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의 현대화가난의 현대화는 산업 생산성이 가져다 준 풍요에 기대어 살면서 삶의 능력이 잘려나간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풍요 속의 절망이다. 이 가난에 영향을 받는 사람은 플러그처럼 시장에 꽂혀 평생을 생존이라는 감옥에 갇혀 살게 된다.새로운 가난이 만연하는 세상에서 상품에 중독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 하거나, 죄악이거나, 또는 두가지 다 일수도 있다.선진국에서 가난의 현대화는 전문가의 공인 없이는 아무리 자명한 것도 깨닫지 못하는 현상으로 나타나난다. 자율은 무너지고, 기쁨은 사라지고, 경험은 같아지고, 욕구는 좌절되는 과정이 현대화가 일으키는 다른 결과들이다.전문가 독재의 시대전문가가 대중으로 부터 받는 신뢰가 산업 시스템의 아킬레스 건이다.자본가 엘리트가 권력과 특권을 실질적으로 배분하면서 그것이 그대로 드러난 모습이 교육계, 의학계 그리고 정책 기관이지 않은가?전문가에게 중요한 것은 개인을 고객으로 정의하는 권위이며, 그 고객에게 필요를 결정해주는 권위이고, 새로운 사회적 역할을 알려주는 처방을 하는 권위이다. 교육자, 사회사업가, 군인, 도시 기획자, 판사, 경찰관 들은 자기 분야에서 치료를 받을 고객을 확보하고 처방 기구를 만드는 광범위한 자율권을 누리고 있다.상품 시장 의존사회에 종속되어버린 개인전문가의 처방은 늘고 인간의 자신감은 줄어들었다. 소비자들은 전문 소비자 운동가의 조언을 받아야만 한다.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누군가로부터 배워야 하는 사회는 개인이 만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행동하거나 결정할 수 없는 문화에서 나온다. 이런 문화에서 소비자는 스스로 배우기 보다 만들어진 필요에 적응할 수 밖에 없다.자신에게 부여된 필요를 무시하거나 확신하지 못하는 인간은 사회가 용납할 수 없는 반 사회적 인간이 된다. 인간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집중 치료를 받는 것이다. 이로써 삶은 마비 된다.부자들은 상품속에 든 필요에 중독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필요가 만든 환상에 마비된다.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첫번째 환상은 상품과 재화를 구매해야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환상은 지금껏 자동사로 지칭되던 행위(배우다, 낫는다, 움직이다, 놀다)를 명사(교육, 건강관리, 교통, 텔레비전)로 통합시킬 수 있다는 환상이다.전문가가 권리를 정의할 권한을 갖게 되면서 시민의 자유는 사라져 버렸다. 어떤 것이 좋은 것이고 옳은 것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전문가의 권력은 '보통'사람이 자신의 판단으로 살아가려는 소망과 의지, 능력을 빼앗는다.인간의 자율적 행위는 고용 수준을 위협하고 사회적 일탈을 일으키며, 국민 총생산을 떨어뜨린다. 따라서 그런 행위는 부적절하게 불리는 '노동'일 뿐이다. 전문가의 효율적인 측정에서 벗어나 만들어진 사용 가치는 상품에 대한 필요만 줄이는게 아니라 그 상품을 만들고 상품 구매에 필요한 월급을 주는 일자리를 줄이기 때문에 상품 의존 사회를 위협한다.
한국사 특강201085188 김승욱도입사림은 사류와 같은 의미로 통시적으로 사용되었다. 사족·사류·사대부는 이와 비슷한 의미로 고려 후기 문벌귀족의 몰락 이후 지방의 향리자제가 과거를 통해 대거 등장하면서 능리능문의 학자적 관료로 대두되면서 하나의 신분으로 자리잡아갔다. 고려시대의 사족·사류는 향리·서리의 이족과 대칭되는 의미로서 관리가 될 수 있는 신분, 仕宦을 할 수 있는 가문을 의미하였다. 또한 사대부는 문신·무신과 유형을 달리하는 학자적 관료로서 현직관료와 관료후보자까지 포함한 지배계급이란 뜻으로 쓰였다.사림이라는 용어가 집중적으로 사용된 시기는 기묘사화를 전후한 중종대로 4대 사화 때 피화된 신진사류를 지칭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훈구파에 비해 군현이족에서 사족화 하는 시기가 늦었다. 사대부가 고려 후기에 대두했다면 사림파의 가문은 여말선초에 성장하였다. 이들은 과거·첨설직·산관 등을 통해 사족화 하였다.또한 그들은 중소지주로서 생활기반이 향촌 사회에 있었고 비록 상경종사 하더라도, 항상 처사적 취향을 가졌다. 따라서 농촌의 실정과 민중의 애환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관직보다는 학문을 중시하였고 그들의 환역도 대게 시종·문묘·교수지임과 양친을 위한 수령직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중앙정계에 투신하더라도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여 권력구조에 깊이 참여하지 않았다. 그 결과 사림파에는 국혼을 하는 예가 거의 없었고 또 역대 공신 계열에 참여한 자도 별로 없었다.1) 사림의 경제적 기반여말 선초의 정치·사회·경제적 변동과 지방통치체제 개편에 따른 향·소·부곡의 소멸과 임내의 직촌화, 유불교체에 따른 재지세력의 불교시설·기반 인수, 기타 전란으로 인한 유이민의 대량발생, 성진농법의 수용을 통한 활발한 외곽지역 개발 등은 사림의 경제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 요인이었다.특히 고려 후기까지 토착향리·장리들의 장악 하에서 미개발된 상태의 임내지역은 기성사족의 낙향과 재지사족의 확산에 따라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인구의 증가와 이앙법의 보급은 각 주읍의 접경지대에산간 계곡을 따라 복거하거나 농장을 개설하였다. 이러한 곳은 한해나 수해가 적었고 피병·피세하는데 유리한 지세였으므로 사림파의 성향에 맞았다.이와 같은 기반을 바탕으로한 사족의 재산 증식 방법은① 부·모·처변에서 전래되는 상속과 분배 및 친척으로부터 수증하는 경우② 복거와 개간에 의한 새 가옥과 전답의 확보③ 자산의 기반 위에서 매득하거나 증식하는 경우가 있었다. 조업계승과 자녀균분상속제 하의 혼인에서 증식된 재산은, 혼인 후 세거지를 떠나 처향·외향을 따라가서 이주하면서 외관의 비호하에 무주지·진황지를 수령으로부터 입안 받거나 영점하기도 했고, 폐사의 토지와 노비를 모점하기도 했다. 이를 토대로 장리나 상행위를 통해 토지나 노비를 증식시켜 나갔다.특히 농업과 현물을 위주로한 봉건경제하에서 노비를 통해 상행위를 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일정한 자산을 가진 사족들은 관노들에게 상술과 利殖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막대한 이득을 올리게 했다. 이담명 일기에 의하면 이 가문은 내륙에 거주하면서 하도나 동해안 쪽에 솔거 노비를 보내 어염을 구입하여 수로·육로를 통해 운반해 와서 내륙 각지의 장시들을 통해 미·米牟·稷·소두·포목·과실과 교역하였다. 특히 貿鹽은 당시 왠만한 가문이면 모두 소규모로 행하고 있었다.조선전기 사족들의 재산 비중은 토지보다 노비에 더 많은 비중이 두어졌다. 이는 사족의 노비지배체제가 확고했던 조선 전기에는 노비가 토지에 비해 생상성과 수익성이 훨씬 높았던 데에서 기인한다. 노비는 사족의 수족으로서 중요한 재산으로 그것의 多寡가 가운의 성쇠에 직결되었다. 使喚·居家·處鄕·농경·길쌈·상행위 등 어느 경우도 노비 없이는 사족으로서의 생활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필수 불가결한 존재였다.노비의 증식방법은 토지와 마찬가지로 공훈과 관직을 매개로 획득하기도 하고, 부변·모변·처변 등에서 분금·화회·별급의 형식으로 전래된 것도 있었다. 이렇게 확보한 노비는 노비 신분 내지 소유의 세전법에 의하여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는가 하면 로 인한 구휼노비도 노비 획득의 한 방편이었다.노비의 상속은 토지와 함께 자녀균분을 원칙으로 하였다. 가산의 상속규정에 있어 조·부모가 자손에게, 외조부모가 외손에게, 처부모가 처에게 허여·별급하는데 제한을 두지 않는 대신 孫外與他 해서는 안된다는 강한 관념이 존재하였다. 재주는 조상의 유산이 대대로 혈족자녀에게 세전되기를 바랐고 법제적인 면에서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주었다. 이는 왕권의 안정은 사족 전체의 지지기반 위에서 가능한 것이며 사족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는 자녀균분제가 무엇보다 요망되었기 때문이다.재주가 자녀에게 노비·토지를 분금할때는 대체로 분할주의를 지켜 분배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각처에 산재한 노비·토지를 거주 지역별·노비호 단위·소재지 전답별로 배정하지 않고 각처 소재의 노비와 토지를 세분하여 자녀 수대로 분급·분할 하였다. 이러한 원칙은 대체로 잘 지켜진 편이었다.하지만 17세기들어 사족의 경제적 비중이 노비에서 토지로 옮겨지고 노비의 전호·雇工化·양민화가 진행되면서 내외 양변의 재산을 분급받은 당사자나 그의 자녀·내외손 사이에 상환행위가 많아지게 되었다. 상환의 이유는 ‘먼 곳에 경작이 불가능’, ‘거주지 부근 전답을 대신 구매’라는 경우처럼 부재지주가 재지지주화하는 경향을 띠면서 효율적인 토지경영을 위해 외지전답을 거주지 중심으로 집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토지 집적은 양천민의 것을 매입·겸병하는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2) 사림의 사회적 기반사림파 형성의 사회적 배경을 규명하는 데는 먼저 각읍 토성의 존재실태와 토성이족의 사족화 과정 및 사족과 이족의 분화, 재지사족의 혼인 등 재지사족의 존재양상이 밝혀져야 한다.나말 여초의 재지세력들은 상경종사하면서 귀족·관인이 되었고 재지토착의 토성은 상급향리층을 구성하여 군현을 지배하였다. 기성세력인 재경관인은 고려왕조의 전개과정에서 세력교체가 빈번하였는데, 이에 신진세력을 공급해 주는 자원이 재지토성이었다. 이 중 군현 토성이 역대 지배세력의 공급원이었다.재지토성의 혼인은 동읍토성 간의 稅調役등 업무로 경향간을 자주왕래하면서 각 읍 이족간의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통혼권이 확대되었다. 또 이족에서 사족화하면서 동성혼을 기피하고 원혼하거나 동성불혼의 원칙을 지키려는 경향이 일반화되었다. 특히 친손·외손의 차별이 심하지 않고 자녀균분상속이 철저히 지켜지는 관념으로 사족이 거주지를 처향으로 옮기는 것이 일반화 되었다. 이로인해 대개 子와 壻가 동촌에 거주하면서 친가·외가 또는 처가의 일문이 한 촌락을 점거하게 되었다.사림파의 가계는 대부분 군현의 토성이족에서 유래하였다. 무신란의 계기로 전시과체제가 붕괴되면서 토지의 사유화와 농장의 발달이 일반화 되어 갔다. 또 기성 관인들의 낙향생활과 지방의 중소지주층이라 할 수 있는 향리 자제의 대거 관계진출은 지주적 성격을 가진 신흥사족을 창출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고려·조선왕조의 군현제 정비에 따라 외관의 지배에 들어간 이족의 지위는 저하되었다.또한 지방향리 자제들의 관계진출과 첨설직 남발은 관료군의 포화상태를 가져오게 되었다. 향리자제들의 계속적인 관계진출은 기성사족의 입장에서 특권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므로 이족의 관계진출을 봉쇄하면서 사족과 이족의 분화가 명확해져갔다. 그리고 여말부터 상경관인들의 낙향생활과 재지적 기반구축 및 그로 인한 재지사족의 광범한 존재로 인해 결국 중앙의 관직에만 의존하지 않고 지방에 적극 관심을 가지면서 유향소가 나타나게 되었다.이와 함께 社倉·鄕規·鄕案 등이 사족과 이족의 분화시키는 촉진제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향안에는 이른바 세족이어야 입록할 수 있었다. 세족이란 군현토성에서 상경종사 했다가 낙향한 가문, 이족에서 재지사족으로 성장한 가문, 타읍·타도 출신의 기성사족으로 이주하여 벼슬·학문·덕행을 갖춘 가문들을 통틀어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향촌조직은 재경관인들의 경재소와 연결되어 명실상부한 재지사족의 조직체가 되었다.한편 이와 동시에 향촌사회에서는 그 운영에 필요한 제규약으로 鄕規·鄕約·洞約 및 각종 契가 조직되어 있었다. 사족들은 이러한 규약들을 통해 상호간의 결향촌사회 지배기반을 다져나갔다.3) 사림의 교육과 학통조선왕조의 국가통치 이념인 주자학은 안향 등 신흥사대부에 의해 수용되어 여말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교육을 통해서 보급되었다. 특히 지방군현에서는 문과 및 성균관 출신의 문신들이 수령으로 나가서 지방교육을 장려하였다. 선초에는 재지사족으로 상경종사한 신진사류들은 일반적으로 부모봉양을 위한 爲親乞郡을 숭상하여 본관지 또는 부모소재읍의 수령으로 나아갔다. 이들은 지방교육을 진작하고 성리학적 사회윤리를 몸소 실천하면서 교민화속하였던 것이다.신흥사대부들은 왕조 교체과정에서 양분되어 하나는 집권세력으로 계속 재경관료가 되었고 다른 일파는 정몽주·이숭인 등과 같이 순절하거나 길재·元天錫 처럼 재야세력으로 남았다. 15세기 전반까지는 전자가 관학을 중심으로 유불미분화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 정주의 사서집주와 소학을 교본으로 한 경학 위주로 경술과 사장을 중시하는 실용적인 교육이 실시되었다.이에 반해 김종직-김굉필-조광조 일파로 이어지는 사림파는 소학을 학문과 처신의 기본으로 삼았다. 소학은 삼대의 교육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경사자집의 여러 경전에서 추출 선집하여 편찬한 것으로 유교적인 이상 실현에 가장 적합한 교과목이었다. 4서5경을 유교의 강령이라 한다면 소학은 이 강령을 실현하는 시행세목이라 할 수 있었다. 김종직일파에 의해 주도되었던 사학계통에서의 소학 교육은 그야말로 실천궁행하는 차원에서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입장에서 실시되었다. 그 결과 소학은 위기지학의 기본교재가 되었고 사림파를 훈구파와 구별하여 학문적 내지 교육적으로 특징짓는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이러한 소학과 주자가례 등 성리학적 실천윤리의 전국적인 확산과 함께 사림은 점차 확산되어 갔다. 여기에는 각 지방 군현에 사림파 인사가 수령으로 부임한 것이 크게 작용하였다. 길재가 선산지방에 낙향함을 계기로 이곳에 성리학적 분위기가 먼저 조성되었고 김종직이 선산과 밀양을 왕래하고 함양군수로 재임한 관계로 이 일대에 사림파 인사가 배출되었다. 이와 같이 문풍을 진작시키다.
한국사세미나Ⅰ201085188 김승욱1. 머리말주지하다시피 조선의 건국이념은 성리학이다. 성리학은 인간의 심성구조, 사회에서의 인간의 자세 등에 대해 사색하면서 올바른 국가관과 사회관을 마련하기 위한 학문이었다. 실천적인 학문으로써 상리학적 체제의 확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화를 통해 모든 국가 구성원들이 덕이 있는 어진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 중요하였다. 때문에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중앙에 학교와 성균관을 설치하고 각 지방마다 향교를 두어 성리학적 이념을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종대 이후로 성균관과 향교 등의 관학이 교화적 기능 보다 관료로 진출하기 위한 과거 준비 기관으로 변질되게 되면서 그 본연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성종때부터 중용되기 시작한 사림들을 중심으로하여 서원이 건립되기 시작하였다.최초의 서원은 중종대 풍기군수 주세붕이 창건한 백운동 서원이었으나 이는 교화적 기능을 다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 퇴계 이황의 서원보급운동을 시작으로 교학적 기능을 중심으로한 사림의 서원 설립이 계속되게 된다. 이후 서원은 지방향촌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이념적 중심지가 되었고, 나아가 향촌사회에서 사림들의 입지를 강화시켜주는 기능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로 인하여 사림들이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서원은 더욱 증가하게 되었고 국가교육기관으로 인정받아 각종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사액을 받기위한 경쟁도 치열해지게 되었다. 게다가 중앙의 붕당정치와 연계되어 서원은 정치적 여론 형성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가지기도 하였다. 성리학적 이념이 지배하는 조선사회에서 국가정책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유학자들의 정치적 소견은 무시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므로 많은 유학자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것이 중앙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이처럼 서원은 조선의 사회·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 많은 영향을 끼친 기관이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서원 성립의 사상적 배경에 대하여 살펴봄과 동시에, 서원의 정치적 기능에 중점을 두고적 배경연산군대에는 폭정으로 관학 쇠퇴 뿐만 아니라 유풍마저 붕괴된 상황에서 이를 혁신하기 위한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중종반정을 주도한 공신세력은 교학진흥에 대한 방안을 연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인재 수급에 대한 혁신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반정직후 성균관과 사학이 수리되었고 사유를 선발하는 등 관학을 중심으로한 구제회복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종 초년 교학진흥책은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었다. 훈척의 후예인 공신계열은 새로운 정치를 보도할 정치이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이에 반해 성종대부터 중용되기 시작한 신진사류의 교학진흥책은 도학정치 이념에 기초하였다. 그들은 삼대의 지치를 실현하려면 공도의 회복과 치자의 양심이 중시되어야 하며 이는 개개인의 수기를 통한 인심의 순화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孔孟에 단서를 두고 宋代 諸儒의 도학을 숭장하고 천명하는 방법의 교학진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입장은 중종12년 8월 조강에서 奇遵이 소학의 장려를 강조하는 주장에서 나타났다. 그는 당시의 사습이 이록만 추구할 뿐이어서 지치는 성취될 수 없으니 도학을 천명하기 위해 소학을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조광조계 신진 사류의 교학진흥책은 ‘正士習’에서 출발한 것이다.이러한 논리 위해서 그들은 이록만 탐하게 하며 사장만 중시케 하는 과거를 비판하였으며, 태도를 바르게 하려면 윗사람이 분발해야 함을 주장하면서 “임금께서 먼저 덕을 닦아 감화시킨다면 아래의 선비들이 감동하지 않을 수 없어 지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라 하여 인군 스스로 솔선수범을 청하였다. 그 위에 구체적인 교학진흥의 방안으로서 ① 소학의 장려, ② 존현, ③ 師友之道의 확립 등을 제시하였다.①소학의 장려 : 소학은 송대 주자에 의해 편찬되어 수신도덕과 효제의 윤리관을 기록한 유학의 수신서이다. 조선에서는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에 의해 주목되었는데, 연산군대 경원되었다가 조광조일파가 다시 제창하였다. 김안국은 ‘소학의 책은 아끼기를 부모같이 하고 공경嚴講節目을 만들도록 했다. 김안국은 경삼감사 재직 중에 소학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보급하기까지 하였다. 정사습·정사풍을 위해서는 소학지도를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② 존현 : 중종12년 8월 성균생원 권전이 정몽주·김굉필의 종사를 청하면서 과거 이여의 건의 이후 다시 논쟁이 전개되었다. 권전의 상소 요지는 ‘도통설에 토대하여 동방도학은 정몽주에 의해 뿌리를 내리고 김굉필에 의해 밝아졌으므로 순풍속·신사습을 위해 두 사람을 종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왕은 두사람의 종사여부를 의론케 하였는데, 정굉필·신용개·김전·고형산 등 공신계열은 정몽주의 이학지공은 인정하나 위신을 섬긴 것에 흠절 있으며 김굉필은 성경을 을 발휘하여 사도를 돕게 한 공이 없다고 하여 반대하였고, 최숙생·소세양 등 문신들은 정몽주는 종사가 가하나 김굉필은 포상하는 것만 으로써도 족히 선비의 풍속을 격려하여 본받게 할 수 있는 바이니 종사에는 찬성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조광조는 김굉필의 도학전심을 말하며 “문묘에 종사하게 되면 아랫사람들이 모두 그 뜻과 기상을 격동하게 될 것이며 그 나아가는 방향 역시 바르게 될 것”이라 하여 사림의 나아갈 바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도 문묘종사가 필요함을 말하였다. 참찬관 김정은 ‘요사이 정몽주·김굉필을 문묘에 종사시키자는 논의는 비단 이들이 중하게 여기기 때문만이 아니라 종사하게 되면 도학이 스스로 밝아지고 아래 선비들의 나아가는바 역시 한 가지로 올바른 데로 돌아갈것입니다.’라고 하여 정·김 양인의 문묘종사가 도학을 밝히고 사림의 나아갈 바를 바르게 한다는 데 있다고 하였다.도학적 정통성을 계승하는 여부는 집권명분과 여론의 지지를 뒷받침해주는 요소이므로 정·김의 문묘종사는 공신계열의 치열한 반대에 부딪힐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정치적 연관성이 적은 정몽주만 종사하는 것으로 종결되었으나 사림의 교학진흥을 위해 특정인물을 제향한다는 방안이 처음 제시된 것이며 후일 사림의 존현처로 서원의 발생 가능성이 나타났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특히 공신계 인물인 높이고 도학을 무겁게 여기는 뜻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라 하며 사우의 건립은 가능하다는 절충안을 내놓았는데, 이를 통하여 공신계 나름의 존현을 통한 숭유중도의 방책을 제시함으로써 어느정도 유학적 명분은 세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일 남곤과 관계했던 주세붕이 안향사우를 세운것도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고 명종초 사화 중에도 이황의 사액 요청을 들어줄 수 있던 것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볼 수 있다.③ 師友之道의 확립 : 조광조 일파도 학교가 교학의 근본임은 인정하고 있었으나 공신계와는 달리 사택의 필요성보다 군주의 躬行心得을 강조하거나 孝悌之道의 숭장을 통한 유생의 자발적인 흥기를 도모하는 입장을 취했다. 학교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당시와 같은 관학은 찬성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관학을 대체할 학제의 마련에는 미치지 못하였는데 이를 대신한 것이 사우지도의 확립이었다. 사우지도란 학문을 매개로 한 사제관계 형성 곧 학파의 형성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수수관계가 아니라 도덕과 인격의 상존관계였다. 이러한 면에서 사제간의 의리는 대단히 중시되고 스승에 대한 존봉과 사설의 계승·천명은 당연한 의무로 인식되고 있었다. 조광조 계는 이와 같은 사우지도를 부활시키고자 하였다. 이 역시 서원을 출현시키게 하는 단초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조광조 계의 교학진흥책은 기묘사화로 시련을 맞았다. 그러나 이후 정사습의 논리는 부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김안로·윤원형 등의 권신을 제거하는 명분으로 활용될 정도였다. 정사습은 이후 교학진흥책의 논리적 근거가 되었으며 사우·서원 등의 출현 기반이 될 수 있었다.3. 문묘종사 논쟁전술하였듯이 조선의 사회 전반에 깔려있었던 이념은 성리학이었다. 그리고 성리학은 어진마음을 가지기 위한 실천적 방법론이 중요하였으며 그 방법으로 이용한 것이 체계적 교육을 통한 심성의 교화였다. 이를 위해서는 앞선 현인들의 행위를 추종하는 것이 필요하였고, 여기에 그러한 현인의 가르침을 받고 수학하는 것이 성리학적 정통성을 입증할 수 있에서 문묘는 정치적 당위성을 입증하는 주요 장소였다. 또한 문묘를 바탕으로 한 서원의 존현처로서의 기능은 해당 서원의 위상을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그로 인하여 사림 집권이후에 그들의 정치적 위상을 드높일 수 있는 선현의 문묘종사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문묘가 처음 설치 된 것은 신라 성덕왕 16년(717년)인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이때 “당나라에 갔던 수충이 돌아와 문선왕·10철·72제자의 화상을 바치므로 대학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에 중국의 성현과 함께 우리 나라 선현을 문묘에 종사하기 시작하였다.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세종 때부터 우리나라 선현을 종사하자는 의견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때 문묘 종사의 대상자로 많이 언급된 사람은 권근이었고, 이제현과 이색도 여러 차례 거론됐다. 하지만 중종 12년 조관조 등 사림파의 뜻대로 정몽주가 처음으로 문묘에 종사됐다. 조선 유학자들의 사표가 된 권근에서 정몽주로 바뀐 셈인데, 이는 업적보다 도덕이 더 중요한 가치로 떠올랐음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자신들의 이상적인 가치를 정몽주의 권위에 의지해 정당화 하려는 사림파의 집요한 노력이 있었다.광해군 2년에는 5현으로 불리는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을 함께 종사했다. 이는 사림 세력이 추구한 도학적 가치의 완전한 승리를 뜻한다. 김굉필과 정여창은 도학을 일상생활에서 몸소 실천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도학적 가치를 내면화하고 도학적 습속을 온몸에 새겨 넣은, 도학의 이상적인 인간형이었다. 조광조는 도학적 가치를 실천하려다 실패했지만, 그의 실천과 희생은 후대의 도학자들의 의식 속에 계승해야 할 유산으로 깊이 각인 됐다. 이언적과 이황은 도학의 이론을 주자학으로 확립한 이론가였다. 이 다섯 명의 문묘 종사는 약간의 이견이 없지 않았지만 선조 대 이래로 사림들의 공론이었다. 다만 조식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북인 계열로서는 도학의 흐름이 이언적과 이황 계열로 굳어지는 것이 못마땅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들은 이언.
<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결정 과정 >Ⅰ. 머리말Ⅱ. 한국전쟁 참전 직전 까지 중국의 대외관계Ⅲ. 공산당 지도부의 논의 과정Ⅳ. 毛澤東의 입장과 참전 결정Ⅴ. 맺음말김 승 욱Ⅰ. 머리말한국전쟁이 벌어지게 된 원인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일반적인 관점은, 소련과 미국의 냉전구도 형성이다. 소련은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국가로서 북한을 지원하고, 미국은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국가로서 남한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전쟁의 직접적인 당사국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에 대해서는 북한을 이념적인 동질성을 가지고 소련과 함께 중국을 도운 것으로 인식한다. 또한 그들의 군사전략은 ‘인해전술’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야만성을 지니는 이미지로 그려지기도 한다.하지만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은 단순히 원조라는 측면에서 무조건적인 물량 공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전쟁 시기의 중국은 국공내전 종결 이후에 국가를 새롭게 다시 재정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20세기 들어 지속적인 내전과 중일전쟁 등으로 중국 대륙은 빈사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일반적인 상식 수준에서 중국이 다시금 전쟁에 참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단순하게 이념적 동지로서의 책임감을 수행한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것이다.중국은 내부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외부적으로도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상황이었다. 공식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기는 하였으나, 국민당 잔존세력은 완전히 소탕되지 않은 상태였다. 국민당 대부분의 주력은 臺灣으로 도피해있는 상황이었고, 이들은 미국의 간접적인 보호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로 인하여 중국 공산당의 통일 과업은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소련을 포함한 공산주의 국가들을 우방에 두는 대외정책이 추진되어야만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참전을 결정하였다. 이는 중국이 희생을 치루더라도, 반드시 참전하여 그 희생보다도 더 큰 것을 지켜야 한다는 대전제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가정해 볼 수 있다. 오랜 전란으로방문하였다. 이 방문에서 毛澤東은 과거 국민당 정부와 소련 간에 체결되어 중국의 이익에 위해요소로 작용했던 ‘중·소 우호동맹’을 개정함과 동시에, 양국 간 상호 협력을 위한 각종 협상들을 진행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협상은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스탈린은 협상을 통해서 중·소 우호동맹이 개정될 시에는 소련이 현재까지 가지고 있던 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기득권을 상실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주를 소련이 장악함으로써, 동아시아 지역의 공산국가들을 통제권 하에 둘 수 있었다. 또한 자유진영의 진출을 억제할 수 있었고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도 되었기 때문에 만주지역의 중요성은 매우 컸던 것이다. 하지만 이 기득권은 중국에게 있어서 큰 안보적 장애요소였다. 소련의 도움이 절실한 것은 현실이지만, 동북지역이 안정화 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국가 안보가 위태롭다는 사실을 중국은 역사적인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毛澤東-스탈린 회담 동안의 분위기는 “자극적이면서도 모호한” 것이었다. “두 지도자들은 신경을 항상 곤두세운 채 상대방의 극히 단순한 발언에도 숨은 뜻은 없는지 함정은 없는지 예의주시 하였다.” 스탈린의 통역관 니콜라이 페데렌코(Nikolai Federenko)는 “폭발물이 내 머리 위에 매달려 있는 것을 실제로 느낄 수 있는 정도였다”고 회상하였다. 양국 정상간의 회담은 교착상태에 머무르게 되었고, 급기야 毛澤東은 이듬해인 1950년 새해를 소련에서 보내게 되었다. 당시 毛澤東의 통역으로 모스크바에 동행한 師哲은 당시를 회상하며 “할 일이 별로 없었다. 따분한 노릇이었다. 우리는 적들과 아무런 접촉도 하지 못했다.”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毛澤東은 소련 기관지 ≪프라우다≫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하는 일은 고작 자는 것 뿐이오.”, 또 “난 먹고 화장실 가는 일 말고는 다른 할 일이 없소.”라고 말하며 만약 그들이 자신을 계속 이런 식으로 대한다면 짐을 싸서 다음날 아침 베이징으로 돌아가겠다고 까지 말했다. 또한 1950년 1월 2일, 소련의 제안을 거절 할 수 없었다. 전술했던 바와 같이, 중국의 대소일변도 정책은 국가의 중심 되는 정책적 방향이었기 때문이다.게다가 중국으로서는 항일 투쟁시기부터 맺어온 북한 조선 노동당 핵심인사들과의 관계는, 북한의 계획을 단순히 무시할 수 있는 정도의 관계가 아니었다. 북한의 주요 간부들뿐 만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 내부의 인민해방군에는 항일 전쟁 시기부터 함께 싸워온 조선족 출신 군인들이 많이 있었다. 1945년 항일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시작된 국공내전에서 조선인 부대가 활약하고, 前중국공산당원이 중심이 된 북한 정부도 이 내전을 도와 일체가 되어 싸운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들을 ‘피를 나눈 형제’처럼 여겼고 이념에 입각한 동포주의적인 친근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9년 4월 28일 부터 4월 30일 까지 金一 북한군 정치총국장의 중국 방문에서 毛澤東과 나눈 회담은 이러한 양국 간의 우호관계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의 남침이 가시화 될 경우, 중국은 또 다른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이었다. 국가 내부에 산재해 있는 문제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에, 이념적 동지이자 투쟁을 함께했던 동지인 북한의 전쟁에도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즉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중국은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주의 세계에서의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이었다.Ⅲ. 공산당 지도부의 논의 과정중국은 건국 직후 경제와 정치 등 국가 전체적으로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당시 중국 공산당 지도층 내부에서는 대략적으로 두 가지 대립되는 의견이 충돌했다고 알려져 있다. 첫째 의견은 경제회복도 중요하지만 먼저 군사적 승리를 마무리 짓는 것이 더 시급한 과제라고 지적하면서 승리의 세를 몰아 붙여 臺灣과 티벳의 점령을 끝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둘째 의견은 일단 국부군의 주력이 臺灣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본토 일부가 군사적으로 미평정의 상태이긴 해도 그렇게 많은 병력이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경제재건 없이는 완전한 것이다.”라고 말하여 미군에게 참전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는 곧 미군의 북진은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압록강을 넘어 중국 동북지역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고 판단에 근거한 행동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동북지역은 중국을 지탱해주는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밀집해있던 곳이었고, 더군다나 臺灣解放計劃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시점에서, 동북지역까지 위협받는 것은 이제 막 기반을 다져나가기 시작하는 중국에게 있어서 위협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해야 하는 것이었으나, 지도부측에서는 쉽사리 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에 전황이 북한에게 급격히 불리하게 전개되자 북한은 10월1일 박헌영을 중국으로 보내 毛澤東에게 병력지원을 요청하였다. 毛澤東은 10월 4일 당정치국확대회의를 소집하여 한국전쟁 참전에 관한 결정을 내리고자 하였다. ?榮臻, 周恩來처럼 강력하게 중국의 참전을 고려하자는 지도자들도 있었지만, 당시 高崗, 林彪 등을 포함한 중국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참전에 대하여 다소 애매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주된 참전 반대파였던 高崗은 “우리국가는 이미 20년간의 전쟁을 치루었다. 지금 막 통일이 되어 아직도 원기가 회복되지 않고 있다. 또 싸운다면 경제적인 부담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이제 정권을 손에 쥐어 상처를 아물게 해야 한다. … 미국의 1개 군이 각종 화포 1500문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해 중국은 200문도 안되며 탱크는 더 작다. … 나는 아직도 동북변방을 강화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 미국은 원자탄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의 경제가 발전되고 부대의 무기장비가 개선되면, 특히 우리의 해군과 공군이 튼튼할 때, 그때가서 다시 싸우는 것이 아마 더욱 확실할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周恩來는 “어떻게 방어한다는 것인가? 적극적인 공격이 가장 좋은 방어이다. 압록강의 1000리 방어선은 얼마나 많은 부대를 필요로 하는가? … 기왕 언젠가는 싸워야 한다면 일찍 싸우는 것이 毛澤東은 10월 3일 스탈린에게 다음과 답신을 곧바로 보냈다.50년 10월1일자 귀하의 전보를 받았다. 우리는 적이 38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하는 시점에서 수개 사단을 북한으로 보낼 계획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검토 결과, 우리의 참전이 심각한 사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첫째, 몇 개의 사단만으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란 어렵다.(우리 군의 장비는 매우 빈약하며, 미군에 맞서 군사작전을 성공시킬 자신이 없다.) 적은 우리를 물리칠 것이다.둘째, 중국의 참전으로 미국과 중국의 전면적인 충돌을 가져올 공산이 크다. 그 결과 소련 또한 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 이런 형태의 문제는 극대화 된다.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많은 동지들은 이 문제에 대해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우리가 군사원조를 취소한다면 북한 동지들은 대단히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들 도한 이 사실을 알고 인내하기 어렵다.그러나 우리가 지원한 병력이 미국에게 패배한다면, 미국은 이를 빌미로 우리가 계획했던 평화건설의 꿈을 좌절시킬 것이다. … 대륙해방을 위해 오랜 기간 전쟁해온 중국 인민들에게는 평화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그러므로 지금 당장 북한에 병력을 지원하기보다는 우리의 전력을 보강하는 데 힘을 집중시키는 것이 좋다. 북한이 일시적으로 패배하겠지만, 빨치산 투쟁 등으로 전쟁형태를 변화시키면 될 것이다.우리는 당중앙위원회를 소집한다. 이 자리에는 중앙위원회의 여러 책임있는 동지들이 출석한다. 이 문제에 관한 최종적인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다. 이것은 다만 우리의 잠정적인 입장이며 앞으로 귀하와 구체적인 상의를 해나갈 생각이다.귀하가 동의한다면 이 문제를 협의하고 조중문제를 보고하기 위해 주은래와 임표 동지를 귀하의 휴가처로 파견할 용의가 있다.회답을 기다린다.1950년 10월 2일毛澤東사실 毛澤東은 한국전 참전에 대하여 高崗, 林彪 등 반대론자들과 비슷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전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중소다.
『동아시아史와 동아시아史 교육』학 과사학과학 번2003 87 023성 명김 승 욱제 출 일 자2008년 10월 10일Ⅰ. 머리말현재 대한민국 교육에서 추구하고 있는 궁극적인 목표는 ‘참된 민주 시민의 양성’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발전적인 형태로 성숙되어야 할 민주주의는 ‘인간존중·인간중심’이라는 대전제가 보편논리로서 작용한다. 이러한 논리는 단순히 일국차원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 차원에 적용되는 일종의 휴머니즘적 성격을 가진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 성장한 민주시민은 세계의 민주시민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한 측면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동아시아史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 까지 동아시아 역사는 끊임없는 지역간·민족간 상호작용에 의해 전개되어 왔다. 때로는 다양한 목적에 부합하여 상승효과를 가져오는 발전적인 관계로, 때로는 각국의 이해관계에 의한 극단적 대립관계가 형성되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고 인식된 역사이다.하지만 최근까지 우리가 인식하고 있었던 동아시아史는 막연함 그 자체였다. 각국 내부의 정치적 관계 혹은 대외관계에 의한 각기 다른 역사 해석은 역사 분쟁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동아시아의 긴장상황을 불러오는 원인 중 하나였다. 때문에 각국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했으며, 자국의 이익논리에 근거한 역사왜곡이 일반화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의 민주시민을 양성한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세계의 민주시민에게 요구되는 것은 획일화 되어있는 가치관에 따른 천편일률적인 인지나 인식이 아니다. 다양한 가치관과 관점을 통해서 기존에 알고 있던 관념체계를 넘어선 다양성의 인식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는 보다 넓은 범위를 아우르는 다름에 대한 이해이며, 다름에 대한 이해와 존중은 진정한 민주시민이 되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빠르게 변화하는 소위 ‘세계화’ 시대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떠한 가치보다도 인간의 존엄성이 우선시 인과관계 분석에 치우치게 된다면, 또한 그러한 분석이 정당화 되는 교육이 지속된다면, 어느 누구도 타자에 대한 존중과 이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아시아史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자국의 번영에서 더 나아가 동아시아 세계의 진정한 번영으로 나아가는 밑거름이 될 수 있는 단초적인 작업이다.동아시아에 대한 혹은 동아시아史에 대한 새로운 조명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는 화합과 분쟁의 시간들을 어떻게 더 객관적이고 각국의 형평성에 맞는 이해를 도출해 낼 것인가에 대한 일련의 노력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다름에 대한 이해와 존중의 방법을 이끌어 낼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인간존중을 최우선으로 하는 세계의 민주시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본 보고서의 목적은 이러한 가치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노력과 그 노력을 구체화 시킬 수 있는 동아시아 교육에 관련한 대안들을 살펴보는 것이다.Ⅱ. 동아시아 史 이해의 방법적 측면① 구체적 근거에 입각한 인과관계 분석감정이입적인 역사인식은, 동아시아 각국의 역사해석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극복되어야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예로 ‘침략’에 대한 피해국의 해석은 대부분, 침략에 의한 피해와 고통들만을 세밀하게 묘사 하여, 적개심을 키워내는 설명에 치우치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특정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을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그 사건의 인과관계 분석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역사적 교훈을 도외시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마련이다. 또한 역사적 사건의 결과에 대한 자기 성찰보다도 이타적 존재에 의한 일방적인 피해의식만을 남길 수밖에 없다.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가 필요하다. 이 근거는 1차적 사료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여타 과학적인 분석 자료가 토대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근거들을 종합하여 이해하여야 역사적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가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요시노 마코토는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생겨났던 국가들은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참여해서 중국 왕조와 관계를 증명하면서, 한편으로는 일본의 국력을 포장하는 기능을 하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일본이 타국을 침략했었다는 사실을 정당화 시킬 수 도 있는 증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정치적 의도를 포함한 역사인식은 왜곡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기 힘든 것이며, 자가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시노 마코토는 목조 미륵반가사유상의 출처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자연과학적인 증거를 통해서 불상의 재료를 파악함으로써, 이 불상이 일본에서 목조불상을 만들 때 활용했었던 목재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이에 앞서 견수사의 파견과 함께 신라의 역할을 언급하면서, 중국을 포함한 각국의 불교교류가 매우 활발했다고 말한다. 이는 일본의 불교 문화가 독자적으로 일본 문화의 우수성에 입각하여 성장하였던 것이 아니라, 다각적인 교류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또한 ‘신국 일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가미카제에 대한 요시노 마코토의 해석은 객관적인 역사인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자국 내에서의 권력투쟁에 의한 분쟁 이외에 특별한 물리적 압력을 느끼지 못했던 일본에서 가장 심각한 위협이 되었던 것이 바로 몽골의 내습이다. 유라시아 대륙을 걸쳐 정복에 정복을 거듭하여 그야말로 세계 대 제국을 건설하고 있었던 몽골의 팽창은 일본도 비켜갈 수 없었다. 하지만 일본은 그러한 몽골의 폭풍에 굴복하지 않았던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였다. 일본에서는 이를 가미카제와 함께한 일본 무사의 용맹성이 몽골의 침략을 막을 수 있었다고 이해하였다. 하지만 이를 당시 정황의 맥락을 통해서 보면, 반드시 일본의 강인함이 이를 막았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본원정 계획을 구상했던 쿠빌라이 칸은, 일본 원정에 앞서 그에 대한 교두보로서 고려를 공략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고려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저항이 완강했으며, 고려를 종속시키기 위해 많은 시간을 소비하였다. 고려를 종속시킨 후 고려로 하여금 일본침략을 위한 선박건과 더불어 편향된 역사인식으로 인한 역사 갈등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역사를 이해하는 본질은 보다 거시적인 측면에서 맥락적 이해를 바탕으로, 객관적인 근거에 기초한 인과관계 분석이 타당하다는 것이다.② 거시적 안목을 통한 총괄적 역사이해역사가가 적당한 개념 아래에 여러 개의 사건을 묶는 행위를 ‘총괄’이라고 한다.거시적인 안목을 가지고 총괄적인 역사이해를 한다는 것은, 특별히 조명되는 사건을 분석하는 데에 집중하여, 전체적인 흐름을 읽어내지 못하는 것을 보완해줄 수 있는 개념이다. 먼저 거시적이라는 것은 특정 국가, 특정 지역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원인이나 그에 미치는 결과를 단순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세계사적 관점에서 사건을 판단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 지역별로 따로 분리되어 인식하는 사건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모아야 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총괄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소위 본격적인 세계사라고 칭하고 있는 ‘근·현대사’의 이해는 거시적인 안목과, 총괄을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실제로 근·현대사에 대한 이해는, 단순한 일국적인 관점에서만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례로 ‘한·일 합방’이라는 사건은 단순히 일본과 조선만의 관계에 의해 발생된 결과가 아니다. 합방 이전의 러시아·영국·미국·프랑스 등 서구 열강세력과 기존의 청나라와 조선간의 조공관계 등이 한데 엮여서 발생한 사건인 것이다. 아편전쟁 역시 단순히 청과 영국간의 관계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서구 열강들의 자본주의 발달에 의한 판매시장 확보 욕구의 일환으로 발생한 사건이며, 아편전쟁 이후 청은 열강에 의해 나눠 먹기식의 조약체결로 인하여 영토가 분할점령 되는 결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 이외에도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과 같은 최근현대사에 가면 갈수록 이러한 거시적인 시각에 입각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두 전쟁은 유럽대륙에서의 세계대전 이후에, 국제적 질서로 대두된 이데올로기적 대립인 냉점은 동아시아史 속에 포함되는 한국의 역사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할 것이며, 접근 할 것인가에 대한 측면일 것이다. 이는 내용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부분이다.한국사의 내용과 동아시아史의 내용을 연관성 있게 구성하기 위해서는 특정사건에 관계되어 있는 여러 국가들의 입장을 서술하는 데 있어서 어느 입장에 무게중심을 둘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구성의 일관성을 생각하여 한국사에 비중을 두면 세계사 내용이 형식적으로 밀려나게 되고, 세계사에 힘을 주다 보면 한국사 내용의 내적 연결성이 떨어지게 된다는 점은 동아시아史를 보는 사관을 딜레마에 빠지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균형 잡힌 역사서술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올바른 동아시아史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할 때,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유념해야할 대전제일 것이다. 이는 형평성의 측면에서 민주시민을 육성시킨다는 교육의 대전제에 점진적으로 접근하는 노력의 일환이 될 수 있다.동아시아史를 보는 관점은 적극적인 자기성찰에 의한 상대화 시각에 그 초점을 맞추는 것이 딜레마에 대한 대안 중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상대화 시각은 자국?자민족 중심의 시각이 팽배한 동아시아에서 가장 필요 하고 중요한 시각이다. 이는 종래 당연한 존재로 받아들여지던 국가와 민족도 상대화 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상대화 시각에서 보면 동아시아라고 하는 공간은 지금까지 생각해온 국민국가의 틀에 한정되지 않은 다양한 지역과 사람들에 의해 구성되는 다원적이고 열린 공간으로 볼 수 있다.여기서 우리는 상대화라고 하는 것이 절대적 근거를 가진 진리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지나친 상대화는 일방적인 침략이나 경제적 침탈을 정당화 시키는 논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상대화 시각이란 비교의 방법이 우열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차이의 발견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근대 서구유럽적사고가 만들어낸 문명/야만, 선진/후진, 우승/열패, 전통/근대 등의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