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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욤아폴리네르(시론위주)
    기욤 아폴리네르 ≪알코올≫과 ≪새로운 에스프리와 시인들≫ 발표.‘자기 생애의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한 기념’*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8) 생애1880년 8월 26일, 로마에서 미지의 아버지와 익명을 요구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 당시에는 다른 이름으로 로마시청에 신고되었으나, 9월 29일 신 비토 성당에서 기욤 아폴리네르 알베르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어머니 안젤리카 드 코스트로비츠키양이 아이의 어머니로 입회됐다. 아폴리네르의 아버지는 나폴리 왕국의 전직 근위대 기병 장교였던 플란체스코 플루지 다스페르몬테였다는 증거가 제시되기도 하지만, 시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다.(아폴리네르 생전에 교황청 고위 성직자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나돌았으며, 그가 나폴레옹 황제의 증손임을 증명하려는 노력이 한 전기 작가에 의해 시도되기도 했다.) 어머니인 안젤리카 드 코스트로비츠키양은 폴란드의 대단치는 않지만 전통 있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1863년 러시아에 대항하여 폴란드 민족이 반란을 일으켰던 직후, 이탈리아에 망명하였다. 평소 카톨릭의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조숙하고 오만하여 사치와 쾌락을 좋아하는 성정 때문에 기욤과 그의 동생 알베르를 각기 사생아로 낳았다.1882년 동생 알베르가 태어나다.1885년 두 아이의 아버지로 추정되던 플란체스코와 헤어진다.1887년 드코스트로비츠키 부인은 기욤과 알베르를 데리고 다른 한 남자와 더불어, 모나코 공국으로 이주하였다. 그날 강력한 지진이 이탈리아의 리비에라를 휩쓸었으며, 그 여진이 니스에까지 미쳤다고 한다. 아폴리나레는 그 추억을 간직하며, 『상형시집』의 「대서양 편지」에 “너는 1885년에서 1887년 사이에 일어났던 지진을 기억하느냐? 사람들은 한달 넘게 텐트에서 잠을 잤지.”라고 표현했다.4월에는 카톨릭 마리아회가 운영하는 생 샤를르 학교 제8학급에 입학하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이탈리아인들이 지배적이었던 이 공국에서 중등 과정의 프랑스 고전을 교육하기 위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었다.숨겨둔다. 그리고 8월, 「모나리자」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도난당한다. 이를 계기로 피에레가『파리 주르날』에 자신의 절도 행위를 고발하여 물의를 일으키자 당황한 아폴리네르는 보관하고 있던 피에레의 장물을 이 신문의 중재로 박물관에 돌려준다. 이 사건으로 그는「모나리자」절도 혐의를 입는다. 일주일만에 석방, 허나 한 주간지가 아폴리네르를 외설 작가이며 불법 체류자라고 비난한다.1912년 무죄가 확인. 문학 잡지『파르테농』이 7인 합작으로 익명의 릴레이 소설『무지개』를 기획, 그 첫 회를 아폴리네르가 쓴다. 이 소설은 아폴리네르의 환상적 수법에 용기를 잃은 다른 작가들의 불참으로 첫회로 중단된다. 이후 월간 문학지『파리의 야회』를 창간. 「미라보 다리」를 실었으며, 새로운 화가들에 관한 비평을 게재한다.1913년 현대 회화의 강연을 하고, 입체파 화가들과 그들의 작품에 대한 최초의 비평집『입체파 화가들』을 출간. 이해 4월, 아폴리네르의 최초의 시집『알콜』이 인쇄 완료. 그러나 조르쥬 뒤아멜의 혹평이 실리고, 아폴리네르는 이탈리아의 미래주의자 마리네티를 옹호하며, 「미래주의의 반전통-종합선언」을 작성한다. 한편으로 입체파 미술의 대변자 역할을 해온 아폴리네르는 이 무렵부터 대화시, 동시성의 시 등 새로운 표현 형식을 모색한다.새로운 문학 잡지를 구상하던 중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몽파르나스를 매일 저녁 드나들게 된다. 12월,『시와 산문』에 살몽, 카르고, 툴레 등 이른바 ‘환상파 시인들’ 사이에 끼어 아폴리네르가 소개된다.1914년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하여 총동원령지원이 내려지자 지원 입대 원서를 파리시에 지출하였으나 보류되고, 독일군의 공격이 파리를 위협하자 니스를 향해 떠난다. 이때 어느 화가의 집에서 루이즈 드 콜리니 사티용 부인(『상형시집』의 루)을 만나 첫눈에 반한다. 12월, 입대가 허가되어 연대 입대를 하고, 루이즈는 기욤의 연인이 된다. 기욤은 수많은 연시를 썼으나, 루이즈는 연정이 금세 식었다.1915년 포병대로 귀대중, 열차에풍요롭지만 가장 덜 알려지고, 그러나 무한한 넓이를 가진 것은 상상력이다. 시인이야말로 이를 통해 새로운 기쁨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넷째, 시인은 아름다움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는 미지의 세계를 탐색해 예기치 못한 놀라움을 오늘날의 시의 핵심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시인은 그런 까닭에 언제나 항상 새로운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이다.새로운 진실이란 오랜 관습이나 관행을 ‘위반’하거나 다르게 관찰해야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무엇인가 발견해내기 위해서 취향에 따라 작성된 규칙의 도움을 받아 숭고한 것으로 분류할 수 있는 사항들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일상적인 사실로부터 출발할 수 있다. 떨어지는 손수건 하나가 시인에게는 전 우주를 들어 올릴 수 있는 지렛대가 될 수 있다.”‘떨어지는 손수건 하나’로부터 무엇인가를 발견해낼 수 있는 시인은 정신의 과학자이다. 그 발견은 관례적인 사실주의의 시각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디에나 있는 일상적인 사실로부터 ‘예기치 못한 놀라움’을 주는 ‘새로운 진실’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정신의(에스프리) 몫이다.* 미학의 정립과 전개나는 예술이 환상, 감정, 상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예술은 가능한 한 자연으로부터 멀리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예술은 자연과 어떤 공통점도 없습니다. 라신, 보들레르, 랭보의 예술이 그러한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아폴리네르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묘사하는 예술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베지네의 센 강변에서 만난 드랭의 그림을 통해서 현대 미술이 ‘모방’이나 ‘묘사’의 굴레를 벗어난 것을 알아차렸다. 문학에서는 그 자신이 이미 라인 강변을 조재로 한 시들을 통해서 자연을 과감하게 ‘변용’함으로써 그리고, 를 통해서 애니와의 사랑을 극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자연’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상상이나 환상, 감정의 문학을 창출했다.1908년 1월 그는 ≪라 팔랑주≫에 「장 루아에르론」를 게재하면서, 자신의 미학이자 문학 예술관을 다음과 구성하는 어휘의 기능 확대를 통해 독자의 상상력 증진을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아폴리네르는 해외의 추세에 민감했다. 그는 표현주의 문학보다 이탈리아 미래주의에서 더 많은 것을 받아들였다. 그는 베라렌 등의 표현주의가 추구하는 현대 도시 예찬과 사회주의적 우애를 이미 쥘 로맹의 일체주의를 통해 자기 식으로 소화했다. 1912년 12월에 발표한 에서 그가 통사적 유연성을 시에 부여하기 위해 구두점을 모두 삭제한 것은 마리네티의 제2선언의 영향이었고, 1914년 처음으로 시도한 ‘칼리그람’이라는 ‘그림 시’는 어휘들을 순간적인 시각적 구도에 따라 배열하여 시로 하여금 내용과 일치하는 그림 모양을 갖도록 하는데, 그것은 자유로운 상상력을 위해 문자 배열과 조판의 혁신을 주장하는 마리네티의 제3선언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제4선언에서 말한 ‘서정적 가치 일람표’를 우회적으로 거부했다. 아폴리네르는 마리네티의 선언 중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배격할 것은 배격했다. 그들은 미래지향적이라 과거의 문화유산을 존중하지 않았다. 아폴리네르는 과거의 문학 전통과 문화 유산을 존중하는 시인이다. 그는 미래주의가 머리를 짜내 감행하는 시도의 과격한 면을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현대와 진보를 찬미하고, 새로움을 추구했지만 항상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그것을 수용하고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다.* 티레시아스의 유방-티레시아스의 유방 서문나는 ‘초현실주의’라는 형용사를 만들어 냈다. 그 의미는 빅토르 바쉬가 자신의 글에서 제안하고 있는 것처럼 ‘상징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하나의 예술적 경향을 일컫는 것이다. 태양아래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떠한 문학적, 예술적 주장이나 신조를 이루는 데 결코 사용된 적이 없었던 예술 경향을 일컫는 것이다.극적 쇄신을 위해서 아니면 적어도 개인적인 노력을 위해서라도, 나는 자연 자체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사진작가들이 하는 것처럼 하라는 것은 아형 ‘알코올’이 보다 단순하고 타는 듯하며 색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다.2) 그는 최근 집필을 끝낸 「변두리」를 시집의 첫 시로 놓기로 했다. 「변두리」가 자신의 모든 과거를 돌아보는 자전적 시이기 때문에, 뒤따르는 시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삶의 대체로 슬픈 사건들을 기념하는 시들로 읽히게 되길 기대한 것이었다.3) 「변두리」가 시집의 첫 시가 됨으로써 당초 첫 시로 예정되었던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의 위치를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긴 시 두편이 이어지기 때문이었다.4) 시집 전체에 모든 구두점을 삭제하였다. 당대의 췌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며 현대적 감각에 맞게 면모를 일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새로움을 좋아하는 아폴리네르가 구두점을 삭제한 것은 마리네티의 미래주의 제2선언인 「미래파 문학의 기법 선언」에 의거했다는 것이 오랫동안의 통설이었다. 제 2선언은 전통적인 구문과 문체를 관행적 규칙으로부터 해방시켜 유연성을 갖게 하자는 것이었다. 아폴리네르가 미래주의 선언을 따랐을 가능성은 높다. 그러나 새로운 사실은 말라르메가 오래전에 「주사위 놀이」에서 시도한 구두점 삭제를 아폴리네르가 본받아 마리네티의 미래주의 선언 시점보다 훨씬 전에 이미 그의 원고나 서신에서 구사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특히 『알코올』의 구두점 삭제에 대해서 그는 “시의 리듬과 운율이 진정한 구두점인 까닭에 구두점은 필요 없어 보여 삭제했다”고 마르티노에게 보낸 1913년 7월 19일자 편지에 설명했다는 사실이다.『알코올』의 매력은 사랑의 고통과 기쁨, 시간의 흐름, 추억, 자아 탐구, 자기 쇄신과 순화 등이 조성하는 다양성뿐만 아니라 전 시대의 시법을 존중하면서도 동시성이나 말장난 같은 현대적 시도를 감행한 아폴리네르의 창작 기법으로부터도 비롯한다. 『알코올』은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작품이자 현대성을 입증하는 첫 작품이다. 20세기 현대시는 1913년 『알코올』로부터 태동한 것이다. 이 시집은 20세기에 가장 많은 발행부수를 기록한 시집이며, 전 세계의 수많은 언어로 번역너의 삶
    인문/어학| 2020.11.27| 27페이지| 4,000원| 조회(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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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욤아폴리네르(생애위주)
    기욤 아폴리네르는 자신의 시가 ‘자기 생애의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한 기념’이라고 말했다. 이 고백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진실이다. 이를테면 그는 애니 프로이든과의 연애가 실패했을 때 「사랑받지 못한 자의 노래」를 시작하였고, 화가 마리 로랑생과의 사랑 속에서 이 노래를 끝맺었다. 따라서 이 노래는 두 사건의 기념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이는 한 남자의 사랑이 그 대상을 바꿨다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첫 번째 연애에서 아폴리네르는 풍성한 지식을 가진 젊은 시인으로서, 다시 말해서 상징주의 시인으로서 자신을 부각시키려 했으며, 그 사랑이 실패했을 때 한 시인의 운명에 좌절을 느꼈다. 상징주의와 젊은 날의 기대가 함께 파멸했던 것이다. 마리 로랑생과의 관계는 그 좌절을 무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미학의 발견과 일치한다. 곧 우리 시대의 문학사에 대한 기념이다. 아폴리네르에 대한 이해는 그 자체가 한 시대에 대한 이해를 의미한다.기욤 아폴리네르(1880~1918)1880년 8월 26일, 로마에서 미지의 아버지와 익명을 요구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 당시에는 다른 이름으로 로마시청에 신고되었으나, 9월 29일 신 비토 성당에서 기욤 아폴리네르 알베르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어머니 안젤리카 드 코스트로비츠키양이 아이의 어머니로 입회됐다. 아폴리네르의 아버지는 나폴리 왕국의 전직 근위대 기병 장교였던 플란체스코 플루지 다스페르몬테였다는 증거가 제시되기도 하지만, 시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다.(아폴리네르 생전에 교황청 고위 성직자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나돌았으며, 그가 나폴레옹 황제의 증손임을 증명하려는 노력이 한 전기 작가에 의해 시도되기도 했다.) 어머니인 안젤리카 드 코스트로비츠키양은 폴란드의 대단치는 않지만 전통 있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1863년 러시아에 대항하여 폴란드 민족이 반란을 일으켰던 직후, 이탈리아에 망명하였다. 평소 카톨릭의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조숙하고 오만하여 사치와 쾌락을 좋아하는 성정플란체스코와 헤어진다.1887년 드코스트로비츠키 부인은 기욤과 알베르를 데리고 다른 한 남자와 더불어, 모나코 공국으로 이주하였다. 그날 강력한 지진이 이탈리아의 리비에라를 휩쓸었으며, 그 여진이 니스에까지 미쳤다고 한다. 아폴리나레는 그 추억을 간직하며, 『상형시집』의 「대서양 편지」에 “너는 1885년에서 1887년 사이에 일어났던 지진을 기억하느냐? 사람들은 한달 넘게 텐트에서 잠을 잤지.”라고 표현했다.4월에는 카톨릭 마리아회가 운영하는 생 샤를르 학교 제8학급에 입학하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이탈리아인들이 지배적이었던 이 공국에서 중등 과정의 프랑스 고전을 교육하기 위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었다.1892년 생 샤를르 학교의 제6학급이었던 아폴리네르는 지주의 아들인 잠 오니무스, 파리 신문 기자의 아들인 르네 뒤퓌 등과 동급생으로 우정을 나눈다.1895년 생 샤를르 학교가 공국의 명령에 의해 폐교되자, 기욤은 칸느 스타니슬라 학교 제2학급에 입학하였다. 폐교 당시 제3학급을 마친 기욤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1897년 니스의 리세에 입학하였다. 동급생이며 기숙생이었던 투생 뤼카와 사귀었으며, 함께 현대 문학을 섭렵하는 한편 ‘기욤 마카브르’또는 ‘기욤’이라는 필명으로 시를 써 모아 교내 회람 문집『복수자』『타협자』등을 발간한다. 뤼카는 훗날 변호사를 거처 행정관리가 되었으며, 아폴리네르의 후원자가 된다. 1911년 「모나리자」도난 사건과 관련하여 구속된 아폴리네르를 석방하는 데도 도움이 컸다. 특히 그의 저서『기욤 아폴리네르-한친구의 추억』(1920)에서 니스의 리세 시절 쓴 아폴리네르의 습작시들을 여러 편 전재하고 있다.1898년 기욤은 모나코를 배회하며, 발자크 톨스토이, 졸라, 엘레미르, 부르즈 등 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하는 한편 보카치오의 번역을 시도하였다. 좌파 신문인 『인민일보』를 구독하고, 그레퓌스파로 자처하며, 아나키스트 지식인들에게 동조한다.1899년 어머니와 함께 모나코 공국을 떠나 리용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어머니는 유태인 쥘어느 카페 주인의 딸 아리 뒤브와에게 많은 연시를 써 보냈다.『썩어가는 마술사』의 초안이 여기서 이루어졌다.이후 숙박하던 곳에서 도주를 하여 파리행 기차를 탄다. 10월 11일, 기욤 코스트로비츠키라는 이름으로 파리 경시청에 외국인 등록을 신고했다.1900년 파리에서의 궁핍한 생활을 계속됐고, 어머니의 권유로 행정관리나 은행원이 되는 길을 모색했으나, 실패. 외국인으로 자격증도 없어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이후 에스나르라는 삼류 소설가의 대작가가 되어 첫 소설 「무엇을 할까」를『르 마탱』지에 실었지만 보수를 받지 못했다. 6월, ‘파리 금고’라는 유령 증권 회사의 서기로 취직 거기서 르네 니코시아와 사귀게 되었으며, 그녀의 소개로 알게 된 파리의 한 극장 지배인에게 스타블로의 추억으로 엮어진 단막극「야반도주」를 맡겼으나 희곡으로 상연되지 않고 오랫동안 서랍 속에 묵혀진다. 이후 알게 된 친구 페르디낭 몰리나 다 실바에게서 무용 교사인 아버지를 도와『프랑스인의 우아한 몸가짐』의 원고를 정리했다. 아폴리네르는 이 유태인 교사로부터 성서에 대한 고증학적 지식을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1901년 ‘파리 금고’를 떠나 페르디낭의 누이동생 랭다 몰리나에게 수편의 연시를 썼으나 대답을 얻지 못한다. 그때 쓴 시구들은 이후 다른 여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서와 연시에 다시 이용된다. 그때 푼돈을 받고 에로소설「미를리, 또는 비싸지 않은 작은 구멍」을 썼다. 비슷한 소설「올리브의 영광」을 썼으나 원고를 기차칸에서 잃어버렸다.5월, 피아노 교사인, 니코시아의 어머니의 주선으로 부유한 독일 과부 드 밀호 자작 주인의 딸 가브리엘에게 불어를 가르친다. 8월, 드 밀호 부인을 따라 가정교사 자격으로 라인란트에 간다. 독일 시대의 시작. 8월 말, 이폴리네르는 가브리엘의 영어 담당 가정교사인 영국 처녀 애니 플레이든을 만나 처음부터 열렬히 사랑하게 되며, 그녀 역시, 태도가 불분명하지만, 이 사랑에 무관심하진 않았다.1902년 밀호 부인의 여러 소유지를 옮겨다니며 가정교사로의 임무를 수행때까지 독일 관계 기사 2편, 시 1편「은둔 고행자」, 단편소설 5편을 기고한다. 한편 애니와의 관계는 사랑의 기쁨과 비애가 교차하는 가운데 계속 되었다. 8월말, 계약 기간을 끝낸 기욤은 프랑스로 돌아와 가족과 합류하고 말단 은행원으로 취직한다. 이후 문학 예술계에 발을 들여놓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유럽인』지에 뒤셀로르프의 전시회에 관한 기사를 기도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1903년 문예지『펜』이 카레 ‘황금 태양’을 빌어 정기적으로 열고 있는 문학의 밤에 참석, 알프레드 자리, 앙드레 살몽, 외젠 몽포르 등 젊은 문인들을 알게 된다. 그가 이 문학의 밤에 낭독한「신더하네스」는 상당한 주목을 끌었다. 이후『펜』지에 「미래」와「도둑」을 발표. 젊은 문인들과 문예지『이솝의 향연』의 창간을 계획하고 주간을 맡았다.애니와의 관계 회복을 꾀했으나, 실패. 이때 매월 정기적으로 간행되는『이솝의 향연』에 시를 차례로 발표하다.1904년 근무하던 은행이 문을 닫고, 함께 근무하던 증권 중개인과 손을 잡고『연금 생활자, 소자본가 지침서』를 창간. 이때 아폴리네르는 투자 전문가로 행세한다. 마지막으로 애니를 찾아간다. 그녀의 부모들이 결혼을 반대하면 그녀를 납치하겠다는 아폴리네르의 협박에 불안을 느낀 애니가 미국으로 떠났다. 8월,『이솝의 향연』은 통권 11호로 폐간. 피카소와 막스 자콥을 알게 된다.1905년 문학 애호가이며 수필가인 앙리 들로르멜의 후원으로『부도덕지』를 창간. 이후『현대문학』으로 제호를 변경하였으나, 2회를 마지막으로 폐간. 기욤은 이때 시 1편, 소설1편, 그리고 피카소에 관한 긴 논문을 실었고, 이 논문은 아폴리네르 최초의 본격적인 미술 비평이 된다. 은행원으로 다시 취직했으나, 폴 포르가 계간지『시와 산문』을 창간하면서, 창간호에 아폴리나레는 앙드레 살몽의 주선으로 「살로메」등 수편의 시를 발표한다.1906년 시를 발표할 다른 지면을 찾았으나, 여의치 않았고, 은행 업무도 벌이가 시원치 않아 두 편의 에로 소설을 쓴다.1907년 생 샤를르 학교의다. 이후 피카소의 소개로 마리 로랑생을 처음 만난다.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이 여류 화가에게 반한다. 하지만 어느 화상을 공격하는 기사를 기고하고 물의를 일으킨 뒤, 이때부터 아폴리네르는 신문 및 잡지에 기사를 써 생계비를 벌게 된다. 이 해 콩트를 발표하기 시작. 그리고 마티스에 관한 기사를 기고하면서 입체파 회화의 시대가 열린다.1908년 소설평란의 기고를 맡게 된 아폴리네르는 wjfqdms 시인들에 대해 언급하고 자신의 문학적 입장을 ‘새로운 동시에 인간적인 서정성 탐구’라고 천명하며『질 블라스』지에 「회충」을 발표. 이때 아폴리네르와 마리 로랑생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루소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1909년 친구 몽포르가 주관하던 잡지『마르쥬』에 루이즈 랄란이라는 가명으로 여류 문학에 대해 악의에 찬 비평을 게재한다. 이 가명으로 수차례 시를 발표. 비평을 연재하기도 했다. 7월, 아폴리네르가 편집하고 서문을 붙인『사드 후작의 작품집』이 출간, 이때부터 사드가 재발견된다.1910년 단편집『이교시조회사』의 간행으로 스톡 출판사와 계약.『동물 시집 또ㅤㅡㄴ 오르페우스의 행렬』의 출판을 준비하며, 라울 뒤피에게 삽화를 부탁하는 편지에 “나는 경탄한다”가 자신의 좌우명이라고 씀.『이교시조회사』는 콩쿠르상 수상작에 후보로 올랐으나, 수상에는 실패했다.1911년 『이교시조회사』가 포, 호프만, 네르발, 보들레르 의 작품과 유사하다는 평을 받았으나, 짧은 인용과 며 편의 시밖에 알지 못한다며 반박함. 6월부터 아폴리네르란 이름을 쓰기 시작하며, 동시에 연재된『일화로 엮은 삶』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5월, 임시 비서 제리 피에레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페니키아 흉상 하나를 훔펴 아폴리네르의 집에 숨겨둔다. 그리고 8월, 「모나리자」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도난당한다. 이를 계기로 피에레가『파리 주르날』에 자신의 절도 행위를 고발하여 물의를 일으키자 당황한 아폴리네르는 보관하고 있던 피에레의 장물을 이 신문의 중재로 박물관에 돌려준다. 한다.
    인문/어학| 2020.11.27| 4페이지| 2,500원| 조회(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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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채만식 탁류 작품론
    채만식의 1. 작가소개* 채만식(蔡萬植; 1902~1950년) 호는 백릉(白菱), 채옹(采翁).채만식의 삶1902년 6월 17일 전북 옥구군에서 6남 3년 중 5남으로 출생.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 부속 제일와세다고등학원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그 후 조선일보사, 동아일보사, 개벽사 등의 기자로 전전하였다가 1936년부터 전업 작가로 활약하였다. 소설 뿐 아니라 희곡에서도 작품을 집필하기도 하였다.*1920~1930년대 주로 농촌의 현실, 지식인의 가난한 모습, 노동자의 갈등, 유이민 현상 등을 다룬 단편 창작.*1934~1938년 현실 인식의 성숙도와 예술적 성취도가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음. ?레디메이드 인생?,?탁류?,?태평천하?, ?치숙? 등 그의 대표작이 이 때 발표되었다.* 1939~광복 친일적인 내선일체적 작품을 썼다.*광복 후 작가 스스로 작품을 통해 친일 행위를 비판하였고, 그 후 친일파가 다시 득세하는 민족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풍자하는 작품을 발표하였다.2. 배경탁류의 배경: 군산. 공간배경 소개 1930년대. 일제강점기.* 탁류의 고향 군산.는 금강유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군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일본 식민지 당시 일본은 본토와 전쟁터의 일본군에게 보내기 위해 조선의 쌀을 강제 징집한다. 군상항은 그 쌀들이 보내지던 항구. 당시 군산은 쌀이 넘쳐나고 그로 인해 미두장이 성행. 미두장은 쌀로하는 주식 같은 걸로 보이는데 도박성이 있어서 재산 날린 사람들 많았다). 탁류의 공간은 고정된 곳이 아니라 열려진 자유로운 공간에서 펼쳐지고 있으며, 작중인물들 사이의 여러 관계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서울서울은 시골에 사는 사람들에겐 동경의 장소이지만 황폐해져가는 그들의 고향이, 사실 서울을 닮아가고 있음은 모르고 있다. 또한 얽히고설킨 자신들의 운명이 고향에선 풀어질 수 없기에 그 해결지로 서울을 동경한다. 서울로만 가면 뭐든지 해결될 수 있을 것만 같은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고 실제로 최후의 피난처로 앉아 있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서울서는 별반 다녀보지도 못한 찻집이 불현듯이 그리웠다.그러나 이곳에는 그런 기분이 가라앉는 찻집이 없으니 소용없는 말이고, 그냥 선창이나 공원으로 거닐까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은 어제 밤을 새워 술을 먹은 몸이 고단해서 내키지를 않는다.*“만 원을 가지구 어떡허게?““응 그놈 만 원을 가지구서 나하구 둘이서 서울루 가거던...... 자네 혼자 가기가 적적하거들랑 저 애 행화나 데리구.”“흥!”“하아따! 지레 그러지 말구 끝까지 들어 봐요...... 그렇게 서 울루 가서, 자넬라컨 문 밖에 아무 데나 깊숙이 들어앉어 있으란 말야, 삼 년 아니면 다직해야 사 년......”“공금 횡령해 가지구 도망갔다가 잽히잖는 놈 못 봤네...... 제기, 상해나 북경 같은 데루 뛰었다두 잽혀와서 콩밥을 먹는데, 횡차 서울!”“그야 저 하기 나름이지. 조심을 안 하니까 붙잽히지, 죽은 드끼 들어앉어만 있으면 십 년 가두 일 없어요.”*피하려도 패히지지도 않고, 그게 안타깝다 못해 필경 제 마음이 울고 싶게 짜증만 났었다.그러나 다만 한 가지, 인제 오래잖아 서울로 가는 날이면, 그것도 활활 털어지고 마음 가뜬하겠지, 이렇게 믿고 일변 안심을 했었다.3. 인물 소개* 정주사 - "인간 기념물" 경제적 능력이 전혀 없으며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없는 인물.가부장제의 몰락과 모순을 보여줌. 작품 내내 서술자의 조소의 대상이며,가장 빈번하게 풍자의 대상이 되는 인물.* 초봉 - 정주사의 맏딸. 남자에 순종적이고 의존적이며, 가족에 대해서는 희생정신을보이는 고전적 여성. 태수, 제호, 형보를 거치면서 서서히 몰락. 형보의 악행이계봉과 송희에 위협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형보를 살해함.* 계봉 - 정주사의 둘째 딸. 승재와 함께 작가가 긍정적으로 본 인물. 초봉과는 대조적인성격과 외모로, 신여성상을 보여줌. 부모를 위해 억지로 하는 결혼과, 결혼을 대가로물질을 받는 것을 비판함.* 태수 - 초봉의 첫 남편. 위조를 통해 마련한 돈으로 유흥을후에 계봉의 연인이 됨. 형보를 살해한초봉의 자백을 권고하면서 삶의 희망을 주기 위한 모습을 보임.4. 의존적, 속물적 여성으로 나타난 초봉초봉은 당대의 이해관계에 따라 철저하게 유린당하는 여성으로 등장하지만 이러한 불행은 어느 정도 본인이 자처했다고 볼 수 있다.부모의 요구도 있었지만 고태수와의 결혼은 본인 스스로가 선택한 길평소 이성적 호감이 있었던 승재가 있는데도 고태수의 외모, 집안, 학벌, 재물을 따졌을 때 속물적인 환심에 이끌려 삶의 중대사를 결정한다.초봉이 맨 처음 그날, 태수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다가 승재와 비교해서 승재가 그것만 못하니까, 그것을 시기하여 태수한테 반감이 생긴 것, 그것이 벌써 심상치 않을 시초였다. (중략) “태수는 고향이 서울이요, 야안의 집 과부의 외아들이요, 재산은 천 석 추수나 하고, 지금 은행에 다니는 것은 장차 무슨 큰 경륜이 있어 일을 배울 겸 그리하는 것이요 (중략) 모친의 여러 가지 설명으로 해서 초봉이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태수의 영상은 이제는 더할 나위도 없이 찬란해 가지고, 승재의 그렇잖아도 뒤로 밀려간 영상을 더욱 압박했다. 163~166자본주의의 폐해에 처참하게 짓밟히는 비련의 여주인공이지만 초봉 또한 자본주의적인 사람가난을 알기에 재산과 안락한 삶을 욕망하는 그녀는 남편, 혹은 남성 배우자를 자기 삶을 의탁할 대상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그녀는 본인 스스로를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체가 아닌 남성에게 의존을 해야만 살 수 있는 의존적인 존재로 전락시키므로 그 남성에 대한 본인의 기호나 의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으로 희미하게 납득되는 것이다.그는 제호가 이야기한 생활의 설계 가 적잖이 만족했다. 욕심 같아서는 기왕이니 제 의향으로 가령 친정집의 생활 같은 것도 어떻게 요량을 해달라고 말을 해서 다짐 같은 것이라도 받고 싶었으나, (중략) 초봉이는 비로소 제가 제호의 아낙이 되는 것에 대한 제 기호를 생각해 본다. 그러나 막상 생각해 보아야 스스로 이상할 만치 좋고 언짢고 간에 분간을 할 수도 없고 대한 무의지는 그녀가 당대 사회에서 여성이 지녀야 할 미덕으로 인내와 순종을 강요받은 것에서 기인한다. 초봉은 ‘초봉’이라는 자신이 아닌 딸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철저히 이타적인 삶을 사는 것을 요구받았던 당대 여성들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있다.5. 연애와 정조초봉에게 결혼과 사랑는 전통적인 가치와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초봉은 자신의 의지와 취향과는 상관없이 고태수와의 결혼을 수용한 데에는, 가난한 집안의 장녀라는 사실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물론 초봉도 승재란 인물에게 연애의 감정을 느끼지만, 정략결혼이란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채봉은 아버지의 선택을 따른다. 특히 초봉은 자신의 삶이 남자로 인해 비극적으로 변했지만, 여전히 남자에게 의지하려는 태도로 일관한다. 그녀에게 남자는 자신을 파탄하게 만드는 대상이기도 하면서, 삶을 영위하게 만드는 존재이다. 결국 채봉의 삶은 가부장제의 사슬을 거부하지 못한 구식 여성의 비극적 삶과 연애사상을 조명하는 것이다.반면에 계봉은 자유연애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계봉은 승재를 좋아하여 결국 승재의 마음을 잡는데 성공한다. 계봉은 승재가 채봉을 좋아하는 것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승재에게 접근하였고, 그 적극성은 육체적 접촉으로서도 나타난다. 또한 계봉은 승재에게 연애와 결혼은 다르다며, 연애하다가 마음이 바뀌면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입장을 밝히는 것으로 그 시대 자유연애의 한 측면을 반영하고 있다. 타인의 요구대로가 아니라 자신의 주체적 선택으로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계봉은 오늘날의 여성주의시각에서 보아도 손색이 없으리만치 이상적인 여성인물이다.전통적인 조선, 한국 사회에서, 정조는 여성-처녀-의 가치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가치 판단은 비단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의 사고에서 뿐만 아니라 여성들 스스로도 각인하고 있었다. 여성에게 바라는 수많은 전통적 사회상 중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이자 정조가 없는 여성은 다른 어떤 면모도 의미가 없다. 고로 처녀에게 정조를 빼앗긴다는 것은, 빼 돈을 빼돌린 일과 그것으로 붙잡혀 징역을 살게 될 생각을 하자 죽어버리겠다고 계속해서 결심을 한다. 죽음이 모든 문제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탈출구로 보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죄책감이나 두려움 같은 것 보다 지금 이 상황을 당장 회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대하고 있다.“죽어야 하겠고, 죽어서 잊어버리거나 하지 않고는 도저히 마음을 견뎌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이것은 한 개의 순수한 결벽이다. 이 결벽으로 하여 죽음을 뜻한 초봉이는 죽어야 할 또 하나의 다른 이유를 깨닫고...” p.258이런 생각은 형보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 초봉이 또한 하고 있다. 형보에게 복수를 하던지 해를 입히려 하기 보다는, 스스로가 죽으면 이 문제에 대해서 잊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죽음이라는 강을 건너면 모든 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이다. 다르게 보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죽음’밖에 없을 만큼 절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7. 초봉의 타락초봉이 완전히 타락하는 장면초봉은 천성자체가 부정적 인물은 아니었으나 파멸해 가는 사회구조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수레바퀴에 밀려 욕망의 절제가 요구되는 환경에서 좀 더 긍정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에 지켜나갈 자제력을 상실한 채 부정화 되어간다.그녀는 초기에 약국 제중당에서 일을 하며 아버지와 가족을 위해 젊음과 미모를 바치려는 헌신적인 여성이었다. 하지만 생활 능력이 없는 아버지 정 주사를 대신하여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장녀의 입장이었다. 아버지의 장사 밑천을 떼어준다는 고태수의 거짓 약속을 믿게 되면서부터는 동생계봉이 조차도 그녀를 “아주 케케묵은 생각”으로 평가하는데 결국 초봉은 봉건적 자기희생의 이데올로기적 주인공이 된다.이것은 훗날 피해갈 수 없는 형보 사슬에 스스로를 얽어매는 덫의 역할을 수행하기에 충분했다. 인간이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의 삶 속에서 상호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인간이 갖고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친애욕과 물질욕등이 밀접히 관계하고 있다. 초봉의 것은 제친다.
    인문/어학| 2020.11.27| 8페이지| 4,000원| 조회(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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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손 웰즈, 오손 웰스, 오슨 웰즈,시민케인(사진有) 작품론
    오손 웰즈, 오손 웰스, 오슨 웰즈 (1915-1985)지난 4월 오손 웰즈의 유품이 경매에 출품되었다는 뉴스를 봤다. 카메라와 담뱃재털이 등을 비롯해 영화 「시민 케인(1941)」의 대본 24페이지까지 모두 18만 달러에 팔렸다. 그의 유품은 그만큼 가치가 있다. 그는 미국 위스컨신 주에서 태어나 연출가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영화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재였다.오손 웰즈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역시 「시민 케인(1941)」이란 작품 때문이었다. 유명한 작품이기에 기대를 했고, 감상하는 내내 흥미있었다. 「시민 케인(1941)」이란 작품은 오손 웰즈에게 빼놓아서는 안 될 작품이다. 그를 ‘천재’라고 불리게 만든 작품이면서, 그의 평생을 따라다닌 걸작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는 오손 웰즈의 모든 작품을 보고,「시민 케인(1941)」만이 그의 최고의 작품이라 했다. 천재 혹은 미치광이로 불리던 예술가, 오손 웰즈는 분명 배우였다. 그가 영화상 걸작으로 손꼽히는 「시민 케인(1941)」를 내놓고, 명성을 이어가기 위한 투쟁은 계속됐다. 오손 웰즈의 작품에서는 「시민 케인(1941)」의 뒤를 이을 만큼에 작품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강력한 작품이었고, 독창적인 구성과 테크닉, 문학적 의미, 그리고 어쩌면 텍스트까지도 완벽했던 것이다. 그는 열정이 있었다.그는 배우였다. 그의 아버지는 발명가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손 웰스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 리처드 헤드 웰스는 64세였다. 아버지는 호텔 경영자이자 기업가이기도 했다. 발명가였던 아버지는 몽상가이면서 종종 기발한 생각의 소유자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발명한 자전거와 오토바이용 탄소 전조등을 판매하여 많은 돈을 벌기도 했다. 어머니 베아트리스 이브 웰스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 부모의 영향인지 오슨은 창조적인 재능을 타고난 아이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향으로 「위대한 앰버슨가」에는 발명가가 직업인 인물이 등장했고, 뚜껑이 열려있고 악보가 펼쳐져 있는 피아노가 영화에서 나타나기도 있다. 정형외과 의사 모리스 번스타인은 오슨의 모습에 반해 여러 가지 선물(선물 중에는 마술도구가 포함되었고, 그러한 영향으로 「진실과 거짓」이란 작품에서 시작 부분에 마술사처럼 능수능란한 자태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면서 베일의 한 쪽을 걷어올린다.)을 주었다고 한다. (「시민 케인」에는 번스타인이란 인물이 등장한다.) 그만큼 주변 가족들과 인물들에게 영향을 받았다.오손 웰즈는 5세에 셰익스피어를 배웠고, 8세 때 아버지와 함께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11세에 그는 를 분석했고, 중국을 여행했다(「상하이에서 온 여인」의 배경이 되었다.). 그리고 13세에 극단을 설립했고, 14세에 연극 의 연출로 시카고 연극협회상을 수상했다.이후에는 모로코를 거쳐 투우를 배우기 위해 스페인으로 건너가기도 했고, 미국에서 캐서린 코넬 극단에 입단하고, 당시 유명한 뉴스 시리즈 프로그램 에서 정치인들의 성대모사로 라디오에 데뷔한다.머큐리 극단의 일원이 되면서, 희대의 사건이 터진다. 오손 웰스는 1938년 10월 30일(미국에서 4월 1일 만우절과 같은 핼러윈 데이 전날) 라디오 방송실에서 이름이 같은 SF소설가 허버드 조지 웰스의 「세계 전쟁」을 각색하여 화성에서 온 침입자들이 뉴저지 주를 공격하고 있다고 믿게 만듦으로써 미국 전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데 성공했다.“2X2L 콜링 CQ... 본부 나와라. 아무도 없나? 거기 … 아무도 없나?”할로윈을 맞이하여 장난을 칠 의도로, 벌어지는 '사건들'을 실시간으로 알리는 뉴스 속보를 흉내 내어 각색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전운이 짙어가던 상황에서 미국의 대중은 화성인들의 침공 소식을 즉각 사실로 믿어 버렸고, 집단적인 히스테리가 뒤를 이었다. 그 방송으로 웰즈는 순식간에 악명을 떨쳤고, 다음날 공개 사과문을 발표해야 했다.그렇게 이름을 알린 오손 웰즈는 드디어 그의 대표작이자 영화계에서 길이 남을 작품을 만들었다.「시민 케인」(1940)은 그가 남긴 역작이며, 나이 25세에 불과한 젊은 감독의 작품이었다. 심지 이끌어 냈다. 이듬해에는 「위대한 앰버슨가」를 만들었다. 흥행에 크게 성공했던 이 영화는 그가 처음으로 작품을 스튜디오의 요구에 따라 재편집한 영화이기도 했다. 이후에도 「공포로의 여행」(1942-1943, 오손 웰즈가 감수한 노먼 포스터의 영화), 「스트레인저」(1945-1946), 「상하이에서 온 여인」(1946-1948), 「맥베스」(1947), 「오셀로」(1949), 「아카딘 씨」(1954), 「악의 손길」(1957), 「젊음의 원천」(1958), 「심판」(1962), 「심야의 종소리」(1964), 「불후의 이야기」(1966), 「베니스의 상인」(1969), 「진실과 거짓」(1973), 「오셀로」(영화촬영, 1978) 까지 다양한 작품을 연출했다.그는 이러한 자신만의 작품을 위해 텔레비전, 광고, 단역까지 포함해 백여편을 출연했다. 작품을 만들고자 했던 열정이 컸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 「시민 케인」을 넘어서는 작품이 나오진 않았다. 연이은 실패와 ‘완전한 작품’의 제작을 꿈꾸던 그의 성격으로 인한 것이다.이제 신동이란 별명이 어울리지 않게 된 웰즈는 남은 날들을 스튜디오의 영화 「제인 에어」(1944)에 출연하여, 자신의 프로젝트「미스터 아카딘(1955)」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면서 보냈고, 그 사이 때때로 주류의 걸작들「제3의 사나이」(1949), 「캐치-22」(1970)에도 참여했다. 1970년대에는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우정에 일부 힘입어 그의 작업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했다.그렇지만 그가 영화사의 위대한 인물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가 내세운 영화들은 하나같이 새롭고 독창적인 방법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가 천재는 외롭다고 했던가. 그래서 그가 발견한 영화적 기법은 항상 돋보였다. 보르헤스는 「시민 케인」을 중심없는 미로라고 묘사했다. 그만큼 시간과 여러 타입의 서술, 여러 가지 시점 사이로 소용돌이치는 서사 구조를 요악할 적절한 이미지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스토리는 자신이 주체할 수 없는 사건에 휘말린 강하고 야각했단다.예를 들어 「시민 케인」의 오프닝은 주관적 카메라를 정교하게 사용하였다. 카메라 움직임의 기능으로 문자적이며 동시에 은유적이고, 공간과 신비를 설정하면서, 스토리의 시작을 서사적 공간의 시작으로 시각화 시켰다. 외부에서 내부로 서슴지 않고 들어가는 카메라의 이동은 마술의 눈처럼 기능하여 이야기꾼의 세계와 상상력 속으로 가는 길을 연다. 공간을 초월하고 금지를 어기는 마술의 눈으로서의 카메라는, 스토리 속으로 무자비하게 침투하며 호기심의 대상인 성을 향하여 좁혀 들어가는 탐색의 눈을 갖고 있다. 또한 마지막 부분에는 카메라를 역으로 움직여서 스토리를 시작했던 공간이 마찬가지로 닫히며 관객을 원래의 위치로 돌려놓는다. 이러한 카메라 움직임은 웰즈가 최초의 할리우드 프로젝트로 참여했던 「암흑의 한가운데」의 각색에서 계획했던 위대한 실험의 흔적이 보인다. 이 프로젝트는 머큐리 극단의 라디오 시리즈 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거기서는 서술자 ‘나’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소설이 이야기꾼의 ‘보이스 오버’와 합쳐진 극적 연기로 각색되었다. 「암흑의 한가운데」는 그 중의 하나였다. 1인칭 서술을 새로운 매체인 영화에 맞게 변형시키기 위해 웰즈는 카메라를 ‘나’의 눈으로 사용하고, 영화 전체를 주관적 카메라를 사용하여 찍기를 원했으며, 이것은 후에 로버트 몽고메리가 「호수의 여인」에서 사용하였다.카메라의 시선이 스토리 속의 1인칭 참가자인 캐릭터와 연관되지 않기 때문에 스토리 세계 밖의 해설자 기능을 취하면서 화면을 바라보는 관객의 눈을 동화하며 대표한다. 카메라는 관객이 일관성 있는 그림으로 통합할 수 없는 신비한 풍경이 지나가기도 하고, 거미원숭이가 곤돌라와 병치되어 있는가 하며, 장면과 배경 음악은 고딕품의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다. 구체적인 서사적 수수계기가 설정되기도 전에 미장센이 먼저 수수께끼가 된다. 장면을 읽고 싶은 욕망이 자극되면서 동시에 좌절된다. 관객들은 화면상의 시각적 단서를 포착하도록 종용되지만, 동시에 이미지의 성격이 이해의 만족을 연기하도록 적인 시간과 공간의 이동 개념을 뒤집는다.카메라로 주관적 시점을 묘사하고, 비연속적인 편집기법과 병렬, 다층적 시점, 열린 이야기 구조, 표현주의적 조명, 사선 앵글, 딥 포커스, 롱 테이크 등을 통해 고전 영상문법 뿐만 아니라 세계 영화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모든 기법들이 오손 웰즈의 손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것은 아니며, 일부 영화들에서 부분적으로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웰즈의 업적은 이 기법들을 한 편의 영화에 조화롭게 통합한 데 있으며, 이는 영화적 미학에도 좋은 평을 받았다.결국 「시민 케인」은 실제 인물인 허스트에 의해 방해받기도 하고, 웰즈는 탄압을 받기도 했다. 한동안 할리우드에 발을 붙일 수도 없었다. 비도덕적이고, 이기적인 시민이며, 신문 판매 부수를 늘리기 위해 황색 저널리즘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거대한 언론제국을 건설한 장본인인 허스트.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세계 각국으로부터 다량의 골동품을 사들였고,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며, 독선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인물이었다.오손은 영화의 다양한 기법과 서사적 구조, 그리고 ‘플래시백’과 ‘액자식 구조’, ‘회고 시점’ 등의 인터뷰를 통해 낱낱이 고발한다. 이에 오손 웰즈의 연출력은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연출가의 능력으로 인정받은 것도 있지만, 서사적 능력과 시나리오 작법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할지도 모른다. 시대를 반영하고, 비판하며, 시사하는 바를 잘 표현한 작가였기도 했다.분명 고전적인 감독이라면 대 여섯 개의 쇼트로 분할했을 장면을 단지 하나의 시퀀스-쇼트로 보여주는 것이 웰즈의 독창성이었다. 많은 비평가들은 오손 웰즈가 만들어낸 깊이 있는 화면 구성이 매우 사실적인 기능을 한다고 믿었다. 고전적인 장면 분할에서 관객을 미리 만들어진 대 여섯 개의 장면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웰즈의 깊이 있는 화면구성덕분에 관객은 스스로 자신들이 볼 것을 선택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비평가인 앙드레 바쟁이 지적하듯이 이런 웰즈의 독창성았다.
    인문/어학| 2020.11.27| 9페이지| 4,000원| 조회(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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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슐리K르귄,빼앗긴자들 독후감
    어슐리 K. 르귄의 책을 읽기 전, 두께에 놀랐다. 그리고 유명한 국제 도서 상을 여러 번 수상한 작가란 것도 신기했다. 엄청난 실력의 작가구나 싶어서 기대하며 읽었다.은 유토피아에 대한 인류학적 고찰과 새로운 사회에의 탐구가 만들어 낸 SF 명저. 이런 식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책을 읽기 전에는 맨 뒷장에 그려진 지도를 봐야 한다.(나는 너무 늦게 그림을 발견해서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선 중간에 위치적 설명을 다시 찾아 읽어야 했다.) 지도를 본다면 르귄이 그린 세계가 조금 이해가 된다. 의 세계는 우라스와 아나레스란 두 개의 행성을 볼 수 있다. 우라스와 아나레스는 쌍둥이 행성으로 처음에는 하나의 민족이었지만 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오도의 혁명으로 아나레스로 넘어간다. 아나레스는 남녀가 평등한 세상, 정부가 없는 세상을 추구한다. 그곳에서 자란 쉐벡 박사가 초청받게 된다. 우라스 행성에는 두 체제가 존재하는데 ‘에이 이오’와 ‘츄’란 나라가 존재한다. 두 나라는 쉐벡 박사를 초청하는데 박사는 ‘에이 이오’를 선택해 간다. 스스로 아나키스트라고 부르며 어찌 대할지 물어보고 생활을 시작한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작가 르귄이 만든 세계이다. 작가는 온전히 색다르다는 세계를 만들었다. 행성과 행성을 연결하는 우주선이 존재한다는 것. 새로운 언어의 통칭을 만든 것. 환상적 세계를 구축한 점은 정말 대단했다. 그렇지만 작가가 서술한 세계와 통칭을 현실에 빗대어 만들기만 한다면 이건 현실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책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고 사는 방식과 전혀 다르지 않다. 특히 사람들의 생활방식은 같다고 볼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하기엔 우라스의 나라들이 우리가 볼 수 있는 정부가 존재하는 세계. 그리고 소유를 하고 욕망과 지위에 따라 사는 삶을 사는 것이 비슷하다. 반대로 아나레스도 언뜻 보면 우리랑 비슷하다. 그렇지만 약간 다른 점이 있다.이 부분이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아나레스는 무정부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그래서 우라스를 떠나 새로운 세상을 찾아간다. 평등을 주장한 사람들에게 쌍둥이별을 내주었다. 함께 공생하며 살아가자는 뜻으로 해석된다. 물론 큰 교류는 없었고, 서로의 사상을 존중하기도 금기되었다. 하지만 우라스의 사람들도 그렇고 아나레스의 사람들도 서로의 사상은 존중하기에 무사히 20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쉐벡박사가 언급했듯이 아나레스는 무정부와 평등, 체제가 없는 곳을 추구함에도 알게 모르게 자유가 억압되고 금기시되는 행동들이 존재했다.쉐벡이 연구소를 옮기게 됐을 때 미티스가 한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미티스는 자유를 인정하는 아나레스에서 쉐벡의 마음을 흔드는 말을 한다. “최고를 찾는 것이 자네의 의무야, 쉐벡. 잘못된 평등주의에 속지 말게. 자넨 사불과 함께 일할 거야. 그는 뛰어나지. 그는 자넬 심하게 부려 먹을 거야. 하지만 자넨 자유로이 따라가고 싶은 선을 찾아내야 해. 여기에 한 학기만 더 머물고 애비네이로 가게. 그리고 그곳에 가면, 조심하게.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권력은 중심에 내재해 있는 법이고 자넨 중심으로 가는 거니까. 난 사불을 잘 알지 못하네. 그를 나쁘게 볼 만한 이유는 없어. 그래도 이 점을 마음에 새겨두게. 자넨 그의 사람이 될 거야.”(72쪽)철저히 소유격인 언어도 존재하길 거부하는 세계에서 ‘그의 사람’이란 말은 듣기 거북했을 것이다. 또한 쉐벡이 아는 아나레스는 이런 곳이 아니라고 배웠지만, 점차 어른이 되고 일을 하면서 현실은 다르단 걸 알았다. 미티스는 쉐벡에게 보이지 않는 권력에 대해 말했다. 아나레스는 사실 그러한 사회가 되었었다. 그래서 쉐벡은 우라스에서 민주주의적 행보가 강한 ‘에이 이오’로 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에이 이오’의 세계는 더욱 추잡하다고 느꼈다.“아나레스에서 그는 사회의 기대치에 도전하여 개인적 소명받은 일을 하기로 선택했다. 그일을 한 것은 저항이었고, 사회의 안녕을 위해 자아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었다. 여기 우라스에서는 저항이라는 행동이 사치스러운 자기 탐닉이 된다. 에이이오에서 물리학자가 된다는 것은 사회나 인류, 진실 같은 것에 봉사하기 위함이 아니라 국가에 봉사하기 위한 것이다.(중략) 그는 이제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면에서 우라스에 온 것이 실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처음 저지른 큰 실책이며 남은 생애 동안 지속될지도 모르는 실수였다.”(309쪽)쉐벡은 자신의 물리학을 갖기 위해 우라스의 두 나라, ‘에이 이오’와 ‘츄’가 싸우는 것을 봤다. 또한 ‘에이 이오’에서 자신이 정치적으로 물리학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빈민 계급과 함께 한다. 정부는 이를 가만두지 않는다. 결말은 역시 쉐벡은 돌아가기로 한다. 세계 정부 주재 테라 대사관을 찾아 어디로 갈지 결정한다. 쉐벡은 뼈속까지 오도니안이라고 묘사되어 있다.(378쪽) 아나레스는 세계 정부 주재 테라 대사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대화를 하면서 우라스가 지옥이라고 말하는 쉐벡과 우라스를 낙원과 근접한 세계라고 일컫는 테라 대사의 언쟁이 있다. 이 언쟁을 보면 도대체 무엇인 낙원인가에 대해 고민을 던지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쉐벡은 아나레스로 돌아가길 원했다.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사람들인 오도니안들이 세계 정부 사람들을 환영할지도 의문이었다. 도착이후 시간에 대해선 서술하지 않았다. 그리고 쉐벡의 물리학, 시간에 대한 이야기도 그리 탁월한 서술은 없었다. 그 물리학이 무엇이든 이 책에서는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에서 중요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 낙원이고 서로의 낙원이 반대쪽 쌍둥이별에 있겠단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하다. 우라스와 아나레스 사람들은 상대의 별이 각 행성에선 달이라고 생각한다는 문장이 있다. 우리가 달을 보면서, 이야기를 만드는 것처럼. 우라스와 아나레스에선 서로의 달을 보면서 낙원을 꿈꿨다. 서로가 만들어낸 상황임에도 보다 더 좋은 낙원을 빼앗겼다고 여겼나보다. 누가 누구의 낙원을 빼앗았는진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건 낙원은 어디에도 없고, 어디든 세상이 발전하거나 행보를 결정하기 위해선 언쟁이 존재하고, 전쟁과 혁명은 있다. 그건 불가분한 사실이다. 그렇게 본다면 낙원은 어디에도 없을 수도 있다. 이 책은 유토피아의 존재여부를 묻고 고찰하기 위한 책이지 판단을 강요하는 책은 아닌 듯하다.
    독후감/창작| 2020.11.27| 3페이지| 2,500원| 조회(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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