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재구 : 인구어족 연구 』요약아주 오래전 상대방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때 그를 'barbarian'이라고 단정하던 시대를 지나 언어의 다양성을 받아들이게 된 사람들은 왜 언어는 서로 다른지 깊이 생각하고, 다양한 언어들 간의 관련성을 입증할 증거를 찾기 시작했다.중세와 르네상스시기의 유럽에서는 기독교의 천지창조 이야기가 깊은 영향을 끼쳐 모든 인간의 원 언어는 히브리어라고 믿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여러 언어에 쓰이는 여러 어휘들 간의 유사성에 주목하고 '어원'이라는 개념을 고안해 내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추측에 지나지 않았으며 확실한 개념의 정립도 없었다. 언어와 언어변화에 관한 연구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처음 연구한 유럽의 학자는 12세기 아이슬란드의 소위 '최초의 문법학자'였는데, 후세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14세기에 와서 단테는 그리스어, 라전어 및 게르만어의 하위 어계를 인정하고 로만스어에 속하는 언어들이 라전어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점과, 여러 방언은 하나의 원 언어에 기원을 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지만 여전히 히브리어가 모든 언어의 기원이라고 믿는 한계에 부딪혔다. 16세기말, 스케일리거는 마침내 히브리어가 모든 언어의 조상이라는 관념을 반박하였다. 그는 유럽의 언어를 11개의 모언어로 분류 하였으나, 이들 언어간의 정확한 친근 관계는 이해하지 못하였다. 인구어 연구에 가장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 것은 1786년, 존즈가 왕립 아시아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이었다. 슐레겔은 산스크리트어가 인구어의 조어라고 주장하는 오류를 범하기는 했지만, 다른 인구어들의 분류를 세밀히 분류하였다. 보프는 동사체계를 자세히 기술함으로써 인구어 연구를 촉진시켰다. 라스크는 체계적인 음운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언어들간의 내적인 친근관계를 지적하였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유럽의 역사 언어학은 비로소 하나의 학문으로 확고하게 자립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인구어에대한 연구가 시작되는데 이 연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어족' 이라는 개념부터 살펴보아야 한다.어족이란 어떤 언어들은 다른 언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공통된 특징을 공유하고 있어서 이들 언어들의 기원을 소급해서 올라가 비교 연구해 보면, 하나의 공통적인 언어, 즉 조어에서 나왔을 추측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개념이다. 어족의 현대적 개념은 다윈의 진화론의 개념을 언어에 적용한 독일인 식물학자였던 슐라이허의 연구에서 기인한다. 슐라이허는 그가 제창한 족보형 모형으로 언어학자들이 이 모형을 이용하여 언어의 파생과정을 생물학적으로 추적할 수 있고, 언어의 기원을 밝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선사 시기의 원시언어를 재구해 낼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다른 언어들 간의 횡적인 접촉에 따르는 상호 관계를 설명하지 못하는 결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 때문에 1872년 독일의 언어학자인 슈미트는 족보 이론을 수정하여 소위 파도 이론을 제안하였다. 또한, 역사 비교 언어학의 중요한 원리중 하나는 생활에서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어휘는 다른 언어에서 빌려다 쓰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에 두 언어 간의 친근 관계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처럼 한 언어의 중심이 되는 어휘를 토착어라고 하고, 다른 언어에서 빌려온 어휘를 차용어라고 한다. 이러한 개념과 원리를 바탕으로 영어의 glide와 스웨덴어의 gida는 각각 토착어이며, choose는 영어에서는 토착어이나 프랑스어에서는 차용어이며, 영어의 pepper와 도이치어의 Pfeffer는 모두 라전어에서 차용했고, 라전어는 그리스어에서, 그리스어는 산스크리트어에서 각각 차용했음을 알 수 있다. 영어의 head는 토착어인 반면, capital은 라전어에서 온 차용어이다. 이 두 어휘는 뿌리는 같지만 영어가 capital을 빌려오기 전에 두 언어에서 가각 다르게 발전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어족에 관한 개념이 생겨나면서 학자들은 인구어의 시작이 어디였는가에 대한 의문에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인구어 민족의 원거주지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세가지 학설이 지배적이다. 모든 인구어에는 winter, snow, cold를 뜻하는 어휘가 공통적으로 쓰이며 열대 생활과 관련된 어휘는 공통으로 나타나지 않음으로 미루어 인구어 민족의 원거주지가 온대지역보다도 더 위쪽인 북부지역에 위치하였다는 가설이다. 또한, sea를 뜻하는 어휘는 모든 인구어에 나타나지 않으므로 원 인구어 민족은 내륙인들 이었으며 이들 중 일부가 나중에 해안 지역으로 이동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북 아메리카 식민지의 독립 :독립전쟁과 독립혁명과목명 : 미국의 역사- 목 차 -미국 독립혁명의 배경① 독립혁명의 일어나기전의 미국의 상황② 왜 미국사람들은 독립을 원했을까?③ 독립혁명의 원인이 된 주요 사건들미국 독립혁명의 전개① 전쟁의 서막 – 보스턴② 독립전쟁의 전개③ 독립전쟁의 3국면미국 독립혁명의 결과 및 의의① 결과② 의의1. 미국 독립혁명의 배경① 독립혁명의 일어나기 직전의 미국의 상황명예혁명 이후 영국은 수상과 내각의 나라의 행정권을 장악했는데 이들은 영국의 대상인과 지주들에게 정치적으로 의존했다. 따라서 상인들이 식민지에 통제를 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식민지의 해정은 느슨하고 비효율적이었으며 파편적이었다. 게다가 조지 3세가 즉위하면서(조지3세는 1760년에 즉위함) 예전과는 상반된 통치정책이 실행되면서 식민지에 대한 영국의 태도는 일관성이 없었다. 이러한 시기에 1754년 프랑스-인디언 동맹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미 유럽대륙에서는 이전부터 프랑스와 영국의 대립이 자주 있어왔는데 이 전쟁에서 영국은 승리를 거두어 방대한 영토와 함께 신세계 영토에 대한 권리를 한층 더 강화할 수 있었지만 엄청난 전쟁부채에 시달리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영국은 식민지에 세금을 매겨 전쟁부채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식민지 의회들은 전쟁 채무를 갚을 생각이 없음을 반복적으로 시위하며 정부의 세금 부과에 반발하며 격렬하게 저항했다.② 왜 미국사람들은 독립을 원했을까?프랑스 – 인디언 전쟁에서 식민지와 영국은 프랑스에 맞서 같이 싸웠는데, 그로부터 불과 13년 후 양국은 이제 서로가 피 흘리며 싸우는 사이가 되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본국에 반기를 들도록 했을까? 여기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었다. 1950년대 신 휘그주의자들은 헌법의 원리, 정치적 권력, 자유 와 재산의 보호를 목적이라고 주장하였으며 19세기말에는 영국이 미국인들의 자유의지를 압박하였기 때문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미국과 영국상인들간의 경제적 이익의 마찰과 식민지 내에서의 계급 및 지역간의 불균형에 영국의 강압적인 경제정책이 더해져 경제적 이해 관계의 대립이 제일 큰 이유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실 미국은 식민지들 중에서도 특별한 성격을 띠고 있는 식민지로 본국과 사회, 경제, 피부, 언어, 풍습이 같으며 이념과 사상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으며 비교적 풍요롭고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물론 독립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엔 빈익빈 부익부 현상도 심화되고 일자리도 줄어들어 서민계층의 생활이 어려워져서 많은 반반을 샀지만 지역 엘리트들이 혁명에 참여할 이유는 별로 없었던 것이다. 결국 미국의 독립전쟁은 ‘자유’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자유’는 독립전쟁을 일으킨 다른 이유를 가리키는 명분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③ 독립혁명의 원인이 된 주요 사건들*프랑스 – 인디언 동맹전쟁 – 원인 :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 영토 쟁탈전- 결과 : 영국의 승리. 엄청난 크기의 땅을 영국에게 넘겨줌1763년 파리조약으로 식민지 입법의회의 권력강화- 의미 : 1754년 Albany 회의:7개 식민지 대표들이 모여 회의 별다른 결실은 없었지만 동질감을 느끼게 함* 설탕법(Sugar Act) - 1764년 영국이 돈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최초의 세입법* 반란법(Munity Act) - 1765년 영국군인들의 숙박을 식민지에서 해결함.* 인지세법(Stamp Act) - 1765년 식민지에서 발행되는 모든 문서에 세금을 부과 이를 계기로 영국 관리들은 매년 10배가 넘는 세입을 거두어 들이게 됨.=>인지세 항거운동 “대표자가 없는곳 에서는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 식민지 사상최초로 하층민들이 정치에 참가하는 기회가 됨.하지만 하층민들의 과격한 행동을 완화시키기 위해 지역 엘리트들은 자유의 아들들(Son of Liberty) 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하층민의 항거를 완화시키고 온건한 방영 투쟁을 추구하였다.* 타운센드 관세(Townshend Acts) - 1767년 영국에서 식민지로 수입되는 다양한 상품에 새로운 세금을 부과2. 미국 독립혁명의 전개① 전쟁의 서막 – 보스턴1770년 보스턴 학살사건(Massacre of Boston)이 일어나면서 영국은 권위유지성 차 관세만 남기고 다른 수입관세들을 철회한다. 그러다 1773년 파산위기의 영국 동이도 회사의 차를 미국에 덤핑 판매하기 위해 차세법(Tea Act)이 제정되었다. 이 사건으로 식민지 상인들은 크게 반 발하였으며 이로 인해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동인도 회사의 차를 실은 배가 보스턴 항에 정박하자 사무엘 아담스, 존 핸콕 등의 자유의 아들들 150명이 차가 들은 상자를 바다에 던져 버린 것이다. 영국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항하여 강제법(Coercive Act)을 시행하였다. 제일먼저 손실액을 배상할 때까지 보스턴항을 폐쇄하고 영국 국왕이 식민지의회의 상원의원과 보안관을 직접임명하고 이들이 배심원을 임명하는 통치법(Government Act)을 만들었으며 영국 본토에서 재판을 받게 하였다. 이를 보고 식민지인들은 참을 수 없는 법 이라고 부르며 투쟁을 시작했다.② 독립 전쟁의 전개1770년 보스턴 대학살1773년 보스턴 차사건1774년 제 1차 대륙회의 : 영국 상품 불매운동1775년 제 2차 대륙회의 ->민병대 승인 4월 19일 Lexignton 전투1776년 제 3차 대륙회의에서 공식적으로 독립선언서 채택&발표제 2차 대륙회의 때 식민지의 대표들은 전쟁 지원에 동의했다. 그러나 전쟁의 목적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지 못했는데 이는 보스턴 차 사건이 생긴 뒤 독립을 선언하기까지 왜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는가에 대한 해답을 알려준다. 식민지시대의 영국 이민 1~2세들은 아직까지 조국에 대한 애착이 남아있었으며 렉싱턴 전투가 일어날 때에도 식민지는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는 급진파와 영국과의 관계개선을 목표로 강압정책의 절회를 주장하는 온건파가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을 시작한지 1년이 지나자 식민지인들은 전쟁의 대가가 얼마나 큰지 실감하고 그들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선택이라고 결론 내렸다. 또한, 토마스 페인의 ‘상식’이라는 팜플렛이 나오면서 독립에 대한 지지가 확산되는데 일조했다.③ 독립전쟁의 3국면첫 번째 국면 : 뉴잉글랜드1775년 봄부터 1776년 봄까지 첫 해 동안 영국은 실제로 전쟁을 치른다고 생각한다기 보단 보스턴 주변의 말썽 많은 지역에서 국지적인 반란을 진입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사상자가 많아지자 보스턴이 싸우기 부적합한 곳이라고 결정하고 노바스코샤의 핼리팩스로 향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영국인들도 이 전쟁이 더 이상 국지적인 충돌이 아님을 깨달았다.두 번째 국면 : 대서양 중부 지역1776년부터 1778년 초까지 계속된 전쟁의 두 번째 국면은 영국이 전쟁에서 이길 승산이 가장 많았다 하지만 큰 실수와 계속된 불운으로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이 때 식민지 지도자들은 해외의 도움의 절실함을 느끼고 프랑스에 밴저민 프랭클린을 보낸다. 처음에 프랑스는 미국에 아주 긴급한 물자들만을 공급했지만 1778년 미국을 공식적으로 주권 국가로 인정하고 미국에 대한 군사 원조를 확대할 것을 약속했다.- 마지막 국면 : 남부영국은 이제 전면전을 치르는 것보단 아직도 영국 국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충성파 정서가 가장 강한 지역인 남부에서의 이 전략은 비참하게 실패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전쟁은 혁명화 되었다 새로운 종류의 전투가 도임되고, 이전에는 고립되었던 지역으로까지 전쟁이 확대되고 민간인이 전쟁에 연루되었으며 이로 인해 독립에 대한 지지는 사그라 들기는커녕 더욱 켜졌다. 1780년 식민지 군대에서 심각한 배신 행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1781년 요크 타운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며 전쟁의 막을 내렸다.3. 미국 독립혁명의 결과와 의미① 결과: 13개의 식민지를 연합하는 영구적 동맹을 기반으로 한 세계최초의 민주 공화국 탄생. 전쟁 후 감리교, 회중교, 침례교는 애국파와 성공적으로 연합하여 더욱 교세가 늘어난 반면 퀘이커 교도들은 평화주의자로서 전쟁을 거부해 인기를 잃고 말아다. 혁명 전쟁을 거치면서 가장과 사회에 대한 여성의 기여도를 재평가하게 됨 경제구조에도 변화를 가져다 주었는데 영국이 미국과의 교역을 중단했고, 미국 상인들은 카리브해와 남아메리카의 새로운 거래처를 개발하였다. 영국 물품의 수입이 차단되자 생활 필수품을 국내에서 제조하려고 노력하였고 각 주간의 교역도 상당한 규모로 늘어났다.② 의미미국 혁명은 바로 계몽 사상에 부응하여 기존 질서에 대항해 일으킨 최초이자 가장 영향력이 큰 반란이었으며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영감을 준 사건이다. 미국혁명 10년뒤 프랑스에서 혁명이 시작되었고 이 두 혁명은 대서양 세계의 반란들에 영감을 불어넣었으면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 식민지로 번지게 된다.참고문헌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1권, 앨런 블링클리, 휴머니스트미국의 역사, 최웅’김봉중, 소나무미국사 100장면, 유종선, 가람기획살아있는 미국역사, 하워드 진, 추수밭
현대사회에서도 샤일록의 증서와포샤의 판결은 과연 유효할까?유럽 대륙의 근세 초기 형사절차는 소추를 기다리지 않고 법원이 직권으로 심판하는 규문절차가 행하여졌지만, 프랑스혁명 후 검사의 공소의 제기가 있어야 소송절차를 시작하는 탄핵주의를 취하게 되었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보면 그때는 규문절차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 때 상황으로 본다면 포샤의 판결은 아무 이상 없는 판결이라고 볼 수 있다.[셰익스피어]하지만 현재의 우리 법체계에 맞춰 판단한다면 더 이상 판사가 직접 권리를 행사하는 규문주의가 아니라 그 반대의 탄핵주의 절차가 행하여지는 현대적 관점으로 볼 때 탄핵주의가 원칙이기 때문에 포샤의 판결은 월권행사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원래 판사의 본분은 변호인 둘의 말이 맞고 아니고만 들어주는 것인데 포샤는 이미 판결을 내린 뒤에 또 다른 법을 적용하여 샤일록의 전 재산을 몰수 하며 안토니오의 편을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판결은 옳고 그름만을 따지는 판사의 본분에서 벗어난 비판받을 수 있는 판결이라고 볼 수 있다.샤일록의 계약증서로 넘어가 보면 샤일록과 주인공과의 계약이 반사회 질서적 계약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법 조항으로 보면♤ 제103조(반사회질서의 법률행위)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한 사항을 내용으로 하는 법률행위는 무효로 한다.
[국제정치]국제관계이론 : 국가간의 갈등원인과 질서유지제 9장 오간스키의 힘의 전이이론 요약오간스키의 힘의 전이이론은 정태적인 세력균형이론과는 반대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국가 간의 힘의 분포상태의 변화에서 전쟁의 원인을 찾으려는 국제정치시스템의 동태적 변화양상을 설명하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간스키는 전쟁의 원인을 국제정치구조의 변화에서 찾고 있으며 ‘국제사회는 주권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국가는 힘의 크기에 따라 최강의 지배국가로부터 최약의 종속국가에 이르기까지 계층적으로 나뉘어 있는 위계질서에서 일정한 위치에 놓여 지는데, 전쟁은 국제정치 질서를 지배하고 있는 기존의 강대국과 이 지배권에 도전하는 신흥 강대국 간의 지배권 쟁탈전의 형식으로 일어나게 된다’고 본다. 힘의 전이이론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국제정치관을 전제로 하고 있다.첫째, 국제정치사회는 정치질서가 없는 무정부상태로 보고 있다. 이는 국제정치사회를 주권국가들의 제도적 제약 없는 자율행위의 무대로 보는 고전적 이론의 전통적 국제정치관이기도 하다 즉, 홉스가 말하는 자연의 상태로 파악되는 것이다. 주권의 절대성과 국제사회의 무정부상태라는 두 가지 조건을 전제로 하여 전쟁을 막는 방안으로 제시된 세계정부이론, 집단안보 이론, 세력균형이론이 추구하는 규범적 목표 상태로서의 국제정치체제의 중앙집권적 양상의 정도 차에서 세 이론은 하나의 연속선상의 변형이라고 보고 있다. 즉, 세력균형이론은 최소한의 체제권력을, 그리고 집단안보는 제한된 중앙권력을, 그리고 세계정부는 최고의 중앙권력을 이상으로 잡고 있다는 차가 있을 뿐, 모두가 국제정치 체제의 무정부적 상태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오간스키의 힘의 전이이론은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세력균형 이론과 같은 정도의 힘의 집중, 즉 완전한 무정부상태를 상징하고 전쟁의 원인과 평화의 조건을 찾는 입장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두 번째, 국제정치질서는 그 시점에서 가장 강한 국가와 그 국가를 지지하는 국가군이 힘으로 유지하는 것이며, 그 질서는 최강의 지배국에게 가장 큰 이익을 주도록 되어 있어, 모든 나라는 가능하기만 하다면 국력을 늘려 위계적 국제정치구조의 최상계층에 올라서려 한다는 것이다. 이 전제가 암시하는 바는 약육강식의 무정부적 국제사회에서 강대국은 약소국을 착취하기 위한 제도로 국제정치질서를 형성, 유지, 보존하려 한다는 것이다. 국가의 본원적 속성으로서의 지배욕을 하나의 보편적 성향으로 전제 할 때라야 오간스키의 힘의 전이이론은 타당성을 갖게 된다.세 번째, 각국의 국력은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것이다. 국가 간의 힘의 차의 가변성이야말로 힘의 전이이론의 핵심이 되는 힘의 전이를 가능하게 하여 주는 전제이다. 오간스키는 그의 힘의 전이이론에서 이상에서 열거한 세 가지 전제로 요약되는 국제정치관에 입각하여, 현상유지를 도모하는 현재의 지배국과 이에 도전하는 피지배의 신흥 강대국 간의 대결로 전쟁의 발생과정을 설명하며, 이러한 분석에 따라 평화의 조건을 도출해 내려고 하고 있다. 오간스키는 국제정치현상을 설명하는데 있어, 각 시대의 특질에 맞는 특수이론은 있을 수 있어도, 시간을 초월하는 보편적 이론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세계역사를 산업화의 진행을 기준으로 3기의 시대로 구분하는데 제 1기는 1750년 이전의 시대로서 산업화 이전의 왕조시대이다. 제 2기를 산업화가 시작된 1750년경부터, 산업화가 진행 중인 국가와 이미 산업화가 끝난 국가들이 병존하는 현재까지로 잡고 있다. 제 3기는 모든 국가가 산업화를 마친 시대인데, 아직 오지 않은 시대이다. 이때의 국제 정치는 힘의 전이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고, 새로운 특수이론이 개발되어야 한다고 오간스키는 주장하고 있다. 힘의 전이이론은 이런 점에서 현세대에만 적용되는 시한적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오간스키는 힘의 3대요소로 ①부와 산업능력, ②인구, ③정부조직의 효율성을 들고 있는데 이중에서는 산업능력의 증강이 주도적 역할을 한다고 보며 산업화의 진행에 따라 한 국가는 세 가지 단계를 거쳐 강대국이 되어 간다고 본다. 이 세 단계란 1. 잠재적 힘의 단계, 2. 힘의 전환적 성장단계, 3. 힘의 성숙단계이다. 성숙기에 든 강대국의 힘은 상대적으로 감소한다. 국제정치에서 힘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다른 나라와의 상대적 관계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인데, 산업화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전환적 성장단계에 있는 나라의 힘의 신장 속도만큼의 성장속도를 유지 못하는 성숙기의 강대국은 자연히 힘의 전환적 성장단계에 있는 국가들과의 힘의 격차를 계속 높이 유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힘의 전이이론은 바로 이 현상, 즉 전환적 성장을 하고 있는 국가와 힘의 성숙기에 접어든 국가왕의 힘의 격차가 좁아진 현상을 포착하여, 여기서 전쟁의 원인을 찾아내려 하는 이론이다. 현재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는 강대국은 그 지배권의 유지를 위해 힘의 격차를 좁히며 쫓아오는 제 2의 강대국군이 도전을 못하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후발, 추적 강대국은 지배국의 저지를 뚫고 최강의 국력을 확보하여 기존지배국의 지배권을 탈취하려는 데서 갈등, 그리고 전쟁은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다. 지배권을 가진 현재의 강대국이 도전하는 강대국의 도전을 막는 방법에 대해 오간스키는 세 가지 대안을 제시하지만 모두 유효하지는 않다고 지적한다. 첫째 방법은 원조, 통제력행사 등을 통해 도전할 나라의 산업구조를 농업 내지 경공업 위주로 전향시키는 것이다. 두 번째 장법은 도전국의 산업화를 지연시키는 방법이다. 세 번째 방법으로, 지배국이 앞장서서 도전국의 산업화를 원조 제공등으로 도와줌으로써 도전자가 이에 대한 고마움을 느껴 지배국의 지배권을 계속 존중하도록 해 주는 방법이 있다. 무정부상태의 국제사회에서는 각국의 지위를 정해주는 어떠한 초국가적 권위도 없으며 오직 각국은 자국의 힘에 따라서 서열을 정해 받게 되어 있다고 오간스키는 보고 있다. 즉, 국제정치구조는 힘의 강약에 따라 위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위계질서에 따라 대체로 다섯 개의 계층구조에 분포되어 있다고 보는데 최상부의 지배권을 행사하는 지배국, 그다음의 강대국, 그 밑의 중급국가, 다시 그 아래의 약소국, 그리고 제일 밑의 종속구가 등이 그 다섯 개의 계층이다. 위계별로 각 계층에 분속되어 있는 모든 나라가 다 국제정치 질서에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배국과의 특별한 관계로 특혜를 누릴 수 있는 몇몇 강대국들과 중급, 약소제국들을 제외하고는 불만스러우나 힘이 없어 그대로 승복하고 있는 수가 많다. 오간스키는 각국의 현존 국제질서에 대한 만족, 불만족을 함께 고려하여 국가들을 다음의 네 부류로 분류하고 있다. 즉 ①만족해하는 강대국, ②불만스러워 하는 강대국, ③만족해하는 군소국, ④불만스러워 하는 군소국이 그 네 가지다. 최강의 지배국은 항상 만족스러워 하는 것으로 분류되고 있다.오간스키가 분석하고 있는 국제정치구조와 국력변화의 추세를 함께 고려하면, 전쟁의 원인은 자명해 진다. 그의 이론적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평화의 조건 : 현존질서의 지배국의 국력이 도전국의 국력을 압도하고 있는 동안 평화는유지된다.전쟁 가능성 : 현존질서의 지배국의 국력과 도전국의 국력의 격차가 좁아져서 도전국이 전쟁으로 지배국의 위를 확보할 수 있다고 믿을 만한 상황에 이르면 전쟁 가능성이 높아진다.오간스키는 이에 덧붙여 여기서 논하는 평화란 정의와 일치시켜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지배국이 추구하는 것은 그들의 이익뿐이지 여타 국가들을 포함한 전 세계의 국가들의 평화와 복지가 아닌 것과 같이 도전자가 정의를 반드시 대표한다고 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평화를 비폭력적 수단에 의하여 분쟁을 해결하며,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제도적 보장이 확보된 사회 상태라 한다면 평화는 국제질서의 유지보다 비폭력적인 구조개편의 허용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산업화시대 직전의 유럽에서는 프랑스가 최강의 국가였다. 산업혁명을 처음으로 겪은 영국은 축적된 국력을 토대로 프랑스에 도전하여 나폴레옹 전쟁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어 지배국에 나섰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서구세계에서는 미국이 완전한 지배권을 장악하여 미국 주도의 국제정치질서를 형성하였으나 신흥 강대국인 소련의 도전을 받기 시작하여 전쟁일보전의 대결을 계속 반복하였다. 지난 1세기 동안의 전쟁의 역사를 일별해 보면 주요한 전쟁은 거의 전부가 세계최강국 및 그 동맹국들이 산업화로 강대해진 신흥 도전국과 싸워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오간스키가 주장하는 전쟁원인으로서의 힘의 전이이론과 평화조건은 경험적으로 입증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