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와 5.16으로 본 한국 현대사-진보와 보수의 끊임없는 다툼연세대학교 의학과김 형 우목차머리말 - 1p-진보와 보수, 그 위의 한국 사회< 1 > 4. 19 현재 진행형의 혁명 - 1p ~ 3p1. 4. 19의 불씨를 일으켰던 국내 정치?경제적 상황2. 혁명의 시작3. 4. 19 혁명의 의의와 한계< 2 > 5. 16, 또 다른 보수 세력의 등장 - 4p ~ 5p1. 무엇이 군부를 일어나게 만들었는가2. 역사 이래 첫 군사 정부의 등장3. 5. 16 군사정변의 결과와 그 한계성< 3 > 4. 19 와 5. 16 - 5p ~ 6p맺음말 - 6p ~ 7p-어제의 진보는 오늘의 보수, 그리고 어제와 오늘의 한국 학생들참고자료 - 7p머리말-진보와 보수, 그 위의 한국사회한국의 현대사는 진보와 보수 사이의 다툼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통 현 상황에서 변화나 개혁을 추구하여 앞서나가기를 원하는 측이 진보, 현 상태에 만족하고 현상 유지에 적극적인 측을 보수라고 한다. 그러나 보수가 우익이 되고 진보가 좌익이 되는 현상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특수성에 기인한다. 해방 직전 한국에는 여러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존재했는데, 해방 이후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우리나라는 미국의 자본주의과 민주주의 사상을 적응과정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공산주의로 변하였고 남한 사회는 이를 극단적인 이념으로 치부하였다. 소위 좌익 세력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잘 적응한 집권층과 기득권층은 엄청난 이익을 가지게 되고 이를 지키기 위한 일에 주력하게 된다. 그들의 이익에 상반되는, 즉 공공복리 부의 독점 거부 등을 주장하는 사람을 진보라고 하지 않고 좌익이라고 하게 된다.앞으로 살펴볼 4.19와 5.16 또한 한국 현대사의 큰 흐름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두 사건 모두 진보와 보수 양쪽 갈등의 역사적 사건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4.19는 이승만 정권의 보수 세력과 이를 개혁하려는 진보세력인 민중간의 갈등이 원인이 된 사수 하였으나 한국전쟁을 계기로 이 땅에 영구 주둔하게 되었다. 1953년 10월 1일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이를 뒷받침 한다. 이 조약을 통해 미국은 ‘대륙진공을 위한 안정된 교두보’로서 무료로 군사기지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이후 한국은 미국에 의해서 ‘원조경제’를 겪게 된다. 1952년 5월 ‘대한민국과 통일사령부 간의 경제조정에 관한 협정(마이어 협정)’이 체결되고 이에 ‘한미합동경제위원회’가 설치되었는데, 이를 통해 남한의 경제 정책이 미국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1950년대 말에 이 ‘원조경제’에 의해 남한에 위기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미국의 원조에만 기대서 값싼 공세를 계속했던 자본가들은 농민과 중소기업을 몰락시켰고 이에 따라 시장도 파괴되고 말았다. 각 공장들은 가동률이 급격하게 떨어졌고 실업자가 크게 증가했으며 노동자들의 임금 인하를 재촉했다. 경제 성장률의 하락과 1인당 국민 소득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은 군사비를 증가시켜 나갔으며 전체 세금 또한 엄청난 액수를 더 거두어 들였다. 실업자의 증가, 임금인하, 물가상승, 세금부담 등은 민중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민중은 투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1957년에서 1958년 사이에 전국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났다. 농촌에서도 농민들이 일어나 토지개혁을 요구하였다. 또 평화통일에 대한 열망 또한 대단하게 일어났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파업과 항의로 이승만 정권은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이를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저지하였다. 1958년 초 이승만은 여러 민주인사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명목으로 투옥하였다. 이어 국회의원 입후보에 엄청난 액수의 공탁금을 걸어놓음으로써 민중의 평화통일 욕구를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이러한 상황 속에 1958년 4월에 두 보수 정당인 자유당과 민주당만이 참가하여 국회의원 선거를 진행하게 되었다. 선거전은 다른 당의 후보를 방해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폭력단이 맞붙어 싸우는가 하면, 비밀투표가 무시되고 강제로 투표를 하게 하는 일분개한 학생들은 시위를 벌이게 된다. 이후 3월 5일 서울, 8일 대전, 10일 수원에서 시위가 발생했다.이런 가운데 선거 직전 민주당 후보인 조병옥이 미 육군 병원에서 수술을 받던 중 사망하게 된다. 이에 이승만은 쉽게 대통령에 당선되어, 자유당은 부통령선거에 집중한다. 과거 장면 후보에게 이기붕 후보가 크게 진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960년 3월 11일 중앙청 국무 회의록을 보면 부정 선거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당시 내무장관은 선거준비에 공무원이 제2선, 제3선에 서서 나가기로 한 것이 지방에 따라서는 공무원이 제1선에 서게 되어 주변공기가 이상하니 각별한 주의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언론에 내무장관은 그런 일이 없다고 발뺌을 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자유당은 민주당의 집회가 있는 곳의 대중교통을 중단시키거나 당원을 폭행해 사망하게 하는 등 온갖 부정을 저지른다. 급기야 1960년 3월 10일 동아일보에 모의투표와 3인조 9인조 선거 등의 자유당이 짜놓은 3.15 부정선거 계획이 민주당 의원들에 의해 폭로되기에 이른다. 자유당의 득표 전략이 드러나게 되자 자유당은 언론에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다.이러한 과정 속에서도 제 4대 정?부통령 선거는 1960년 3월 15일에 예정대로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미 언론을 통해 폭로되었던 3인조 9인조 선거, 대리 투표등의 부정선거는 공공연하게 일어났다. 이에 민주당은 당일 선거 무효를 선언하기에 이르렀고 마산의 민주당 지부에는 부정선거를 외치며 시위를 하게 되는데 이내 경찰과 충돌하게 되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실탄과 공포탄 최루탄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되는 가운데 많은 수의 학생들이 죽어나갔다. 그 사이 자유당은 언론에 민주당의 무효선언은 이치에 닿지 않는다고 발표하였으며, 표를 조작해서 이승만 92% 이기붕 78%의 득표율로 대통령과 부통령을 당선시켰다. 그리고 마산 사태에 대해서 민주당에게 책임을 전가시켰다.4월 11일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군의 다. 마침내 4월 26일 이승만은 사임을 하게 되고 과도정부가 수립되었다. 1960년 7월 20일 총선을 통해 장면을 수반으로 하는 내각이 조직되었고 윤보선이 대통령직을 맡게 되어 제 2 공화국이 등장하였다.3. 4. 19 혁명의 의의와 한계민중들의 노력으로 이승만 정권 12년간의 독재가 막을 내리고 한국 사회에 민주주의가 제대로 뿌리내리는 듯 했다. 새로 출범한 제 2 공화국, 즉 민주당은 과거에는 자유당에 맞서기 위해서 민중의 의견을 대변하는 이미지를 보였으나 이승만 정권과 별 차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당의 많은 인사들이 친일 지주계급의 자제였으며 1/4은 총독부 관리 경험이 있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이승만 정권과 다름없이 온갖 비리를 저질렀으며 미국과의 동조를 통해 특권에 안주하였다. 목숨을 바쳐가면서 민중들이 얻어놓은 기회가 증발해 버린 것이다.그러나 4.19 혁명은 학생대중과 지식인, 도시민들의 저항이 일으켰으며 새로운 역사의 지평을 열었다는 사실에 있어서 충분히 평가 받을 만하다. 이는 한국 대중의 민주의식의 발전을 의미하며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원리를 확고히 한 사건이었다. 4.19를 원점으로 하여 지금의 2000년대에 이르기 까지 학생운동이 계속되는 사실에 있어서 4.19는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이라고 하겠다.< 2 > 5. 16, 또 다른 보수 세력의 등장1. 무엇이 군부를 일어나게 만들었는가군부가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사회적 측면과 군 내부의 문제 측면이 있다. 그 당시는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 집권과 독재, 그를 뒷받침 하는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에 맞서서 민중들이 일어난 4.19 혁명 직후였다. 그러나 혁명 이후 등장한 제 2공화국은 이승만 정권과 다름없는 부패한 정치형태와 무능력, 무기력성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어제의 진보가 보수로 변한 꼴이었다. 이런 민주당 정권의 부패한 정치 속에 사회적 혼란이 일어났으며 이에 물가가 인상되게 되었고 민중들은 더욱더 궁핍해져 갔다.콜론연구소(Colon Associates Institution)가 6일 참모총장에게 보낸 서한에도 잘 나타나 있다.친애하는 참모총장 각하,각하의 충성스러운 육군은 금16일 3시를 기하여 해 공군 및 해병대와 더불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궐기하였습니다.그들의 명분은 국가를 위기로부터 구하고 부정과 부패를 추방한다는 명분 아래, 1961년 5월 16일 새벽 행동을 개시하게 된다.2. 역사 이래 첫 군사 정부 등장1961년 5월 16일 새벽, 제 2군 부사령관 소장 박정희와 8기생 주도세력은 사병 3,500여 명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하고 군사 혁명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방송을 통해 민주당 정부를 무너뜨렸음을 국내외에 박정희는 이어 국회를 해산하고 3권이 군사 혁명 위원회에 귀속시키고, 6개 항목의 혁명 공약을 내놓았다. 6개 항목은 다음과 같다.①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②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할 것③모든 부패와 구악을 이소하고 청렴한 기풍을 진작시킬 것④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다 할 것⑤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할 것⑥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군사 혁명 위원회는 이어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위원회의 명칭을 국가 재건 최고 회의로 바꾸었다. 혁명군은 미군의 반감을 줄이고 민중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반공을 최우선으로 정하고 사회 기풍 쇄신에 힘썼다. 혁명정부는 군정 2년 후 민정 이양에 착수하여, 국민 투표에 의한 대통령 책임제와 단원제 의회 정치를 기본으로 하는 새 헌법을 제정하였다. 1963년 10월 15일에 실시한 제 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제 3공화국이 등장하게 되었다.3. 5. 16 군사정변의 결과와 그 한계성혁명 정부는 부패한 한국 사회를 바로 잡기 위해서 일어난 것은 틀림없다. 제 2 공화국은 그 권력에 취해서 많은 부조리를 낳았고 그 불만이 밖으로 표출 되었던 것이다. 혁명 정부는 5.16 직후 사회의 많있겠다.
서평 ‘신대륙과 케케묵은 텍스트들’연세대학교 의학과 김형우‘1550년에서 1650년 사이, 서구의 사상가들은 중요한 모든 진리를 고전 속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버렸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의 역사학 교수 앤서니 그래프턴(Anthony Grafton)이 자신의 쓴 ‘신대륙과 케케묵은 텍스트들’(New worlds, Ancient Texts)의 책머리에서 기술한 내용이다. 예시로써 저자는 예수회 신부였던 아코스타의 항해를 들고 있다. 아코스타는 적도를 통과할 때 거기서는 뭐든지 불타버려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상학』과는 달리 추위에 떨게 되자 아리스토텔레스를 비웃었다고 한다. 이처럼 1492년 신대륙의 발견은 유럽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 때까지 큰 권위를 놓치지 않았던 이른바 케케묵은 텍스트들이 신대륙의 발견으로 하나둘씩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의학 분야도 예외는 아니어서 유럽인들의 패러다임 변화는 일어났다. 예를 들어 신대륙에서 건너온 새로운 약초들과 질병은 학자들의 논쟁을 일으켰다. 약초에 관한 수많은 텍스트들이 쏟아져 나왔고, 담배는 그 효능에 있어서 수많은 논쟁을 일으켰으며, 새로운 질병 치료에 대한 무수한 의견들이 나왔다. 여기서도 어김없이 고전 텍스트들의 권위는 무너진다. 이처럼 이 책은 신대륙의 발견으로 드러난 증거물로 인해 새롭게 변화하게 된 우주관, 항해, 지도, 질병, 교육을 각각 장으로 나눠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에 덧붙여 여러 가지 사료와 고문서 지도, 책 표지 등의 다양한 자료를 담고 있어서 당대 사람들의 의식 구조 변화를 생생하게 알 수 있다.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500년을 기념해 만든 이 책은 르네상스 시대 지성사의 변천을 잘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93년에는 의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저자는 이미 『책의 수호자(Defenders of the Text)』와 『고전과의 소통(Commerce with the Classic)』등을 통해 고전 텍스트 방면에서 이미 많은 연구를 하였다. 여러 저술 활동을 바탕으로 쓴 ‘신대륙과 케케묵은 텍스트들’은 이런 큰 상을 받을 만큼 내용에 있어서는 흠 잡을 데가 없다. 우리가 잘 모르는 르네상스 시대의 세세한 내용을 방대한 증거 자료를 통해 쉽게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의 위대한 텍스트 들이 문제가 있었듯이 이 책도 아쉬운 점들을 지니고 있다. 첫째로 서구인들의 유럽 중심의 생각에 대한 비판은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또 신대륙의 발견으로 인해 생긴 변화가 너무 유럽 사회에만 집중된 부분도 한가지 아쉬움으로 남는다. 물론 이 책이 그 제목처럼 신대륙의 발견으로 인한 고전 텍스트에 대한 인식 변화를 말하고 있긴 하나 이미 유럽 사회 전 분야의 변화에 대해 논하고 있는 이상 신대륙에 원래 거주하고 있었던 사람들의 변화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