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2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2005)는 촘스키가 10년 동안의 간담회, 연설회, 세미나 등을 통해 ‘세상’의 물음에 답한 내용을 망라하여, 그 가운데서 촘스키 사상의 고갱이와 세상을 읽는 통찰의 큰 줄기를 보여주는 내용을 치밀하게 가려 뽑아 엮은 책이다.이전에 시대의창에서 펴낸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2002)와 『촘스키, 세상의 권력을 말하다 1?2』(2004) 가 주로 특정 주제에 대해 전문 인터뷰어와 나눈 대담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면, 이 책은 불특정 다수의 청중과 광범위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것이어서 그 내용이 훨씬 대화적?논쟁적?고백적이다.이 책의 옮긴이 서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1권은 , 2권은 , 3권은 로, 총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그동안 ‘촘스키’라는 이름은 많이 들어 보았지만, 부끄럽게도 그의 책을 읽어 보지는 않았다. ‘촘스키’라고 하면 막연하게 어렵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렵다고 느낀 부분도 있지만, 그보다는 정확한 자료와 근거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거부감 없이 풀어내는 촘스키가 대단하게 느껴졌다.3권의 책 중에서 2권을 선택해서 읽었다. 다른 주제에도 관심이 갔지만, 2권의 내용 중에서 교육에 관한 부분이 있어서 더욱 관심이 끌었다. 2권은 크게 ‘세상을 지배하는 제국의 방식을 말하다’, ‘공동체의 시민운동을 말하다’, ‘지식인의 책무와 사회 변화를 말하다’로 이루어져 있다.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학교의 정규교육과정에서 벗어나지 못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고등학교 때에는 물론이고 대학교에 입학해서 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권력자들이 펼쳐놓은 통제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에서 풍물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각종 집회나 시위 현장을 다녔다. 그곳에서는 항상 ‘정부’, ‘미국’이라는 존재가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그들이 추진하는 정책이나 잘못에 대해 밝히고 반대의 목소리를 드높였지만, 그런 일이 발생하는 원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 이면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커다란 권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권력자들이 원하는 교육을 받고, 예상했던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에서 ‘제대로 배웠기’ 때문에 사회주의의 개념을 소련이나 중국의 그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소련의 몰락이 곧 사회주의의 몰락이었고 사회주의 보다는 자본주의가 좀 더 나은 체제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촘스키는 이렇게 말한다.사회주의라는 사상을 완전 박멸하려는 일관된 노력에 의해 사회주의는 곧 소비에트 전체주의와 같은 것으로 둔갑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이런 박멸 노력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사람들이 소련의 사태를 쳐다보면 거의 자동적으로 사회주의는 망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소련의 진정한 체제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려고 하지 않고 말입니다. 그것은 서방 엘리트들이 볼 때 아주 귀중한 프로파간다의 승리였습니다. 그걸 내세우기만 하면 사회 체제의 진정한 변화를 위한 미국 내의 운동을 아주 간단히 견제할 수 있으니까요.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이봐, 자꾸 사회 체제의 변화라는 말을 하는데 그거 까놓고 말하자면 사회주의 하자는 거잖아. 그 사회주의가 어떤 꼬락서니가 되었는지, 소련의 사례를 한번 보라고.”나도 그동안 사회주의라는 사상을 박멸하려는 노력에 충실하게 속아왔다. 그 노력은 우리가 단순히 성공이냐, 실패냐에 대해서만 매달리도록 만들었다. 소련과 미국에 대해 단순 비교만을 강요당함으로써 우리는 진실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20세기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 커다란 싸움이 붙었는데 결국 자본주의가 이기고 사회주의는 졌다고 생각하고 있다.사실 미국은 그들의 필요에 따라, 지난 50년 동안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파시스트 체제를 줄기차게 지원해 왔다. 이것은 심지어 부유한 유럽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스스로를 ‘세계경찰’로 자부하지만, 실상은 그들의 필요와 이익에만 움직이는 것뿐이다.이러한 권력에 맞서서 촘스키는 ‘시민운동’을 희망으로 생각한다. 민중의 단결된 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는 시민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우리는 안정된 민중조직, 관심의 문화, 참여의식, 행동주의, 연대의식을 개발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있으면 각종 투쟁에서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그 힘으로, 우리를 갈라놓고 산만하게 만들기 위해 쳐놓은 각종 장애물을 쳐부술 수 있습니다.하지만 이렇게 시민운동을 조직하기까지는 어려운 과정이 있음을 말한다. 권력의 무관심과 방해로 인해 시민운동의 조직화가 쉽지 않다. 언론은 계속해서 "너희들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너희는 혼자야. 너희는 서로 떨어져 있어. 너희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잖아. 그러니 앞으로도 성취하지 못할거야."라고 말한다. 세상은 자기 혼자만을 생각하며 살아가기에도 힘들다고 말하며, 민중들은 좌절을 겪을 뿐이다.민중들에게서 그들이 변화의 주체라는 생각을 뺏어버리는 기술 가운데 하나는, 변화의 진정한 행동가는 민중이 아니라 지도자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위인사관을 내세워야 민중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무기력하니 위인이 나타나 그들을 지도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지연 전술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그리고 민중들에게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무언가를 바꿔줄 것이라는 기대감만을 갖게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IMF시절, 일부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같은 인물이 다시 나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었다. 경제가 어려워서 나온 이야기겠지만, 이런 생각에도 우리 사회를 변화시켜줄 지도자를 기다리는 모습이 담겨있다. 요즘은 한?미FTA가 화두이다. 이에 반대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민중 스스로가 일어서는(물론, 자신의 이익이 걸려있는 사람들이 많긴 하지만)것을 볼 수 있다. 민중들이 서서히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운동을 성취하려면 많은 일련의 과정을 거쳐 가야 하는데 우선 인식으로 시작하는 겁니다. 물론 인식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뭔가 해야겠다는 인식이 없이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할 테니까. 그것이 원칙적으로 시작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진짜 인식은 세상에서 실천하고 경험함으로써 찾아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먼저 인식하고 그 다음에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하여 인식하게 되는 겁니다.책을 읽으면서 가장 의미있게 다가왔고, 나에게 반성을 가져다 준 구절이다. 실천하는 젊음이 아름답다는 둥 실천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왔다. 하지만 ‘알고 있어’라며, 항상 예사롭지 않게 흘려 넘겼을 뿐이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과연 진짜로 알고 있는 것일까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그리고 ‘과학의 사기꾼’이라는 작은 주제도 흥미로웠다. 여기서는 자연과학에 비해서 인문사회 과학의 사기성을 말하고 있다.어떤 정치적 의도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아젠다를 뒷받침할 "과학적 사기"를 찾게 마련입니다. 이미 엉터리로 판명된 '피아제 이론'을 불변의 진리인양 끌어대는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피아제 이론의 구조가 완전히 허물어졌고 발달 단계들이라는 것이 다 가짜인 것으로 판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형집행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과학적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그리고 촘스키는 아담 스미스의 고전 자유주의와 지금까지 얘기하고 있는 자유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로 넘어가는 일련의 단계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역시나 권력이 그 과정을 어떻게 왜곡하고 이데올로기를 집어넣고 있는지 비판하는 작업을 계속한다.사실을 전적으로 은폐하고 사실과는 정반대의 것을 제시하면서 "내가 읽지 않으니까 아마도 473쪽을 읽는 사람은 없을 거야"라고 짐작하는 겁니다. 이 책을 편집한 사람들에게 473쪽을 읽었느냐고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첫 번째 문단을 읽었지만 그 나머지는 대학교 수업에서 배운 것을 기억하고 있다. (아담 스미스의 시카고 판을 거론하며)지식의 사기를 얘기하며 지식의의 책무를 강조하고 있다. 지식인들은 그들의 권력과 지위를 지켜나가기 위해서 알고 있는 것을 모른척 지나가기도 하고, 심오하다고 생각되는 온갖 용어들을 써가며 그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막기도 한다.
‘현대중국을 찾아서’를 읽고1. 머리말얼마 전에 위화의 소설 『형제』를 읽었다. 이 소설의 1권은 문화대혁명 시기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2, 3권은 중국의 현재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문화대혁명부터 자본주의의 중국까지를 생생한 묘사로 다루고 있다. 이 시기를 주인공인 두 형제가 헤쳐 나간다. 문화대혁명 광기의 시대, 그리고 80년대는 개혁?개방이 실시되면서 부를 쫓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전체적으로 부패, 도박, 매춘 등 온갖 사회의 어두운 면이 나오고 현대 중국 40년을 응집시켜 보여준다. 중국 사회의 빠른 변화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마치 우리나라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중국은 어떤 나라인가? 중국은 현대 사회에서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나라이다. 미국의 국제안보연구소가 최근 펴낸 계간 `중국안보'의 2008년도 봄철호 `중국 미래에 대한 논쟁'에 참여한 22명의 저명 중국 전문가들에 따르면 중국이 세계의 패권을 차지한다는 이른바 `중국위협론'이나 중국 공산당이 조만간 몰락할 것이라는 `중국붕괴론'은 자취를 감추고 ‘중국 불확정론’이 대세로 떠올랐다. 중국 불확정론은 중국이 경제적으로 강국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은 이제 당연한 일이 돼버렸지만 중국의 미래는 국내외의 변수에 따라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에 대해 아직 점치기 어렵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국제적으론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견제가 여전하고 국내적으론 정치 체제, 소수 민족 단결과 사회 안정 유지 등의 난제가 많아 한 마디로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이다.중국은 우리나라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중국은 우리나라가 많은 수출을 할 수 있는 기회의 장으로, 혹은, 우리나라에 위협을 끼치는 나라로 언급된다. 그리고 최근의 동북공정과 티벳트 독립 문제로 인한 중국 유학생 폭력 문제 등 그 감정이 미묘하다. 하지만 우리는 세계화의 시대에서 중국을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번영을 위한 동반자적 시각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접근을 1부는 ‘정복과 통합’, 2부는 ‘분열과 개혁’, 3부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구상’으로 이루어져 있다.1부 - 정복과 통합명 말기의 사회가 문화적?경제적으로 풍요를 누리고 있었음에도 사회구조의 취약성을 암시하는 위험한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명 왕조는 농촌 관료조직에 대한 통제력을 서서히 잃어 갔으며, 그 결과 과세구조에 대한 통제력도 무너지게 되었다. 동시에 만주의 누르하치의 공격에 대비한 군사비 지출로 조정은 압박을 받게 된다. 결국 명나라는 1644년 이자성이 지도하는 농민 반란군에 의해 멸망하였다.청나라는 명나라 이후 만주족 누르하치가 세운 정복왕조로서,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1636~1912)이다. 명나라의 힘이 약해질 무렵, 만주의 여진족은 차차 힘을 키워 1616년에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웠다. 그리고 명나라 군대를 무찌르고 성경에 도읍을 정하였다.누르하치가 죽은 뒤에, 그의 아들 태종은 만주뿐만 아니라 내몽고까지도 정복하고, 1636년에 나라 이름을 청이라 고쳤다. 강희제 때에 이르러 '삼번의 난'을 평정하고, 타이완에서 반항을 계속하던 정씨 일족도 굴복시켜 중국 통일을 완성하였다.중국을 정복한 여진족들은 한인들에게 자기들의 풍습인 변발과 만주복을 강요하여 한인들의 심한 반발을 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중국의 전통 문화를 존중하고 과거 제도를 실시하였다. 또 동일 관직에 만주인과 한인을 병용하는 만한 병용제를 실시하고, 조세를 가볍게 하여 민심의 안정을 꾀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옛날 원나라가 중국을 통치하던 방법과는 다른 것으로 청나라가 한족을 300년간이나 통치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청나라는 통일을 완성시킨 강희제로부터 다음 옹정제를 거쳐 제6대 건륭제 시대까지의 약 130년간이 전성기였다. 강희제는 중국에 접근해 온 러시아 세력을 북쪽으로 몰아내는 동시에,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러시아의 남진을 막았다. 또 몽고를 공격하여 외몽고 일대를 영토로 삼고 티베트도 청나라의 지배 아 이미 변경에서 조짐을 보이고 있던 이슬람교도 먀오족 등의 여러 반란은, 얼마 되지 않아 가경 연간에 이르자 백련교의 후베이 등 5개 성에서 대반란으로 폭발하였다. 백련교의 난은 10년(1796~1804)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국가권력의 지주인 8기의 무력함이 폭로되었으며, 거기다 권신 화신의 미증유의 수회사건이 상징하듯, 관료정치의 부패로 인하여 청 왕조의 지배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유럽 자본주의의 세계 지배의 파두가 중국에 들이닥침으로써 결정적인 청 왕조의 쇠퇴를 가져왔다.2부 - 분열과 개혁중국학자들은 인구 증가, 관료의 부패 등 중국이 당면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보다 현실적이고 행정적인 문제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며 유교적 전통 속에서 변화를 고무시킬 요소를 모색했다. 이 무렵 영국으로부터 들어온 아편이 확산되고 중국의 은이 다량 유출되면서 논쟁의 핵심 사안이 되고 결국 1838년 도광제가 아편 무역을 종식시킨다. 이에 영국은 무력으로 대항하여 아편전쟁이(1839-1842) 일어나고 청은 서양의 군사기술과 전술의 혁신을 접하고 이로 인해 결정적인 공격을 받게 되며 1842년 난징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를 기점으로 다른 열강과도 조약을 맺게되고 청은 외국에 대해 정체성을 지키는데 실패하며 중국의 통상, 사회, 외교의 핵심부분의 통제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런 대외적 압력 외에도 인구증가, 은의 유출, 관직에 못 오르는 유생의 증가, 아편중독자의 급증, 정규 기군의 전력 감소, 관료조직의 부패 등 중국 내 불안요소가 심화되면서 내부에서도 혼돈이 생겨나고, 남부와 북부에서 린칭의 반란, 삼합회 같은 저항이 절정에 달한다. 이후 1840년대에는 홍슈취안을 중심으로 유교의 근본을 흔드는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의 형성과 만주족의 박멸을 꾀하는 중국 역사상 가장 치명적이고 장기적인 태평천국 반란이 생겨난다. 청이 태평천국을 물리칠 수 있던 것은 1860년대 초 외국인의 협조를 얻어서인데, 영국은 1858년 중국을 굴복시켜 텐진조약과 베판 등은 학교의 재건과 엄격한 유학 교육을 위한 개정안을 제시하고 서양의 기술을 선택적으로 사용하는 자강운동을 계획한다. 외교에 있어서도 1861년 외무부인 총리아문이 설립되고, 통역관 양성학교등이 개교되는 등 개혁을 통한 중흥을 도모한다. 선교사들을 통해서는 기독교 교재 및 일반 역사서와 과학서가 출판되고, 학교와 의학기술이 도입, 발달되었다. 또 이 시기에는 내부 혼란으로 인해 많은 중국인들이 티베트, 베트남, 타이완 등으로, 또 동남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미국 해안에까지 이민을 갔다. 19말엽에는 서양의 학문, 기술을 선택적으로 도입해 중국을 발전시키려는 자강운동이 리홍장의 주도로 계속되었다. 그러나 1894년 조선 정변이 일어나 중국과 일본 모두 군사를 파견하였으나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보다 나은 군사력을 확보한 일본이 조선 왕조를 점령하고 이에 청과 대립하게 되지만 청은 일본에게 패하고 1895년 중국에게 비극적 손실을 안겨다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1898년에는 광서제가 청의 사회와 정부에 변화를 요구하며 캉유웨이 등과 개혁 추진을 시도하지만 서태후의 광서제 유폐로 실패로 끝난다. 중국 내에서는 외세나 만주족의 관계에 대한 새롭고 시급한 자각이 요구되었으며 중국인이 생존을 위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대응의식이 고취되었다. 이런 민족주의 경향의 대두는 1900년 의화단 운동, 1903년 쩌우룽의 창간, 1905년 반미 불매운동 등에서 드러난다. 또한 중국의 전반에 걸친 압력이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해외유학생, 여성, 상인, 도시 노동자들 같은 무시되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청은 1905년 서태후에 의해 세계열강의 정부체제를 연구하고 제도 개혁 조치를 이루며, 군대를 재정비하고, 철도를 국유화하는 등의 노력을 하지만 각 지방에 생긴 성의회는 청을 비판하고 지방의 이해를 관철시키는 기반이 되었으며, 철도에 관한 이권회수운동을 추진하던 중국의 인민들에게 반발을 사게 되었다. 캉유웨이 등은 민족주의 통치를 지지 위안스카이를 중심으로 임시공화정부가 조직된다. 이로써 2천년이상 이어진 중국제국사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3부 - 국가나 사회에 대한 구상청 왕조가 가지고 있던 중앙과 지방 권력의 불균형은 결국 사회 혼란과 함께 새로운 체제의 요구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고자 학자들과 핵심세력들은 공화정 형태의 정부를 추진하고자 한다. 여러 노력으로 자정원, 참의원이 구성되었고 1913년 총선을 거쳐 국민당이 승리하게 된다. 그러나 국민당 지도자 쑹자오린이 암살됨으로 평화적 민주 공화제의 정착은 무효화되었고 위안스카이가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위안스카이의 독자적 형태의 정치 행보와 성향은 현실적인 상황을 타개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하였고 중국 정국은 결국 지방 권력의 군사지도자들의 난립에 더욱 혼란해지게 된다. 이러한 국내의 혼란에 세계정세는 더욱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흐르며 여려 영향을 끼치게 된다. 제 1차 세계대전에 중국이 노동자를 파견하게 외교적 노력으로 국내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으나 일본이 요구와 영토문제의 해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불안한 시간 속에서 사회 진화론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소련의 대중정책이 다른 서구 열강과 대조적이어서 중국은 소련에 대해 우호적인 정서를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학교와 지식인들의 주도로 1919년 5월 4일 5개의 결의안이 발표되었는데 이것은 청 왕조 멸망 이후 극도의 혼란에 빠진 중국 사회에 대한 회의와 미래에 대한 갈망의 분출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운동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지식인들은 코민테른 요원들과 접촉하며 마르크스주의에 몰두하게 되었고 1921년에 중국 공산당 전체회의를 열게 되었다. 중국 전역에 조직과 지지자를 갖고 있었던 국민당과 연합하여 군벌을 시작한 중국 공산당은 노동자 파업 유도와 농촌 협회 구성 등의 성과를 내었으나 근본적인 의견차이로 인해 결별하게 되었고 중국공산당은 처참하게 실패의 길을 걷다.
국어과 교수?학습 과정안차례Ⅰ. 대단원 개관1. 대단원 학습 목표 ? ? ? ? ? ? ? ? ? 2쪽2. 단원 설정의 이유 ? ? ? ? ? ? ? ? ? 2쪽3. 전학년 학습 내용과의 관련 ? ? ? ? ? 2쪽4. 관련 교육 과정 ? ? ? ? ? ? ? ? ? ? 3쪽Ⅱ. 대단원 교수 ? 학습 운영 방안1. 교수 ? 학습 계획 ? ? ? ? ? ? ? ? ? ? 3쪽2. 지도상의 유의점 ? ? ? ? ? ? ? ? ? ? 5쪽Ⅲ. 본시 교수 ? 학습 계획1. 본시 교수 ? 학습 과정안 (1차시/ 2차시/ 3차시)? ? ? ? ? ? ? ? ? ? 6쪽2. 판서 계획 ? ? ? ? ? ? ? ? ? ? ? ? ? 22쪽3. 학생용 학습지 ? ? ? ? ? ? ? ? ? ? ? 23쪽4. 평가지 ? ? ? ? ? ? ? ? ? ? ? ? ? ? ? 24쪽5. 좌석 배치도 ? ? ? ? ? ? ? ? ? ? ? ? 26쪽단원명3. 독서와 사회(2) 독서와 사회?문화와의 만남대 상3학년 7, 8반 (각 34명)장 소3-7 교실, 3-8 교실Ⅰ. 대단원 개관1. 대단원 학습 목표? 읽는이에 따라 글을 다르게 읽음을 알 수 있다.? 작품에 나타난 사회적, 문화적 상황을 창작 동기와 관련지어 설명할 수 있다.2. 단원 설정의 이유오랫동안 독서의 중요성은 강조되어 왔으나, 문학 작품 읽기를 통한 사회적, 문화적 경험 실천에 관한 논의는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문학 작품 읽기를 통해 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내가 겪어 보지 못한 세계를 알게 되며, 역사의 본질적인 의미에 대한 성찰을 이룬다. 이는 작품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 그리고 작가의 사회적 동기를 고려하며 읽는 적극적 문학 읽기와 문학의 소통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태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적극적, 능동적 문학 익기는 우리가 만나는 사회 현상이나 문화 현상에 대해 주체적인 자리에 서야 한다는 각성을 제공한다.이 단원은 적극적, 능동적인 문학 작품 읽기의 중요성과 문학 작품정리하기【목표학습】? 사회적, 문화적 상황을 나타내 주는 소재 찾기? 이 소설을 통해 지은이가 말하려고 한 짓 정리하기? 인물들의 행동에 대한 자신의 생각 말하기? 소설 속의 사건과 비슷한 일을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기5/6생각 넓히기? 소설의 뒷이야기 꾸며 보기보충?심화자기 점검? 자기 점검을 통해 단원 학습 내용의 이해 정도와 활동의수행 정도를 학생 스스로 평가하기6/6활동 1? 글을 읽고, 느낌 말하기? 어린 시절에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 발표하기활동 2? 글에 나타난 시대상 파악하기? 현재의 나의 생활과 비교해 보기활동 3? 작품에 나타난 사회상 파악하기이 단원을 마치며? ‘이 단원을 마치며’를 읽고, 단원의 학습 내용과 활동을정리하기2. 지도상의 유의점? 소단원 (1) ‘독서와 사회? 문화의 만남’은 독서를 통해 사회?문화를 만난다는 것의 의미, 문학 작품 읽기와 더불어서 대화적 의사 소통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 작품의 사회적, 문화적 의미와 작가의 사회적 동기를 고려하여 읽는 적극적 문학 읽기의 중요성, 문학 작품 읽기를 통한 사회적, 문화적 경험 실천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는 글이다. 이 단원의 내용은 학생들의 이해와 이를 바탕으로 한 실천에 중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단원의 학습 내용을 단순한 지식 전달 위주로 지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소단원 (2) ‘원미동 사람들’은 소설의 사회적, 문화적 상황을 고려하여, 이 소설을 통해 작가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생각하며 학생들이 작품을 읽도록 구성하였다. 따라서 이 작품의 주제를 단정적으로 못 박지 않는 것이 좋다. 학생들의 다양한 반응을 통해 소설을 여러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이 좋다. 또한 소설 속의 사건과 비슷한 일을 우리 주변에서 찾아봄으로써 소설 속의 현실과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현실의 관계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이 단원의 평가는 구체적인 작품을 대상으로 하여 다음 사항에 초점을 두고 평가하는 것이 좋다 ‘① 작품이 지닌고 학습목표를확인한다.?교과서에 인용되어 있는지문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이야기해보도록 한다.?학생들의 생각을 들은 후에이번 단원을 통해 읽는이의경험이나 처한 환경, 사회적,문화적 차이에 따라 글을다르게 읽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울 것임을 설명한다.?단원의 길잡이를 통해학습목표와 학습의핵심을 이해한다.?교과서에 인용되어있는 지문에 대한자신의 느낌과 생각을자유롭게 이야기한다.?자신의 생각과 다른학생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교사의 설명에따라 다양한 해석의가능성을 이해한다.교과서전개(28분)읽기 전 활동?교과서 P.72의 ‘읽기 전에’를풀어보도록 한다.?풀은 내용을 발표해보는시간을 갖는다.?작품의 창작배경에 대한이해를 돕는다.?도식을 통해 작가와 작품,그리고 독자의 상호관계에대해서 설명하고 이들사이의 영향을 주고받음을깨닫도록 한다.?자신의 지식과 생각을바탕으로 ‘읽기 전에’를 풀어본다.?자신이 풀은 내용을자신 있게 발표한다.?작품의 창작배경을이해하고 그 이해의중요성을 안다.?도식을 통해 보다 쉽게작가와 작품, 독자의관계를 이해한다.교과서읽기 중활동(문학 작품읽기와세상과의만남)?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학습지를 안내한다.한 단락씩 읽은 후에중심내용을 찾는 방식으로수업이 진행될 것임을알린다.?학습지를 보면서수업의 진행방식을파악한다.학습지PPT자료?소제목을 보고 어떤내용인지 짐작하여말해보게 한다.?본문을 학생의 자원 또는지명으로 한 단락씩 읽힌다.?학생들과 함께 각 문단별로중심내용을 찾는다.?소제목을 보고자신이 추측한내용을 이야기한다.?자원을 하거나 지명을받은 학생은 본문을한 단락씩 읽어나간다.?처음에는 혼자 힘으로해보고 다음에는 짝과 함께협동하여 해보게 한다.?찾은 중심내용을 바탕으로학습지의 괄호 안을채워나간다.?진행 중에 필요한 어휘와단락에서 두드러지고 있는표현기법이 있는 경우에이를 찾아 언급하고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예를 들어 설명해준다.(아래 보충 참조)?하나하나의 단락의 중심내용을 파악한 뒤에는구성 단계별로 핵심내용을정리하여 학생들이글의 구성을 이해하게 한다.?친에 이어서문학 작품 읽기와 관련된사회?문화적 요소에 대하여배울 것임을 인지시킨다.?오늘의 학습내용을예상해본다.?교사의 설명을 통해단원의 기본적인내용을 안다.교과서학습방법안내?학습형태는 개별학습 및짝과의 협동학습 형태로이루어질 것임을 알린다.?지난 시간에 나누어 주었던학습지를 준비하도록지도한다.?학습형태를 안다.?학습지를 준비한다.학습지전개(33분)읽기 중활동(문학 작품읽기와사회적,문화적대화)?소제목을 보고 어떤내용인지 짐작하여말해보게 한다.?본문을 학생의 자원 또는지명으로 한 단락씩 읽힌다.?학생들과 함께 각 문단별로중심내용을 찾는다.?처음에는 혼자 힘으로해보고 다음에는 짝과 함께협동하여 해보게 한다.?찾은 중심내용을 바탕으로학습지의 괄호 안을채워나간다.?소제목을 보고자신이 추측한내용을 이야기한다.?자원을 하거나 지명을당한 학생은 본문을한 단락씩 읽어나간다.?친구가 단락을 읽고나면 그 단락의 중심내용이 무엇인지찾아본다. (개인+짝)?짝, 교사와 함께찾아낸 중심내용을바탕으로 학습지의괄호 안을 채운다.학습지PPT자료교과서읽기 중활동(문학 속의사회적,문화적배경과동기)?진행 중에 필요한 어휘와단락에서 두드러지고 있는표현기법이 있는 경우에이를 찾아 언급하고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예를 들어 설명해준다.(아래 보충 참조)?하나하나의 단락의 중심내용을 파악한 뒤에는구성 단계별로 핵심내용을정리하여 학생들이글의 구성을 이해하게 한다.?본문에는 글의 내용에등장하는 여러 작품이존재하므로 이들의효과적인 전달을 위해본문의 진행 중작품이 언급되고 난 후에동영상을 틀어준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동영상 자료- ‘홍길동전’드라마 일부 동영상 자료- ‘난쟁이가 쏘아올린작은 공’ 동영상 자료(수업 진행속도와 관련하여 시간 조절)?교사가 설명해주는어휘는 표시하고 뜻을적어 놓으며,표현기법 또한 표시하고 예를 통해 이해를하도록 한다.?중심내용이 파악된단락들을 바탕으로글의 구조를 파악하고구성단계별 핵심내용을 이해하고학습지에 정리한다.?동영상을 보고 각작품의 내용을이해하면서 문학 작품 에 내포되음을 알 수 있다.2. 작품에 나타난 사회적,문화적 상황을 창작동기와 관련지어 설명할 수 있다.?학습목표를 인지한다.PPT자료과제확인?지난 시간에 사회?문화적배경과 동기가 두드러진드라마나 시, 소설 등을생각해오고 그에 대한 간단 한 줄거리를 발표할 수 있도 록 준비해 오도록 하는 과제 를 부여했음을 상기시킨다.?발표 시간을 갖는다.?지난 시간의 과제를확인한다.?발표를 통해 자신의과제를 확인 받고자신의 생각을표현한다.학습방법안내?학습형태는 지난 시간과마찬가지로 개별학습 및짝과의 협동학습 형태로이루어질 것임을 알린다.?학생들에게 교과서와 함께학습지를 준비하게 한다.?학습형태를 안다.?학습지를 준비한다.학습지읽기 중활동(문학 작품 읽기와사회적,문화적실천)?지난 시간과 마찬가지로본문을 학생의 자원 또는교사의 지명으로 한 단락씩 읽힌다.?학생들과 함께 각 문단별로중심내용을 찾는다.?처음에는 혼자 힘으로해보고 다음에는 짝과 함께협동하여 해보게 한다.?찾은 중심내용을 바탕으로학습지의 괄호 안을채워나간다.?진행 중에 필요한 어휘와단락에서 두드러지고 있는표현기법이 있는 경우에이를 찾아 언급하고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예를 들어 설명해준다.(아래 보충 참조)?하나하나의 단락의 중심내용을 파악한 뒤에는구성 단계별로 핵심내용을정리하여 학생들이글의 구성을 이해하게 한다.?자원을 하거나 지명을당한 학생은 본문을한 단락씩 읽어나간다.?친구가 단락을 읽고나면 그 단락의 중심내용이 무엇인지찾아본다. (개인+짝)?짝, 교사와 함께찾아낸 중심내용을바탕으로 학습지의괄호 안을 채운다.?교사가 설명해주는어휘는 표시하고 뜻을적어 놓으며,표현기법 또한 표시하고 예를 통해 이해를하도록 한다.?중심내용이 파악된단락들을 바탕으로글의 구조를 파악하고구성단계별 핵심내용을 이해하고학습지에 정리한다.학습지PPT자료교과서전개(29분)읽은 후활동(학습활동)?글의 갈래와 제재, 주제를판서하고 종합적으로 글의특징에 대하여 설명한다.?학습활동 중 내용 학습을풀어보게 한다.이는 글을 정확하게 제대로잘 읽었는지를 평가하는것으로
‘태평천국과 염군’19세기 하반기에 동아시아 지역에는 두 차례의 대규모 농민운동이 발생하였다. 바로 중국의 태평천국과 조선의 동학농민혁명이었다. 이 두 농민운동은 시간의 차이는 조금씩 있지만 그 성격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찾을 수 있다. 종교를 바탕으로 농민들을 하나로 묶어 낼 수 있었던 운동이며, 근대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에 일어난 운동이었다. 물론 ‘태평천국과 염군’에서는 태평천국을 근대화 운동, 종교적 혁명운동, 농민운동의 한 가지 성격으로만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농민이 주축이 되었기에, 두 운동을 비교하여 살펴봄으로써 태평천국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유사점을 살펴보면, 첫째 역사적인 면에서 볼 때, 모두 본국의 근대 역사에 있어서 규모가 제일 큰 농민혁명이었다. 중국과 조선은 모두 농업국으로 농민이 인구의 대부분을 겸하고 있으며, 농민문제는 양국의 중요한 사회문제였다. 한중 양국의 고대와 근대의 역사에 있어서 일찍이 크고 작은 수많은 농민기의가 발생하였었는데, 태평천국 농민운동과 동학 농민혁명은 한중 양국의 근대 역사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영향이 제일 컸던 농민혁명이었다.둘째, 외국 세력이 침략해오면서 조성된 사회적 위기의 원인에서 폭발한 반봉건?반침략 성질의 농민혁명이었다. 한중 양국의 전통적인 농민혁명은 모두 본국의 봉건지주관료의 착취와 압박이 불러일으킨 것으로, 이른바 ‘관핍민반’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중국은 진말의 진승과 오광의 기의로부터 청대 중엽의 백련교 기의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러하였다.셋째, 하층의 지식분자출신인 영도자들이 종교의 형식을 이용하여 농민을 조직하여 혁명을 진행하였다. 농민의 분산적이며 산만하고 문화수준이 낮은 특징으로 인해 농민혁명의 영도자들은 종종 일정한 문화소질을 갖추고 있는 하층의 지식분자들인 경우가 많으며, 종교의 신비적인 역량을 이용하여 농민군중을 발동하고 조직하였다. 중국 역사상에서 예를 들어 동한 말년의 농민기의는 태평도와 오두미교를 이용하였으며, 청대의 농민기의도 백련교와 천리교 등을 이용하였다.넷째, 본국의 봉건통치와 외국의 침략세력을 공격하여 충격을 주었으나, 본국 봉건통치자와 외국 침략자의 연합에 의해 진압당하고 실패하였다.다음으로 두 운동의 차이점을 살펴보자. 첫째, 시간의 선후와 처해있던 환경 및 형세의 차이이다. 중국의 태평천국 농민운동은 1851년부터 1864년까지 사이에 발생하였으나, 조선의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부터 1895년 사이에 발생하였으므로, 양자 사이의 선후 차이는 30여년이었다. 이 시간상의 차이와 동아시아 국제형세의 변화는 두 농민전쟁이 처한 환경이 서로 다르게 하였다. 1850년대부터 60년대 초까지 중국은 두 차례의 아편전쟁을 겪으면서 닫혔던 문호를 여는 과정을 실현하였다. 외국의 열강들은 아직까지는 내륙 깊숙이 들어오지 못하였고, 중국의 경제적인 명맥도 완전히 통제하고 있지는 못하였었다. 당시 중국사회의 주요한 모순은 농민계급과 봉건통치계급간의 모순이었으며, 이 같은 상황에서 발생한 태평천국 농민운동의 투쟁의 창끝은 주로 봉건통지자인 청왕조와 귀족과 관료지주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태평천국을 진압한 주요한 역량은 중국 한족의 지방 무장세력인 상회군이었다. 태평천국 측은 일관하여 서방열강들을 상제를 믿는 ‘서양형제‘라고 생각하였고, 그들의 도움을 얻겠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서방열강 또한 일찍이 태평천국에 대해서 중립관망의 태도를 채택하고 있었다. 당시의 일본은 아직까지 막부 말년에 처해 있었으며, 서방열강의 침략을 받아 반식민지로 전락할 수도 있는 위험에 처해있었다. 따라서 일본은 아직까지 중국을 침략하는 열강의 행렬가운데는 참여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태평천국이 서발열강의 역량을 견제하여 서방의 일본에 대한 압력을 경감시켰으므로,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위해 유리한 국제적인 조건을 만들어주었다.그런데 1894년 조선에서 동학혁명이 발생하던 때에는 국내와 국제적인 형세가 이미 크게 달라져 있었다. 조선은 1870년대에 개항을 한 이후, 서발열강과 일본세력의 경제적인 침략을 받고 있었다. 더욱이 명치유신 후의 일본은 조선을 대외확장의 첫 번째 목표로 삼고 “정한론”을 고취시키고 있었다. 1894년 조선정부가 중국에 파병하여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청한 기회를 이용하여 대거 출병하였고, 사단을 만들어 돌연 급격을 하였고, 중일 갑오전쟁을 일으켰다. 동시에 일본군은 조선의 왕궁을 점령하여 친일파 정권이 집권하게 도왔다. 따라서 동학농민혁명의 후기에 있어서 주요한 투쟁대상은 일본 침략자들이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의 최후 또한 주로 일본의 군대에 의해 진압당하게 된다.둘째, 정치강령과 혁명조치의 차이이다. 중국의 태평천국 농민운동은 완비된 강령과 제도와 정책을 제시하였었다. 1853년, 태평군은 남경을 점령한 직후, 천왕 홍수전이 태평천국의 기본강령인 ‘천조전무제도’를 반포하였다. 그것은 농민의 요구인 토지와 평등의 희망을 반영하여 인구에 따른 토지 평분 방안을 제시하고 있었다. 또한 절대적인 평균주의 분배제도를 실시하고 있었다. 이것은 선면한 반봉건 색채를 갖추고 있는 농민의 혁명강령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전쟁환경과 정대적인 평균주의는 생산력 발전에 불리하였으므로 진정으로 실행되지는 않았다.태평천국과 비교해볼 때, 한국의 동학농민혁명이 제창하였던 강령과 조치는 비교적 간단하였다. 1894년 2월 전봉준이 영도하던 동학농민혁명군은 백산을 근거지로 하여 ‘사대명의’라고 이름붙인 행동강령을 반포하였다. 그 내용은 “첫째, 살인하지 말고 짐승을 죽이지 말라. 둘째, 충과 효를 모두 온전히 하고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 셋째, 오랑캐와 왜인을 몰아내어 성도를 맑게 하라. 넷째, 군대를 몰아내고 서울에 들어가 권귀를 섬멸하자”고 하여 그 반봉건, 반침략의 종지를 나타내고 있다.셋째, 본국의 봉건정권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이다. 중국 태평천국 농민운동의 목표는 청왕조의 통지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것이었다. 홍수전은 청왕조를 비유하여 ‘염라요’라고 하였고, 청조의 관리와 군대를 “요괴(妖怪)의 졸병‘이라고 하면서, 상제가 그를 지상으로 내려보내 세상을 구원하고 요괴들을 몰살시키라고 명령하였다고 말하였다. 아울러 북벌군을 파견하여 북경으로 진군하여 일거에 청왕조를 타도하려고 하였다.
‘중화제국질서의 동요’개혁을 통한 중흥1850년대에 마르크스가 청 왕조가 곧 멸망할 것이라고 전망했으나, 청 왕조는 당장 무너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9세기를 지나 1912년까지 존속했다. 청의 정치인은 이 생존을 ‘중흥’이라고 묘사했다. 중흥이라는 관념은 과거에 대한 향수와 희비가 교차하는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과거의 중흥은 중요했지만 영원하지는 않아 모든 ‘중흥된’왕조들이 결국에는 망했기 때문이다. 청의 관리들은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군사적 동원을 시도했다.청조의 중흥을 위한 노력을 ‘유교의 개혁’, ‘외교정책의 결정’을 통해 알아보고 19세기 후반에 화교들의 진출을 살펴보자.동치중흥의 목표는 바로 유교국가의 기본 가치들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중흥관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준 인물은 후난 출신의 학자이자 장군인 쩡궈판이었다. 쩡궈판이 옹호한 유교 신조는 엄격하기는 하지만 절충적인 것으로 유교적 진리에 이르는 세 가지 접근법을 조화시키려 했다. 하나는 도덕원칙의 지고함과 교육을 통한 개인의 수양을 강조했다. 또 하나는 건륭제 시기의 고증학파를 지배했던 것으로 문헌적 엄격함과 정밀성을 주장했다. 셋째, 건전하고 정직한 행정구조를 재건하기 위해 굳건한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 허창링 같은 정책사상가의 실용적인 가르침을 신봉했다. 쩡궈판의 종합적 이론은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패한 후 암울했던 시기에 수년간에 걸친 연구와 사색에서 나온 결과이다.그는 유능한 학생들에게 명예직이나 감투를 사는 대신 정식 시험을 치르라고 격려했고, 반란군에 맞서 정의롭게 전사한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해 책으로 편찬하고, 그들의 선례가 미래 세대까지 귀감이 되도록 했다. 이런 정책들은 베이징의 중앙정부로부터 전반적으로 지지를 받았으나 재정이 부족하고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기에 쩡궈판과 그의 동료들은 어떻게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쩡궈판은 그를 도와 줄 이러한 조직원을 찾기 위해 사려깊은 면접 방법과 등급 순위를 개발했다. 전통적 학문이나 도덕적 가치에 중점을 두기는 했지만 쩡궈판은 서양의 기술을 선택적으로 활용하는 것의 가치를 일찍이 깨달았다. 그러한 정책에 대한 확신을 심어 준 첫 번째 인물은 학자인 펑구이펀이었다.“우리가 야만인들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오직 한 가지, 강한 군함과 효과적인 총”이라고 펑구이펑은 주장했다. 일부 항구를 선정해 조선소와 병기창을 세우고 중국에서 군함과 무기를 생산할 수 있도록 중국인 기술자를 훈련시킬 외국인 고문을 고용해야 했다. 1862년 쩡궈판의 일기를 보면 그의 생각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는 35세의 융윙을 미국에 보내 작은 병기창을 건설하는 데 필요한 기계를 구입해 오도록 했다. 상하이와 푸저우에 있는 두 병기창에는 기계 기술과 항해술을 연구하는 학교가 외국인 고문의 지도 아래 설립되었고 대대적인 기술서적의 번역작업이 야심차게 시작되었다. 이런 자강운동의 질서정연한 계획은 정말로 유교의 내적 가치와 결합하여 청 왕조를 위해 국가와 경제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는 것 같았다.1850년대에 일어난 사건들을 겪으면서 중국의 지도자들은 세게와의 상호작용을 도와 줄 여러 방안을 서서히 개발하기 시작했다. 장기간의 논쟁 끝에 청은 새로운 특별 기구인 총리아문을 1861년에 설립했다. 이것은 베이징 중앙 관료사회에서 일어난 최초의 중요한 기구상의 혁신이었다. 총리아문은 황제의 삼촌인 공친왕이 실질적인 책임자였다. 새로운 기구를 설치하기 위한 논의에서 청은 그것이 단지 일시적인 조직이며 현재의 대내외적 위기상황이 끝날 때 까지만 존속하리라는 점을 반복해서 명시했다. 하지만 외국인들에게는 총리아문이 틀림없이 중요한 기능을 수행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기 위해 새로 육중한 대문을 걸고 1861년 11월 11일에 업무를 시작했다. 동치중흥기의 개혁가로 부상한 공친왕은 겨우 28세였다. 그는 서양에 대해 신중한 입장으로 변했고 마침내는 서양을 공개적으로 존중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지적인 업무는 아마도 그의 능력 있는 2인자 원샹에 의해 수행되었을 것이다. 총리아문에서 행한 공친왕과 원샹의 초기 사업 두 가지는 청의 새로운 외교정책의 서로 다른 측면을 보여주며, 레이디 휴즈호와 에밀리호 시기 이후로 얼마나 상황이 변하였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레이-오스본 함대의 기원은 186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스본 함장은 1863년 9월 선단을 이끌고 상하이에 도착했으나 복잡한 난관에 봉착한다. 공친왕은 오스본에게 중국인 제독 밑에서 함대의 부함장으로 일하도록 했다. 어느 쪽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황은 결국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총리아문은 상황이 나아질 가망이 없다고 판단, 오스본 함장과 선원들에게 보상을 해주고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1862년 총리아문은 외국 공사관에 대한 부분을 번역하고 연구했다. 자신이 서양인에게 “중국은 자체적인 제도와 체계가 있어 외국 책을 참고로 하는 것이 자유롭지 않다” 고 표명했던 것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외국의 법과 규정에 대한 그 책이 중국의 체제와 기본적으로 조화롭지는 않지만 때로는 유용한 점도 있다고 판단하게 된 공친왕은 500냥을 들여 휘턴의 책을 출판하고 300부를 지방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1862년에 원샹과 공친왕은 베이징에 통역관 양성 학교를 개교하도록 조정의 허가를 받아냈다. 1867년 공친왕과 원샹은 베이징의 동문관을 완전한 형태의 대학으로 탈바꿈시키려는 운동을 시작했다. 이 대학은 새로운 커리큘럼을 갖추고 중국의 선구적 지리학자이자 역사가인 쉬지위의 지도 아래 1867년 2월에 개교했다. 쉬지위는 1840년대에 푸젠 성의 미국인 선교사들한테서 서양에 대해 배웠고 총리아문의 초기 관리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쉬지위는 서양, 특히 신기하게도 왕이 없는 미국 정부에 대해 열성적으로 호평했다. 중국해관은 1854년에 설치된 소규모의 외국인 해관관리위원회를 기반으로 설립되었고 1860년대에는 각 개항장에 대리인을 둔 국제적인 관료조직으로 성장했다. 그의 직원들은 중국 전역의 무역 형태와 지방의 현황에 대한 정확한 통계자료를 모으는 중요한 임무도 수행했다. 오랜 세월에 걸친 전쟁과 불화 끝에 1860년대 말에는 중국과 외국 열강사이에 협력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총리아문의 관리들은 당시 논리정연하고 지적인 장관 러더포드 올콕이 대표하는 영국과의 협상에 신중하고 기술적으로 임했다. 청의 고위 관료집단과 그 일행이 정부체제를 시찰하기 위해 하트와 함께 유럽으로 여행을 갔으며 청은 미국, 유럽과의 조약 협상을 위해 미국의 전 중국공사인 앤슨 벌런게임을 중국 대표로 임명했다.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자 갑자기 중국은 유럽과 가까워지게 되었고 잠든 것처럼 보였던 과거의 탐욕과 반목이 되살아났다. 올콕과 총리아문의 노련한 관료인 원샹의 신중한 조약 개정협상은 두 사람 모두에게 분노와 실망을 안겨 주었다.수백 수천만의 중국인이 19세기 중반을 특징지었던 내란과 그에 수반한 기근, 사회적 혼란의 물결 속에서 죽거나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토지에 대한 압력은 감소될 줄 몰랐다. 중국의 인구는 1870년대에는 또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중국인들 사이에서 이민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중국인의 세계를 완전히 벗어나 다른 곳에서 행운을 찾아보는 것이었다. 이러한 선택을 한 사람들은 대개 중국 동남부 출신으로 광저우나 마카오를 그들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동남아시아 이민은 가장 값싸고 손쉬웠으며 많은 중국인들은 벼농사, 어업, 소매상이나 상업 관련사업에 빠르게 정착해갔다. 중국인 이민자들은 그들 특유의 사업가적 자질을 발휘하여 그 틈새를 발견했다. 그들은 구리광산, 고무농장, 운송업 등에 성공적으로 파고들었다. 이 새로운 정착민들은 대부분 푸젠이나 광저우의 삼각주 지방 출신이엇기에 지역적 유대감이나 방언을 계속 중요하게 여겼고 비슷한 지역에서 온 중국인들은 한데 모여 살면서 서로를 돕는 경향이 있었다. 청 정부는 고위직을 팔아 부유한 이민자들의 충성을 얻어내려 했다. 라틴아메리카 지역에는 특히 1840년 이후 수많은 중국인 이민자가 정착했다. 이때는 그 지역의 많은 국가들이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그곳의 노예노동 수요의 증가와 증기선의 값싼 운임은 일자리를 찾는 중국인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중국인 이민자들은 거기서 생각보다 힘든 생활을 해야만 했다. 수천 명의 중국인이 정착한 하와이의 사탕수수, 파인애플 농장에서도 힘든 노동 상황은 매한가지였다. 1873년에 총리아문은 조사위원회를 만들어 페루와 쿠바에 사는 중국인의 생활과 노동환경에 대한 보고서를 각각 작성케 함으로써 적극적인 외교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두 위원회는 중국인 노동자의 알선 자체에 산적한 문제점들에 대해 놀라운 증거들을 보고했다. 수천 명이 꼬임에 넘어가 서명을 했고 일단 서명을 하고 나면 사기를 당했다. 1876년부터 주로 이러한 보고서의 영향으로 계약 노동의 관습상의 페해가 근절되었고 수송과정도 더 조심스럽게 구제되었다. 1880년 무렵 포틀랜드에는 수많은 중국인이 살고 있었고 와이오밍의 산간지방과 아이다 호의 스테이크 강 주변에도 정착지가 형성되었다. 미국에서는 중국인이 이민자라기보다는 체류자로 여겨졌다. 중국인을 거칠게 비난해도 좋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해외를 여행하는 중국인의 권리에 대해 아무 것도 인식하지 못했던 청 정부는 비록 총리아문의 관리들이 어떤 현안들이 있는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1867년에 청 정부는 전직 주중 미국 공사였던 앤슨 벌런게임을 무임소 대사로 고용했다. 벌런게임의 설득으로, 미국은 중국의 이민권을 계속 보장하는 1868년 조약에 서명했다. 청은 1871년 프랑스와 영국에 외교 대표단을 보냈고 1878년에는 미국에 정식 대사를 두게 되었다. 이로써 미국을 인종, 종교, 출신에 관계없이 세계의 모든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천국으로 만들려는 꿈은 끝났다. 청의 전성기에 청의 정치인들이 자신들 이외의 세계에 대해 그랬던 것만큼이나, 이제 미국인은 중국인이 열등하다고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