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 장 부모와 효(孝) 교육 1부모와 효(孝) 교육서론오늘날 우리들은 과학기술시대를 이룩하여 편리한 생활과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는 반면에, 전쟁, 분쟁, 폭력, 갈등, 실업 등과 같은 인간적인 문제들로 인하여 윤리와 도덕의식이 실종된 위기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은 가정과 학교의 진정한 역할이 점차 감소되고, 부모와 사회지도계층 사람들의 본보기 교육이 부족한 까닭이며, 또한 양심과 도덕의식이 희박해진 사회신경 탓이며,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진정한 인간교육을 외면한 교육환경에 있다고 할 수 있다.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부모부양이 부담스러워진 자녀들이 속출하고, 고독, 소외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노부모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오늘날 서양의 복지국가들이 심각해지는 노인의 부양문제를 두고 고심하는 상황을 보면서 우리가 부딪히고 있는 노인 문제도 심상치 않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 민족은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효가 있다. 효는 부모와 자녀간의 도덕적인 관계를 규정하는 가치이고 규범이다. 이의 기본은 부모와 노인을 존경하고 보살피고 돕는 자녀와 가족의 의무를 일상생활 속에서 실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레포트에서는 孝(효)란 무엇인가, 不孝(불효)란 무엇인가, 효를 행하는 방법, 그리고 현대인이 효행하는 이유 여섯 가지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본론1. 효(孝)란 무엇인가?부모를 봉양(奉養)하고 섬기는 일로 유교 덕목의 하나로 효경에서는 인간행위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는다. 효를 맨 처음 덕목으로 삼은 것은 공자(孔子)인데 당시 중국에서는 사회라는 관념은 희박해졌고, 대신 가족(家族)이라는 관계가 중시되고 있었다. 또한 당신 한국의 유학의 중심적 인물은 이퇴계(李退溪)와 이율곡(李栗谷)이었다.이분들은 다 같이 덕행으로 효제충신을 설정하고 이를 가족 구성원들 간의 대화를 통해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특히 효에 치중한 것이었는데 도덕적인 가치의 기준을 이러한 덕행에서 찾으려고 하였다.효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그것이 특히 부모와것으로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질적이고 정신적인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제시한 세 가지 조건에서 물질적인 도움보다도 정신적인 대접을 더 앞에서 지적함으로써 효의 보다 더 중요한 내용이 물질에 선행하여 정신적 내지 정서적 차원에 있음을 시사하였다.오늘날 효(孝)에 관한 이야기들은 학교와 가정에서, 그리고 신문과 TV를 통해서 흔히 전달되고 있다. 최근에는 문화교육 및 사회복지 단체들이 효의 이념과 관행을 고취, 장려하는 각종 행사를 전개하고 있으며, 이러한 활동이 점차 확대되는 경향이다.2. 불효(不孝)란 무엇인가?효(孝)의 개념을 자녀가 부모를 계승 하는것, 잘 섬기는 것 이라면, 자녀가 부모를 계승하지 못하고 잘 섬기지 못하는 일이 곧 불효(不孝)라고 할 수 있다.중국의 맹자는 세속적으로 말하는 불효 다섯가지를 아래와 같이 들었다.부모와 효(孝) 교육 2가. 게으름을 피우고, 부모를 공양 않는 것나. 노름과 술을 좋아하고 부모를 돌보지 않는 것다. 재물과 처자에 빠져 부모를 돌보지 않는 것라. 관능적 향락에 빠져 부모를 고생시키는 것마. 포악과 난동을 일삼아 결과적으로 부모를 위험에 몰아넣는 것또한 불교 경전(經典)에서 본 불효(不孝)의 사례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첫째, 부모에 대한 불공(不恭)이다. 자녀들은 마땅히 부모에게 공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아니함을 지적한 것이다.둘째, 부모에 대한 봉양(奉養)을 소홀히 하는 것이다. 자녀가 어렸을 때 부모의 양육을 받은 것처럼 부모가 늙으면 자녀가 부모를 봉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것이다.셋째, 고향을 등지는 것이다. 자녀가 성장하여 자립할 만하면 객지에 나가 살면서 부모에게 소식도 자주 전하지 않고 자주 찾아가 뵙지도 않는다는 것이다.넷째, 좋지 않은 친구와 사귀고 허망한 일을 하는 것이다.다섯째, 형제간에 불화하여 싸우고 욕설하는 것이다. 형제간뿐만 아니라 친척들과의 사이에 사소한 이해관계나 감정을 가지고 심지어는 언성을 높이고 싸우며 서로 멀리한다는 것이다신하는 경우를 볼수 있는데 이러한 행위들은 부모를 욕되게 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셋째, 부모님을 소외시켜서는 안 된다. 노인이 계신 가정은 매일같이 전화로라도 문안인사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노인을 모시고 있는 가정에서는 노인과 대화할 수 있는 소재를 부단히 만들어야 한다.(3) 물질적(物質的)인 효물질적인 효란 의?식?주에 관한 효행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공양의 효를 의미한다. 물질적인 효행으로서는, 첫째. 맛있는 음식, 좋아하시는 음식을 자주 해드려서 즐거운 식사시간이 되도록 해야 한다. 둘째, 입으실 옷과 이부자리를 넉넉히 해드려야 한다. 특히 부모님께서 좋아하시는 색깔, 디자인, 등을 세심하게 고려하고 가능하면 직접 고르시도록 하는 것이 좋다. 셋째, 용돈은 정해진 날짜에 드려야 한다. 부모님께 드린 용돈은 결국 가족이나 친지를 위해 쓰여지는 것이므로 가급적 정해진 날짜에 꼬박꼬박 드리는 것이 부모님 마음을 편안하고 여유롭게 해 드리는 것이다.(4) 양명(揚名)의 효부모와 효(孝) 교육 3양명의 효란 양친(揚親)의 효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름을 세상에 널리 펴도록 하는 것이다. 자식 된 도리로서 열심히 노력하여 입신출세함으로서 가문의 명예를 빛내는 것이 정신적인 효의 마지막 단계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부모가 바라는 자식의 효 중에 양명의 효는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5) 양지(養志)의 효양지의 효(孝)란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원하셨던 바의 뜻을 받드는 것으로서 봉사(奉祀)의 효까지 포함되는 의미이다. 사후에도 생전과 다름없이 계속 하는 효가 양지하는 효이다.4. 현대사회의 새로운 효(孝) 사상 정립전통사회가 급속히 해체되고 그 자리에 산업화라는 새로운 질서가 들어서면서 우리 사회에서 효를 둘러싼 고민은 늘고 있다. 이런 고민은 특히 ‘부모는 자식이 모셔야 한다’ 고 생각하는 마지막 세대라고 하는 요즘 30?40대에서 심하다.‘효의 아노미(Anomie))' 현상은 이미 사회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다.1) 부모도 자식도 혼란스양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생활이 너무 버거웠던 지은은 쌀 10여 섬을 받기로 하고 노비로 들어갔다. 지은의 딱한 사정을 안 주인의 배려로 낮에는 일을 하고 저녁에는 밥을 지어 돌아가 어머니께 쌀밥으로 봉양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은이 종이 되어버린걸 안 어머니는 지은을 안고 통곡을 하였다. 이 때 이곳을 지나가던 두 명의 이 사실을 알고, 효종랑(孝宗郞)에게 자세히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효종랑은 딱한 사정을 듣고 지은의 집에 직접 찾아가 보고 돌아가 부모에게 청하여 곡식을 보내고 옷도 지어 보내 주었다. 이 갸륵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진성여왕도 벼 5백 섬과 집 한 채를 하사하고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그리고 동리 어귀에 효녀 정문을 세우는 한편 마을 이름을 효양리(孝養里)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효종랑은 그 후 부마가 되었다. 효성이 지극한 지은은 복을 받아서 어머니를 편히 모시게 되었고 그를 도와준 효종랑은 크게 이름을 떨쳤다.부모와 효(孝) 교육 52)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충?효?예 교재, 육군본부, 1993)심해룡 군이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에 어머니는 정신이상이 되었다. 또 그의 나이 15세되던 해에 아버지마저 가까이서 볼 수 없게 되었다. 불구가 된 아버지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주운 물건을 고물상에 팔다가 절도로 고발되어 교도소에 가게 된 것이다.또 심군에게는 6살 터울의 어린 여동생도 있었다. 이러한 열약한 환경에서 심군은 초등학교만 근근히 졸업한 후 따로 공부하고 식구들의 생계비를 벌며 생계를 이어나갔다.정신분열의 어머니는 가끔씩 이웃에게 피해를 주었지만 그때마다 심군은 조금도 언짢아하지 않고 오히려 어머니께 더 잘해드렸다. 그리고 심군은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서울기계공업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이에 감동한 이웃들의 입소문에 의해 새마을 지도자와 의원들의 추천으로 심군은 고등학교 3학년 동안 학비 전액을 지급받았다.그러나 심군에게는 또 한 차례의 시련이 왔다. 아버지가 출감한지 얼마 되지 않아 술에 만취하여 음식점에서 폭행을 하 효도(이광렬, 효 이야기, 1994)어느 마을에 나이 많은 부부가 50이 다되도록 자식 하나 없이 지내다가 아들이 생겼다. 내외는 아들을 애지중지 키웠다.아이가 네 살쯤 되었을 때 아버지가 “가서 어머니를 한 대 때리고 오너라”하고 시켰다. 그래서 아들은 엄마를 막대기로 한 대 때렸다. 그러자 엄마는 웃으면서 “가서 아버지도 한 대 때리고 오너라”하고 시켰다. 이렇게 매번 시키니 아들은 당연히 아버지 어머니를 때려도 되는 것으로 여겼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여전히 즐거워하며 아들이 때리는 매를 맞았다.그러나 아들이 차츰 커가며 손이 점점 매워졌다. 힘을 쓰게 되자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부모와 효(孝) 교육 6내외는 안 되겠다 싶어서 아들을 불러놓고 어른을 때려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자세히 타일렀지만 이미 버릇이 되어버린 아들의 행동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점점 아들한테 매맞는것이 무서워진 부모는 아들을 집에서 나가게 하려고 생선을 한 상자 사서 지게에 지워주고 팔고 오라고 이렀다.생선상자를 짊어진 아들은 마을을 돌며 장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한 나절이 지나도록 한 마리도 팔지 못했다. 그러다 한 젊은 선비가 지나가다가 생선을 달라고 했다. 제일 큰 놈으로 집어든 선비는 달라는 대로 값을 내었다. 그리고 다시 여러 마리 생선을 고르더니 이번에는 값을 많이 깎았다. 왜 처음엔 안깎고 이번엔 깎는 것인지 아들이 묻자, 처음에 드리는건 부모님께 드릴 생선이기에 그렇다고 했다. 그러자 아들은“부모님께 왜 큰 고기를 드리나요. 심심해하시면 막대기로 때려드리면 될텐데요.”이 말을 들은 선비는 기가 막혔다.“무엇이, 부모님을 때려? 이런 고얀 놈을 보았나.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 너 안 되겠다. 나를 따라 오너라” 선비는 아이를 데리고 가서 부모님을 모시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저녁 무렵이 되어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은 아들이 무서워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돌아온 아들은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큰 생선을 골라 깨끗이 손질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것 이었다.있었다.
【이공계 위기에 관하여】자료 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이공계 대학 4학년생은 괴롭다. 진로 결정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결론은 대체로 두 가지이다. 대게 취직을 하거나 대학원을 간다. 하지만 이런 결정을 내려도 그들에겐 속 답답한 무언가가 있다. 이는 사회 전반에 걸쳐 널리 퍼져있는 이공계 기피현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요 몇 년 사이에 사회문제로 떠오른 이공계 기피현상은 이미 정부에서조차 대책을 내놓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이다.정부에서 그나마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고위 공직자 쿼터제, 장학금 지급, 군복무 단축 정도이다. 하지만 이 정책이 얼마나 효과를 거둘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런 정책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소극적인 정책으로는 이공계 생들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잠재울 수 없다. 미래가 불확실하다면 아무리 당근으로 유인한다 하더라도 대다수의 학생들이 이공계 지원을 꺼려할 것이다.나는 이공계 기피현상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이공계생의 상대적 박탈감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생계를 걱정할 정도로 그런 궁핍한 상황도 아니며 인문계생들에 비해 취직이 잘 안되는 것도 아니다. 절대적인 문제가 아닌 그들 스스로가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란 얘기다. 학생시절에 공부는 공부대로 많이 해야하고 취직후에도 일거리가 많으며 계속 공부를 해야한다. 거기에다 정년도 보장되지 않는다. 이것이 그들이 고민하는 바다.보통 이공계생은 전공특성상 인문계생에 비해 자기 주장이 약하다. 인문계열에 가치판단이 중요하다면 이공계열엔 절대적인 진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주장이 약한 이공계생은 문제가 생길때마다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문제점에 노출돼 그냥 당하기 쉽다. 이 때문에 IMF시에 1순위로 정리해고 되었고, 근속년수도 짧은 편이다. 처우가 부족하다면 처우개선을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한다. 정어떤 조직에서의 인간관계나 사회참여에 있어서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 "공대생이 하루에 하는 3가지 말(밥먹었니?, 쟤 이쁘지 않냐?, 숙제 뭐야?)"같은 유머가 있을 정도로 자신의 전공에 파묻혀 사는 그들에게 단순함은 가장 피해야 할 적(敵)인 셈이다.인문계생이 과학적 소양을 쌓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이공계생이 인문학적 소양을 쌓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다. 그리고 이는 커다란 장점이다. 이공계생이 학생일 때나 또는 사회에 나가서도 자신의 두가지 소양을 계속 발전시켜 나간다면 결코 천대받지 못할 것이다.자료 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인문학이란 기초학문으로서 철학, 미학, 역사학, 문학 등 우리 실생활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그 학문 고유의 영역을 심도 있게 연구한 학자의 정신적 결과물이다.기초학문은 사람들의 실생활과는 직접관련이 없는 관념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 학문 자체로서 우리의 정신세계를 풍요롭고 윤택하게 해주며 2차적으로 다른 실용학문의 근원이 된다. 예를 들어 정치학에서 현실정치를 연구함에 있어 한 나라의 역사나 문화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 나라의 정치제도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어떠한 철학적 관점을 가지고 정치현실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연구의 내용이 달라지게 된다. 이렇게 인문학의 탄탄한 기반위에서 성립된 사회과학은 복잡한 사회현실을 단순화시킨 모델을 만들고 그 모델을 사용하여 사회현상을 분석하여 여러 가지 문제들의 원인을 찾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게 된다. 인문학은 이와 같이 현실과 괴리된 학문이 아니라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인문학의 발전 없이는 모든 학문의 근원이 뿌리 채 흔들려 인간이 만든 여러 제도나 사회시스템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이다.경제학에서 공공재라 함은 비경합성과 비배제성을 특성으로 하는 재화를 일컫는다. 비경합성이란 타인의 재화소비로 인해 자신의보화 사회에서 학문의 연구결과를 얻는데 돈을 요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공공재의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사용재와는 달리 공공재는 타인의 재화소비로 인해 다른 소비자의 효용이 감소하지 않기 때문에(한계비용=0) 양의 가격으로 판매하는 것이 부적합할 뿐 아니라 그 비배제성으로 인해 무임승차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한마디로 그 재화(공공재)의 생산을 민간에 맡길 경우 민간부문은 그 재화의 생산을 포기하게 된다는 얘기다.인문학의 위기를 경제문제로 풀지 말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경청할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누가 굶어가면서 인문학연구를 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필요하다고 하여도 누가 그걸 인문학자들에게 강요할 수 있겠는가? 모두 어불성설이다. 인문학을 중시하는 풍토로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작업도 사람들의 의식변화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 아무리 사람들이 인문학자를 떠받들어 준다고 하여도 학자가 인간인 이상 그 존경심을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사람들 모두에게 그 편익이 돌아가는 공공재의 생산을 민간에 맡길 경우 그 공공재의 생산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공공재의 생산은 정부가 해야 된다고 되어 있다. 정부가 인문학 연구 기관을 만들어 그 기관에 학자들을 적정한 급료를 주고 고용하여 연구에 몰두하게 하는 방법도 대안이 될 수 있겠으나 학문의 자율성을 해칠 우려가 있으므로 정부의 예산에 인문학지원특별기금 같은 것을 만들어 학자들이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고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자료 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노키아는 세계 최대의 휴대폰 업체로써 유명하다. 실제로 서유럽 휴대폰 시장의 절반 가까운 시장 점유율을 갖을 정도로 그 규모나 영향력하다. 그런 노키아가 인구 520만 국가차원의 해결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정보통신산업 부분에만 당시 전체 R&D 비용의 절반 가까운 비용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로 나온 기업이 노키아인 것이다.비슷한 예로 우리는 지난 90년대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고통을 가져다 주었던 IMF를 겪었다. IMF를 겪으면서 우리는 나름대로 중요한 교훈을 얻었고 정부에서는 나름대로, 타국보다 ‘뒤늦은 산업화’를 따라가는 대신 초고속 인터넷망이나 벤처산업 육성 등 ‘한 발 앞서가는’ 정보화 쪽에 투자를 하였다. 그 결과 세계적으로도 손색이 없는 정보화 선도 국가로 발돋움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기업에서도 어려움 속에서도 타 기업보다 정보화 산업에 많은 투자를 하였던 삼성 같은 경우 일본의 거대기업 소니와 비견될 정도로 우리나라의 전체 경제구조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면서 지금까지의 경제 성장의 밑바탕이 되었다.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는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가치관으로 존재한다. 무엇을 이야기 하더라도 경제성을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다. 위의 예에서 보듯이 국가가 경제적 위기에 처하게 되면 결국 해결법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여 팔아먹는 방법밖에는 없다. 그것은 자본, 자원 또는 기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시점에서 가장 현실적 있는 방법은 기술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경제적 시각으로 볼 때도 우리나라의 이공계 기피현상은 좋지 않은 것 같다. 국가적 차원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바라볼 때 ‘무’로부터 ‘유’를 창출할 수 있는 것은 이공학 뿐이다. 서비스업은 아무리 발전을 하여도 나라안에서 도는 자본의 이동일 뿐, 기술이 수출되지 않는 이상 우리나라의 부는 결코 축적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지금의 한국의 경제 구조로 볼 때도, 조그마한 한국시장으로는 내수가 원활치 못하고 국제 원자재 가격에 출렁거릴 수밖에 없다. 그 어느것도 순탄치 못한 현 상황에서 수출이 아니면 그 무엇도 우리 경제를 발전시킬 수 없다.그런데 이것은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이공학 분야의 최선진국인 미국도 그렇지만 이공계 기피래도 그들이 자국으로 돌아가 버리면 그 후의 연구는 유지되기 힘들 것이다. 우리나라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런 것은 국가적 입장으로 본다면 분명 손해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현재의 이공계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는 문제는 분명 경제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 미래의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적어도 정부 입장에서는 이공계를 바라볼 때 우리나라의 가치(부)를 높이는 것은 그들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지금의 전세계적인 이공계 기피현상은 어찌보면 또 다른 기회가 될 수 있다. 분명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작업은 미래엔 언젠가 국가적 이익이 됨은 자명한데 다른 나라에서 이러한 이공계 기피 현상이 만연한다면, 우리는 더욱 더 이곳에 ‘투자’를 해야 하는 것이다.그런데 이런 일들은 기업은 할 수 없다. 기업의 목표가 남들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내는 데 있는 만큼, ‘막연한’ 미래를 보고 이런 투자를 할 수 있는 기업은 몇몇 없다. 분명, 언제가는 막대한 이익을 내겠지만, 그것이 언제가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기업은 투자를 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정부밖에는 할 수 없다. 한편 정부는 이러한 단순한 경제성에서 더 나아가, 이것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이공계를 바라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나라의 미래를 발전적인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또 다른 위기를 맞닿은 후에야 깨닫는 다면, 그때는 정말 늦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자료 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이공계로 진학하려는 고등학생들이 점점 줄어든다고 한다. 필자가 대학에 입학할 때만 해도 치열하던 이공계 입시 경쟁이 이제는 먼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 같다. 여기저기서 다들 이공계가 위기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이공계 위기란 무엇인가? 많은 고등학생들이 이공계 진학을 기피하고, 많은 연구원들이 수능시험을
Ⅰ. 서론“리더십은 특정인만이 소유하고 있는 타고난 능력이 아니라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것”이라며 “리더가 되겠다는 의지와 열망을 갖고 모범적인 리더의 모습을 보고 배우며 교육훈련과정에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도력을 키울 수 있다”이경숙 숙명여대 총장님이 세상을 바꾸는 섬김의 리더십을 주제로 강연한 것 중의 일부분이다. 이처럼 예전의 막강한 권력과 힘으로 추종하는 자가 있어야만 누릴 수 있었던, 특정인들만의 리더십은 많이 변했고, 평소에 소극적이고, 리더십과 거리가 멀었던 나 또한 이번 리더십 수업을 들으면서 내가 생각하는 가장 위대한 리더는 누구일까? 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었다.우선 이러한 위대한 리더들의 기준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는데, 먼저 리더의 업적에 관한 내용을 들 수 있다. 리더는 사회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사람이다. 하지만 위대한 학자가 반드시 위대한 지도자가 아니듯 개인적인 성과만을 낸 인물을 위대한 리더라고 보기는 어렵다. 즉 그의 업적이 구성원들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주었는지도 고려해야 하며, 구성원들이 그 인물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여부, 큰 영향력, 즉 많은 사람에게 깊은 영향을 준 인물이 위대한 리더가 될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이러한 기준들을 통해 내가 선정한 가장 위대한 리더는 세종대왕이며, 세종대왕의 업적에 대해서는 누가 보아도 반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세종대왕의 리더십을 분석하기에 앞서 세종대왕은 누구이며 어떠한 업적을 남기고 갔는지에 대하여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세종대왕은 조선 제4대 왕(재위 1418∼1450)으로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418년에 왕세자에 책봉, 동년 8월에 22세의 나이로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그는 정치적으로 중앙집권체제를 운영하기 위하여 1420년에 집현전을 설치하고 황희·맹사성·허조 등의 청백리를 등용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에 노력하여 의정부의 독주를 견제하였다. 뿐만 아니라 집현전을 왕립 학술기관으로 확장하여 변계량·신숙주·정인지·성삼문·최항 등 장년층의 학자를 등용하여 정치 자문·왕실 교육·서적 편찬 등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하였다. 그리고 궁내에 정음청을 설치하여 성삼문·신숙주·최항 등으로 하여금 1443년(세종25) 한글을 창제하게 하고 1446년 이를 반포하였다.과학기술에 대한 업적은 1442년 이천·장영실로 하여금 우량 분포 측정기인 측우기를 제작하게 했는데, 이는 1639년 이탈리아의 가스텔리가 발명한 측우기보다 약 2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그리고 궁중에 과학관인 흠경각을 설치하고 과학기구를 비치하도록 했고, 혼천의·해시계 ·물시계 등 각종 과학기구를 발명하였다.경제 ·사회 정책면은 1436년 공법상정소를 설치하고, 1443년에 공법상정소의 안을 시정하기 위하여 전제상정소를 설치하고 풍흉에 따른 연분 9등법과 토지의 비옥도에 따른 전분 6등법에 의한 수등이척법으로 조세의 공평화를 도모했으며, 전국의 토지를 20년마다 측량하여 양안을 작성하도록 했다. 그리고 의창·의료제도·금부삼복법을 제정했고, 노비에 대한 지위 등을 개선, 사형을 금하도록 했다.대외정책면에서는 국가의 주권 확립과 영토 확장에 진력한 치적을 들 수 있다.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처녀 진헌을 폐지하는 한편 명나라에 보내던 금·은의 조공 물을 폐지하고 마·포로 대신하도록 했다. 그리고 여진과의 관계는 무력으로 강경책을 쓰거나 회유하는 화전 양면책을 썼는데, 두만강 유역의 여진은 김종서로 하여금 구축하도록 하고 6진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다(1432). 압록강 유역의 여진은 최윤덕·이천 등으로 하여금 구축하게 하고 4군(四郡)을 설치하였다. 이 때의 국경선이 압록강으로부터 두만강까지 확보되어, 이 곳에 사민정책을 실시하는 등 국토의 균형 잡힌 발전에 노력하였다.이제 이러한 바탕 위에 강의 내용을 위주로 세종대왕의 리더십을 분석하도록 할 것이다. 내가 본 세종대왕은 국가를 통치함에 있어서 어떠한 방면에서도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학문?기술?안보?민생?인사 등 다양한 방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Ⅱ. 본론세종대왕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더로 선정한 첫 번째는, 세종대왕은 조선시대의 탁월한 지식인 경영자였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은 지식의 공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많은 백성들이 글자를 알지 못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세종이 한글을 만든 이유는 백성들의 의사소통을 도와주어, 보다 풍부한 지식의 공유가 이뤄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신분을 가리지 않고 능력에 따라 지식인과 기술인을 등용하여 적재적소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게끔 하고, 집현전 등의 연구기관을 만들어 지식의 효율적인 관리와 학자들의 공동 작업을 도모하였다. 또 과학서적을 편찬하는 집현전을 천문연구기관인 서운관과 연계시키는 등 전략적으로 연구 자원을 활용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둘째, 세종은 지식을 효과적으로 축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그는 지식의 효과적인 관리에 있어 게으르지 않았다. 세종은 이를 위해 집현전을 만들어 수많은 지식을 담은 서적과 자료를 보관하고, 학자들이 자유롭게 이를 공유하도록 하였다. 또한 집현전은 단순히 지식의 관리 장소와 공유 장소뿐만 아니라 위대한 학습 조직이 되어서 이 조직으로부터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이개, 정초, 이순지 등과 같은 학자들을 배출하였다.셋째, 세종은 지식을 활용할 줄 아는 지도자였다. 세종은 지식이란 것이 활용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축적된 지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애썼다. 좋은 예로, 세종이 한글을 만든 후에 삼강오륜도 등을 편찬하며 한글을 실용적으로 이용하고자 애썼던 점을 평가할 수 있다.넷째, 세종은 신지식인을 발굴하는 데 앞장섰으며 인재들을 존중하는 지도자였다. 세종이 수많은 위업을 이룩할 수 있었던 데에는 정치적으로 안정된 기반 위에 그를 보필한 훌륭한 신하와 학자가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세종은 황희, 맹사성, 허조 등의 청백리를 등용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에 노력하였고, 관노의 신분이었던 장영실을 단지 기술과 재주만을 갖고 있다고 하여 관원으로 발탁하여 측우기를 발명하는 등 과학과 농업의 진흥에도 힘을 썼을 뿐만 아니라, 예악에도 관심을 가지고 박연에게 명하여 아악을 정리하게 하였다. 이처럼 세종이 수많은 인재들의 보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사람됨이 그 바탕이 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 세종은 스스로의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단독으로 하지 않고 군신이 힘을 합하여 진리와 인도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최고 권력자 개인의 사소한 감정, 지연, 혈연, 학연 등의 이유로 우수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하지 않고 심지어는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아직도 우리의 리더들이 신지식인을 발굴하고 올바르게 양성하려는 인재존중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600년 전의 인물인 세종조차 깨우쳤던 용인 술을 제대로 알아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현대의 리더들도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한낱 부하로 볼 것이 아니라, 세종이 한 것처럼 인간적인 면에서 한걸음 다가가 그들에게 공을 돌릴 줄 알고 어버이처럼 자상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다섯 째, 세종 자신이 여러 분야에 걸쳐 전문가 못지않은 풍부한 교양을 가지고 있었다. 세종대왕은 평생에 걸쳐 많은 책을 읽었으며,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데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또한 당시 왕가의 필수 교양이던 유학뿐만 아니라 음악 등의 예술 분야나 과학 기술 분야에도 능통했다. 또한 과학적 지식에 있어서 결코 전문가들보다 뒤지지 않는 배경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장영실 등의 학자들이 풍부한 업적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었다.여섯 째, 세종대왕은 수평적 통치철학을 실천했다. 한국의 전제왕권의 마지막 시대였던 조선은 나름대로 신하가 가신의 위치에서 관리의 위치로 자리 잡고, 전제왕권에 대한 견제체제가 다른 시대에 비해서 효과적으로 설계된 사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을 손꼽았던 이유는 그가 가진 특별한 통치철학 때문이다. 세종대왕은 수직적 권위체제의 기반을 바탕으로 수평적 통치마인드를 효과적으로 발휘함으로써, 신하들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하였고 한글 창제를 포함한 많은 업적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조선을 포함해 역사 속의 선왕이라 평가받는 많은 왕들도 세종처럼 백성을 사랑했겠지만, 백성들의 의견을 정책에 반영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실천에 옮겼던 왕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유능한 몇몇의 신하와 왕이라는 수직적 권력구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세종대왕은 다른 성왕과는 달리 수평적 통치철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일곱 째, 세종대왕을 가장 위대한 인물로 선정하는 데 크게 기여한 마지막 요인은 세종의 타고난 성품이다. 세종이 32년 동안 재위하면서 수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왕조가 성립되고 태조?태종에 걸쳐 창업기로서의 안정을 다진 후 수성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고도의 문화를 창조해낼 수 있었던 황금기라는 시대적 배경이 뒷받침해 주기도 하지만, 그보다 우선해서 주목해야 할 점은 세종의 타고난 성품이다.
서론루소는 사회계약설의 영향을 받은 당시의 계몽주의 사상가이다. 그는 자연주의 사상가였으며 현대 교육(특히 아동교육)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에밀》을 통해 그의 교육론을 이야기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의 생애에서부터 《에밀》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과 그의 모든 사상의 토대라고 도 할 수 있는 자연에 관하여 좀 더 다루어 본 뒤 그의 교육론의 의의와 영향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1. 루소의 생애와 작품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 Emile, ou traite de I' education, 1762장 자크 루소는 성숙한 사상가로서 《에밀》?《사회계약론》?《신(新)엘로이즈》등의 대표적인 작품을 발표한 것은 1761~62년이며, 그 독자성을 보인 처녀 논문인 《학문 예술론》을 발표한 것은 1750년이다.루소의 생애를 생각할 때에는 3기로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태어나서부터 40세까지를 제1기, 이후 50세경까지는 제2기, 이후 고독한 산책자로서 죽음에 이르기까지를 제3기로 구분하는 것이다. 루소가 자신에 대하여 ‘나는 감성적인 사람이며 감정과 상상에 의해 쉽게 움직여지고 생각하기 전에 느끼는 인간’ 이라고 말한 것처럼, 그는 매우 시인적이다. 그러한 그가 체계적인 사상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경험과 반성뿐만 아니라 상당한 기간이 필요했을 것이다.그렇다면 이제 루소의 사상적 발전을 그 생애와 작품을 통해 더듬어 보기로 하자.루소는 1712년, 6월 28일, 스위스 제네바 공화국 시민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자크에 대해서는 그의 자서전인《고백론》에 상당히 미화되어 씌어 있지만, 변덕스럽고 남다른 인물이었음을 부정 할 수 없을 것 같다. 루소 가는 16세기의 종교 전쟁을 피해 스위스로 이주해 온 프랑스계 프로테스탄트로서 당시 제네바 공화국의 국민을 형성하고 있던 네 계습 중에서 최상층의 지배 계급이었던 ‘시민(市民)’ 에 속해 있었다. 루소는 태어나자 곧 어머니를 잃었는데, 어린 그에게 걸핏하면 눈물을 흘리며 어 방랑 생활을 시작했다. 그 방랑 생활 속에서 그의 인간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바랑 부인)의 감화와, 특히 스무네 살부터 서른 살까지 탐욕스러운 정도의 호기심을 가지고 철학 ? 문학에서부터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막대한 양의 저작을 탐독하였는데, 폴 르와이알의 《논리학》,로크의 《인간 오성론》?《교육론》,플라톤 ? 데카르트 ? 마르블랑시에 ? 라이프니츠 등의 철학적 저서를 읽었으며, 키케로?카토?몽테뉴 ? 파스칼 ? 페늘롱 ? 볼테르 등의 문가가? 모랄리스트의 책 외에 기하학 ? 대수학 ? 천문학 등의 자연 과학, 그리고 라틴어 공부에까지 몰두했다.1750년 디죵 아카데미에서 미개 시대의 도덕적 우월이라는 부정적 논문 《학문?과학 예술론》써서 일등으로 당선되었는데 그는 여기서 문학?예술?과학 등 일체의 문학적 산물이 결국은 도덕을 파괴하는 원인임을 주장하였다. 이로써 이제까지 파리 사교계 한 귀퉁이에서 음악가로서 알려져 있었을 뿐인 루소가 프랑스의 사교계 에뿐만 아니라 외국에까지 알려지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이 《자연》은, 그 후 루소의 정신 속에서 심화되어 굳은 신념이 되고 철학이 되었는데, 이 발상은 오래된 전통적인 사상과 라틴?그리스의 모랄리스트의 상투적인‘현대 사회’ 비판 형식을 되풀이 한데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다.1761년 발표한 《신 엘로이즈》는 루소의 유명한 서간체 소설로써 귀족의 딸과 가난한 서민 출신의 가정 교사 사이에서 일어난 사랑을 다루고, 봉건적 신분 제도의 편견을 공격하고 사랑의 열정, 순결한 부부도덕, 즉 연애와 도덕을 교차시켜 연애 소설을 양심의 비극으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1762년의 ‘사회 계약, 정치 적 권력의 원칙’은 근대 민주주의 이론의 대표적 논문으로써 그가 계획한 대규모의 정치제도의 연구의 일부분인데 미국 독립 당시의 헌법이나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에밀》은 《사회 계약론》에서 밝힌 정치적?이상적 사회개선도 그 제도의 주인인 인간 그 자체의 혁신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지 그의 성장을 5단계로 나누고 각 시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교육관과 교육 방법을 설명하였다. 그는 앞서 말한바와 같이 자연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이성중심의 계몽주의를 비판하면서 이상적인 인간은 자연인이라는 것을 제시한다. 이제 루소가 제시한 교육 방법론 등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아보고자 한다.① 제 1부 유아기 (0세~2세)루소는 교육은 출생과 동시에 시작된다고 하면서 우리가 참으로 배울 것은 인간과 그 환경이고 진정한 교육은 타에서 배운 것보다 스스로 실행해 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루소는 어린아이의 신체의 단련과 부모와의 관계를 논하였다. 어린아이의 신체의 단련의 시작은 태어난 직후 수건이나 허리띠나 보자기 같은 것으로써 잡아매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또한 사지를 자유로이 하여 어린아이가 자유로이 운동할 수 있도록 커다란 산 의를 입히도록 할 것을 표하였다. 이것은 막 태어난 아이가 꽉 막힌 것보다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게 함으로써 그의 신체적인 발달에 기초를 마련하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그리고 갓난아이가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것은 지성의 활동도 또한 의지의 활동도 없는 순전한 반사적 운동이기 때문에 그 것을 구속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귀족사회에서 귀족들이 즉 부모들이 자식이 태어났어도 자신들이 직접 돌보는 것보다는 유모들에게 자식을 맡겼을 것이다. 귀부인이 자식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표현을 하는 것은 고상한 품위를 손상시키는 일로 여겼기 때문에 학교나 수도원에서 자라고 성장이 끝난 다음에나 부모와 만나게 된다. 그래서 여기서 루소는 갓난아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의 부모와의 관계를 교사의 개념을 도입하여 설명하였다. 그래서 좋은 교사는 어떠한 자격이 필요한 것에 대해서 많은 논의를 했지만 첫 번째로 제시한 것이 그 자격을 돈으로써 사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직접 즉, 부모 자신이 그것을 담당해야 한다고 하였다.② 제 2부 아동기 (3세부터 12세)제 2부에서 처음 나오는 것이 사람이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교훈을 처음으로 배우고 가이성의 연령에 도달하기까지는 도덕적, 사회적 관계에 대한 관념이 형성되지 않지만 우리의 생활에는 이웃이 있으며 그리하여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게 되어있다.③ 제3부 소년기 (12세부터 15세)여기서는 청년기에 이르기까지의 어렵고 허약한 단계 중 마지막으로서 이성의 훈련과 지성의 기초를 이루는 훈련을 다루고 있다. 또한 앞선 두시기와 같이 지속적인 사물의 교육을 중심으로 삼고 있으면서, 사회생활의 개념을 익히도록 유도를 하고 있다. 이 시기에 아이의 체력은 욕망보다도 훨씬 급속도로 발달하게 되며 삶에 있어서 근본을 이루는 최대 체력의 증진기로서 일생 중 가장 귀중한 시기이자 짧은 시기이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근로, 면학, 교훈을 얻는 시기이다. 아이에게 교훈을 주고자 할 때에는 순전한 이론적 지식은 이 시기에는 적당치 않다고 서술하고 있다. 오히려 이 시기에는 모든 실험을 연역에 의해서 연결시키면서 자연의 모든 법칙을 연구함에 있어서 가장 평범하고 명백한 현상부터 아이의 사물교육의 근간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고 있다. 또한 노동은 사회에 사는 인간의 필수적인 의무임을 강조를 하면서 근로의 가치성과 자기 자신의 실정에 맞는 노동의 선택을 중시하고 있다.앞서 말했듯, 이 시기에는 체력이 욕망보다 앞서기 때문에 한창 성장기의 동물이 그런 것 처럼, 상대적으로 기운이 왕성한 시기이다. 즉, 청년기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욕구, 그 중에서도 성욕과 같은 욕망이 나타나기 이전의 상태이며, 아동기에 속하기에는 힘이 넘치는, 청년기와 아동기의 중간상태로 보았다. 루소는 이 시기를 가장 행복한,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는 유일한 시기라 했다. 따라서 남들이 아는 지식을 모두 학습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쓸모가 없다 보면서 그보다는 그 시기에 알맞은, 알아야 할 것을 놓치지 말고 배워야 한다고 했다. 출생시부터 소년기까지는 “어린이 완성기”라고 할 수 있으며 이기간은 사회적 존재로 들어서기 이전의 개인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시기이다. 루소는 이 기간의 교육을 공적, 일큼 성에 대한 교육도 언급이 되었다. 사춘기에 발달하는 신체적 욕구인 정념에 대해 루소는 비교적 많은 실례를 들어 어떻게 그런 욕구에 대처해 나가야 하는가에 대해 상세히 적었다. 성에대한 전통적인 관점이 자연에 위배되는 점과 동시에 성에대한 책임, 의무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에 대한 그의 주장은 역시 선구자적인 성교육론을 펴 보였다고 생각된다. 그밖에 사춘기에 형성되는 사회인으로서의 자질에 대해 허영심의 극복이나 취미의 육성, 고전 선호에 대한 것, 이성에 대한 관심과 이상적인 여성상에 대해 서술하였다.⑤ 제5부 결혼기청춘시대의 막을 고하면서 결혼시기이며 이것은 생활을 수립하여 감정을 안정하고 내적인 자유를 낳는 완성이다. 루소는 이 5편에서 에밀의 배우자를 찾으면서 소피이라는 여자인물을 내세우면서 『여성교육론』을 서술하였다.루소의 여성에 대한 참 뜻은 여성을 남성의 노예로, 혹은 봉사자로서가 아닌, 동반자로서의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여성의 미덕을 단순히 수치심이나 매력적인 몸놀림에 두지 않았다. 즉, 가정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남성과 함께 여성도 공적인 생활을 알아야 하다는 것이다.루소의 여성관은 다른 관점이 진보적인데 비해 지나치게 보수적인 색채를 띠었다는 것으로 많은 비판을 받아온 부분이다. 남녀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공통되고 남녀라는 성의 차이에서 공통될 수 없다. 이 차별은 자연의 법칙에서 생겼으며 따라서 남녀의 교육은 동일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주의할 점은 남녀의 차별을 상하로 규정한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르다는 점이다. 물론 남편의 명령에 아내가 복종해야 하고 남편의 마음에 들게 해야한다는 표현이 있으나 이는 주인과 노예와의 관계를 적용시킨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의 아내의 위치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보수적인 교육론은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보수적인 것이고, 당시 귀족사회에서의 귀부인의 실상을 생각할 때 그것은 하나의 혁명적인 관점이 될 수도 있다.2. 에밀에 나타난 루소의 자연주의 교육론루소의 이다.
오이디푸스를 읽고..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살아가는 것일까? 우리가 누군 인지 혹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 앞의 인생은 또 어떻게 달라질지 대충 눈감고 모르 척하며 사는 것이 휠씬 편하지 않을까? 그러나 또한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 알아야만 하지 않을까?오이디푸스는 죽음을 무릅쓰고 알고자 하는 욕망을 좇는다 .하지만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호기심은 맑은 신화와 기독교성서가 보여주듯 신들의 눈에는 하나의 죄악이었고, 오이디푸스는 응징을 받고 만다.버려진 아이었던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가 낸 수수께끼를 풀고 테베의 왕이 되지만 친부를 살해한 후 어머니와 몸이 섞고 만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짓을 했으며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것은 훨씬 훗날의 일이다. 이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에 의해 기록됐지만 아직도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야릇한 힘을 발산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이디푸스는 옛 전설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시간과 함께 역사 속에 묻혀버린 이야기가 아니라 문명을 가로질러 내려온 이야기이며 인간 모두에게 공통된 진실을 표현하고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의 한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이야기임에 틀림없는 것이다.이 이야기는 사회구조와 인간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끔찍한 무질서를 헤아리고 있으며 이 무질서를 드러내어 법을 만들려고 한다.근친상간과 친부 살해의 공포 앞에서 그리고 혼란에 빠진 국가와 가정과 인간 앞에서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무질서에 대한 욕망과 질서의 필요성을 동시에 표현하는 모순 된 모습을 보여준다.자신의 운명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다 끝내 자신의 눈을 파내었다. 이는 실제적인 의미와 비유적인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즉 오이디푸스는 실제로 자신의 두 눈을 파냄으로써 장님이 되었지만 상징적으로 두 눈을 늘 자신이 범한 죄악의 결과인 그의 두 아들을 의미하기도 한다.오이디푸스는 이 두 아들을 볼 때마다 스스로 분을 이기지 못해 광분하곤 한다.행복의 정점에서 불행의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보편적인 인간의 운명을 상징하는 한 예인 것이다.그가 거둔 성공은 그가 겪게 될 불행의 전조였다.테바이의 옥좌에 앉게 되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이오카스테의 손을 잡는 것이기도 해고 근친상간의 출발점이기도 했다.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주도하는 자는 오이디푸슨 자신이다.오이디푸스에게는 자신이 그럴만한 능력이 있다고 믿었으며 또한 자신의 판단력을 신뢰했다.그 누구도, 그 어느 것도, 그로 하여금 끝까지 탐색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다.그리고 그는 마침내 나라 전체를 구해낸다.이런 의미에게 그는 영웅적 인물임에 틀림없다. 언제든지 거짓에 근거한 삶을 수용할 태세가 되어 있었고, 그래서 진실을 찾아 나선 오이디푸스를 필사적으로 만류했던 이오카스테라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던 것이다.이런 이유에서 오이디푸스를 한 인간의 불행을 보여주는 비극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다.다시 말해 오이디푸스는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비극이기도 한 것이다.인간은 확실히 이 세계가 주문하는 대로 살수는 없다. 그 이유는 의지와 행동사이에는 깊은 괴리가 있기 마련이다.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고 원치 않았던 것을 하며 사는 경우가 많다.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장님이 되고, 가혹한 운명에 짓눌려 심신이 피폐해졌어도, 병도 그 어떤 재앙도 자신을 파멸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오이디푸스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되고 스스로 가장 무거운 형벌을 택한다.자신이 저지른 극악한 죄악에 걸맞게 형벌을 원하고, 그것을 택해 스스로를 정죄하며 죽음을 요구 한다.사실 오이디푸스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뒤집어 쓴 것이었지만 이런 구분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작가는 다루고 있다.소포클레스의 관심을 오직 인간으로서 저질러서는 안 되는 죄를 지은 인간의 불행에 있다.이런 이유로 소포클레스는 인간이 저지른 악과 그로 인해 인간이 받게 되는 고통을 동등하게 다룬다. 작가에게 공동체의 안녕이란 오직 개인의 불행이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오이디푸스는 다룬 비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해서 흐르는 주제는 법이라는 장치 아래 숨어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인간본성에 대한 탐구를 금지하는 금기이다.오이디푸스는 왕의 살해범에 대한 조사를 명한다.그가 몰랐던 것은 이 조사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었다.따라서 그는 자신이 명령을 내린, 이 조사가 자신의 족보에 대한 것이고, 왕국의 통치에 대한 것이며, 나아가 왕국의 모든 사람에 대한 조사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혀내면서 동시에 국가의 비밀들은 가리고 있는 장막도 걷어낸 것이다.그는 마침내, 결국 그 금기를 어긴 것이다.오이디푸스에서 최후의 금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친부 살해도 아니고 근친상간도 아니었다.최후까지 지켜져야 할 금기는 다름 아닌 조사였다. 어떤 경우에도 조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근친상간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머릿속에서 해결해야 한다.아니면 완전히 모르 척 해야 했다.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전 국가와 가족 모두를 조사의 대상으로 삼는다.이것이 바로 최후의 금기인 것이다.인간에 의한 인간에 대한 앎, 법에 의한 법에 대한 앎, 그리고 가족에 의한 가족에 대한 앎과 사회에 대한 앎, 이 모든 과정은 누구도 막을 수 없게 진행되어 버렸고 마침내 모든 것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그때야 비로소 눈이 멀어 버리는 것이다.결론,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을 읽으면서 가장 알 수 없었던 것은 오이디푸스에게 내려진 운명을 도대체 어디에 기인한 것인지를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이다.전혀 인과 관계없는 그의 불행은 단지 신들의 장난인 것만 같아서 매우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가령 다른 영웅들이나 신들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오이디푸스와 비교하더라도 전혀 손색이 없는 죄를 지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스 최고의 영웅 헤라클라스만 해도 자신의 부인과 자신의 아이들을 자신의 손으로 살해했다.물론 신들의 개입이 있었다고 하지만 오이디푸스 역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행했다.더욱이 헤라클레스는 그에 대한 대가로 12사지의 어려운 일을 함으로써 죄를 용서받았을 뿐만 아니라 신에 버금가는 신분을 가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