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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통일
    1.서론주변국의 강력한 견제와 이해관계가 얽혀있어 한국의 통일보다 더 어려울 것이라 여겨지던 독일이 어느덧 올해로 통일 20주년을 맞이하였다. 냉전이 낳은 분단의 고통을 오늘날 지구촌에서 유일하게 짊어지고 있는 우리로서는 독일의 통일이 남일 같지 많은 않다. 우리는 아직까지 이루지 못하고 있는 통일을 독일은 어떻게 이루었는지 그리고 그 후 변화와 문제점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다. 또한 이러한 문제점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2.전개2.1.독일통일의 배경과 과정※배경독일 통일에서 가장 먼저 논할 수 있는 것은 국제사회의 변화이다. 고르바초프가 이끄는 소련의 태도 변화는 사회주의 국가 전체에 커다란 개혁 요구에 불을 당겼다. 소련의 개방과 개혁정책으로 인해, 1989년에 이르러 도미노처럼 유럽 사회주의 체제가 힘없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또한 헝가리의 국경 개방은 동독의 민주혁명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미국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는데 미국은 독일통일을 지지함으로써, 유럽 및 주변국들의 동의를 얻어내는데 도움을 줬다. 둘째로 동독인들의 민주혁명과 조속한 통일 결정을 들 수 있다. 동독인들의 탈출과 반정부 시위가 동독 정부를 압박했고, 자유로운 선거가 통일을 앞당겼다. 셋째로 서독인들과 동독인들은 지속적인 경제적·사회적 교류를 통해 상대방을 이해하고, 어느 정도의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넷째로 자유 민주주의·법치주의 국가로서 그리고 시장 경제와 사회복지를 적절히 결합해 세계 최고 수준의 복지 국가를 이룬 서독은 동독인들을 흡인하기에 충분히 우월했다. 또한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며 전쟁의 폐허를 딛고 눈부신 경제 성장을 해 온 독일은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3위의 경제 대국으로 다시 일어섰다. 동?서독 경제적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경제력이 서독에 없었더라면 통일 이후에 엄청난 혼란과 갈등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따라서 서독의 막강한 경제력은 너무도 급작스러웠던 통일을 껴안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다섯째로 독일의 연방국가적 전통이다. 독일은 역사적으로 지방분권 국가였기 때문에 지방정부가 연방정부에 가입하거나 탈퇴한 경험이 역사적으로 많다. 그래서 서독 기본법도 동독의 연방으로의 가입을 가능하도록 열어두었던 것이다.※과정독일 통일의 첫 걸음은 1969년 10월에 들어선 빌리 브란트 정부의 동방정책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브란트 서독 수상은 취임연설에서 "동독의 국제법상 승인을 고려할 수 없으나, 동독의 존재를 독일내의 제2의 국가로 인정하여 동등자격의 기초 위에서 동독정부와 만날 용의가 있다."라는 동방정책을 발표하였다. 이와같은 서독정부의 제안에 대해 동독정부는 한때 상이한 입장을 취했으나 점차 협상의 동등한 자격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결국 양 독 관계 정상화 발전단계는 이를 기점으로 정상회담까지 진전되는 과정에 진입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역사적인 제1차 동서독 정상회담은 70년 3월 19일 동독의 에르프르트에서 서독의 브란트 수상과 동독의 슈토프 수상의 만남으로 성사되었다. 하지만 본 회담에서 양 독 정부를 대표하는 쌍방의 수상은 각자 그들의 기본입장을 공표하는데 그쳤다. 이어 70년 5월에 열린 제2차 카셀 정상회담에서는 동·서독간에 보다 완화된 조건에서 여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보다 개선된 협력관계를 이룰 수 있는 조짐을 보여줌으로써 국민적 희망을 갖게 하였다. 이러한 많은 우여곡절 끝에 소련을 비롯한 4대국의 중재로 양 독 정부는 71년 11월 18일 10개항으로 되어 있는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에 가조인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동.서독은 이 기본조약의 취지에 부응하여 1973년 11월 UN에 동시 가입하게 되었고, 이에 근거하여 74년 6월20일 상주대표부를 각각 설치하였다. 이후 동서독간의 관계는 모든 면에서 다각적인 교류와 관계증진에 따라 민족공동체의식을 새롭게 되찾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서독은 본 조약체결의 목적을 잠정적으로 통독을 위한 과도기적 장치로 이해하였고, 이를 위한 동서독간의 인적 물적 교류의 증대 및 자유왕래, 그리고 공동체적 번영을 일차적 선결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동독은 동서독 기본조약의 본질적 취지를 1민족 2국가체제라는 서독의 입장과 전혀 다른 2민족 2국가라는 사고에서 출발하였고, 이를 근거로 할 때 동독은 자본주의민족과 사회주의민족이라는 이념적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성향의 차이는 양국의 교역이 활발해 짐에 따라 더욱 극명하게 표출되었다. 서독정부는 교역초기부터 상호 경제교류를 통하여 얻어지는 단순한 경제적인 실리보다는, 오히려 이를 통하여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는 정치적 기대효과에 더 치중하여 동서 냉전시대나 긴장완화시대를 가리지 않고 분단된 양국을 서로 결속시켜주는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더욱 중요시하였다. 이러한 서독정부의 기본성향은 독일통일정책을 실현시킬 수 있는 정책수단의 한 부분으로서 발전되어 왔다. 즉, 통일이 되기까지 서독정부는 동서독 교역을 국내거래로 간주하여 거래되는 상품에 대하여는 비관세 원칙, 부가가치세 경감 및 면제 조치 그밖에 여러 경로를 통한 금융지원 등 거래지원 시책을 강구하여 동독이 실질적으로 이득을 얻을 수 있게 하여 서독과 밀접한 관계가 계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소련경제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견실한 경제발전을 이루는데 기여하였다. 이후 고르바쵸프의 등장과 그의 신사고 정책이 추진되면서 이의 경향으로 동구권 전역이 개혁의 물결에 휩싸이게 되었다. 특히 ’89년 10월 바르샤바조약기구회의에서 소련의 “브레즈네프 독트린” 완전폐기 선언은 소련의 군사개입에 대한 위협이 사라지게 하였으며, 이것은 민주화 개혁 추진의 계기가 되었다. 당시 동독은 철의 장막에 속한 동구권국가 가운데서도 경제적 강국인 서독의 존재자체에 의하여 큰 영향을 받았으며 어느 정도의 독자성을 지속하여 왔기 때문에 사회주의 모델로 평가되기도 한 국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동독의 집권자였던 호네커 정권은 폴란드와 헝가리, 심지어 소련의 개혁정책까지도 싸잡아 “정통 사회주의에 대한 배반”이라고 비난하면서 마지막까지 개혁도입 반대를 고수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89년 9월 동독국민의 해외로의 집단탈출사태를 야기시켰으며, ’89년 10월 동독건국 40주년 행사에 참석한 고르바쵸프의 개방에 대한 공개적 촉구는 동독국민의 시위를 촉발시킴으로써 ’71년이래 18년간 동독을 통치해 왔던 강경파 공산당지도자 호네커의 퇴진을 가져온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이후 동서독은 1990년 8월31일 양 독간에 맺어진 통합조약에 의하여 급기야 급진전 되었고, 1990년 10월3일 정식으로 하나의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2.2.문제점통일 후 가장 심각한 문제는 동독 정권하에서 교조적이고 타율적인 생활 방식에 길들여진 동독 주민들이 새로운 민주주의 제도와 시장 경제 질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함으로써 겪는 심리적 갈등이다. 재산권의 불확실성으로 인한 위기감, 실직, 서독 국민들에 비하여 2등 국민이라는 열등감, 사고 방식의 괴리 등으로 심하게는 사회 병리적 현상까지 보인다. 둘째로 정치적 과거의 청산 문제로서, 과거 동독 공산 정권에 의한 피해자와 가해자에 관한 것이다. 피해자 10여만 명의 복권과 보상을 위해 신청을 접수하여 조사·처리하고 있으며, 공산당과 정권 기관 등의 권력 남용자로 분류된 6천여 명에 대해서는 사법 처리를 원칙으로 규정하였다. 셋째로 동독 지역에서 행정·사법 체제를 구축하는 문제이다. 먼저, 행정 분야에 있어 새로운 통일 독일의 행정 체계에 적합한 지방 행정 인력의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구 동독 공무원을 대상으로 자격 심사와 재교육을 거쳐 이들을 재임용하거나, 일부 서독 공무원들을 파견·전보하여 해결하였다. 사법 분야에 있어서는 동독 지역 주민들의 법률적 보호와 사법적 공백 현상을 방지하고 새로운 사법 체계를 구축하기 위하여 구동독의 사법요원들을 재교육시켜 자격 심사를 거쳐 선별·재임용하는 조취를 취하였다. 셋째로 소유권 등 재산권의 처리 문제이다. 소련군 점령시 점령군에 의한 토지 개혁으로 몰수된 재산권에 대해서는 보상을 원칙으로 처리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비교적 수월하게 해결해 가고 있으나, 그 후의 동독 정부에 의해 몰수당한 재산권에 대하여는 원래의 소유자에게 돌려 주는 것을 원칙으로 함에 따라 200여만 건의 반환 청구 소송이 제기되었다. 마지막으로 동독 지역의 경제 재건 문제이다. 붕괴 상태에 있는 동독의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해 통일 정부는 신 연방 주 경제 재건 정책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동서독 주민 간의 생활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보조금뿐만 아니라, 동독 재건을 위한 시설 현대화와 신규 투자에 막대한 비용을 투입하였다.
    인문/어학| 2010.05.24| 4페이지| 1,000원| 조회(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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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칠레의 지진”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칠레의 지진”이 작품은 짧은 분량 속에 빠른 전개와 실감나는 장면 묘사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 나갔다. 그러나 이내 가벼웠던 마음은 무거워 졌다. 지진을 통해 주인고 예로니모와 요제페 그리고 그들의 아들 필립은 원점으로 돌아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 이라 기대했던 나의 생각과는 달리 끔직 하게 죽음을 맞는 그들의 모습과, 마치 다른 이의 죽음을 축제처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읽는 동안 마치 내가 작품 속에 들어가 있다고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인간의 내면을 리얼하게 묘사했다. 인간은 모두 죽음에 대해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물론 이 논지에 100% 공감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현대인의 모습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다. 작품 속에 보여 지는 마치 사형 제도를 축제처럼 즐기며, 공개 처형을 더 잘 보기 위해 창문을 제거하고, 지붕을 없애고, 친구를 초대하는 모습. 그리고 뒷부분에 주인공들을 때려죽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사람들의 모습은 시대가 변해 다르게 나타날 뿐이지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게임이나 영화와 같은 미디어를 통하여 살인과 폭력과 같은 비인간적인 모습에 대리만족을 느끼는 현대인의 모습도 저들과 다를게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또한 이 작품을 읽으며 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였다. 중세시대 신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존재했던 공개처형이 대중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하나의 구경거리로 전락한 것은, 신의 권위 앞에서 인간의 목숨 따위는 도외시하는 광신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면 지진을 일으킨 신의 뜻은 인간의 목숨을 도외시하는 풍습, 신분제도, 가부장적인 당대의 현실을 다시 한 번 생각 하게끔 하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했다. 지진 후 사람들의 모습은 많이 변하여 신분에 상관없이 서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서로에게 위로해 주며 용기를 복돋아 주는 모습에서 그런 생각을 해보며 지금 우리나라에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부패한 사건들과 우리 내면의 추악함을 반성할 수 있도록 그 어떤 시대보다 ‘칠레의 지진’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명은 신이 주신 고귀한 선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생명의 소중함과 인간의 존엄성을 결국 잃게 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신의 존재를 믿지는 않지만 이 작품 속엔 신이 존재 한다고 생각하는데 지진을 통해 또한 신은 어린생명과 두 주인공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독후감/창작| 2010.05.24| 1페이지| 1,000원| 조회(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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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마누엘 칸트 계몽
    임마누엘 칸트계몽이 글은 이라는 잡지의 1784년 12월호에 개제되었다. 칸트가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같은 잡지의 1783년 9월호에 실린 베를린 목사 쵤너(Johann Friedrich Zollner)의 한 논문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이 논문에서 쵤너는 교회를 거치지 않는 시민결혼을 비판하면서, 시민결혼이라는 관념을 낳은 계몽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아무도 대답한 적이 없다고 비판했다. 이런 비판에 대해 모제스 멘델스존이 1784년 9월호에서 먼저 대답하고, 그 다음으로 칸트가 대답하게 된 것이다. 칸트는 이 잡지의 편집인 비스터(Biester)와 20년동안 서신왕래를 지속하는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계몽에 대한 칸트의 정의는 이러하다:?계몽이란 인간이 자신의 과오로 인한 미성숙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숙상태란 자신의 지성을 타인의 지도 없이 사용하는 능력이 없는 것을 말한다. 이 미성숙상태가 인간 자신의 과오로 인한 것인 이유는, 이런 상태의 원인이 지성의 결핍이 아니라, 지성을 타인의 지도 없이 사용하려는 결단과 용기가 부족한 데 있기 때문이다. Sapere aude! 네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지녀라!는 것이 계몽의 구호다.“너무도 유명하게 된 이 문장에 대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는 이 문장을 자세하고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위의 문장에 따르면 계몽이란, 인간이 타인의 도움 없이 자신의 지성을 스스로 사용하는 능력을 습득하고 실행하는 데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타인의 도움이 없다 함은 바로 사고의 자율성에 대한 요구이다. 기존의 선입견이나 지배적인 관념, 상부로부터 주어지는 해석과 설명 등에 의존하지 않고, 이런 일체의 생각들, 나아가 세상만사에 대해 스스로의 지성으로 검토해보고 자신의 판단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나 교회, 학교, 언론 등에서 가르치고 유포시키는 일체의 견해들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비판적 검토와 숙고만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못할 때, 인간은 부모의 말을 그냥 믿고 따르는 어린는 것은 피곤한 일이며, 그 대신 남이 만들어놓은 생각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훨씬 편하기 때문에 미성숙상태에 머무르고자 하는 태도를 말한다. 더구나 사고의 지배자들은 이런 상태를 고착시키기위해 온갖 노력을 한다. 자립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개인에게도 위험한 일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혼란과 대립을 낳을 것이라고 선전해대는 것이다. 그러나 첫걸음마란 항상 서툴고 힘든 것이지만, 연습을 할수록 머지 않아 직립보행이란 것이 전혀 어렵지 않은 상태가 오는 것처럼, 자립적으로 사고하는 것도 일정한 훈련기간을 거치면 안정된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또한 그는 자립적 사고가 사회의 혼란의 원인이 전혀 될 수 없다는 생각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뒤에서 말하기로 하자.그런데 게으름과 비겁함으로만 미성숙상태를 설명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닐까? 삶을 유지하기 위한 노동이 자신의 거의 전 에너지를 소비시킬 때, 자율적으로 사고하는 일을 피하고 싶어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에서 쉴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대다수의 사람들은 곤궁과 싸움하느라고 너무 지치고 기력을 잃어 오류와의 새롭고 힘겨운 싸움에 나설 힘이 없다. 사유의 쓰라린 수고를 면제받는 데 만족하여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개념에 대해 후견인으로 나서는 것을 허용하며, 설령 그에게 보다 높은 욕구가 일어나더라도 국가와 성직자들이 이런 경우를 위해 마련해놓은 공식들을 갈증난 믿음으로 움켜쥐는 것이다. 이런 불행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연민을 느껴야 한다.“독자적인 사유를 철저하게 해낼 수 있기 위해서는 노동생활 바깥에서도 일정한 기력이 남아있어야 한다. 오늘날에도 직장에서 기진맥진하여 돌아온 사람에게는 어려운 책을 읽을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냥 텔레비젼 앞에서 멍청히 앉아있다가 가뭇 잠이 들고 마는 것이다. 칸트는 계몽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소홀히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계몽이 성립하게 된 것도 시민계급의 물질적 부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의 전파를 계몽으로 간주하는 것은 칸트의 계몽 정의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계몽의 주체는 소수 지식인이 아니라 만인이다. 칸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지니고 있으며, 계몽이란 이런 능력을 활성화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누구도 교육의 수용자로 대상화되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대상화하는 태도야말로 반계몽적이다. 이미 만들어진 지식을 대중에게 전파하겠다는 태도는 대중의 머리를 기존의 지식 대신 다른 지식으로 채우겠다는 것 이상이 아니며, 이 때 대중의 독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은 여전히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계몽이란 타인의 생각을 더 이상 독자적 검토 없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계몽의 광장에서는 지식인의 견해도 검토의 대상일 뿐이다. 누구의 견해도 권위나 특권에 근거하여 관철되어서는 안된다. 바로 이런 면에서 칸트의 정언적 명령과 마찬가지로 그의 계몽구상 역시 형식적 규정이다. 어떤 특정한 주장이나 주의가 관철되는가 하는 것은 계몽 자체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주장과 주의들이 어떤 식으로, 어떤 기준에 의해 관철되는가 하는 것만이 계몽의 존재여부를 결정한다. 특정 주장이나 주의의 관철을 계몽으로 보게 될 때, 이는 오히려 반계몽으로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이 주장, 주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독자적인 사유권리는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공론의 영역에서의 자유로운 토론을 거쳐 이루어진 시민들의 동의에 기초하는 개혁만이 계몽에 일치하는 개혁이다.이렇게 독자적으로 사유하기 위해 사회적 차원에서 관철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상과 언론의 자유다. ?그러나 이 계몽을 위해서 가장 요구되는 것은 자유다.“ 이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 한, 인간은 몽매상태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다. 자유롭게 생각들이 교환되고 부딪치는 가운에에서만 인간은 사고를 위한 자극을 받고 사고의 지평을 확장시키며 사고하는 법을 습득할 수 있다.칸트는 당대의 국가가 이런 자유를 허용하지 않고 있는 것을 비판한다. 위에행동할 것을 허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성의 공적 사용과 사적 사용의 차이를 이런 주장의 근거로서 제시한다.얼핏 떠오르는 것과는 달리 이성의 사적 사용이란 직업의 수행을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고, 공적 사용이란 개인으로서, 그러나 인류 혹은 ?세계시민“의 일원으로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양자는 사용되는 이성의 적용범위가 제한적인가 아니면 보편적인가 하는 것을 기준으로 구별된다. 직업 수행에 있어서 개인의 판단을 배제하는 것은 칸트의 보수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혹은 적어도 국가에 대한 타협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으나, 실은 그렇지 않다. 이 구별에는 매우 깊은 고려가 반영되어 있다. 칸트의 생각을 좇아가보자:장교는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장교가 명령이 자신의 생각에 맞지않는다고 복종하지 않으면 군대는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성직자는 자신이 속한 교회의 입장에서 설교해야 한다. 그가 교회의 입장과 다른 견해를 설교하게 되면 그에게 성직을 부여한 교회와의 계약을 위배하는 것이다. 시민은 자신에게 부과되는 시민적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시민적 의무의 수행을 거부할 때, 사회는 혼돈에 빠질 수 있다. 사람이 자신의 직업적 업무를 수행할 때에는 이렇게 자신이 속한 조직의 규정에 따라야 한다. 이 규정에 따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업무수행시에도 규정에 어긋나게 행동하려 한다면, 그는 조직을 대표하면서 조직을 거부한다는 모순을 범하게 된다. 조직의 일원으로서 그는 조직이 위임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자일 뿐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은, 조직의 입장을 자신의 입장과 맞는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이다.그러나 그렇다고 조직이 일체의 면죄부를 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 직업이 부여하는 의무가 완전히 반이성적이라면, 그런 의무를 부과하는 조직은 거부되어야 한다. 이런 경우에 인간은 조직을 떠나야 한다. 반이성적 조직을 대변하는 일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이렇게 조직이 부과하는 직무의 수행시에 인간은 이성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조직이다. 이성이 이렇게 사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공적으로 사용되는 것처럼 기만하려고 할 때, 바로 이것이 후일 맑스가 말하는 ?이데올로기’가 될 것이다.반면,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한다 함은, 그런 조직의 일원의 자격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자율적인 개인으로서, 전세계에 대해 타당한 이성적 사유를 하는 경우를 말한다. 칸트는 이 때 개인은 ?학자“로서 사고한다고 한다. 학자란, 특정한 제한적 이익을 떠나 보편인간적인 차원에서 사고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이성의 공적 사용에는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 공론장의 토론에 개인으로서 참가하는 경우에는 장교도 개인자격으로군대의 문제점과 오류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설교단 바깥에서는 성직자도 교회의 잘못을 비판하는 글을 쓸 수 있으며, 시민도 국가가 부과하는 의무의 부당성을 공격할 수 있다.이런 자유는 진보를 지향하는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권리이며, 따라서 어떤 구실로도 제한되거나 금지되어서는 안된다. 만일 군대나 교회, 국가가 이런 자유를 금지한다면, 이런 규정은 그 자체로 이미 무효이며, 인정될 필요가 없다. 계몽은 어떤 누구도 건드려서는 안되는 ?인류의 신성한 권리“다. 그러므로 입법자는 계몽을 금지하거나 억압하는 법률을 정하고 강제할 권한이 당초부터 없다. 입법자는 일반의지를 대변해야 하며, 시민적 질서 안에서만 행동해야 한다. 시민적 질서에 본질적으로 속하는 것이 바로 사상과 언론의 자유다. 사상과 언론의 영역에서 국가권력은 이 영역을 보호하고 향상시키는 것 외에는 아무런 권한을 지니지 못한다. 이런 계몽의 권리는 개인이 포기하기를 원하더라도 포기될 수 없는 것이다. 개인은 자신에 한해서도 계몽의 권리를 처분할 권한이 없다. 그러므로 설령 역사의 특정 시기에 국가와 국민이 이런 자유를 영구히 제한하는 계약에 합의했다고 하더라도, 후세는 이 계약을 즉시 무시할 권리를 지닌다. 물론 이 때에도 이런 계약에 대한 저항은 시민적 의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자유를 행사하는 것으로 나타나.
    인문/어학| 2010.05.24| 6페이지| 1,500원| 조회(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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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극의 정의와 문제점
    서론지난 몇 해 동안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특징적인 현상은 역사드라마의 급부상이었다. 방송 3사 4개의 채널에서 동시에 역사드라마를 방영하면서 역사드라마의 경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 지고 있다. 또한 각 방송사마다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프로그램도 모두 역사드라마로 뽑혔고, 딱딱한 역사교과서와는 달리 ‘사랑’이나 ‘남녀관계’ 등 스토리 위주의 전개방식이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시켜 재미를 부가시켰다.그러나 최근, 역사드라마의 특성상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설정에서, 최근 역사왜곡과 관련해 논란이 일고 있다. 방송제작자 및 관계자들은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재미를 추구하기 위해 허구를 도입하는 것은 불가피 한일이라고 하지만, 그 허구의 허용기준은 어디까지이며 어떠한 방식으로 허구를 도입하느냐가 문제시 되고 있다. 드라마의 인기만큼이나 그것이 시청자들의 역사의식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대부분 시청자들은 TV 역사드라마를 너무 재미있게 시청한 나머지 이를 사실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판타지 형식, 퓨전형식의 역사드라마로 인해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역사의식에 혼란을 빚고 있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역사드라마가 가지는 특성과 문제점, 그리고 역사드라마가 시청자들의 역사의식에 미치는 영향이 어떤지에 대해 알아보고, 역사드라마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알 살펴보도록 하겠다.본론1. 사극의 정의사전에는 사극(史劇)을 역사극(歷史劇)이라고도 하며 역사에 있었던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만드는 연극이나 희곡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극은 역사드라마, 대하드라마, 대하사극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여기서 ‘드라마’의 사전적 의미는 문학작품의 희곡, 텔레비전 따위에서 방송되는 극, 극적인 사건이나 상황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 ‘극’이나 ‘연극’등에 사용된다. 역사드라마, 대하드라마, 대하사극을 사전적 의미에 따라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역사드라마 : 역사를 소재로 한 희곡, TV 방송극, 연극? 대하드라마(大河drama) : 내이 무도 역사시대를 바탕으로 하며, 대부분의 작품이 각 해당시대에 있었던 역사 인물과 사건을 소재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극이 역사적 시대를 영상으로 재현하여 당시대의 이야기를 펼쳐나가기 때문에 고증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역사적 사실의 변형이나 오류, 제도나 풍속의 잘못된 표현은 극의 완결성을 떨어트리는 요소로 작용한다. TV사극이 다루는 해당시대의 시대상황을 충실히 재현해낼 때 그 속에 전개되는 사건과 인물의 행위는 생명력을 얻고 이로 인해 시청자의 절대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TV사극이 대중예술작품이기는 하지만 역사를 소재로 하여 과거를 재현하기 때문에 소재로 삼은 역사에 대해서는 진실을 보여줘야만 한다. 사극이 갖는 역사재현의 방식을 살며보는 것은 이러한 중요한 작업이다.그러나 최근 ‘퓨전사극’이라는 새로운 명칭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언제부터인가 음악이나 요리에 사용되어 동서양적인 요소의 크로스오버를 의미하던 ‘퓨전’이라는 단어가 이제부터는 역사적인 사실을 모티브로 하는 ‘사극’앞에 쓰이며 과거와 현재의 것이 혼재하는 신종 역사극을 가리키게 되었다. 즉 퓨전 이러한 ‘퓨전사극’의 명확한 정의를 하자면, 사실(fact)과 허구(fiction)가 합성된 신조어로 ‘일정한 사실에 토대를 두되 사실과 허구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상상의 공간이 보다 확장된 신종 서사물’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퓨전사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고증이나 역사적 실재 여부를 중요시 여기지 않고, 공간적 배경이 된 시대가 구체적으로 언제인지, 그들의 머리모양이나 복식, 그리고 행동양식이 과연 그 시대에 가능했던 것인지는 전혀 중요시 여기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퓨전 사극 역시 실존인물과 실재하는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사극으로 분류되는 것이 당연하다. 퓨전 ‘사극’이라는 명칭에서부터 볼 수 있듯이, 이는 ‘사극’에서 완전히 벗어난 ‘새로운 장르’는 아닌 것이다. ]이처럼, 현재 역사드라마의 논점은 ‘역사적 사실성역사적 인물의 형상화가 빈약해 지는 경우가 많고, 때문에 이야기구조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일쑤다.우리가 또 하나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작가들이 사극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과연 제대로 된 역사의식을 가지고 확실한 고증과 검증을 거치느냐에 대한 질문이다. 대부분의 드라마 작가들은 원작 없이 대본을 쓰고 있다. 오히려 이들은 내친김에 드라마의 내용을 바탕으로, 혹은 드라마의 시나리오를 그대로 옮겨, 원작 아닌 원작을 만들어 책장사를 하는데 혈안이 돼있는 모습마저 보이고 있다. 소설이든, 드라마든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면 사서에 대한 정확한 학습과 사실 확인, 현지 취재 등 수년, 수십 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완성되는 거대한 결과물이다. 역사소설과 드라마는 결코 하루아침에 뚝딱만들어지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드라마 작가들은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철저한 고증을 거친 후, 보다 풍부하고 독창적인 극본을 쓰려는 본연의 자세로 하루빨리 돌아가야 할 것이다.무엇보다 드라마가 재미를 위해 첨가하고 수정한 내용들이 원래의 의도와 상관없이 사람들에게 역사의식의 혼란 등 상당히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방송사나 제작진들은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재미를 추구하기 위해 허구를 도입할 수밖에 없고, 그로인한 역사적 오해는 책임지지 않는다는 입장이지만, 반면 이를 너무나 재미있게 시청한 나머지 이를 사실로 오해하는 시청자들이 적지 않고, 실제 자세한 정황과 전문적 지식이 없는 시청자들은 그것을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고 비판적 사고를 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설령 극중 완성도나 재미를 떨어뜨린다 할지라도 이에 대해서 명확하게 기준을 지키지 않는다면, 미디어의 절대적인 간섭을 받고 있는 시청자들에겐 드라마 내용자체가 역사의 한 부분으로 각인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이쯤에서, 미디어의 영향력과 시청자들에게 미치는 사극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살펴보도록 하자.3. TV 사극의 영향력영상자료는 학생들이 역사를 이해할 때 다른 자료와 달리여성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기존의 남성중심, 지배층 중심의 역사서술에서 벗어나 역사 속에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장금의 모습을 제시하였다. 장금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 가치관을 제시함으로써 역사 속에서 인간을 끄집어내어 부각시켰는데, 이로 인해 조선시대 다양한 계층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입체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글로 된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민중의 삶을 구체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문자서술이 갖는 추상성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셋째, 사극은 역사적 사건의 과정을 연속성이라는 동적인 서술로 제시한다. 역사에서 중요시 되는 사건들은 그 자체에 분절적인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 속에서 원인과 결과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또한 추상적으로 명시된 사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부적으로 중첩된 여서 사건들의 집합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사건 속에는 왜구의 침입을 놓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세부 내러티브들이 존재한다. 도전과 응전의 다중 플롯구조와 외적 갈등과 내적 갈등의 혼재로 인해 시청자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원인과 결과로 단순화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내러티브가 혼재된 과정의 역사, 동적인 역사를 파악하게 된다.이처럼, 사극의 역사재현 방식이 갖는 이런 장점은 상당 부분 문자설명보다도 효율적이며, 학생들이 사극을 통해 자연스럽게 역사를 배울 수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리서치 전문기업 엠브레인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사극의 역사 학습 효과에 대해 ‘매우 도움이 된다.’(10.7%), ‘다소 도움이 된다.’(66.8%), 등 총77.5%의 응답자가 사극이 역사 학습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사극 속 역사 내용에 대한 신뢰 정도는 ‘보통이다.’가 42.3%로 가장 많았으며 ‘다소 믿는다.’가 38.1%로 나타나 대체로 사극의 역사 내용을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령별로는 30대 이상 중장년층 응답자의 신뢰정도가 10~20대보다 다소 높았다.반면 사극에 기반으로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극의 성격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허구성이라는 개념만을 가지고 사극에 대해 말해서는 안될 것이다.2) ‘판타지 사극’에 대한 잘못된 해석.‘판타지’라는 것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즉, 비현실적인 것을 말한다. 따라서 판타지 사극이라는 것은 기존 사극에서 비현실적인 내용을 가미시켜 영상의 화려함과 재미를 주기위한 것이다. 즉, 손에서 불이 나온다든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장면을 보고 아무도 그것을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누구나 ‘저건 비현실적이야...’라고 인식하는 부분을 우리는 ‘판타지’라고 부른다.이처럼, ‘판타지’라는 말 자체가 비현실적이라는 뜻이지, 역사를 왜곡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극이라는 이름을 달고 잇는 이상, 역사의 기본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되, 비현실적인 요소를 가미시켜 재미와 흥미를 조금 첨가해주자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제작자들은 ‘판타지’라는 말을 ‘역사의 왜곡’과 동의어로 해석하거나, 혹은 ‘판타지’라는 이름만 갖다 붙이면 역사왜곡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드라마를 만드는 제작자로서이 역사인식이란 면에서 큰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3) 말뿐인 기획 의도.사극으로 분류되는 것 안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실존인물을 중심적으로 다루느냐, 그렇지 않느냐 뿐만 아니라 제작자가 어떤 기획의도를 가지고 드라마를 만들었는가와 시청자가 그 드라마에 무슨 기대를 가지고 보는가에 따라 분석의 틀이 달라진다.의 경우에는 실존인물이지만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고,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여성의 성공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고 기획의도에서 밝히고 있다. 이것은 공식 역사로 편입되지 못했던 영역을 조명하려는 시도이다.그러나 , 은 전 국민이 모두가 알만한 영웅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세우고, 기획 의도는 ‘찬란한 한민족의 역사를 복원함으로써 자긍심을 높인다.’라고 자청하고 있다. 이는 고증을 근거로 해서 자주적 한민족의 주다.
    인문/어학| 2010.05.24| 12페이지| 2,000원| 조회(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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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통일과정과 문제점
    독일은 1945년 제 2차 세계 대전에서 패함으로써 패전국이 되어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이 되었다. 그래서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어 우리나라처럼 분단의 아픔을 겪는다.이러한 분단의 상황에서 서독은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의 점령 하에 많은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나, 동독은 소련의 점령 하에 사회주의 국가의 길을 걷게 된다.하지만 두 나라는 분단된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평화공존체제를 이룩하여 양국 간의 교류와 협력을 지속하였고, 1985년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개혁,개방 정책을 시행하게 된다.이것은 사회주의 국가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커다란 사건이 되었고, 사람들은 통일에 대한 염원을 동서를 가르던 베를린 장벽을 1989년 11월 9일에 무너뜨림으로써 표출하게 되고 1990년 10월 3일에 독일은 통일을 하게 된다.하지만 통일을 하고서 좋은 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통일 후 문제점이 드러났다.첫째, 동독과 서독의 경제적 차이로 인한 문제점이다.이러한 경제적 차이는 사회전반에 커다란 문제점을 낳았다.위에 표 처럼 통일독일 초기 1992~1994년 8.7%에 이르렀던 동독 지역의 경제 성장률은 2001-2003년에는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등 1996년 이후 1%대 이하에 머무르게 된다.또한 위의 왼쪽 아래 그래프를 보면 2004년에 동독지역의 실업률이 서독지역의 두배인 것을 볼 수 있다.이처럼 독일 통일 후 과거 동독 지역의 주민은 곧 당면한 실업 문제, 재산권 문제, 과거 청산 문제, 통일 비용, 사회 심리적 문제 등 사회주의 계획 경제 체제를 시장 경제 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문제들 앞에서 양쪽 모두 높은 장벽과 깊은 골을 실감하게 되었다. 특히 동독 주민들이 서독 주민들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고 새로 적응해야 하는 환경 앞에서 좌절감을 겪는 점은 심각했을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을 통일 독일 정부는 신 연방주 경제 재건 계획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여기에는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는데 통일에 필수 불가결했던 경비인 협의의 통일비용과 동·서독 주민 간의 생활 격차 해소를 위한 보조금 뿐 아니라 동독 재건을 위한 시설 현대화와 신규 투자 등에 막대한 비용이 투입 함으로써 조금씩 해결되어갔다.둘째, 사회주의에 길들여진 동독 주민들이 새로운 민주주의 제도와 시장 경제 질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함으로써 겪는 심리적 갈등 문제이다. 재산권의 불확실로 인한 위기감, 실직, 서독 국민들에 비하여 2등 국민이라는 열등감, 사고 방식의 괴리 등으로 심하게는 사회심리적 병리 현상까지 보인다.이러한 현상은 통일 하기 전에, 통합 후 동독 사회주의 체제의 자유 민주주의 및 시장 경제 체제로의 전환에 수반되는 어려움을 심각히 생각하고 준비했어야 했는데 이것을 과소 평가하고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이 이념에 대한 문제점은 하루 아침에 개선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므로 세대에 걸쳐서 천천히 조금씩 해결 해 나가야 할 것이다.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이다.셋째, 소유권 등 재산권의 처리 문제를 들 수 있다. 소련 군정시 점령군에 의한 토지 개혁으로 몰수된 재산권에 대해서는 보상을 원칙으로 처리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비교적 수월하게 해결 해 가고 있으나, 그 후의 동독 정부에 의하여 몰수당한 재산권에 대하여는 원소유자에게 돌려 주는 것을 원칙으로 함에 따라 200여만건의 반환 청구 소송이 제기되었다. 이로 인한 소유권의 불확정 때문에 신규 투자에 장애를 겪었다.
    인문/어학| 2010.05.24| 2페이지| 1,000원| 조회(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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