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2년 04월 15일 목요일 (날씨 맑음, 먼지 370㎍/㎥, 소음 90㏈)오늘은 제 24대 국회의원 총 선거가 있는 날이다. ‘어느 정당을 뽑아야 할까’ 사실 나는 당일 날 아침까지 정하지 못했다. 일단 선거에 많은 정당들이 나왔지만 승부는 네게의 정당으로 좁혀질 전망이라고 뉴스는 전하고 있었다. 각각 ‘에너지 소비율 감량’ 정당, ‘실업률 최소화’ 정당, ‘의료 복지 활성화’ 정당, 그리고 마지막으로 ‘엘리트 선진 교육’ 정당이었다. 각 정당의 이름에서 느껴지겠지만, 요즘 대부분의 정당들은 많은 공약을 내세우는 대신에 단일 현안을 내세워 투표자들의 표를 공략하고 있다. 예전의 정당처럼 정당의 이미지로 승부하기 보다는 단일 현안 그 자체로 승부를 보겠다는 심산이다. 때문에 나는 현재 나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정당에 대해 다시 한번 꼼꼼히 검토해 보았다.)결국, 나는 ‘실업률 최소화’ 정당에 표를 던지기로 결심했다. 실업률은 현재 나에게 큰 위협이 되는 요소는 아니다. 그러나 나의 삼촌의 경우를 보면 이 현안의 실현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한 달 전, 나는 삼촌이 몸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삼촌 댁을 방문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삼촌은 얼마 전 일하던 공장에서 해고를 당하신 상태였다. 그 공장은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회사였고, 삼촌은 그 곳에서 20년 넘게 일해 오셨다. 하지만 최근 그 공장은 기계들이 노동자들을 완전 대체하는 시스템을 완비했다. 본사에 관리직원들만 일부 남고, 공장 노동자들은 전원 해고를 당했다.요즘 뉴스를 보면, 노동시장의 심각성을 직감할 수 있다. 예전엔 노동조합 등이 파업과 같은 방법으로 그나마 자기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기계가 인간의 모든 기능을 기계가 대체하면서 노조는 와해됐다. 즉,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상실한 것이다. 기술력이 진보를 거듭하면서 공장의 기계화, 자동화율이 높아졌고, 그에 발맞춰 노동자들의 실업률은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었다.)삼촌은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으셨다 예전에는 뉴스에서 확인하던 득표 경과를 이제는 중앙선거위원회의 중앙 통제 시스템이 각 가정에서 보내온 투표들을 즉각즉각 합산하여 실시간으로 그 경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2시쯤 경과를 확인했을 때는 ‘실업률 최소화’ 정당이 전체 45.3%로 1위를 달리고 있었고, ‘의료 복지 활성화’ 정당이 38.7%로 그 뒤를 쫓고 있는 형태였다. 투표가 끝난 시각인 6시에 바로 결과가 나왔다. ‘실업률 최소화’ 정당이 총 48.9%로서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국민들 대다수 역시 실업률을 국가 최고의 해결 과제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 같다.2032년 05월 26일 수요일 (날씨 흐림, 먼지 245㎍/㎥, 소음 88㏈)한 달간의 성과급이 내 계좌에 들어왔다. 이번 달은 성과가 좋아서인지 저번 달보다 대략 10% 가량이나 많은 금액이었다. 저번 달에는 6500 월드(World)였는데, 이번에는 무려 7200 월드(World)나 들어온 것이다.) 월급이 들어왔으니 우선 부모님께 생활비를 보내드렸다. '2000월드면 생활하시는데 불편함은 없으시겠지...' 내 아이들에게도 용돈으로 200월드씩 입금해 주었다. 10년 전이었던가? 그 때부터 화폐는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화폐의 실체가 사라졌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 대신에 가상 화폐 즉, 전자 화폐가 생겼다. 지금은 자기 고유 카드 한 장과 잃어버렸을 경우를 대비한 여분의 카드만 있으면 된다. 그 고유 카드 하나로, 내 아이들은 대중교통 수단도 이용하고, 군것질도 하고, 학교 수업에 필요한 준비물도 산다.) 몇 달 전에는 둘째 아들이 그 고유 카드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동사무소에 다시 카드를 신청해야 했다. 다행히 아들의 지문이 중앙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카드가 발급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이번에 전기세, 수도세가 얼마나 나왔더라. 오, 이런! 전기세 55월드, 수도세 187월드나 나왔다. 아들들한테 물과 전기를 아껴 쓰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물을 아낌없이 쓰는 버릇은 어렸을 적 날 니 말이다.아내의 옷을 산 다음, 6층에 있는 전자 매장으로 갔다. 많은 종류의 재활용 수도 변환기가 나와 있었다. 단순히 물 재활용의 기능만 있는 것은 약간 쌌고, 여기에 담수화 처리 기능까지 있는 것은 좀 더 비쌌다. 직원은 담수화 처리 기능이 첨가 된 제품을 가리키며 매장 내 최고의 인기 상품이라고 얘기했다. 비싼 가격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담수 가격의 절반도 안 되는 해수를 구입하여 담수화시키는 것이 훨씬 이익일 것 같긴 했다.) 결국, 아내와 나는 그 제품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아들들한테 앞으로 목욕했던 물은 재활용 수도 변환기에 넣어 재사용하라고 교육했다. 집에서 작동시켜보니 깨끗한 물로 변환시키는데 대략 10분 정도가 소요됐다. 오늘 밤부터 재활용 수도 변환기를 사용해 보았다. 아내가 세수를 하고, 그 물을 변환기로 정화시킨 다음 다시 내가 세수를 하였다. 다음 달에는 수도세를 150월드 이하로 줄여볼 생각이다. 아들놈들이 불편하더라도 재활용 수도 변환기를 사용하는 습관을 길들여야 될 터인데... 수도세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잠이나 자자.2032년 06월 11일 금요일 (날씨 맑음, 먼지 256㎍/㎥, 소음 65㏈)중앙 컴퓨터의 자명종이 울렸다. 시간을 보니 아침 9시였다. 어제 늦게까지 일을 해서인지 일어나가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일어나서 대충 씻고 부엌으로 가니 중앙 컴퓨터에 의해 요리된 토스트와 계란이 놓여있었다. 토스트와 계란을 가지고 내 작업실로 갔다. 10시에 동료들과 가상 회의가 있기 때문이다.나의 직업은 프리랜서이다. 7년 전까지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었으나 그만두고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고 비교적 자유로운 프리랜서를 하기로 한 것이다. 사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프리랜서로서 일하고 있다. 기획자가 인터넷에 자신의 프로젝트를 올리고, 나의 전문 분야와 그 프로젝트가 맞는 부분이 있으면 일을 신청하는 것이다. 기획자는 내 전자 이력서를 보고 채용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이번에 가상 회의에서 의논할 내용은 나를 포함한 로 하였다. 인터넷을 이용해 공연을 실시간으로 감상하는 온라인 감상 티켓 시스템은 9년 전에 도입되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공연의 온라인 감상 티켓을 구입하기만 하면 된다. 온라인 감상 티켓은 매진 될 염려가 없고 가격도 저렴했기 때문에 우리 동호회 사람들은 이를 즐겨 이용하였다. 7시 반이 되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거대한 스크린 위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모습이 보였다. 작업실의 오디오 시스템은 내가 마치 실제 공연장에 와있는 것 같은 착각을 줄 정도였다.)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감상한 뒤 우리 동호회원들은 다시 모니터 화면에 화상 대화창을 올려놓고 활발히 의견을 나눴다. 오늘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곡은 드보르자크의 9번 신세계 교향곡이었다. 동호회 사람들은 대부분 이번 공연이 훌륭하다고 얘기를 하였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신세계 교향곡이 더 끌린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한동안 계속 이 문제를 가지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솔직히 나로서도 어느 오케스트라가 더 훌륭한지는 감이 잘 오질 않았다. 그래서 난 동호회 사람들에게 이번 주 일요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신세계 교향곡을 연주하니까 그 공연을 같이 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동호회 사람들은 흔쾌히 동의했고, 결국 이 문제는 동호회 사람들이 그 공연을 모두 보고 난 후에 결론짓기로 하고 모임을 마무리했다. 메인 스크린을 끄고 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온라인 감상 티켓을 끊었다. 공연 시작 시간은 2032년 6월 13일 일요일 7시 30분, 공연 장소는 오스트리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홀, 그리고 나의 현재 거주지는 서울... 서울과 빈 그리고 그에 따르는 공간적 제약? 그것은 현재 나의 선택에 영향을 줄 수는 없다. 내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2032년 06월 29일 화요일 (날씨 비옴, 먼지 196㎍/㎥, 소음 85㏈)아들이 오늘 학교에서 돌아온 뒤 내게 성적표를 건넸다. 수학과 영어 점수는 만족할 만한 수준이었으나않은 과정이지만, 요즘 많은 대학생들이 그런 식으로 학사를 취득하고 있다. 예전에 나는 고려대학교 학생으로서 그 조직의 경계 밖으로 좀처럼 나가는 일이 없었지만, 최근에는 대학들의 경계가 약화되면서 학생이 원하면 동시에 여러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제도가 도입되어 있는 상태였다.)그렇지만 난 대학 마지막 1년을 영국에서 다니겠다는 아들의 결정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들아, 대학 마지막 1년은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아닌, 일본의 와세다 대학교를 다녀보는 것이 어떠니?” 동북아시아 연합이 출범했기 때문에 각 동북아시아 국가를 대표할 수 있는 대학교들의 학사를 취득하는 것이 훨씬 이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들은 유럽의 문화를 배우고 직접 느끼길 원하였다. 최근 뉴스에서 미국과 중동의 갈등, 팔레스타인에서의 분쟁 등 모든 국가적 분쟁들을 EU의 중재로 해결됐다고 하는 뉴스들이 흘러나온 것이 아들이 유럽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게 했던 것 같다. 사실 지구의 모든 평화적 움직임은 EU가 주도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듯했다. 최근 십년 간, 미국이 주로 자국의 경제 성장과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에 주력했던 반면에, 유럽은 경제 성장보다는 삶의 질 향상과 생태계의 보전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며 세계의 평화 공존과 번영을 위해 새로운 비전을 추구하였다.) 세계 최강대국은 여전히 미국이지만, 세계 분쟁의 주요 중재자 자리는 이미 오래 전에 EU에게로 넘어간 상태였다. 아들이 유럽으로 유학을 가길 원하는 것도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아들과 진로에 대해 오랜 대화를 나눴다. 결국 아들이 뜻하는 대로 대학의 마지막 1년은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다니는 것을 허락하였다. 유럽에 가서 아들이 좀 더 열린 자세로 남을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또한, 아시아권의 대학만을 다니는 것보다 유럽의 대학도 다녀보는 것이 아들이 세상을 보다 넓게 바라보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 마지막에 당부의 말을 잊지 않
2025, 다이어리2025년 05월 05일 화요일, 먼지 370㎍/㎥ 소음 90㏈어린이날이다. 20년 전의 오늘과 너무나 다르다. 20년 전 거리에는 환호하는 아이들로 넘쳐났고 그들의 손에는 언제나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 있었다. 모두들 물질 풍요의 시대를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서기 2005년 어린이날은 너무나도 삭막하다. 몇 명 어린이만이 세상을 다 가진 듯 거리를 활보하지만, 그들은 소수의 부유층 자녀들이다.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이미 어린이날을 잊었다.난 삼촌 댁을 찾았다. 삼촌은 얼마 전 일하던 공장에서 해고 당하셨다. 그 공장은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회사였고, 삼촌은 그 곳에서 20년 넘게 일해 오셨다. 하지만 최근 그 공장은 기계들이 노동자들을 완전 대체하는 시스템을 완비했다. 본사에 관리직원들만 일부 남고, 공장 노동자들은 전원 해고를 당했다. 요즘 뉴스를 보면, 노동시장의 심각성을 직감할 수 있다. 예전엔 노동조합 등이 파업과 같은 방법으로 그나마 자기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기계가 인간의 모든 기능을 기계가 대체하면서 노조는 와해됐다. 즉,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상실한 것이다. 기술력이 진보를 거듭하면서 공장의 기계화, 자동화율이 높아졌고, 그와 발맞춰 노동자들의 실업률은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삼촌은 나에게 많은 고민을 털어놓으셨다. 정부에게서 취업을 위한 재교육을 의무적으로 받도록 통보가 왔던 것이다. 그러나 삼촌은 이 교육으로 인해 다시 재취업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아셨다. 솔직히 그러하다. 예전에도 그렇지만 현재는 더욱 많은 직업들이 고도의 지식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전문 지식을 필요로 하는 직업에 나의 삼촌과 같은 블루컬러 노동자들이 의무 재교육을 통해 쉽게 취업하기란 그야말로 ‘하늘에 별 따기’이다. 삼촌은 그래서 현재 여러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고 하셨으나 신통한 만한 것이 없다고 하셨다. 대부분의 공장은 새로운 노동자를 필요로 하지 않고, (이 역시 기계들이 대부분 노동자를 대체한 다고 믿고 계신 것이다. 삼촌은 자식들이 실리콘컬러 노동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나마 실리콘컬러 노동자들은 자기의 일자리에 대한 위협을 덜 느낀다. 실리콘컬러 노동자는 전문 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적정 수준의 소득과 고용보장이 가능하다. 나도 내 조카들이 훌륭하게 자랐으면 좋겠다. 그러나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고 양극화가 극심화된 세상이다. 이제 블루컬러 노동자의 아들, 딸들이 부모보다 나은 삶을 살 가능성은 희박한 것이 현실이다.삼촌 댁에서 나오는 나의 발걸음은 매우 무거웠다. 늙으신 삼촌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어린 동생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도 편치 않았다.2025년 06월 20일 토요일, 강수량 120mm 먼지 200㎍/㎥ 소음 80㏈오늘은 비가 왔다. 우산을 가지고도 외출하기 싫을 만큼 기분 나쁜 비가 쏟아졌다. 어머니께서는 앞으로 일주일 동안 필요한 갖가지 식재료를 사고 싶어하셨다. 평소에는 드라이브를 즐기기 위해서라도 직접 대형 상점에 가는 편이지만, 오늘은 날씨 때문에 인터넷으로 주문하기로 했다.요즘은 대형 마트를 가도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식재료도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것이 일상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영세 가게들은 대부분을 문을 닫았고, 현재는 몇몇 대형 할인 마트만이 남아 있다. 보통 대형 마트에 들어가도 예전의 그런 복잡한 분위기는 느낄 수 없다. 사람들도 별로 없을뿐더러, 우리가 사려는 물건 값을 계산하는 종업원들조차 간단한 인사 한마디 건네지를 않고, 계속 물건의 바코드만을 찍어댄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월별로 그 실적을 가지고, 해고할 사람들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상당수 할인 마트에는 아예 종업원은 없고 바코드를 찍어 계산하는 로봇들이 등장했다.어머니께서는 인터넷으로 야채와 과일, 돼지고기 등을 주문하셨다.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다. 굳이 밖으로 외출하지 않고도 집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 가능하니 말이다. 우리가 산 것은 구체적으로 토마토와 감자, 사과 한 상자, 돼지고기 3kg이었다. 토마토와 감자는 유전자 재조합으로년 수 만개의 일자리 창출을 그 목표로 여러 정책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 구조상 일자리 창출이 쉽지 않아 목표치의 절반도 이뤄내지 못한다. 게다가 그런 정책들은 대부분 일시적인 대책이지, 장기적인 대안일 수 없다. 정부 정책도 방향을 잃고, 뒤처질 만큼 세상은 무섭게 변했다.오늘 가족과 저녁을 먹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 내가 먹는 토마토 샐러드, 감자튀김, 돼지고기 삼겹살... 분명 20년 전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 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행복지수가 올라갔을까? 물질의 풍요와 여러가지 혜택이 과연 공평하게, 적절하게 분배되었을까? 우리가 배부르게 먹는 이 시점에, 가난과 실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 기계 문명이 가져온 이 물질적 풍요로움과 혜택을 많은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기 위한 사회적 장치는 과연 없는 것일까?2025년 07월 28일 화요일, 강수량 40mm 먼지 180㎍/㎥ 소음 80㏈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를 만나기로 한 날이다. 설렌다. 기대된다. 그 친구는 3년 전에 유학을 갔었다. 이름은 김성겸이라 하고 매우 착하고 성실한 친구이다. 성겸이와는 고등학교 때부터 절친한 친구였다. 그 아이의 특징이라면, 고등학교 당시 이중 국적을 가진 아이였다는 사실이었다. 성겸이의 부모님은 후에 자식의 유학을 쉽게 보내기 위해 미국에서 내 친구를 낳았다. 미국은 과거의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출생지에 따라 국적 취득권을 줬기 때문에 성겸이는 고등학교 때까지 미국과 한국 두 국적을 가졌었다. 우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을 때, 성겸이는 예정대로 미국 국적을 선택하고, 그 곳으로 유학을 떠났다.그 친구를 다시 보게 된 것은 아마 5년 전일 것이다. 성겸이는 미국에서 사회 경제학을 공부하고 돌아왔었다. 정말 몰라보리만큼 훌륭해져 있었다. 성겸이는 미국 월스트리트 가의 어느 회사에서 취직해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우리에게 미국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회사에서 일하는 것 자체는 국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자율성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과도하게 소비했고, 모든 욕구를 채우려 했으며, 지구의 자원을 낭비했다. 미국인들은 무제한적 경제 성장을 중시했으며, 강한 자에게 혜택을 주고, 약한 자에게 불리함을 주었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을 ‘선택받은 국민’으로 간주했으며, 따라서 지구의 자원을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차지할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서글프게도 개인 이익추구는 점차 순전한 이기심으로 변했고 국가 발전 동력이 되지 못했다. 결국 미국은 문화와 경제 모두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미국이 예전의 위상을 되찾기엔 그들은 너무 비대하고 속으로 곪은 문제가 많았다.난 성겸이에게 유럽인은 어떤지 물어보았다. 과연 유럽인의 어떤 점이 유럽이 미국을 넘어설 수 있게 하였는지 궁금하였기 때문이다. 성겸이는 유럽인과 미국인은 같아 보이면서도 매우 다르다고 했다. 미국인들이 우월감에 빠져 이기적이고 다른 국가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에, 유럽인들은 타국민 사람들마저 포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미국과 유럽의 차이라고 했다. 미국은 주로 자국의 경제 성장과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에 주력하지만, 유럽은 경제 성장보다는 삶의 질 향상과 생태계의 보전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며 지구의 평화 공존하는 번영을 위한 새로운 비전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최근 뉴스를 통해서도 자주 접할 수 있다. 지구의 모든 평화적 움직임은 EU가 주도하고 있다. 미국과 이라크의 갈등, 팔레스타인에서의 분쟁 등 모든 국가적 분쟁들은 EU의 평화적 움직임이 없었다면 깨끗하게 해결되기 힘들었을 것이다.난 성겸이와 저녁을 먹고 난 이후에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랜 친구가 좋은 이유는 바로 언제만나도 편안한 이런 기분 때문일 것이다. 레스토랑을 나와서 난 성겸이에게 유럽으로 언제 돌아갈 것인지에 대해 물었다. 성겸이는 3일 뒤 금요일에 아침 영국 런던 행 비행기를 탄다고 했다. 한국에 좀 더 머물고 가라는 나의 말에 성겸이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젠 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서 꽤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난 이 동호회가 꽤 맘에 들었고, 그들의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모니터 창에 서로의 화상 대화창을 여러 개 띄워놓고 서로 자기가 좋아하는 오케스트라나 지휘자, 교향곡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다. 원래 소심하고 사교성이 없는 나였지만, 온라인에서는 활발하게 대화에 참여했다.오늘은 그 사람들이랑 같이 공연을 보기로 하였다. 얼마 전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내한했는데 오늘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을 하기로 한 것이다. 오케스트라 공연 시각이 다가오자, 난 조용히 내 방으로 들어가서 컴퓨터를 켰다. 공연장에 가서 공연을 직접 볼 수도 있었지만, 공연 티켓 가격도 매우 비싸고, 이동의 번거로움이 있기 때문에 각자 집에서 실시간 동영상으로 감상하기로 하였다. 인터넷을 이용해 공연을 실시간으로 감상하는 것은 몇 년 전에 도입된 시스템이다. 공연장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질 만큼 컴퓨터의 오디오 시스템이 발달한 덕분이다.인터넷 등 정보고속도로의 확산으로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갔다. 때문에 국가란 개념 자체가 모호해졌고, 지역 간의 물리적 거리는 빠른 속도로 좁혀져만 갔다. 공연과 같은 것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연과 콘서트도 얼마 전에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이 제도를 도입하게 된 것이다. 아직 시간의 제약은 극복하지 못했으나 (시간의 제약을 극복하는 것은 저작권 침해와 관계되므로 아직 이것까지는 시행하지 않고 있다.) 공간에선 더 이상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미국이나 일본에서 열리는 공연도 어느 정도의 가격을 지불하면 정해진 시각에 집에서 보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 시스템을 알게 된 이후로 난 이것을 자주 이용하였다. 휴일에 여러 공연을 찾아보고 동호회 사람들과 같이 감상을 하고난 후에 토론을 하는 것을 즐겼다.오래 전에 빌게이츠가 이런 말을 했다. “정보고속도로가 생겨남으로 인해 사람들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질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의 고립을 가져오리라 생각하지는 않는이다.
목 차1. Prologue2. ‘사랑의 기교’는 남녀 간의 예절인가? 단순한 기술인가?2. (1) 사랑의 기교는 남녀 간의 예절일까?2. (2) 아니다. 사랑의 기교는 단순히 이기적 기술이다.3. 사랑의 기교는 ‘사회적 비윤리’를 조장한다.3. (1) 사랑의 기교는 ‘불륜’을 조장한다.3. (2) 사랑의 기교는 ‘강간’마저 용납한다.4. ‘사랑의 기교’에 드러난 남자와 여자의 위치4. (1) 오비디우스는 남녀 평등주의자다.4. (2) 오비디우스는 남녀 평등주의자가 아니었다.5. 에로스 사랑이여! 나에게 기쁨을, 그리고 쾌락을...5. (1) 오비디우스는 지나친 외모지상주의자?!5. (2) 오비디우스는 쾌락주의자다.6. 사랑으로부터 상처 받은 자, ‘사랑의 치유’를 읽어라.7. ‘사랑의 기교’에서 진정한 사랑으로...8. 책을 통해 오비디우스와 대화한다?! (구어체)9. 로마 최고의 시인, 오비디우스 (비유와 일화)18 -10. Epilogue1. Prologue오비디우스 (Publius Ovidius Naso)의 대표적 저서 ‘사랑의 기교’는 그 당시에도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한다. 사랑에 관한 그의 뛰어난 통찰력도 그 이유들 중의 하나지만, 책의 선정적인 내용과 남녀 관계를 피상적인 기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간주했다는 것이 사회적 파장의 주된 이유였다. 사실, 출판의 자유가 예전에 비해 많이 보장되었다고 볼 수 있는 현재에서도 ‘사랑의 기교’가 출판되었다면 논란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책이 쓰여졌던 당시의 로마 시대와 기독교 시대에서 ‘사랑의 기교’는 금서로 선정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독일의 위대한 시인인 단테는 오비디우스를 ‘신곡’에서 베르질리우스와 함께 위대한 문학가로서 존경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단테는 ‘신곡’에서 베르질리우스를 그의 스승이자 안내인으로서 삼은 반면에, 세속적 시인으로서는 오비디우스를 가장 존경받는 위치로 앉혀 호메로스나 루카누스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하였다. 단테는 왜 한때 금서를 저술했다는 오명을 (2) 아니다. 사랑의 기교는 단순히 이기적 기술이다.이 책이 논란이 되는 주된 이유는 남녀 관계에 대한 접근법 때문이리라. ‘사랑’의 가치는 분명 본질적 가치이다. 아니, 본질적 가치여야만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있으면 그러한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흔히 본질적 가치는 본질적 방법에 의해 얻어져야 된다는 이상론을 떠올리기 쉽다. 즉, 사랑이란 것은 서로간의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되고, 사람의 외모와 같은 피상적 가치보다는 내면과 같은 본질적인 것에 더 끌려야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비디우스는 여기에 대해 코웃음이라도 치는 듯 말 그대로 사랑을 얻기 위한 기교 즉, 기술(Art)을 제시하고 있다.위에서도 언급한 얘기지만, 남녀 간의 예절은 사랑의 기술과 어느 정도 통한다고 볼 수 있다. 둘 다 남들에게 호의를 얻기 위한 과정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기술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의 욕구나 욕망에 적합하도록 주어진 대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인간적 행위이다. 즉, 그 행위의 목적을 들여다본다면 둘은 결코 같은 대상일 수 없는 것이다. 예절은 자발적 의지에서 남을 기쁘게 하는 행위이다. 행위의 중심에 타인이 서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사랑의 기술은 위에서 얘기한 ‘기술’의 사전적 의미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행위를 통해 기쁨을 얻는 주체가 나 자신이다. 기술은 자신의 욕구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이기적 행동인 것이다. 사랑의 기술은 남을 위한 것처럼 보여서 간혹 예절로 비칠 수도 있지만, 그 행위의 끝에는 바로 나 자신이 있다. 제 3서에 나와 있는 여성답게 우는 방법, 걸음걸이 등을 예절이라 볼 수 있을까? 물론 그러한 방법들로 상대방의 호의는 얻을 수 있겠지만, 그들을 위한 행위는 아니지 않은가. ‘사랑의 기교’는 단지 상대방을 현혹하기 위한 기술에 불과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또한 ‘사랑의 치유’ 부분에서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의 결점을 끄집어내어, 자신의 상처받은 영혼에 위안을 주고자 한다. 위에서 언급한 사실이지만 결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것을 일반화시킴으로써 사람들에게 위험한 진리로 다가갈 여지도 있다. ‘거칠게 힘으로 밀어붙여라. 여자는 그런 것을 좋아한다. 여자들이란 흔히 그들이 정작 주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것을 마지못해 주기를 원한다.’ 강간이란 것은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든 그렇지 않든 간에 표면적으로는 상대방의 의사를 무시하고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즉, 이러한 행동을 부추기는 오비디우스에게는 여자가 인격체로 보였을 리 없다. ‘폭력이라니, 당치않은 말이다. 강간의 주범을 달래려고 애쓰는 데이다미아를 보라.’오비디우스의 ‘강간’에 대한 의견은 위에서 얘기했던 2번 사랑의 기교는 남녀 간의 예절이 아니라 단순히 기술이라는 의견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상대방의 의사를 진심으로 존중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의견은 절대로 내비칠 수 없다.러시아 출신의 ‘발레리 게르기예프’라는 지휘자는 최근 구스타프 말러의 1,3,7번 교향곡을 녹음한 이후 세간으로부터 엄청난 혹평을 받고 있다. 말러의 곡들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섬세함을 요구한다. 흔히 사람들은 짜증스러울 정도의 로맨스라고 말한다. 이에 반해, 게르기예프의 지휘 스타일은 ‘Rough’ 그 자체이다. 연주곡의 모든 세세한 요소들을 무시하고 뭉개버리는 것이 그의 스타일인 것이다. 게르기예프의 마초적 지휘가 차이코프스키나 라흐마니노프와 같은 대륙 풍의 러시아 음악과 어울릴 때에는 관객들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런 게르기예프가 섬세함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말러의 곡을 지휘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비평가들의 혹평은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한 것이다. ‘게르기예프가 녹음한 말러의 곡들을 듣고 있자면, 과연 그가 20대에 진정한 사랑을 해봤는지 의문이 든다.’ 세간의 대표적 혹평이다.마찬가지로 오비디우스가 말한 사랑의 방법들을 보고 있자면, 과연 그가 진정한 사랑을 해봤는지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다. 강간과 같은 그런 비윤리적인 사랑이 과연 20대의 청순한 사랑에서 있을 법한 일인가?! 사랑이란 것은 일방향적인 소소한 배려들이 여자들을 감동시키는 법이라고 얘기한다.그러나 여자의 경우는 어떠한가? 여기서는 여자의 외모가 연애의 필수 조건이 된다. ‘사랑의 치유’를 보면, 남자가 여자를 잊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가 그 여인을 아침 이른 시각에 방문하는 것이다. ‘여인이 아직 사람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아침 시간을 타서 불쑥 앞에 나타나 보아라. 여자란 옷이 날개이다.’ 참고로 나중에 뒤의 ‘플라토닉 사랑과 에로스 사랑’을 논할 때에도 강조하겠지만, 여자에게 있어서 ‘교양’은 그녀의 육체적 아름다움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하는 부가적 기능에 불과한 것이다.그렇다면 왜 오비디우스는 이토록 남자보다 여자의 외모를 강조했던 것일까? 그것은 그가 세상을 전적으로 남자의 시각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비디우스 자신이 바로 남자였던 점도 강하게 작용하였겠지만, 그 시대적 배경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시대의 유명한 문학가, 정치인 등은 모두 남성이었다. 때문에 그 시대 로마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시각도 당연히 남성 위주였을 것이다. 여자의 외모를 강조했던 것은 그러한 남자들에게 쾌락을 안겨다 주기 위해서라고 생각된다. 오비디우스가 자유 연애를 강조했다지만, 그것 또한 남자에게 쾌락을 보다 쉽게 안겨다 주기 위한 방편일 수 있다. 제 3서에서 여자들에게 자유 연애를 강조하는 부분에서 이러한 구절이 나온다. ‘고작 인간인 주제에 굶주린 연인을 거부하지 말고 여신들의 모범을 본받아 그들에게 기쁨을 주어라. 그들이 천 번의 쾌락을 얻어갈지라도, 기쁨은 그대로 살아 남고 잃는 것은 하나도 없다. 자꾸 사용하다 보면 쇠도 닳아 없어지고 부싯돌도 작아진다. 그러나 그 부위만은 끄떡도 않고 잃어버릴 염려도 없다.’ 이처럼 오비디우스에게 있어서 여자란 남자를 성적으로 만족시켜주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비디우스는 분명 남녀 차별주의자가 아니었음을 염두해 두길 바란다. 그는 그 시대의 정신에 충실했을 뿐이기 때문이다.5. 에로스 사랑이여! 나에게 기쁨을, 그리고 쾌락 있고, 쾌락의 끝에는 금욕이 있는 법이다. 여담일지 모르지만, 조선 시대 최고의 기녀 황진이는 죽기 직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내가 죽거든 관을 쓰지 말고 시체를 동문 밖 모래 터에 그냥 내처 개미와 벌레들이 내 살을 뜯어먹게 함으로써 천하 여인들의 경계로 삼아라.’ 어찌 보면 그 누구보다 큰 쾌락을 즐겼을 그녀가 천하의 여인들에게 금욕을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아마 쾌락 그 자체에서 큰 허무를 느꼈으리라. 반대로, 금욕적인 삶을 사는 수도승이나 수녀들을 보자. 그들을 무엇을 위해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인가? 그들이 굳게 믿고 있는 것은 내세에서의 보다 나은 삶이다. 극단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현세에서의 금욕적인 삶을 통하여 내세에서의 쾌락적인 삶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금욕과 쾌락에서의 중용을 추구하는 것이다. 금욕과 쾌락은 결국 뫼비우스의 띠처럼 계속해서 순환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형태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육체적 쾌락이 절대 사랑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남녀 관계의 사랑을 돈독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는 이용될 수 있다. 반대로 정신적 교류만으로 사랑을 할 수도 없다. 인간은 어느 정도 쾌락을 추구하는 동물이기에 정신적 교류를 빙자한 금욕은 남녀에게 모두 큰 억압으로서 다가올 수 있다. 즉, 플라토닉 사랑이 커다란 배경을 이루고, 에로스 사랑이 그림에 묘미를 더하는 식의 남녀 관계가 사랑의 참모습이 아닐까 한다.6. 사랑으로부터 상처 받은 자, ‘사랑의 치유’를 읽어라.이 책의 구조는 매우 흥미롭다. 사랑을 주제로 다루었다고 해서 남녀 간에 사랑을 이루는 방법만을 소개하고 있지는 않다. 오비디우스는 ‘사랑의 치유’ 또한 소개함으로써 잘못된 사랑으로 인해 상처 받은 영혼에게 치유를 선사하고 있다. 그리고 연인으로부터 멀어지는 방법까지도 소개하고 있다. 그 당시 최고의 시인이자 연애학자(?)다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럼 오비디우스는 왜 ‘병주고 약주고’ 식의 책을 서술할 수 밖에 없었는가?‘사랑의 치유’ 첫 다.
우리가 맞이할 미래는 ‘디스토피아’인가?-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보고-1982년도에 제작된 ‘블레이드 러너’는 2019년의 모습을 보여준다. 2019년은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정도 밖에 남지 않은 기간이지만 그 당시에만 해도 30~40년 후라는 까마득한 미래였을 것이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극단적으로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보여준다. 영화는 건물에서 불꽃이 치솟는 장면과 함께 시작을 하고, 영화 내내 비가 내리고 밤이 지속됨으로써 실제로 우리가 맞이할 미래가 ‘유토피아’적 미래만이 아님을 보여준다. 패트릭 딕슨이 쓴 ‘퓨처 와이즈’라는 책을 보면 “FUTURE”라는 이름으로 미래의 모습을 예견하고 있다. 패트릭 딕슨은 “FUTURE"의 각각 철자를 이용하여 미래의 모습을 제시한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는 퓨처 와이즈에서 논의한 universal (U-세계보편주의), urban (U-도시화), ethical (E-윤리성)의 문제가 잘 드러난다.)1. Universal (U-세계보편주의)세계의 교통 수단이 활발해지고 점차 시간적 거리가 단축됨에 따라 세계보편주의는 피할 수 없게 됐다. ‘블레이드 러너’에서는 그 같은 측면을 엿볼 수 있다. 일본인, 중국인, 이슬람인 등 다양한 인종이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건물에 비쳐지는 일본 광고와 식당 등을 통해 각 국의 경계가 모호해 졌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인종이 같은 지역에 살게 됨으로써 인간에게 ‘국가’라는 조직의 개념은 모호해질 수 밖에 없다. 라이디의 ‘세계화의 불안’을 읽게 되면 이러한 세계화는 우리가 피할 수도 또한 피해서도 안되는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세계화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발생되는 문제점들을 수정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많은 문제들을 야기하게 된다.) 세계보편주의는 거대한 다국적 기업의 성장, 다양한 문화들의 차이와 함께 한 인간의 정체성 확립 문제가 미래의 새로운 문제로 부각될 것이다. 그리고 세계보편주의가 몇몇 특정한 국가들에 의해서만 주도되어지면서 거대한 제국처럼 비추어 준다. 이러한 기업들은 특정 국가의 것이 아닌, 다국적 기업으로서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기업은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인만큼 그 영향력이 긍정적일리만은 없다. 예를 들어, 다국적 기업은 개발도상국의 값싼 인건비를 이용해 물건을 생산하고, 이를 그들에게 되파는 형식으로 이익을 남긴다. 이는 미래의 ‘착취’이다. 하지만 이러한 다국적 기업의 성장과 국가 경계 간의 붕괴는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의 균형을 가져다줄 수 있다. 다국적 기업의 오프쇼링은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의 부의 차이 정도를 좁혀줄 수 있다. 개발도상국의 인건비도 점차 상승할 것이고, 다국적 기업의 오프쇼링은 줄어들게 되겠지만 개발도상국은 선진국과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출 수 있다. 또한, 국가 경계 간의 붕괴는 개발도상국으로부터의 이민을 촉진할 것이다. 이는 개발도상국의 인구 압박과 실업 문제를 덜어줄 것이고 동시에 선진국들의 인구 감소와 노동 인구의 고령화에 따른 경제 문제들을 상대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발전을 유도하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제도적 장치가 세계화에 수반되어야 한다.)문화의 다양화는 자칫 인종간의 갈등으로 번질 수 있다. 이러한 갈등은 극단적 배타주의로 번짐으로써 주류의 인종이 소수의 인종을 노예화시키는 일도 발생할 수 있다. ‘블레이드 러너’에서는 인간이 복제 인간을 배타적으로 다루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복제 인간’이 실제 인간이 아니라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단순히 인간과 복제 인간의 갈등으로만 치부하기엔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너무 크다. ‘인간은 복제 인간을 이용한다. 그리고 버린다. 이에 불만을 품은 복제 인간은 인간의 세계에 테러를 가한다.’ 현재의 흐름과 많이 비슷하지 않는가? 불만을 품은 소수 인종들은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방법이 없어질 수도 있다. 결국,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테러를 감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매체와 통신’의 발달은 아무리 소수의 사람들일지라도 발언권을 보람의 국적이 모호해지는 미래에 국적을 묻는 것이 의미가 있는 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 자신은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이러한 문제에 답을 찾기 위해서라도 사람들은 ‘종교’에 의지하려는 경향을 보일 것이다. 혹자는 과학적 문명의 산물로 종교적 힘은 약화되리라 예상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것에 대한 안식처로서 ‘종교’의 중요성이 커지게 될 것이다. ‘종교’에 관한 것은 후에 윤리적 측면을 다룰 때 언급하도록 하겠다.마지막으로 강대한 ‘조직’들에 의한 일방적 세계보편주의이다. 영화의 첫 장면과 그 뒤의 장면에서도 일본의 광고를 많이 볼 수 있다. 이렇듯 주요 몇 개국의 의해 세계화가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어디에서나 일본의 음식은 팔지만, 파키스탄의 음식은 구하기 쉽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영화 감독이 ‘광고’를 통해 이러한 측면을 보여주었듯, 국가가 가진 자본의 정도가 세계화 주류의 정도와 비례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나 패트릭 딕슨은 모든 흐름에 다 반작용이 있다고 보았다. 세계보편주의의 반작용이 바로 Tribal (T-부족주의)이다. 세계화의 주류에 끼지 못한 대부분의 약소 국가에서는 이러한 부족주의가 만연해질 가능성이 크다. 세계보편주의와 부족주의는 서로에 대한 역트랜드이다. 그렇지만 난 이 두 개념을 상호 공존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화를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받아들이되, 전통적 특색을 살려나가는 것이다. 이는 문화의 획일화를 방지함과 동시에 위에서도 언급했던 개인의 자아 정체성 확립에도 적잖은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2. Urban (U-도시화)영화에서는 극도로 혼란스러운 도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거리는 각종 점포들과 쓰레기들로 쾌적하지 못하다. ‘깨진 유리창의 이론’에서 알 수 있듯이 혼란스러운 도시의 모습은 그 지역의 범죄율을 증가시킨다. 전형적인 ‘디스토피아’의 모습이다. 이러한 도시화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문제는 높아지는 도시 밀집도와 한 인간이 느낄 수 있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수업 시간에 배운 ‘기술의 사회 결정론’은 말 그대로 기술이 사회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일종의 ‘Co-Evolution’이다. 즉, 기술과 사회의 발전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현재 기술의 흐름은 교통 수단은 빨라지고, 통신 수단은 더욱더 발전해가는 것이다. 이는 미래에는 더욱 발달될 전망이다. 때문에 이러한 기술의 발전은 극심한 도시 밀집화를 막을 수 있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 인간은 삶의 질에 더 많은 투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미래는 대충 이러하다. 사람들은 도시의 혼란을 피해 근교지역으로 간다. 재택 근무를 하고, 상호 협조를 요구하는 일은 가상 회의를 통해 처리한다. 출퇴근이 사라지면서 남은 시간은 여가 시간으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업무차 실제로 만나야 되는 일이 있다 해도 지금보다 빨라진 교통 수단 덕분에 더 이상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또한, 영화에서는 도시화로 인해 인구의 물리적 거리는 가까워지지만, 심적 거리는 멀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등장인물 ‘세바스찬’은 자신이 직접 만든 로봇들을 통해 인간의 정을 대신한다. 인간의 역할을 기계나 로봇이 대신하는 경우는 해밍슨의 ‘사이버 섹스’에서 알 수 있다. 사이버 섹스는 테크놀로지에 의존하는 섹스를 지칭한다. 사이버 섹스는 인간이 기계의 일부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그로테스크한 수많은 미래 모습의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칫 피곤해 질 수 있는 인간의 관계보다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기계와의 관계에 더욱 흥미를 느낄 수도 있다. 이는 인간에게 소외감과 외로움을 갖게 하고, 인간이 기계와의 관계에 더욱더 빠지게 하는 악순환의 구조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미래는 이렇게 우울한 모습만을 포함하고 있는 것일까? 난 조심스럽게나마 작은 ‘희망’을 기대한다. 사회적으로 소외되던 ‘세바스찬’마저도 타이렐의 회장과 함께 가상 전화를 통해 서로 체스를 두며로서 제시한 부분이기도 하다. 위에서 소개했던 세계보편주의, 도시화 등등에서 드러나듯 인간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짐에도 불구하고 심적으로 메말라지며, 많은 사회적 위험에 노출되게 된다. ‘윤리’가 개입해야할 부분은 바로 이곳이다. ‘윤리’는 인간에게 정신적 안정을 제공해 줄 수도 있으며, 인간의 본질에 위협이 되는 일 등에 규제를 가한다. 하지만 현재의 ‘윤리’가 미래에도 같은 모습일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던진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면 알 수 있듯이, ‘윤리’라는 개념도 시대의 틀에 맞춰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킨다. 영화에서 보듯 복제 인간은 인간과 매우 흡사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인간과 같이 생각하며,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 지금의 ‘윤리’적 잣대로 평가하면 복제 인간은 단지 ‘로봇’에 불과하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데커드’가 ‘레이첼’을 데리고 도주하는 장면은 복제 인간을 인간으로 인정하는 윤리적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미래에는 분명 기존에 가지고 있던 윤리의 개념과 충돌할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으며, 우리는 기존의 관념을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윤리의 기준을 바꿀 것인지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될 것이다.인간에게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것은 윤리, 그 중에서도 ‘종교’이다. 미래에는 분명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질 것이다. 하지만 물질적 풍요로움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 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오히려 인간의 의식이 사회의 빠른 발전을 따라가지 못해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패트릭 딕슨은 그러므로 미래에는 ‘윤리’나 그 밖의 강한 정신적 세계로의 회귀가 일어난다고 전망한다. 영화에서 ‘데커드’가 꿈을 꾸는 장면이 나온다. 데커드는 꿈 속에서 유니콘을 본다. 여기서 유니콘은 혼란스러운 미래의 사회에서 ‘데커드’에게 심적 안정을 주는 영적 존재로 생각할 수 있다. 실제의 미래 사회에서는 ‘종교’가 그 역할을 주로 맡게 될 것이다. 사회의 빠른 변화로 피곤을 느낀 미래의 인간들은 상대적으로 정체되어 있고 절대
꿈에 관한 학문적 고찰꿈은 인간의 주된 관심사였다. 꿈을 꾸는 이유는 무엇이며, 또 그 꿈의 기능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수많은 학자들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왔다. 그러나 그 꿈의 본질에 근접한 이론은 지금껏 없었으며, 많은 학자들은 거기에 각자의 학설만을 주장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학자들은 꿈을 신의 계시로 여겼다. 그 결과 꿈은 ‘꿈에서 직접 받는 예언’, ‘코 앞에 닥친 사건의 예고’, ‘해석이 필요한 꿈’ 등으로 분류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이르면서 처음으로 꿈의 심리적 측면이 부각되기 시작한다. 즉, 꿈은 신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일종의 마성적 측면을 띤다는 것이다. 꿈의 초자연적인 면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직도 두 의견 간의 논쟁은 끝나지 않고 있다.가까운 현대에 와서는 다른 분야에서 논쟁이 일기 시작한다. 바로 꿈이 현실과 관계를 맺고 있느냐, 아니면 건널 수 없는 심연을 사이에 둔 것처럼 전혀 별개의 것이냐의 문제이다. 부르다흐와 슈트룀펠 등은 꿈은 깨어있는 동안의 의식세계에 등을 돌린다고 주장한다. 특히 부르다흐는 꿈에서는 낮의 삶이 절대 반복되지 않으며,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일종의 정신적 해방을 안겨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프너와 바이칸트, 모리, 그리고 로마의 학자 키케로 등은 꿈과 깨어있는 의식 세계의 연관성을 주장한다. 그들은 꿈과 우리의 깨어있는 의식 세계가 끊임없이 상호 작용을 한다고 말한다. 꿈은 우리의 정신과 지나치게 상반된 측면을 지녔기에 전자의 의견에 손을 주고 싶기도 하지만, 우리의 뇌 속에서 일어나는 정신 활동이기도 하기에 후자의 의견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다.꿈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꿈을 일으키는 인자로부터 꿈만의 특수성, 기능에까지 다각도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많은 학자들이 각자 자기의 의견을 개진하고 있는 만큼, 같은 현상에 대하여 일치를 보이기보다는 약간씩 다르거나 완전히 반대인 의견들도 종종 관찰된다. 하지만들 또한 모두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힐데브란트는 이를 증명할 만한 경험을 이야기한다. 자신을 깨우는 자명종의 소리가 경우에 따라 마을의 작은 종소리, 썰매에 매달린 방울 소리, 그릇 깨지는 소리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슈트룀펠과 분트는 자는 동안 뚫고 들어오는 자극에 대해 착각을 일으키는 조건 하의 정신이 그 원인이라 분석한다. 현실 세계에서는 감각인상을 충분히 숙고할 시간이 있기에 그 인상을 올바르게 해석한다. 하지만 자는 동안 정신이 외적 자극을 통해 받아들이는 인상들은 불분명한 성질을 지닐 수 밖에 없다. 인상을 통해 다소간의 기억 형상들이 일깨워지고, 이 형상들에 의해 인상이 심리적 가치를 부여 받게 되면서, 정신은 인상들을 근거로 착각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2-(2). 내적(주관적) 감각 자극내적(주관적) 감각 자극은 주관적 시각과 청각을 그 원인으로 들고 있고, 그 중에서도 주관적 망막 자극을 특히 주목한다. 어두운 곳에서 먼지에 불빛을 비추게 되면 새, 나비, 물고기 등 환상적인 형태로 우리 눈앞에 나타난다. 빛이 현란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움직이는 대상으로 자주 보일 수 있다.그러나 외적 감각 자극의 경우 관찰과 실험을 통해 자극 인자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반면, 내적(주관적) 감각 자극은 이를 증명하기 어렵거나 전혀 증명할 수 없다. 요하네스 뮐러는 여기에 입면기 환각이라는 증명 방법을 제시한다. 입면기 환각이란 깨어 있는 상태와 수면의 중간 단계에서 일어나는 환각을 말한다. 트럼벌 래드는 실제로 이러한 실험 등을 통하여 망막의 점 배열을 통해 꿈을 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래드는 거의 모든 시각적 꿈은 망막의 내적 흥분 상태에서 비롯되는 재료에 의존한다고 피력한다. 망막 고유의 빛 자극이 가지고 있는 무한히 변화 가능한 특성은 우리의 꿈이 보여주는 불안한 형상들의 흐름과 일치한다.2-(3). 내적(기관) 신체 자극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전혀 지각하지 못한 발병의 초기 상태를 꿈에서 깨닫게서로 도우면, 전체는 쉽게 기억이 남을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서로 모순되는 것은 무질서하게 혼란된 것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기억하기 어렵고 기억할 수도 없다. 꿈의 대부분은 이렇듯 질서가 결여되어 있으므로 이해하기 어렵다. 네 번째 원인으로는 꿈과 깨어있는 상태에서의 심리적 관계이다. 꿈은 깨어있는 삶에서 결코 정리된 기억이 아니라 그 부분들만을 받아들인다. 꿈은 깨어있는 동안 익숙한 심리적 관계로부터 부분들을 떼어낸다. 따라서 꿈의 구성은 정신을 채우고 있는 심리적 대열에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 눈을 깨는 것과 동시에 밀려드는 감각 세계가 주의를 독점해 버리는 상황 역시 같은 방향으로 작용한다. 감각 세계의 힘 앞에서 버티어 낼 수 있는 꿈의 형상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꿈을 망각하는 마지막 원인으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자신의 꿈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인보다 꿈 연구가들이 보다 자신의 꿈을 잘 기억하는 것이 좋은 반증이 될 것이다. 보니텔리는 슈트룀펠의 위와 같은 원인들에 다음 두 개의 원인을 덧붙이고 있다. 첫째는 수면 상태와 깨어있는 상태 사이에서 일어나는 전반적 감정의 변화이고, 두 번째는 꿈과 깨어 있는 의식에서의 표상 재료가 다르게 배열되기 때문이다.꿈을 망각하게 하는 원인이 이렇게나 많은데도 많은 꿈이 기억에 남아있다는 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다. 이러한 것들은 꿈의 기억 일반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에게 꿈의 가치를 심하게 떨어뜨릴 수 있는 문제 제기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꿈의 대부분이 위조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다. 잠에서 깨어난 의식이 부지중 많은 것을 꿈의 기억에 끼워 넣는 것은 다반사이다. 사람들은 실제로 꿈에서 일어나지 않은 많은 것을 꿈꾸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즉 우리가 과거에 꾼 꿈을 기억에 되살리는 경우, 부지불식 간에 무심코 꿈 형상들의 틈을 채우고 보충하기 때문에 거의 언제나 진실에 가까이 가기 어렵다. 길게 이어지는 꿈이 우리가 기억하듯 이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기과 정신 세계의 이질성을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꿈의 이질성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여기서부터 ‘꿈 속에서의 심리적 가치’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① 꿈은 심리적 가치를 수반하지 않는다.옛 연구가들은 꿈 속에서 심리적 가치의 역할을 평가 절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대표적인 꿈 연구학자 슈트륌펠은 꿈에서는 ‘감각적으로 활동하는 직관과 정상적인 삶의 의식이 중지되면서, 정신은 감정과 욕망 그리고 행위들이 뿌리내리고 있는 토대 역시 상실한다’고 말하다. 즉, 심리적 가치가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정신 안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방도를 찾아 헤매는 것이다. 수면 상태에서 심리적 기능을 수반하지 않는 것은 꿈의 정신적 이질성을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꿈은 특별한 동기 없이 극단적 대립을 결합시키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고, 낮 동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지식을 등한시하고, 윤리와 도덕에 둔감해진다.또한 뒤가는 꿈은 심리적, 감정적, 정신적으로 무정부 상태라고 주중한다. 꿈 속에서 나타나는 표상들은 제어 능력과 목적이 없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르무안 역시 꿈은 비일관적이라고 표현했다. 꿈 속에서는 정신의 논리적 작업은 뒤로 물러난다. 인과 법칙도 없고, 상식도 통하지 않는다. 요틀은 온갖 종류의 의식 활동이 꿈속에 나타나긴 하지만, 그것은 불완전하고 억제되어 있으며 서로 고립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슈트리커는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들어 설명한다. 꿈 속에서는 실제 사실들이 망각되거나 표상들을 맺어주는 논리적 관계가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말이다.그러나 심리적 가치에 대해 과소평가하던 학자들도 정신활동의 일부가 꿈에 남아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들은 정신 활동 중 ‘기억 능력’과 ‘정서 활동’은 수면 상태에서도 살아남는다고 얘기한다. 기억 능력은 때때로 깨어 있을 때보다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는 사실은 앞 1장 ‘꿈-재료 : 꿈 속의 기억’에서 얘기했다. 물론, 건망증도 있지만 이 기억 무관하다.우리는 경험론적 측면에서 이 주장이 옳게 여길 수도 있다. 나 또한 꿈 속에서 남에게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짓을 많이 저질렀고, 그런 꿈을 꾸고 나면 그 것을 잊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라데슈토크는 꿈에서 ‘우리의 판단력은 지극히 미약해지고, 우리의 정신력은 윤리적 무관심이 지배한다’고 말한다. 폴켈트는 꿈 속에서 우리는 성적으로 자유분방해지는데, 이것이야말로 꿈과 도덕의 무관성을 증명할 수 있는 사례로서 여긴다.하지만 이 의견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반박되어지고 있다. 현실 속에서도 우리는 ‘꿈에도 그런 생각을 없다’고 말할 정도로 어느 정도 꿈에 대한 책임 의식을 지니고 있고, 이는 자연히 꿈과 우리의 도덕성을 연결짓고 있다. 이에 대해 예센은 꿈에서 떠오르는 의도하지 않은 표상들에서 의지력이 휴식에 들어갔으며, 형상과 표상들은 내적 움직임에 따라 어느 정도 기계적으로 진행되는 특성이라고 바라본다. 부도덕한 꿈을 꾸는 것은 그 표상에 사람이 접한 것을 어느 정도 증명하는 셈이지만, 그의 정신이 직접 흥분했다는 것은 증명할 수 없다는 논리로 꿈과 도덕성의 무관성을 불씨를 살리고자 했다.5-(2). 꿈은 도덕성에 반응한다.우리는 흔히 자신의 죄나 잘못을 해명할 때 ‘꿈에도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즉, 우리는 꿈을 무의식중에 하나의 도덕적 의지로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하프너와 숄츠 등은 이러한 꿈과 도덕성의 관련성에 대하여 강력히 주장한다. 이들은 덕망이 높거나 성실한 사람은 꿈 속에서도 수치스러운 행위를 하지 않는 것처럼 인간의 도덕적 품성은 꿈속에서도 유지된다고 보았다. 칸트는 우리가 꿈을 꾸게 되면 도덕적 의식은 ‘정언 명령’으로서 우리를 바짝 쫓아다닌다고 보았다.하지만 이러한 논리가 진행될수록 우리는 새로운 불합의점에 봉착하게 된다. 꿈에 도덕적 가치가 정언 명령으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보면, 우리가 꿈에서 저지른 죄는 용서받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인가? 꿈 속에 인간의 도덕성이 사라진다고 바라보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