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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촛불정국과 시민단체
    촛불정국과 시민사회단체의 역할과 전망행정학과 200201296박정환Ⅰ.들어가며올 한 해 이남 사회를 가장 뜨겁게 달군 이슈는 누가 뭐라고 해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이다.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 이후 이명박 정권은 집권 100일만에 전 국민적 저항의 바람을 맞고 있다. 그리고 이 저항의 단초에는 인터넷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인터넷 공간은 누리꾼들을 교양하는 장소가 되었고 토론하는 장소가 되었으며 단결의 거점이 되었고 의견과 주장을 자정하는 작용까지 담당하여 축소시켜 놓은 고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며 논의와 참여범위, 의제설정까지 확장시키는 결과를 현재까지 만들어 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촛불집회들을 보면서 많은 국민들을 포함하여 제도권 정치 계급을 비롯한 지배계급들은 인터넷의 힘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이러한 국민들의 움직임은 정부 관료들과 기존 지배 계급세력들은 물론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조차 예상한 범위를 벗어난 것이다. 오히려 현장에서는 시민사회단체들의 지도를 받기보다는 자신이 직접적으로 조직하고 가담한 소규모 집단이나 모임들 내에서 독자적인 행동을 주로 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이는 국민들의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사회참여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제기하는 패러다임이 국민들에게 권위 있게 인정받지 못하는 스스로의 반성지점도 있어야 할 것이다.여기서는 광우병의 과학적 근거나 쇠고기 협정이 갖는 국제법적인 의미는 차치하고 이런 거대한 저항을 만들어 낸 인터넷 공간의 특성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 수 있도록 하겠다. 그리고 이번 촛불 집회가 있기 전까지 이러한 여론을 환기시키고 모임을 주도 했던 한국 사회의 시민 단체들이 정보화 시대로 돌입한 한국 사회 내에서 변화시켜 가야할 역할과 과제, 그리고 전망에 대해서 논의해 볼 수 있도록 하겠다.Ⅱ. 인터넷 공간의 특성1. 정보의 공유와 확산과거의 이남 사회 민주화를 위한 대표적인 운동 중 하나인 광주민중항쟁을 예로 현재와 비교졌고,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 명칭이 바뀌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광주사태 또는 광주폭동 등으로 알고 있었고 지금도 재교육 받지 못한 50대 이상의 세대와 일부 보수단체들은 예전과 같은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실제로 이 사건이 알려지는 최초의 과정을 살펴보면 몇몇 항쟁의 생존자들과 시위 가담자 및 목격자, 외신을 통한 제한적인 정보 습득으로 대학가나 지식인 계층에서 은밀하게 퍼져 나갔고 미 문화원 방화 등을 통한 선도적이고 혁명적인 투쟁을 통해 조금씩 진상이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실제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이 진행되고 민주화 유공자들의 업적이 인정되기까지는 굉장히 많은 세월이 흘러서야 가능했다.하지만 작금의 한국 사회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다르다. 인터넷 공간은 엄청난 양의 지식이 난무하고 있다. 물론 모든 것이 검증된 사실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이러한 사실조차 인정하고 접근하는 누리꾼들이 더 많다. 그리고 그 공간에 아마추어 집단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공유하고 논리를 생성하고 강화하면서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곳으로 발전되고 있다.--대표적인 공간으로 다음 아고라를 들 수 있겠다.-- 이번 쇠고기 파동만 봐도 정부에서 제시한 협상안이나 광우병에 대한 사실들을 누리꾼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정보를 남들과 공유하며 확장해냈고, 분야 전문가들의 입지를 공고히 해주는 역할까지 담당하며 많은 사람들이 광우병 위험과 정부의 쇠고기 협상절차의 실책에 대해서 비판하는 데에 앞장서게 했다. 이 정보공유의 측면은 운동의 확산과 조직화 부분에도 영향을 끼쳐 공지된 집회의 내용과 세부상황을 쉽게 알게 되면서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게 된 계기도 마련하게 되었다. 과거 비둘기들을 사전에 깔아 놓는 투쟁이나 소위 떴다택과 같은 택이 있는 투쟁과는 다른 양상의 것이 건설되었던 것이다.2. 기성 언론들의 붕괴와 1인 미디어의 출현이번 촛불집회의 계기가 된 것 중 하나가 바로 MBC ‘PD수첩’이라는 프로의 광우병에 대해서 다룬 프로그램이었다. 사실 그 내용의 진실과 선동 대해서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촛불집회가 시작되면서 보수적인 논조를 가지고 있는 조선, 중앙, 동아, 문화일보와 각종 경제신문 등의 언론은 일제히 MBC를 비판하고 광우병공포에 대해서 허위, 조작된 사실이 많고 한미 FTA를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 협정이었는지를 마치 정부의 관보인 것처럼 광고했고 촛불집회에 대해서 소위 배후론을 제기하며 다시 반공이데올로기를 생산해내는 듯 했다. 하지만 이런 기성 메이저 언론들의 논조는 많은 국민들의 대다수가 매일 접하는 인터넷 공간과의 정보와 충돌하면서 논리적 우위에 선 것이 아니라 불신임을 받게 되는 결과를 낫게 되었고 다소 진보적인 논조를 가진 경향, 한겨레신문의 구독률이 몇 배씩 늘어나고 보수 신문에 광고를 싣는 업체들에게 광고를 철회하라는 항의를 하는 운동까지 확산되고 있다.이와 더불어 떠오르게 된 것이 바로 1인 미디어이다. 물론 청계천에서의 촛불문화제 당시에도 참여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인터넷 방송이 존재했지만 확산된 계기는 청와대로의 가두시위가 진행되면서 경찰과의 물리적 마찰이 생기면서부터이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고 누가 폭력을 유발하는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알리고자 하는 일부 시민들의 아이디어가 확산되고 인터넷에서 다시 공유되면서 더욱더 투쟁은 확장되어갔다. 이로 인해 BJ(Broadcasting jockey)라는 신조어가 생겨나고 아프리카를 비롯한 1인 미디어를 위한 공간이 많아졌으며 민중의 소리, 오마이뉴스, 진보신당 칼라TV 등의 진보적 미디어들도 대중들에게 인식된 계기가 되었다.이러한 1인 미디어의 특징은 기성 언론과 같은 정보의 가감이 없고 정제되지 않은--선정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영상이 있고 거침없고 보통사람들인 BJ들의 입담도 있다. 이것은 기성 언론들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증거이며 시간과 공간에 제약적인 언론매체가 현대인들의 습속에 부적합하다는 비판적 근거가 되기도 한다.3.누리꾼들의 언행일치와 자정작용최근 보수적인 언론과 정과 습성을 가진 천태만상들이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사회의 자정작용과 마찬가지로 온라인 역시도 자정작용이 작동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온라인 공간이 현대 우리 사회의 문제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세대 간의 갈등, 소통이 부재하고 삭막한 사회, 개인주의화의 확산으로 생겨난 인간개별화 등의 부작용들을 해소할만한 대안 사회라고 주장하는 학자들까지 있을 정도이다.그리고 누리꾼들은 이제 익명성이라는 그늘에 숨어 말만 해대는 그러한 존재들이 아니다. 이번 촛불집회의 시작과 확산, 전진해야 할 방향의 토론, 문제 제기, 내부 비판 등 모든 과정에 참여한 것이 일반 시민, 바로 누리꾼들이다. 이젠 단순한 의견제시자를 넘어서 실천가적인 면모를 보이면서 좀 더 성숙된 사회건설에 인터넷 공간이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Ⅲ. 시민사회단체들의 역할과 전망전술하였다시피 이번 전 국민적인 촛불집회를 지켜보면서 당황했던 것은 기존 제도권 정치집단과 언론권력들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해오던 활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름 전문가 집단이라고 자부하며 이데올로기 생산 또는 이슈파이팅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왔고 대규모 집회를 건설했던 진보적인 단체들도--마치 중국의 혁명가 손문이 1919년 5?4운동 전개과정에서 대중들의 역동성과 주체성을 보고 깨우친 것처럼--기존에 가지고 있던 대중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점점 더 고도로 발전해 가는 정보화 시대에 가장 발 빠르게 변화에 대처해야 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의 부진에 경종을 울려야 할 일이며 대중과 괴리되어 버리는 순간 지금의 이명박 정권처럼 고사되는 결론을 같이 맞이할 지도 모를 일이다.여기서는 앞으로 변화해야 할 시민사회단체의 변화의 지점 두 가지와 전망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1. 시민사회단체가 가져야 할 대중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장 크게 변화해야 할 것은 바로 대중에 대한 인식의 변화이다. 과거의 대중들은 그저 제도권 언론과 권력에 무비판적인 수용자적 측면이 강했을지도 모르지만 현재의 대중들은 경향이 크다. 시민사회단체 역시 87년 민주화 이후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수많은 단체로 보기보다는 기성386 운동권 세대의 유물 혹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힘을 업었던 현재는 끈 떨어져버린 집단 등 올곧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외에도 여러 가지 시선들이 존재한다. 이는 시민사회단체가 자신들만의 활동에만 몰두하면서 정작 중요한 대중들의 눈높이와 인식변화에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한 평가이다.그리고 더 나아가 기존 시민사회단체들이 간과했던 청소년들의 정치?사회적 진출 역시도 평가해야 한다. 가출청소년들을 위한 모임, 미혼모 센터, 각종 봉사단체 등 소외된 청소년들을 위한 공간이나 봉사활동을 하는 단체들은 존재하지만 청소년들의 정치?사회적 진출에 대한 고민을 담보하는 공간은 적다. 이것은 아직까지 청소년들을 미성년자 혹은 금치산자라고 하는 법적 개념에 사로잡혀 수혜적 입장으로서나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서만 생각하여 정작 한 사회의 구성원 중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이들의 진출을 막고 있는 것은 기성세대와 기존 시민사회단체들의 경직된 구조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2. 시민사회단체의 사회적 위상의 변화한국 시민사회단체들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던 것이 여러 가지가 존재하지만 가장 큰 것이 실질적으로 회비를 납부하는 회원이 적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활동가가 적다는 것이다. 이는 실제 시민사회단체들의 위상이 대중들과 괴리되고 활동가 중심의 조직이 되고 있다는 것에 착안해야 한다. 이제 온라인 공간을 통한 다른 방향의 활동과 조직 확장 사업에 대한 고민을 해보야 한다.인터넷 공간은 어느새 기존 언론매체의 공간보다 더 많은 사람이 접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이러한 공간을 기존과 다른 대중 이데올로기 생산의 공간으로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은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RTV와 같은 시민방송이 점점 더 확산되고 온라인 언론매체들의 영역이 확장되면서 발 빠르게 이러한 공간을 선점하거나 새로운 공간을 창출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활동가들의 대중적 활동 역다.
    사회과학| 2008.06.23| 6페이지| 1,000원| 조회(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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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시대구분론을 읽고
    나이또오 도라지로오(內藤虎次郞)의 時代 區分論1●들어가기11. 나이또오 도라지로오12. 나이또오 도라지로오의 관점13. 문화와 시대 구분에 대한 나이또오 관점의 분석14. 나이또오 시대 구분의 특징25. 나이또오의 時代區分2(1)『중국 근세사』를 통해본 시대 구분2(2) 『지나 상고사』를 통해본 시대 구분 36. 나이또오 시대 구분의 평가 4宮崎市定의 時代區分論41)「송·원의 경제적 상태」에서 북송시대의 발전42)내등의 가설을 세계사에 최초로 적용5◎ 松井等(마쓰이 히또시 1877∼1937)6◎ 다찌바나 시라끼6◎오다께 후미오7◎우쓰노미야 기요요시의 「중국 중세사의 영역」7◎마에다 다오노리7●나오기7나이또오 도라지로오(內藤虎次郞)의 時代 區分論일본에서의 중국학 연구는 다른 학문에서와 마찬가지로 메이지 연간에 새로운 단계로 들어섰다. 서양의 동양학 학자들의 연구에 자극 받은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중국사의 중심과제를 동·서 문화의 교섭과 남·북의 정치적 특징에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이들은 적어도 중국 근대화의 시작을 서구인의 도래에 의하여 출발하였다고 믿고 있었다.하지만 京都 대학의 나이또오 도라지로오는 중국 문화 전반에 걸친 폭넓은 이해와 특히, 중국사의 각 시대를 특징 짓는 문화적 차이에 착안하여 새로운 時代 區分論을 내놓았다. 그는 중국의 근대가 서구인의 도래에 의하여 시작되었다는 통설에 반해하고 唐·宋 문화사이의 뚜렷한 차이를 지적하면서 宋 代 이래 중국의 近世가 시작하였다고 주장하였다.1. 나이또오 도라지로오나이또오 도라지로오는 중국 近代化의 時期를 당시로서는 破格的인 이론을 내세워 서구인의 渡來이전으로 거슬로 올려놓았는데 이것으로 그는 京都 학파의 東洋學 대표자로,나이또오 史學의 창시자가 되었다.나이또오는 1866년 에 출생하여 소학교의 교사로 지내던 중 돌연 상경하여 萬朝報, 아사히 신문 등의 기자로 지내면서 동아시아 문제에 대하여 다양한 경험을 쌓았는데 이것이 계기 기되어 중국 문제가 그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1905년 12월부터 이듬였다. 이러한 그의 관점은 후에 언급할 『개괄적 당·송 시대관』에서는 물론이거니와 그보다 훨씬 앞서서 발표된 당시 중국의 정치적 상황을 주제로한 논설인 「군주제인가, 공화제인가?」에서도 발견 할 수가 있으며 사후에 발표된 『중국 근세사』, 『지나 上古史』,『중국 中古의 문화』등에서도 살펴 볼 수 있다.그는 민족도 일종의 생물처럼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의 단계를 거친다고 믿고 있었으며 이리하여 역사는 횟수나 왕조에 따라 구분되어 질 수 없다고 생각 하였다. 따라서 역사를 上古, 中古, 近世로 구분하고 각 국가나 문화마다 서로 상응하는 시대의 차이점과 유사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이또오 도라지로오는 이러한 관점 아래 중국 같은 장구한 문화를 가진 민족은 최고 수준의 미술품등 을 창조 할 수 있으며 일본 같은 청년기의 민족들은 정치적 , 군사적 활동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고 당시 사회를 분석하였다.3. 문화와 시대 구분에 대한 나이또오 관점의 분석·나이또오 시게노부의 분석- 니와 마사요시의 영향니와는 나이또오에게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였으며 , 니와는 다시 하인리히 리케르트 와 장학성 에게 영향을 받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역사학 개론』에서 니와는 중국사를 몇 개의 시기로 나누었는데 ,획기의 기준은 『周禮』의 이념이 실현된 정도 였다. 역사적 분위기를 가치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시도한 것이었다.·아베 다께오의 분석 -비교사적 이해아베는 나이또오의 연구가 오닌亂후의 일본사회의 변하와 중국의 당·송 변혁기에 관한 비교사적 이해틀 안에서 형성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마에다 나오노리의 분석마에다는 나이또오가 중국사를 세 시대로 고대와 중세의 차이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실제로 나이또오는 그의 여러 저술에서 중국사의 시대 구분에 있어서 보다 흔히 쓰이는 고대, 중세 등과 같은 용어대신 上古, 中古, 近世 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마에다는 나이또오가 중국이 고대와 중세사이의 아무런 뚜렷한 차이를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상분명한 황제들의 귀족의 후예로서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한 선계를 조작하였던 사례들을 분석함으로써 고대에는 군주가 귀족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권을 갖지 못했다고 주장하였다.그러나 나이또오는 혈통을 중시하던 전통은 군사 지도자가 평민 병사에서 나오는 당 말 五代에 완전히 사라졌다고 바라보고 있다. 이시기 가족제도의 변하는 많은 義兒를 갖게 하였으며 귀족들의 권력과 심지어 황제 자리조차도 의아에게 물려주는 경우를 지적하고 있다.나이또오에 따르면 중국의 근세는 천하의 모든 것을 세습 재산으로 간주하는 군주 독재권과 책임없는 관료군, 평민권의 신장 ,胥吏의 영향력 증대라는 특징을 갖는다.5. 나이또오의 時代區分(1)『중국 근세사』를 통해본 시대 구분○ 당·송 시기의 중요한 변화1 귀족 정치의 몰락과 군주 독재정치의 大興 - 中古 ,上古의 중국에 있어서 귀족들 은 천자로부터 영토와 인민을 부여받지 많은 名族에 속해 있었다. 이들 명족은 비슷한 계급의 귀족과 결혼하고 나라의 모든 일을 독점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송대 이래로 황제들이 거의 모든 기능을 관장하였다.2 군주 지위의 변화- 中古 중국에서의 군주는 귀족 계급의 공유물 수준이었으나 송대 이후로 황제의 자리는 보다 공고해졌다.3 군주 권력의 확립- 당 대 중앙정부는 三省으로 구성되었다. 이 삼성의 특징은 문하성의 봉박 권한이다. 관료들은 이러한 봉박의 권한으로 황제의 독재권을 견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송·명 대 이후로 전각대학사 라는 재상이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였지만 그러나 황제의 변덕은 그들의 군주 권력의 확립을 예증해주고 있다.4 서민 지위의 변화- 귀족 시대의 서민은 전체 귀족에 매인 노예와 같이 간주되었으나 수·당 정부는 귀족 정치의 멍에로부터 그들을 해방 시켰다. 그들은 이제 국가의 소작인으로서 국가 재정의 한 부분을 차지하였다.5 관리 등용법의 변화- 수·당 시대의 귀족적 특권 성격인 과거제도는 송 대에 와서는 왕안석의 건의로 성격이 바뀌어 자격을 갖춘 응시자의 수가 늘었고 관직도 널리 일반 서민에게 개방 1 서민의 진보-인민의 소유권과 노동의 자유가 확립, 학문과 예술의 주체가 귀족에서 대중으로 (왕안석의 신법, 청묘법, 모역법 등 )2 정치의 중요성 감소 -귀족만의 고유문화에서 대중의 정치로.○ 근세 외적 생활의 다섯가지 요소- 나이도오는 이 다섯 가지 요소가 근세의 전조라고 지적하고 있다.1 모든 계급과 집단이 공유하는 생활 양식2 고대 생활 양식의 열망 ,정신적 문화의 열망3 북방 민족의 문화적, 정치적 영향4 골동품의 수집의 열기5 상품 시장의 발달(2) 『지나 상고사』를 통해본 시대 구분나이또오는 서구의 삼분법적 시대 구분의 영향을 받아 중국사를 주변 민족의 역사들과 관련지어 네 시대로 구분하고 있다.1 제 1기. 개벽부터 후한 중엽( 기원후 100년 경 까지)-상고, 중국 문화의 형성기2제 1 과도기. 후한부터 서진까지(기원후 100년-307년 경 까지)- 중국문화 외부적 발전정지.3제2 기. 5호 16국-당 중엽(기원후 307년-756년 경 까지)-주변 민족의 힘이 중국의 내부에영향줌4제 2 과도기. 당 말- 오 대 까지(756년-959년)- 외부 세력의 영향 절정.5제 3기. 근세 전기 . 송-원 시대6제 4기 .근세 후기. 명-청 시대.6. 나이또오 시대 구분의 평가나이또오는 유럽의 역사를 비 유럽계 민족의 역사로 들어가는 대문을 여는 만능 열쇄 정도로 생각했던 같은 시대의 역사가들과 몹시 다르다. 하지만 그도 중국 사대부의 관점에 서서 중국 이외의 민족으 문화를 배타적으로 단정하는 점에서 또 다른 극단적인 입장을 고집하고 있다. 더욱이 『지나 상고사』와 『중국 근세사』에서 두 개의 변혁기인 한-진 과 당-송 의 서술 사이에 분명한 부조화가 보인다. 또한, 나이또오는 中古에서 近世로의 移行에서만큼 분명하고 상세하게 上古에서 中古로의 이행을 설명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번째의 연구가 반영하는 폭넓은 관점은 찬양받을 만하다. 곧 동북 아시아 전체를 포함하는 배경을 깔고 중국사를 분석했다거나 , 남과 북의 투쟁으로 보는 판에 박은 설명 사회·경제적 부분을 보완해 주등길지와 논쟁 ·의의 : 비마르크스적인 시대구분론이자 내등의 가설을 또 다른 의미에서 세계사에 적용..한계 : 송이후 집권적 관료기구의 필요, 중세에 대통일제국의 존재, 반란주체 문제.1) 「송·원의 경제적 상태」에서 북송시대의 발전.천자의 권력 강화1 태조(太祖)는 전국적으로 절도사(節度使)의 권력 삭감.2 동등한 비중을 갖는 여러 개의 관아를 중앙정부에 설치, 관료들의 권한을 분산..중요 정책은 천자를 의장으로 한 합의제의 집정 회의에서 결정하고 천자가 최종 결재권 행사함.3 황성사(皇城司) 운용 - 전제권력 유지위한 감찰기구4 과거제도시험관과 급제자 사이에 좌주(우두머리)-문생(추종자) 관계를 만들어냄.이중 천자는 새로 임명된 모든 관리의 최고의 좌주가됨.. 농업 형태의 변화노예건 부곡(部曲)이건 중세적인 예농이 해방되어 자유로운 소작인이 나타남.하지만 얼마 후 그들의 자유는 줄어들고 관료 지주에게 예속된 전호(佃戶)가 됨.. 권력 분배개인이 가족보다 중요 - 고관의 자제도 문음(門蔭)으로는 낮은 관직에만 임명될 수 있었음. 본인의 업적에 모든 것이 달려 있음.ex) 송대 이래로는 삼대에 걸쳐 재상을 배출한 가문은 매우 드물었음.. 요역제도의 변화-국가가 백성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징발하는 수취제도중세 촌락의 유력자들이 가진 사회적 지위가 당말에 이르러서는 의무 자체가 성가신 것으로 맡기를 꺼려함. 또한 관호들의 영향력 행사에 따른 부농들의 체납세금 징수로 수난을 당함.- 왕안석의 신법 이후 자치적 지방정부의 누적된 봉건적 의무로부터 해방시켜, 자신의 세금만 물도록 함.. 동전의 수요 증가- 예농이 해방되어 소작인이 되자 소작인들간의 교역 활발상품생산의 발달, 분업, 생산에 있어 지역적 전문화, 병농분리, 직업 선택의 자유, 특별히 인가된 지역 밖으로의 시장의 확산, 이 모든 것이 근세 전기의 중국사의 특징임.※근세 중국의 높은 반란의 빈도천자들이 절도사의 지방군을 줄여 금군에게 국방을 의존, 이 병력을 의존하기 위해 염(鹽)것
    독후감/창작| 2008.06.22| 8페이지| 1,500원| 조회(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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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의 시험지옥 과거를 읽고
    一. 序論저자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자신의 임무는 과거의 사실 가운데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뽑아내어 가능한 객관적으로 세상에 소개하는 데에 있다고 말하며 ‘사실이야말로 무엇보다 설득력 있다’라고 한다. 그래서 자신은 가능한 한 냉정하고 공평한 입장에서 과거제도와 그 실제를 묘사하려고 노력했다. 이리하여 중국의 시험지옥-과거라는 책이 완성되었다. 이 책은 굉장히 방대한 양임에도 불구하고 무덤덤하고 건조할 정도로 사실관계만을 이야기하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부분이 굉장히 이해할 수 없지만 저자의 역사관은 실증적인 사료만이 진실을 얘기할 수 있다는 논리로 이 책 역시 전개되는 듯하다.1. 과거의 기원중국의 통치사상에 의하면 천자(天子)는 하늘에서 위임을 받아 천하의 백성을 통치해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 그러나 천하는 넓고 백성은 많기 때문에 도저히 혼자서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연히 백성 가운데 조수를 구해 그 업무의 일부를 분담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곧 관리이며 관리의 자질은 정치적으로 중대한 영향을 미치므로 백성 가운데 가장 현명한 자를 등용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만인 가운데 공평하게 인물을 채용할 수 있는 시험제도야말로 가장 좋은 수단이다. 이리하여 과거가 시작된 것이다.2. 과거의 탄생 시기지금으로부터 약 1천 4백여 년 전인 587년에 과거제도가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획기적인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6세기는 유럽으로 따지면 게르만 민족의 이동으로 인한 대혼란이 겨우 수습될 무렵으로서 훗날 봉건 제후들이 곳곳에서 자신들의 군사력으로 난을 일으키고 세습권력이었던 ‘기사’ 라고 불리우는 계급이 화약무기의 유입으로 몰락한 이후에나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중국에서는 봉건 제후에 비견될 만한 특권 귀족의 황금시대는 이 무렵 이미 종언을 고하고 그에 대신하는 새로운 사회가 태동하고 있었다. 과거제도 역시 단순한 유교의 이념으로부터 형성된 것이 아니라 실제 정치의 필요에 부응하여 역사의 움직임 충분히 교육시킨 후, 학생들 중에서 우수한 사람을 과거 시험에 의해 발탁한다는 제도이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이 제도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 본래의 정신을 잃어버렸다. 돈이 드는 학교 교육이 유명무실해져 버리고 학교에서의 시험이 점차 과거 시험의 발판처럼 되어가자, 처음부터 끝까지 시험의 연속뿐이라는 극히 바람직스럽지 못한 제도로 변형되어 버린 것이다.청조는 명대의 과거제도를 그대로 답습했지만 가능한 한 그 폐단을 시정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 개혁은 단지 시험의 부정을 없애고 공정성을 도모하기 이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그 결과 시험 위에 또 시험을 중첩시키는 것이 되어 점점 시험의 부담만 더할 뿐 그다지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게다가 청조 말년이 되면 폐단이 점점 불어나 드디어 과거는 세간으로부터 대접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청조도 드디어 어쩔 수 없이 1904년을 마지막으로 하여 이후는 과거를 실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이상은 주로 천자 쪽에서 과거제를 바라본 것이지만 이를 백성들 입장에서는 즉,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또 다른 뉘앙스가 생긴다. 과거제도가 시작된 6,7세기 무렵부터 이후 수백 년간은 관리가 되는 것 말고는 관리가 되거나 권력가가 될 수 있는 길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시대가 흘러 명대 무렵이 되면 장사에 투신해서도 편안히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이때에도 상인에게는 체신이 없었다. 게다가 크게 장사를 하려면 어쩔 수 없이 몸을 낮추어 관청과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굴욕을 참으면서 돈을 버는 것보다는 관리가 되어 당당히 위세를 부리는 것이 훨씬 현명한 방법이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이 다투어 과거를 목표로 하여 쇄도하였기 때문에 그 넓은 문도 점점 좁아져 갔다. 경쟁이 격화될수록 그 승부에는 단순한 개인의 능력보다 개인을 둘러싼 환경이 큰 작용을 미치게 된다. 그 결과 문화가 점차 지역적으로 편중되고 부(富)또한 점차 불균등하게 분배되기에 이른다.1.시험공부어머니들이 사용하는 구리거울의 뒤쪽에는 흔히 ‘오자평을 받았다.사서 가운데 [대학]과 [중용]은 [예기]와 중복되기 때문에 뺏어도 전부 합하여 43만여 자라는 정말이지 정신이 아찔해지는 숫자이다. 이 경전의 본문만 모조리 암송한다 해도 엄청난 일이다. 하루에 2백 자씩 익힌다면 꼬박 6년 정도 걸린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대학교수들 중에서도 이와 같은 수업을 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암송하는 것이 끝나면 나아가 그 몇 배에 이르는 주석을 읽고 또 본문의 일부가 시험 문제로서 출제될 경우에 대비해 해답의 작성 방법도 배운다. 이 외에도 반드시 읽어 두어야만 하는 또 다른 경전들이 있고 역사 서적과 문학 서적들이 있다. 문학서는 단순히 읽는 것만으로는 아무 쓸모가 없고 그것을 익힘으로써 자신도 시와 문장을 작성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오늘날로 치면 초등학교에서 중학교에 이르는 나이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한창 놀고 싶을 때이다. 그런데 종일 교실을 처박아 연금 상태에 두는 것이므로 학생들로서는 고통스럽기 그지없다. 그래서 양친과 선생님이 곁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라고 격려한다.2.과거의 유용성수나라의 첫 번째 황제인 문제는 내란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막강해진 왕권을 이용하여 종래 귀족이 갖고 있었던 특권, 즉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관리가 될 수 있었던 권리를 단숨에 박탈하고 비로소 시험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를 통하여 시험에 급제한 사람들에게만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고 다수의 관료 예비군을 수하에 모아 두었다가 필요에 따라 중앙과 지방 관리의 결원을 보충하는 제도를 수립했던 것이다. 이것이 중국에서 과거의 기원이었다.당조도 역시 이러한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다만 당조는 대란을 평정하고 천하를 얻었기 때문에 건국 초기의 공신들이 새로운 귀족으로 부상하면서 그들의 특권적인 지위를 자손에게 그대로 세습시킬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이에 대하여 천자(天子)측에서는 과거를 통해 발탁한 진사들을 하수인과 같이 삼아 요직에 배치하여 천자가 마음먹은 대로 정책을 추진하려고 노력하였다. 여기서 귀족층과 진사 진보이다. 그리고 과거는 이 사회적인 진보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더욱이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1천 4백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 때의 일이다. 바로 유럽에서는 봉건적인 기사 제도가 막 출현했던 무렵이다. 이에 비한다면 과거제도는 차원을 달리할 만큼 진보한 제도이고 당시 세계에는 그것에 견줄만한 것이 없었던 뛰어난 이념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다만 당대의 과거는 아직 실제적인 다소의 결점이 보인다.첫째, 그 채용 인원이 매우 적었다는 점이다. 아직 인쇄술이 실용화되지 못하여 책자를 손으로 베껴야 했기 때문에 책이 매우 희귀했고 동시에 매우 비쌌다. 이 때문에 학문에 종사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한정된 범위에 지나지 않았다.둘째, 때로는 관료 사이의 격렬한 파벌 투쟁이나 당쟁이 전개되었는데 과거 자체가 원인이 되었던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과거에서는 시험 때마다 시험관을 좌주(座主)라 하고 합격자가 스스로 문생(門生)이라 불러 후견인과 하수인의 관계를 맺었다.셋째, 같은 시기의 합격자는 서로 동년이라 부르면서 상호 부조에 힘썼는데 그 결합 관계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여기서 파벌이 발생한다. 이때 시험관인 사람은 애쓰지 않고도 많은 하수인을 얻을 수 있으므로 그 지위가 또한 경쟁의 대상이 되었다. 진사의 당파가 천하를 얻으면 비진사의 당파는 전부 중앙에서 쫓겨나고 비진사의 당파가 천하를 얻으면 이번에는 진사의 당파가 모두 중앙에서 밀려났다.송 대 이후가 되면 이상의 폐해에 대해 면모를 일신할 정도로 개혁이 이루어졌다. 첫 번째로 과거 급제자의 수는 송 대에 들어 놀랄 정도로 많아졌다. 이것은 동시에 응시하는 사람도 많아졌음을 말해 준다. 중국사회는 당대에서 송 대로 바뀌는 동안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무엇보다도 생산력의 발전, 그리고 그에 따라 나타난 부의 축적이다. 마치 유럽의 근세 초기 부르주아와 같은 계급이 중국에서는 이미 송 대에 성립했다. 이 신흥 부민계급이 다투어 학문에 뜻을 두게 됨에 따라 그들을 고객으로 하는 서 재상의 지위에 오르는 예도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역사상으로 나타났던 모든 제도에는 영고성쇠(榮枯盛衰)가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정부 측에 결원이 많기 때문에 인물이 필요했다. 그래서 과거를 융성케 하여 많은 진사를 채용했지만 그 후에는 진사의 수가 지나치게 많아져 나눠 주어야 할 관직의 수가 모자라게 되었다. 그렇다고 진사 합격자의 수를 줄일 수도 없었으므로 종래의 관행대로 진사를 배출하자 결국에는 진사의 취직난이 생기게 되었다. 이제 과거는 반대로 정부에 점차 무거운 부담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정부 측에서도 과거제도에 대한 재검토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북송 중기, 신종시대에 왕안석이 재상이 되었을 무렵이 바로 그 시기에 해당한다. 이를 위해서는 근본적인 교육부터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새롭게 학교의 건설에 착수했다. 당시로서 이것은 매우 진보된 사고방식이었다. 이 시대에 수도에 훌륭한 국립대학을 세워 한 동에 30명씩, 80동의 기숙사에 합계 2천 4백 명의 학생을 수용하여 수업을 실시했다는 사실은 진실로 경탄할 만한 점이다.북송이 멸망한 후에도 이 학교제도는 거의 그대로 남송에 계승되었다. 그 졸업생은 과거 출신자와 마찬가지의 자격으로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왕안석의 생각으로는 점차 과거를 폐지하고 태학 졸업생만으로 관리를 채용하려고 한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이상이 실현될 수 없었다고 해도 과거제도 이외에 학교제도가 병행하여 실시되었던 점은 송 대 사회의 선진적인 부분을 볼 수 있다. 이처럼 학교제도가 모처럼 만들어졌으면서도 과거제도를 압도하여 이를 완전히 대신할 수 없었던 데는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사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교육은 원래 돈이 드는 일이다. 남송 대에 들어서면 태학은 규모 면에서 북송에 비하여 훨씬 축소되고 있다. 정부는 교육처럼 바로 눈앞에서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사업에는 도무지 돈을 들이려 하지 않는 것이다.3.과거의 현실성과 이상가장 먼저, 과거는 누구라도 응시할 수 있는 개방적인 제도였다는 것이 그다.
    독후감/창작| 2008.06.22| 8페이지| 2,000원| 조회(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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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자민주주의의 의미
    § 여는 글이 글에서 다룰 “전자민주주의”는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Digital 기술문명)과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라는 두 개념이 결합되어 생긴 개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전자민주주의에 대해서 논하기 위해서는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의 특성과 그러한 민주주의의 객관적 토대로서의 Digital 기술문명에 대해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능력부족으로 전자민주주의의 객관적 토대로서 Digital 기술문명에 자체에 대해서는 논하지 못할 것 같다. 이 글에서 나는 정치체제로서 이상적 민주주의의 상에 대해 먼저 논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현대 한국 민주주의의 상황을 살펴 볼 것이며, 객관적 토대로서의 Digital 기술문명이 보편적 민주주의보다는 현대 한국 민주주의라는 특수한 민주주의 정치체제에 어떤 영향을 끼쳐왔는지 혹은 끼칠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고 한국 전자민주주의에 대한 평가 및 전망을 해보도록 하겠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강정인이 지적하듯이 현대에 있어 “민주주의는 마치 인류의 보편적 종교로 자리잡게 된 것처럼”(1997, p.124) 보일 정도로 좌파와 우파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넘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보편적 가치로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지금처럼 보편적 가치로서 인식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플라톤(Plato)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에서부터 시작된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은 불과 수백 년 전만 하더라도 매우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우리가 천부인권으로 여기는 평등한 정치적 권리로서의 투표권이 현재처럼 확립된 것이 채 100년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보여준다. 이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가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며 오랜 역사적 경험 속에서 형성된 것임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는 단일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다양한 입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와 같은 개념들이 바로 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다양성으로 인해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수 있는 체제”(2007, p.12)라는 최장집의 정의를 빌릴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내 나름대로 풀어본다면 하나의 정치체제를 국가-정치사회-시민사회로 구분지어 생각할 때 정치과정에 있어 시민사회 내 존재하는 다양한 이익집단들 사이의 경쟁과 갈등을 정치사회가 수용하고 그것을 법 또는 정책을 통해 시행하며, 시행된 법이나 정책에 의해 영향을 받는 시민들에 의해서 그것이 평가받는 정치체제가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가장 이상적인 상은 달(Dahl)의 다원민주주의(Pluralist Democracy))일 것인데, 이러한 이상적 민주주의에 대해 달은 다섯 가지의 기준을 제시하는 데 그것은 효과적 참여(effective participation), 투표의 평등(voting equality), 계몽적 이해(enlightened understanding), 의제의 통제(control of the agenda) 그리고 성인들의 수용(inclusion of adults)이 그것이다(달, 1999). 즉 이상적 민주주의란 위의 기준들이 잘 지켜지면서 앞서 언급한 정치과정에 의해 정치가 이루어지는 정치체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한국의 민주주의현대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는 민주주의에 대한 입장이 다양한 것만큼 매우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다양한 평가 중에서 최장집의 평가에 동의하기에 최장집의 논의를 중심으로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를 해보도록 하겠다. 오랜 기간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지배당했던 한국에서 민주화의 움직임은 운동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런 민주화 운동은 노학연대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강력한 민중주의의 형태를 띠었다. 이런 운동은 87년 6월 항쟁을 통해 직선제 개헌이라는 일정 정도의 소득을 얻게 되었는데, 이 과정 속에서 민주화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운동세력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에서 기성정치인들에 의해 배제되었다. 그로 인해 ‘87년 체제’는 군부세력의 연장선상에 있던 냉전적 보수세력과 그에 맞섰던 자유“매우 협애한 이념적 대표체제, 사실상 보수와 극우만을 대표하는 정치적 대표체제”로 전락했고, “민주주의는 그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 합의형성의 기제가 되기는커녕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그 사회의 기득구조와 특권체제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기제에 머무르게”(2005, p.23) 되었다. 즉 앞서 말했듯이 민주주의는 시민사회 속 이익집단 간의 경쟁과 갈등을 정치사회가 수용해야 하지만 현 한국의 민주주의는 정치사회 속 행위자인 정당의 대부분이 보수적 이념의 시민사회만을 대표함으로써 많은 시민들의 의견을 대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한국 민주주의가 보통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까닭은 절차적 민주주의가 내장하고 있는 어떤 본원적 한계 때문이기보다는 현실에서 실천되는 민주주의가 앞서 제시한 절차적 민주주의의 기준에 크게 미흡하기 때문”(2007, p.89)이라는 최장집의 지적은 한국민주주의의 가장 큰 모순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는 달이 제시한 다섯 가지의 기준 중 효과적 참여와 의제의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계몽된 이해 역시 마찬가지인데, “계몽된 이해를 가질 수 있느냐의 문제는 그들이 자신의 투표를 얼마나 효과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느냐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고 볼 때, “현재 한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민주주의의 제도와 실천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원리나 기준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2007. p.89)이러한 한국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체제의 가장 중요한 행위자인 정당의 역할이 매우 왜곡되어 있다. 즉 민주주의의 정치과정 상 정당은 언제나 시민사회의 요구와 갈등에 대한 응답성(responsiveness)과 책임성(accountability)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의 정당은 오랜 독재의 경험 그리고 민주화 이후에도 지역주의라는 허구적 갈등구조 속에서 응답성과 책임성 없이도 정치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는 왜곡된 민주주의를 낳았다. 최장집이 지적하듯이 이렇게 왜곡된 민주주의는 후보들이 무소속으로 혹은 새로운 정당을 건설하면서 등장할 수 있고 또 그런 후보들이 높은 지지율을 얻는 한국의 현실을 만들었다. 즉 이런 한국의 민주주의가 안정화되기 위해서는 정당체계가 안정화되어야 하고 그것은 정당정치가 현실의 사회경제적 문제에 기반을 두어야만 함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민주화 이후의 모습처럼 전혀 성격이 다른 여당이 야당에게 대연정을 제안하고, 서로 크게 다르지 않은 정책으로 인해 정책선거가 되기보다는 BBK와 같은 이슈 중심의 선거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의 암울한 한국정치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민주주의가 전자민주주의를 만난다면?전자민주주의는 기존의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객관적 토대로서 Digital 기술문명을 만남으로서 생기는 것을 말한다. 물론 정치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는 이런 기술문명 외에도 직접 대면하는 대인 간 커뮤니케이션도 존재한다. 그러나 전자민주주의에만 초점을 맞춰 설명하자면 Digital 기술문명의 기본적 특징을 과거 Analog 기술문명과 대비하여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기존의 기술문명은 일반적으로 송신자(sender), 메시지(message), 채널(channel), 수신자(receiver) 및 반응(feedback)으로 이루어진다. 국정홍보처를 이 도식에 집어넣어 본다면 정부의 정책에 대해 홍보를 해야 하는 국정홍보처는 송신자로서 선전 및 홍보를 하는 내용의 메시지를 전 국민에게 보냄으로써 국민들에게 그들의 입장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Digital 기술문명은 한 명의 송신자가 다수의 수신자에게 단방향으로 메시지를 전송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송신자와 다수의 수신자가 존재하는 즉 매체를 사이에 두고 다수의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 매체인 인터넷은 매체로서 공론장(the public sphere)으로서 정보의 상호교류(interactivity)를 강화하고, 대중(mass)의 참여를 강화한다.인터넷과 같은 Digital 기술문명을 객관적 토대로서 가지고 있는 전자민주주의는 많은 학 공론장에 대한 접근의 공평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또한 개인들이 자본과 정치권력에 의해 활용되고, 포섭될 가능성이 커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때 문제가 되었던 뭐 정당의 인터넷 알바 문제와 같이 직접적으로 포섭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에서의 헤게모니처럼 인터넷 상에서는 애국주의가 강력한 코드로 힘을 발휘하고 있다. 황우석 사태에서 봤듯이 공론장은 합리적 토론 및 소통의 장이 아니라 애국주의로 무장한 홍위병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물론 한국의 인터넷 공론장이 가지는 이런 성격은 다양한 요인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정치체제와 연관시켜 논하자면 안정되지 못한 정당체계 및 지역주의로 대변되는 허구적 정치갈등은 시민들에게 정치적 불신감을 주었고, 정치적 공론장에서 시민들이 합리적 개인으로서 이성적 논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불신을 씻어줄 영웅적 존재 예컨대 거짓말이 들통나기 전에 황우석과 2002년 대선에서의 노무현과 같은 존재에 열광하며 그에 반대하는 의견에 대해서는 언어폭력 및 협박이 난무하며 반대로는 ‘이게 다 노무현 탓이다.’와 같이 역시 합리적 논의보다는 허무적 정치 불신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한국 전자민주주의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인터넷 공론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영웅주의와 허무주의는 한국의 전자민주주의가 얼마나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지표이다. 또한 전자민주주의 시대에 있어 분명 공론장에 대한 일반시민들의 접근성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아직도 접근성이 보장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에 있었던 한미 FTA 추진과정을 보자면 과연 이것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능한 일인지, 정말 우리나라가 민주공화국이 맞는지 의심케 한다. 시민들에 의해 선출되지 않은 정부관료들이 자신들의 마음대로 일말의 정보공개도 없이 추진되었고, 이로 인해 합리적인 토론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즉 Digital 기술문명은 시민들에게 공론장에 대한 접근성을 주었지만 그 이상을 주지는 못한다. 결국 진정한 의미의 전자민주주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과거 다.
    사회과학| 2008.06.22| 5페이지| 1,500원| 조회(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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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교행정론
    비교행정의 대두와 전개 그리고 근래의 동향Ⅰ. 서(序)비교행정이 행정학의 독립적인 연구분야가 된지 약 반세기가 지났다. 개발도상국의 행정양태를 주로 연구해온 비교행정은 1970년대를 지나면서 침체되었으나 그동안 계속적인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여기서는 비교행정의 대두와 전재 그리고 근대의 동향에 대해 살펴보겠다.Ⅱ. 비교행정의 대두비교행정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에 미ㆍ소 양국을 축으로 하는 냉전체제 속에서 출발한다. 종전이후 양국은 새롭게 탄생한 신생국들을 자기 세력화에 편입시키기 위해서 미국은 경제원조를 통한 자유민주주의체제란 이름 하의 친미정부를 수립하려 했고, 소련은 공산주의 이념을 전파하면서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려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미국은 자신들이 실시한 경제원조가 신생국들의 정치적 불안정과 체제붕괴의 위험, 내란상태를 해결해내지 못한 것을 알고 그 경제원조를 운용할만한 관리능력이 없다는 판단을 하고 다시 행정기술원조를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이에 미국의 행정학자들은 신생국들의 다양한 행정실태를 주목한다. 자신들이 만들어 낸 행정이론이 보편적이고 과학적이었다는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했고 이에 새로운 행정이론의 필요성을 느낀바 미국이외의 국가들의 행정에 대한 파악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비교행정의 대두를 힢피(J. Heaphey)는 세 가지 이유로 요약한다.①미국의 행정경험을 행정학의 유일한 기반으로 삼은데 대한 불만족②제 2차 세계대전 이후 타국의 행정제도에 관여하는 미국의 대외정책과 여기서 얻은 미국행정과의 상이성에 대한 교훈③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난 비교정부 연구 상의 큰 변화Ⅲ. 전개비교행정은 1960년 리그스 (F. Riggs)를 회장 겸 대표로 하고 포드재단의 지원을 받는 비교행정연구회(CAG)가 창성되면서 전성기를 맞는다. 특별회의와 세미나 등 활발한 연구노력과 아울러 세계 도처의 많은 대학과 행정연구기관들의 교과과정이나 간행물에서 비교행정에 대한 관심이 높이 반영되었다.그러나 비교행정은 행정학이 그랬듯이 패러다임의 혼란을 보였으며, 여러 가지로 비판을 초래하였고 이러한 이유들로 비교행정은 하강곡선을 그리게 된다. 비교행정에 대한 여러 가지 비판은 다음과 같다.①연구 주제와 범위를 설정하지 못해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산만하였다.②지나치게 이론 형성에 탐닉하여 경험적 여구를 충실히 수행하지 못했다.방법론에서도 과학적 ? 실증적 접근이 부족하였다.③그 연구내용이 현실과 유리된 성향을 띄어 실제의 행정활동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Ⅳ.근래의 동향비교행정은 50년대 미국에서 대두, 본격화되어 60년대 그 전성기를 맞았고, 70년대에 들어 하강국면을 그리게 되었다. 전반적인 침체의 분위기 속에서도 비교행정에 대한 연구는 지속되고 있다. 과거에 비해 개념이나 방법론상의 논의는 감소한 반면 경험적 불신은 증가하였다. 근래들어 학술지에 의해 비교행정에 대한 인식이 다시금 일깨워지고 있다.Ⅴ. 결(結)비교행정은 행정에 대한 비교 연구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이를 위한 이론의 정립과 경험의 분석에 노력을 기울여왔다는 점에서 행정학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세계화 시대를 맞아 비교행정연구가 좀 더 활발해 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프리즘 이론Ⅰ. 서(序)비교 행정은 각 국의 행정에 관한 비교ㆍ연구와 분석을 도모해왔다. 적절한 이론적 틀을 정립시키기 위한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으며, 그 중 비교행정연구에서 가장 대표적인 이론인 프리즘 이론이 리그스(Riggs)에 의해서 제시되었다. 여기서는 이 이론에 대해서 얘기해보고자 한다.Ⅱ. 프리즘 사회의 성격과 유형리그스는 개발도상국의 행정 및 사회상에 많은 비중을 두고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에 그는 행정이 어떤 실태를 나타내며 어떤 양상을 보이는가는 그 행정이 자리 잡고 있는 사회 내지 국가가 어떤 모습이며 어떤 상황에 있는지에 좌우된다고 보았다. 그는 사회의 분화를 이루지 못한 융합사회, 고도의 분화를 달성한 분화사회, 분화는 달성했지만 통합을 이루지 못한 프리즘 사회로 분류했다. 그는 사회의 변화 양상 및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서 구조적 분화 및 통합을 주요 요소로 꼽았다. 프리즘 사회는 분화를 이룩했으나 통합이 부족한 원조-프리즘 사회를 의미하며 현실적으로 개발도상국들이 이에 해당한다.Ⅲ. 통합의 과제와 구비요건프리즘 사회의 과제는 통합의 달성과 통합부족의 해소라고 할 수 있다. 통합의 기본 요소는 헌정주의에 의거한 침투와 참여라는 상호관계가 정부와 국민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에 대해 리그스는 통합의 구비요건에 관한 논의를 정부와 국민으로 나눠서 제시하였다. 정부의 구비요건은 정통성 확보, 책임성 확립, 효과적인 통제의 구현과 행정능력, 관리능력을 구비하여 국정수행능력을 향상시키는데 있고, 국민은 헌정체계를 유지하고 정착시킬 수 있는 국민적 역량을 향상시켜야 하는데 이를 위해 교육수준향상과 언론의 활성화, 정당의 활발한 활동 그리고 건실한 시민단체의 역할 등이 요구된다.Ⅳ. 살라모형 : 관료제의 실태프리즘 사회에서 통합 달성을 위해서는 정부 즉 관료제의 적절한 역할 수행이 필요하다. 이에 리그스는 관료제가 어떤 실태를 보이는지 파악하여 이론화시킨 살라모형을 제시하였다. 살라모형에서 제시한 관료제의 실태는 다음과 같다.①형식주의와 표리부동성, ②이질성과 중복성, ③다분화주의와 파벌도당성, ④다규범성, ⑤양초점성, ⑥상하누수체계, ⑦연고중심주의, ⑧가격의 불확정성이 있다.Ⅴ. 비판과 대응프리즘 이론이 비교행정에서의 기여와 비중이 높은만큼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주요 비판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서구적 관점과 입장에 기본을 둔 서구적 편견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 둘째, 부정적 설명위주로만 되어있다는 점 셋째, 개발도상국들에만 국한시켜 일률화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에 리그스는 비판적 입장이나 부정적 견해는 내세우지 않고 이론 정립의 내용을 실적 분석으로 검증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프리즘 이론은 행정과 직결된 정치적 맥락 내지 상황에 관심을 두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Ⅵ. 결(結)지금까지 비교행정의 대표적인 프리즘 이론의 주요 요지와 비판 그리고 리그스 교수의 대응도 살펴보았다. 프리즘 이론은 행정을 포함한 광범위한 사회현상과 실태를 다루고 있으며, 매우 체계적이고 치밀한 논리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프리즘 사회가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강조될 것이고 이론적인 부분에서의 보완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행정에 대한 비교연구의 주요접근방법Ⅰ. 서(序)비교행정은 그 태동과 더불어 활발한 연구 활동을 전개해왔고 지속적인 활성화를 도모해왔다. 지금부터 비교행정의 접근방법을 분류해 보고 그 기본적인 성향에 대해 규명해보고자 한다.
    사회과학| 2008.06.22| 2페이지| 1,000원| 조회(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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