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들어가며‘가장 두려운 것은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얼마 전 개봉한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의 홍보 문구이다. 사실 이 책에 대해서도, (노벨 문학상의 수상자임에도 불구하고) 작가 주제 사라마구에 대해서도 들어 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주로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들과는 달리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다는 사실’ 또 그것이 ‘가장 두렵다는 것’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평소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보고 여러 번 실망한 경험이 있는 탓에 나의 선택은 영화보다는 책이었다. 다행이도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원작이 훨씬 더 낫다는 평가였다.꽤 두꺼운 두께의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줄거리 진행 및 사건의 구성은 비교적 명확했다. 또한 매 장면 마다 나에게 갖가지 물음을 던지며 잠시 쉬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때문에 아래에서부터는 소설의 전개과정을 소개하면서 각각마다 내가 느낀 점을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2.내용 및 줄거리-혼란의 시작신호를 기다리던 한 남자 운전자가 갑자기 눈이 먼다.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우유의 바다’에 빠진 듯이 온 세상이 뿌옇다는 것이다. 그 운전자는 너무나 당황스럽고 두렵다. 지나가던 사람들, 또 그중 한 남자의 도움으로 겨우 집으로 올 수 있었다. 부인은 퇴근 전이었다. 집까지 바래다 준 남자는 놀랐을 남자를 위해 집안으로 들어가 부인이 올 때까지 말벗이 되어주려 하지만, 눈이 먼 운전자는 한사코 사양한다. 혹시나 집안의 물건들을 훔쳐가기라도 할까봐서 이다. 하지만 도움을 준 남자는 결국 주차해 두었던 눈 먼 남자의 차를 훔쳐 달아난다.이 책의 시작부분이다. 누군가가 갑자기 아무런 이유 없이 눈이 멀었다는 것은 나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눈이 먼 자신을 집까지 바래다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은 남자가 자기의 물건을 훔쳐 갈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는, 또 눈이 멀어 절망에 빠져있을 사람을 도와주고도 그 사람의 차를 탐하는 그들의 마음이 씁쓸했을 뿐이다. 이것은 비단 소설 속에 이야기만은 아닌 듯하다. 사람 마음이 꼭 한 가지만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와중에도 내일 내야할 카드 값을 걱정할 수도 있고, 하반신 마비가 되어서도 어렸을 때 했던 장난을 떠올리며 킥킥 될지도 모르는 일인 것처럼 말이다.-눈이 멀다눈이 먼 남자는 집에 돌아온 부인과 함께 안과를 찾지만 원인을 밝혀내지는 못한다. 안과 의사는 깜깜한 어둠에 빠진 것이 아닌 하얗게 눈이 멀어버린 이 남자에 대한 의문을 떨쳐내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여러 서적들을 파고든다. 그리고 그 다음 날, 하얗게 눈이 멀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처음으로 눈 먼 남자가 자신의 병원을 찾았을 당시 대기실에 있던 다른 환자 역시 눈이 멀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의사는 그 실명을 전염병으로 생각하고 보건 당국에 신고한다. 실명 한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자 보건 당국은 비어있는 한 정신 병원에 그들을 격리 시킨다. 의사의 아내는 비록 앞을 볼 수 있었지만, 남편을 따라 눈이 멀었다는 거짓말로 함께 격리된다.눈에 아무런 이상도 없이 왜 눈이 멀어 버리는 걸까. 또 실명이 전염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너무나 궁금했다. 또한 내가 생각한 책의 전개는 이렇게 점차 사람들의 눈이 멀고, 누군가 영웅처럼 나타나 그 원인을 밝혀내고 어려운 상황을 헤치고 극적으로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주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에는 그 원인이 전혀 소개되지 않고, 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사람들은 갑자기 눈을 뜬다.나의 궁금증과 예상이 오로지 위와 같은 일에만 집중되어있었기 때문에 의사의 아내가 눈이 멀었다는 거짓말로 남편을 따라나섰다는 것은 큰 감동을 주지 못했다. 소설을 다 읽고 이렇게 다시 한 번 정리 하는 지금에서야 눈이 멀어 울고 있는 남편을 안아주는 모습, 침착하게 옷가방을 꾸리던 모습, 담담하게 자신의 눈도 멀었다고 말하는 아내의 모습에서 잔잔한 감동을 느낀다.-눈먼 자들의 도시가 생기다눈먼 자들이 격리 되면서 그렇게 눈먼 자들의 도시가 생긴다. 물론 나중에는 의사 부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어 사회기능 전체가 마비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작가가 말하는 이 ‘도시’는 눈먼 자들이 격리 수용된 정신병원 내를 뜻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이곳이 사람들 간의 갈등을 일으키는 중심지이자, 작가가 파헤치고 싶었던 절망적인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이다.이곳에서의 갈등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격리된 사람들과 그들을 지키는 군인들이다. 군인의 정신병원의 입구를 지키고 있고, 눈먼 자들은 일체 밖으로 나올 수 없다. 심지어 식량을 보급 받을 때조차 대표로 한 두 명이 정해진 선에 놓인 식량을 가져와야 할 뿐이다. 처음에는 식량과 구급약 등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보급 받는 일에서 약간의 갈등을 보일 뿐이다. 하지만 군인 내에서도 눈이 머는 사람이 생기면서 군인들의 두려움도 극에 치닫는다. 결국 실수와 고의에 상관없이, 정해진 선을 넘은 사람들에게는 서슴없이 총을 겨누게 된다.처음 군인이 한 남자에게 총을 쏘았을 때에는 내 마음에서 분노가 일어났다. 다리에 입은 상처가 약도 없이 더러운 환경에서 점점 감염되어가자, 고통을 참지 못하고 한 밤중에 약을 청하러 나간 남자에게 총을 쏘아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후에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총을 쏘는 군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 총을 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이유 역시 두려움인 것이다. 눈 먼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가까이 닿으면 자기의 눈도 멀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동료 군인처럼 눈이 멀어 자기도 격리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들로 하여금 조건반사처럼 총을 쏘게 했다.쏘지 않았더라면, 눈 먼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결국 나는 군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자 자신의 눈이 머는 것을 감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전쟁도 이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적군에게 어떠한 원한도 없다. 내가 적군을 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그를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나를 먼저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상황이 사람을 만드는 듯하다. 극한 두려움은 오히려 사람을 극단적으로 만드는 것이다.갈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막연한 시간을 함께해야하는 눈먼 사람들끼리의 갈등은 더욱 더 힘이 든다. 수용자들의 수가 늘어날수록 침대와 식량은 턱없이 모자라다. 또한 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곳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배변을 본 덕에 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이런 곳에서 모두들 예민해져 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생활을 겨우 유지해가고, 식량을 무력으로 차지하여 그것을 미끼로 금품을 갈취하는 폭력집단이 생겨난다. 그들은 금품을 갈취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여자 수용자들로 하여금 성관계까지도 요구한다.이 글과는 상관없는 엉뚱한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병원 내에 폭력집단이 생길 것이라고는 정말 상상을 못했는데, 보통 사람들의 행동과는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그들의 행각을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또 한편으로는 실제로 우리 모두가 눈이 멀어버린다고 하더라도 혼란은 잠시 뿐, 곧 권력자가 생기고 이렇게 폭력집단이 생기는 듯 어떠한 형태로는 사회가 유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인간의 적응력은 엄청난 것인 듯하다.-모두가 눈이 멀다.처음에는 두려움에 모든 사람들이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지만, 결국 유일하게 앞을 볼 수 있는 의사의 아내는 그 집단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만다. 하지만 그것조차 아무런 소용이 없는 짓이었다. 그들은 밖으로 탈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군인들은 이미 그 병원을 지키고 있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가장 두려운 것은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의사의 부인은 의사와 몇 명 처음 수용소 생활을 함께 했던 사람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온다. 세상은 처참하다. 모두가 눈이 멀었고, 먹을 것이 부족하다. 사람들의 생활은 이미 동물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야기의 전개가 점점 더 극에 달할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책은 점점 마무리 된다. 의사의 부인은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있었다. 자신의 집에 데려와 사람들을 보살핀다. 물과 먹을거리는 여전히 부족하다.어느 날 밤 의사의 아내는 잠결에 비 오는 소리를 듣게 된다. 베란다에 나가 온갖 그릇에 빗물을 받다가 멍하니 비를 맞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불러 베란다에서 깨끗이 씻게 한다. 자신도 보이지 않을뿐더러, 남이 자신을 볼 수 없다는 걸 뻔히 아는, 또 그것에 충분히 익숙해졌을 법한 늙은 할아버지가 욕실에서 혼자 씻게 해달라는 부탁도 거절하지 않는다.그것은 더럽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찌든 몸을 씻어내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악몽 같았던 시간들, 제발 꿈이기를 바랐던 시간들을 씻어내는 것을 의미하는 듯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으로 눈이 멀었던 남자가 눈을 뜬다. 믿어지지 않을 뿐이다. 그렇게 점차 다른 사람들의 눈도 보이기 시작한다. 의사의 아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모든 것이 하얗게 보였다. 내 차례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두려움 때문에 그녀는 눈길을 얼른 아래로 돌렸다. 도시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한민족네트워크론-중국 동포의 남한 진출 실태와 그에 따른 문제점Ⅰ. 들어가며까무잡잡한 얼굴에 낡은 잿빛 양복을 입고 어눌한 말투로 ‘일 없읍네다’ 라고 말하며 수줍게 웃는 모습-바로 내가 떠올리는 중국 동포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런 순박한 얼굴 뒤로 한국인의 돈을 가로채려는 속셈을 지닌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현재 530여만 명이 넘는 한민족이 세계 140여 개국에 거주하고 있다. 그 중 200만 이상이 중국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이다. 이들은 가장 오랜 이민의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의 한인사회에 비해 우리의 언어, 문화 등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한민족이 중국에 살기 시작한 것은 한민족사가 시작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중국 동포가 살고 있는 중국의 동북삼성은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를 이어오면서 대부분 우리 민족이 살아오고 있는 땅이다. 고조선과 고구려는 한나라와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고 고구려 유민들은 대부분 한반도로 이동하였으나, 요동일대에 남아 있던 고구려의 유민들은 말갈족과 함께 발해를 세웠고, 발해는 요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그 후 요, 금, 원 왕조와 명조 초기 요동, 요남 일대에는 한반도에서 이주해온 고구려인들이 총 인구의 30%나 차지하고 있었지만 오랜 세월 중국의 다른 민족들과 잡거하고 통혼 하는 과정에서 동화되어 지급은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뿐이다. 그 중에서 우리에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구원군의 대장인 이여송 장군 정도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중국동포는 혈통이나 민족의 속성에서 고조선이나, 고구려, 발해의 유민들과는 직접적인 계승관계가 없고, 현재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국 동포들은 조선시대 중기부터 여러 원인으로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해온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다.)1992년 한?중 수교가 수립되면서 중국에 비해 빠른 성장을 거듭하던 한국으로 많은 중국 동포들이 몰려들었다. 우선 한국이 중국 동포들이 모국임과 동시에 언어소통에 문제가 없었고그 수가 18만에 달했다.②일제식민지-일제식민지 당시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른 조직적, 계획적 이주그 후 한일합방부터 1945년 일본 패망까지 두 번째 조선인의 대거 이주가 이루어진다. 일본은 만주 괴뢰정부를 세우고 동북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1936년 이후 20년 동안 조선인 100만 가정, 511만 명을 강제적, 조직적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이로써 1939년 말 중국 동부의 조선인은 116만 명, 44년에는 165만 명의 한민족이 살았던 것으로 집계된다.-일본의 패망과 조선족의 대거 귀국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조선이 독립하자 약 50만 명의 한민족이 한반도로 귀국한다. 이들의 대부분은 독립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사람,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 조국에 재산이 있는 사람, 만주에서 친일 활동을 했던 사람 등이다. 반면, 생계 대책이 막막해 자진해서 중국에 남은 사람과 함께 해방 이후 사회적 혼란, 38도선에 의한 분단 등으로 중국 동포의 귀국은 중단되었다. 이로써 대부분 농민으로 구성된 약 150만 명이 현재의 동북 3성에 집단으로 거주하며 현 조선족 사회를 구성했다.2.한민족의 중국 정착: 연변조선족 자치구 설립이주규모가 커짐에 따라 중국 동북지구의 한민족 거주 지역도 넓어졌고, 한민족 사회도 많이 형성되었다. 통상 만주라고 지칭되고 있는 중국 동북 3성의 조선족 분포를 보면, 랴오닝 성에는 평안도 출신, 옌변을 포함하고 있는 지린성에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함경도 출신, 헤이룽장성에는 경상도와 전라도 출신이 주로 이주했다. (한국일보 편, 1990: 201)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고, 1952년 9월 3일 주덕해(본명 오기섭, 1911년 생)를 자치구장으로 하여 인민정부의 승인 하에 연변 조선족 자치구가 세워졌다. 1955년에는 인민정부의 소수민족 우대정책과 함께 조선족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자치구가 자치주로 승격되고 우리말을 공용어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가난과 굶주림을 피해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갔던 한민족은 국경을 고 한족에 비해 중국 동포의 생활은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특히 중국 동포들이 주로 거주하는 연변 지역은 수자원과 수력발전, 삼림, 석탄 등의 풍부한 지하자원과 우수한 자연경관으로 인한 관광자원이 무수히 많지만 지리적 특성상 중국의 국가 주도적 경제 발전에서 제외되었다.1996년 1인 당 GDP는 중국 평균이 5,576 인민폐였는데, 연변지역은 4,871인민폐로서 전국 평균보다 낮은 형편이었다. 또한 1978년 개혁개방 이후에나, 1991년 두만강 개발이 시도된 이후나, 1992년 한중간 외교관계가 성립된 이후에도 연변 경제는 여전히 중국의 평균에 비해 저성장을 기록해 오고 있다. (1991-95년 사이의 중국 전체 GDP 연평균 성장률은 12%였으나, 연변은 7.6% 밖에 안 됐고, 같은 기간의 1인당 GNP연평균 성장률은 중국평균이 11.6%였는데, 연변은 7.1%에 불과했다. )경제적인 측면 뿐 아니라 정치, 사회적으로도 중국 동포의 생활은 항상 불안정 했다. 대표적인 예로 문화 혁명 기간 중에 희생된 수많은 조선족 지도부층을 들 수 있다. 문화 대혁명은 공산주의 이념아래 13억 중국인의 평등과 단합을 외쳤기 때문에 56개의 소수민족은 중국의 단합을 해치는 그런 존재로 간주되었다. 특히 각 소수민족의 언어와 문화, 정체성을 지키는데 주도적인 지도부층은 민족 분파주의자로 몰려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Ⅲ. 중국 동포의 남한 진출1. 중국 동포의 남한 진출 실태?중국의 개혁개방정책에 따른 조선족 사회의 변화중국 동포들이 중국 내에서 집단을 이루고 우리의 말과 문화를 지켜나갔지만 한족과의 접촉으로 인해 특이한 형태로 변형된 부분들 역시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언어의 경우만 보아도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공식 언어는 한?중 2개 국어로, 관청의 간판도 2개 국어 모두를 표기한다. 대부분의 중국 동포들이 한국말을 하지만 도시로 갈수록 중국어 사용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는 도시에 사는 조선족 어린이 중에는 우리말을 아예 못하는 경우도 있으며, 연변 대학에서도적이다. 2000년 까지만 해도 친척 방문 허용 연령은 50세 이상이었으나 2002년 11월 중국동포에 대한 교류 증진, 포용 정책 차원에서 친척방문 허용연령을 종전의 45세 또 40세로 하향조정하여 시행한다.대상은 국내의 배우자, 8촌 이내의 혈족 또는 4촌 이내의 인척을 방문하고자 하는 자로 40세 이상인 자이다. 단, 한중수교(92.8.24) 이후 국민과 결혼 등의 사유로 한국국적을 취득한 자가 중국거주 친척을 초청하는 경우 제외되었다.2003년 5월 10일 법무부는 취업관리제를 도입하여 중국동포들에 대한 고국방문 및 취업기회를 확대하기 위하여 친척방문 허용연령을 30세 이상으로 대폭 하향조정하고, 혼인·귀화 등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중국동포들에게도 일정한 범위 내에서 친척을 초청할 수 있도록 현행 중국동포 입국절차를 개선했다. 가족 당 연간 2명 이내에서 초청을 허용하고 입국 후 불법체류하지 않고 귀국하는 경우 대체인원 초청도 허용하기로 하였다.따라서 8촌 이내의 혈족 또는 4촌 이내의 인척으로부터 초청을 받는 30세 이상의 중국동포들은 주중공관에서 방문동거(F-1) 사증을 발급받아 입국하여 친척을 방문할 수 있게 되며, 또한 소정의 절차를 거쳐 음식점·청소·사회복지사업 등 6개의 서비스분야 등에서 합법적으로 2년간 취업할 수 있게 된다.현행 친척초청 허용범위는 25세 이상으로 하향 조정되었다. 그만큼 한국에 친척이 있는 동포들의 경우 입국이 수월해졌다.)3.합법적 입국의 한계와 그에 따른 불법 입국?친척초청 범위는 넓어졌지만, 한국에 친척이 없다하지만 문제는 200만 조선족동포 중 중 한국에 친척이 있는 인구는 30% 정도라는 것이다. 연변지역의 조선족동포들은 대개 북한출신들이 많은 지역이다. 따라서 연변 조선족 동포들은 결혼으로 귀화한 자들에 의한 친척초청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그에 따른 불법 입국과 위장 결혼-불법 입국한국으로 가려는 사람은 많지만 한국으로의 입국이 쉽지 않자 브로커들을 통해 큰돈을 주고 여권 및 초청장 위조 등의 방법으로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중국 동포들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구한다는 것은 쉽지 만은 않다. 때문에 고용주의 부당한 대우나 임금 체불 등의 횡포에도 중국 동포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또 고용 계약 기간을 연장조건으로 고용주에게 사례금을 줘야하는 경우나 재취업이 안 되어 불법체류 위기에 놓인 동포들을 상대로 여행사에서 70만원에서 100만원의 사례금을 받고 재취업 수속을 밟아주는 악순환이 계속 되고 있다.5.한국 정부의 노력한국 정부에서는 불법 입국과 취업, 이에 대한 사기 등의 피해를 막기 위해 다방면에서 정책적인 노력을 기울인다.-1999년 재외동포법 제정1999년 8월 12일 재외동포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중국동포에 대한 종교, 사회단체들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재외동포법이 미국과 일본의 동포에 비해 구소련, 러시아와 중국의 동포를 차별한 ‘차별법’이란 비판이 일었기 때문이다.이에 재외동포법은 1999년 8월 23일 중국동포의 집(김해성 목사) 동포 3인의 이름으로 헌법 소원이 제기되었다.-2000년~2001년 표면에 드러난 재한중국동포사회서울조선족교회와 중국동포교회를 중심으로 한국 정부가 중국 동포에 대한 포용정책을 펼쳐줄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하지만 법무부는 강제추방 위주의 불법체류자 단속을 강화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았고 많은 중국 동포들이 집단 시위, 단식 투쟁 등으로 대항했다. 이에 법무부는 20여 일만에 문구만 바꾸는 선에서 타협을 풀었다.2001년 11월 29일, 헌법재판소에서는 재외동포법 헌법불일치 판결문이 나왔다. 따라서 재외동포법은 2003년 12월말까지 개정되지 않으면 사장되는 법이 되고 만 것이다. 재외동포법 헌법불합치 판결이 나왔음에도 20만 명 가까이 추정되는 국내체류 중국동포들은 여전히 불법체류자로서 단속에 걸리면 강제추방을 당해 도피자의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됐다.-2002년 월드컵대회와 불법체류자 자진신고·출국유예조치2002년 3월 12일 법무부는 '불법체류자 종합방지대책'을 발표해 불법체류자 자진신고기간.
한민족 네트워크-한민족의 사우디아라비아 진출Ⅰ.서론1995년 1월 한국 정부의 공식 통계에 의하면 당시 우리나라의 '교포' 수는 5,228,573명에 이르고 있으며, 이중에서 중동과 아프리카에는 각각 9,356명과 3,316명씩 거주하고 있다. 이 수치는 전체교포수의 0.3%에 불과하지만 많은 한인들이 작은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그 중에서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 내에서도 한국인이 2569명으로 가장 많다. 때문에 한인 사회의 규모나 활동범위 역시 다른 중동?아프리카의 한인사회에 비해서 큰 편이다. 아래에는 한민족의 사우디아라비아로의 진출계기와 과정, 그 안에서의 역할과 삶, 한인 사회의 특징 등을 살펴보고자한다.Ⅱ.본론⑴1970년대의 세계 상황?1973-1974, 1978-1980 두 차례에 걸친 오일 쇼크1973년 10월 6일 이스라엘과 아랍국가 간에 제4차 중동전이 발발하여 아랍 산유국들은 이스라엘과 국교를 맺고 있는 나라에 원유 판매를 금지했고, 원유 값도 4배나 올렸다.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각종 물가가 급상승했고 원자재 가격이 폭등했다.?오일 쇼크로 인한 석유 무기화와 중동의 건설 붐(Boom)1970년대 세계 경제는 중?화학 공업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때문에 석유 파동은 세계경제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석유는 하나의 경제적 무기가 되었다. 대표적인 산유국들이 모여 있는 중동은 이른바 ‘오일 머니’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으며 석유 관련 산업은 물론이고 그 외의 사회 기반 시설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개발 붐이 일기 시작했다.⑵1970년대의 국내 상황? 6?25와 건설업의 발전남한과 북한의 3년 동안 계속된 전란으로 국토는 폐허가 되었고 산업시설과 도로, 항만, 철도 등 사회간접시설 대부분이 파괴됐다. 1950년대 전후(戰後)복구 과정에서 정부는 각종 시설물 공사를 발주했고, 도시 재건사업 과정에서 막대한 건설 수요가 창출됐다. 또 주한미군의 기지와 막사, 숙소, 군 주둔에 필요한 각종 시설 등이 한꺼번에 발주되면서 건설 시장은 활기를 띠게 되었고 고층 건물은 물론이고 대규모의 공사를 진행할 정도의 기술력 역시 갖추게 된다.? 박정희 정권의 제 2,3차 경제 개발 계획과 오일 쇼크박정희 정권의 제 2,3차 경제 개발 계획이 한 창 진행 중이었다. 한국 정부는 60년대 후반부터 수출 우선주의의 고도 경제개발 정책을 추진하였다. 오일 쇼크로 인해 한때 한국 경제 전반이 큰 타격을 받기는 했지만 중동에 건설 붐이 일기 시작하면서 중?화학 공업의 수출 증가는 물론이며 건설회사가 직접적으로 중동에 진출하게 된다. 이 시기 건설이 국부에 차지하는 비율이 중동 건설 붐이 경제 성장에 기여한 바를 고려할 때 개발시대의 절정이라 부를 수 있다.⑶한민족의 사우디아라비아 진출계기와 시작?삼환기업을 선두로 한 한국 건설회사의 사우디아라비아 진출과 근로자의 이주당시 동남아시아 등지로 진출했던 삼환 기업은 중동지역으로 눈을 돌려 1972년 8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발주된 알울라-카이바간 164Km 공사를 2400만 달러에 수주함으로써 사우디아라비아 진출의 서막을 열었다.그 뒤 1974년 동아건설은 421도로 건설로 사우디아라비아 외 중동지역에 첫발을 디디며 모두 12개, 4억 달러 규모의 공사를 시공했으며 얼마 안 있어 1975년 1월 현대 그룹이 진출하여 1979년 사우디의 주베일 산업항을 준공했다. 이 공사는 전체 금액이 무려 9억 4000만 달러, 우리 정부 예산의 25%에 달하는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그 외에도 1987년 쌍용건설과 비슷한 시기 금강산업이 큰 규모의 공사를 맡으며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한다.이렇게 큰 회사가 대규모의 공사를 맡으면서 많은 수의 한민족 역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단기적으로 또는 장기적으로 정착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개별적인 통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시 1975년부터 중동 각국에 진출한 노동자들은 1975년 6000명, 76년 1만 8700명, 78년에는 무려 9만 명 이상이 중동 건설 현장에 나가 땀흘려 일했다.⑷사우디아라비아에서의 한민족의 역할과 삶?사우디아라비아에서의 역할사우디아라비아로의 한민족의 거주는 건설회사의 진출과 함께 이루어졌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국인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그 외에도 식품 판매업자, 무역업자, 간호사, 의료요원, 선원, 종합상사와 무역진흥공사의 직원, 태권도 등의 체육 교류 종사자, 소규모 조경업자 등 다양한 편이다. 하지만 그 외 분야 종사자들은 건설업 종사자들이 진출함으로써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건설업 중에서도 한국인은 거의 건설 현장에서의 육체적 노동을 맡았다. 이것은 한국의 건설회사가 대규모의 공사를 시공하긴 했지만 건설기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설계는 기술 선진국에게 맡겨지고 한국은 단순 시공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한국인의 끈기와 인내는 현지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단적인 예로 삼환이 1차 제다시(市) 미화(美化)공사를 할 때, 제다 시장이 회교 순례기간이 시작되는 12월 20일 까지 공사를 끝내 달라는 요청을 해오자 삼환은 횃불로 밤을 새우며 공사를 진행했다. 횃불을 피워놓고 작업을 한 탓에 횃불이 장관을 이루어 시민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 이곳을 지나던 파이잘 왕도 이를 보고 감탄하여 부지런하고 성실한 한민족에서 공사를 더 줄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횃불 작업을 통한 공기 단축은 원가 절감으로 이어져 이후 우리 건설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상징처럼 되었다.?한민족의 삶과 한인사회먼저 건설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당시 삶을 살펴보면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작업 현장과 숙소가 도시에서 떨어진 사막에 위치해 있어 밤낮으로 불어대는 심한 모래바람에 시달려야 했고, 한낮에는 수은주가 섭씨 4,50도를 오르내리는 혹서 속에서 하루에 10-15시간 정도의 육체적 노동을 했다.또한 사우디아라비아는 우리와 종교와 풍습이 달라 엄격한 금녀(禁女), 금주(禁酒)의 나라이며 여가를 즐길 만한 오락이나 취미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노동자들은 건설 현장을 벗어날 기회가 없었고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 현지인들과의 접촉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어느 나라나 그렇듯 공사현장은 위험한데 특히 중동의 근로환경은 열악했다. 때문에 적지 않은 수의 한민족이 질병이나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니지만 중동에서 노사분규와 농성에 의해 기능공 316명이 강제출국 당하기도 했다.반면 건설업으로부터 발생하는 교민의 숫자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부분에서 발생하는 교민들은 현지인들과 교류하면서 정착해 나갔다. 당시 도로 등의 사회 제반시설이 크게 열악했고 무엇보다 기후, 문화, 관습 등의 차이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현지인들과의 활발한 교류로 더 뿌리 깊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해외 건설업이라는 큰 흐름이 사우디아라비아 교민의 밑거름이긴 하지만 교민 사회를 구성하는 주류는 건설업 출신 보다는 그 이외 부분에서 현지 적응 훈련을 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국내에서의 역할앞에서 말했듯이 한국의 건설 기업이 사우디아라비아로 진출 할 당시 전 세계는 오리 쇼크의 충격에 휩싸여있었다. 특히 강력한 정부 주도형의 수출지향 정책을 펴던 우리나라는 무역적자가 심화돼 국가 경제가 파산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외 중동진출이 본격화 되면서 1975년에는 6000면, 76년 1만 8700명, 78년에는 무려 9만 명 이상이 해외 건설현장에 나가 땀 흘려 일한 덕분으로 매년 2억7000만 달러에서 4억 달러 이상의 돈이 한국으로 송금되어 우리는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또한 해외에 파견되는 기능공들의 임금은 국내보다 3배정도 높아 이들에게 몇년만 고생하면 집을 마련하고 안정된 중산층 생활을 보장하는 길을 열어 주었다. 해외 건설이 중산층 확대에도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이다.⑸사우디아라비아 한인 사회의 특징?장, 단기 해외 근로자를 교민이라고 생각해야 할까사우디아라비아의 한인사회의 특징은 7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건설 붐을 타고 건설 노동자들이 대거 진출하면서 정착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노동력이 있는 남자들만이 단신으로 떠나서 작업장에서 집단으로 거주하고 기간이 지나면 집단으로 귀국하였고, 그들 중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특수한 형태로 현지에 남아서 돈벌이를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이민으로 정착한 형태의 교포로 남기보다는 장·단기 체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1.들어가며이 영화의 원작은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현재 실존하는「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회화 작품을 보고 화가가 그림을 그리게 된 과정을 작가의 상상력을 동원해 그려낸 작품이다.사실 수업시간에 이 영화를 봤을 때, 처음에는 아무런 기대감이 없었다. 영화를 접하기 전에 책으로 먼저 원작을 봤기 때문에 내용을 모두 다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책을 원작으로 해서 재구성한 영화들은 하나같이 실망스러웠기 때문이다.하지만 책을 통해서 화가와 하녀 사이의 잔잔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면, 영화에서는 교수님의 설명과 함께 더 깊게 들어가 화가와 하녀 사이는 물론, 당시 네덜란드의 예술과 중산층의 생활 등을 시각적으로 더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다. 때문에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계속 이 작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내 개인적인 감상과 함께 나름대로 더 깊이 생각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이 영화를 토대로 글을 쓰게 되었다.2.등장인물 및 줄거리 소개16살 된 네덜란드 소녀 그리티는 타일에 그림을 그리시는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게 되자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가족들을 위해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집에 하녀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리티는 집안일과 고기를 사오는 등의 잔심부름 그리고 베르메르의 화실을 청소하는 일을 맡게 된다. 무엇보다 화실을 청소하는 일은 흐트러진 물건들까지도 그 자리에 두면서 청소를 해야 하기 때문에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리티는 화실을 청소하면서 베르메르의 여러 작품들을 보고 그 경이로움에 점점 더 빠져들게 된다.요하네스 베르메르는 그림을 그려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한 가정의 가장이다. 예술적 자기만족을 느끼면서 그림을 그리고 싶지만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아내의 질책으로 인해 그것이 쉽지 만은 않아 늘 갈등을 느낀다. 하지만 새로 들어온 하녀 그리티는 왠지 자신의 그림들의 감동을 알아주는 듯 하다. 베르메르는 그리티에게 색의 신비로움에 하나하나 가르쳐 나가던 중 오고, 얼마 있지 않아 결혼을 하게 된다.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 던 어느 날 베르메르의 집이 파산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그림을 그리면서 꼈던 베르메르 아내의 진주 귀걸이를 전해 받게 된다.3.실감나고 빼어난 영상미와 잔잔한 긴장감위에서도 잠깐 말했던 것처럼 원작을 책으로 먼저 접하고 봤던 영화들은 하나같이 실망스러웠다. 줄거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책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등장인물의 이미지가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의 이미지가 너무도 틀리다는 이유가 더 클 것이다. 하지만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서는 배우들의 이미지가 하나같이 내가 상상했던 것과 비슷했다. 물론 그리티의 경우는 원작의 근거가 되는 실존하는 그림이 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겠지만 묵묵하면서도 근엄한 분위기가 묻어져 나오는 베르메르,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베르메르의 아내, 개구쟁이 아이들, 탐욕스러워 보이는 후원자 라이벤까지 모두가 그 역할과 너무 잘 어울리고 연기 역시 훌륭하다는 느낌을 받았다.영화의 기술적인 면에서는 전문적인 지식이 거의 전무하지만 왠지 모를 빛의 아름다움을 느꼈다. 특히 그리티가 화실을 청소하면서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을 때 들어온 빛으로 인해 영상이 더욱 아름답게 보였던 것 같다.사람은 누구나 자기와는 다른 무언가에 그 차이를 느낄 때 신비감과 미적 매력을 더 많이 느끼는 듯 하다. 나 역시 동양인으로써 우리 문화와 생소한 네덜란드 문화의 차이로 인해 더 큰 신비감을 느꼈던 것 같다. 소품, 배경, 영화 속의 그림 하나하나가 나의 관심을 끌었다.무엇보다도 특별한 사건이나 반전이 없기 때문에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원작인데, 그리티와 베르메르의 사건이 일어날 듯 말 듯 하면서 일어나지 않는 긴장감을 영상으로 잘 표현해서 지루하기는커녕 다 알고 있는 줄거리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사실 지금까지는 영화를 상업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고 책이나 다른 예술 분야에 비해 쉽기만 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영상미’의 효과라는 것을 란드는 자본주의 물결의 중심에 있었다. 해외 무역으로 인해 네덜란드에는 온갖 진기한 물품들이 드나들었고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었다.이런 자본주의의 발달은 자본가라는 ‘제3의 신분’을 탄생시켰는데 이들은 바로 네덜란드 미술의 경제적 원동력이었다. 이전에 미술을 뒷받침 했던 교회나 정부보다는 오히려 일정한 재산을 갖춘 시민들(최초의 부르주아 계급)이 그림을 주문했다. 그래서 그림의 소재도 성서나 고대신화에서 점차 일상적인 생활 모습으로 변모해갔다.?자본주의와 예술나는 이런 자본주의의 발달이 미술에도 생각이상의 변화를 끼쳤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자본가를 위한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 그림은 예술적 가치를 뛰어넘어 경제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즉, 예술이 개인의 창조적 욕구의 발산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직업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예술품에 가치를 매기고 그 가치에 따라 거래되고 예술품을 산 사람은 감상의 즐거움을 예술가능 창조의 즐거움과 함께 경제적 부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두 번째로는 미술이 더욱 더 발전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기존 종교화에 얽매여 있던 미술계에서는 소재와 표현방식들이 비교적 자유롭지 않았다. 때문에 예술가의 창조의 표현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소재와 표현 방식이 자유로워지고 다양해짐에 따라 미술의 발전이 뒤따르지 않았을까한다.반면 그 양면성으로 이런 예술의 자본주의화 현상은 그 이전의 예술이 종교에 제약을 받았던 것처럼 자본의 제약을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다. 즉 개인의 창조성이 아무리 잘 표현된 작품이라고 해도 자본의 인정을 받지 못했을 경우는 생계에 지장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대중과 자본의 제약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5.영화 「왕의 춤」과의 비교「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란 영화를 보면서 앞서 봤던 영화「왕의 춤」이 계속 생각이 났다. 차이는 있기는 하지만 「왕의 춤」역시 예술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단적인 가장 큰 차이는 「왕의 춤」은 16기 프랑스 궁정의 루이 14세를 중심으로 한 권력 구도를 예술을 통해 그린 영화이다. 당시 프랑스에는 왕을 중심으로 왕에게 군대를 보조하는 봉건 귀족, 자금을 보조하는 신 부르주아 계급이 팽팽한 권력 다툼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루이 14세가 음악가 몰리에르를 후원하고 몰리에르는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보답한다. 루이 14세는 몰리에르에 의해 창작한 예술을 권력을 나타내고 유지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하지만 몰리에르만 루이 14세에게, 즉 예술만이 권력에 이용된 것이 아니었다. 몰리에르는 훌륭한 예술 작품으로써 루이 14세의 후원과 동시에 경제적 부, 권력, 더 나은 예술 창작을 위한 조건을 갖추게 된다. 이렇듯 당시 예술과 권력은 공생의 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서의 예술과 경제「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서는 예술이 경제적 도구로 이용된다. 즉 자본가는 예술가의 예술작품으로 감상의 즐거움을 느낌과 동시에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부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삼았다. 한편 예술가는 자신의 창작물에 따른 일정한 경제적 대가를 받고 그 대가를 바탕으로 다시 예술 작품을 창작한다.?왜 예술이 권력과 경제에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되는 것일까이런 관계들은 당시뿐만이 아니라 현재의 사회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면 도대체 예술의 어떤 면 때문에 예술이 권력에서, 경제적으로 이용되는 것일까. 이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 인간의 습성과 예술의 습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한다.먼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자신을 정의하는 기준은 다름 아닌 항상 주위의 타인이기 마련이다. 나의 경제적 부는 타인과 비교함으로써 넉넉한가 모자른가를 판단하게 되고 그 외의 것들도 마찬가지 이다. 또한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부나 지위, 권력 등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고 생각한다. 타인과 비교하여 타인보다 우월함을 확인하여 안도감을 찾고, 타인의 부러움을 사고 싶어 하는 최소한의 욕구 말이다. 때문에 인간은 예술 등의 수단을 이용하여 권력이나 경제적 부를 표현하고 싶어. 또 일본의 노부가나는 세분화 된 다도의 예를 통해서 권력을 표현한 것처럼 말이다.예술의 특성을 살펴보면 첫째 예술은 하나의 문화로써 인간의 본능적 욕구의 표현과도 같지만 다른 기본적인 욕구 즉 먹고 자는 등의 것들이 충족되어야만 즐길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며칠 동안 굶어 아사 직전에 있는 거지에게는 아무리 훌륭한 그림과 음악도 빵 한조각의 가치도 지니지 못한 것이다.그렇다면 둘째 먹고 자는 등의 욕구가 충분히 충족되어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경제적 부와 사회적 신분과도 직결되는 문제이다. 즉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만 최소한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고, 또한 그런 경제적 여유는 비교적 높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셋째, 예술 문화 등의 유행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즉 비슷한 예술을 창작했다고 하더라도 창작한 사람 간의 사회적 지위의 차가 크다면 당연히 높은 사회적 지위의 사람의 창작물이 더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문화나 예술의 전파 능력을 지녔다는 것은 곧 신분, 능력, 권력의 문제와도 직결되는 것이다.넷째, 예술은 인간 고도의 정신문화라 할 수 있다. 물론 법, 예절 등이 예술 보다 아래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예술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법과 예절 등이 사람을 제약하는 형식적인 것임에 반해, 예술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인간 정신활동의 결정체이며, 예술을 즐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즐거움과 감동을 불러온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6.순수 예술이란 있을 수 있을까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예술은 권력, 경제 등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물론 예술가의 순수한 창작 동기를 모두 부정하고 권력, 경제적 부만을 위해서 예술이 존재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예술이 권력과 경제적 부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현상이 현재 사회에서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문이다.
대항해시대와 유럽 중심주의 형성Ⅰ.유럽의 대항해의 목적과 배경유럽이 대항해를 시작하게 된 시대적 배경에는 경제적인 원인이 가장 크게 자리잡고 있다. 15세기의 유럽은 하나의 시대적인 전환기로서 교황권이 ‘교회의 대분열’등으로 쇠퇴하기 시작하고 정통 카톨릭 교리에 대항하는 이단설이 대두하는 등 많은 혼란이 일어나면서 경제적인 관계가 사회를 주도하기 시작하였다.①이슬람권을 통한 동방무역에서의 금의 부족중세에 기독교와 이슬람은 경화에서는 상호 공생적인 관계에 있었다. 유럽과 이슬람권 사이에 이루어진 무역에 대한 결제수단으로 귀금속이 이동되어야 했다. 주로 유럽의 금이 동방으로 유출되었다. 유럽은 은본위제였고 이슬람권은 금본위제여서 유럽인들이 동방에서 향료 및 동방의 특산품 등을 구매할 때는 결제수단으로 금을 지불해야했기 때문이다. 유럽내의 귀금속은 이슬람권을 거쳐 인도와 중국방향으로 끊임없이 유출되었다. 유럽은 비단, 후추, 향료, 약제, 진주 등을 얻기 위해서는 금과 은을 지불해야 했다. 이 때문에 유럽의 무역수지는 대략 1820년대까지 적자인 채로 남아있었다.금의 공급이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해상로를 통해 금광을 찾으려는 것이 초기 포르투칼 탐험가들의 목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물론 귀금속에 대한 욕구는 중세 전반에 걸쳐 매우 높았다.②동방무역에서의 주요 수입물품인 후추, 향료의 수요 증가중세말부터 서구에서는 육류의 소비가 급증하게 되어 15~16세기에는 일반 민중들도 육류위주의 식생활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직 냉장수단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질긴 육류를 저장하기 위해서는 후추류나 향료가 많이 사용될 수밖에 없었다.향료가 육류를 저장하는 데에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귀족들이 즐겨 사용하는 최음제인 히포크라스에도 사용하였다. 그러나 중세시대에는 기독교권 지중해가 이슬람 세력에 의해 봉쇄당하여 후추와 향료가 모자라게 되었다. 게다가 12세기에 들어서면 향료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어 더 이상 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③밀과 설탕의 경작지 발견 목적또한 15세기와 16세기에 걸쳐 밀이 유럽의 식량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밀은 새로운 경작물로 그 중요성이 더욱 커져갔고, 사업에서도 주요 거래물품이 되어갔다. 고디뉴(Maglahaes Godinho)의 주장에 의하면 포르투칼이 대서양 제도로 진출하게 된 것은 밀과 설탕 등을 재배할 경작지를 찾고자 하는 데 한 원인이 있었다. 밀은 새로운 주 식량원이 되어갔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점차 커져갔고, 설탕은 지력을 많이 소모시키기 때문에 한번 수확하고 나면 다른 토지에 재배해야 했으므로 새로운 경작지를 계속 발견해야 했던 것이다.④종교적 요인-이슬람과의 전쟁당시 기독교인들의 성지라 말하는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수차례의 십자군 전쟁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동로마는 멸망까지 이르게 된다. 그래서 유럽은 기독교 왕이 다스리는 선교사 존(Prester John)의 왕국이 있다는 이야기가 퍼져 선교사 존의 왕국을 찾아 연합하여 이슬람을 물리치고 기독교를 전파하려했다.또한 부가적으로 항해 장비와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원양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모험심을 자극했다는 기술적 요인도 있다.Ⅱ.유럽 대항해 시대의 전개 과정①아프리카 탐사유럽의 대항해의 처음 시작은 포르투칼의 엔리케 왕자의 아프리카 항해이다. 엔리케는 1415년 카나리아 제도까지 항해하고 코나크리 부근까지의 아프리카 서해안이 발견된다. 엔리케의 뒤를 이어 1486년에는 포르투칼의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 최남단인 희망봉에 다다랐다.②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제노아인인 콜럼버스는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인도를 찾아 항해를 시작한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인도가 아닌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지만 이것은 인도 대륙이라고 믿는다. 이 후 다른 항해자인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가 인도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고 그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라는 이름이 지어진다.또한 1498년 영국함대의 함장 카보트는 뉴펀들랜드를 발견하여 아메리카의 북부해안을 탐험했다.③인도대륙의 발견1498년 포르투칼의 바스코 다 가마는 인도에 이르러 캘리컷에 입항한다.그 외에도 바스코 다 가마와 카보트가 동시에 브라질을 발견하고 1513년에는 누녜드 드 발보아가 다 리엔 꼭대기에 올라 유럽인 최초로 태평양을 내려다가 본다. 불과 100년만인 1518년에 포리투칼의 배는 중국의 광동과 일본까지 항해하기에 이르고 1519년부터 1522년에는 마젤란이 세계최초로 세계일주에 성공한다.Ⅲ.유럽의 팽창과 유럽중심주의의 형성유럽 각국의 항해로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세계들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고 압도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잠식해 들어간다. 또한 아프리카와 동방의 문화는 유럽 자신들의 것과 너무나도 다른 것이었기 때문에 비유럽의 문화를 후진적이고 야만적인 문화로 치부해버렸기 때문에 유럽 자신이 타문화권보다 우월하다는 유럽 중심주의에 사로잡히고 만다. 또한 여기서 그치지 않고 유럽의 문화에 동요되기를 강요하면서 식민지 지배를 일삼는다.식민지 쟁탈에서 유럽이 가장 크게 노렸던 것은 역시 경제적인 이득이었다. 금광을 찾아내서 금 획득에 전력을 다했고 그곳의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아 노동력을 착취한다. 즉 유럽인들에게 비유럽의 모든 것은 사람이거 문화이건 유럽 자신보다 하등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비유럽은 유럽의 이용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