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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충선왕의 개혁
    Ⅰ. 序論충선왕은 여러모로 14세기 고려 국왕 중 주목되는 인물 중에 하나이다. 또한 충선왕은 최초의 혼혈국왕 이었다. 원과의 관계에 있어 다른 국왕과 차이를 보이고 선왕 충렬왕과는 달리 강도가 센 개혁을 단행했다. 이와 함께 그에 대한 연구도 여러 갈래를 보이고 있다. 그 연구의 갈래 중 하나는 과연 그의 개혁에서 反元의 기치를 확인할 수 있느냐이다. 우선 반원성의 여부는 단언하기 힘들다.폐정을 개혁하고 국정을 혁신했다는 기치 아래 반원성이 있다고 보는 초기 연구들이 있다. 하지만 요즈음의 연구에서는 충선왕대의 관제 개편이나 개혁에서 원과 부응하는 부분과 함께 유사성도 발견이 되고 있다. 이 당시 원과의 관계가 1세기가 지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반원과 친원으로 나누기에는 한계가 있다.충선왕대의 정사를 이해함에 있어 그의 국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여러 가지 였을 것이다. 원나라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나라인 고려의 영향도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혼혈국왕이기는 해도 그는 ‘고려인’이라는 인식을 완전히 버려두고 있지는 않았다. 여느 후대 고려왕들이 그래 왔듯이 그도 태조 왕건을 존경하고 있었다. 충선왕이 원 정부 내의 사정과 상황에 조예가 깊었고 원 제도의 수용에도 적극적이었음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전체적으로 그의 개혁을 살펴보았을 때 고려 전기의 제도 나 관례가 복원된 경우가 상당수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관제? 전례? 제정 등의 분야에서 발견이 된다. 이 분야에 충선왕이 개혁을 하는 데 있어서 고려구제나 중국구제들의 구제를 추구하는 지향이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논하고자 한다.구제지향적 조류는 원나라 내 에서도 무시 할 수 없는 흐름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는 충선왕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개혁에 있어 정치 개혁과 경제개혁으로 나누어 보고 구제복구의 큰 틀 안에서 논해보고자 한다.충선왕의 개혁은 또 다른 점에서 흥미롭다. 30년이 넘는 재위기간 충렬왕이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이 불과 충선왕의 짧은 재위기간관계와 관련한 시무가 많아지면서 국정 의결기구의 구성원이 증가해 조정의 의사결정구조가 복잡해졌고 자연히 여러 부속관청들도 필요 이상으로 많아져 있었다. 그러나 충렬왕은 이러한 관부 규모에 손보지 않았다. 그에 비해 충선왕은 의사결정의 신속화 및 왕권강화 그리고 업무 효율 제고를 위해 용원감축이라는 의제를 새로이 설정하여 관제개편 및 통폐합의 형태로 그를 추진한 것이다.첫 번째로 용원감축과 함께 두 번째 지향점은 감찰행정의 강화였다. 충선왕은 즉위 당시 어사대의 설치가 백관 단속하기 위한 것인데 근래 풍속이 크게 허물어져 제대로 논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금후 백관을 彈糾하여 朝廷을 肅淸할것을 천명하였다. 즉위 교서에는 뇌물수수 및 지방 按廉使들의 백성침해 등을 적극 거론하기도 하였다. 충선왕을 복위 시에도 같은 기조를 유지하였다.충선왕이 수도와 지방을 막론하고 관직사회에 대한 감찰을 강도 높게 시행했다. 이러한 노력은 추상적 선언이나 적발에서 멈춘 것 이 아니라 실제 실무 관원? 관청의 직급 정비에 수반해 이뤄졌다.충선왕은 부서 정비 과정에서 즉위년의 경우 司憲府 大夫의 품급을 종 2품으로 설정, 문종대의 정 3품보다 올려 잡았다. 또 복위 시 에는 대부를 고쳐 大司憲이라 하면서 그 품급을 정 2품으로 한 등급 더 승격시켰다. 감찰기구내의 실무자 수도 조정하였다. 즉위년에는 중승의 수를 2인 늘리고 복위년에는 監察御使를 糾正으로 바꾼 후 14인을 늘렸다.충렬왕대에는 지극히 일반적 업무지침이나 송사와 관련한 지방관들의 역할, 역마사용금지 등만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충선왕에 비해 적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그에 비해 충선왕은 즉위년과 복위년 계속해서 감찰담당부서의 위상을 전에 비해 현저히 승격시켰음을 알 수 있다.충선왕은 무신집권기 등장해 전선을 단절하던 정방을 혁파하거나 무력화 하여 조정의 기능을 정상화 하려고 노력하였고 관제개편을 통해 불필요한 인원과 부서를 없앰으로써 업무분담상의 효율을 제고하는 동시에 의사결정구조를 단순화시켰으며 관료사회의 기즉위년 당시에는 중국의 구제 준수를 강력히 천명하고 그 과정에서 문종관제의 양상을 일부 복원했던 반면 복위 후에는 그러한 원칙을 사실상 철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복위년 관제 개편은 일반적으로 대원관계를 많이 의식한 개편으로 간주되고 있다.그러나 복위년 개편에서 중국의 제도와 명확한 관련성이 보이지 않으나 고려 초기 또는 전기의 모습을 추구한 것으로 보이는 조치들이 없지 않다. 충선왕은 즉위년 당시 충렬왕대의 밀직사를 광정원으로 고쳤다가 폐지하고 이후 복위 직전에 미쳐 判司事를 더 두었는데 이는 문종대의 것을 복구하려한 가능성이 엿보인다. 이와 함께 복위 2년 밀직사를 승격시켜 첨의부와 동일케 하고 兩府라 칭한 것도 고려 전기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며 복위 3년 부사의 질을 정3품으로 내려 문종대 부사의 품질로 복귀시킨 것도 주목된다. 충선왕은 또 복위년 이?병?예부를 합쳐 ‘선부’라는 새 관부를 구성했는데 그 관부명은 태조대의 ‘선관’을 연상시키며 복위년 ‘민부’또한 즉위면 ‘민조’처럼 국초의 ‘민관’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양위 직후에는 자신이 혁파한 충렬왕대의 보문서 대신 예종대의 보문각을 복구하기도 했다. 또 문산계의 구조를 수정하면서 태조대의 대광 정광 등을 그 직제 내에 결합시켰다.충성왕은 복위연간이나 양위를 전후한 시점 등 중국 구제 추구의 원칙을 거론하지 않거나 사실상 새로운 목표 아래 관제 개편을 추진 하는듯한 상황에서도 비록 대단히 제한된 영역에서이긴 하지만 고려 초기의 전기의 모습을 관제에 반영시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즉위년 관제개편에서의 고려 전기 원속 명칭의 복구 또한 중국 구제 추구과정에서 발생한 결과인 동시에 고려 구제를 자국 전통으로 간주하는 충선왕의 인식 또한 어느 정도 내포한 노력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충선왕은 중국 구제의 준수라는 명분을 제시 그 내용을 참조하고 그 권위에 가탁한 개편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찍이 중국 문문을 수용해 마련된 고려 전통 관제를 복원하고자 하였다. 다만 원과의 관계로 후 ‘三國末, 經界不正, 賦斂無藝. 高麗太祖卽位, 首正田制, 取民有度, 而??於農桑, 可謂知所本矣. 光宗 定州縣貢賦, 景宗立田柴科, 成·顯繼世, 法制愈詳, 文宗躬勤節儉, 省冗官, 節費用. 太倉之粟, 紅腐相因, 家給人足, 富庶之治, 於斯爲盛. 毅·明以降, 權姦擅國, ?喪邦本, 用度濫溢, 倉??竭. 及至事元, 誅求無厭, 朝覲·饋遺·國?等事, 家抽戶斂, 徵科萬端, 由是, 戶口日耗, 國勢就弱, 高麗之業, 遂衰. 叔季失德, 版籍不明, 而良民盡入於巨室, 田柴之科廢而爲私田. 權有力者, 田連阡陌, 標以山川, 徵租一歲或至再三. 祖宗之法盡壞, 而國隨以亡. 當初, 食貨出入之制, 未爲不詳, 而屢經兵火, 不可備考, 今?見於史牒者, 條分類聚. 一曰田制, 二曰戶口, 三曰農桑, 四曰貨幣, 五曰?法, 六曰借貸, 七曰科?, 八曰漕運, 九曰祿俸, 十曰常平義倉, 十一曰賑恤, 具著于篇, 作食貨志.’이라며 당시의 세원확보 정도 및 재정의 안정성이 선왕대의 상황에서 크게 악화 돼 있음을 지적하였다.그리고 복위 후에는 태조대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였다. 즉위 당시에는 선왕의 전정 재정 및 평균적 분급을 찬양하고 그에 어긋난 상황이 누적된 결과 국용에 쓸 공부의 수입이 현저히 감소했음을 탄식한데에 그쳤던 것과는 달리 복위 연간에는 이 상황을 극복할 것임을 분명히 하는 동시에 예전 방식을 따르겠다고 천명한 것이다.이렇듯 충선왕은 즉위년 세정의 문란을 지적하고 복위년 그 극복방침을 천명하며 양위 후에 그 방법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고려 선왕의 구제와 구법을 적극 거론 활용하였다. 물론 그 방법은 단순한 방법이기는 하다. 충선왕의 선왕 거론은 그 실제 내용을 직접적으로 참조한 것이라기보다 반대파의 저항을 줄이고 개혁 지속의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그 권위에 가탁하고자 한 일종의 정치적 행위에 불과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가탁과 함께 일국의 세제가 지녀야 할 원칙에 대한 인식이 뚜렸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그 원칙과 함께 충선왕과 그 군신들은 그를 잘 녹아내서 세제 계정에 적극적으로 썼다는 것 또하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이를 보면 그 시행 의도 및 배경이 서로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보면 충선왕의 정책이 원으로부터 영향 받은 것이라 보기 어렵다. 하지만 맥락 상통적으로 용원 감축은 실용적 의미를 지니는 조치 였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목표를 위한 수단적 의미로써의 의미를 가졌다. 직접적 이유를 달랐지만 정치 개혁에서 지는 의미와 효용성은 같았다.감찰강화의 문제에서 원에서는 감찰기구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감찰기구의 타 기구 견제권을 보장하는 방식을 택했다면, 충선왕은 관료비리를 적발하고 그를 구치할 감찰기구의 위상을 높여 감찰기능의 강화를 꾀한것이다. 물론 어떤 정부든 감찰강화는 당연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충선왕의 감찰 강화 노력이 감찰기관의 승격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이 중에서도 사헌부의 단계적 승급이 주목된다.원정부에서 세조대 이래 중앙 감찰기구의 직제를 정비했지만 그것이 완성된 것은 무종이 즉위한 이후였다. 고려내 사헌부의 단계적 승급이 원 내의 정황과 이례적으로 교차하고 있었고 무관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위에서 살펴본 결과 당시 고려와 원의 관계를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원에서도 세조대부터 상황을 배경으로 세가지 의제를 토대로 한 정치 개혁이 단행되고 있어 고려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여건이 조성되 있었다.이러한 측면을 고려 할때 원 황제들의 내강지 개혁?용람한 관청 관직 삭감 및 감찰 강화등을 추진한 것이 충선왕의 정방혁파?재추감축? 관부 병합 및 사헌부 강화등으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겠다. 그런 점에서 충선왕의 정치개혁은 당시 고려와 원 양국간의 교류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2. 財政 運用의 類似性재정운용의 내용에 있어서 충선왕과 무종의 유사성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 번째로 상업정책에 대해 살펴보고 두 번째로는 염제에 대한 인식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역정책에 대해 살펴보겠다.일단 고려의 상업정책과 원의 상업정책에 있어서의 차이점이다. 충선왕이 상거래 진작을 위해 경시상인을 본다.
    인문/어학| 2013.09.05| 24페이지| 3,000원| 조회(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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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읽어주는 여자 감상문
    ‘책읽어주는 여자’-‘영화를 통해서 본 문학의 영향’1. 들어가는 말나에게 프랑스 문학도 문학이지만 영화는 정말로 생소하다. 헐리우드 영화나 일본영화는 익숙하지만 프랑스영화는 왠지 어려울것 같다는 느낌에 본적이 없다. 더군다나 국내에 극장에서 간판을 올린 프랑스 영화는 그리 많지가 않다. 솔찍히 처음 명작읽기 시간에 이영화를 봤을때는 졸았다. 귀에 익숙한 영어가 아닌 부드러운 억양의 프랑스어를 듣자니 잠이 절로 왔기 때문이었다. 앞에 조금 뒤에 조금을 보게 되어서 집으로 오자마자 영화 다운 받는 곳에 들러 그 영화를 찾아 보았다. 워낙에 오래된 영화라 그런지 찾느라 정말 힘들었지만 다행히 올드무비를 좋아하는 분이 있어서 그것을 다운받아 볼수 있었다. 첫 번째를 보고 나서는 정말 시각적인 영화구나, 그리고 정말 코메디다.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두 번째를 보고 나서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 다른 생각을 여기에 쓸수 없는 나의 글실력이 너무나 한탄 스럽다. 아무튼 첫 번째 볼때의 그 시각적인 장면들과 경쾌하고도 우울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템페스트 3악장밖에 생각 안나던게, 두 번째 볼때는 무언가 더 생각하는게 있었다. 리포트의 주제는 ‘영화를 통해서 본 문학의 영향’ 이다. 근데 이 주제가 정말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문학을 통해서 받은 영향들인가, 아님 이 문학이 영화에 미친 영향인가 에 대해 고민하다가 나는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생각 행동 대화를 통해주인공들이 받은 영향에 대해 써내려가기로 했다. 이게 답인지는 솔찍히 확신이 안선다. 문학이나 영화나 정확한 답은 없다 생각하고 조금은 주관이 개입한 내 나름대로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글을 써보겠다.2. 영화의 주인공들에게 문학이 미치는 영향마리가 책을 읽어주는 고객은 반신불수의 한 소년 에릭, 장군의 미망인, 채굴석장의 사장, 엄마가 너무나도 바쁜 6살짜리 어린애 코랄리, 에릭의 친구 조엘, 전 판사인 한 노인 이 있다. 그리고 주인공 마리도 친구에게 책 읽어주기를 부탁하며 자신도 그 고객이 한번 되어 본다. 각각의 인물에 따라 분석을 해보고 문학이 그들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겠다.반신불수의 소년 에릭 : 에릭은 굉장히 엄마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다. 얼핏 봐서는 마마보이 같기도 하다. 반신불수 이기 때문에 억눌린 감정들이 많은듯 하다. 에릭은 마리에게 모파상의 ‘머리카락’을 읽어줄것을 원한다.“ 어느 맑은 아침, 파리를 돌아다니다가, 어느 골동품 상점의 유리창을 통해,18세기의 상감세공 책상을 보았다. 그것은 희귀하고 아름다웠다.‘이렇게 유혹적인 독특함을 가졌다니!’소유하고 픈 욕구가 일어났다. 그것은 처음엔 부드럽고, 거의 소심한 마음이었지만,점점 격렬하고, 저항할 수 없는 마음으로 커져버렸다. 나는 그 책상을 샀다. 그리고 내 방에 갖다 놓았다. 어느날 밤, 한 개의 판넬이 너무 두껍다는 것을 알아냈다. 비밀 서랍 같은 것이 있는게 분명했다. 나는 그것을 밤새도록 찾았다. 그 다음날, 나무 틈새에 칼을 억지로 밀어넣어,그것을 찾아냈다. 어떤 여자의 아름다운 머리카락 한 다발이 검은 벨벳 위에 놓여있었다. 황금색 끈으로 묶여 있었고, 거의 붉은색에 가까운, 금발의 길게 땋은 머리카락이었다. 난 정신이 아찔해졌고, 떨렸으며, 불안해졌다. 나는 경건하리만치 부드럽게 그것을 만졌다.그 순간, 땋은 머리가 풀어졌고, 황금빛 물결을 일으키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은 짙고, 가볍고, 부드러웠으며, 혜성의 불타는 꼬리처럼 빛났다. 이상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 머리카락에 관한 생생한 생각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내 손과 내 마음은 그 매력적인 곳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싶은 혼란스럽고, 야릇하고, 관능적인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그것을 애무하듯 어루만진 후, 그 책상 서랍을 닫았을 때,나는 그것을 다시 잡아 보고 싶고, 만져보고 싶고,기절할 때까지 나를 흥분시키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일어났다." 마리가 이 구절을 읽자 에릭은 기절하고 만다. 처음봤을때 이런 구절을 생각안하고 나는 에릭이 마리가 입은 스커트 사이로 보이는 허벅지 때문에 기절했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두번째에는 모파상의 ‘머리카락’의 내용이 에릭을 기절에 까지 이르게 했다고 생각했다. 영화의 중간쯤에 에릭의 친구 조엘과 하는 대화에서 에릭이 그 문학에 대한 상상으로 기절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릭입원한 병원에서 의사가 이렇게 말했다. “ 저 아이는 환상속에 시달렸소. 저아이는 머리카락, 덮수룩한 머리카락 얘기만 하더군요. 숨도 제대로 못쉬면서 ”라고 말이다. 그리고 에릭의 친구 조엘은 에릭이 자신보다 조엘은 볼수 없어 아름다움을 모른다고 하자 이렇게 말한다. “상상하기 위해 바라볼 필요가 없으니 내쪽이 더 아름다워.” 라고 말한다. 이 영화에서 그리고 이 문학작품에서 중요한 기준은 상상인것 같다. 또한 에릭의 생일 잔치에서 마리가 “ 난 상상하지 않아요.” 라고 말을 했을때 조엘과 에릭은 비웃음 비슷한 웃음을 흘린다. 나는 이장면을 또보고 또봐도 왜 웃었을까, 에 대한 확실한 대답은 얻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마리가 찾아간 에릭은 자신은 언제 황금빛 양털을 얻기위해 항해를 할수 있냐고 묻는다. 그러자 마리는 어떻게 문자로 설명할수 없자, 망설임 없이 자신의 치맛자락을 걷어 올린다. 그러자 에릭이 그렇게 말한다. “다음번엔, 속옷을 입지 않고 올 수 있나요?”라고 말이다. 에릭은 억눌려 있었다. 하지만 마리가 읽어준 머리카락, 악마의 시 등의 책을 읽고 나서 그 억눌러진 감정이 표출된거라고 생각을 했다. 책은 그사람은 살찌운다. 내가 읽는 책은 말이다. 내 생각을 찌우고 내 마음을 찌운다. 근데 여기에 있는 에릭은 머릿속의 암묵적 언어가 아닌 매력적인 여성의 신체적인 언어로 문학을 머리에 집어 넣는다. 낭독이 에릭의 인간의 본능을 일깨울수 있었던 것일까?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생각을 해봐야 할것 같다.장군의 미망인 : 자신을 100세라고 하는 미망인은 ‘군인’과 ‘독서’에 열정이 있는 특이한 사람이다. 그녀는 마리에게 첫 번째에 막스 166쪽을 읽어 달라고 한다. 그리고 마리가 두 번째 찾아 갔을때는 ‘레닌과 러시아 농부’를 읽어 준다. "그에게 있어 대단히 독특한 점은,슬픔이란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토대가 아니라, 없애버려야 할 악이라고 본 그의 불타는 신념이었다." "마르크스 주의는 아주 강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정하고, 완전하고, 조화롭기 때문이다." 난 이러한 글귀를 통해 장군의 미망인의 성격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사상또한 알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나의 의문점. 그녀가 장군의 부인이라서 이러한 막시즘을 갖게 된것일까, 아니면 이러한 책들로 인해서 그녀가 막시즘을 갖게 된것일까, 아니면 원래 막시즘이 있었는데 이러한 문학이 그녀를 더욱 부추긴 것일까?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이문제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 같다. 그녀는 시위를 좋아하고 레닌을 좋아한다. 그리고 계속에서 그녀는 ‘전쟁과 평화’를 주문한다. 끊임없이 그 책의 구절을 인용한다. 이 책이 그녀에게 무슨 영향을 끼쳤는지를 글로 잘 표현할수는 없다. 다만 이 책이 엄청난 영향을 끼친것만은 사실이다.채굴 석장을 가지고 있는 사장 : 이 사장은 일에 치여서 사는 아주 바쁜 사람이다. 마리는 이사람에게 마그리뜨 뒤라스의 ‘연인’을 읽어 준다. 사장은 마리가 연인의 첫구절을 읽어주자 그가 원하는건 그녀라고 말한다. 그리고 결혼하자고도 말한다. 마리가 계속해서 거절하자 사장은 다시 책을 읽어 보라고 한다. 그리고 한 구절에 집착을 한다. "난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것은 낡고, 거의 속이 비쳤다..." 이구절에 그는 욕망의 전율과 떨림이 엄습해 온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은 6개월동안 사랑을 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만큼 사장은 바쁘고 일에 시달렸을것 같다. 사장은 계속에서 마리의 몸을 요구하지만 마리는 책 읽어주는 본분을 잃지 않는다. 사장은 마리를 미친듯이 좋아해서 마리에게 아프리카로 가자고 하지만 마리는 그를 믿을수 없다고 하며 그를 거절한다. 이 장면에서 이상깊었던 부분은 마리가 이상한 가발을 벗어 당신의 아내에게 돌려줘, 라고 말을 한다. 이는 무슨 뜻일까? 이제까지 사장과 만난 부분에서 가발을 쓴 마리는 볼수가 없었는데 말이다. 이도 의문점이 남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머리에서 나온건, 그 사장이 마리를 있는 그대로 좋아한게 아니라 자신의 부인화 시켜서 좋아한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역시 ‘연인’이라는 책이 이 사장에는 어떠한 성적, 에로틱한 인간의 본능을 일깨운것 같다. 내가 넘겨 짚어 보건데, 책속의 실크 드레스를 입은 여인을 아마 마리로 일치화 상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엄마가 바쁜 6살 짜리 코렐라 : 엄마와 있는 시간보다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은 코렐라에게 마리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어 주기로 한다. 그렇게 앨리스를 읽어 주다가 코렐라는 엄마의 값비싼 보석들을 하고 마리와 함께 놀이공원에를 간다. 그러자 코렐라의 엄마는 코렐라가 납치되고 보석들을 강도 맞았다고 생각해서 경찰에 전화를 한다. 마리와 코렐라가 돌아왔을때, 코렐라의 엄마는 화를 엄청 내지만 마리는 코렐라의 엄마를 진정 시킨다. 내 생각인데 코렐라는 엄마의 관심을 받고 싶어 보석들을 훔쳐내고 놀이공원에 갔던것 같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면 앨리스가 무료함을 느끼다가 신비롭고 미지의 세계로 들어서는 앨리스를 코렐라가 자신과 동치화 시켰던것 같다.퇴임한 판사 : 이 판사는 눈이 잘 안보인단 구실로 마리에게 책을 읽어 달라고 말한다. 그책은 바로 사드의 ‘120일’라는 책이다. 이 책은 아주 하드코어적이며 성적인 책이다. 사디즘을 만들어낸 사드는 성도착적 필체로 알려진 작가 이다. 마리는 갈등을 하다가 떨리지 않고 그 판사가 읽어 달라는 부분을 읽어 준다. 또 다시 판사의 집을 찾은 마리는 판사의 친구들에게 같이 사드의 ‘120일’을 읽어줘야 한다는 사실에 거부를 한다. 그 두 친구는 한명은 에릭이 입원했던 병원의 의사, 또 한명은 자신을 심문했던 형사 였다. 그에 마리는 책읽어주는 직업을 포기한다.
    독후감/창작| 2011.11.18| 5페이지| 2,000원| 조회(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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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개석
    目 次머리말Ⅰ. 蔣介石의 생애Ⅱ. 蔣介石의 사상1. 정치사상2. 경제 사상3. 사회윤리 건설사상Ⅲ. 蔣介石은 왜 敗하였는가?맺는 말참고문헌머리말1911년 이후 중국인들의 가장 절실한 요구는 국가적 통합이었다. 청나라가 무너진 후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과 군벌들의 등장은 중국의 존망 자체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자주적이고 통일된 독립국가의 건설은 다른 어떤 가치의 추구보다 앞서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치적 정통성을 확립하고 그것에 근거한 확고한 공화체제를 구축하는 일과 함께 현실적으로는 여러 세력에 의해 분열되어 있는 영역을 통합하여 통일과 안정을 이룩하는 일을 포함하는 국가적 통합은 중국인들의 존망을 결정하는 절대적 요구였다.국가적 통합을 이룩하려는 시도는 여러 세력들에 의하여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어 왔는데, 손문도 그 중에 한 사람 이었다.)장개석은 1925년 2월 12일 손문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광동 국민정부의 실권자로 떠올랐다. 그리고 1926년 7월 국민혁명군 총사령으로서 혁명군을 이끌고 북벌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주요 군벌들을 타도하고 국토를 통일, 1928년 10월 중국사상 첫 근대 정부인 남경 국민정부를 수립하였다. 그 뒤 그는 1949년 말 국공내전(1946~1949)에서 패하여 대만으로 탈출할 때까지 20여 년 동안 중국대륙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권위와 명성을 누림과 동시에 수많은 내란을 극복하고 국가의 존망을 위협한 8년 동안의 항일 전쟁을 지도하며 국가 통일의 유지와 근대화 발전의 기틀을 마련해야 하는 3중의 시련 속에서 지냈다.)이러한 장개석의 일생에 대해서 오늘날의 평가를 보면 부정적인 면이 더 많다. 아마도 이것은 국가의 방향을 둘러싸고 대립이념을 가졌던 모택동과의 대결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이 글에서는 장개석의 생애에 대해서 살펴보고, 그의 근대화 방안에서 정치, 경제, 사회 건설에 대한 것을 위주로 알아보겠다. 그리고 장개석이 패한 이유에 대하여 ‘로이드.E. 이스트만’의 책을 위주로 살펴보았다.Ⅰ. 蔣介石의시아 혁명이후 반혁명진압을 지도한 트로츠키에게서 소련 적군의 조직원리는 배우고 赤軍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1924년 6월 혁명군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황포 군관학교의 초대 교장에 임명되었다. 소련에서 적군의 조직원리를 배웠던 장개석은 황포군관학교에서 새로운 군인교육을 실행하여 자기에게 충성하는 혁명집단의 육성에 성공했다. 1925년 손문이 사망한 후 국민당의 지도자가 된 그는 1926년 국민 혁명군 총사령에 취임하여 북벌을 수행하였다. 1927년 4월 12일 상해에서 ‘4.12정변’을 일으켜 공산당원과 혁명인사를 잔혹하게 학살하고 각지에서 당내의 반대자들에 대한 숙청작업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제1차 국공합작이 결렬되었다. 1927년 4월 18일 무한정부와 대립하여 남경정부를 성립하였고, 같은 해 12월 1일 송미령과 결혼하였다. 이로써 송자문 공상회와 인척관계를 맺고, 이들을 통하여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였다.1928년 북경을 점령한 그는 남경 국민정부 주석과 육해공군 총사령에 취임하여 당과 정부의 통치권을 확립했으며, 풍옥산 염석산 및 광동과 광서의 대소 군벌들을 몰아냈다. 1930년부터 다섯 차례에 걸친 대규모 포위전을 통해 공산당 토벌에 나섰으며, 이는 만주사변으로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내전을 중지하고 일치단결하여 항일전쟁에 나서라’는 여론이 높아지는 가운데 1936년 서안에 가다가 장학량에게 감금당했다. 공산당과 합작하여 항일전을 수행한다는 조건으로 석방된 그는 1937년 제 2차 국공합작을 통해 총사령에 올라 전면적인 항일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또다시 공산당과 결별하고 재차 내전에 돌입했다. 미국의 지원으로 초반 우세를 지켰으나 이미 등을 돌린 인심을 돌이킬 수 없었다. 결국 패배한 그는 1949년 12월 대만으로 건너가 중화민국 총통과 국민당 총재를 역임하여 자유중국 대만을 지배하였다.1953년 대한민국의 독립을 지원한 공로가 인정되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1975년 4월 5일 대북의 관수 있는 중앙정권이 필요하며, 그런 뒤에 오직 강대한 중앙정권의 영도 아래 비로소 지방자치와 국민에 대한 기본적인 민주 활동 등을 실시할 수 있고, 조건이 성숙한 뒤에야 다시 헌법을 반포하여 진정한 민주 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조건이 아직 성숙되지 않은 때에 경솔하게 서양식의 민주정치를 실시하면 천하대란이 있을 뿐이니, 너무 급하게 서두르다가는 오히려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그는 주장하였다.2. 경제 사상장개석은 경제 근대화야말로 각종 근대화 사업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정부의 계획아래서 민영의 방식으로 경제의 근대화를 실현해야 하며, 정부는 민영경제의 발전을 위해 장애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계급투쟁과 사회모순의 격화를 막기 위해 그는 경제 근대화를 실현하는 동시에 평균지권과 절제자본(자본통제)정책을 실시하여 경제혁명과 사회혁명 두 가지가 한꺼번에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장개석은 경제 건설이 훈정기의 주요 사업이고 국가 부강의 기초이며, 공업이 경제 건설의 핵심이라고 보았다.1931년 연설에 이르기를 “반드시 경제적으로 자급자족의 능력을 갖추어야 하며, 그 뒤에야 비로소 민족의 독립을 실현 할 수 있다. 또한 오직 국가가 경제적으로 자급자족의 능력을 갖추어야 하며, 그 뒤에야 비로소 민족의 독립을 실현할 수 있다. 또한 오직 국가가 경제적으로 자급자족의 능력을 갖춘 뒤에라야 국민 모두가 풍족함을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생산을 증가시키는 것은 실로 삼민주의를 실천하는 근본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경제 건설에 있어서 사회 생산활동을 농업에서 공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장개석은 이론상으로나 중국의 필요에 부합하지 않으며, 오직 정부가 계획하고 육성하는 방식을 채택해야만 거대한 규모와 빠른 속도로 경제 건설 사업을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명 계획 경제를 말하는 것인데, 그는 중국의 현실로 볼 때 자유 경제를 실시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중국은 불평등조약의 속박 아래 공업이 낙후되어 공업이고 생각했다.그러나 1930년대 중국 농촌의 토지 문제는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극히 첨예한 분쟁에 직면하여 당시 이미 겸병을 규제하는 정도가 아니라 당장 토지 집중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정된 정치질서를 확립 할 수 없었다. 다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장개석은 평균지권의 방안을 실시 할 수 없었다. 반면에 공산당은 자기의 점령구에서 보편적으로 강제적 토지분배정책을 실시하여 단기간 안에 농촌의 모순을 기본적으로 해결하였다.중국은 당시에 바로 농민의 국가였는데, 농민의 지지를 얻은 결과 공산당은 최종적으로 정권을 얻게 되었다. 토지 정책은 장개석의 실수였다. 대만으로 망명한 뒤에는 안정적인 환경에서 장개석의 민생주의 방안은 더욱 완벽해 졌다. 1952년 장개석은 새롭고 비교적 현실적이며 인도적으로 사회를 균등하게 하는 방안을 말했다. 공업방면의 기본 방침은 한편으로는 공업화를 완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업화 과정에서 사회화 정책을 실시하여 독점자본을 막음으로써 생산증가의 이익을 모든 인민이 함께 누리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농업방면에서는 토지 국유의 함의를 해석하면서 토지 국유의 원칙아래 토지소유권을 포함하는 사유재산제도의 합리적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다.장개석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익이 일치함을 강조하고 노사가 합작하여 공동으로 중국의 경제 현대화를 추진할 것을 제창하였다. 또한 경제 발전은 자력 갱생을 위주로 하되 외국의 원조를 얻어 보완해야 한다고 했다.3. 사회윤리 건설사상장개석은 현대는 전통의 연속이므로 전통문화에 대해서 장점은 키우고 단점은 포기하는 태도를 취하여, 알맹이는 계승하고 찌꺼기는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통문화를 낡은 것으로 여겨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민족자비주의적인 행동에 반대했다. 그는 중국 전통문화를 이용하여 중국을 근대 문명국가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중국 전통문화에 대한 장개석의 인식은 그의 다음과 같은 사상에서 알 수 있다.장개석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의 성공은 중국철학 때문이라면서, 중국철학은 일본 사회를 단결시키사 전통이 시대와 환경에 맞지 않으면 개혁하고 교정해야 하며, 국가와 민족의 우수한 문화 역사라면 마땅히 그 불변과 가변의 흔적을 자세히 살피고, 시대와 과학 정신을 융합하고, 시대와 함께 전진해 나갈 때 나날이 새롭게 될 수 있다.”둘째, ‘知行合一’을 제창하고 힘써 행하는 철학을 주장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단지 ‘지행합일’의 학설에만 의지해서는 중국민족은 유학의 낡은 기운을 제거할 수 없다고 보았다. 손문의 ‘知難行易’)학설을 이행하여 중국인이 있는 힘을 다하도록 격려해야 하고 만약 중국 인민이 중국 고유의 양호한 철학을 충분히 응용하고 손 총리의 학설을 마음에 새겨 잊지 않고 찬란하게 발양한다면 반드시 중국을 하나의 번영하는 국가로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셋째, ‘八德四維’를 중신으로 민족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부흥시킨다. 장개석은 전통문화의 부흥이 전면적인 복고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우수한 부분은 계승 발전시키고, 가치 없는 것은 버리고 정수를 흡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고대의 교육내용과 방식을 일부 참고하고, 현재의 수요에 근거하여 하나의 새로운 교육 방식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청조 康熙 시대의 ) 16조는 비록 오래된 이야기지만 몇 조목만 더하면 국민 교육에 적합한 준칙이라고 할 수 있다고 보았다.그는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풍속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학교교육을 중시해야 하며, 중학교와 소학교의 교사에게 본업에 충실하고 인재를 양육하며 명리를 탐내지 말고 비현실적으로 이상만 높게 가지지 말고 분수를 지킬 것을 요구했다.넷째, 일련의 체계적인 사회교육의 사상체계를 확립하였으며, 그 속에는 가정교육, 위생교육, 문예 체육활동 등이 포함되어 있다.1953년 장개석은 을 발표하며 일련의 사회윤리 건설 사상을 제기 했다. 그는 사회가 농업에서 공업으로 바뀜에 따라 사회 관계에서도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오래된 윤리와 새로운 형세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으며, 사람들의 행동거지가 질서를 잃고 혼란에 빠졌다고 하였다. 있다.
    인문/어학| 2011.11.18| 12페이지| 3,000원| 조회(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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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돈생애를 포함한 공민왕대의 개혁
    목차Ⅰ. 서론 ..............1Ⅱ. 본론 ..............11. 辛旽의 생애2. 신돈의 등용 배경3. 신돈의 개혁1) 전민변정도감 - 경제개혁2) 정치세력 재편4. 실패한 개혁Ⅲ. 결론 ..............8Ⅳ. 참고 문헌 .......9Ⅰ. 서론요새 고려 건국자인 태조 왕건의 뒤에 가려져 있던 ‘궁예’가 새롭게 주목 받는 다고 한다.또한 남자들이 아닌 여자들의 이야기인 궁녀들의 이야기들도 새롭게 각색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숙종’이 주인공이 아닌 ‘동이’가 주인공이 된 것은 더이상 어색하지 않다.언제나 2차 사료는 역사가의 역사 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승자의 역사이기에 많은 사실들과 역사들이 숨겨져 있거나, 혹은 가려져 있거나, 또는 의도치 않게 빠져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사람’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또 우리는 ‘사람’이기에 숨겨진 ‘反 기억’들을 찾아 상상하고 감정이입하며 이를 인지 하고자 한다.내가 알아보고자 하는 인물은 ‘辛旽’이다. 신돈은 고려 말에 온갖 사회모순들로 국가가 스러져 갈 무렵 공민왕과 함께 등장한 이다.그는 철저히 ‘비주류’였다. 그리고 그는 그의 반대파를 끝내 저지 하지 못하고 몰락을 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한 사료는 하나 같이 요승, 더럽고 추잡한 승 이라고 적혀 있다. 그 이외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발견 되지 않는다. 지금 남겨진 2차사료로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사강목 등등이 있는데 이 사료들 역시 조선시대 초 온갖 명분들이 필요했던 이들에 의해 쓰여 진 것이었다. 그들은 불자 인 신돈을 유학자인 그들이 결코 곱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直敍’했다 하더라도 이는 감출 수 없는 사실 이다.나는 그러한 2차 사료들을 대상으로 신지는 田民辨正都監을 중심으로 추진된 경제개혁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가지는 권문세가를 누르고 사대부를 육성하여 새로운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당신의 신진 사대부는 새로운 유학, ‘성리학’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참신한 정치신인 들이었다. 이들은 신돈의 개혁정치를 주도함에 있어 권문세가보다 더욱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었다.고려 말 신돈 등장이후, 공민왕과 신돈, 신진사대부에 의해 추진되었던 개혁정치는 1371년 신돈이 제거되면서 중단이 되었다. 그토록 총애하던 신돈을 공민왕의 제거한 이유는 아래와 같다.첫째는 개혁정치가 진행 되면서 신돈이 자신의 독자적 기반을 구축하려 하였고 이것이 공민왕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다. 공민왕이 신돈을 기용한 이유 중 한 가지가 없어지자 마찰이 생기는 것은 당여한 일이었다. 점차 공민왕은 신돈이 올린 안건에 대해 무조건 수용하지 않기 시작했다. 1369년 신돈이 5道都事審官이 되고자, 사심관 제도의 복구를 주장하자 공민왕이 이를 거부하였던 것을 보면 단적으로 알 수 있다.둘째로는 당시의 원명 교체에 따른 대륙정세의 변동과 그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의 필요성이다. 1368년 명이 건국된 뒤에 명과의 외교관계가 급진전 되고 있었고, 1370년에는 공민왕이 친정을 선포하였다. 이는 곧 신돈의 실각으로 이어져 다음해에 신돈이 유배되고 그를 중심으로 추진되던 개혁정치도 중단 되고 말았다.)신돈의 죽음은 이인의 투서에 의해서 이루어 졌는데, 신돈을 제거하기 위한 표면적인 이유는 “신돈이 스스로 폭위를 떨침이 너무 심함을 알고 왕이 자기를 꺼릴 가 두려워하여 드디어 반역을 도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공민왕은 신돈의 측근 7인을 처형하고 신돈의 아들 생일날 광명사에서 반승중인 그를 오게 하여 2일간 정릉에 감금했다가 수원에 유배시켰다. 그리고 사건 발설 5일 만에 공민왕은 자신의 의도 하에 등용시킨 신돈을 권문세족과 신흥유신의 입장이 맞아떨어진 상황 하에서 반역죄로 몰아 임박을 시켜 주살했다. 신돈의 측근으로 지목된 이들 20현을 수상에 임명하여 자신이 귀국할 때 까지 고려의 정계를 정리하도록 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공민왕 귀국이후에도 그들 개혁세력이 공민왕의 협력을 얻어 개혁을 주도하리라 예상되기도 했다.하지만 공민왕 귀국 후 얼마 되지 않아 개혁 관료들의 영향력을 미약해져 갔다. 이는 공민왕이 측근세력을 위주로 한 정치 때문이었다. 공민왕은 이러한 측근세력을 배경으로 개혁정치를 단행한다. 그렇게 반원위주의 개혁정치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홍건적이 쳐 들어오면서 국왕의 권위는 국내외적으로 위기를 맞는다. 국내 적으로는 정권 쟁탈 과정 중에 공민왕의 측근세력이 모두 제거되어 버렸고, 원나라에서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충선와의 서자인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세우고자 하는 바람에 국왕으로서의 정통성에 도전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홍건적과 원나라의 간섭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운 무장들의 입지가 강해졌고, 측근세력을 상실한 공민왕의 정국 주도력은 약해졌다.)이때 공민왕은 정국전환을 모색하게 된다. 자신의 왕권을 강화해 주고 일반민들의 고통을 분담해 줄 수 있는 인물을 어디서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는 아래의 사료가 말해준다.왕이 재위 한지 오래 됐는데 재상들에 대하여 만족을 느끼지 못하였다. 世臣大族은 親堂의 뿌리가 얽혀 서로 엄폐하고 있으며 草野新進들은 자기의 행동을 가식하여 명망을 얻어서 귀하게 되면 자기 가문이 한미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대족과 혼사하여 초기의 오점을 모두 버리었으며, 유생들은 과단성이 적고 기백이 없으며 게다가 門生이다, 座主다, 同年이다 하면서 서로 당파가 되어 사정에 끌리니 이상 세 부류는 모두 쓸 수 없다고 공민왕은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세상을 초원하여 독립 독행할 사람을 얻어서 크게 등용함으로서 과거의 폐단을 혁신하여 보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신돈을 보게 되자 “그가 득도하여서 욕심이 없으며 미천하여서 친척도 없으니 대사로 위임하면 반드시 정실에 구애됨이 없이 일을 마음먹은 뜻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 인정하고 드디어 에도 역시 가장 중요한 사업은 전민 추정 사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사업은 토지와 사람의 소유 문제를 바로잡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는 점에서 일반 민의 생활 안정과 직결되는 것이었고, 공민왕의 국왕권 확립을 위하여 추진된 개혁이었기 때문에 여러 개혁 조치 중 가장 핵심이 된다. 당시 대토지소유 추세와 일반 농민층의 생활 파탄은 국가 재정의 고갈로 이어져 국가 붕괴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에 대하여 공민왕은 탈점된 농민들의 땅을 되돌려 주고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본래대로 良人化함으로써 국가 지배체제의 인적 물적 바탕을 보다 확실히 파악하고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작업이 바로 전민추정사업이었고, 그 주관 부서는 전민변정도감이다.)경제 개혁을 주도한 신돈은 1365년에 가뭄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된 刑人推整都監)의 기능을 확대 개편하여 1366 명칭을 전민변정도감으로 바꾸고 스스로 판사가 되어 의욕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고려시대에 토지탈점 등 대토지 소유의 경향에 따른 사회 경제적 모순은 12세기부터 시작되어 무신 집권기와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점점 누적되어 온 것으로, 공민왕대에 이르면 권세가들이 공 사전을 탈점하는 한편, 양인 농민층을 노예로 삼고, 나라의 有役者를 누락시키고 숨기는 부정을 저질러 거대한 농장을 확대시키고 있었다. 이것뿐 만 이 아니라 홍건적의 침입이후 엄청난 사회변동이 생겼고 이로 말미암아 농장은 더욱 몸집을 불려가고 있었다. 이와 같은 농장의 확대는 궁극적으로 국가의 有役人口의 감소와 재정적 결손을 초래하였다. 전민변정도감은 궁극적으로 이와 같은 농장의 확대를 억제시키며, 권세 무리들의 폐단을 척결하자는 목적에서 설치된 것이었다.공민왕 이전에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개혁정치가 실시되었고, 공민왕 때에도 1352년과 1356년, 그리고 1363년에 ‘개혁’교서가 반포되었지만 사회 경제적 모순을 시정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러한 개혁들이 실패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이를 그 내용의 본질은 탈점된 토지는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은닉한 민호는 국가의 공역대상으로 삼는, 쇄환에 의한 원상 복구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이는 토지겸병의 현실과 그 발생의 구조적 모순은 그대로 묵인하면서 여기서 제기되는 표면적인 문제만 처리한다는 자세였다. 이는 소극적인 대책이었으나, 고려가 토지 정책의 기본 입장을 변경하지 않는 한 취할 수 있는 방책은 이것뿐이었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이 시기 토지겸병의 원인인 賜牌田이나 농장의 폐지를 적극적으로 추진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하였고, 이는 구려 국왕이나 지배층의 기반을 스스로 허무는 것이므로 결국 고려 국가의 부장을 뜻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런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국가재정의 확보를 위해서나 견디지 못하고 유망하는 민의 현실 앞에서 국가는 수습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 신돈의 전민변정사업은 소극적인 대책으로서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긴 경우이다.그러나 신돈의 이러한 제도 보완은 결국 다른 제도 개혁으로 충분이 뒷받침 되지 못해, 신흥유신의 비판과 권세가로 자리 잡은 기득권 세력의 연합에 의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2) 정치세력 재편신돈의 개혁정치는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을 와해시키는 것이었고, 이는 맹렬한 반대를 불러왔다. 이에 공민왕과 신돈은 권문세족에 대한 대안으로 왕권을 뒷받침하고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필요로 하였으며, 이들을 억누를 제도를 필요로 하였다.循資格制는 品階 및 經歷에 따라 官職을 승진시키는 인사법규로, 본래 고려는 1년 단위로 근무성적을 평정하는 差年法이 시행되어 왔으나 이때에 와서 근무일수를 기준으로 성적을 평정하는 법이 시행 된 것이다. 홍건적의 침입과 흥왕사의 난)이후 무장 세력들이 軍功으로 급속히 성장하게 됨에 따라 관료체제상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정상적인 국왕 중심의 권력질서의 확립을 저해 하였다. 따라서 개인의 능력차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근무 일수로 진급의 기준을 삼은 것은 군공 중심의 평가를 지양하면서 이러한 무장세력들을 견제였다.
    인문/어학| 2011.11.18| 10페이지| 3,000원| 조회(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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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12세기 東北아시아 國際秩序와 遊牧民族의 政治力學
    目 次Ⅰ.서론Ⅱ.본론1. 10~12세기 동북아시아 세계의 재편성2. 유목사회의 발전과 유목국가의 성립3. 遼(거란)4. 金(여진)5. 宋6. 10~12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 개편의 영향Ⅲ. 결론참고문헌10~12세기 東北아시아 國際秩序와 遊牧民族의 政治力學Ⅰ. 서론10~12세기는 격변의 시기였다. 더 이상의 한족의 중원은 그들만의 중원이 아니었고 북방민족에 의해 중원의 역사는 새로 씌여졌다. 동북아시아에서 중심이라 할 수 있었던 ‘당’의 힘이 사라지자 그 공백 사이사이로 지역적인 힘이 자라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정치가 어지러운 와중에 북방민족이 중원을 지배하자, 더 이상의 굳어진, 중국 중심의 조공책봉으로서의 무역이 아닌 조금은 자유로워진 무역이 시작될 수 있었다. 한족의 입장으로 봤을 때 치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는 교류를 많이 할 수 있던 시기였다. 여기에서는 10~12세기의 국제질서 개편과 유목민족의 정치 역학에 대해서 알아보고, 10~12세기의 국제질서 개편이 동북아시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한번 살펴보기로 한다.Ⅱ. 본론1. 10~12세기 동북아시아 세계의 재편성당나라의 멸망을 계기로 동북아시아에서는 중국 주변 나라들의 자립이 활발해졌다. 한반도에서는 고려, 대륙에서는 遼 ? 金 ? 西夏 ? 宋 등이 건국 되었다. 그리고 몽골침략이 시작되기 까지 약 3세기 동안 동북아시아에서는 불안정한 대립관계가 지속되면서도 여러 나라들 사이의 교류를 활발하게 전개 되었다.중국의 오대십국 시대는 후주의 무인으로서 명성을 날리던 조광윤이 송나라를 건국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그러나 송나라의 영역은 당제국에 비해 극히 축소되었고, 당나라와 같이 강력한 국제정치 질서를 재건하지 못하였다. 특히 중국 북부를 차지하고 있던 거란이나 그 후의 여진은 군사적으로 송나라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에 송나라를 1004년 거란에 의해 황하 부근까지 밀려났고, 1127년에는 금나라에 의해 淮河 이북을 빼앗겨 수도인 개봉을 버리고 강남의 임안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세운 왕조가 일찍부터 발전하여 왔고, 북방에는 유목민족에 의한 유목국가가 성립되어 남북으로 대립하면서 동아시아 세계의 역사를 이끌어왔다. 북아시아에서 흥망한 북방국가를 다시 유형별로 구분하면 유목국가와 정복국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유목국가는 고대로부터 흉노, 선비, 유연, 돌궐, 회흘(위구르)이 세운 국가이고 정복 왕조는 요, 금, 원, 청등을 말한다.) 그런데 유목민족이 부족사회로부터 부족국가나 민족 국가를 건설하고 다시 정복왕조로 발전하기 까지는 여러 가지 발전 형태가 있다.유목사회의 발전에 있어서 유목민의 목축업에 타 지역과의 교섭이 절대적 조건이 되었다. 이 때문에 인구밀도는 적고 그 위에 유목생활에서 나타나는 강한 자급성 때문에 유목민의 고립화 현상은 심화될 수 밖에 없었다.이러한 고립된 유목사회가 그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부족으로 발전하고 다시 부족들이 연합된 부족연합체를 형성하면서 유목국가로 발전하는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유목민이 부족적 단결을 이루어 유목부족을 탄생하게 만든 요인은 다름 아닌 내부적 분쟁의 조정과 외부세계에 대한 대응이었고 이를 위해 유목 국가의 출현은 불가피 한 것이었다. 특히 자연의 재해에 의한 가축의 떼죽음이 가져다주는 식량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식량약탈에 나서기 위한 부족적 단결과 타부족으로부터 그들 자신이 약탈을 당하는 경우 이에 맞서 싸우기 위한 공동방어의 필요에서 단결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유목사회의 단결은 초기에는 씨족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으며 유목사회의 내외적 위기가 장기화하면서 유목민의 단결력도 강화되고 이어 부족사회로 발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사 정치적 능력이 있는 부족장이 나타나 여러 부족을 통합하게 되고 유목국가의 출현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씨족적 사회에서 부족형성이 진행되기 시작하고 이 단계에서 부족 상호간에 농경정착지를 차지하기 위한 전투와 약탈적 행동을 시작하게 되고 부족은 군사적 체제를 근간으로 하여 통합되어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보통 유목국가라고 부르는 원형은 여기에 있고, 이것을 군란(916~1125)을 건국하였다.야율아보기가 거란부족을 통일 한 후 한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의 협력을 모아 거란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취하고 있는 사회 경제적 정책은 그 이전의 유목국가의 군주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그것은 유목사회의 경제적 기반을 비유목적 경제적으로 전환시켜 이를 건국의 기반으로 다져 나갔다는 점이다. 이와 함께 거란족은 오랫동안 당의 기미정책의 영향을 받아 중국문화와도 긴밀한 접촉을 통해 유교적인 통치이념에 익숙해 있었고, 야율아보기의 참모에는 한인 지식층이 다수 참여하고 있어 중국적인 전제왕조의 싹이 일찍부터 나타날 수 가 있었다. 거란족이 중국식 연호와 국호를 선포하고 최초의 정복 국가로 나아 갈 수 있었던 배경이 바로 이러한 거란국 건국과정의 사회 경제적 특성에 있다.그 이전까지의 유목군주는 타민족의 침략으로 획득한 약탈 재화를 신하와 부족장에게 분배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였으나 이제는 군주를 축적된 재화를 가지고 정복왕조로서의 군사력과 군주권의 지위를 확보하는데 사용하고 있다.요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정복왕조로서 요가 만든 제도는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요가 같은 정복왕조이면서도 이후의 국가들과 다른 점은 그들의 본거지를 중국본토로 옮기지 않고 수도를 그대로 북방에 놓아 둔 채 정복지인 화북지방을 통치하였다는 점이다.요는 그들의 부족체제를 그대로 행정체제에 반영하여 이중통치제제로써 정복민을 통치하였다. 거란이 정복한 영토 내에는 농경민과 유목민이 혼거하면서 생활하였다. 요는 이러한 다양한 정복민을 통치하기 위해 거란족을 비롯한 유목민에게는 거란 고유의 관습법으로 다스리고 한인 발해인등 농경민은 중국의 주현제로 통치하는 이중 체제를 취하였다. 요의 이중체제는 중앙관제상에서 유목민 통치를 위한 北面官制와 농경민을 지배하기 위한 南面官制를 말한다.북면관의 최고 집행기구는 北南宰相府이고 그 아래 6部)를 두었다. 이는 중국의 6부제를 도입한 것이기는 하나 거란 부족사회의 독자성이 강하게 남아 있다.남면관제는 중국의 제도를 그대로 을 하였을 뿐 아니라 동서문물의 교류에도 많은 공헌을 하게 되었다.4. 金 (여진)1) 건국 이전의 여진사회여진족의 본명은 黑水靺鞨이다. 이들은 5세기 이후부터 만주 동부지방의 松花江 유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이다. 여진족은 고구려의 유민이 말갈족을 지배하여 발해를 세우자 그 지배를 받았고 뒤에 발해가 요에게 망하자 다시 요의 지배를 받았다. 요는 발해를 멸하고 그곳에 그들의 괴뢰정부인 東丹國을 세웠으나 태조의 사망 후에는 요양으로 옮기면서 만주의 직접 지배는 사실상 포기 하였다.여진족은 熟女眞와 生女眞으로 구분된다. 송화강을 경계로 그 서남쪽에 살면서 비교적 漢化 되고 수렵과 농사를 지을 줄 아는 부족은 숙여진이라 한다. 요는 이들을 동쪽으로 이동시켜 직접 통치하며 강제로 농경에 종사시켰다. 생여진은 송화강의 동부에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요는 송화강 부근에 관청을 두고 이들을 지배하였다. 생여진은 약 72개의 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큰 것은 數千戶, 작은 것은 수백호로 구성되고 각 부락은 용감하고 호기있는 남자를 추대하여 추장으로 받들었다. 이들은 강변과 산중에서 수렵생활을 하고 들에 나가 농사도 짓는 반렵 ? 반농생활을 하였다. 11세기 초에 생여진은 이 당시 阿什河 유역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이 지역은 땅이 비옥하고 삼림이 울창하여 완안부는 이곳을 발판으로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특히 배와 수레를 만들고 석탄을 채취함으로써 철을 제련하여 농기구와 무기를 만들었기 때문에 농업생산이 발달하였고 군사력 또한 신장되었다. 11세기 중엽에는 부락민에게 법규와 교육을 가르쳐 원시적 씨족사회에서 탈피하여 부족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이렇게 주변 여러 부족을 복속시키고 그들로부터 재물 등을 약탈하여 경제력을 키워나갔다.2) 금의 건국과 발전금은 중국의 송과 연합하여 요를 멸하였으나 동맹국 송의 문약과 기강의 문란함을 알고 군사를 남으로 돌려 송의 수도 변경을 함락하고 徽宗과 欽宗을 비롯하여 종실과 관료들을 만주로 잡아갔다.(1127,靖康의 變정조직의 중추가 되었다. 그러나 중국적 황제 독재체제로 나아가는데는 장애가 되었기 때문에 희종이 즉위한 후 발극렬제도를 폐지하고 그 대신 중국의 3성6부제로 통합하였다.금은 중앙의 발극렬제와 함께 지방행정조직으로는 여진부족사회의 군사조직인 맹안,모극제를 체택하였다. 금은 요를 복속시킨 후 송의 路制를 도입하여 지방을 10路로 나누고 그 아래 맹안, 모극을 편입시켰다. 여진족의 성년 남자는 모두 병사가 되는 것이 원칙이고 맹안, 모극은 바로 한 부락 혹은 몇 개의 부락을 지배하는 우두머리이다. 맹안과 모극에 소속된 장정들은 평시에는 수렵에 종사하나 전쟁이 일어나면 징발되어 병사로 전쟁에 나가게 되었다.금은 태조와 태종대에는 여진사회의 부족세력이 강하였고 이들의 눈치를 살필 수 밖에 없어 부족연합적인 정부체제로 군신의 합의에 의해 정책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정복지가 확대되고 제국 내에 한족을 지배하게 되면서 중국적 황제체제로 강력한 황제권의 구축을 위해 태종 후반기부터 여진 중심주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중국 영토 깊숙이 진출하여 한인을 통치하게 되자 한문화의 수용에 있어 문화적 분별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5. 宋(1) ?淵의 맹약 (宋-遼)11세기 초(1004) 거란의 聖宗은 송을 쳐들어왔다. 이에 대해 眞宗은 7년간의 전쟁 끝에 전연의 맹약을 체결하였다. 이것 이후 약 100년 동안 요와 송 사이에는 평화적인 관계가 이어졌다. 전연의 맹에 의해 송은 형, 요는 동생이 되었으며, 요가 매년 비단 20만필과 은 10만량을 송에게서 받게 된 것 이외에 양국의 경계가 정해져 교역이 활발히 행해졌다. 단연의 맹약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요와 송의 대등한 국제관계를 유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요의 국제적 지위가 높아지고 그 결과 요의 고려, 서하에 대한 관계가 굉장히 유리하게 바뀌었다. 단연의 맹약에서 宋을 형이라고 해 송이 우위에 선 관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송의 입장에서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특유의 중화사상에 의거하여 외국과 하였다.
    인문/어학| 2011.11.18| 9페이지| 2,000원| 조회(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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