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트 뵈-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을 읽고 -주 트 뵈 . ‘너를 갖고 싶어’ 라는 뜻의 제목을 가진 이 곡은 주인공 미흔의 결혼식에서 축가로 연주되었다. 하지만 이 곡은 모순적이게도 그녀의 결혼 생활을 종식하는 발단으로 또 한 번 쓰이게 된다. 미흔을 충분히 이해하기에 나는 아직 너무 미숙했고 아직은 경험해 본 것 보다 그렇지 못한 게 많았다.주인공 미흔은 전부라 믿었던 남편의 사랑에 배신당하고 오랜 시간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한다. 그녀는 스스로 세상으로부터, 남편 효경으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격리된 채 살아간다. 미열처럼 남아 그녀를 아프게 하는 내면의 상처는 무엇으로도 치료되지 않는다. 너무나도 오랜 시간 끝도 보이지 않는 서글픔에 시달리던 그녀의 인생에 규라는 새로운 남자가 나타난다.처음 미흔과 규가 만나던 날, 그가 ‘괜찮아요?’ 라고 묻던 순간, 나는 미흔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녀의 마음속에 억눌려 있던 설움, 눈물 그리고 분명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겨 가고는 있지만 목적지가 불분명한 그녀의 행보를 보듬어 주는듯한 한마디로 들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그와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되고 그를 통해 잃어버렸던 자신을 찾고 또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사랑이란 ‘하는 것’ 이 아니라 ‘빠지는 것’이라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나중에는 결국 이성보다 감성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니 더욱 이 말에 공감이 갔다. 분명 불륜이란 이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사랑이 정당하지 못한 것이고 그래서 남들 앞에 떳떳하게 드러낼 수 없는 종류의 것임을 알고 있다. 주인공 미흔이 그랬고 규가 그랬고 효경이 그랬고 혜윤이 그랬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랑을 시작했고 거부할 수 없었다.그래서일까? 소설의 규는 흔히들 더 선량하고 너그러운 사람들이 더 많은 사랑을 한다고 착각을 하지만 실은 정말로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끝까지 하는 자들은 나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보다 덜 선량하고 부도덕하고 연약하고 이기적이고 히스테릭하고 예민하고 제멋대로이고 불행하고 어둡고 자기도취적이고 집요하면서도 변덕스럽고 독선적이고 질투하는 사람이라고. 아마도 끝까지 자신들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 미흔과 규 같은 사람일 것이다.이 책에는 유난히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구절이 많았다. 그리고 단풍과 숲속, 삶과 마음을 묘사하는 문체 또한 참 예뻤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강함과 행복에 관한 것이었다. 규는 소설에서 강하다는 건 이를 악물고 세상을 이긴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 곳에도 뿌리내리지 않고 진흙 한 점 묻히지 않고 피어나는 물 위의 꽃처럼 세상과 상관없이, 어떤 경우에도 행복하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간혹 우리는 ‘덤벼라 세상아’ 라고 말하며 세상을 향해 도전을 하려는 시도를 한다. 나 또한 그런 경험이 있고 결국은 이기지 못한 채 좌절한 경험이 있다. 그 때 나는 한참을 그로 인해 힘들어 했다. 하지만 규의 말처럼 행복은 생각과 마음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미흔은 규를 통해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그들의 '뜨거운 언어'에 동참하다"핸드폰은 잠시 꺼.... 두시지 마시고 큰소리로 맘껏 통화하십시오. 공연중 소리를 지르거나 발을 구르는 행위는 적극 권장합니다. 사진촬영은 절대.... 하셔도 좋습니다." 처음 공연을 시작하기 전 공연담당자가 관객들에게 한 주의 사항이었다. 의외였다. 관객들은 이런 담당자의 말에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는 발레리나가 스트리트 댄스(Street dance)를 접한 후 문화적 충격을 받고 비보이에 동화되어 가는 과정을 춤으로 그린 작품이다. 작품은 전통과 현대를 충돌시킴으로써 세대간, 계층간 갈등의 폭을 완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이런 의도처럼 공연장에는 역시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어린 아이들부터 마흔쯤 되어 보이는 회사원들, 심지어는 나이가 많이 드신 할아버지까지. 그만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신이 나 즐길 수 있는 공연이었다.공연이 시작되었다. 막이 열리자 순간 눈부신 조명을 받은 발레리나의 자태는 선녀가 내려온 것 같았다. 관객들은 뜨거운 환호성으로 발레리나를 맞이했다. 무대 위의 발레리나들은 아름다운 몸으로 그림을 그리듯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전통 클래식 음악은 따뜻함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유혹했다. '발레'라 하면 누구나 숨을 죽이고 음악을 경청하고 발레리나를 주시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극장 안 관객들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은 발레리나가 한쪽 다리를 자기 얼굴 옆으로 올리고 있는 모습이나, 발끝을 세우고 연속해서 회전하는 등 고난이도 동작을 취할 때면 환호성과 박수로써 열광했다.비보이들은 발레리나와는 또 다른 느낌의 감동을 줬다. 그들은 발레리나와 대결하는 장면에서 자신들만의 색다른 춤을 췄다. 특히 헤드스핀하는 모습과 계속해서 두 손으로 지탱하고 두 발을 공중위에서 도는 장면, 온 몸을 공중에 띄우고 한 손으로 중심을 잡는 장면에서는 사람들의 환호성과 감동의 박수가 가장 컸다. 또한 걸스힙합팀은 섹시한 춤으로 남자관객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계속해서 윗무대와 아랫무대를 오가며 펼쳐지는 화려한 춤들로 공연이 끝나는 시간까지 극장 안은 뜨거운 열기를 더해갔다.‘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 는 대사가 없는 일종의 무언극이었다. 대신 춤과 연기, 표정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내용을 전달했다. 물론 초반에는 조금 답답한 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몸은 가장 솔직한 언어이고, 춤은 가장 뜨거운 언어’ 라는 말이 있듯이 대사가 없어도 그 열정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관객들은 어깨를 들썩거리고 발로 박자를 세었다. 그리고 어느새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를 치며 그들의 외침에 동참하고 있었다.비보이란 '비'와 '보이'라는 말의 합성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비'는 브레이크댄스의 약자를 뜻하고, '보이'는 이를 즐기는 사람들을 뜻한다. 청소년들이 그 주류를 이루어 '보이'라는 명칭이 대표가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브레이크댄스란 무엇일까? 사전의 정의에 의하면 1980년대에 뉴욕의 흑인 소년들이 거리에서 추기 시작한 춤으로 자유롭고 곡예적인 율동을 보여 주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자유로운 춤을 추는 사람과 서양 고전의 대표적 춤인 발레리나와의 만남은 많은 볼거리를 제공했다.
-애처롭고 기괴한 인간의 욕망-인간이 원하는 것은 욕망의 충족이다. 인간은 모름지기 자기의 욕망을 신성하게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소설 는 우리에게 인간의 욕망으로 빚어진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인간의 욕망에 대한 견제와 제어가 필요함을 경고를 하고 있는 작품이다.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의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철학도였으며 심지어 철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자 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미셸 투르니에에게 소설은 그의 인간 존재론적 고민을 형상화하는 수단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고민없이 읽어서는 이야기의 표면에 드러난 일차적 의미밖에는 알 수 없으며, 두 세 번은 읽고 난 후에야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가까이 갈 수 있다.소설 는 라디오가 오늘날의 텔레비전보다 사람들의 정신력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 중심소재로 이용한 라디오란 시각에 의존하는 다른 매체와는 달리 청각에 모든 것을 의지하는 특별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라디오를 소재로 사용한 것은 시각적인 것에 익숙한 대중들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나 신비감을 가지고 있음에 주목한 것이다. 라디오는 형상화되고 구체화된 이미지를 알고 싶어 하는 청취자들의 욕구를 자극하여 궁금증을 일으키고, 이로 인해 사람들로 하여금 ‘상상'이라는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 막대하고 통제 불능한 범주의 특권을 부여하게 된다.소설의 주인공 트리스탄 복스는 스피쾨르, 다시 말해 라디오 DJ이다. 청취자들의 상상 속의 트리스탄 복스는 우수에 젖은 커다란 눈에 밤색 머리카락을 가진 키가 크고 날씬한 남자로, 흔히 꿈꿔왔던 만화 속 주인공을 방불케 한다. 청취자들에 의하면 트리스탄 복스는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형에 가까운 완벽한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실제의 트리스탄 복스는 펠릭스 로비네라는 실명을 가졌으며 대머리에 배가 불룩하게 나온 전형적인 아저씨의 모습을 하고 있다. 결국 청취자들이 상상했던 가상의 이미지에는 현실과는 무관한 그들의 욕망이 담겨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에서는 사건을 진행시키는 욕망의 흐름이 미셸 투르니에의 그 어떤 작품들보다 극명히 드러나고 있다. 주인공 펠릭스 로비네가 라디오 방송에 의해 트리스탄 복스로 재창조되는 데에는 라디오 청취자들 외에도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로비네와 방송사의 욕망들이 숨어있다. 이들의 욕망은 스타를 중심으로 대중문화를 만들어내는 ‘스타시스템'으로 실현될 수 있었다. 현재 우리 사회를 보아도 스타를 대중의 우상으로 만드는 신격화 과정은 인간들의 욕망을 대변하고 있다. 스타는 자본주의가 만든 꿈의 빵이라는 말이 있다. 정신적인 만족은 줄지언정 실질적 도움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꿈의 역할은 하지만 빵의 역할은 하지 못하는 허상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스타는 이해 관계자들과 스타를 원하는 대중들의 욕망에 의해 현실세계에서도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모든 것은 인간의 욕망에 의한 것이었다. 각각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행동하고, 그러한 행동들은 서로 얽히면서 사건을 이끌어 나간다. 방송사는 이윤을 위해 트리스탄 복스가 필요했고, 로비네는 평온한 삶을 위해 기꺼이 트리스탄 복스가 되었다. 라디오의 청취자들은 그들의 정신적 지주인 트리스탄 복스를 자신들이 꿈꿔온 욕망에 따라 가공해낸 것이다. 그리고 로비네와 가장 가까운 인물인 여비서 플라비양과 아내 아멜리는 트리스탄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라디오 청취자들처럼 스타인 트리스탄을 향한 욕망과 트리스탄의 비밀을 말하고 싶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로비네의 평온한 삶의 파멸을 가속화시킨다. 마지막으로 청취자들이 상상해온 트리스탄 복스의 이미지와 너무나도 닮은 뒤라토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데, 그는 결국 스타의 삶이 주는 특권을 누리기 위해 펠릭스 로비네의 뒤를 이어 또 다른 트리스탄 복스가 되기로 한다.에서 이러한 욕망은 혼란을 낳게 된다. 특히 펠릭스 로비네 자신이 겪는 혼란보다 그에게 가장 가까운 두 인물인 아내 아멜리와 여비서 플라비 양이 겪는 혼란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둘은 트리스탄 복스에게 '이졸데'라는 가명으로 편지를 보내며 그들의 혼란스러움을 드러냈다. 하지만 욕망들이 빚어낸 결과는 혼란에서 멈추지 않았고 끝내 참담한 결과를 빚어냈다. 그의 여비서는 창문 밖으로 몸을 던져 자살을 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아내는 삶의 열정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이렇게 삶은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사실은 펠릭스 로비네가 애초에 볼품없는 자신의 실제 모습을 숨기고 '트리스탄 복스' 라는 가상의 존재를 빌려 라디오의 영웅이 되면서부터 사건은 이 모든 비극적인 결말을 암시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소설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로비네는 아내가 로비네의 뒤를 이어 트리스탄복스가 된 뒤라토에게 보내는 편지를 발견하고 아찔한 고독감을 느낀다. 그리고 라디오를 진행하는 뒤라토에게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로비네는 이제 그를 따르던 청취자들은 물론 자신의 아내에게조차 소외되는 외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상의 이미지가 실재를 압도해버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