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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스타보 두다멜
    구스타보 두다멜세계를 정복한 엘 시스테마의 음악청년목 차서론본론1. 두다멜, 그는 누구인가?2. 그 에게 가르침을 준 사람들1) 호세 안토니우 아브레우2) 사이먼 래틀3) 클라우디오 아바도4) 다니엘 바렌보임3.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의 대표곡 ‘맘보’4. 두다멜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말러’5. 괴팍함? 다혈질? 다정다감 교회 오빠 같은 두다멜1) 친화력이 좋다.2) 다른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 준다.3) 긍정, 긍정, 또 긍정적이다.6. 엘 시스테마가 키운 두다멜1) 엘 시스테마2) 엘 시스테마와 두다멜4) 두다멜의 음악적 행보3) 엘 시스테마와 한국, 한국형 엘 시스테마의 한계점결론참고자료서론세계의 클래식계의 떠오르는 샛별, 클래식인들 모두가 한 젊은 지휘자에게 주목하고 있다.그는 구스타보 두다멜. 정통 클래식으로 유명한 유럽국가가 아닌 남미의 가난한, 클래식과는 상관없는 베네수엘라 출신인 점, 엘리트 교육을 받지 못 한 그저 그런 서민출신의 가정에서 자랐다는 점, 그러나 그는 어릴 때부터 꽈뜨로 라는 작은 기타 악기를 배우지 않아도 혼자 연주 가능하고, 다양한 리듬을 표현해 낼 줄 알고 하나를 배우면 열 이상을 아는 음악적 천재 였다는 점 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유발하게 한다.그리고 가장 중요한 베네수엘라 국가적 음악사업인 ‘엘 시스테마’는 두다멜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이야기는 중요하다.우리는 두다멜에 대해 파헤쳐 봄으로써, 베네수엘라의 사회, 엘 시스테마라는 프로그램에 대해 이해할 수 있고 나아가 그의 인생을 보면서 가난, 어려움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게 할 수 있는 한 가지 수단인 ‘음악’에 대해 그동안 알고 있던 ‘음악’의 뜻 그 이상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본론1. 두다멜, 그는 누구인가?두다멜은 베네수엘라 라라 주의 바르키시메토에서 살사밴드 단원인 아버지와 합창단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음악을 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그는 확실히 음악적인 면에서는가히 ‘신동’이라 할 만큼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두다멜의 할머니, 할아버지도 손자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고는 모차르트 음반을 사준다던지, 장난감 지휘봉을 사준다던지, 진짜 바이올린을 사준다던지 등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가정 속에서 자라난 두다멜은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마음껏 접할 수 있었고, 바이올린으로 시작해서 작곡과 지휘공부를 병행하며 그의 최종목표인 지휘자의 꿈으로 한발짝 한발짝 다가간다.그러던 중 1997년, 16세가 되던 해 호세 안토니우 아브레우 박사를 만나 집중교육을 받게 되면서 엘 시스테마로 입문하게 된다. 엘 시스테마에서 교육을 받은 후 두다멜은 자신의재능을 아낌없이 발휘하며 세계 클래식계를 놀라게 만들었고, 가는 곳마다 호평과 환영을 받았으며, 각종 대회와 콩쿠르 수상 등을 휩쓸었고 마침내 28살이라는 최연소의 나이에 LA필 하모니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으로 선임되게 된다.2. 그에게 가르침을 준 사람들1)호세 안토니우 아브레우아브레우 박사는 두다멜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스승으로, 베네수엘라의 음악교육 프로그램인 엘 시스테마(El Sistema)를 창시자이며 빈곤층 청소년 교화사업을 펼쳐온 베네수엘라의 음악가이자 경제학자ㆍ사회운동가다. 그는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인 할머니 할아버지에게서 어릴 때 부터 음악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외가가 있는 마을에서 다니던 학교에서 매주 열리는 ‘문화의 밤’에서 시낭송, 노래, 음악, 연극등의 예술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이러한 영향을 받으며 자란 그는, 7살이 되던 해 바르키시메토로 돌아와서 음악을 공부하기로 했고 그의 부모님도 전폭적인 지지를 해주셨다. 이후 거장들의 가르침 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살려나가던 그는, 오케스트라를 배우고도 관련 일을 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을 알고 후안 호세 란다에타 국립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만들었고, 이후 빈민가의 수많은 아이들이 경제의 빈곤함 속에서 마약, 총기, 포르노 등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것을 조금이나마 막고, 꿈과 희망을 주고자 엘 시스테마라는 국가적 프로그램을 출범시키게 된다.아브레우 가 어떻게 꾸려져 가는지, 그리고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를 가르치는 ‘봉사’를 위해서 베네수엘라로 갔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광경에 놀라고 만다. 공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아브레우 박사와 브라스 앙상블, 합창단이 래틀이 출국장 입구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멋진 환영공연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합창과 앙상블 공연이 생각보다 수준급이었던 것에도 그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이후 엘 시스테마 산하 오케스트라들을 돌며 많은 음악을 듣고, 특히 그가 평소 잡음이 많이 나서 연주하기를 꺼려했던 곡을 베를린에서 베네수엘라 청소년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것을 듣고는 눈물을 흘릴 만큼 많은 감동을 받았고, 전 세계에 베네수엘라 어린이,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알리는 중요한 후원자가 되리라 다짐하게 되었다. 특히 두다멜에게 애정을 가지고 집중지원을 시작한 그는 두다멜에게 다양한 큰 무대에서 많은 경험을 쌓게 해준 스승이다.3) 클라우디오 아바도아바도는 래틀의 베를린 필 하모닉과 엘 시스테마를 연결시켜준 사람이다. 아바도 덕분에베네수엘라의 젊은이들은 독일 오케스트라의 최고 교수진들에게서 수준급의 수업을 받을 수 있었고, 두다멜, 에릭손 루이스 같은 끼 많은 음악가들이 세계무대에 진출하고, 유럽무대에서도 환대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그는 구스타프 말러 청소년 오케스트라의 창시자이고, 우연한 기회로 두다멜이 지휘하는 어린이,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아바도는 ‘가난한 아이들과 젊은이들을 돕는다’는 엘 시스테마를 알고는 이에 매료 되었다고 한다.그는 아예 베네수엘라로 와서 장기체류를 하면서 여러 프로젝트를 추진시키기도 했고,두다멜에게 자신의 조국에서 열리는 큰 연주회에서 지휘를 하고 거장에게 조언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했다. 현재도 그는 엘 시스테마의 든든한 후원자다.4) 다니엘 바렌보임'현대 음악계의 거장'으로 불리는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이다. 아르헨티나 출생인 같은 남미출생인 두다멜과 둘도 없는 친구사이이다. 자신의 70번째 생일 콘서트에서 는 곡이다. 이를 복잡한 라틴음악을 기가막히게 잡아내는 두다멜이 지휘해서 라틴사람들 답게 활기찬 스타일로 만들어 냈고, 가히 반응도 굉장히 좋아서 간판곡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중간중간 악기를 들고 들썩거리면서 ‘맘보!’라고 외치는 부분들이 있는데 절로 어깨가 들썩거리기도 한다.4. 두다멜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말러’구스타프 말러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절망감이나 염세관, 괴기한 해학이나 초연한 탐미, 종교적이라고 할 만한 고독한 만족감을 표현했다. 근대음악 발전의 과도기에 속한 인물로 낭만파적인 교향곡의 마지막 작곡가라고도 할 수 있다.이 인물은 두다멜과 전혀 만난 적은 없지만, 두다멜은 ‘말러는 내 인생의 음악가’라고 말한다. 두다멜이 11살일 때, 말러의 곡을 처음 접했다. 삼촌이 실수로 CD를 잘못 가져다준 것이다. 하지만 어린 두다멜은 이곡도 나쁘지 않다며 흥미롭게 듣고는 했다고 한다. 그 후 두다멜은 말러 지휘자 콩쿠르에 나가기 위해 말러의 곡들을 세밀히 분석해 우승해서 지휘자로서 인정도 받게 되고 세계무대로 뻗어나가는 발판이 되었다.두다멜이 말하는 말러의 곡은 단순한 기술만으로 연주할 수 있는 곡이 아니라고 한다. 말러가 살았던 시대는 문화, 예술적인 것들이 폭발하는 시기였고, 말러의 인생도 순탄치않았기에 그는 그의 복잡미묘한 감정전부를 자신의 음악에 들이부었다고 볼 수 있다.그런 힘든 감정기복 표현 등을 세심하게 연구한 두다멜은 한곡 한곡 완성해낼 때마다 성장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말러 프로젝트를 실행하면서 미국, 베네수엘라가 말러의 ‘1000인 교향곡’을 통해 정치적으로는 적대관계지만 음악 안 에서는 완벽하게 화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다. 두다멜이 한 말 그대로 말러는 정말 두다멜 인생에 있어서 큰 영향을 준 음악가인건 확실하다고 본다.5. 괴팍함? 다혈질? 다정다감 교회 오빠 같은 두다멜1) 친화력이 좋다.이는 두다멜의 가장 큰 장점이다. 베네수엘라 음악교육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음악을 시작할 때부) 긍정, 긍정, 또 긍정적이다.일반적으로 천재 음악가, 지휘자들은 대부분 난폭하고 괴팍한 성격을 지녔다고 한다. 자기화를 주체하지 못해 악기를 부순다던지, 단원들에게 폭력적으로 대하기도 했다.하지만 두다멜은 그런 점과는 전혀 반대였다. 누군가 실수를 한다면 ‘잘했어요, 잘했는데 이 부분을 좀 더 세게 연주해준다면 더 멋질 거 같은데?’ 이런 식으로 칭찬과 격려로 가득 찬 다정한 말로 팀을 화합시켰고, 가끔 유치한 표정과 이야기로 음악의 느낌을 최대한 음악의 느낌을 설명한 뒤 연습을 시키기도 했다. 이도 엘 시스테마 교육의 특수성이라고 볼 수 있다.어릴 때부터 오케스트라에서 또래의 아이들을 지휘하고 가르치게 지도를 받아온 두다멜은자신보다 더 어린아이들에게 어떻게 이 음악을 설명할지를 항상 깊게 고민했었다. 이런 요령있는 인내심은 지휘자, 교육자들에게 기본중의 기본이며, 두다멜에게는 그만의 장점이자 카리스마이자 멋진 매력이라 할 수 있겠다.6. 엘 시스테마가 키운 두다멜1) 엘 시스테마1975년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경제학자이자 오르가니스트인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박사가 어려운 환경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음악 교육을 실시해 마약, 범죄에 노출되기 쉬운 이들을 보호하고 재할의 역할을 하기 위한 국가 지원 하에 무상악기와 무상교육을 실시하는 음악교육재단이다(정식명칭: 베네수엘라 국립 청년 및 유소년 오케스트라 시스템 육성재단).이 교육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는 꿈이라는 희망을 주고, 그 꿈을 꾸게 만들 감성을 부여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그 과정에서 감성의 발달과 단체라는 유대감, 성취감 등을 느끼며 성숙한 베네수엘라의 시민으로 발전해나갈 수 있도록 이끄는 역할을 하고 있다.미국 명문 오케스트라인 LA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과 베를린 필하모닉 역대 최연소 오케스트라 단원 에릭슨 루이스 등을 배출함으로써 음악성을 인정받았다. 지금은 매년 3천만 달러의 지원을 받으며 30만 명 이상의 청소년들이 참여하는 국가 전체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니다.
    예체능| 2021.02.16| 10페이지| 2,000원| 조회(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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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인의 아람문화특징과 기독교 스페인의 관계
    목 차1. 스페인과 아랍1) 스페인에 기독교가 들어온 배경2) 스페인에 아랍문화가 들어가게 된 배경과 이유2. 스페인에서의 아랍문화의 특징3. 스페인의 아랍문화와 기독교 스페인의 관계4. 출처1. 스페인과 아랍1) 스페인에 기독교가 들어온 배경스페인의 기독교와 아랍문화의 관계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페인의 기독교의 역사에 대해 알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우선 스페인의 기독교는 1세기경 로마에 의해 들어오기 시작한다. 아프리카의 북쪽으로부터 기독교가 들어와 남부와 동부 지역의 거점으로 스페인 내부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당시 로마제국은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인정하고 본인도 기독교로 개종을 한다. 결국 380년에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가 되었고, 스페인은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그 후 스페인은 서고트족의 침략으로 서고트족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서고트족은 라틴어와 기독교를 국교로 사용하기로 하면서 스페인의 기독교는 더욱더 번창하기 시작한다. 스페인의 기독교는 이때부터 시작하게 된다.2) 스페인에 아랍문화가 들어가게 된 배경과 이유8세기경 서고트족이 무너지면서 그 틈을 타서 무어인들이 스페인에 침투하기 시작한다. 처음 스페인에 무어인들이 들어왔을 시기에는 아랍 본토에 있는 칼리프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756년 압둘라만 1세가 스페인의 독립적인 왕국 안안달루시아 왕국을 세우면서 본격적으로 아랍문화가 들어오게 된다. 이슬람교도들을 생각할 때 흔히 ‘한 손에는 칼과 한 손에는 코란’이라는 생각을 가져 이슬람교도들, 즉 아랍문화는 포용은 없고 폭력과 강제성을 가진 집단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이슬람교도들은 포용과 개방을 가졌었다. 때문에 이슬람교도들은 당시 스페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기독교를 인정을 하게 된다. 그래서 당시 스페인은 기독교와 이슬람을 공존하게 된다.2. 스페인에서의 아랍문화의 특징앞에서 말했듯이 스페인에 아랍권 문화가 들어감으로써 스페인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되고, 아랍문화와 스페인문화의 혼합이 일어나게 된다.우선, 아랍문화는 언어와 문학부분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711년 아랍인에 의한 스페인 정복 이후 약 8세기동안 아랍 지배하의 스페인은 아랍어와 스페인어 사이에 언어 차용과 언어 혼합이 매우 많이 발생하였다. 아랍어의 영향은 스페인어의 어휘적 영향에 가장 크게 나타난다. 즉 이러한 아랍어와 스페인어의 혼합이 일어나면서 문학적인 면으로 볼 때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아랍의 지배하에 있던 당시에는 소수 아랍인들이 자신들의 전통 아랍시를 즐겼던 방면에 피지배층의 스페인 사람들은 그러지 못했지만 아랍어와 스페인어의 혼합으로 인해 자잘이란 시문학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아랍문학의 전파로 인해 스페인 문학은 발전하게 되고 영향을 많이 끼치게 된다.그리고, 아랍문화는 스페인의 건축양식에 무엇보다도 많이 영향을 끼치게 된다. 아랍 지배하의 당시 주요도시인 코르도바에는 흰색과 빨간색을 교대로 배열하고 표면도 장식이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이 번갈아 있는 아치를 말하는 도벨라스 양식으로 지은 회교도 사원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아랍의 마지막 거점이였던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도 아랍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이렇듯, 스페인에서의 아랍문화의 특징은 지금 현대 스페인에 많은 것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동·서양의 조화가 가장 이상적으로 이뤄줬던 것 같고, 나중에 대항해시대의 스페인의 국력의 기본은 동·서양의 조화로 인해 아랍의 과학과, 문학과 문화 등이 들어오면서 강대국 스페인을 만들 수 있었다.3. 스페인의 아랍문화와 기독교 스페인의 관계앞에서 말했듯이, 아랍문화는 포용과 개방적인 성격으로 인해 처음에는 기독교와 공존이 가능했다. 하지만 기독교 스페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아랍문화는 침입자일 뿐이였다. 이로써 국토재정복운동(레콩키스타)을 하기 시작한다. 이 레콩키스타는 군사적인 사건으로 이 전쟁을 통해서 많은 것들이 살아남았고 새로이 창조되어, 스페인과 훗날의 스페인계 아메리카의 윤곽이 점점 갖추어지게 되었다. 결국 국토재정복운동으로 인해 무어인들을 몰아 냄으로써 중세 기독교 스페인이 새워지게 된다.
    인문/어학| 2021.02.16| 4페이지| 2,000원| 조회(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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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헌군주정의 길
    제 10장. 입헌군주정의 길Ⅰ. 복고왕정 체제1. 찰스 2세- 1658년 크롬웰 사망 후 국민들은 안정적이고 합법적인 왕정복고를 원함- 브레다 선언 발표 : 왕위 복귀 후, 일반사면, 종교의 자유 및 토지분재의 공정한 해결, 군대 체불 임금의 완전 지급 약속.-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10여 년 만에 복귀.- 그는 망명 시절의 의논 상대였던 씨 에드워드 하이드를 클래런던 백작으로 서임.- 오직 쾌락만을 위해, 혹은 여자를 유혹하기 위해서만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또한 기지에 차고 쾌활한 성격에 영리하고 현실적인 판단력을 가지고 있던 그는 왕위를 유지하고 왕권 을 장악하기 위해 타협하고 양보하는 융통성을 지니고 있었음.- 가족에게 충실하고 사람들을 편안하고 상냥하게 대함으로써 그들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 교역에 대한 관심이 많아 바다와 해군을 사랑하고 육성.- 연극과 과학에 대한 후원과 장려에도 힘을 기울임.2. 공회- 복고왕정 초기 : 클래런던의 주도 아래 비교적 순조롭고 현명하게 운영- 찰스 2세의 치세가 그의 부왕이 처형당한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선언? 공화정 시대의 정통성을 부인 ∴ 공화정 시대에 제정된 모든 법은 그 효력을 잃음.- 찰스 1세의 동의 : 각종 대권 법정들은 부활되지 않음(의회가 폐지한 성실청, 고등 종교 법정, 북부 자문회의 등)- 클래런던이 바란 복고왕정 : 혼합 왕국(1630년대의 일인통치와 같은 대권적(Prerogative) 군주정이 아니라 왕의 권위와 국민의 자유가 적절하게 균형을 이룬 왕국)- 공회의 역할1) 브레다 선언의 약속 실행 :가. 사면령 : 찰스는 왕정의 적들을 엄벌하려는 극렬한 왕당파들의 요구를 물리쳤다. 찰스 1세의 재판과 처형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50명가량만이 사면에서 제외되었으 며, 이들 중에서도 실제로 처형당한 사람은 대역죄인 13명에 지나지 않았다.나. 주인이 바뀐 토지 처리 문제 : 왕령지와 교회령, 그리고 공화정에 의해서 강제로 몰수 된 토지는 원래의 소유자에게 되돌려졌다. 그러나 부과된 벌금을 물 북아메리카 등지에서 네덜란드와 군사적 충돌을 일으킨 끝에 마침내는 전면전에 돌입.- 1665년 초에 시작해서 2년 반 동안 지속된 이 제2차 네덜란드 전쟁은 치열한 무역 전쟁 으로서, 대부분 브리튼과 대륙 사이의 바다에서 해상 전투로 치러졌음.- 두 나라의 세력과 장비가 엇비슷하여 전세가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이듬해가 되자 두 나라 모두 싸움에 지치게 됨.- 영국의 두 재앙가. 대역병 : 역병이 이듬해 말까지 런던을 휩씀. 궁정이 햄프턴 코트로, 다시 솔즈베리 로 옮겨지고,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빈민가에서 죽게 내버려 둔 채 런던을 빠져 나갔다. 그 동안 7만 명 가까운 런던 시민들이 사망.나. 1666.9 대화재 발생 : 런던브리지 근처에서 일어나 강한 동풍을 타고 서쪽으로 번져 도시 전체를 잿더미로 만듦. 인명 피해는 별로 없었지만 1만 3,000채의 가옥과 수 많은 교회와 공공건물을 삼켜버렸다.- 영국 정부의 평화 협상 시도- 1667.6월 네덜란드는 방어망을 뚫고 템즈강을 거슬러 올라와 선박을 불태우고 영국 함대 가운데 가장 큰 함선인 ‘로열 찰스’호를 끌고 감. → 영국 국민들에게 커다란 공포와 깊은 굴욕감을 안겨줌.- 재정적 곤경에 빠져있던 네덜란드 역시 평화를 갈망- 7월 말에 브레다 조약이 맺어짐.가. 영국은 뉴암스테르담을 포함한 북아메리카의 뉴네덜란즈를 양도받음. 뉴암스테르담 은 왕의 동생이자 해군 제독인 요크 공 제임스의 이름을 따라 뉴요크로 개칭나. 영국은 남아메리카의 수리남을 네덜란드에 양도하고, 동남아시아의 향로 제도에 대 한 권리를 포기.6. 캐벌과 제 3차 네덜란드 전쟁- 클래런던의 실각 : 흉흉한 민심을 달래기 위한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 탄핵받아 망명됨.- 캐벌 형성 :가. 한 사람의 대신이 아니라 다섯 명의 심복 정신을 자문관으로 삼음.나. 어떤 내적 동질성을 지닌 집단이 아니라 찰스가 임의로 발탁한 비공식적인 자문 집단다. 당시 추밀원이 비대하고 방만하여 효율적인 자문기구 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있던 차 에, 소수 주요 대 숙영시킴으로써 런던에 은근한 압박을 가함.가톨릭 왕국을 추구하는 그의 이런 무분별한 정책은 자의적이고 전제적은 통치의 길로 너무 멀리 나아가고 있었다. 국교회와 사이가 나빠진 왕이 개신교계 비국교도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함으로써 그들의 지지를 얻으려 한 책략 역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자기들을 회유하기 위한 제임스의 일시적 선물을 믿지 않았던 비국교도들은 오히려 국교회에 가담하여 국왕의 가톨릭 전제정치에 반대했다.3. 무혈의 혁명- 1688년 5월 관용령을 재공포하고 모든 성직자가 두 일요일에 걸쳐 그것을 낭독하도록 명 령 했을 때, 마침내 영국 교회는 비록 악한 군주일지라도 그가 군주인 한 저항하지 말고 복종해야 한다는 이른바 순종의 신념을 버릴 수밖에 없었음.- 6월 왕비의 왕자 출산 : 가톨릭 혈통이 이어지게 됨을 의미.- 캔터베리 대주교인 윌리엄 샌크로프트와 다른 6명의 주교가 관용령의 낭독을 강요하지 말도록 청원하고 그 내용을 공표.- 국왕은 이를 중상적 비방으로 몰아 7인의 주교를 런던탑에 가두었음. 이들은 국왕 법정 에 회부되었으나 배심원들은 무죄 평결을 내림.- 6월 30일 군중은 환호하고, 종을 울리고, 총을 쏘고, 화톳불을 밝히면서 이들의 석방을 환영. 일곱 주교의 대의는 곧 전 국민의 대의가 됨.- 한 밀사가 오렌지 공 윌리엄에게 전달할 초대장을 지니고 런던을 떠남. 초대장은 토리와 휘그의 두 정파 및 종교계를 대표하는 7인의 지도자가 서명한 것으로, 윌리엄에게 군대를 이끌고 영국으로 들어와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 찰스 1세의 외손자이자 제임스 2세의 사위이기도 한 윌리엄은 영국 침공을 신중하게 준 비하는 한편 영국민에게 자유로운 의회를 약속하는 선언서를 보냄.- 다급해진 제임스는 그때서야 여러 가지 양보안을 내놓았으나 이미 때늦은 일.- 11월 초에 윌리엄은 약 1만 2,000명의 보병과 4,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잉글랜드 남서 부의 토베이에 상륙.- 제임스는 이를 훨씬 능가하는 상비군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군의 사기는 떨어져 있었 폄하할 만한 요소 또한 없지 않음.가. 명예혁명은 사회적·정치적 권력의 참다운 전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궁정 쿠데타와 같 은 모습을 보여줌.나. 혁명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물리적 폭력과 유혈 없이 비교적 평화롭 게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혁명이라 부르기가 주저되는 것도 사실임.- 의회적 군주제를 확립함으로써 왕과 의회 사이의 오랜 투쟁에 종지부를 찍음. ⇒ 이제 영 국은 선출된 의회가 협동의 원리에 다라 국왕과 함께 통치 과업에 동참하는 세계 유일의 국가가 됨.- 서유럽에서 절대주의가 강화되고 있던 시기에 이런 변화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님. 18~19세기의 휘그들이 1689년의 성과를 과장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명예혁명이 정부에 관한 종래의 개념을 뒤엎은 하나의 역사적 전환점이었던 것.- 새로운 정치제제를 수립과 동시에 그것을 정당화 시키는 정 치 철학 탄생 : 존 로크가. 『정부론』을 저술 : 18세기 정치 학설의 교범이 됨.나. 그는 생명, 자유 및 재산에 대한 권리를 정치사회가 생기기 이전에 존재했던 것, 즉 자연법에 의해 보장 된 것으로 규정하고 정부의 목적을 엄격하게 이들 권 리를 보호하는 일에 국한시켰다. 그에 따르면 이 목 적은 절대군주정 아래에서는 성취될 수 없고, 오직 최고의 입법권을 가진 의회와 한정된 권력을 위임받 은 행정부 아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만일 정부가 이와 같은 고유의 목적을 저버린다 면, 국민은 그에게 위임했던 권한을 회수하고 그에 저항할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 고 주장했다. 혁명은 로크에게는 국민이 자신의 권리를 지킬 최후의 수단이었다.다. 그의 논의는 영국인이 17세기 내내 추구해왔고, 1689년에야 마침내 획득했던 두 개의 이상, 즉 법이 보장한 개인의 자유라는 이상과 의회를 통해 표현된 대의 정부 라는 이상을 위한 고전적 변론을 제공Ⅲ. 전쟁과 정치1.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1) 배경- 명예혁명으로 대외 관계에서도 중대한 고비- 크롬웰부터 제임스 2세까지 대체로 친프랑스적이거나 반네덜큰 영향력을 행사한 그의 아내 새라 제닝스의 힘으로 출셋길에 오름.다. 1702년 군사령관으로 임명: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 동안 크고 작은 많은 전투에서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음.라. 1704년 바이에른의 블렌하임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의 사령관인 사보이 공 프랑스와­ 외젠과 연합하여 프랑스군을 대파.마. 1704년 써 조지 루크 제독이 지브롤터를 점거바. 1706년 라미이 전투와 1708년 아우드나르드 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바. 재무부 총재 시드니 고돌핀 백과 더불어 앤 여왕 치세 동안 최고의 실권자가 됨.사. 1708년에는 영국 해군이 지중해의 미노르카 섬에 상륙하여 마혼 항구에 주둔하며 지 중해의 해상권을 장악3) 계속되는 전쟁- 오랜 전쟁에 지친 루이 14세는 1709년 강화를 시도.- 에스파냐에서 필리프(펠리페) 5세를 축출하라는 모욕적인 조건이 제시되자 그는 싸움을 계속하기로 결심.- 말버러는 말플라케에서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것은 많은 희생을 치르고서 가 까스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전략적으로는 프랑스군의 승리나 다름없었다.- 이 전쟁으로 영국군의 파리 진격이 저지, 프랑스군의 명성 회복- 군대의 규모가 훨씬 더 커지고 그만큼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고 재산과 인명의 피해가 큼.- 막대한 전비를 조달하는 것은 성공적인 의회 운영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 전쟁이 진행되면서 강경책을 추구한 휘그파가 점차 의회의 다수를 차지.- 온건한 토리였던 말버러와 고돌핀은 휘그파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됨. → 휘그 의 원과 정치적 동맹을 결성. → 휘그는 그 대가로 내각의 여러 자리를 요구하고 주도권을 쥐게 됨.- 자신이 직접 각료를 선택할 권리를 행사하기를 위한 여왕은 반발했지만 당파적 열정과 결합된 돈주머니의 힘 앞에 국왕 대권은 너무나 무력함을 나타냄.- 고돌핀의 재정 지원하에 말버러는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 그러나 유리한 조건으로 전쟁을 종결짓는 데는 성공하지 못함.- 그들은 1709년 이후 언제든 유리한 입장에서 강화를 맺을 수 있었으나 다.
    인문/어학| 2020.12.15| 23페이지| 2,500원| 조회(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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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나파파 감상문
    루나파파를 보고중앙아시아, 나에게는 중앙아시아는 축구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월드컵지역예선을 할때마다 들어본 나라들로만 인식되어있었고 그 나라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나라의 문화와 사람들 그리고 지금 처해있는 상황들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 영화 루나파파는 아마도 우즈베키스탄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 것 같다. 이 영화로 인해서 우즈베키스탄, 넓게 보면 중앙아시아의 사람들과 문화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된 것은 행운인 것 같다. 우선 이 영화는 여자주인공(말라카)와 그의 가족들, 아버지와 오빠(나즈레딘)의 이야기로 풀어나간다. 특이한것은 말라카가 임신을 하게 되는데 그 안에 잉태되어있는 아기의 나레이션이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생명경시사상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인 것 같고 이 아이의 나레이션을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더 강조했지 않았나 싶었다.우선 영화는 말라카의 가족이 살고 있는 자그마한 도시인 파코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말라카의 오빠는 지능이 떨어지지만 아버지와 말라카에게 불길한 암시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하지만 말라카의 오빠(나즈레딘)은 항상 말라카의 보호가 필요할 정도로 마을에서는 사고뭉치이다. 말라카는 항상 가슴에는 배우의 꿈을 품고, 찻집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어느날 파코에 배우들이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하지만 배우가 오는날에 아버지와 나즈레딘과 함께 생계의 수단인 토끼를 팔러 길을 나서게 된다. 그러나 가는길에 게릴라들의 습격과 함께 차가 고장나버려서 연극을 보러가지 못할거라는 위기감을 느낀다. 하지만 배에서 옷을 파는 상인을 만나 아버지는 그 상인에게 파코까지 말라카를 데려다 달라고 부탁을 하게 되고, 결국 말라카는 늦었지만 연극을 보러 파코까지 가게 된다. 하지만 말라카는 연극을 보지 못하게 되고 아쉬움에 숲속의 길을 통해 집으로 향하게 되는데, 그때 의문의 남자가 그녀에게 접근한다. 배우라고 말을 한 의문의 남자와 말라카는 거의 반 강제식으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그녀는 다음날 찻집을 같이 하는 친구에게 자신의 처녀성을 잃었다고 말을 한다. 미지의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 말라카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평소처럼 지내고 있던 어느날 생선을 보고 헛구역질을 하게 되고, 말라카와 말라카의 친구는 직감적으로 임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임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난 후 영화는 새로운 전개를 맡게 된다. 임신이라는 것을 알게된 말라카는 친구와 함께 낙태를 하러 시내의 산부인과 의사를 찾았지만 시술을 하기 전에 잠시 나간 산부인과 의사는 괴한들의 총에 죽고 만다. 이 장면에서는 솔직히 정말 어이가 없게 의사가 죽게 되는데, 보면서는 조금 이상하다 싶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이 장면은 생명을 중시사상이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결국 말라카는 아버지에게 임신 사실에 대해 말하기로 결심을 하게 되고 아버지에게 임신사실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이슬람을 믿는 중앙아시아 사람들에게는 미혼모는 더러운 존재일 뿐인 것을 잘 알고 있는 아버지는 말라카와 나즈레딘을 데리고 아버지를 찾으러 다니게 된다. 여기저기로 아버지를 찾아 헤매던 어느날 우연히 말라카는 한 마을에서 헌혈을 하라는 알렉을 짧지만 강렬한 만남을 가지게 된다. 계속해서 말라카 일행은 아버지를 찾으러 다니지만 별 소득이 없게 되고, 결국 말라카는 배가 불러온 상태로 파코로 돌아오게 되고 이제는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마을 사람들의 무시를 받게 되고 하던 찻집에는 손님이 끊기게 된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말라카가 더러운 존재로 판단되어 말라카에게 온갖 욕설과 함께 배를 함께 타는 것도 거부하게 되고, 이러한 행동을 견디지 못한 말라카는 결국 혼자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여행에서 알렉을 만나게 되고 그의 목숨을 구해주게 된다. 그 둘은 첫 눈에 사랑에 빠지게 되고 알렉과 함께 말라카는 파코로 돌아와 새로운 인생을 꿈꾸게 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결혼식 날 알렉과 함께 아버지는 하늘에서 소가 떨어져 그 소에 의해 강에 빠지게되고 둘은 익사를 하게 된다. 말라카와 나즈레딘은 또다시 절망에 빠지게 되는데, 그렇게 절망에 빠져 살던 파일럿이 파코에 찾아오게 되고 이 파일럿은 찻집에서 비행기에서 소가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 이야기를 들은 말라카는 분노를 하게 된다. 하지만 그 파일럿은 말라카를 보고 찾아가 말라카에게 그날 밤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게 되고, 말라카의 뱃속에 있는 애기는 자기 애기라면서 말라카에게 아빠가 되어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파렴치한 그에게 말라카는 권총을 남발하게 되고 겁에 빠진 파일럿은 잠을 푹 자게 된다. 말라카와 나즈레딘은 파일럿을 도시로 보내기로 하고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와 결혼하기를 바라고 말라카에게 그와 결혼하라고 강요를 하게 된다. 하지만 파렴치한 그와는 결혼할 수 없었던 말라카는 나즈레딘이 만들어놓은 비행선을 타고 멀리 떠나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 된다.
    독후감/창작| 2020.11.27| 3페이지| 1,500원| 조회(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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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틴아메리카, 멕시코카톨릭성모, 치아빠스,께찰꼬아뜰
    ☆ 치아빠스의 산기슭에 있는 마을에서는 새해를 어떻게 맞이하는가?※ 그들이 새해를 맞이하는 의례의 근거는 무엇일까?☞ 새해 맞이하는 법 : 치아파스의 시나깐딴에서는 일 년에 두 번 새해의 불 제전을 한다. 이 날이 되면 마을의 모든 샤먼은 성스러운 산을 향해 행진한다.☞ 새해를 맞이하는 의례의 근거 : 새로운 해를 위한 제전은 시나깐딴의 독특한 것이다. 모든 면에서 시나깐딴의 주요한 것이다. 샤먼, 행정가들 실제 일을 하는 사람들. 실제로 권력은 대표샤먼과 집사장은 시장의 두 쪽으로 집중된다. 또한 제전의 구조를 보면 제전중심지와 주위 제전지의 상호 관계이다. 다른 하나는 신들과의 일체감이다. 시나까딴의 모든 자들은 여러 성스러운 장소로 흩어져서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모두 골고다의 산 정상으로 모인다. 여기서 그들은 각자의 집과 조상신을 소개하고 모든 참가자들은 중앙과 주변 지역이 함께 연결 끈을 형성한다. 여기에 가장 큰 상징은 골고다언덕으로 상징되는 가장 높은 정점의 상징이다. 여기에 그들은 십자가의 성소를 지어놓고 미식바라밀(mixik' balami, 세계의 중심, 세계의 배꼽이란 뜻)이라 부른다☆ 멕시코 카톨릭의 성모는 다른 지역의 성모와 어떻게 다른가?↔성화에 새겨진 성모 마리아의 키는 1m 45cm이다. 피부색은 인디언처럼 거무스름한 황갈색이고 머리카락은 검은색이다. 목에 건 십자가 목걸이는 스페인 선교사들이 선교한 가톨릭교회를 표시한다. 머리에서 발 아래까지 길게 내려온 외투는 밝은 청록색으로, 이 색은 거룩함을 뜻하다. 이 외투에는 세례와 새로운 생활을 상징하는 46개의 팔각의 별로 장식되어 있다. 또 성모 마리아는 금빛의 꽃무늬가 새겨진 엷은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있으며, 하얀 소매깃은 순교를 표시하고 소매에 달린 검은색 리본은 그녀가 예수 그리스도를 낳았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성모의 모습은 햇빛과 같은 금빛 광선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형상은 마치 광선이 구름을 물리치는 듯하다. 또 악마를 상징하는 검은 초생달을 밟고 서 있는데, 그 밑에는 한 어린 천사가 성모의 옷자락을 떠받들고 있다. 성모의 얼굴은 아주 아름다운 젊은 여성의 모습으로, 약간 홍조를 띤 두 볼과 아래를 내려다 보는 눈은 자비와 겸손을 드러내고 있다.멕시코 과달루페 성모유럽지역의 성모☆ 이 성모(멕시코)는 어디서 유래한 것이며 멕시코 사람들이 이 성모를 모시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유래 : 1531년 12월 9일 이른 아침, 인디언 원주민 후안 디에고가 미사에 참석하려고 테페약 언덕을 넘고 있었을 때 신비롭고 찬란한 빛을 내는 구름 속에 푸른 망토를 입은 성모 마리아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는 후안에게 자신이 발현한 장소에 성당을 세워 자신을 공경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후안 디에고는 이 메시지를 스페인에서 온 후안 데 수마라가 주교에게 전했으나, 주교는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주교관에서 나온 그는 같은 날 성모 마리아를 만났던 장소로 다시 갔다. 성모 마리아는 “후안, 네가 처음 나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장소에 가보아라. 산 위에 올라가면, 너는 거기에서 많은 장미꽃이 피어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들을 주워 모아서 이곳에 가져와 내게 보여주어라.”라고 말했다.테페약 언덕 정상은 꽃이 필 수 없는 험한 바위 언덕이었던데다가, 당시 계절도 꽃이 필 수 없는 겨울이었기 때문의 성모 마리아의 말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후안은 그곳에 카스티야산 장미꽃들이 만발한 것을 목격하였고, 꽃들을 채집하여 자신의 틸마로 쌌다. 그러고는 서둘러 내려와 성모 마리아에게 다시 갔다. 성모 마리아는 그가 가지고 온 장미꽃들을 보고 손수 그의 틸마에 가지런히 다시 놓아주었다. 뒤이어 그녀는 “후안, 이 여러 가지 장미송이들이 네가 주교에게 가져가야 할 표적이다. 너는 주교에게 이것들을 가져가서 내 소망을 깨닫도록 하고, 내가 요청한 일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내 이름을 들어 말하도록 하여라. 너는 나의 심부름꾼으로서 신념을 지니고 행동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나는 너의 틸마에 싸인 꽃송이들을 주교 앞에 나아갈 때까지 풀어 보이지 않을 것을 엄격하게 명령한다. 그것들을 조심해서 가져가도록 하여라. 네가 그에게 모든 사실을 설명할 때, 내가 너를 산 위로 보냈으며 거기에서 이 꽃들을 발견했다고 전하여라. 그렇게 한다면 너는 그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며 내가 요구한 성당이 세워지는 날까지 너는 그의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후안 디에고가 수마라가 주교에게 가서 “성모님이 보내신 꽃입니다. 받아주십시오.”라고 말하고는 틸마를 펼쳐 담아온 장미꽃들을 보여주었을 때, 신기하게도 장미꽃들이 마루 바닥에 폭포처럼 흩뿌려지면서 과달루페의 성모 형상이 후안 디에고의 틸마에 새겨져 나타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를 본 수마라가 주교는 그 경이로움에 놀라 그 즉시 성모 형상이 새겨진 틸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인문/어학| 2020.11.27| 2페이지| 1,500원| 조회(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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