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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이현 낭만적 사랑과 사회 감상문
    낭만적 사랑은 없다-정이현,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읽고이 책에서는 영악하나 얄밉지 않은 여자들의 모습이 나온다. 그녀들은 행동하나 하나가 계산적이며 보다 높은 것, 큰 것을 얻기 위한 준비과정이다. 이 모습이 낯설고 거부감이 느껴지신다면 당신은 ‘여자들이란 이런 거야.’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는 노예들이다. 여성들 중에서 자신들을 규제 짓는 생각 따위 바란 적 없다. 그것은 다 여성들을 바라보는 남성들의 시선과 사회의 시선 그리고 알게 모르게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여성들이 감내해야 했던 사회적 폭력일 뿐이다. 성을 신분상승의 도구로 사용하는 그녀들에게 뜨악한 감정을 느꼈다면, 굳이 그런 방법을 써서까지 올라가고 싶어 하는 여성들의 신세를 안타깝게 생각해주기를 바란다.누가 이렇게 만들었나. 바로 당신들이다. 당신들은 그대들이 바라는 바람직한 여성상을 주입시키는 한편 사랑에 대한 환상까지도 주입시켰다. 낭만적인 사랑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서 말이다. 그러나 ‘사랑’이란 이름을 욕망 충족의 이유로 남발하는 남성, 같이 자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는 여성, 순결을 자신의 마지막 카드로 생각하고 인생 상승의 기회로 삼는 여성에 이르러서는 그 가치는 무너지고 만다. 이렇듯 깨어지고야 말 것임을 알면서도 강요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당신들이 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맞아떨어져야 할 사회에서 튀어나오는 분자들은 필요 없는 것들이다.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행동을 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그렇기 위해서 적당한 생각들을 만들어서 주입시키는 것이다. 이런 생각들이 사회가 주입시킨 것이라면, 현실에서 사랑이란 것은, 낭만적 사랑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그녀들은 말한다. 여자들의 몸은 ‘유리 같아서 깨지면 돌이킬 수 없다’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 유리의 이미지가 많이 나온다. 주인공 여자의 이름이 유리이며, 하얏트 호텔은 창이 많은 외양 때문에 ‘유리의 성’이라고 불린다. 유리라는 이름 속에는 지금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체념과 유리가 지닐 수밖에 없었던 순결에 대한 강박관념이 고스란히 녹아있다.그 모습은 ‘솥에 넣고 푹푹 삶아댄, 누렇게 변색된 팬티’ 나 관계를 갖기 전 그녀가 외치는 십계명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을 지키려고 애를 쓰는 모습은 진지하다 못해 절박해서 다른 한편으로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어머니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고 필사적으로 팬티를 사수하는 그녀에게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애초에 출발선부터가 다른’것이라는 이유로 순결을 비장의 카드로 사용하기에 이 세상은 만만치가 않다.
    독후감/창작| 2019.05.13| 1페이지| 1,000원| 조회(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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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세전과 무정 비교
    의 긍정적인 의미들-과 비교해 본 -1. 시작하는 글염상섭의 은 이광수의 에 비해 훨씬 근대소설에 가까워졌다고 평가받는다. 두 소설을 세 가지 점에서 살펴보았는데 첫째가 이 갖는 리얼리즘적인 성격이며, 둘째가 에서 드러나는 자기인식과 묘지에 대한 생각이며, 셋째가 지식인 소설로서의 이다. 그 이유에 대해 과 비교해서 이야기 하겠다.2. 들어가는 글1) 만세전이 가진 리얼리즘적 성격ⅰ) 중점을 두고 봐야할 점 : 이 글에서 초점을 둔 것은 리얼리즘의 사상적인 특징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 소설에서 사실적인 면이 많이 나온다. 그것을 리얼리즘적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굳이 리얼리즘을 따지자면 에서는 자아를 각성하고 현실의 환상에서 깨어난 인물이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점을 리얼리즘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ⅱ) 무정과 비교 : 과 비교해도 이 작품이 사실적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에 나오는 부산이나 도시의 묘사나, 노동자들의 모습을 표현한 것을 봐도 그렇고 일본인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다. 현재 상황을 ‘묘지’라고 말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반면에 에서는 일본에 대한 막연한 환상에 잡혀 있다. 그들의 목적은 배워서 무지한 백성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보다 앞서있는 일본이나 미국을 배움의 터전으로 여기고 추종한다. 미래에 대해서도 근거 없이 이상적이다.2) 에서 볼 수 있는 자기인식과 묘지에 대한 생각ⅰ) 무정과 비교했을 때 만세전에서 보이는 자기인식 : 이 소설에서 이인화는 중산층계급의 인물로 일본에서의 유학생활에 젖어서 민족이 처한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다가 집으로 오는 여행길에서 깨닫게 된다.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기차역, 항구에서 형사들의 감시를 받고, 가방 수색을 당한 것에 대해 모멸감을 느낀다. 배 안의 목욕탕에서 일본인들이 조선인 노동자를 속여서 광산노동자로 데려간다는 말을 듣고 조선의 현실에 대해 눈을 Em게 된다. 이것은 부산에서 조선인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를 둔 술집소녀가 자신의 어머니와, 조선을 부정하는 모습에서도 알 수 있다. 이것은 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에서도 현실을 나름대로 비판하지만 그것은 배움이라는 일시적인 해결방법으로 돌아올 뿐, 이런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다.ⅱ) 자기비판과 반성의 모습 : 이인화는 이제까지의 소설에서 보지 못했던 자기비판과 반성을 하는 지식인이다. 무정의 인물들은 배움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하고, 자신들의 상황이나, 생각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긴 하나 그것이 배움과 교육에 대한 것으로 결론이 난다. 그에 반해 이인화는 자신의 행동과 생각에서 잘못된 것을 비판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는 이런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있다.ⅲ) 조선은 묘지다 : 그가 바라본 조선은 묘지 같았다. 만세전을 겪은 주인공이 그 당시를 생각하면서 쓴 것이 이다. 3.1운동만 지나면 모든 것이 변할 거라고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세상은 변한 것이 없었다. 여기서 사람들은 환상이 깨지게 된 공허함을 겪게 된다. 아무런 희망 없이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 조선인들을 보며 이인화는 “구더기가 들끓는 무덤”에서 살고 있다고 말한다. 살아있는 이들이 무덤에서 살고 있다면 죽어서 공동묘지에 묻히든, 조상의 선산에 묻히든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깨닫지 못하고 공동묘지에 묻히기 싫어서 아웅 거린다.의 처음 제목은 였다. 라는 이름으로 신문에 연재되다가 연재가 중단되고, 1924년에 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것은 염상섭이 당시의 상황이 ‘묘지’ 즉, 아무 희망도 없는 묘지와 같다고 생각한 것을 짐작하게 한다.3) 지식인 소설로의 ⅰ) 그 전의 작품들이 지식인 소설로 인정받지 못한 이유 : 그것은 주인공들의 생활 태도와 비판이 당시의 사회현실을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의 지식인은 계몽가로 배운 자신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을 가르치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의 이런 생각은 현실보다는 이상에 가까운 이야기이다. 에서 보이는 지식인은 계몽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진로에도 관심이 없는 어쩌면 현실을 외면하는 모습의 지식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문제점을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만세전이 지식인 소설로 인정받는 이유를 알 수 있다.ⅱ) 사실적이고 건조한 염상섭의 문체와 1인칭 시점 : 사건에 대해서 극히 사실적이며 무미건조하게 서술해놓은 염상섭의 문체는 1인칭 주인공시점을 통해서 이인화가 사건에 대해서 부정적이면서도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직접적으로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이인화에게 없기 때문이다.
    독후감/창작| 2009.04.02| 2페이지| 1,000원| 조회(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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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동,제망매가,상대시가 논문 요약
    교과명: 한국문학사과제명: 요약 레포트祭亡妹歌학 과: 국어국문학과월명사가 지은 제망매가는 삼국유사에 실려 전해오고 있는 10구체 노래로서 같은 경덕왕 대의 사람 충담사가 지은 찬기파랑가와 더불어 유사에 실린 신라가요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의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가명이 지시하고 있는 그대로 누이의 죽음을 애도한 내용으로 되어있는 이 노래는 옛 시대 시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시정기교에 성공하여 높은 시의 경지를 개척하였고 특히 인간의 죽음의식을 심각하게 노래하고 있어서 주목을 끌고 있다.이 노래의 성격을 구명하고 본가에 담겨져 있는 월명사의 죽음의식에 대하여 얘기하겠다. 이 노래를 순수서정시로 이해하고 싶다. 먼저 생각해 볼 문제는 “아으 彌陀刹애 맛보올내/ 道닷가 기드리고다” 라는 9?10구에 관해서이다. 이재선 교수는 초고부터 8구까지는 일반서정시로 간주하였고, 이 9?10구에 와서 이 노래는 종교시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하였다. 초구~8구까지 순수서정시임이 분명하고 9,10구 역시 그렇다고 보아 무방하다. 불교적인 단어(‘道닷가’, ‘彌陀刹’)는 불교를 국교로 믿었던 신라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된 상용어류이다. 따라서 이 9?10구에서 결정적인 종교시의 단서를 포착할 수 없다. 한두 개의 특수 용어가 시 속에 들어 있다고 하여 그 시 전체를 일정한 범주 속에다 집어넣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하관」에서 그 예를 구하기로 한다.「하관」역시 동생의 죽음을 슬퍼한 노래이고 시인 자신이 기독교이었으므로 이런 점이 제망매가의 경우와 일치한다. 이 시에도 ‘주여’ ‘성경’ 등의 기독교적인 요소들이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인 이 작품을 종교시?기독교시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하관」을 전체적인 면으로 보아 틀림없는 순수서정시이다.노래의 내용면을 분석해 보아도 제망매가가 불교가요라기보다는 순수서정시에 훨씬 가깝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노래의 핵심부분은 초구~8구까지다. 월명사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을 8까지 이르는 동안에 다했고 결사에 이르러서는 구호류의 가락을의 거의 대부분은 초연하게 혹은 무외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월명사의 죽음관과 대치되고 있는 것이다.유사를 보면 즉음을 화제로 한 기록이 많이 보이고 있는데 원왕생가와 우적가는 신라가요의 범주에 드는 시가형식이기 때문에 특별한 관심을 끌고 있다. 광덕이 지은 원왕생가의 경우, 남편이 죽자 그녀와 남편의 벗이 그 죽음을 의당 있어야 될 일인 양 그려져 있다. 죽음을 일상사처럼 간단하고 수월한 것으로 취급한 이야기는 사복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범상한 것으로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시체를 등에 업고 그도 지하의 세계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죽음을 가벼운 마음으로 선택한 사실도 있다. 이러한 사례는 유사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사기에서도 나타난다. 화랑 사다함의 동지애에 의한 죽음과 관창의 죽음, 비녕자 부자와 그 노복 합절의 죽음은 화랑도 정신의 정화라 이를 만한 것이다.요컨대 월명사의 죽음의식은 그때의 시대정신으로 보아 정면으로 거역하는 아웃사이더 적인 것이다. 죽음을 보고 그가 서 있던 자리는 오직 평범한 인간본성의 자리였고 성자나 수도인의 자리는 아니었다. 제망매가는 누이의 죽음을 애통해한 노래이면서도 다른 한편 그 누이의 죽음을 빌어서 자신의 사생관도 간접적으로 피력한 노래이다. 월명이 불가의 몸으로서는 원효대사에 크게 미치지 못함은 재언할 여지도 없겠으나 자유분방하고 감성적인 인간적 풍모에 있어서 만은 그에 비견될만하다.이제 이 절을 끝맺음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한두 가지 문제를 거론하겠다. 첫째는 9?10구를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 시 전체의 중추는 시가적 성격면으로 보나 내용면으로 보나 초구~8구에 있다. 그 초구~8구는 서상한 그대로 비통함과 허허로움에 감싸여 있다. 월명사의 순수한 진정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8까지의 문맥을 무시하고 이 시의 중심되는 의미와 가치를 9?10구에서 구할 수는 없다. 비록 9?10구가 결사에 해당하는 부분이고 결사는 8구까지의 감정을 매듭을 짓는 부분이긴 하다. 그러나 제망매가 도통한 사람의 언어가 되겠지만 제망매가와 같은 슬픈 시 속에다가 삽입시켜 논할 때 그것은 범용한 사람의 비탄이 된다는 뜻이다.제망매가의 성격을 구명함에 있어서 필자는 불교시가 아닌 순수서정시로 규정하였다. 일체의 기존괌념에서 벗어나 작품이 말하고있는 바를 중시하여 이를 해명하는 일에 주력하였다.제망매가에 투영되어 있는 월명사의 죽음의식은 수도인이나 인생을 달관한 사람의 그것도 아니고, 또 승려나 낭도의 사생관도 무관한 것이며 그 무렵 시대정신과도 연관지을 수 없는 그런 것으로 파악하였다. 지극히 평범한 시정인?자유인의 가식없는 죽음관이 제망매가에 반영되었다고 보았으며 그것은 인간본성에서 우러나온 비통과 공포, 그리고 보편적인 무상성 그런 것의 결정체라 이를만한 것이라고 논하였다.상대시가의 미의식 유형체계 - 논문요약상대시가는 향가 출현 이전의 시가를 총칭한다. 이 시대의 문학활동은 원시종합예술(시?가?무) 형태 혹은 그 발전 형태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접할 수 있는 자료는 ,, 등 3편에 불과하여 이 시대 시가의 모습을 알기 힘들다.상대시가의 미의식 유형을 알기 위해서는 공통된 시대 정신을 바탕으로 핵심미를 파악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시가의 성격?본질부터 파악해야 한다.상대시가의 본질은 신화와 제의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주어진 작품 3편이 신화와 제의와 관련 있다는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제의는 시?음악?춤과 고대인의 우주론?진화를 또한 포함한다. 신화시대는 ‘신화적 질서’를 시대정신으로 한다. 신화는 사람들에게 사화규범을 설정?유지하며 행동지침을 마련, 인식의 근거, 가치의 판단기준이 된다. ‘신화적 질서’를 통해 ‘이상적인 것’을 추구하며 ‘현실적인 것’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이것은 ‘신화적 숭고’ 라 부르며 애니미즘, 토테미즘에도 확대해서 적용할 수 있다. 숭고는 신화적 행동표현인 제의에서도 찾을 수 있다. 위의 두 가지는 이 시대 문화구조의 가장 근본적, 대표적 정신적 원천인 시대정신으로서의 원시신앙(무속)에 수거북이 빨리 머리를 나타내 줄 것이라는 념이다. 이 두 지향에서 후자에만 집중되기 때문에 전자와의 갈등이 없으며 후자가 우세한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숭고’가 구현되는 것이다. 이 경우 숭고는 주술적인 이념에 기초하고 있어 주술적 숭고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공무도하가는 국적문제에 있어서 이론이 제기되어 주목을 끈 바 있다. 지리적 배경이 되는 조선은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땅 직례성내의 조선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중국 고인의 시가로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직례성내의 조선현인은 고조선 이래의 한인의 잔류민으로 역사적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들의 문화구조가 중국민족에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나 민족의 동질성으로 볼 때 한반도의 조선인과의 동류적 맥락을 완전히 청산하지는 못했을 것이다.본 가요와 설화에 대한 흥미있는 해석은 백수광부를 서구신화의 주신에 비견하고 그의 처를 님프로 추정하여 주신과 악신에 얽힌 신화가 인간 세계로 하강하여 하나의 설화로 전성된 것으로 보았다. 백수광부를 미숙련의 박수로 상정하여 무부의 주능실패로 인한 비극적인 파멸담에 관한 설화와 가요로 추정한 것도 있다. 이 설화는 주술적 능력이 상당히 약화된 것으로 여겨지던 시기의 사회배경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았다.이 작품의 미의식 유형을 검토해보면 ‘현실적인 것’은 남편의 익사이며, ‘이상적인 것’은 남편이 강물에 익사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후자에의 신념을 처음부터 포기한 상태에서 즉 ‘이상적인 것’에의 지향이 애초부터 열세한 상황에서 ‘현실적인 것’에의 저항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상적인 것이 불리한 상황에서 그쪽을 추구한다는 것은 비극적 갈등일 수밖에 없고, 그 결과는 파멸만 남을 뿐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 구현된 미는 신화적 숭고 내지는 주술적 숭고의 파탄으로 초래된 비극미라 할 수 있다.신화적 질서?주술적 능력이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시대의 주신 또는 무부였다면 그의 죽음을 초월한 난류이도 행위는 성공적으로 실현되었을 것이고 그의 행위는의 근본적 동인은 신화적 숭고의 붕괴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유리왕은 신화적 인물이면서 동시에 그의 신화적 능력이 좌절되고 파탄되던 시대의 인물이다. 밖으로는 부여와의 투쟁, 안으로는 화희와 치희와의 싸움이 있으며 해명태자를 죽게 한 것 모두가 그의 신성성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화적 질서가 붕괴된 사회상을 반영해 주는 것이다. 신화적 질서와 권능이 확고부동한 시대였다면 그는 현실적인 것을 장엄하게 극복햇을 것이며 그의 행위는 숭고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적인 것이 열세인 상황에서 그것을 추구하려는 그의 의도는 필연적으로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지금까지의 개별 분석을 토대로 하여 현존 상대 시가에 표출된 미의식 현상을 설명해 보면 크게 두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이 시대의 핵심미이자 미적 혼인 신화적 숭고 또는 주술적 숭고가 그대로 작품에 표출되는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비극미가 들어나는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는 당대의 시대 정신이 확고부동한 것으로 수용될 경우에 구현되는 미의식이다. 후자의 경우는 신화적 질서가 붕괴되거나 주술적 권능이 파탄되는 신화시대 말기의 경우이다. 첫 번째 같은 경우 의 미적유형이 속하고, 두 번째는 와 를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상대시가의 미의식은 두가지 유형으로 2대별되는 것이다.靑孀의 절규 動動 - 동동 논문 요약(1) [고려사] 악지에 을 다음과 같이 소개?설명하고 있다. 무대, 악관과 妓, 그리고 의관과 행차는 무고의 의례와 같다. 이것이 인데, 여기에 불려진 가사에는 송도의 말이 많다. 대체로 선어를 본받아서 지은 것이나, 우리말로 되어 있기에 싣지 않는다. 위와 같은 내용을 [악학궤범]에서도 전해 주고 있는데, 여기에 이어라 싣지 않았던 의 가사가 있어 우리는 그 작품을 보게 된 것이다.동동이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다. 지금 창우들이 입으로 북소리를 내어 춤의 절조를 삼는 것이다. 신라의 향악으로 다섯이 있는데, 그것은 김구, 월전, 속독, 대면, 산예이다. 금구는 공기 네게나 다.
    인문/어학| 2008.02.03| 9페이지| 1,000원| 조회(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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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문학사 요약 리포트
    10. 조선전기 문인유형과 방외인문학방외인문학이 문학사에 등장한 것은 최근의 일이며 정치체제에 대해 작가가 취한 태도를 주목해서 말하는 개념이다. 방외인문학은 사대부문학과 분리해서 말할 수 없다.우리나라 사대부계급은 문인지식층이고 관인지배층으로 관료문학과 처사문학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중앙의 관료이며 지방의 지주인 이들은 관인의 생활과 전원에서의 처사로서의 생활이 있었다. 한편으론 경세문학, 궁정문학 등의 관각문학-관료적 문학이 형성되었고 다른 면에서 강호문학-처사적 문학이 형성되었다.이와는 다른 문학이 방외인문학이다. 방외란 세상 밖의 문학, 즉 세속적이고 예교적인 것에서 벗어난 문학을 말한다.문인은 우리나라나 중국 중세사회의 문학의 담당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지식과 예술이 미분화된 상태의 문인은 전문적이지 않은 직업으로, 유교적 한문능력이 문학의 바탕이 되었다. 고려후기와 조선시대의 문학의 담당자는 사대부층이며 그들이 문학을 숭상했기 때문에 ‘문(文)’이 관인으로 진출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관인사회에서도 강조되어 사대부=관인=문인의 공식이 성립되었다. 이런 문인을 관인형 문인이라 하며 대부분의 사대부가 이런 유형이다.15세기말(성종 때)에 나타난 새로운 문인학자를 ‘신진문인층’ 이라 한다. 당시 신진문인층은 대부분 사림에 속해있었고 신분이 비천하여 사림에 속하기 힘든 홍유손, 어무적 같은 사람도 있었다. 사림은 지방의 중소지주계급 출신으로 문학과 조행을 닦아 관인으로 진출한 이들로 관인형 문인과는 배경과 이념이 매우 달랐다.김종직의 문도에서 서로간의 처지, 사상적 차이에 따라 두 갈래로 나누어지며 정여창을 처사형으로 남효온을 방외형으로 구분 지을 수 있다.처사형은 학자의 양심을 지켜 정치권력에 타협하지 않고 조용히 고향에 묻혀지는 산림학자다. 의리를 존중, 규범적이고 문학을 경시하며 성리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방외형은 격렬한 비분과 비판의 자세가 체제에 받아들여지지 못해서 현실 밖으로 자신을 던져버린 사람이다. 사회적 규범을 무시하고 문학의 세계에서 자신을 찾으려 한다. 처사형은 안정된 생활기반이 있어야 가능하며 체제에 순응하는 관인형의 다른 모습이다. 반면에 방외형은 자기생활기반에서 벗어났고 사대부 생활에 균열을 일으키는 특이한 유형이다.신진문인층은 국가기강이 무너지고 사회적 모순이 심화된 연산군 때에 살았다. 농민수탈이 심해져 유랑민이 무리를 이루어 저항한 시대며 홍길동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또한 사림파를 숙청하기 위해 두 차례의 사화를 일으킨 때이기도 하다.처사형인 사람은 향리에 은둔해서 성명을 보존하기도 했다. 송세림은 연산 때에 교리를 지내다 병이 걸려서 갑자년의 사화를 피했다. 그는 민간이야기를 채집하여 이라는 우화집을 남겼고 고향선배 정극인의 가숙을 확장해서 동서제를 세우고 지방학생을 교육시켰다.방외형인 홍유순은 사화에선 벗어났으나 [조음미망], [오세비속]으로 그의 추종자와 함께 제주도로 추방되었다.정희랑과 어무적을 살펴보면 정희랑은 김종직의 제자로 한림으로 있다가 무오사화 때 의주로 유배되고 김해로 옮겨졌다가 행방이 사라졌다. 시작에 힘썼으며 은둔자와는 다른 유학자로서의 자세를 지키려 했다. 그러나 그가 인식한 현실은 암담했으며 시적자아는 철저히 분열. 고립된 상태이다. 그는 정신적으로 탈속? 망세를 기도했고 이란 산문에 나타나 있다. 에서는 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말하고 있다.어무적은 , 에 몇 편의 시작이 수록되어 있을 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 상소문 때문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신분은 , 에 [김해관기]로 명기되어 있다. 어무적은 정희량과 다르다. 정희량의 같이 개인적인 도피가 아니라 민중구제사상이 나타나있다.
    인문/어학| 2008.02.03| 8페이지| 1,500원| 조회(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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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문학사상사 논문 요약
    3. 과거제와 한문학나라에서 인재를 뽑는 최고의 수단이 과거에는 과거제였고 오늘날은 고등고시다. 옛날에도 의약, 복서 등과 같은 전문과목이 있었으나 문?무과가 단연 비중이 컸고 그중에서도 문과가 으뜸이었다. 그래서 문과에 급제하면 출세할 길이 많아 문과에 대한 문인들의 열망이 대단했다.과거제가 중국의 제도여서 그 내용도 중국을 따라가게 되었다. 책문은 국가정책을 다루었으나 다른 유학경전을 다루는 의(疑)와 의(義)는 유교의 경학을 다루었고, 시?부는 주로 한문의 시와 부를 다루었다. 내용이 우리 것이어도 표현할 때는 책문은 중국의 사륙문으로, 시?부는 논설문의 고문체로 써야했다. 이렇듯 과거제도는 중국제도의 모방과 한문학에 특별한 능력을 요구했다. 이 말은 한문학에 능숙한 사람을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입신양명의 최고의 길이 한문학에 있는 까닭으로 우리나라의 한문보급은 급격하게 늘었고 글자가 없었기 때문에 일반인도 한문을 숭상하게 되었다. 후에 국문보다 한문이 더 많이 쓰이게 된 것도 과거제도의 영향이 크다.우리나라의 과거제도는 신라시대 원성왕 4년에 독서출신과를 둔 것을 효시로 볼 수 있다. 상중하 삼품으로 나눠서 합격시켰기 때문에 다른 이름으로 독서삼품과라고 부르기도 한다.신라인들은 본국에서 실시하는 과거뿐만 아니라 당나라에서 외국인을 위해 실시한 시험 즉, 빈공과에도 응시하여서 50여명 이상 합격하는 영광을 누렸다.과거제는 고려시대에 와서 형태가 잡히기 시작했다. 광종 9년에 후주 사람 쌍기를 지공거)를 삼아 시?부?송과 시무책을 시험 보게 하여 진사 2인, 명경 3인과 의약?복서 2인을 뽑았다. 그 후 과거를 통해서만 인재를 뽑게 되었다. 현종 15년에는 각 주?현에서 예비시험에서 선발한 사람을 국자감에서 시험 보게 하고 다시 합격한 자는 과거를, 나머지는 돌려보냈다. 덕종이 즉위한 해에는 국자감시가 최초로 실시되었는데 시험내용은 부와 6운?10운의 시였다. 인종17년에 예부공원의 주에 의하면 우리나라 제술과는 시험의 3장에서 제외되었고 책론에는 운을 달지 않고 대우도 없어져서 시부학이 쇠퇴하게 되었다고 했다.조선왕조 태조 원년에 과거법을 세우면서 문무 양과를 실행하였고 문과는 제1장은 성균관에서 사서)?오경)?통감)을 강독, 2장은 예조에서 표장과 고부)를 시험보고, 책문은 예조에서 시험해서 이것을 모두 통과하면 이조에 보내어 관리가 되게 했다. 권근의 주장으로 잠시 경서 강론하는 것이 의(義)?의(疑)로 대체되었으나 세종 24년에 다시 강론하게 되었다.동월의 주에 의하면 성균관에서 500명을 양성했다가 3년마다 명경으로 뽑은 것이 생원, 시부로 뽑은 것이 진사, 전국의 사학에서 온 것을 승학이라 했다. 즉, 소과 중에서 유학경학에 능통한 사람이 생원, 시?부?사륙문을 잘하는 사람이 진사로, 대과는 생원이 보는 명경, 진사가 보는 시?부 그리고 의?제를 다 통과해야 과거급제를 할 수 있다.과거제도는 뛰어난 인재를 뽑기 위한 방법이었으나 후에 폐단이 생겨서 나라의 인재선발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조광조는 현량과를 건의하였고 이이는 경학에 밝고 문리를 통하지 못하는 사람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였다.과거의 종류와 과목을 크게 나누어보면 문?무과?잡과로 구분된다. 문과 안에 대?소과를 두고 소과 안에 생원?진사가 있다. 문과급제가 어려웠기 때문에 이것을 대과라 하고 문과는 과거 중의 과거라고 불렸다. 한문학은 문과와 관계가 있다. 문과에서 취급된 내용은 시(詩)?부(賦)?표(表)?책(策)?의(義)?의(疑)로 말할 수 있다. 시부는 운문이고 의의는 산문이라면 표?책은 운문과 산문의 중간 형태인 사륙변려문으로 씌어져서 모두 문학과 관계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의의는 경학으로, 표?책은 국가 정책을 다룬 것이기 때문에 문학적인 면은 시부에 한해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시?부는 신라 때 독서삼품과에는 없었으나 고려 광종 때 시?부?송과 시무책으로 진사를 뽑게 되면서 중요성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 후에 계속 숭상되다가 현종원년에는 시부만 치르고 시무책은 보지도 않았다. 이를 보면 과거에 있어서 시와 부의 존재가 컸다는 걸 알 수 있다. 충숙왕 때는 사서오경과 율시 100수, 소학과 오성자운도 암송해야 과거에 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시?부를 숭상하니 격식 또한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고 곳에 따라서는 독특한 형식이 요구되었다. 덕종 즉위년의 국자감시에서 6운시와 10운시를 보게 한 것이 바로 그 예이다.조선조의 과시는 고려와는 다르게 한말에 되어서 과시가 18귀로, 운도 구의 수에 따라 18운으로 변하였다. 6운에서 10운으로 늘이듯이 10운에서 18운으로 늘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모두 고시이므로 18구를 대고풍, 이전의 것을 소고풍이라 불렀다.과거제도는 우리 한문학의 발전과 변화에 관계를 갖고 있으며 좋은 영향과 나쁜 영향을 동시에 주었다. 고려시대에 이색의 글을 보면 과거로 인해 독서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문풍이 시작된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후세에 폐단이 많아 조광조와 의 한 필자도 이를 지적했다. 그 폐단 중 하나가 과거를 위한 문학이 실생활에 활용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과거에서 요구하는 시는 고시 원래의 형태가 아니라 6?10운시 또는 18운 36구의 대고풍이라는 시를 강요했다. 이 시는 과거 볼 때만 필요하지 그 어디에도 쓰이지 않았던 시형식이다.지금까지 우리나라 과거제와 한문학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우리나라 과거는 신라의 독서삼품과에서 시작되나 참으로 과거라 불릴 수 있는 것은 고려 광종 때부터이다. 이것이 발전하여 한말까지 지속되었고 과거제는 무과?잡과라는 구체화된 틀을 갖추게까지 되었다. 그중 문과는 과거 중의 과거라 불리며 대과라는 호칭까지 받게 되었다. 대과에 급제하려면 경학, 사장학에 뛰어나야 한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한문학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으나 뒤에 가서는 미사여구에만 치중한 문학을 발전시켜 한문학을 몰락시켰다. 과거에만 사용되는 실용적이지 못한 6?10?18운 등의 특수한 시 형식을 강조하여 순수한 문학이 발달하는 것을 방해했다.4. 고려전기 귀족문학고려는 정치적, 문화적인 면에서 신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신라가 안고 있던 고대 신분체제와 수취체제를 없애거나 바꿈으로서 그것에서 자유로운 상태에서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고려 문학의 특징적인 사실은 전통적인 신라향가를 수용하지 못하고 귀족문신들에 의해 한문학 위주의 문학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에 의해 고려 전기의 한문학은 귀족문학의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그들로 인해 고려문학이 만들어지게 되었다.다른 하나는 고려문학이 신라를 계승함으로써 전통적인 흐름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려전기 문학은 전대문학에 대한 해석과 이해에 치중하였고 형식이나 내용에서 새롭지 못했기 때문에 신라의 문학을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밖에 볼 수 없다.이러한 상황에서 문인들은 대개 시? 문을 함께 하게 되어 장르가 뚜렷이 구분되지 못했다. 이는 당시의 문학이 풍류적인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귀족적인 성격을 보이고 있다는 말과 같다. 고려전기의 귀족문학은 변화의 중간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신라에서 유행하던 문선문학을 그대로 받아들여 고시체와 사륙문이 주를 이루었다.고려 나름대로의 문학세계를 펼치려고 했던 시기는 문종 연간 때다. 이때는 광종 9년에 실시된 과거제를 통해 새로운 인재들이 뽑혔고 그들이 고려문단을 이끌어가게 되었다. 성종연간을 전후로 활약했던 김책 등의 문인에게서 그러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고려의 귀족문학은 11세기경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타난 결과를 보면 문학이 유학보다 우위에 있었고 왕들이 행한 문치주의 정책은 고려 귀족문인들을 문학에 치중하게 했다. 문학이 유학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발전한 예는 예종 연간에 전개된 경학에 대한 사장우위론에서 살펴볼 수 있다. 사장우위는 고려 초에서 예종전후까지 이르는 보편적인 모습이었고 고려문학은 마음을 맑고 차분히 다스리는 도학예교의 성격을 띠었다기보다는 수식이나 정서표현에 충실했다.고려전기의 귀족문학은 시와 문으로, 그 중에서도 한의 문장과 당의 시에 충실하였다. 당시 시문학은 문학의 주된 흐름이었고 문인들이 시를 통해서 출세한 것이 사실이다. 광종 때 과거제가 시행된 이후로 고체시에서 신체시로 경향이 바뀌어 새로운 시문학이 나타났다.시에 나타난 경향을 보면 공리적인 면의 시, 귀족적인 취향의 시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자연히 화려한 것에 치중하게 되어 문학의 본질에서 멀어졌다. 다른 하나는 공리적인 면에서 현실과 도덕적인 면에서 벗어난 처사문학적 특성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형식의 화려함을 극복하진 못했지만 내용은 비교적 참신하고 개성적이다. 고려시대에는 주로 공리적인 영향을 받은 시가 대부분이었다. 대표적인 시인으로 정배걸, 고응, 최충, 박인량, 김연, 김부식, 고당유등을 들 수 있고 이들 시의 내용은 이인로가 파한집에서 고려전기의 시에 시대에 대한 용인과 현실주의적인 것이 나타났다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처사적인 시풍을 따른 시인은 크게 부각되지는 못했지만 공리적인 시인과 반대되는 성격을 보이며 독특한 시세계를 이루었다. 이자현, 곽여가 대표적인 사람이다.
    인문/어학| 2008.02.03| 10페이지| 1,000원| 조회(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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