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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경국민정부
    남경국민정부의 성립과 성격Ⅰ.서론Ⅱ. 남경 국민정부의 성립1.寧漢分裂2.寧漢合作3.將介石의 복직 및 장 ? 합작4.北伐完成 및 統一Ⅲ.정치적 성격1. 國民黨의 성격2. 남경국민정부시기의 정치체제Ⅳ.군사적 성격Ⅴ.경제적 성격1.關稅(관세)2.綜合(종합세)3.公債(공채)4.通貨(통화)Ⅵ.사회?문화적 성격1.사회·문화적 측면2.교육적 측면Ⅶ.결론Ⅰ.서론제 1차 국공합작의 결과로 국민정부는 원세개 사후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로서 인정받았다. 하지만 국공합작으로 국민당 내부의 분열이 발발하게 되었다. 특히 좌파 성향을 보인 왕조명에게 정권이 넘어가게 되면서 국민당 우파는 크게 반발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북벌과 천도 문제로 더욱 좌파와 우파간의 입장 차이는 더욱 커져가면서 결국 우파의 장개석이 별도로 국민당 정부를 건설하게 된다. 그러면 이번 과제를 통해서 남경 국민정부의 성립에 대해 알아보고 무한세력과 장개석 중심의 북경세력이 정치적 대립을 이루다가 결국 남경국민정부로 통합됨으로써 남경국민정부가 중앙정부로 들어서는 단계에서부터 실질적인 중앙 집권적 중앙정부의 건설과 장개석의 군사적 정치적 우위권 확보를 위하여 반장개석 군사집단에 의한 대규모의 내전을 수습하고 훈정체제를 확립하는 과정까지의 구체적 상황을 전반적으로 재구성해보겠다. 또한 이러한 남경국민정부의 경제 ? 사회적 등의 성격을 알아보도록 하겠다.Ⅱ. 남경 국민정부의 성립1. 寧漢分裂(영한분열) (두 개의 국민 정부)손문의 사후 국민정부는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와 우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무한(武漢) 국민 정부의 권한이 좌파인 왕조명(汪兆銘)에게 넘어가게 되고, 장개석은 중산함사건(中山艦事件))을 계기로 당무정리안을 제출하여 공산당 당원의 당 요직 사퇴를 요구했고, 이를 통해 공산당을 견제할 수 있었다. 북벌이 시작되면서 정부 천도문제로 국민당저부의 좌우파가 대립, 좌파는 1927년 2월 무한(武漢)으로 정부를 옮겼다. 이에 1927년 4월 국민당 혁명군 총사령관 장개석은 상해를 점령하는 4.12쿠데타를 단절되면서 재정적 위기가 왔고, 농민·노동운동이 계속 고양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국민당 좌파들도 반감이 생기게 되고 무한내부의 지방 군인들도 반공적 태도를 취했다. 이런 상황에 5월 13일 호북에서 하두인(夏斗寅)의 난과 21일 허극상이 일으킨 마일사변으로 보로딘 중심의 중국공산당은 농민들의 과화(過火)라 하였으나 양보정책을 관철시키려 했으나 왕조명 중심의 좌파는 중국공산당과 결별하였고 마옥상은 평화 통일 하여 공동 북벌을 주장하였다.남경정부의 호한민은 중앙정치회의 이름으로 서산회의파를 타도 구호를 취소하고 반공을 주장하다 당적을 취소당한 임삼 등 18명의 당적도 회복되어 남경과 상해가 통일되어 가는 분위기가 성숙되었다.이런 분위기가 조성되자 장개석은 8월13일 하야하고 16일 혁명군 총 사령관 직도 사직한 다고 통고하였다. 이렇게 되자 남경의 실세는 이종인과 백종희가 장악하게 되었으며 영한합작의 명분이 되었다. 19일 무한에서는 중앙확대회의를 소집하고 즉일로 국민정부를 남경으로 옮긴다고 결의하였다. 서산회의파는 왕정위도 인책하여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9월 13일 왕정위도 물러났고 손과가 특별위원회를 조직하여 중앙의 직권을 대행하고자 건의했고 남경 측에서 찬성하였다. 15일 남경·무한 쌍방의 정권을 특별위원회에서 관리하기로 하고 중국국민당이 통일되었음을 선포하여 영한합작이 이루어졌다.3. 將介石의 복직 및 장·합작왕정위은 하야 이후 무한으로 돌아와 당생지(唐生智)와 계계(桂系)의 충돌이 일어나 당생지가 하야한다고 선포하였다. 그런데 왕정위은 이 전쟁이 일어나기 전날 이제침과 장발규의 요청으로 광주로 가서 국민당 중앙 집행위원회를 소집하였다. 그리고 그 곳에서 광주 국민정부를 성립시켜 다시 한 번 세력을 확장하려 했고, 11월 10일 상해로 온 장개석과 연합하여 계계를 제압하려 했다. 이제침은 11월 16일 상해로 가고 광주를 혼자 독식하려 한다고 비난하고 계계와 손잡고 반 왕조명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왕조명은 고립된 상황을 벗어당이다. 당원은 주로 근대식 교육을 받은 지식인, 군인이었다. 하지만 국민당의 편제를 살펴보면 군인이 대다수를 차지했고 지식인의 수는 적었으며, 발언권 또한 군인을 위주로 형성되었고, 지식인은 약한 편이었다. 확실히 국민당은 소수의 지식인 정당이라고 볼 수 있다.이러한 국민당의 성격을 논할 때 주의할 사항은 국민당 내부에 파벌적으로나 정책적으로 다양한 집단이 존재하였다는 점이다. 국민당은 결코 공산당처럼 하나의 바위 같은 정당이 아니었다. 정책적인 면에서 볼 때, 손문의 삼민주의는 좋게 표현하면 유연하고 나쁘게 표현하면 애매한 점이 있다. 따라서 해석상에 상당한 차이를 남기게 되었다. 이 때문에 1930년대 전반에는 훈정)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로 심각한 정치투쟁이 전개되었다. 경제 정책을 추진하는 세력만 보더라도 송자문(松子文))같은 자유주의자도 있지만, 30년대 통제 경제를 주장하는 자원위원회 집단도 나타났다. 또한 토지문제에 관해서도 지주의 입장에 서 있는 자와 감조(소작료 경감)를 주장하는 자, 그리고 토지 개혁을 단행하여 자작농을 창설하자고 주장하는 지정학회도 있었다. 군(軍)도 위에서 쓴 것과 같이 독자적인 발언권을 가졌다. 손문을 계승한 장개석은 독재자라기보다도 오히려 이러한 다양한 집단 위에 편승한 균형자라고 하는 편이 사실에 가까울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국민당의 성격을 보자면 중요 문제의 결정을 놓고 자주 충돌했던 다양한 집단의 모임이라고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2. 남경국민정부시기의 정치체제북벌 완성 후 성립된 남경국민정부는 이전의 북경정부와는 이념과 정책적 지향 면에서 확연히 구별되는 체제였다. 그러나 정부가 의당 담당해야 할 지방통치의 과제, 즉 중앙과 지방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어떠한 지방제도를 마련할 것인가는 이념이 아닌 현실의 문제였기에, 남경정부도 과거의 정부가 고심했던 지방행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 대한 원칙과 방향을 정해야 했다.일반적으로 남경정부의 정부형태 및 권력체제는 ‘훈정체제’로 요약된다. 그런데 헌정으로 이행하일과 지방의 자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으로 알 수 있다. 즉 집권과 분권의 모순이란 역사적 난제를 해결하고, 민국 이래 원세계의 독재와 군벌의 할거 같은 기형적 발전을 막기 위해서, 연방제가 아닌 단일제의 기초 위의 균권제 실행을 주장했던 것이다.Ⅳ.군사적 성격성립 당초 남경 국민정부는 군인색이 매우 밑은 정부였다. 4.12군사쿠데타를 결행한 장개석, 이종인, 백숭희 등의 장군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재원 조달에서도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공채인구의 강제할당 등 징발과 비슷한 행위가 보였다. 북경정부를 타도했을 때에도 1928년 봄에 재개된 북벌이라는 군사행동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다양한 정치세력을 흡수하는 가운데 노골적인 군인색은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정치에 대한 군부의 발언권은 절대적이었다.당초 군은 장개석 등의 제 1집단군(약 29만 명)에다 풍옥상(馮玉祥)의 하남군을 주체로 하는 제 2집단군(약 31만 명), 염석산의 산서군을 주체로 하는 제3집단군(약 15만 명), 이종인-백승인등의 광서군을 주체로 하는 제4집단군(약 24만 명)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 1집단군의 일부를 제외하고 대다수의 군대는 지방군이었다. 지방군에 대한 재정적인 배려도 필요했으므로 국민정부는 토지세를 중심으로 지방 정부 측의 세수를 보장한 국지획분(國地劃分) 정책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 통일의 실체를 위해 그리고 통치의 안정을 위해서는 군대의 중앙집권화가 불가피했다. 중앙정권를 장악한 장개석 등은 군대의 감축이나 지방배치 체계의 재편 등 모든 기회를 포착해서 군의 집권화를 추진하려 했으며, 거꾸로 지방군의 지도자들은 장개석파 이외의 국민당 파벌과도 연계하여 장개석의 중앙군-중앙정부에 강한 저항을 표시하게 되었다.Ⅴ.경제적 성격외채에 의존하려다 실패한 원세개 와는 달리 장개석의 남경국민정부는 정부 스스로 세수 증가에 전력을 경주(傾注)했다. 그것은 관세자주권의 회복과 관세 인상, 염세의 정리, 통일 소비세의 창설, 공채의 발행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관세-염세환율이 크게 오르내려 국내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국민정부는 1933년 3월에 칭량화폐(秤量貨幣)로써의 은냥(銀兩)을 철폐하고 1935년 11월 미-영의 지원을 받아 전반적인 폐제개혁을 실시했다. 그 결과 정부계 은행이 발행하는 ‘법폐(法幣)’라는 지폐로 중국의 통화는 통일이 되었고 정부계 은행의 법폐매입에 따라 외국환율로 안정되었다. 은화의 높은 환율과 은화유출에 따른 금융난으로 심각한 공황에 시달리던 중국 경제는 이 화폐개혁 이후 급속히 경기를 회복시켜 나가게 되었다.Ⅵ.사회?문화적 성격1.사회?문화적 측면남경국민정부의 파시즘 체제의 성립과 반장세력의 위협.장개석이 반장세력(反蔣勢力)과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황포군관학교 출신의 강력한 군사력과 더불어 절강재벌(浙江財閥)의 절대적 지지 덕분이었다. 절강재벌은 상해를 근거지로 정계와 재계에서 활약하는 절강 강서 출신의 대 브루지아 산업가 및 금융가로써 이들은 양무운동(洋務運動) 당시 관료자본 및 외국자본에 종속한 매판(買辦)에서 성장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제국주의와 유착되고 지주 및 고리대자본과도 불가분의 관계였으며 군장교의 출신은 대부분 지주 및 향신 들이었다. 결국 장개석 정권의 성격은 대 브루주아를 기반으로 한 반봉건적 지주세력이 무장을 한 군벌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남경정부는 군벌적 성격의 중앙에 위치한 것에 불과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개석 정권은 당시 통일과 독립이라는 민족주의의 거대한 조류속에 포함되어 기존의 정객 및 군벌들이 가지지 못한 자산을 계승할 수 있었다. 민족주의는 피억압민의 해방과 근대국가의 창출이라는 두 가지 성격의 교칙을 가지고 있다. 장개석은 피억압민의 해방을 단절하고 근대국가의 창출을 우선시 하였으며 그에 따른 정책을 실행하였다. 대외적으로 관세자주권 철폐와 영사재판권 및 불평등 조약을 폐기하고 대내적으로 도량형 통일 및 교육을 장려하는 정책을 실행하였다. 하지만 장개석 정권의 특성상 이러한 정책은 서구 열강과의 타협 및 유착 그리고 지주와 향신하였다.
    인문/어학| 2012.12.26| 9페이지| 1,500원| 조회(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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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벌통치,호법운동,연성자치
    군벌통치?호법운동?연성자치< 目次 >1. 머리말2. 군벌(軍閥)통치1) 형성배경2) 군벌통치의 전개3) 지역군벌의 할거3. 군벌간의 항쟁1) 호법운동(護法運動)4. 군벌통치의 기본구조1) 경제적 기반2) 군벌과 제국주의3) 대민관계5. 반(反)군벌운동1) 연성자치운동(聯省自治運動)6. 맺음말1. 머리말군벌은 중국의 반식민지? 반봉건사회에서 강화된 지방분권적 상황과 정통적 권위를 갖는 강력한 중앙권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사적 무장력을 기반으로 중앙과 지방의 일정 지역을 제국주의의 경제?군사적 지원을 받거나 민중에 대한 수탈적 방법을 통해 그 지배를 실현하는 정치·군사집단이며, 이러한 체제를 군벌체제라고 한다. 군벌시기를 어떻게 획분할 것인가는 학자마다 군벌에 대한 성격규명이나 고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지역적 차이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원세개 사후 북경정부가 군벌 및 이와 결탁한 관료집단에 의해 무단적으로 장악되어 본격적인 군벌분할통치가 시작되는 1916년부터, 이것이 국민혁명의 과정에서 일차적으로 타도되고 새로운 재편이 이루어지는 1928년 북벌완성까지를 군벌시기로 규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본고에서는 군벌의 기원과 그 집단이 정치 세력화하는 형성배경을 살펴보고, 전개과정과 이러한 군벌들간의 항쟁 및 군벌통치의 기본골격과 마지막으로 이에 반하는 연성자치운동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2. 군벌(軍閥)통치1) 형성배경먼저 군벌이란 군사조직 외부나 다른 세력에게 지배를 받지 않는 조직을 의미하는 것으로, 청말 백련교난, 농민반란, 중·영전쟁 그리고 태평천국운동을 거치면서 구식군대로는 더 이상 청조지배체제를 지탱할 수 없음이 판명된다. 태평천국운동 때 창설된 증국번의 상군과 이홍장의 회군은 상당한 전과를 올리고 결과적으로 중앙 정규군대 외에 사속적인 지방 차원의 무장력을 허용하는 계기가 되었다.청일전쟁의 패배로 청조는 회군같이 지연적 통속관계에 의해 조직된 자위군이 아닌 정부차원에서 신식 군대의 재무장의 필요성을 느끼고, 제일 먼저 정무군과 자강군을 편련하였다은 중앙 집권화의 반발력이 축적된 각 성의 독립선포라는 형태로 표현되었다. 결국 제제의 취소와 원세개의 죽음은 바로 절대권력의 공동화를 초래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각 지방의 분권적 경향은 더욱 증폭되고 그 극단적인 형태인 군벌할거체제로 이어진다.서남군벌은 신해혁명 이후 점차 군벌로 전화하였으니 상당수가 혁명에 참여하거나 반 원세개 투쟁에 가담했던 것이 특징이다. 운남의 당계요, 사천의 웅극무, 광동의 진형명, 광서의 육영정 등은 북양군벌과 일정 대립하면서 반 원세개의 기치하에 자기영역의 확대를 꾀하였고, 단기서 정권의 무력통일정책에 대해서도 대항형식을 취하고 호법운동에서도 손문의 광동군정부와 모종의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다.2) 군벌통치의 전개1916년 원세개가 죽자, 그의 적계부대는 직예파)와 안휘파)로 크게 나뉘어져 각파 군벌간의 대립갈등이 시작되었다. 원세개 집권 당시 육군총장을 역임한 단기서와 직예도독을 역임한 풍국장이 원세개 사후 각각 국무총리와 부총통을 계임하면서 북경정부의 찬탈과 그를 둘러싼 대립이 표면화되었다.‘부원의 쟁’으로 여원홍과 단기서의 대립이 첨예화되고, 여원홍에 의해 파면되었던 단기서는 장훈의 ‘복벽사건’)으로 총리로 복귀하면서 권력의 재탈환에 성공하였다. 단기서는 본격적으로 집권강화에 주력하여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제공받아 이를 재정적 기반으로 하여 남방에 대한 무력통일정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새로이 국회를 만들기 위해 총선을 실시하였는데 매수와 각종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여 안복구락부가 거의 대부분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이를 신국회 또는 안복국회라고 하는데 이때부터 손문을 위시한 남방 혁명세력은 신국회의 비정통성을 지적하고 진정한 법통 옹호를 자임하는 ‘호법’ 투쟁을 전개하여 임시약법과 구국회 회복을 줄기차게 요구하게 된다.당시 북방에서 단기서 군벌정권에 대한 가장 유력한 대항세력은 풍국장 이하 장강삼독을 위시한 직예파 세력이었고, 이들은 단기서의 대남방 무력토벌정책을 반대하고 화평해결을 주장하였다. 1918년 11월에 남북의 정고, 봉천파는 일본의 후원을 받고 있었는데, 또다시 이 직?봉 양파벌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전국적인 판도에서 직예파와 그에 대항하는 안휘?봉천파 그리고 손문의 연합세력인 반직삼각동맹의 대치국면이 형성되었다. 1922년 4월 제1차 직·봉전쟁에서 직예파가 승리하고 봉천파는 산해관 밖으로 후퇴, 동삼성에서 자치를 선포하였다.제1차 직봉전쟁에서 승리한 직예파는 이제 북경중앙정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권력의 정초작업에 착수하였다. 직예파 내부에서의 조곤과 오패부의 갈등과 조곤이 여원홍을 몰아내는 제1차 북경정변, 부패선거에 의해 총통 직위에 오른 사건 등으로 전국적인 규탄운동과 함께 손문을 중심으로 한 남방혁명세력도 이제 ‘호법적’ 지향에서 ‘혁명적’ 지향으로의 전환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국적인 반직예파 운동이 전개되고 손문? 노영상? 장작림의 반직삼각동맹이 형성되는 가운데 급기야 1924년 강절전쟁과 제2차 직·봉전쟁 시작된다. 전쟁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직예파 장군 풍옥상과 호경익 등은 오패부의 제압에 대한 불만과 ‘반직적’인 혁명정세에 영향을 받아 전선에서 이탈하고 북경정변을 일으켰다. 마침내 1926년 7월 광동국민정부의 국민혁명군은 북벌을 개시하여 직예파 군벌을 패퇴시키고 이제 마지막 남은 봉천파를 패퇴시켜 붕괴되고 마침내 북양군벌의 통치는 종언을 고하였다.3) 지역군벌의 할거정권군벌이 북경정부 장악을 둘러싸고 서로 패권을 다툴 때에 남방에서는 각 성에서 자기의 반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면서 일시적으로 광동군정부에 참여하거나 북양군벌의 특정 정파와 동맹하면서 지배력을 행사하던 군벌이 있었다. 이들을 지역군벌이라 지칭한다.먼저 운남군벌은 당계요가 수뇌이며, 신해혁명 이후에 출현하여 원세개 제제 반대운동기에 형성되었다. 북벌완성 직전에 부하들의 ‘병간’에 의해 해산된다. 다음으로 광서군벌은 육영정이 수뇌로 1915년 채악? 잠춘원의 호국운동에 호응하면서 원의 제제운동에 반대 하는 광서독립을 선언하고 나아가 무위군을 조직, 호남에 진격하여 탕항사후부터 1920년대 초에 걸쳐서 여러 독군이 교체되고 북양 객군에 대한 토착군벌들의 끊임없는 저항으로 점철되었다. 이들은 대체로 1910년대 후반기부터 1920년대 초에 이르는 호법운동시기를 통해서 손문의 광주군정부와 일시적으로 연합하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손문의 북벌사업에 장애 내지는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다.3. 군벌간의 항쟁1) 호법운동(護法運動)북양군벌의 안휘파 영수인 단기서는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여 원세개가 제정한 신약법을 그대로 답습하려 하였다. 신약법은 ‘모든 권리를 대총통에게 집중시킨 것’으로 단기서는 여원홍만 조정하면 제멋대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손문은 이 같은 군벌들의 횡포를 염려한 나머지 대총통 여원홍에게 ‘구약법(임시헌법)을 회복하고 국회를 존중하며 국민의 공복으로서 국민과 함께 국가 건설에 헌신해야 한다.’는 요지의 전보를 보내고 구약법의 회복을 선언하였다. 1917년 손문은 서남지역의 군벌들과 함께 광동에 정부군을 세우고(제1차 광동군정부) 법통을 옹호한다는 호법운동을 개시했다.군 정부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서남군벌들은 호법운동과 북벌을 주장하는 손문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1918년 7월 대원수제를 폐지하고 총재제로 바꾸어 손문의 지위를 7인의 총재 중 하나로 격하시켰다. 또한 부원수인 육영정과 당계요는 각각 광동과 운남에 자신들의 기반을 만드는데 주력하였고, 구 국민당계 인물인 잠춘선 마저도 손문의 정치적 지위를 빼앗으려 했다. 이에 1918년 손문은 군 정부를 떠났다. 이로써 사실상 호법정부가 붕괴되었으며, 호법운동 역시 실패하게 된다. 5·4 운동 당시 상해에서 대중운동의 역량을 목격한 손문은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으로 개편했다.(1919) 1920년 진형명이 광동에서 광서군벌을 몰아내고 손문을 초빙하자 광동으로 돌아가 이듬해 다시 제2차 광동군 정부를 세우고 일부 옛 국회의원들에 의해 비상대총통에 선출되었다 손문은 다시 호법의 가치를 내세우고 제1차 직,봉 전쟁에 대응해 북벌을 시도하고자 했으나 손문의 북지방군벌집단에 의한 분권적인 경향이 극대화한 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군벌의 계급적인 기반은 기본적으로 지주와 자본가(상공계층)에 두고 있다. 이들의 토지점유의 방법은 주로 정치적? 군사적 권력에 의지하여 폭력적 수단을 통해 약탈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재정조달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 경상수입원으로 전부가 있는데 그 징수에서 예징)이 보편적으로 실시(2) 부과세와 잡세, 통과세(3) 아편재배경영(4) 화폐발행 - 인플레이션(5) 중앙 및 성 정부는 공채에 의존 - 대부분 은행에서 소화(6) 외국으로부터의 차관2) 군벌과 제국주의군벌의 혼전과 북경정부의 약체성으로 인하여 항상 외국의 압력과 세력잠식의 여지를 제공했고, 역으로 각 군벌정권은 이 열강의 경제적?군사적 후원을 업고 자신의 세력 확장을 도모하고자 했다. 따라서 군벌과 제국주의의 유착은 군벌통치를 지탱하는 하나의 중요한 축이자 군벌의 매판적 성격을 보여주는 측면으로서 파악할 수 있다.먼저 일본에서는 막대한 차관과 무기원조를 받는다.(단기서), 장작림의 만주에서의 안정된 세력 확립을 직? 간접으로 지원하기도 하였다. 영국과 미국은 직예파의 북경정부를 지원했으며, 이로부터 많은 자금을 받게 된다.(오패부) 소련은 풍옥상의 국민군에 대해서 무기제공과 교관 및 고문단 파견 등의 지원을 하였다.3) 대민관계군벌의 주력을 구성하는 일반병은 대부분 빈농이나 도시 유이민 또는 귀순한 토비 출신으로 대부분 교육을 받지 못한 문맹자이며 급료수준도 극히 열악하였다. 군대의 충원방법에 있어서는 급료를 목적으로 자발적으로 입대하는 경우나 강제적 수단에 의해 편입된 경우가 있는데 전자가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한편 실업농민이 토비화 되었다가 이후 이들이 군벌군대로 흡수되거나, 패배한 군벌 병사가 승리한 타 군벌 부대에 편입되는 경우가 있다.농민들은 주둔군대가 필요로 하는 인부, 역축), 차량, 식량, 연료 등의 병차를 할당받거나 주둔군대가 직접 징발하였다. 현? 촌을 통다.
    인문/어학| 2012.12.26| 8페이지| 1,500원| 조회(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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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일전쟁의 전개과정과 그 의의
    항일전쟁의 전개과정과 그 의의목 차Ⅰ. 서론Ⅱ. 항일전쟁의 배경과 항일민족통일전선1. 항일전쟁의 배경과 대륙침략의 확대2. 중국의 항일민족통일전선Ⅲ. 항일전쟁의 발발과 전개1. 7.7 노구교사건과 제2차국공합작의 성립2. 중국침략에 대한 일본의 정책3. 중국의 항전체제Ⅳ. 항일전쟁시기의 중국 사회와 경제1. 민족공업의 발전과 농촌경제의 파괴2. 항일 근거지 건설과 정책Ⅴ. 세계대전으로의 확대와 전쟁의 승리1. 항일전쟁시기 국제관계2. 태평양전쟁과 항전의 승리Ⅵ. 결론Ⅰ. 서론신해혁명 이후 여러 차례 혁명의 결실로 국민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그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열강, 특히 일본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전 중국이 역량을 결집해 외세에 대항해도 부족한 상황에서 원세개 사후 각지의 군벌로 나뉘어 권력다툼과 자기세력 보존에 힘쓴 탓이었다. 1928년, 장개석에 의해 북벌이 완성된 이후에도 중국은 국공분열이나 반장전쟁 등으로 일치되지 않아 혼란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와중에 일본에 의해 만주사변이 발생하게 되고 이것이 14년 중일전쟁의 시작이 되었다.일찍이 조선을 병합한 일본은 독립운동의 배후지이자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막대한 자원과 시장을 제공할 만주와 몽고지역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이는 일본의 대륙진출정책과도 부합하는 것이며 서구열강의 압박에도 버텨낼 수 있는 교두보 확보로써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하지만 국민정부는 즉각적으로 일본의 침략에 체계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으며, 일본에 대해 전 방위적인 대응을 한 것은 2차 국공합작 이후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는 만주사변 당시 장개석이 내세웠던 선안내후양외(先安內後攘外)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미 몇 차례의 공산당의 토벌을 통해 거의 소멸 직전까지 몰았던 장개석으로서는 공산당 토벌과 같은 내부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겠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중국 공산당 역시 지난 1차 국공합작과는 달리 합작 후 10여 년간 국민당의 탄압 속에서 세력이 줄어들었으나 끈질기게 살아남았으며 항일전쟁은 중국 공산여 곳을 점령하여 요녕(遼寧), 길림(吉林)성의 대부분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만주사변이 일어난 후에 관동군 참모장 미야케 미쓰노리(三宅光治)는 만주에 독립 국가를 세워 통치하려는 방안을 수립하였다. 그리하여 ‘동북 4성과 몽골을 영역으로 삼아 청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를 수반으로 하는 중국정권을 세워 그 곳을 각 민족의 낙토가 되도록 하자’고 선전하였다. 그리고 만주국에 대한 기본원칙 세 가지를 수립하였는데 아래와 같다.① 만주·몽고를 완전히 중국 본토에서 이탈시킨다.② 한 번에 만주·몽고를 통일시킨다.③ 표면적으로는 중국인이 통치하게 하나 실제적인 것은 일본인의 수중에 있게한다.이렇게 세워진 만주의 괴뢰정권은 일본의 의도에 따라 독립을 선포하고 국민정부와의 관계를 끊었다. 그리고 1932년 1월 25일 부의를 집정으로, 정효서를 내각총리로 하는 정부를 수립하여 만주국(滿洲國)이라 국호를 정하고 연호를 대동(大同), 장춘(長春)을 수도로 정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꼭두각시였을 뿐 고문이나 주요 요직은 일본인이 장악하여 처리하였다.하지만 국민정부는 만주국을 반란기관으로 간주하고, 주중국일본공사인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에게 항의서를 제출하였다. 만주국이 정식으로 성립되자 국민정부는 1932년 3월 12일에 ‘일본군대가 불법적으로 동삼성을 점령하고 있는 기간에 중국정부는 그 곳의 모든 정치조직을 반란 기관으로 본다. 또한 일본정부의 변태적인 부속기관으로 인정하며 일체의 불법적인 행위를 승인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한편 만주국은 일본과 1932년 9월 15일에 일·만의정서를 체결하고 일본은 만주국을 정식 승인하였다.2) 대륙 침략의 확대일본은 괴뢰정권인 만주국을 수립하고 다시 열하로 침공하기 시작했다. 1933년 1월 1일 밤에 일본군은 중국군이 일본 헌병대에 수류탄을 투척하였다는 구실로 산해관을 침공하여 산해관과 임유현성을 함락하였다.3일 뒤 일본은 3로로 나누어 개로(開魯), 조양(朝陽), 능원(凌源)으로 진군하여 왔다. 열하성 주석 겸 제5군단의 총지휘인통일전선 주장도 살펴보면 표면적으로는 일치 항일하자는 통일전선의 주장인 것처럼 보이나, 실질적으로는 국민정부로부터의 초공을 면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이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기 위하여 민족 전체가 일어나 항일을 하자는 통일전선이 아니라 중국국민당의 타도, 즉 반장개석을 전제로 제기된 형태였기 때문에 그 한계점이 있다.1935년 7월에 열린 코민테른 제7차 대표대회에서 제기된 통일전선에 관한 내용은 ‘식민지와 반식민지 국가 안에서 공산당원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반제인민전선을 건립하는데 있으며, 중국은 반드시 소비에트 운동을 확대하여 홍군의 전투력을 공고히 하고 전중국에서 인민의 반제운동을 연결시키자’는 것이었다.이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기간에 중공 대표단은 「항일구국을 위한 전체동포에게 고하는 글」을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스탈린과 디미트로프에게 보내 코민테른의 동의를 얻었고 중화소비에트 중앙정부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이름으로 발표하였는데 이를 ‘8.1선언‘)이라고 한다.8.1선언은 ‘과거나 현재 각 당파 사이의 정치적 견해와 이익이 다르다 하더라도, 각계의 동포들 사이에 어떠한 의견 상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내전을 중지하고 일치 단결하여 항일하자’는 내용이 주이다.이 결의내용을 가지고 직접 중국에 온 임육영은 1935년 11월 중순, 섬서 북쪽에 도착하여 당 중앙과 모택동·주은래 등에게 전달하였다. 이에 따라 11월 28일에 모택동과 주덕은 중화 소비에트공화국 중앙정부와 혁명군사위원회의 주석 명의로 「항일구국선언」을 발표하였다. 12월 17일에 중공 중앙은 와요보(瓦窯堡)에서 소집된 정치국회의에서 항일구국운동을 분석하고 항일민족통일전선의 책략을 확정시켜 25일에 「군사 전략 문제에 관한 중앙의 결의」를 통과시켰다.Ⅲ. 항일전쟁의 발발과 전개1. 7.7 노구교사건과 제2차국공합작의 성립1)7.7 노구교 사건일본은 9.18 만주 사변을 일으킨 뒤 중국 침략을 확대하고자 국민경제의 군사화를 추진하여 대규모 침략전쟁을 준비하였다. 군비확장은가구에 우품경을 최고위원으로 하는 찰남자치정부를 수립하여 남쪽의 10개현을 통치하였으며 10월에는 진북자치정부를 세워 진북의 13개현을 통치하였다. 또한 1936년 성립된 내몽골정부의 기초 위에 내몽골자치정부를 수립하였다. 1939년 9월에는 이 세 자치정부를 통합하여 몽골연합자치정부로 고쳤다.일본은 북평과 천진을 점령한 다음 이 두 지방에 각각 지방치안유지회를 조직하였다. 1937년 9월에 북평, 천진의 유지회와 기동방공자치정부는 각각 대표를 파견하여 화북정권의 대표회를 조직하였다. 12월 14일에는 북평에서 한간 왕극민을 행정위원장으로한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성립시켰다. 임시정부에는 행정위원회, 의정위원회, 사법위원회가 있었으며 중앙집권제를 채택하여 각 성의 성장과 시장을 임명하였다.임시정부가 수립 후 각 지역의 유지회를 이곳에 흡수시켰다. 임시정부아래 하북, 산서, 산동, 사남의 4성 공서와 북경, 천진의 두 시 정부를 두었다. 그리고 일본은 임시정부에 고문단을 설치하여 모든 행정은 반드시 먼저 고문단의 동의를 받도록 하였기 때문에 한족의 임시정부는 화북지역에 있어서 완전한 일본의 괴뢰가 되었다.남경 점령 후 일본은 강소·절강·안휘 지역으로 점령구역을 확대하여 1938년 3월 28일에는 중화민국유신정부를 남경에 수립하였다. 앞의 3개 성과 남경, 상해 두 특별시를 두었으며 대권은 일본인 고문에게 있었다.유신정부를 수립한 일본의 신정부는 성명을 발표하여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국민정부를 절대 부인하며 일본과 밀접한 제휴관계를 갖는다고 하여 유신정부는 화중 지역의 일본 괴뢰정부가 되었다.일본은 점령지구에 괴뢰정권을 수립하는 것 외에 각종 단체를 조직하여 선전활동을 펼쳤다. 선전활동을 펼친 단체는 중일공영회, 일화친선단, 중일종교대동맹, 대승불교청년회, 선린여자협회, 애향부인회, 경노회, 독경회, 존공회 등 1~2백여개나 되었다. 이 중 비교적 큰 조직은 만주에서 조직한 협화회와 관내에 설치한 신민회, 동아문화협의회, 대민회 등이 있다.2)일본의 경제침략일본은 중국으로 할 것을 전제로 항전에 대한 당의 주도적 책임과 당의 독립성 문제를 강조하였다. 또 이 회의에서 「항전구국강령」을 통과시켰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①일본제국주의 타도, ②전국 군사의 총동원, ③전국 인민의 총동원, ④정치기구의 개혁, ⑤항일 외교정책, ⑥전시 재정 경제정책, ⑦인민 생활의 개선, ⑧항일의 교육정책,⑨한간·매국적·친일파의 숙청과 확고한 후방의 안정, ⑩항일민족단결9월 22일 중국공산당 중앙은 「함께 국난에 나아가자는 선언」을 발효하고 항전을 위하여 국민정부와 함께 한다는 뜻을 대외적으로 분명하게 하였다.2)중국국민당의 항전 체제중국국민당은 항일전쟁에 대한 당의 임무와 행동지침을 정하기 위하여 1938년 3월 29일부터 4월 1일까지 임시전국대표대회를 무창 무한대학에서 열었다. 이 대회에서는 당무, 정치, 군사, 경제, 교육 등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키고 네 가지 중요한 의안을 결의하였다. 「항전건국강령」은 항일전쟁시기 중국국민당 국민정부의 행동강령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①「항전건국강령」제정, ②장개석을 중국국민당 총재, 왕정위를 부총재로 추대, ③국방참의회를 폐지하고 국민참정회를 조직하여 전시 최고민의 기관으로 삼음, ④예비 당원제를폐지하고 삼민주의청년단을 조직중국국민당은 임시대표회의에서 국민참정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한 뒤 1938년 4월 12일 「국민참정회 조직조례」를 공포하였다. 국민참정회는 하나의 임시자문기구로서 각 당파가 모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고 각파의 정견을 공개적으로 발표할 수 있는 장소였으므로 항전과 민주운동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다. 국민참정회는 중국국민당에 의해 지배되었으나 후에 제헌국민대회의 소집과 헌법을 제정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였다.또한 국민정부는 전국의 우수한 청년을 같은 조직체에 넣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여 항전건국이 성공할 수 있도록 하며, 삼민주의를 실현시킨다는 명목 하에 1938년 7월 9일 장개석을 단장으로 삼민주의청년단을 조직하였다.그러나 점차 삼민주의청년단의 단원 하였다.
    인문/어학| 2012.12.26| 6페이지| 1,500원| 조회(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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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화민국의 출범과 원세개
    중화민국의 출범과 원세개-민국(民國) 초기의 정국(政局)-- 목차 -1. 서론2. 중화민국의 수립3. 2차혁명4. 원세개(遠世凱)의 독재와 제제(帝制)운동5. 3차혁명(반 제제 운동)6. 민국초기의 외교7. 결론1.서론1636년 건국 된 청(淸)조는 1840년 아편전쟁, 1894년 청·일전쟁으로 붕괴될 위기에 놓였다. 이를 타파하고자 1894년 손문(쑨원, 손중산)을 중심으로 한 혁명파들은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하여“반제제, 청조타도”라는 구호 아래 혁명을 준비하였다.이는 점차 확대되어 1905년 흥중회, 광복회, 화흥회 등이 모여‘중국동맹회’결성하였고 혁명노선에서 손문과 대립을 보였던 송교인은 1911년 상해에서 중국동맹회 중부총회를 결성하여 분파운동을 하였다.이렇게 준비되었던 혁명은 신해혁명을 정점으로 하여 중국 최초의 공화정이라 할 수 있는 중화민국(中華民國)의 탄생을 가져왔고 지금까지도 대륙과 대만에서 논점이 되고 있다.2.중화민국(中華民國)의 수립(1) 정당의 출현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1912년 1월1일 남경에 수립되어 대통령 중심제의 임시 초대 대총통으로 손문, 부총통으로 여원홍이올랐다. 정체(政體)로는 미국식 의회제도를 도입하여 참의원을 구성하고‘임시약법’을 제정하였다.그러나 손문는 자신의 정치가 오래 이어지기도 전에 정치에 야망이 컸던 청조의 내각총리 원세개에게 청의 마지막 황제를 퇴위시키는 조건으로 내각책임제의「임시 약법(臨時約法)」으로 개정하고 원세개에게 제2대 임시 대총통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런데 원세개는 친위 쿠테타인‘북경 정변’을 일으켜 이를 구실로 남경에 가서 취임하여야 할 약속도 지키지 않고 북경에 그대로 있었다.이에 당소의 내각은 남경에, 대총통은 북경에 있게 되어 행정 처리에 불편이 따랐다. 여기에 원세개는 내각책임제의 정치체제를 이해하지 못하여 내각과 자주 충돌하여 행정을 제대로 처리하기 어려웠다. 결국, 민국원년(1912년) 4월에 임시정부가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북이 통일된 명실상부한 중화연합하여 진보당을 조직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식으로 국회가 개원된 이후 국민당과 진보당의 대립 상황으로 되었다.(3) 임시 참의원 안의 정당 대립무창혁명 이후 각 성 대표단에서 의결한「중화민국임시정부 조직대강」에 의하면 임시 참의원을 설치하여 입법기관으로 삼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임시 참의원은 1912년 1월 18일에 남경에서 개막식을 갖게 되었는데, 참의원은 국민의 선거에 의하여 뽑은 것이 아니라 각 성에서 위임받아 파견된 인물들 이었다. 그리고 정부가 북경으로 천도함에 따라 임시 참의원도 북경으로 옮겨갔다.임시 참의원의 의원은 처음부터 참여하였던 사람도 있었으나 그때까지 각 성에서 파견하지 않았던 곳에도 의원을 파견하거나, 부족 되었던 인원을 새로이 추가로 파견하여 의원의 수가 126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의장에 오경렴, 탕화룡을 부의장으로 선출하였다.임시 참의원에서 하여야 할 일은 「국회 조직법」과「중의원의원 선거법」과「참의원의원 선거법」을 제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동맹회와 통일공화당이 연합하는 추세여서 이들이 거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민주당이 조직된 다음에 공화당이 통일당·민주당과 연합하여 국민당에 대항하였다. 국민당은 내각제로 정당내각을 주장한 반면, 공화당은 대총통제와 연립 내각제를 주장하였다. 또한 국민당은 점진적인 중앙 집권을 실행하도록 주장하였으나 공화당에서는 즉시 중앙 집권제를 실시하자고 주장하여 의견이 서로 상반되었다.이와 같은 의견 대립은 내각의 인선이나 의안의 토론에 있어서도 항상 있었다.당시 국민당은 비록 임시 참의원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완전하게 참의원을 지배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공화당은 원세개의 지지를 받고, 또한 일부의 국민당 당원은 반드시 당의 뜻에 따라 주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4) 당 내각의 와해와 책임 내각제의 실패중화민국의 초대 내각인 당소의 내각은 동맹회와 원세개의 상호 견제 속에서 어렵게 탄생되었다. 당시 혁명당에서는 원세개에게 대총통의 자리를 양보하면서 까지 내각 책임제의 임대리로 명단을 제출하였다. 명단은 내무에 조병균, 육군에 단기서, 해군에 유관웅, 재정에 주학회, 사법에 허세영, 교육에 범원영, 농림에 진진선, 공상에 장작빈, 교통에 주계검이었는데, 공상총상 장작빈만 부결되어 유규일로 바꾸어 다시 동의를 받아 내 육징상 내각이 합법적으로 탄생되었다.그러나 육징상은 병원에 입원하고 나오지 않아 그가 겸임으로 되었던 외교총장직을 양여호로 바꾸고, 조병균에게 총리직을 대리하게 하였다.내각 문제로 시국이 복잡하여 졌을 때, 무창혁명을 이끌었던 장진무가 원세개에 의하여 체포되어 처형되는 일이 일어나 사정은 더욱 복잡하여졌다. 이 때 상해에 있던 손문은 마침 북경에서 동맹회가 통일공화당 등 4개 정당이 합쳐 국민당을 조직하여 그 창립대회를 열게 되자 이에 맞추어 8월 24일에 북경으로 왔다. 26일 동안 북경에 있던 손문은 13차례에 걸쳐 원세개를 만나고, 특히 황흥을 북경으로 불러 원세개 임시 대총통과 여원홍 임시 부총통 사이에 시국 수습 방안을 협의 하였다.이에 따라 원세개는 조병균을 총리로 지명하여 조병균 내각이 성립되었다. 조병균은 함의대로 국민당에 입당하였으며 내각 안에 당파에 가입할 수 없는 육군, 해군총장을 제외하고 비 국민당 당원 출신 각료들은 물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국민당 당원으로 각료를 구성하여 이른바 정당 내각이 아닌 ‘내각 정당’이 나타나게 되었다.그러나 조병균은 북양군벌의 경찰 우두머리로 원세개의 직계였기 때문에 국무회의도 내각 독자적으로 하지 못하고 총통부에 가서 개회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민당의 정강, 정책을 지지하여 입당한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임시 약법이 제시하고 있는 내각 책임제의 정신은 완전히 상실되고 말았다.3. 제 2차혁명(1) 국회소집과 송교인(宋敎仁)의 죽음아시아의 최초 공화정 국가인 ‘중화민국’은 1911년 12월 3일 「중화민국임시정부 조직대강」을 공포하고 임시정부를 난징에 두기로 했다. 그리고 12월 25일 귀국한 손문을 임시대총통으로 선출함으로써, 1912년 1월 1일에 손문은 난징가를 사랑하지 않는 다는 명목으로 국민당의 군사세력이었던 강서, 광동, 안휘성 도독들을 해직시킴으로서 국민당의 군대 기반을 잃어버리게 하였다.이러한 정치적 흐름이 일어나는 사이 손문을 중심으로 상해에서 원세개를 무력으로 토벌하자는 두 번째 회의가 열렸고 토원군(討袁軍)총사령관에 오른 이열균을 중심으로 각 성(강서, 안휘, 강소, 호남, 광동, 복건, 사천)의 호응을 받아냄으로서 2차혁명이 시작되었다.국민당도 국민의 의견을 저 버린 원세개 정부를 비판하며 혁명에 참여하였고 신정부를 조지 하였다.그러나 원세개의 군대에 혁명군은 지속적으로 밀렸고 강소에서는 황흥이 남경에서 독립을 선포하고 스스로 총사령관에 올랐다. 이에 반대한 강소도독 정덕진에 의해 황흥은 세력을 잃고 일본으로 도주하였다.상해에서는 진기미(陳其美)가 상해토원군 총사령관에 취임하고 제조국(製造局) 본부를 공격하였으나 상민(常民)들이 지원해 주지 않아 작전이 실패하고 말았다.그 후 많은 성에서 독립을 꾀하고 혁명군이 일어났으나 성사되지 않거나 군대의 약화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2차혁명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국민당안의 분열과 미미한 국민들의 지지였다. 또한 재정의 부족이었다. 외국에게 차관을 들여 막대한 자금을 확보한 원세개와 달리 국민당은 재정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군사력에서 급격한 차이를 보였다. 마지막으로 외국 세력들은 이들의 2차 혁명을 정부에 반항하는 혁명이 아니라 실패한 정객들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일으킨 정변으로 보았다.(4) 백랑기의(白郞起義)2차혁명으로 각 성이 혼란스러웠을때 하남지방에서 백량이 중심이 되어 자발적 무장 반원 운동이 일어났다. 그 이유는 하남에는 원세개의 이종 동생 장진방이 초대 하남 도독으로 임명되었는데 횡포를 일삼았고 이에 반발하였기 때문이다.백랑은 신해혁명때 하남의 민군활동을 하였으며 2차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부유한 성을 공략하여 재물을 턴 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였다. 또한 원세개 정부에 반발하여 투쟁 하였기 때문에 2차혁명에도 영향을 끼쳤다.2차고 다시 추대를 받은 원세개는 총통부를 신화궁으로 고치고 다음해를 홍헌(洪憲) 원년(元年)으로 하기로 하였다. 이를 ‘홍헌체제(洪憲體制)’ 라 한다.5. 3차혁명(반 제제 운동)(1) 중화혁명당과 구사연구회원세개가 제제(帝制)운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을 때 반대세력 또한 점차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2차 혁명이 실패한 후 일본으로 간 손문은 실패원인을 분석하여 지도중심 확립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는 국민당의 정예들로 재 결집을 시도하여 스스로 입당서약을 만들었고 1913년 9월27일 동경에서 중화혁명상의 조직이 시작되었다.그 당시 입당서약서는 매우 엄격한 것으로 “중국을 위망에서 구하고 자신의 신명과 자유권리를 희생하며 민권, 민생주의를 달성하기 위하여 분투하겠다.”는 서약과 몇 가지 선서를 하게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왕통 등 다섯 사람이 입당에 서약하였으며 10월에 대계도, 진기미 등이 동경에서 입당하였고 장정강, 장중정이 상해에서 입당하였다. 1914년 5월에는 당의 선전을 확대하기 위하여 잡지‘민국’을 발간하였으며, 이를 활동의 중심기관으로 삼았다.그리하여 6월경 중화혁명당의 간부선거회를 열었고 손문을 총리로 추대하게 되었다.중화혁명당의 총부아래 18개성에 지부를 성립시켜 손문이 직접 각성에 지부장을 위임 하였으며 동시에 핵심당원을 해외로 파견하여 이들의 노력아래 39개 지부와 45개의 지분부를 성립시켜 당의 조직을 확대시켰다.중화장은 혁명실천의 강령으로 민권, 민생주의를 앞세웠으며 옛 동맹회의 정신을 답습하였다. 혁명의 과정을 군정, 훈정, 헌정의 단계로 나누고 헌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혁명시기라 칭하였다.봉건 독재정치를 반대하고 민주공화제를 유지, 보호하는 강령을 내세워 무력으로 원세개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1914년초 손문은 진기미와 대계도를 대련으로 파견하여 그곳에 연락기관을 설치하여 동북의 각성과 연락하여 원세개 토벌을 위한 군사를 집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원세개가 이들을 저지하기위하여 체포를 강력하게 지시하고 일본과 교섭하여 진기였다.
    인문/어학| 2012.12.26| 14페이지| 1,500원| 조회(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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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Ⅰ. 서론Ⅱ. 본론※주요인물 소개1. 신문화 운동1) 신문화 운동의 배경2) 백화문 운동과 문학혁명3) 사상적 혁신운동2. 5.4 운동1) 사상적 배경2) 정치 경제적 배경3) 5.4운동의 발발4) 5.4운동의 역사적 영향5) 5.4운동의 주요 의의3. 신문화 운동과 5.4운동1) 새로운 교육의 빠른 발전2) 문학 혁명 운동을 통한 새로운 민족 문화 창조3) 동서양 문화 교류에 따른 민족 문화 부흥의 필요성 자각4. 공산주의와 신문화Ⅲ. 결론Ⅰ. 서론91년 전 3월 1일, 위대한 한국 인민들이 이 자리에서 독립 건국의 깃발을 높이 들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대규모 항일 가두시위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바로 잘 알려진‘3.1운동’이었다. 3.1운동은 중국 인민, 특히 중국 청년들을 크게 고무시켰으며, 당시 중국 진보 언론의 열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두 달 후 파리강화회의 결과 중국 산둥(山東)의 주권이 일본 제국주의의 손에 강탈당하자 중국 인민들의 공분을 불러일으켰고, 베이징(北京)에서 ‘5.4운동’이 일어났다. 5.4운동은 전국 규모의 대중적 반일 투쟁이라는 점과 학생뿐만 아니라 상인이나 노동자, 일반 시민도 적극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중국 민족주의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되었고, 일반적으로 중국현대사의 출발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5.4운동은 중국 인민의 민족주의를 새로운 역사적 단계로 끌어올렸다고 할 수 있다.같은 맥락으로 5.4운동은 제 1차 세계 대전 전, 독일이 점유하고 있던 산동에서의 이권을 종전과 함께 일본이 차지하려는 데 대한 저항운동으로서의 배일(排日)운동이 친일 매국노의 타도와 파리강화조약 조인거부를 구체적 투쟁목표로 전개된 이 사건을 좁은 의미의 5.4운동이라는 데는 이론이 없다. 다만 5.4운동의 의의에 대한 범위와 이 사건을 전후한 각종 개혁운동과의 연관성 등에 대하여 다양한 관점이 있다. 특히 신문화 운동과 5.4운동의 관련성에서도 성격과 목표가 상이한 별개의 운동, 신중국 건설을 위한 근대화 운동, 신민주주의론 등 다양한토와 더불어 새로운 문화와 사상을 도입하는 데 있었다. 신문화운동이 일어날 당시의 중국사회는 비록 정치체제는 민주공화정 사회이었지만 실제로 국민들의 의식 상태는 봉건시대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 더군다나 신해혁명 후 원세개는 혁명의 과실을 앗아가고 이것도 부족하여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황제제도를 복벽시키어 자신이 중화제국의 황제로 행세하였다. 이러한 현실은 중국 민족에게는 역사를 거슬리는 큰 재난과도 같은 일대 사건이었으며 중국 사회는 미래의 희망도 꿈도 없는 암흑과도 같은 세상이 되어가는 듯하였다. 그리고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신해혁명 후에 원세개가 잠시 황제 행세를 한 것을 제외하고는 정치체제가 민주국가의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백성들 대부분이 민주국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모르고 있었다. 백성들은 민주국가가 무엇이며 또 자신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주권을 행사하는 일은 더더욱 모르는 상태에 놓여 있는 상황이었다. 즉, 근본적으로 민중들은 공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중국 사회를 건설하기위한 근본적인 방법은 민중 개개인이 자각하여 자신이 변혁의 주체가 되는 자아의 확립을 들었고 같은 맥락으로 신문화 운동은 사상적인 면에서의 사상해방운동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정신개조와 윤리혁명을 통하여 개인의 독립과 개성의 해방을 추구하였던 것이다.구체적으로 신문화운동의 선구자들은 신해혁명의 결과 중국에서 결코 진정한 민주정치가 건립되지 못함을 보고 대대적으로 민주사상을 고취하며 봉건전제정치를 반대하였는데, 그들의 주장은 첫째, 중국이 생존하려고 한다면 “관료전제적인 개인정치”를 버치고 “자유적이고 자치적인 국민정치”로 바꿔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둘째는 진정하게 민주정치를 실현하려면 반드시 전국 대다수 사람들의 정치에 대한 각성이 있어야 하며 자각해서 스스로 “주인이라는 주동적인 지위”에 있어야 한다. 또 과학에 대해서는 과학적인 태도를 갖고 전통 관념과 모든 사회 문제를 직면하자고 주장하고 그리고 미신적이고 종교적으로 전현동, 유반농과 같은 신지식인들로 인해 백화문은 실험단계에 들어갔고 이후 문학혁명이 제기되자 즉각적으로 북경대학 학생들의 지지를 얻었고, 그 다음 해부터 『신청년』잡지는 전부 백화문으로 발행하였다. 다른 신문과 잡지들도 따라하므로 백화문은 곧 관방(官方)언어로 통행되었다.이어서 학교에서도 백화문 교재를 채택하기 시작했고, 학생과 지식인들이 이 백화문으로 신사상을 전파하므로 신문화운동은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백화문운동은 신문학과 함께 학생들과 지식인들의 정치적인 도구로도 사용되어 정치와 혁명과도 얽히게 되었다. 따라서 이후에 전개되는 5.4운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3) 사상적 혁신운동신문화운동은 유교를 부정하고 민주주의와 과학적 정신에 입각한다는 것이고, 서구식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상적 혁신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주의의 옹호는 대의를 위한 전제체제를 타도하는 것이 그 주목적이었기 때문에 곧 좌익과 우익의 이데올로기에 압도되어 민족주의의 영향력을 발휘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문화운동 추진자들의 자강의 모색은 사회 진화론에 입각한 국가간 약육강식의 논리로 진행되었기에 당시 중국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근원을 인식할 수 없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다른 한편으로는 이 당시 확산되었던 무정부주의적인 요소를 배제할 수 없다. 이시기 무정부주의는 교육을 통해 개인의 도덕적 개조를 이룩하고 그를 기초로 사회혁명의 목표를 달성한다는 긍정적 측면이 강조되었다. 이렇게 무정부주의 영향으로 중국의 지식인이 육체노동에 대한 오랜 편견에서 벗어나 노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금욕주의와 공독주의 등 여러 이상주의가 결합되어 나타났다. 이러한 무정부주의적인 경향은 5.4 운동을 거치며 확충된, 지식인과 노동자의 결합을 전제로 한 사회혁명사조의 디딤돌있다고 할 수 있다.2. 5.4 운동1917년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당은 러시아 무산계급과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폭력으서 중국의 경제발전에 큰 장애가 되고 있었다. 다만 제 1차 세계대전 중 유럽 각국이 군수품생산에 전력하면서 중국은 수출입상품의 다양화와 국제수지 안정화, 민간자본주도의 근대산업부문의 비약적 발전을 이루어 중국산업자본의 ‘황금시대’를 열게 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과 일본세력이 본격적으로 중국에 진출하여 중국 민족산업의 성장을 저해하고, 단기서 정권을 지원하여 중국에 대한 경제적 독점을 추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중국 자산계급이 일본상품배척과 국산품애용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또한 민족산업의 성장으로 증가한 노동자들의 계급적 단결로서, 중화공업협회 등의 공계단체들이 실업구국의 목적으로서 5.4운동에 대표로서 참가하게 되었다.3) 5.4운동의 발발1918년 11월 17일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하여 1919년 전승국들은 파리에서 강화회의를 개최하였다. 중국도 이 회의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구 사항을 제기한다.첫째, 중국에서의 제국주의 특권 철폐, 둘째, 일본과 원세개가 체결한 「이십일조(二十一條)」불평등조약 폐기, 셋째, 전쟁기간 중 일본이 독일에게서 빼앗은 산동에 대한 특권 귀속 등이다. 중국은 이 회의에 기대와 환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공리(公理)’로써 ‘강권(强權)’에 이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중국의요구가 실현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그러나 파리강화회의에서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농간으로 앞선 두 가지 요구 사항은 아예 토론조차 되지 않았으며, 세 번째 요구 사항에 대해서는 일본이 1917년 북경 당국이 문서의 형태로 ‘기꺼이 동의’했음을 이유로 들어 단호하게 거절하는 등 횡포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의 손을 들어줌에 따라 산동에 대한 권리를 일본에게 이양한다는 등에 관한 내용이 독일과의 조약 가운데 포함되었다. 원세개가 이끄는 북양군벌 정권이 이 강화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중국인의 기대와 환상은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공리, 항구적 평화 등은 모두 입바른 소리에 그치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근대 민족주의로 점차 방향을 바꾸었다. 탁월한 계몽 사상가인 량치차오는 “민족주의란 세계에서 가장 공명정대하고 공평한 주의이다. 다른 민족이 자신을 침략하지 못하도록 하는 자유이며 스스로 역시 다른 민족을 침략하지 않는 자유이다.”라고 하면서, “오늘날 중국을 구하고자 한다면 다른 방법이 없다. 먼저 민족주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혁명당과 입헌파 나아가 주로 국내에서 활약하던 개명 관료층까지 모두 근대 민족국가 수립을 위하여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다. 5.4운동 이전까지 중국인의 민족주의는 수동적인 특징을 뚜렷하게 보였다. 하지만 침략과 압제가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민족의식이 비로소 되살아나면서 민족 자위(自衛)를 위한 행동이 시작되었다.1917년 독일과 오스트리아 양국에 대한 전쟁에 정식으로 참가하면서 중국은 국제 활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세계무대에서 민족자결권 쟁취를 위해 투쟁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소수 외국 정부가 당시 중국의 참전을 부추긴 측면이 있지만, 내부적으로 수많은 양식 있는 인사들이 노력한 결과 스스로 내린 결정이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 결정으로 중국은 전후(戰後) 파리강화화의에 참석할 수 있었고, 중국의 권익에 관련된 의제에 대해 중국인 스스로의 의견을 피력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게다가 이제 중국은 더 이상 예전처럼 열강의 의도에 휘둘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전승국으로서 중국은 전전(戰前) 독일 제국주의가 중국 산둥에서 강탈한 권리를 무조건적을 돌려받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과 궤변으로 사전에 다른 제국주의 국가에 접근한 결과, 과거 독일이 산둥에서 확보한 이권을 일본이 강탈했다. 중국 대표는 중국 민중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평화조약에 서명을 거부하여 향후 독립된 주권과 영토를 지키기 위한 투쟁을 위해 합법적인 공간을 확보하였다. 이는 중국 근대사상 전례 없는 승리였다. 이것이 바로 5.4운동으로 촉발된 중국인의 민족주의가 갖는 새였다.
    인문/어학| 2012.12.26| 15페이지| 1,500원| 조회(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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