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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후기 안동김씨 세도가문 의 형성과정과 권력구도 연구
    주제 : 조선후기 안동김씨 세도가문 의 형성과정과 권력구도 연구Ⅰ. 서론1. 세도정치 개관 .... 22. 연구목적 3Ⅱ. 본론1. 세도정치의 시작................ 5(1) 홍국영의 세도정치(2) 순조의 즉위와 정순왕후의 수렴청정2. 순조조 안동김씨의 집권 ............... 7(1) 김조순과 순원왕후(2) 안동김씨의 실권장악(3) 효명세자의 대리청정3. 헌조조 풍양조씨와 안동김씨의 권력구도 .......... 11(1) 순원왕후의 수렴청정과 세력균형유지(2) 풍양조씨의 득세4. 철종조 세도정치의 절정 ............... 14(1) 안동김씨의 재집권(2) 집권 명분의 강화(3) 주요 관직의 독점Ⅲ. 결론 .......... 20참고문헌Ⅰ. 서론1. 세도정치 개관世道란 ‘정치는 널리 사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들은 자기가문의 권력을 권고히 하기 위해 더욱 극렬하고 파행적인 정치양상을 보여왔다. 세도정치는 100여년간 조선후기의 왕실과 정치를 농단하고 민생을 파탄으로 이르게 하는 주요 원인으로 파악되어 왔다.)이러한 세도정치기, 안동김씨가문은 60여년간 집권하며 정국을 주도해갔는데 다른 여러 有力姓貫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과정을 통해 한 가문이 조선전체를 수십년이나 움켜쥐는 기형적인 정치양상을 만들어 졌는지에 대해 좁은 지식이나마 사학전공 학부생으로서 공부하고 싶었고, 특히 철종대에 이르러 안동김씨가문은 안동김씨 一門에 의해 정국장악이 이루어지는 세도정치의 절정을 맞이하는데 당시의권력구도와 양상을 알아보려고 하였다.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본 논문은 먼저 세도정치의 형성배경을 설명하고 이어 순조조 이후 권력에 중심에 서게 된 안동김씨가문의 성립과정, 그리고 헌조조, 철종조에 이르러 풍양조씨와 같은 다른 유력성관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세도정치의 절정에 이르는 과정을 알아보고자 한다.Ⅱ. 본론1. 세도정치의 시작(1) 홍국영의 세도정치18세기 영조와 정조 시대를 통하여 노론일파가 우세한 가운데서 정세의 안정을 가져 올 수 있었던 것은 영, 정조때의 숭문정치와 탕평책이 양반관료간의 과격한 대립을 상호 견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조가 그의 부친 장헌세자의 사후 영조로부터 왕위계승이 약속되어 있을 때 정조를 보호하는데 힘을 기울인 것은 홍국영이었다. 정조는 즉위하자 홍국영을 승지로 중용하고 그로 하여금 도승지겸 숙위대장으로 삼았다. 따라서 홍국영은 왕의 신변 보호는 물론 모든 상주와 결정이 그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되니 홍국영의 세도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勢道政治란 한국사에게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정치 형태이다. 이 정치 형태는 일종의 변태적인 것인데 왕권에 대한 위임정치, 신임정치, 신탁정치, 대행정치로 왕권을 위임받거나 신임, 신탁, 대행자의 지위가 권력의 정상자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이 없다. 국왕의 신임을 얻은 다른 실권자를 두어 배관격을 가했지만 결정적으로 김조순 세력을 완전하게 제압하지는 못했다.김조순은 은인자중하면서 자신에 대한 선왕 정조의 권위를 이용할줄 아는 노련한 정치가였다. 그의 정치적 위상과 거쳐간 관직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자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실록에서는 권력요직에 깊이 관여하며 두루 역임했을 것으로 말하고 있다.)1803년(순조3년) 12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이에 경주김씨를 중심으로 한 벽파가 크게 약화되었고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시파가 정국의 주도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그림1.에서 순원왕후 김씨는 김조순의 딸로 벽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왕비에 올라 안동 김씨 외척 독재의 근원이 되었다.그림1.)정순왕후의 수렴청정 거둔후 순조 4년부터 시파와 벽파의 대립은 계속되었는데 정국의 주도권을 쥔 외척 김조순 세력은 순조 생모(수빈박씨)의 친정 박준원 세력과 풍양조씨 조득영의 협력을 얻어 권력장악에 더욱 기세를 높였다.(2) 안동김씨의 실권장악순조 4년 4월 시파세력을 제거하려던 강진현감 이안묵을 유배함으로써 벽파에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5월에 김조순 집안과의 국혼에 반대하는 권유등 벽파 인물들이 일차로 제거 당하였다. 그리고 순조 5년 12월에 김달순은 우의정에 올라 영남만인소(사도세자의 추숭주장파)의 주모자를 처벌하자는 등 시파의 죄를 재론하다가 조득영이 감달순을 공격함으로써 벽파세력은 몰락하였다.)순조 7년에는 감달순이 처형된이후에도 이경신이 그를 변호했으나 오히려 이를 계기로 벽파의 김종수, 김종후 형제도 관작이 소급되어 박탈되었다. 이로 인해 순조 초의 시,벽파의 정치적 분란은 대체로 종결된 것이다.김달순 옥사를 통해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 세력은 그 동안 벽파 공격에 소극적이던 반남 박씨 세력의 협력을 얻고 여기에 풍양조씨 조득영의 후원을 받아 경주김씨와 벽파를 물리치고 명실상부하게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풍양조씨 조득영이 안동김씨를 도와 벽파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움으로써 후일 그의 8촌인 조만영의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될 수 있 순원왕후 김씨도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정순왕후의 경우처럼 신료들에게 순조와 祖宗의 의리를 내세우며 어린 군주의 보호와 충성을 강조하였다.)그림2.)헌종이 11살 되던 1837년(헌종3년) 3월 김조순의 7촌 조카인 김조근의 딸을 아내로 맞아 혼례를 올렸다. 이가 곧 효현왕후(孝顯王后)이다. 이로써 國舅 김조근은 영흥부원군에 봉해지고 영돈녕부사에 올랐다.)이렇듯 헌조조 초기에도 김조순세력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효명세자 의 세자비로 신정왕후 조씨가 간택되고 효명세자 대리청정 이래 꾸준히 성장을 해오던 풍양조씨도 그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당시 풍양조씨 세력의 구심점에는 조만영과 그의 아우 조인영이 있었다. 조만영은 1819년(순조19년) 그의 딸이 효명세자의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827년(순조27년)에 이조판서 김교근이 병으로 교체되자 이조판서가 되어 인사권을 차지하였다. 조만영은 어영대장을 겸직하면서 실력자로 부상하는 한편, 훈련대장으로 군사권을 장악하고 1829년에는 호조판서에 임명되어 정권까지 잡았다. 1830년(순조30년) 효명세자가 갑자기 죽자 풍양조씨 정치세력은 정계에서 당분간 밀려났다. 그러나 조만영은 계속해 호조판서, 예조판서에 임명되어 세손(헌종)의 보호에 주력하였으며, 헌종이 즉위한 후에도 1838년(헌종4년) 훈련대장, 호위대장, 어영대장을 역임하면서 불안한 왕실을 보호하는데 노력하였다. 조만영의 동생 조인영은 1819년 문과에 장원급제를 한 수제로 순조의 유촉에 따라 형과 함께 헌조를 보살피며 구정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으며 1834년 헌종이 즉위한 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새로운 실력자로 떠오른 조인영 및 그 세력이 대왕대비 후견하에서 이만한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국왕 외척세력들간의 협력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헌종보도를 조인영에게 맡긴다는 순조의 유촉으로 인한 것이다.)(2) 풍양조씨의 득세이러한 가운데 1837년 안동김씨 김유근이 병석에 눕게 되자 그의 아우 김좌근이 그 권한을 물려받지만 풍양조씨의 대립에서는 문을 대표하던 핵심 인물들이 모두 정계에서 사라졌다. 반면에 안동김씨는 그들의 세력을 더욱 확장해 가고 있었음을 볼 수 있었는데 1851년(철종2)에 발생한 ?遷禮訟이 그 계기가 되고 있음이 주목된다.?遷禮訟이란 철종이 조부 은언군, 백부 상계군, 형 회평군 등 3대에 걸쳐 모반죄에 연루된 데다, 생모 염씨 또한 미천한 신분이었으므로 왕위를 계승하기에는 하자가 많았다.) 더욱이 그는 항렬상 헌종의 9촌 숙부였기 때문에 헌종의 후사가 되기에는 家統과 王統이 서로 어긋난다는 결점이 있었다.정통성이 취약한 철종의 왕위 계승은 1851년(철종2년) 6월에 헌종의 3년상이 끝나고 神主를 종묘에 부묘하게 되면서 眞宗(追尊王, 英祖의 長子)에 대한 ?遷問題를 발생케 하였다. ) 진종은 왕통으로는 철종의 5대조가 되지만 ?遷해야되지만 가통으로 보면 3대조가 되어 ?遷이 불가한 상황이였다.이에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한 禮曹는 대신들에게 收議를 건의했고 그 결과 좌의정 김흥근을 비롯하여 우의정 박영원, 판부사 김도희, 박희수 등 收議에 참여한 대부분이 왕통을 중히 여겨 ?遷을 찬성하였다.)그러나 영의정 권돈인등 일부세력이 ?遷이 가통상 불가하다고 주장하며 철종을 순조의 아들로 삼아 왕통을 계승한 것에 대하여 반대의 입장을 드러내였다.이렇듯 전례에 관한 논의에 서로 어긋남이 있자, 국왕은 2품 이상 및 유신에게 다시 收議 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106명에 달하는 중신, 유신 들이 수의에 참여하여 예조에서는 이들의 의견을 취합 보고하였다. 결국 철종은 제왕가는 승통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 고금의 통의라 하며 眞宗의 ?遷을 명하였다.)그런데 조천이 결정된 다음날에 홍직필이 좨주로 있던 성균관 유생들로부터 시작하여 삼사에서도 연이어 권돈인을 탄핵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탄핵 명분은 권돈인의 견해대로 친종을 조천하지 않을 경우에는 의종와 헌종이 장차 소목 안에 들지 못하기 때문에 왕위의 정통성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사태가 정통성 시비에까지 이르자 철종은 권돈인을 직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인문/어학| 2010.05.27| 22페이지| 5,000원| 조회(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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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민주의 역사관
    식민주의 역사관1.식민주의 역사관의 연원일본의 침략주의적인 역사인식은 막부시기 국가적 전통의 고취와 일본 텐노우(天皇)지위의 재확인을 근간으로 하였던 국학(國學)계통의 배타적인 국가주의 이념에 의해 고무된 것이다. 이러한 국수주의 인식은 19세기 말과 20세기초 각기 그 계통을 달리하면서 제기되었으며,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는 침략주의적인 측면을 가지면서 조선에 대한 우월적 위치를 확인하려는 식민주의 인식체계로 나타났다.원래 에도막부시기 일부 국학자들에 의해 주장되기 시작한 신라정벌설, 임나일본부설 등이 막부말기 메이지 초기에 이르면서 정한론(征韓論),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으로 발전하였다. 이 이론들은 근대적 학문의 외양을 갖추어 나타났기 때문에 근대적 지상과제로 설정하였던 우리나라 학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논리 가운데 조선침략의 사상적인 원형으로 제공된 것은 동양평화론과 정한론이다.첫째 동양평화론은 백인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동양 각국인 연대하여 극복함으로써 동양의 평화를 수호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는 명치유신의 원동력이며 일본 파시즘의 생성원리로 작용한 문명개화의 논리였던 부국강병론과 약소 일본이 서구의 침략을 막을 수 없으므로 아시아 각국의 힘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아시아연대론에서 발전한 것이다.동양평화론에서 아시아 연대를 위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한 일본이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여야 한다는 것은 팔굉일우(八紘一宇))라는 천황도(天皇道)의 달성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동양 각국이 텐노이의 위광에 복속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한 동양평화의 달성은 바로 일본을 맹주로 하는 동아시아 지배체제의 구축을 의미하였다.이 동양평화론은 일본 군국주의와 결합하여 아시아 제국에 대한 침략의 논리로 전화되면서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파시즘 체제를 뒷받침하는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둘째, 정한론은 조선에대하여 군사적 출병을 하여야 한다는 이론이다. 정한의 방법으로는 크데 사이고오,사다의 무력에 의한 정한과 이와쿠라,오오대한 종합적인 안내서로서의 성격을 띤 서적들을 출판하기 시작하였다.1896년의 ‘조선왕국(朝鮮王國)’과 1901년의 ‘조선개화사(朝鮮 開化史)’, ‘한반도(韓半島)’,등이 대표적이다. 이책들은 조선 침략의 이론서라기 보다 침략의 상황과 조건을 상론 한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책들은 이미 식민주의 역사학의 기본적인 논리들을 제공하고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식민사학이 성립 될 수 있었다.식민논리를 사서를 통해 정리하기 시작한 것으로 하야시의 ‘조선사(朝鮮史)’, ‘조선근세사(朝鮮近世史)’) 와 도쿄제국대학 국사학과 교과서로 사용되었던 ‘국사안(國史眼)을 들 수 있다. 특히 1877년에 이미 그 대략적인 내용을 완성하고 1890년 출판되었던 ’국사안‘ 이라는 책은 조선은 신대(神代)로부터 일본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고 하는 그릇된 역사상을 심어주었는데 일르 통해 도쿄제대 국사학과를 중심으로 일선 동조론이 자리잡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1893년 요시다는 ’일한 고사단(日韓 古史斷)‘에서 신라와 가야는 일본의 자식관계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저술들은 일선 동조론을 심화시키는 토대를 형성하였다.일제의 침략주의적 역사학의 한 부분을 차지하였던 만선사관은 도쿄제대 사학과 출신의 동양사 전공학자들과 남만주청도주식회사의 만선역사지리조사실(1908년 설치)을 중심으로 그 기초를 닦았다. 이들은 일선동조론을 부정하고 오히려 한국사의 만주사에 대한 종속을 강조하는 만선불가분론에 기초하여 만주와 조선을 하나의 단위로 묶어서 보려는 만선사관(滿鮮史觀)을 만들어 냈고, 이것은 한국의 독자적인 발전과정을 부정하는 타율성론으로 발전하였다.그리고 독일 역사학와 경제학을 전공하였던 후쿠다는 1902년 자신의 한반도 여행을 통하여 얻은 조선의 경제상황을 경제사적인 시각에서 서술한 논문인 ‘조선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를 1904년 발표하였다. 여기서 그는 상공업의 미발달, 토지소유제의 결여, 자급자족적인 상태를 근거로 조선에서는 봉건제도가 결여되어 있으며, 당시 조선은 일본의 가마쿠라막부이전의 후지론으로 확대되었으며 이를 통해 당파성론이 식민사관의 한축을 구성하게 되었다.1910년대에 들어와서 이와같은 침략주의 역사관은 식민지 동화정책에 편승하여 더욱 그 기능을 확대하였다. 특히 총독부를 중심으로 관변에서 각종 조사 보고서류를 간행하기 시작하고 일본 식민주의 학자와 문필가들이 한국관련책들을 출판하면서 식민주의 사학은 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일선동조론, 정체성론, 타율성론, 당파성론, 민족성론 등이 식민주의역사관의 핵심적 논리로 정리 되었다.19210년대에는 조선청동부의 정책적인 후원 속에 부속기관인 조선사편수회)에서는 기초자료의 조사와 수집을 담당하였으며 경성제국대학에서는 이를 근간으로 구체적인 식민주의 역사학의 연구 성과를 양산하였다. 이와 함께 총독부의 지원을 받은 어용학회와 단체들도 이에 가담하여 일제의 식민통치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였다. 이러한 총독부를 중심으로 한 왜곡 작업은 1903-1940년대에도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서 지속되었다.1) 일선 동조론일선 동조론은 한국과 일본이 같은 조상에서 출발하였으므로 불가분의 친근관계가 있다는 주장이지만, 그 이면의 내용을 보면 태고적 이래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였다는 이론이다. 이는 일본의 고전에 신화적 내용으로 기술된 것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 식민지배의 논리로 삼은 것이다.일본의 옛 역사책인 ‘고사기(古事記)(712)’나 ‘일본서기(日本書紀)(720)’에 단편적으로 기록된 일본 신이 한국 신을 지배하였다거나 일본 신의 후손이 한국 신이 되었다는 내용, 진구우(神功)가 신라를 정벌하였다거나 임나일본부를 두어 한반도 남단을 경영하였다는 내용들을 모두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였다.이 이론은 ‘국사안(國史眼)’에서 시작되어 일제의 조선감정이후 그 내용이 더욱 확대되었다. 1910년 ‘역사지리’ 임시중간호의 ‘조선호’에서는 각 분야별 동조론을 정리하여 한일 양국 병합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1910년 여러방면에서 주장되었던 일선 동조론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것은 기다의 ‘한국병합과 국사’였다 동아시아의 선사시대에 대한 연구를 통해 시베리아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이동하는 문명의 흐름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삼한 정벌이나 임나일본부 설치등에 대해서는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근거가 없음을 확인하였다. 일선동조론을 뒷받침하는 이러한 기술이 허구적인 것임에 일본의 현대 역사학자들도 지적하고 있다.2) 타율성론타율성론은 한국사의 l역사가 한민족의 자주적인 역량에 의해 전개된 것이 아니라 북쪽의 중국, 몽고나 남쪽의 일본과 같은 외세의 간섭에 의하여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한국역사는 태고적 이래로 이민족의 지배아래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한민족 시조로서 단군을 부정하면서 기자와 위만 같은 중국인 이주자 집단에 의한 식민정권을 한국역사의 시작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남쪽에서는 진구우의 신라정벌과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치를 전후하여 수백년 동안 일본의 점령아래 있었다는 남선경영설(南鮮經營說)을 주장하였다.한국은 자주적인 근대화가 불가능하며 근대 문명사회로의 진입을 위해서는 일본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식민논리에서 출발한 것이 타율성론이다. 이에따라 의도적으로 한국의 역사 속에서 자주적 역사발전 능력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찾아내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타율성론은 그 주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결과 반도적 성격론이나 사대주의론 등 특수한 관점에서 강조되고 발전 되었다.타율성론을 뒷받침하였던 것은 만선사관으로, 이는 한국사의 전개를 만주사 전개의 부용적 위치로 전락시킨 이론이다. 만선사관에 따라 한국사를 보게되면 만주사와 한국사가 하나로 결합되어 한국사의 독자성과 자주성은 소멸된다. 만선사관에따라 한국사를 연구하였던 식민학자들은 한국사를 대륙세력의 변동에 따른 파급의 현상으로 이루어지는 역사로 축소하였다.한국사에서 보이는 타율성의 필연적 근거로 제시된 지리적 숙명론은 1920년대부터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이 논리를 반도적 성격론으로 발전시킨 것은 1930년대의 도리야마와 미지나등이였다.미지나는 이를 이론화하여여 한국사와 묶음으로써 중국을 만주에서 배제하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나왔다. 이 이론은 일선동조론을 비판하였지만 한국의 자주성을 부정하였다는 점에서는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3) 정체성론정체성 이론은 한국이 여러 왕조의 교체를 거치는 사회적 변혁에도 불구하고 고대사회에 머물러 있다거나, 근대사회로의 이행에 필요한 봉건사회를 거치지 못한 나라로 간주하여 사회경제적 차원에서의 자주적인 근대사회발전을 부정하는 이론이다.정체론은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을 학술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후쿠다가 조선은 정체상태에 빠져 있으며, 근대 일본의 도움과 지도를 받아야 근대사회로 올라설 수 있다고 주장한 것도 이러한 논리의 당연한 귀결 이였다.후쿠다에 의해 시작된 조선 정체론은 경제학의 발전에 따라 다양한 근대 경제학의 학문적 배경을 뒤에 업고 발전하였다. 1920년대에는 사회주의 유물사관이 도입되었으며, 마스르크스주의자들은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에 입각하여 동양사회를 보았다. 그런데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을 말하는 동양사회에서의 노예사회 혹은 봉건사회 결여론을 수요하게 되자,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조선은 세계사의 법칙적인 발전과정을 거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체되었다고 주장하였다.또한 모리야, 시카다와 같은 식민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항하고 식민정책수립에 기여한다는 명목으로 조선경제연구소를 만들어 이를 통해 조선 정체론을 정리하였다. 이들은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 구조적인 측면에서 조선 경제를 연구하여 새로운 경제사 연구의 영역을 개척하였지만 정체론적 시각에서 출발하였다는 점은 다를 바가 없다.정체성 이론은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과 유물사관, 실증사학 등 그 기초한 이론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 종국에는 한국이 선진적인 일본문명에 동화됨으로써 정체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타율적으로나마 발전의 길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라는 데에 귀결되고 있다.한국의 경제사를 살펴보면 토지사유제가 일찍부터 확립되어 있었다. 그리고 조선후기에는 화폐경제가 발전하였으며 일부 업종에서는 임노동(賃勞 있다.
    인문/어학| 2010.05.27| 6페이지| 2,000원| 조회(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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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주의 사학
    Ⅱ. 일제시기 국내학자들의 역사인식1. 민족주의 사학①민족사학과 민족주의 사학1960년대, 1970년대 연구에서는 주로 민족사학이라고 지칭하던 것이 1970년대, 1980년대에는 민족주의 사학이라고 칭해졌다. 그러나 당시에는 양자 간에 구별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단지 민족주의 사학은 민족사학이라는 용어가 갖는 불분명한 것을 보다 명확히 의미 지워 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서중석은 민족사학은 좀 더 포괄적인 의미로 이 범주 안에 민족주의 사학이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조동걸은 민족주의사학과 민족사학을 구별하여 사용하자고 제안하였다. 1920년대 맑스주의(사회경제사학)사학자들의 연구는 반제(反帝)적 성격의 민족사학이긴 하였지만 민족주의 사학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많이 대두되었던 문화사학이나 실증사학도 민족사학이긴 하지만 민족주의사학은 아니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민족주의사학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우선, 근대성을 획득한 근대적인 사론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반제적인 측면이 있고, 애국심이 강조되어 있다고 해도 근대적 서술과 연구가 되어 있지 않으면 민족주의 사학이라고 칭할 수 없다. 장지연과 김택영, 황현의 사학이 대표적이다. 박은식은 민족주의 역사학의 범주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근대적 인식의 한계를 보이기도 하였다. 둘째로 민족주의사학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식민사관의 비판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연구방법이 일원론적 유심론이다. 이는 민족주의사학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한데, 이에 대해서는 조동걸이 정의하였다.) 일원론적 유심론이란 박은식의 국혼(國魂), 신채호의 낭가사상(娘家思想), 정인보의 얼, 문일평의 조선심(朝鮮心)과 같은 민족정신이 역사흐름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일제시기에 일본 관학자들에 의하여 한국을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만들기 위한 식민사관의 극복은 이 시기부터 있어왔다. 그러나 근대적 사학이라고 하여 식민사관을 그대로 답습한 저서는 민족사학이 될 수 없다. 민족사학이란 근대적인 역사연구방법론에서 식민사학에 반하는 당시의 모든 연구방법론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민족주의사학은 일원론적 유심론의 서술체계이면서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근대적인 서술체계를 갖춘 연구방법론이라고 정의하겠다.②1910년대 민족주의사학민족주의사학은 신채호와 박은식을 대표하는 사학자들의 연구방법론을 지칭한다. 위에서 정의한 바와 같이 신채호와 박은식은 각기 역사의 원동력으로 파악하는 민족정신을 정의하였고, 근대적인 서술체계로 식민사관을 비판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1910년대에는 이미 식민사관에 의해 국사(일본사)안에 조선사를 포함시켜 일제가 왜곡시킨 부분이 많았으며, 근대적 서술방식으로 역사를 서술하였던 당시 지식인들도 많은 부분 왜곡된 한국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병폐가 심했다. 따라서 개화기의 교과서에 실린 식민성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였다.)신채호의 [독사신론(讀史新論)](1908)은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역사교과서를 비판하고 식민사관을 구체적으로 비판하여 민족주의 역사학의 방법론의 기초를 다졌다. 그는 여기서 왜곡된 한국사를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바로잡겠다는 목적의식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아직 영웅중심사관이 강하였고, 1910년 이후 대종교 계열의 영향)을 받으면서 역사인식이 발전하였다.1910년에 국권이 피탈당하자 민족주의사학자들의 국내에서의 활동은 일본의 많은 억압을 받았다. 따라서 박은식, 신채호 등은 해외로 망명하여 저술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해외로 망명한 박은식은 1915년 [한국통사(韓國通史)]를 서술하여 민족적 역사의식을 고양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저술로 인해 일제는 크게 당황하여 조선총독부에서 1916년 반도사편찬사업(半島史編纂事業)을 일으켜 조선사편찬을 서둘렀다.)박은식은 특히 역사국혼론(歷史國魂論)을 제시하며 국가의 존재양상을 이분화하여 정신적인 ‘국혼’과 외형적인 ‘국백(國魄)’으로 구분하였다. 국혼은 ‘국교, 국학, 국어, 국문, 국사’등을 칭하며 국백은 ‘전곡(錢穀), 졸승(卒乘), 성지(城池), 선함(船艦), 기계(器械)’를 지칭한다고 구체적으로 구성요소를 서술하였다.) 그러면서 국백이 멸하여도 국혼이 살아있다면 국가는 망한 것이 아니라고 하여 조선이 비록 국토와 주권과 군사를 잃었지만 국혼이 살아있기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중국이나 돌궐도 국혼이 국백보다 강한 나라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이민족의 침략으로 정복되는 비운을 겪기는 하였지만 다시 독립할 수 있었고, 몽고나 거란 등은 국백이 국혼보다 강하여 한때 이민족을 정복하여 나라를 크게 하였지만 결국 위축되었다고 말하였다. 박은식의 사론은 국가를 잃어 비운에 빠진 민중에게 독립의 가능성을 제시하여 정신적인 원동력을 마련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신채호는 낭가사상을 통하여 한국고대사를 재정립하고, 일제 식민사관을 비판하였다. 일제가 조선은 외래사상만 있고, 전통적인 민족사상이 없다고 비하한 것에 대하여 낭가사상을 찾아내 제시하면서 고대로부터 존재한 전통사상을 들어 일본의 견해를 비판하였다. 낭가사상은 신라의 화랑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하며, 그 원류를 찾으면 화랑보다도 훨씬 오래 되었다고 했다. 화랑은 신라가 스스로 구성한 사상이 아니라 고구려의 선배제도를 모방한 것이라고 하였다. 선배제도는 고구려 태조왕, 차대왕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국가차원의 정치적 제도로 발전한 것으로 그 기원은 상고시대의 종교의식에 있다고 하였다. 그는 단군왕검시대에서 비롯된 낭가사상이 선사시대의 일반신앙인 원시종교에서 형태화되어 고조선의 전통사상으로 발전되었으며, 이것이 단군조선시대의 수두제전(단군제)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수두제전이 부족국가인 열국시대에 전달되어 각 국가의 제천행사인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의 무천(舞天), 삼한의 소도(蘇塗)로 발전되었다가 고구려 차대왕때 선배제도로 발전되며 국가적 차원의 정치제도로 발전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사상이 고려중엽까지 그 맥을 유지하다가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란 역사적 대사건 때 김부식으로 대표되는 사대유학파에 의해 묘청의 국풍파가 패하면서 그 맥이 끊겼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그는 이 사건이 대단히 비극적인 현상으로 민족의 사상이 끊기며 국가가 쇠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진취적인 낭가사상이 사대주의 유교사상에 패배함으로서 김부식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통해 민족사를 위축하여 서술하였다고 하며 사대적 중세 유교사관을 비판하였다. 신채호의 낭가사상은 그의 고대사인식을 알 수 있게 하며, 이러한 고대사의 정립 속에서 한반도 역사시대의 시작을 한사군으로 잡으려는 일제의 식민사관을 비판할 수 있는 논증을 수립하였다.위에서 본 바와 같이 박은식과 신채호는 국가를 ‘정신상의 국가’와 ‘형식상의 국가’로 구별하여 전자가 더 중요시 되기 때문에 정신이 멸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족사는 계속 연속될 수 있다고 하여 국가도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바로 민족주의사학의 일원론적 유심론으로 이 사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역사서술의 방법도 박은식과 신채호가 새로운 서술 체재로 역사를 서술하였는데, 근대적인 성향이 강했다. 박은식은 자신의 비평과 논평을 첨가하여 저술을 하였고, 역사적 사실이 유래하게 된 사건과 그 결과를 적어, 역사를 인과관계를 통해 설명해 나갔다. 신채호는 이보다는 더 큰 변화를 보였는데, 1920년대에 서구의 근대적인 역사학 연구법을 수용하여 독창적인 고증방법론을 제시하였다.)1920년대의 민족주의사학은 1910년대만큼 많은 연구저술이 보이지 않는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는 보급이 어려웠는데, 이는 한국통사로 박은식의 서술이 일제에 심한 검열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신채호는 1924년과 25년에 걸쳐 [동아일보]에 새로운 논문을 연재하였고, 1930년대에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로 간행되었다. 1920년대는 국내에서 보다 많은 통사서술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는 진취적인 민족주의사학보다는 일제에 의해 조금은 수월히 진행되었던 문화사학의 저술에 힘입은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민족주의 사학도 한계점이 있었다.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자는 취지에서 나오긴 했지만 국가가 망하였기 때문에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항일의식을 배양하기 위해서 감정적인 면에 치우쳐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역사의 원동력을 정신적인 것에서 구하였기에 사회발전을 역동적으로 파악하는데 한계를 보였다. 민족주의 역사가들은 민족정신과 같은 관념적인 개념이 역사를 움직여 나간 힘으로 설명하려고 함으로써 낭만성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역사방법론상 통사서술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1920년대에는 통사서술을 중점적으로 한 문화사상에 가려졌었다. 거기다가 통사서술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식민사관도 완전히 극복할 방도가 나오지도 않았다. 이러한 민족주의사학의 한계점은 일정부분 1930년대 연구자들이 해결하려고 하지만 많은 부분 민족주의사학 자체가 지닌 한계점은 벗어날 수 없었다.
    인문/어학| 2010.05.27| 4페이지| 2,000원| 조회(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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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 및 통일신라 시대 역사서술 평가A+최고예요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역사서술{Ⅰ. 머리말Ⅱ. 삼국시대의 역사인식과 역사편찬1.고구려의 역사편찬2. 백제의 역사편찬3. 신라의 역사편찬4.정리Ⅲ. 통일신라시대의 역사인식1. 김대문(金大問)2. 최치원(崔致遠)3. 정리Ⅳ. 맺음말Ⅰ. 머리말기원전 5세기 공자의 에 의해 토대가 놓여진 동양의 史 와 비슷한 시기에 헤로도토스로부터 시작된 서양의 History'는 다같이 과거 사실에 대한 기록과 평가,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얻는 교훈이라는 실용성을 띠고 나타났다. 양의 동서와 시의 고금을 통하여 역사는 교훈성(실용성 혹은 주관성)과 과학성(객관성)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교훈성이 진보하고 과학성이 높아져왔다. 사학사의 시대구분은 그래서 필요하다.역사가 갖는 교훈성은 다른 말로 하면 역사의식이라 할 수 있고, 이는 근본적으로 역사가의 총체적인 가치관 혹은 이데올로기와 관련된다. 한편, 역사의 과학성은 역사인식방법에 속하는 것이며, 이는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의 발달과 깊이 관련되 있다. 자연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의 사람들이 역사를 신비주의적으로 해석하여 신화의 형태로 서술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와 같이 역사 서술이 고대, 즉 삼국 및 통일 신라 시대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그런데 우리나라 고대의 문헌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이 다수이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역사서는 고려 인종 23년)1145)에 김부식에 의해서 편찬된 이고 그 이전의 통일신라시대나 혹은 더 거슬러 올라가 삼국시대에도 역사서는 편찬되었지만, 어느 때부터인지 모두 없어지고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대 문헌이 어떠한 이유로 현존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일찍이 조 선 후기 이름난 실학자였던 이덕무는 이만운으로부터 전문한 것이라고 하면서 한국 고대의 서적들이 없어지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일이 있다.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 라 장수 주의자들에 의해 소멸, 개조되거 나, 궁중에 보관되었다가 전쟁으로 인하여 없어졌다고도 하였지만, 역시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 지 않았다. 한국사연구회 편, , 을유문화사, p11이처럼 책이름이나 단편적인 기사만 조금 남아 있을 뿐, 그 역사책 자체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형편에서 고대의 역사서술을 살펴보는 일은 무모하여 사실 어떤 위험성마저 내포되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 사학사의 흐름을 정리하는데 있어 고대의 역사서술 부분을 송두리째 공백으로 남겨두기도 어려운 일이기에 와 기사가 기본적으로 고대의 여러 역사책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는 전제 아래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에 역사책이 편찬되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여 이들 역사책의 성격 내지 역사 인식을 추측하여 우리나라 고대 사학사에 대한 기왕의 연구 성과를 일관된 관점에서 정리하고자 한 최초의 시도{) 위의 책, p12였다고 평가받는 이기동 등 선학의 연구 업적을 따라 본고는 한국 사학사의 흐름에 있어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역사서술이 지니는 특징을 살펴보고, 그것이 한국 사학사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살펴볼 것이다.Ⅱ. 삼국시대의 역사인식과 역사편찬1.고구려의 역사편찬현재 우리가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은 삼국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편찬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삼국 중에서도 고구려가 가장 앞섰으니, (권 20) 고구려 본기 영양왕 11년(600) 정월 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이달에] 태학박사 이문진에게 조서를 내려 고사를 축약하여 5권을 만들게 했다. 국초로부터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어떤 사람이 사실 100권을 기록, 이름을 라고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것을 산수한 것이다.이에 의하면, 고구려에서는 국초에 누군가가 국사책으로 100권을 지었는데, 말기에 해당하는 영양왕 때에 이문진이 왕명을 받들어 이를 요약하고 손질하여 5권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고구려가 이미 국초에 역사책을 편찬한 것은 확실한 샘이다. 다만 그 시기를 둘러싸고 학계에서 신화적, 설화적인 성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그러면, 이 를 토대로 하여 이문진이 편찬한 의 성격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 점에 관하여 이우성은 다음과 같이 흥미 있는 추측을 하고 있다. 즉 고구려 정치, 사회의 발전과 전반적인 역사인식의 발달에 따라 종래의 와 구별되는 현실적, 실용적인 성격의 역사책이 필요하게 되어 새로이 착수한 것이 다름 아닌 이며, 따라서 은 에 비해 현실적인 관점이 고조된, 실용성을 위주로 한 역사책일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100권이나 되던 에 배해 이 겨우 5권으로 줄어든 것은 일정한 관점 아래 사료를 선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은 의 단순한 요약일 수는 없고, 역사책의 성격 자체가 크게 달라진 것이라고 한다. 이 같은 견해는 오늘날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역사인식의 발달단계와도 부합하는 것으로서 중국의 역사책인 (권49) 고려 전에서 볼 수 있듯이 6세기경 오경 외에 三史(, , ) , 등 중국 역사서를 읽고 있었다는 고구려인이고 보면, 이 편찬될 당시에는 국초에 비해 역사인식이 훨씬 더 깊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다만 이우성의 주장처럼 현실적, 실용적인 성격의 역사책이 필요하게 되어 을 편찬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를 손질하는 일에서 그치기보다는 오히려 편찬 이후 영양왕 대까지의 몇 백년간의 기록상의 공백을 메우는 작업에 더 큰 노력을 집중했어야 옳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과연 이 의 단순한 발췌인지 아니면 편찬 이후의 역사적 사실까지도 추가적으로 보충 수록한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2. 백제의 역사편찬(권 24) 백제본기 근초고왕 30년(375)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고기에 이르기를, 백제는 개국 이래 아직 문자로 사실을 기록한 일이 없었는데, 이에 이르러 박사 고흥을 얻어 비로소 를 갖게 되었다 고 하였다. 그러나 고흥에 대해서는 일찍이 다른 책에는 나타나지 않으므로, 그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여기서는 먼저 고기 의 정체가 의문이지만, 이있는 일이므로 그로부터 반세기쯤 지난 근초고왕 때 국사책이 편찬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그런데, 백제시대의 역사편찬과 관련하여 역사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 일본쪽의 관찬사서인 에 주기로 인용되어 있는 , , 등 이른바 백제의 3서이다. 그렇지만 이들 백제 3서의 정체는 확실치 않은 것으로, 일본의 일부 역사연구자들은 의 사료적 신빙성을 의심하여 백제 3서 역시 일본 수사 당룩에 의해서 윤색된 믿기 어려운 역사책이라고 단정하고 있고, 우리 학계에서도 이기백은 백제 3서를 위서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그 원형이 본래 백제 조정에 의해서 편찬되었고, 조국이 멸망한 후 이를 지참하고 일본에 망명한 백제의 지배층과 그 후예들이 일본 조정에서 관료로 복무하게 된 상황에서 일본 수사당국의 요청에 의해서 제출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지도 한다. 다만 이같은 과정에서 백제 3서가 일차적으로 백제 망명자들의 손에 의해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일본 수사당국에 의해서 윤색되어 에 인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만큼 이들 역사책의 본래 성격을 알아내는 일은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에는 전설적인 기사가 많지만, 그보다 후대에 편찬된 것으로 짐작되는 는 日字와 干支 두 가지가 기록될 정도로 실록으로서 확실성이 풍부한 편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볼 때 백제의 역사학은 후기에 이르러 크게 진전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3. 신라의 역사편찬삼국 중에서 국가의 출발이 가장 늦었던 신라에서도 이미 삼국통일 이전에 역사책이 편찬되었다. (권4) 신라 본기 진흥왕 6년(545) 7월 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이찬 이사부가 아뢰기를, 국사라는 것은 군신의 선악을 기록하여 포폄을 만대에 보이는 것입니다. 사기를 수찬하지 않으면 뒷날 무엇을 보고 알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왕이 적이 옳게 여겨 대아찬 거칠부 등에 명하여 널리 문사를 모아 를 수찬하게 하였다.이에 의하면, 신라의 국사편찬은 진흥왕 초년에 정치, 군사상 최고 요직에 있던 이사부의 건의에 따라기록하여 포폄을 만대에까지 보이는 것이라고 한 만큼 유교의 교훈적, 실용적 목적을 위해 편찬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는 일단 의 성격을 암시해주는 유력한 지표로 볼 수 있다.4. 정리이상 검토한 삼국의 역사책들이 갖는 의의와 성격에 대하여 이기백은, 이들 사서는 모두 전하지 않으나, 추측컨대 건국의 시조를 위시한 역대 국왕의 초인간적인 위대한 업적들이 주로 기록되었던 게 아닌가 한다. 이같이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두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의 제도를 정비하고 대외적인 발전을 하기 시작할 무렵에 각기 이 같은 제 나라의 역사를 편찮란 것은, 안으로 국왕의 권위를 높이고 밖으로 국가의 위신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였다고 믿어진다. 따라서 국사의 편찬은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귀족국가 건설의 문화적 기념탑이라고 할 수가 있다. 고 평하였는데 이 같은 그의 지적은 적절한 것이라고 이기동 역시 보고 있다. 삼국이 역사서를 편찬하던 시기는 대체로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중국의 문물제도를 받아들여 국가체제를 정비해가던 시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러한 시기에 역사가 편찬된 것은 대외적으로 국력을 과시하고, 안으로 유교정치를 지향하려는 정치목적이 담긴 것으로 이해된다.다만, 삼국시대에는 아직 유교사상의 비중이 높지 못하고 불교와 도교 및 토속신앙의 영향이 컸기 때문에, 역사서술도 이러한 종교적, 신비주의적 요소들이 잡다하게 혼재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삼국의 역사서술은 신화적 역사서술에서 유교적 역사서술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형태를 취하면서 중앙집권적 귀족국가 건설의 위업을 내외에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Ⅲ. 통일신라시대의 역사인식신라는 660년대에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뒤 연합군으로 끌어들인 당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냄으로서 삼국통일을 달성했다. 그로부터 935년에 고려에 멸망하게 될 때까지 260여 년간 전개된 통일신라시대에 조정에 의해서 어떤 역사서가 편찬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통일신라시대에 관찬사서가 편찬되었다는 확증은 중
    인문/어학| 2010.05.27| 8페이지| 2,500원| 조회(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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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도연맹 관련 자료 감상평
    비디오 감상문우리는 지난주 수업에서 교과 내용과 연계하여 국민보도연맹 양민학살와 관련된 시청자료를 감상하였다. 비디오를 감상하면서 이전에 사진이나 글로써 접했던 양민학살의 내용들보다 더 강한 인상을 받을 수 있었는데 특히 가장 충격적 이였던 것은 경산지역의 폐광산 구덩이에 매장된 무수한 유골들이였다. 이 수백 수천구의 유골은 서로가 엉키어 형체를 구분할 수가 없었고 정말 말 그대로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더욱이 명절과 방학이면 찾아뵙는 할아버지 댁과 가까운 지역이라 더욱 섬뜩하고 안타까웠는지도 모른다.50년이 더 지나 현재에는 너무나 아늑하고 평화로운 이곳에서 그때에는 그렇게 잔인한 일들이 벌어졌다는 것에 대해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무서움뿐만 아니라 인간의 잔인함에 더욱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희생자 대부분은 무고한 사람들이 이였을 것이고 설사 죄가 있던 소수의 사람들도 그들의 인권이 있을 터인데, 최소한 형식적인 재판과정도 없이 대량학살을 은폐하기 위해 불빛 하나 들어올 틈없은 구덩이 속에서 수십년의 한을 품은 채 갇혀 있었다는 것이 너무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보도연맹은 49년 6월에 만들어진 단체로 과거 좌익운동한 사람들을 모두 가입시켜 일정한 심사와 교육을 받게 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나아가 이를 통해 좌익을 분열, 이간하고 더욱 색출하여 그 근본을 뿌릴 뽑으려는 중요한 의도도 포함하였다.그런데 이러한 보도연맹은 이승만 정부초기의 정통성이 부족하고 편협적인 집권세력의 통제 방법의 한 단면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보도연맹원으로는 남로당과 연계된 좌익뿐만 아니라 광복후 민족국가 설립과 건국활동에 매우 적극적이였던 건준세력과 지방 인민위원회와 전평,전농등의 단체를 비롯하여 무수한 사회단체들도 그 대상이 되었다.즉 이승만과 한민당세력을 비롯한 친일의 단정 정부세력에 대항하는, 그들의 헤게모니유지에 필수불가결한 반공이념에 방해가 될 소지가 있는 활동적인 인사들은 감시하고 사전에 그 세력을 자르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한국전쟁이전에도 보도연맹원은 소수 집권세력의 핍박의 대상이였으며 무고한 희생이 잦았다고 한다.그래서 생각해보면 전쟁이후 양민대량학살은 전쟁이 가져온 비극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당시 대한민국의 지도층의 면면을 보고 판단할 때 필연적인 결과물일지도 모른다고 느껴진다. 전쟁이 터진 직후 수도 서울의 많은 시민은 나 몰라라 하며 자신들의 안위만 챙기기 급급했던 그들에게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독후감/창작| 2010.05.27| 1페이지| 1,000원| 조회(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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