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전통 사회와 문화 -신분의 상징, 복식문화(여성 복식의 유행과 사치에 대하여)○○과○○○한국 전통 사회와 문화 강의 시간에 이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된 조선 후기 사회의 복식 문화는, 그동안 내가 대중매체 등을 통해 보아왔던 조선 사회의 모습과는 매우 달랐다. 흔히 대중매체에서 조선은 매우 보수적이고, 여러 제약이 많은 사회로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강의를 들으며 알게 된 조선은 그렇지 않았다. 강의 시간에 새로이 알게 된 조선 사회는, 정확히 조선 후기 사회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상당히 개방적인 사회였다. 적어도 의복 문화에서는 그러했다. 조선 사회에도 유행이 존재했으며, 현대 사회와 마찬가지로 의복에 대한 사치 또한 사회적 문제가 되곤 했다. 현대 사회와 의복 형태만 다를 뿐, 의복이 가지는 사회적 기능이나 유행의 흐름 등은 지금과 다를 것이 없던 것이다.조선 후기 여성 복식의 유행은 어떤 흐름을 가지고 있었을까. 조선 후기 여성들의 복식은 우리가 흔히 대중매체에서 보아왔던 그것과는 달리, 매우 자유분방하고 미(美)를 과시하는 형태였다. 저고리는 앞가슴 절반이 드러나 보여 다소 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길이가 짧아졌고, 팔소매 또한 활동하기 편리함을 위해, 가냘픈 몸매를 과시하기 위해 의복이 몸에 꽉 끼일 정도로 폭이 좁아졌다. 그에 반해 치마는 폭이 상당히 넓어져 풍성해졌으며, 상민층 여성들은 긴 치마를 속바지가 보일만큼 끌어 올린 후, 끈으로 동여매어 걷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또한 조선 후기 여성들은 양반, 기생, 상민을 막론하고 머리 위에 가채를 얹어 아름다움을 더욱 과시했다.이러한 여성 복식의 유행은 대개 상층민에서부터 시작되어, 하층민으로 이어져왔다. 이러한 유행은 상층민의 생활양식을 모방하고 싶은 하층민의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비단 상층민에 대한 모방심 때문만이 아니라, 단순히 미(美)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를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단지, 그 욕구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양반층이 서민층보다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었고, 또한 경제적인 여유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일찍이 과감한 의복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그 정도가 지나치게 되어, 결국 사치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도 이러한 의복에 대한 사치가 문제시 되곤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가장 많은 문제가 되었던 부분이 머리 모양이었다. 아름다움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완벽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머리 모양에 굉장히 많은 공을 들였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 유행하던 머리 모양은 자신의 머리 위에 가채를 얹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머리를 좀 더 풍성해 보이게 하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더욱 과시하려는 것이었다. 가채는 원래 양반 계층의 여성들이 올리는 것이었지만, 조선 후기 의복의 유행이 점차 과감해지면서 이후에는 상민 계층의 여성들도 머리에 가채를 올렸다. 많은 여성들이 머리에 가채를 올림으로써 가채 장식품이 점점 더 화려해지기 시작했고, 이는 결국 심각한 사치 문제를 발생시켰다. 여성들의 가채 장식이 지나칠 정도로 화려해지자, 조선 조정은 가채를 금지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규제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여성들의 사치는 또 다른 방향으로 심해지거나 아니면 아예 규제 자체를 무시해버리는 경향도 생기게 되었다.조선 후기 사회의 여성 복식의 유행과 사치에 대해 공부하다 보니,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기게 되었다. 왜 이 책에는 ‘여성’ 복식의 유행과 사치에 대해서만 나와 있을까. 과연 남성 복식에는 유행이 없었고, 남성들의 사치는 없었을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미(美)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는 시대의 구분도 없고, 남녀노소의 구분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여성들, 과거의 여성들, 현대의 남성들이 하나같이 좀 더 아름다운 모습을 꾀하는 것 같이 과거의 남성들, 특히 조선 후기 사회의 남성들 또한 복식에 유행이 존재했고, 그들도 사치를 즐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이 책에는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 다음 기회에 여건이 허락된다면 조선 후기 남성 복식의 유행과 그들의 사치에 대해서도 한번 알아보고 싶다.- 한국 전통 사회와 문화 -신분의 상징, 복식문화 2- 왕의 옷, ‘곤룡포(袞龍袍) -○○과○○○조선 시대, 신분을 상징했던 복식 문화. 이번 시간에는 교수님께서 준비해 오신 사진 자료를 보며, 조선 시대 복식 문화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았다. 사진 자료에는 서민들의 복식에서부터 양반들의 복식, 궁중에서의 복식 등 다양한 복식 문화가 있었다. 흔히 텔레비전 사극 드라마에서 주로 볼 수 있었던 궁중의 복식을 사진으로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교수님께서 사진 하나하나마다 설명을 덧붙여 주셔서, 지난 시간에 배운 것을 복습할 수 있는 좋은 기회도 되었고, 텔레비전에서 그냥 지나치며 보았던 옷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사진 자료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곤룡포(袞龍袍)였다. 조선 시대 임금들이 평상시 입었던 옷인 곤룡포. 사극에서 임금들은 왜 항상 빨간색 옷을 입고 나오는 걸까 궁금했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알게 되어 기뻤다. 사극에서 곤룡포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임금이 편전에서 국사를 처리할 때 평상시 입던 옷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옷이 빨간색인 이유는,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강했던 조선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중국의 임금은 ‘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하지만, 중국보다 낮은 위치라고 생각했던 조선의 임금은 중국과 같은 ‘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낮춰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던 것이다. 원래 황제의 옷은 금색으로 만들어지는데, 왕은 감히 황제의 색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금색이 아닌, ‘홍색’으로 왕의 옷을 만들었다고 한다.의복의 색깔에 대해 알고 나니, 그리고 ‘곤룡포’라는 옷에 대해 알고 나니, 이제는 조선 시대 왕실을 조금 더 알 수 있게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임금의 의복을 ‘곤룡포’라고 불렀을까? 이유는 ‘흉배’ 그림 때문이었던 것 같다. 교수님께서도 설명해 주셨고, 그리고 더 궁금한 까닭에 인터넷을 조금 더 찾아보니, 흉배의 그림은 ‘용’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용도 모두 다 똑같은 용이 아니라 신분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고 한다. 먼저 왕의 곤룡포 흉배는 ‘오조룡(五爪龍)’ 이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각 한자가 의미하는 뜻은 ‘다섯 오(五)’, ‘손톱 조(爪)’, ‘용 룡(龍)’ 이라서, 즉 ‘다섯 개의 손톱을 가진 용’이 된다. 그리고 왕세자의 흉배는 ‘사조룡(四爪龍)’, 왕세손의 흉배는 ‘삼조룡(三爪龍)’ 이었다고 한다. 즉, 곤룡포라고 해서 모두 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 신분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이번 시간을 끝으로 조선 후기 복식 문화에 대한 수업은 마치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조선 시대 복식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고, 궁금한 것도 많다. 앞으로는 사극을 보면서 옷에 대해 그냥 지나치지 말고, 조금 더 눈여겨보고, 궁금한 것은 조사해보며 조선 시대 복식에 대해 조금 더 알아가고 싶다.- 한국 전통 사회와 문화 -맛과 멋의 조화, 음식 문화(벼농사의 지역 편중과 음식 문화)○○과○○○조선 시대의 식생활. 교수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시대가 변하면서 가장 많이 변화되는 것은 의생활, 시대가 변해도 많이 변하지 않는 것이 식생활인 것 같다. 조선 시대의 식생활에 대해 배우는 과정에서는 그리 큰 어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있는 대부분의 것이 조선 시대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시대에는 부족하여 풍족하지 못했던 것들이, 지금에는 기술의 발달로 넉넉하게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조금 차이가 났을 뿐이다.책의 첫 부분에 이런 내용이 나와 있었다.‘우리나라의 지형 구조는 산악으로 둘러싸여 전체 면적 중에서 밭이 논보다 훨씬 많았다. …… (중략) …… 논의 80% 정도는 하삼도(下三道:전라?경상?충청)와 경기도에 분포되었다. 결국 논농사는 경기도와 하삼도에 편중되었으며, 강원도를 비롯한 북부 지역은 대부분 밭농사가 중심을 이루었다.’이 구절을 읽으며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강원도 출신이신 아버지와 경상남도 출신이신 어머니의 대화였다. 어머니께서 결혼을 하시고 맞이한 첫 번째 명절인 설날. 원래 우리나라의 전통은 설날에 ‘떡국’을 끓여 먹는 것인지라, 어머니께서는 당연히 떡국을 끓일 준비를 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큰댁에서 마주 대한(?) 떡국은 어머니께서 생각하시던 그런 떡국이 아니었다. 큰댁에서 끓인 떡국은, 어머니 표현대로 하면 ‘떡만두국’ 이었다고 한다. 우리 큰댁에서 끓이는 떡국에는 떡과 만두가 함께 들어간다. 어머니께서는 그 때 일을 회상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게 떡만두국이지, 어떻게 떡국이니.”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강원도 출신인 나는 어머니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보니, 원래 떡국에는 정말로 ‘떡’만 들어간다고 한다. 적어도 어머니의 고향인 경상남도에서는 그렇다고 한다.그 당시에는 그냥 웃으며, 그렇구나, 넘어간 일이었다. 단순히 문화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수업 시간에 위와 같은 글을 보니, 그러한 문화의 차이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강원도는 논농사를 짓기에 부적합하다. 그래서 논농사보다는 밭농사가 주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하삼도나 경기도에 비해 쌀이 부족했을 것이고, 떡을 넣어 국을 끓여야 하는 설날이 매우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떡만두국’. 쌀로 떡을 만들고, 밀로 만두를 빚어 두 개를 함께 끓이면, 적은 쌀로 떡을 해서 국에 조금 넣는 것 보다는 더 풍성해보이고, 맛도 있었기 때문이다.
- 한국전통사회와 문화 -반짝이는 아름다움, 귀고리의학적 용도의 귀고리, 남성들의 화려한 귀고리○○○○과○○○1997년 4월 2일자 국민일보에는 이러한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신해철이 KBS에 출연 못하는 이유―빨간 머리와 귀고리”. 이렇듯 1990년대 후반 우리 사회는 남자 연예인들의 귀고리 착용 문제로 떠들썩했다. 여성에게는 관대한 귀고리 착용이 왜 유독 남성에게는 관대하지 못한 것일까? 남성들은 귀고리를 착용하면 안 되는 것일까? 물론, 지금 우리 사회는 남성들의 귀고리 착용에 대해 무척이나 관대해졌다. 귀고리에 대한, 남성의 몸치장 문화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바뀐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단지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일까? 옛날 사람들은 남성의 귀고리 착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우선, 귀고리가 무엇인지, 귀고리의 역사는 어떠한지 대해 알아보자. 귀고리는 이식(耳飾), 이환(耳環)이라고도 불리며, 영어로는 "earing"이라 한다. 현대에는 장식의 효과를 위해 귀고리를 착용하지만, 원시시대에는 주술적인 역할을 하거나, 같은 종족을 표시하거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귀고리를 착용했다. 초기 그리스에서 귀고리는 액막이를 위한 용도로 쓰였다. 그리스 전성기에는 7cm 이상 늘어뜨리는 귀고리가 등장했으며, 한 때는 오른 쪽 귀에만 귀고리를 착용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서양의 오래된 민속에서는 귀를 뚫어 귀고리를 착용하면 시력이 회복된다고 한다. 또 옛날 사람들은 뱃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지 않게 하는 액막이로도 귀고리를 착용했다.이처럼 오래 전부터 전 세계적으로 널리 착용되어져 왔던 귀고리는 우리나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 귀고리의 양식은 낙랑(樂浪)의 이당에서 연유하여, 고구려에 들어와 한국화 되고, 신라시기에 이르러 발전?완성 되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귀고리의 착용이 여성에게만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부터 귀고리는 남녀 모두 착용했다.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하여 신체 훼손을 금하였던 조선시대에도 귀를 뚫어 착용하는 귀고리는 일반적인 사회 풍토였다.세종 1년 1월 6일의 기사 중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다.「금?은은 본국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므로, 진상하는 물건도 오히려 계속하기 어려운데, 그로 만든 술잔이나 밥그릇을 상하가 통용하는 것은 더욱 온당치 못한 일이니, 금후로는 진상에 따른 복용(服用), 기명(器皿), 궐내에서 쓰는 술잔 및 조정의 사신을 접대하는 기명?조관(朝官)의 관대?명부(命婦)의 뒤꽂이?사대부 자손들의 귀고리 등을 제외하고는 일절 사용을 금하며, 소금(銷金)이나 이금 등속도 다 금하는데, 범하는 자는 법령을 어긴 죄로 다스리겠다.」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사대부 자손들의 귀고리”라는 것이다. 법령의 내용 중에 사대부 자손들의 귀고리가 언급된 점으로 보아, 이 시대에는 여성과 남성 모두의 귀고리 착용이 일반화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중종 8년 1월 7일의 기사 중에는 왕손의 귀고리 착용에 대한 내용도 있다.「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의 이손(李蓀)이 아뢰었다. “만손(萬蓀)이 양평군이라고 자칭하는데, 양평군은 곧 강수 아기입니다. 일찍이 신의 집에 피접(避接)해 있는데, … (중략) … 그 당시 강수의 나이 9세인데, 큰 진주(眞珠) 귀고리를 달았고 백회(百會)에 뜸뜬 흔적이 있었으니, 이로써 증거대어 보면 즉각 진위(眞僞)를 분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후략)”」이 글에서 등장하는 양평군은 연산군의 후궁 소생이다. 양평군이라고 자칭하는 자의 진위를 분별함에 있어서 귀고리를 달았던 자국과 뜸을 뜬 흔적을 확인해보라는 주청을 올리고 있다. 이처럼 조선 시대에는 일반 사대부뿐만 아니라, 왕손들까지도 귀고리를 착용했다. 또한 당시 그의 나이 ‘9세’라는 것을 보아 성인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들도 귀를 뚫어 귀고리를 착용했음을 알 수 있다.이처럼 조선시대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남성의 귀고리 착용에 대해 관대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조선시대 내내 남성의 귀고리 착용 풍습이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조선 사회는 남성들의 귀고리 착용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선조 5년 9월 28일의 기사를 보면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신체(身體)와 발부(髮膚)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니 감히 훼상(毁傷)하지 않는 것이 효(孝)의 시초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사내아이들이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달아 중국 사람에게 조소(嘲笑)를 받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이후로는 오랑캐의 풍속을 일체 고치도록 중외(中外)에 효유(曉諭)하라. 서울은 이 달을 기한으로 하되 혹 꺼리어 따르지 않는 자는 헌부가 엄하게 벌을 주도록 할 것을 승전(承傳)을 받들라.」이 금지령은 조선시대 남성의 귀고리 착용을 명백하게 확인시켜줄 뿐만 아니라, 귀고리 착용 금지 이유까지 상세히 밝힌 최초의 제재 조치이다. 선조는 이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착용했던 귀고리를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덕목을 내세워 갑자기 금지시켰다. 이러한 선조의 갑작스러운 귀고리 착용 금지령은 중국인들의 비난 때문이었다. 중국인들은 귀고리 착용을 오랑캐의 풍습으로 여겨, 저급한 것으로 취급되었던 오랑캐의 풍습을 모방한 우리 백성들을 비난한 것이다.하지만 귀고리 착용 문화를 오랑캐의 저급한 풍습이라고 생각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귀고리는 우리 민족이 오래 전부터 착용했던 장신구이다. 귀고리 착용은 삼국시대 때에도 흔하게 이루어졌으며, 그 증거로 고구려?백제?신라의 많은 유적지에서 귀고리가 발굴된 것을 들 수 있다. 실제로 귀고리 문화가 가장 화려하게 발달한 것은 삼국시대 때이다.특히나 남자 귀고리의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것은 삼국시대 신라의 화랑들의 귀고리였다. 당나라 승려의 신라 견문기 《신라국기(新羅國記)》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귀인 자제 가운데 어어뿐 자를 뽑아 분을 바르고 곱게 단장하여 화랑이라고 부르니 나랏 사람들이 모두 높이 섬긴다.」이처럼 신라의 화랑들은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분을 발라 화장을 하고, 귀고리?가락지?팔찌?목걸이 등 갖가지 장신구들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이러한 신라 화랑들의 몸치장은 ‘아름다운 육체에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다.’는 “영육일치(靈肉一致)”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귀인의 자제인 화랑들이 치장을 위해 귀고리를 착용함에 따라 신라시대에는 귀고리, 특히 남성의 귀고리가 많이 발전하였다.삼국시대 백제에서도 남성과 여성을 막론하고 귀고리가 크게 성행하였다. 백제시대 고분은 유물을 통해 고분 주인의 성별을 구분할 수 있다. 큰 칼을 왼쪽 허리춤에 차고, 가는 고리 귀고리를 귀에 매달면 남성의 무덤이고, 실을 뽑는데 이용하는 방추차(紡錘車)를 소유하거나 귀에 굵은 고리 귀고리를 매달고 있으면 대부분 여성의 무덤이다. 또한 여인들은 하트(♡) 모양의 귀고리가 많이 달렸느냐, 적게 달렸느냐에 따라 신분의 상하를 가늠하였다고 한다.남녀노소(男女老少)를 불문하고 성행했던 귀고리는 유행에 매우 민감한 장신구였다. 그래서 삼국시대 각국은 국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다양한 기호에 맞는 독특한 디자인과 제작기법을 구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귀고리의 화려한 황금문화를 꽃피우게 되었다. 이는 드라마 ‘서동요’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드라마 서동요 중(18회)에 태학사 내 기술사들이 귀고리 도안의 도용 여부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별 것 아닌 듯 보이는 귀고리 도안일 뿐이지만 삼국시대에는 큰 자산이었고, 매우 중요시 되었다. 삼국시대는 또한 대립과 화해를 반복하면서도 귀고리를 비롯한 각종 물품의 제작에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다. 때문에 삼국시대 귀고리를 비롯한 장신구는 매우 국제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서로 유사도가 높다.조선시대에도 귀고리는 유행을 좇아 그 형태가 바뀌었다. 영조 때의 실학자 서유구(1764~1845)의 형수였던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에는 이러한 내용이 나온다.「중국 귀고리는 금탄월이니 요즈음 풍속은 처녀들만 달되, 옛 풍속과 중국에서는 귀를 뚫고 평상시에 달기 때문에 맥상상(陌上桑) 공작시(孔雀詩)에 이르기를 이중명월주(耳中明月珠)라 하였다.」이는 귀고리를 착용하는 방식과 시기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빙허각 이씨가 살았던 시대는 영조시대로, 이 때는 귀를 뚫어서 귀고리를 귀에 꿰는 방식에서 벗어나 고리에 줄을 달아 귓바퀴에 거는 형식으로 바뀌었고, 이후에는 그러한 풍조마저 서서히 사라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풍토는 선조의 ‘귀고리 착용 금지령’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선조의 금지령 이후, 남자들은 대개 귀고리를 하지 않았고, 여자들도 귀를 뚫어 귀고리를 착용하기보다는 걸이식 귀고리를 착용했다. 그리하여 그 때부터 귀고리를 착용하는 유행이 없어졌다가 조선 말기에 이르러 상류층 부녀자들이 의식이나 혼례 때에 착용하면서 또다시 서서히 부활했다.이처럼 과거 귀고리 착용의 풍습은 남녀노소(男女老少)를 가리지 않았고, 유행에 민감했던 것이 특징이다. 위에서 언급한 귀고리 착용의 목적은 단순히 “미(美)”를 과시하거나,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이러한 것 외에 또 다른 용도로도 귀고리를 사용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의학적인 용도’로 사용된 것이다.
철학의 이해(06.10.30.) ○○과○○○중요한 것은 ‘결과’인가? 아니면 ‘동기’인가?? 생각해 볼 문제1. 위에서, 는 공자의 입장과 는 맹자의 입장은 일견 상충되는 듯 하다.전자는 ‘결과’를 고려하여 행위 하라는 것이고, 후자는 결과보다도 순수한 ‘동기’를 중시하라는 것이다. 위의 공자와 맹자의 생각 중에서 어느 쪽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결과’를 고려하라는 공자의 사상과 ‘동기’를 중시하라는 맹자의 사상 중에서 한 가지를 고르라고 한다면, 얼핏 생각하기에 당연히 ‘동기’를 중시하는 맹자의 사상이 옳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결과보다는 과정(동기)을 중요시하라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배운 중학교 2학년 도덕 교과서에는 술 취한 일본인 지하철 승객을 구하려다 희생된 故 이수현씨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에 따른 행동이며, 희생의 결과보다는 그 동기를 더 중요시 한 경우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이러한 일화를 통해 순수한 동기의 중요성에 대해 배워왔다. 하지만 본문에 나타난 공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故 이수현씨의 행동은 어진 이의 태도가 아닐 수도 있다. 공자는 행위의 동기도 중요하지만, 그에 따른 결과 또한 고려해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하지만 공자의 말을 좀 더 깊이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무조건적인 “결과중심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도 설명했듯이 공자는 “어진 사람(仁者)은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노력 한다”고 했다. 이는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과도 일맥상통하는 내용이고, 행위의 ‘동기’를 중요시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에 덧붙여 공자는 “사리와 상황은 전연 고려하지 않는 무모한 짓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즉, 어진 이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있는 힘껏 자기 자신을 희생하지만, 상황에 맞지 않은 무모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자의 입장에서 어진 이는 어떤 사람이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분별없이 뛰어들기보다는, 사리와 상황을 잘 판단하고 그에 맞는 다른 조취를 취하는 사람이다.문제에서 공자는 ‘결과’를 고려하고, 맹자는 ‘동기’를 중시한다고 했는데, 내 생각에는 공자도 ‘동기’를 경시하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맹자는 지금 자신이 닥쳐 있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즉시 나타날 ‘결과’보다는 그 행위의 ‘동기’를 더 중요시하라는 것이고, 공자 역시 ‘동기’를 중시하되, 좀 더 먼 미래의 관점에서 봤을 때 그 동기의 ‘결과’가 조금이라도 더 좋은 쪽으로 나타나는 행동, 즉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인 ‘결과’가 나타나는 행동을 하라는 말인 것 같다.2. 결과주의[결과의 좋음을 판단기준으로 함 : (결과가) 좋은 게 좋다]와 동기주의[동기의 올바름을 판단 기준으로 함 : (동기가) 옳은 게 좋다]의 대립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동기’가 중요하느냐, ‘결과’가 중요하느냐라는 질문은 사회 교과목 시간에 자주 언급되었던 ‘성장과 분배’ 문제와 같다고 생각한다. 경제에서 ‘성장’도 중요하고, ‘분배’도 중요하지만, 둘의 문제는 대개 상충되듯이, ‘동기와 결과’의 문제도 이와 같다. 이는 또한 아이들에게 ‘엄마가 좋느냐, 아빠가 좋느냐’라고 묻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는 매우 어렵다. 둘 다 중요하고, 둘 다 좋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도 경시할 수 없는 ‘동기’와 ‘결과’의 대립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중도(中度)의 미’가 필요한 것 같다. 하지만 ‘중도’라는 말은 다분히 상대적이다. 정형화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동기’와 ‘결과’의 대립 문제는 각 상황에 따라 “자신의 상황 속에서 자신이 판단”해야 할, ‘동기’와 ‘결과’가 조화(和)를 이루어야 할 문제인 것 같다.3. 다음의 관련된 문제를 생각해보자.① 노약자에게 좌석을 양보하는 것은 선한 행위인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도 건강한 젊은이라면 당연히 노약자에게 좌석을 양보해야 하며, 이것이 예(禮)에 맞는 선한 행동이다. 하지만 부득이한 경우, 건강한 젊은이라 할지라도 노약자에게 좌석을 양보하기 어려운 때가 있다. 그럴 경우에는 그 사람이 노약자에게 좌석을 양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행위를 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상황을 ‘동기’와 ‘결과’의 문제로 보면, 젊은이는 노약자에게 좌석을 양보할 마음(동기)이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결과적으로는 그렇지 못하게 됐다. 내 생각에는 그렇게 할 마음(동기)이 진심으로 있었다면, 그 결과가 그렇지 못할 지라도 이는 결코 악하게 행동한 것이 아니며, 선하게 행동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결과보다는 그 동기를 더 인정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②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선한 행위인가?-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위는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다. 부유한 사람이 부유하게 된 데에는 그 사람의 개인적인 능력도 뒷받침이 되었지만, 사회적인 여건이 큰 영향을 미친다. 그 사람은 사회로부터 특별한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만이 누리고 있는 혜택을 사회로 다시 환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도움은 옳지 못하며, 꼭 선한 행위라고 볼 수만은 없다. 예를 들어,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동기) 그 사람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무조건적으로 돈을 줄 경우, 가난한 사람에게 그 돈은 처음에는 큰 도움이 되겠지만, 이후에는 더욱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결국 그 사람은 점점 나태해져 삶이 더욱 가난해지고 비참해질 것이다(결과). 따라서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선한 행위이지만, 무분별한 도움은 오히려 악한 행위가 될 수도 있다.
- 물질과 생명 현상의 이해 과제 -와, 너 여기 있었구나. 노브에!○○과○○○봄이면 나물 캐러 다니시는 부모님 뒤를 쫄쫄 쫓아다니고, 여름엔 다슬기를 잡는다고 물 속에서 한바탕, 가을에는 새빨간 고추잠자리를 가지고 조물락 거리고, 겨울엔 하얀 눈밭에서 뒹구그르. 지금은 숙녀 티를 낸다고 온갖 내숭을 떨어대는 저에게도, 이렇게 한없이 순수한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무서운 것 모르고, 힘든 것 모르고, 그냥 단순히 재미있어서 그러고 놀았는데, 언제부터 그리고 왜, 전 그것들을 무섭고, 징그럽고, 힘들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요.선생님께서 수업시간에 종종하시는 이런 말씀이 생각납니다. “현장 학습 나가서 아이들을 앞질러 가며 그 곳에 나 있는 풀들을 지지 밟고 지나가는, 바보 같은 선생이 되지 말아라.”저는 그런 예비교사였습니다. 학생들이 질문할까봐 미리 그 풀을 학생들의 시야에서 없애버리고, 학생들이 매미를 들이대면 꺄아- 비명을 지르고 뒷걸음질을 치는, 그런 바보 같은 예비교사 말입니다.어렸을 땐 그렇지 않았는데, 나이가 들어가고 머리가 커가면서 자꾸만 사회 속에 잠재되어 있는 고정관념(벌레는 징그럽고 더럽다 등)이 어느새 제 머릿속에도 박혀버렸나 봅니다.선생님의 강의와, 선생님의 책은 그런 바보 같은 저를 다시 순수한 동심의 세계로 끌어내어 주었습니다. 징그러워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던 지렁이도, 시끄럽다고 귀찮아하던 매미도, 매일 그냥 지나쳤던 소나무들도 교수님의 강의에서는 늘 신기하고 재미있는 소재였고, 즐거움이었습니다.그리고 과학책은 지루할 것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읽기를 미루고 또 미뤄두었던 교수님의 저서 . 이 책 속에는 그동안 제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신비한 세계가 숨어 있었습니다.이 책은 마치, 초등학교 시절 제가 무척이나 흥미롭게 읽었던 책 같았습니다. 그 시절 제가 읽었던 책에는 어린 제가 무척이나 궁금해 하던 문제인 “낙타의 등은 왜 튀어나왔을까”, “원숭이에게도 지문이 있을까”, “방귀를 참는 것은 몸에 해로울까” 등에 대한 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저서 . 이 책은 선생님의 자서전이자 수필집, 지식의 백과사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게는 자연 세계를 관찰해보며, 우리 사회를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사회과학, 자연과학, 혹은 철학적 교양서적이었습니다.선생님의 책 내용 중에 이런 글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내 몸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부분은?”이란 소제목의 글. 제 몸에서 가장 귀한 부분은 어디일까요. 전, 제목만 보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심장? 뇌? 아니면,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눈? 하지만 정답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발”이라니요. 처음엔 조금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글을 읽고 찬찬히 생각을 가다듬어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발이 가장 귀한 부분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신체 모든 부분이 가장 귀한 부분이요, 각각의 맡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발에 대해 너무나 무관심하고, 발을 천대했지요. 그 글을 읽으며, 새삼 제 발에게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내가 널 너무 소홀히 했구나.선생님의 글은 그랬습니다. 제게 이 세상을, 자연을, 그리고 제 자신을 다시 한번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와 여유를 주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사회과학, 자연과학, 혹은 철학적 교양서적이라고 한 것입니다.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제 자신이 참으로 많이 변했습니다. 얼마 전, 큰할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산 속에 있는 납골당을 찾았습니다. 그 주변에 있는 수많은 식물들, 동물들, 그리고 곤충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혹은 오히려 피해 다녔을 것들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변에 있는 소나무를 보고 이것이 육송일까, 리기다소나무일까, 아니면 잣나무일까 유심히 관찰 하고,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메뚜기 같은(메뚜기인지 다른 곤충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곤충도 손으로 잡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오랜만에 어린 시절로 돌아가 고추잠자리도 쫓아다녀보았습니다. 그런 저의 모습에 제 자신도 놀랐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자연이란 천진한 아이들과 같이 순수하고, 즐거운 것이구나.이번 기회에 새롭게 다짐을 합니다. 앞으로는 자연에 더 관심을 갖고, 자연을 더 많이 사랑하겠노라고. 또다시 동심의 세계로 나아가겠다고요.선생님께서는 “선생”이라는 직업을 정말 좋아하시고, 그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런 선생님 밑에서 배우는 예비 교사인 저 또한 그런 훌륭한, 진정한 “선생”이 되고 싶습니다.아직은 순수한 동심의 세계로 빠진(순수하고 즐거운 자연 과학을 사랑하는) 예비 교사가 적은 이 사회에서, 그런 예비 교사를 찾아보기 힘든 이 사회에서, 저는 선생님의 “노브에”가 되려 합니다. 선생님께서 지치고 힘드실 때, 선생님께서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거문도좀혹달팽이, 노브에 ‘○○○’를 잠시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선생님의 참 가르침을 아이들에게 전하고, 아이들과 함께 자연에 동화되는 진정한 교사, 참된 교사가 되어 어느 한 구석에서 선생님의 외침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와, 너 여기 있었구나. 노브에!”- 물질과 생명현상의 이해 -L'Ultime Secret(뇌)○○과○○○프랑스의 유명한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중에 『L'Ultime Secret(뇌)』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작가이기에 예전부터 이 소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또 직접 구매해서 읽어보았죠. 이 소설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의 뇌에 숨겨져 있는 비밀을 파헤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실 전에 이 책을 읽을 때, 줄거리는 매우 흥미로웠지만, 어려운 의학 용어들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습니다.그러다가 선생님의 저서 『인체 기행』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미리미리 자세히, 찬찬히 읽고자 직접 제 용돈을 들여 책을 구매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첫 장을 폈지만,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생물 과목은 워낙 어려워했고, 또 그러기에 생물에 대해서는 아주 기초적인 것 외에는 아는 바가 없어, 책 읽기가 무척이나 힘겨워 책장을 덮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또다시 책장을 들추었습니다. 이제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기 때문이었겠죠.기대보다는 더 큰 두려움을 안고 책장을 한 장씩 넘겼습니다. 어려운 부분은 그냥 읽고 넘기라고 하셨던 선생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과감하게 읽어 내려갔습니다. 과연, 그 전보다는 글이 술술 읽혀졌고,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그동안은 덜렁덜렁 이끌고만 다녔던 내 몸인데, 겉치장만 화려하게 하고 다녔던 내 몸인데, 내 몸 안은 이렇게 되어 있었구나. 새삼 감탄하게 되었습니다.그리고 얼마 읽지 않아 제 눈을 사로잡는 멋진 제목을 발견하였습니다. “뇌는 소우주이다”. 참으로 놀랍고 궁금했습니다. 인간의 몸 안에, 그것도 내 몸 안에 우주가 존재한다니! 불현듯 전에 읽었던 베르베르의 소설 『뇌』가 생각났습니다. 아, 그럴 수 있겠구나. 과연 뇌가 소우주일 수 있겠구나.소(小)우주. 그렇습니다. 뇌는 무척이나 작습니다. 선생님의 글에 뇌의 무게는 몸무게의 약 2%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제 뇌는 1kg 정도밖에 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 작은 뇌가 나머지 98%를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지금 제가 이렇게 컴퓨터 앞에서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이 작은 뇌가 없었다면, 아니 이 작은 뇌의 더 작은 일부분에 손상이 갔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죠.인간을 흉내 내는 로봇들. 아무리 성능이 좋은 컴퓨터를 만들어도 사람의 뇌와 비슷하게 만들려면 10~100만 대를 모아도 어림이 없다고 하셨죠. 베르베르의 소설 『뇌』에서는 체스 대결에서 인간이 로봇에게 승리하였는데, 얼마 전 뉴스를 보니 현실 사회에서는 인간이 로봇에게 졌다고 하더군요. ‘과학이 참으로 위대하구나.’ 하고 느끼다가도 매우 침통한 일입니다. 인간이 만든 로봇에게 인간이 지다니요. 물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컴퓨터가 아무리 성능이 좋아봤자 컴퓨터요, 로봇일 것입니다. 인간의 뇌에는 조금도 미치지 못하겠지요. 그래서 전 언젠가 다시 열릴 체스 대회에서, 인간이 로봇에게 이겼다는 소식이 들리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날이 반드시 올 거라고 믿고 있고요.
해방 후의 교육 - 대한민국의 교육1. 정부수립 직후의 교육가. 헌법에 명시된 교육(1) 교육의 기회 균등, 초등 무상 의무교육(2) 교육기관에 대한 국가의 감독, 법정주의 원칙에 입각한 교육제도나. 1949년 12월 「교육법」제정?공포 : 홍익인간, 인류공영의 이상실현 목적다. 대한민국의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安浩相)’ : 일민주의(一民主義) 교육이념 제창2. 1950년대의 교육가. 1951년 2월 「전시하 교육특별조치령」발표(1) 피난 학생들의 취학 독려, 가교실 건축, 피난 특설학교 설치(2) 북한에서 피난 온 학생들을 위한 특설학급과 분교 설치 (거제도, 통영)(3) 설치 (부산, 광주, 전주, 대전)(4) 전시생활을 지도하기 위한 교재 발행?배부나. 1952년 교육자치제 실시 (시?군 단위)다. 휴전 이후 교육정책 : 반공민주교육, 과학기술교육 강화(1) 반공교육 추진, 군사훈련 실시(2) 구안법(Project Method), 문제해결학습(Problem Solving Method) 연구(3) 각종 심리검사 및 표준화된 학력검사 제작(4) 시청각교육 중시, 객관식 출제방식 도입, 상담교사 제도 도입라. 1955년 성문화된 교육과정(敎育課程)을 갖게 됨마. 휴전 이후의 교육상 변화(1) 교육의 양적 팽창, 사친회(師親會) 발족(학교와 가정이 협조하는 출발점)3. 1960년대의 교육가. 제2공화국의 문교부 장관 ‘오천석’ : ‘교육의 민주화’를 교육정책의 기조나. 군사정부(1) 1961년 8월 「중학교?고등학교 및 대학의 입학에 관한 임시조치법」제정(가) 각급 학교의 입학시험이 ‘국가고시제’로 전환(2) 1961년 9월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제정(가) 2년제 교육대학과 5년제 실업고등전문학교(1969 폐지) 신설(3) 1961년 10월 「학사자격 고시령」발표(4) 1962년 1월 교육법 개정 : 시?군단위의 교육자치제 완전 폐지(5) 1963년 2월 제2차 교육과정 : 교육 주체성 강조다. 제3공화국(1) 1964년 교육자치제 부활 (시?도 단위)(2) 1968년 중학교 입시제도를 무시험 추천제로 바꿈, 대학입학 예비고사제 도입(3) 1968년 12월 국민교육헌장(國民敎育憲章) 선포4. 1970년대의 교육가. 1970년대 교육정책의 기조(1) 안보교육 체제 강화, 새마을 교육 강조, 도덕과 국민윤리, 국사 교육 강화나. 1973년 제3차 교육과정 제정 : 국민교육헌장 이념 구현, 학문중심 교육과정다. 1970년대 이루어진 교육상 중요한 변화(1) 고등학교 입시제도 개선 : 인문계 고등학교 연합고사 추첨진학제(2) 대학교육 개혁(가) 실험대학(實驗大學) 운영, 대학의 특성화 추진, 2~3년제의 전문대학 설치(3) 방송통신교육 체제 확립(가) 1972년 5월 서울대학교에 2년제 방송통신대학 설치(나) 1974년 국공립 고등학교에 방송통신 교육과정 실시(4) 취학전 교육 확대 : 1976년 서울지역 공립 국민학교에 병설 유치원 설치(5) 특수교육 진흥(가) 1971년 공립 국민학교에 특수학급 설치(나) 1974년 전국 시군의 국민학교에 1개씩의 특수학급 설치(다) 각 장애영역별 특수학교들의 교육과정 제정(라) 1977년 12월 특수교육진흥법 제정5. 1980년대의 교육가. 1980년 7월 30일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발표(1) 1981학년도부터 대학입학 본고사 폐지(2) 초?중?고등학생의 과외수업과 중?고등학생의 학원수강 금지(3) 대학의 졸업정원제 실시 → 1988학년도부터 폐지(4) 1981년 교육대학을 4년제로 승격(5) 2년제의 방송통신대학을 독립된 국립대학체제로 전환, 5년제 학사과정으로 승격(6) 1983년 개방대학(Open University) 설치(7) 1985년 3월 한국교원대학교 설치나. 1981년 제4차 교육과정 제정 : 교과목 수 줄이고 수준 낮춤다. 1981년 교육세법 제정, 1982년 1월부터 징수라. 1984년 교육법 개정, 중학교까지 의무교육 실시마. 1987년 제5차 교육과정 제정(1) 학년 간?학교 간 연계 유지, 기초적 학습능력 중시(2) 통합교육과정 확대, 특별활동 강화(3) 교육과정 운영에 교사와 학교장의 재량권 확대참고문헌고재천 외(2006), 초등교사론, 서울:학지사. 267쪽~275쪽.김기수 외(1996), 교육사 교육철학 강의, 서울:동문사. 136쪽~145쪽.김영록 외(2006), 교육학의 이해, 서울:학지사. 74쪽~86쪽.신차균 외(2006), 교육철학 및 교육사의 이해, 서울:학지사, 134쪽~138쪽.※ 모 교육대학교 교육학과 송 모 교수님은요,1. 보고서 작성 시, 반드시(!) 형식에 맞춰야 하구요. (교수님께서 알려주신 형식)2. 보고서는 줄글로 길게 늘여 쓰는 것보다, 문제집처럼 보기 좋게 요점 정리가 되어있는 것은 좋아하신다고 합니다.3. 보고서 작성 시, 잘못된 부분 같은 경우는 마음대로 수정하시지 마시구요, 발표할 때 언급하세요. (예 : 1페이지 몇 번째 줄, 어떤 부분이 틀렸습니다. 정정하겠습니다.) 이렇게 발표할 때에 그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수정하면 매우 좋아하시고, 칭찬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