단지 미국의 반격을 예견하고 두려워 한 것뿐이었다.또한 영화는 일본군의 탐욕을 모두 ‘애국심’이었던 것으로 미화시켜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 애국심의 이기적임과 잔인함은 보이지 않고, 나라의 위험이 있으니 이를 위해서 우린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식의 이야기만 되풀이 된다. 그들의 야욕 대신 보여주는 것은 진주만 공습을 위해 출발한 파일럿이 하늘에서 아침 태양을 보며 ‘햇살 봐, 우리 깃발 같아’ 라고 말하는 장면 등이다. 또한 진주만 공습에서 목표물을 격퇴시키기 위해 전함의 이름을 맞추며 연습하는 모습은 즐거운 게임이라도 하는 것 마냥 그들이 천진난만하게 나온다. 이후 그들이 할 진주만 공습과 비교해보면, 공습 이전의 그들의 모습은 어디 스포츠게임에 나가는 듯 한 분위기이다. 이런 식으로 일본의 야욕을 영화는 감추고 있는 것이다.그래서 영화의 제작이 일본과 미국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일본에서 바라 본 진주만 공습 이야기와 미국에서 바라 본 진주만 공습 이야기. 이 양국에서 각각 만들어진 독립된 영화를 하나로 접합한 것이 인 것이다.그러니 영화의 첫 장면부터 한국인으로서 마음이 씁쓸해진 것은 당연했다. 첫 장면부터 자랑스레 나오는 거대한 전함과 군용기는 ‘우리나라에서 밥그릇, 숟가락 죄다 쓸어가 저기에 갖다 붙였구나.’ 하는 생각만 들게 했다. 또한 진주만 공습에 성공하여 돌아오는 파일럿을 향해 박수치며 환호하는 장면은 어떠한가. 수 천 명을 죽이고 온 이들에게 휘파람을 불어대는 잔인함을 영화는 무심하게 보여준다.또한 영화에는 단 한 명의 사람도 피를 흘리며 죽지 않는다. 전함과 군용기를 파괴하는 장면은 세세하게 한 시간 동안 보여주면서 2300여명이 되는 사람들을 죽이는 장면은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에서 보여준 진주만 공습을, 같은 소재의 영화로 , 도 있지만 과 비교해보도록 하겠다.에서 비밀 암호 해독실의 중년의 여성을 제외하면 여성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으나 에서는 아름다운 여자 주인공과 그녀를 두고 전쟁하랴, 사랑 싸움하랴 바쁜 두 남자 주인공이 나온다. 속 인물들의 잠시나마 삭막했던 분위기가 을 감상하며 풀어진 것은 더 얘기하지 않도록 하고, 진지하게 두 영화의 차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두 영화를 보며 많은 차이를 느낄 수 있었는데, 에서는 에서와 같이 미국인들이 융통성 없는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대처능력이 뛰어나며 용감하고 현명한 인물들로 그려진다. 그리고 진주만 공습 직전, 에서는 전투기를 타고 있는 파일럿이 햇살을 보며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은 비장한 일본인들의 모습과 뛰어놀며 웃고 있는 아이와 가족의 평온한 모습을 고집스레 교차하며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 내내 이도 드러내지 않는 무표정의 일본인들은 냉혈한 인상으로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죽인다. 에서 사람보단 전함의 피해를 중점으로 보여준 것과 달리, ‘격침했는데도 왜 쏘는 거야!’ 라고 외치는 미국군의 말처럼,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미국이 교란작전을 쓰며 끝까지 싸우는 모습과 ‘복수’를 위한 노력과 그 실행을 보여주며 미국인만의 영화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났다. 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식으로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잔인한 모습으로 그려냈음에 비해, 이를 맞받아치는 사람들은 ‘영웅’으로 그려내는 것에 상당한 거부감이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미국식 영웅주의에 질려 혀를 내둘렀지만, 영화와 비교해보며 좀 더 진주만 공습을 다양한 시각으로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