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소설집 분석황정은의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에서는 유령이 많이 등장한다. 이 유령은 말 그대로 죽은 혼을 뜻하기도 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제외된 비체로서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다.황정은은 이런 유령들을 보여줌으로써 객관적, 보통의 질서만이 존재하는 현실 사회 이면에 다른 삶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1. 오뚝이와 지빠귀‘오뚝이와 지빠귀’에서는 꿈에서나 나올 법한 혹은 장난감 가게에서나 봤을 법한 오뚝이가 되어 가는 인간이 나온다. 그녀의 이름은 기조이며 오뚝이가 되어 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지켜주는 무도씨가 소설의 주인공이다.잠결에 기조는 무도씨, 무도씨 하며 무도씨를 부른다. 욕실 문손잡이에 가슴을 긁혔다는 것이다. 언제나 배를 스치는 정도였는데, 가슴을 긁혔다고 말하며 그녀는 집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말한다. 너는 혈압이 낮으니까 너가 줄어든 게 아닐까? 라고 무도씨가 말하고 그런가, 하고 기조는 수긍한다.그런데 정말 기조는 분명 줄어들고 있었다. 무도씨의 말에도 그녀는 다른 것들이 커진 게 틀림없다고 말한다. 그 이유라는 건 왜냐하면 그런 느낌이 들어, 가 전부다. 무도씨는 기조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보지만 헛수고다.금요일 오후 무도씨는 오후의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는다. 기조가 자신을 데리러 왔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은행에서 기조는 모터 달린 소형 냉장고처럼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택시가 도착할 무렵이 돼서야 움직이기 시작한다.물속에 있는 절벽을 생각하기 위해 가만히 있었다는 기조에게 무도씨는 왜 그런 걸 생각하느냐고 반문한다.기조는 기울다가 꽁치를 떨어트린 날 이후로 종종 기울기 시작하다니 점점 오뚝이가 되어갔고, 결국 오뚝이가 된다.회사 사람들이 무도씨네 집으로 몰려 왔고 효율의 문제를 들먹이며 기조 앞에 사퇴서를 들이민다. 기조는 실업오뚝이가 된다. 기조는 객관적이 것이 무엇인지, 보통이란 것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무도씨에게 묻는다. 먹고 살기 바쁜데, 먹고살아야 하니까, 라고 무도씨는 대답할 뿐이다. 하지만 물방울에 움푹 패는 바위처럼, 한 점이 오목하게 일그러지는 것 같다고 무도씨는 생각한다.기조를 병문안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온다. 애를 낳고는 사람답게 살게 되었다며 애를 낳으라는 사람부터, 서로 오뚝이(기조)를 밀어볼 차례라며 빨갛게 얼굴을 붉히고 싸우는 아이들, 주말에 목사님과 교인들을 모시고 신방을 올 거라는 친척 아주머니에게 정중히 사과하며 무도씨는 당분간 집이 빌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다.기조는 드디어 방울 소리를 낼 수 있게 된다. 맑고 명징한 금속음이 딸강, 하고 울리는 기조를 무도씨는 곰곰이 바라본다.한편 무도씨도 이것저것을 곰곰 생각하게 된다. 분명 세계가 미묘하게 커졌다는 것을 느낀다. 자신의 시선이 상수도공사와 가스영업소를 잇는 가느다란 라인과 수평으로 만나고 있었지만 그것을 눈여겨 바라본 적이 없기에 평소에 비해 높은지 낮은지 알 수가 없다.무도씨는 기조와 같이 둘이 나란히 오뚝이가 도ldj 멈춰버린다면 집이며 냉장고며 각종 선반들의 관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한다.점점 오뚝이의 면모를 갖춰가는 기조의 곁에서 무도씨는 혼자 밥을 먹고 빨래를 널고 이따금씩 기조를 베란다에 옮겨주었다가 안으로 넣어주면서 오뚝이적 부재를 눈치챈 친척들이 몰려올 때를 대비한다.황정은은 ‘오뚝이와 지빠귀’에서 오뚝이라는 환상적인 모티프를 전면에 부각시키는 방법으로 우리들의 삶의 표정들을 이끌어낸다.기조처럼 우리는 언제든지 오뚝이가 되어버릴 수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오뚝이가 되어 약간 기울어서 세상을 보게 되면 말 그대로 ‘효율적으로’ 문제가 되어 현실에서 우리는 곧 퇴출되고 마는 존재들이다. 세상은 어떻게 손대볼 수 없을 정도로 완강한 세계다.사실 기조가 되고 싶은 것은 지빠귀였다. 지빠귀, 얄미운 소리를 하는 사람들을 콕콕 쪼아줄 수 있게. 하지만 기조는 오뚝이가 된다. 그렇다면 오뚝이는 무엇인가? 오뚝이는 사람들이 건드리면 건드리는 대로 반응하는 사물이다. 아이들이 얼굴을 붉히며 오뚝이를 밀어보려고 애쓰는 것처럼 세상과 현실은 우리들을 오뚝이로 만들어 그저 밀고 또 밀며 다시금 오뚝 서는 우리들을 재밌어 하는지도 모른다.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옆에 둔 채(무도씨)오뚝이가 되어야 하며, 오뚝이가 된 채 오뚝이가 되어가는 사랑하는 사람을(무도씨) 바라봐야 하는 현실에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2. 모자‘세 남매의 아버지는 모자가 되었다’,라고 소설은 시작한다. ‘오뚝이와 지빠귀’에서 그랬듯이 ‘모자’도 마찬가지로 그래 소설이니까, 라고 믿고 따라갈 수밖에 없다.아버지는 그전부터 가끔씩 모자가 되곤 했는데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져서 아무 데서나 모자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식구들을 곤란하게 만들고, 아이가 보는 앞에서 모자가 되어 버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이웃이 항의하기도 한다.하지만 모자가 된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들의 모습은 담담하기 그지없다. 조금은 심드렁하기까지 하다. 모자가 되어버린 아버지가 혹시 못에 걸릴까봐 이사를 가면 맨 처음 벽에 박혀 못들을 빼기도 하지만, 냉장고 앞에서 모자가 되어 발에 밟히는 것 보다는 못에 걸리는 게 낫다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이렇게 모자가 된 아버지, 혹은 아버지가 모자가 되는 상황은 내가 갑자기 벌레가 된 상황처럼 갑작스럽지도 놀랍지도 않은 어디서나 잘 보이는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는 텔레비전처럼 별스러울 것 없는 자명한 전제가 된다.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되고 독자들도 더 이상 모자가 된 아버지에게 의문을 품지 않았을 때 그제야 황정은은 언제부터 아버지가 모자가 되었는지에 대해 말해준다. 딸들의 입을 통해 말해지는 이야기들은 각자 다르지만 아버지가 초라했던 순간이었던 점에서는 모두 같다. 첫째는, 허름한 옷차림을 한 아버지를 모른 척 했을 때 아버지가 모자가 되었다고 말하며 둘째는, 라디오 하나 고치지도 사주지도 못하는 아버지에게 따졌다가 모자가 되었다고 말하며 셋째는 학부모 참관일 날 뒤에 서있던 아버지가 갑자기 모자가 되었다고 말한다.하지만 아버지가 언제 처음 모자가 되었는지는 아버지의 어머니 아버지의 아내로부터 나온다. 아내의 기억은 격렬하게 싸우는 아내와 어머니에게 화를 내며 기세 좋게 장을 업고 마당으로 내려가다가 힘이 다 빠져서 대문을 나서지도 못하고 모자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기억은 밥상에 밥알을 다섯 알정도 흘린 일 때문에 아버지에게 맞고 모자가 되었다는 것이다.하지만 언제부터, 인지만 알지 왜 모자가 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모르기에 세 딸은 아버지에게 묻는다. 하지만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나도 모르겠다.아버지가 말했다.확실한 것은, 좋아서 모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P55동네에서 딸들과 함께 산책을 하던 중 예비군에게 희롱당한 딸 때문에 파출소로 달려가던 아버지는 또 다시 모자가 되고 만다. 모자 왜 모자일까? 아버지는 하필이면 세상에 수많은 맨들(슈퍼맨, 베트맨, 스파이더맨 등)을 놔두고 교실 뒤 사물함에 놓이거나 못에 걸리기 일쑤인 모자가 되는 것일까.황정은은 모자가 되는 아버지를 통해 이 시대의 서민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집에서도 밖에서도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못한 채, 자식들도 아내도 부모도 자신도 자신이 왜 이렇게 됐는지, 왜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아버지들. 라디오를 고치지도 사지도 못하는 아버지로서 그가 될 수 있었던 건 고작 중절모 정도로 추정되는 모자가 되는 것뿐이 아닐까?황정은은 모자가 되는 아버지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비극적인 아버지의 삶의 속을 낱낱이 풀어헤치고 있다.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가 말한다는 것-‘한유주’의 《달로》중 3편달로《달로》를 읽는 내내 명확하게 부조되는 사건이나 인물을 찾기 어려웠다. 마치 서사를 중심으로 소설을 쓰는 작가들에게 ‘이 루저(loser)들아! 비유가 180문장(?)은 되어야지!’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달로》는 ‘달로 간 사람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로 시작한다. 달 착륙이라는 사건은 텔레비전을 통해 세계로 뻗어나간다. ‘모든 것이 텔레비전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지만, ‘화면 밖에서 어떤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고, 어떤 사람들은 성호를’ 긋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텔레비전 속에서 나오는 정보(언어)를 자신의 기억에 담는다.‘나’와 ‘그’는 같은 시간에 공존하고 있지만 다른 곳에 살고 있다. 둘을 연결시켜주는 매개는 강이다. 강을 통해 둘은 서로를 바라본다. ‘나’의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혼성교배에 의해 태어났음에도 서로가 순결하고 깨끗한 존재임을 믿고 싶어 하고, 전쟁과 살인과 폭력을 ‘환영’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몽상과 사유가 사라진’ 세계에서 사람들은 어두운 구멍을, ‘간직하고 싶은 기억’들로만 채워나간다.‘나’가 시간 속에서 부유하는 인물이라면 ‘그’는 달 이면에 있는 원초적인 인물이다. 그는 중력을 거스르며 강 위에서 걷고, 전설 속을 떠다닌다.몇 번이나 《달로》를 읽었음에도 도대체 이게 뭐야? 라는 생각이 들게 한 건 작가의 의도임이 분명했다. 그건 ‘나’와 ‘그’사이에 어떤 욕망도 없기 때문이다. 즉 둘 사이는 비유로만 존재하며, 아무런 서사가 없다. 비유는 곧 잊혀지고, ‘기억’이 아닌 ‘망각’만이 남는다. 텔레비전 속 정보를 자신의 고유한 기억인양 믿는 것처럼, 사람들은 너무도 많은, 어쩌면 조립품에 불과한 기억들을 순수하다고 믿으며 ‘영원한 흔적’이라고 생각한다.결국 작가는 ‘나’와 ‘그’를 통해 ‘이 모든 이야기를 나는 어디선가 전해 들었고’라는 문장처럼 기억한다는 것은 타율적일 수밖에 없음을, 기억의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도 강 건너를 꿈꾸지 않’는 세상에서의 소설이란 ‘겨드랑이에서 발가락 사이에서 양 옆구리에서 자라’는 ‘지겨운 이야기들’로 된 ‘버섯의 몸’같다고 말한다. 소설은 기억을 합리화 시킨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그 한계에 대해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그’가 장대높이뛰기를 해서 가려고 하는 ‘달’은 무엇일까? 《달로》에서 달은 세상의 끝이다. 아니 달의 뒷면이 세상의 끝이다. 달의 뒷면이라는 것은 한 번도 가보지도 바라보지도 못한 곳이다. 작가는 ‘기억은 망각의 뒷면이었고, 망각은 기억의 뒷면이었다’라고 말한다. 기억한다는 것은 실재가 아니며, 망각한다는 것도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달의 뒷면도 세상의 처음일 수 있고, 지금의 세상도 세상의 끝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일까.‘세월에도 빛바래지 않은 누군가의 최초의 기억을 찾아’서 작가는 글을 쓰고 있는 것 같다. ‘꿈의 공장’이라고 불리는 ‘도시의 곳곳에서 되풀이’되는 이야기가 아닌 ‘달로, 달로, 그러나 아무도 그 소리를 다시 귓가에 재현해낼 수는 없었’던 이야기를 재현하기 위해.작가는 분명 절망하고 있다. 지금 세상이 온통 가짜라고 말한다. ‘가짜로 흐르는 강과, 가짜로 떠 있는 하늘과, 가짜로 바람에 울먹이는 대나무 숲’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지금 소설 또한 가짜일 수밖에 없다. 써내려가는 서사는 실재가 될 수 없다. 작가는 ‘나’를 통해 ‘달로, 달로’ 끊임없이 걷는다. ‘강의 건너편을 향해 걷기 시작’하며, 결국 ‘검은 테가 둘러진 액자’같은 온통 가짜인 세상을 빠져나온다. ‘어디선가 전해 들었’던 이야기가 아닌 실재하는 글을 쓰기 위해. 아니 실재하는 글을 쓴다는 것은 오직 감각의 비유로만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일까?그리고 음악작가 한유주는 《그리고 음악》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걸까?오윤호, 우찬제, 문학과사회 편집인, ‘달로’ 해석을 참고했습니다.‘나’와 ‘환영’이 나오고, 그들이 춘천으로, 음악회에 가는 시간과 사건이 나오지만, 그걸 말하려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스토리를 굳이 말하자면, ‘나’와 ‘환영’은 기차를 타고 만 이틀간의 여행을 떠난다. 어디로? 춘천으로.‘환영’은 ‘나’와 음악으로서 영혼적인 동일시(?)를 맺고 있는(백민석의 ‘올빼미 농장’에서 ‘인형’이 내재하는 또 다른 자아, 즉 ‘비성숙한 자아’를 말했다면 ‘환영’은 ‘유폐된 자아’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또 다른 인물 같다.‘나’는 말하지 않는다. ‘환영’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말하려고 하면 자꾸 잊게 되’기 때문이고, ‘비명을 막기 위해 말을 잊어야만 하’기 때문이다.‘환영’은 ‘도통, 아무것도 읽으려 하지를 않’는 사람이다. ‘환영’은 글을 읽는 대신 ‘종일 침대에 걸터앉아 음악을 듣’고, ‘농담이 통하지 않는’사람이다. ‘환영’이 ‘비명을 막기 위해 말을 잊어야만’했던 것은 ‘환영’의 엄마가 익사해서 죽은 것과 관련이 있다. ‘환영’은 상처로 인해 사회와의 소통을, 즉 언어로 말하는 것을 그만 두었다.그렇다면 ‘나’는 왜 말하지 않는 걸까?‘우리의 세대는 수사학이 선인 세대야.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세대지. 우리의 과거는 전파로 얼룩져 있고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반성도 회의도 추억도 갖지 못한다. 텔레비전의 화면은 한 가지 전파만을 송신하고, 그마저도 뒷면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우리에게는 영혼이 없다. 오직 전파만이 영혼의 속도로 직진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우리의 야만이다.’작가는 ‘나’를 통해 ‘우리의 야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완전한 이해, 완전한 묘사는 불가능하니까.’ 우리는 함구해야만 하지만 ‘나는 자꾸만 말하고자 한다.’ 그것이 작가가 말하는 야만이다. ‘수사학’이란 진실이나 실재에 가닿지 않는 허위적인 말이다. ‘우리가 야만’하다는 것은 그런 언어를 아무 거리낌 없이 쓰면서도 우리가 반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야만적인 세대는 이야기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들며, 그래서 ‘나’와 ‘환영’은 그런 절망 앞에서 ‘우리에게 언어는 다만 치장일 뿐’이며, ‘치장된 언어는 윤리적으로 거짓말보다 더 나쁘다’고 말한다. ‘닥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2001년 9월 11일,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두 건물이 허물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목을 길게 빼고 전광판을’ 바라본다. 세계 모든 곳의 전광판에서는 분명 ‘똑같은 장면이 되풀이되고 있’을 것이다. 작가는 ‘텔레비전의 화면은 한 가지 전파만을 송신하고, 그마저도 뒷면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우리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너무나 공시적’이기 때문에, 카메라는 언어보다도 먼저 그 곳에 당도해 있다.진정한 경험은 거세되고 그 자리를 환영이 차지한다. 즉, 경험으로 말해지는 서사는 현존할 수 없다. 작가는 ‘상상은 소리를 제거한다.’고 말한다. 환영을 상상과 같다고 볼 때 환영은 주체와 풍경을 아득히 멀게 하는 존재다.작가는 ‘거짓말이다’라는 말을 반복함으로써 어떤 사건도 실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장면은 감각 너머에 있’기에 ‘슬프고 광포한 일들’이 무수히 일어나도 우리는 아파하지 못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살아 있’고 ‘이것이 나의 야만’이라고 말하는데서 언어가 가진 순수한 기능 즉, 소통의 기능을 잃어버린 언어를 벗어난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세계를 꿈꾸는 작가의 희망을 엿볼 수 있다.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나보다 무려 예순 살이 많아서 위안이 되는, 작가“한밤중 톰의 정원에서”의 작가 필리퍼 피어스(Philippa Pearce)는 1920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BBC방송국,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 안드레 듀취사 등에서 방송작가와 편집자로 일하면서 문학성과 재미를 두루 갖춘 작품들을 썼다. 두 번째 작품인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로 카네기상을 수상하면서 천부적인 이야기꾼이라는 찬사와 함께 장소와 분위기를 생생하게 재현할 수 있는 감각, 말을 정확하게 사용하는 재능, 가장 뛰어난 현대 어린이 문학 작가 등 숱한 칭찬을 들으며 단숨에 영국 어린이 문학계의 대표 작가로 떠올랐다. 영국 근대 판타지 문학을 대표하는 작기이며, 몇 안 되는 문장가로 손꼽히는 작가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대체로 문장가라는 명성에 걸맞는 묘사력과 기억에 아주 오래 남을 만큼 개성 있는 인물 창조와 완벽하고 균형있게 짜맞춘 구조, 이 모든 것이 잘 갖추어져 있어서 ‘걸작’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피어스의 대표작으로는 아름답고 섬세한 언어로 잘 그린 실제 세계와 상상의 세계를 살짝살짝 넘나드는 멋진 작품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와 “아주 작은 개 치키티토”등이 있다. 또한, “버블과 스퀵 대소동”으로 휘트 브레드 상을 받았으며, “학교에 간 사자”, “다람쥐와 마법의 반지”등이 전세계 어린이들에게 커다란 사랑을 받고 있다.파헤쳐보자매력적인 배경톰이 판타지의 세계로 빠지게 되는 과정은 매우 현실적이다. 그 현실적인 지점에는 바로 배경이 있다. 배경은 가공의 장소가 아닌, 도심의 오래된 다세대주택이다. 또한, 다세대주택은 큰 저택을 개조해서 만든 것으로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런 배경은 비현실적인 세계를 뚜렷하게 현실화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되어 준다. ‘만약’이 아닌, ‘정말인가?’로 더 나아가 ‘진짜네’ 라고 독자를 이끈다.‘홍역을 피해 집을 떠나다’가 중요한 이유이야기에서 논리적 인과가 허술하면 그 이야기는 힘을 잃게 된다. 분명한 논리적 구조에 의해서 진다니. 등장부터 포즈가 심상치 않다. 뭔가가 있다는 냄새가 풀풀 풍긴다. 괘종시계의 등장만으로 가슴이 콩닥거린다. 이런, 멋쟁이 포즈를 자체발광으로 펼치니 톰이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내가 주인공이어도 당장 궁금해 했을 것이다.어른들에게 하루는 ‘스물네 시간’이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확고한 논리다. 그러므로 이모부를 필두로 한 어른들에게 제멋대로 종을 울리는 괘종시계는 ‘저놈의 괘종시계’일 뿐이다.하지만, 톰은 분명히 괘종시계가 열세 번째 종을 치는 걸 듣는다. 괘종시계의 열세 번째 종소리는 톰의 갈망 속에 단단히 자리를 잡는다. 그때, 톰은 이모부의 확고한 논리를 의심하게 된다.‘하지만, 하루에 열세 시간씩 두 번 있다면 어떻게 될까? …… 자유로운 한 시간을.’그리고, 여분의 한 시간을 찾아 톰은 침대를 박차고 일어난다. ‘저놈의 괘종시계’가 ‘이상한 괘종시계’이자, ‘흥미로운 괘종시계’이며 ‘엄청난 괘종시계’로 바뀌는 순간이다. 드디어, 흥미진진한 판타지 세계가 열린다.두 얼굴을 가진, 정원톰이 이모네에 가게 되면서 가진 가장 큰 불만은 놀이집을 지을 정원이 없다는 점이었다. 늘 자신을 포근하게 감싸주었던 정원이 아닌 차가운 돌바닥으로 뒤덮인 다세대저택은 톰을 숨 막히게 한다. 톰이 처한 이모네는 낯설 뿐만 아니라, 규제를 받으며 규칙을 지켜야 하는 세계다.이는 지금까지 포근하고 자유로웠던 어머니의 품이 아니라, 좀 더 성숙한 어른의 세계 즉 금기가 존재하는 세계를 뜻하는 것 같기도 하다. 톰에게 있어 그곳은 ‘지독한 곳이며, 나갈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는’ 세계다. 톰은 벽을 부수고 자기를 해방 시켜 줄 공간, 즉 정원을 간절히 원한다. ‘자유에 대한 갈망’을 하는 것이다. 마침내, 열쇠역할을 하는 괘종시계를 지나 톰은 ‘제2의 세계’인 정원으로 들어선다.‘바깥 풍경은 지금도 톰을 유혹하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너무나 매혹적이고 선명했다.’정원은 톰을 유혹하는 공간이다. 단순히 톰이 정원을 좋아한다고 느꼈을지 모르지 이모와의 대화를 떠올려 보고 싶다.‘그리고 여기가 손님 방이야. 네가 쓸 침실이지. 꽃도 꽂아 놓았고, 네가 읽을 책도 몇 권 갖다 놓았단다.'처음에는 이 부분을 아무렇지 않게 읽었다. 그런데 책을 다시 읽는데 나도 모르게 오싹해졌다. 석연치 않은 점은, 톰이 남자 아이인데도 이모가 방에 꽃과 여학생들이나 읽을 책을 준비했다는 점이다.‘방에 꽃을 놓아줘서 정말 고마웠어요.’그리고, 그 뒤에 톰이 이모에게 하는 말 또한 의미심장하다. 대체로 남자아이들은 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즉, 이때까지의 톰은 남자로서 기능하지 못했다고도 볼 수 있고, 해티의 방에 왔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해티와 톰은 정원에서 곧잘 자신들만의 은밀한 공간인 비밀의 통로를 드나든다. 늘 오빠들 뒤만 졸졸 쫓아다니던 해티는 톰을 만나고 난 뒤에 나무에 오르고, 활과 화살을 만들어 활을 쏘기도 한다. 화살 때문에 거위떼가 정원을 덮치는 장면은 내게 참 인상적이었다.‘악마가 가르쳐주지 않고서야, 거위들이 어떻게 그런 길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아벨은 말하고 있지만 사실 이 거위떼는 화살 때문이 아니라 해티가 미리 만들어 놓은 비밀 통로 때문에 정원에 오게 된 것이다. 시간의 문제일 뿐이지, 화살이 없었어도 언젠가 정원을 망칠 게 분명했다. 즉, 해티의 마음 깊숙이 있던 정원에 대한 불만이 정원을 망쳐 놓은 것뿐이다. 그렇기에 큰 어머니의 호된 말을 들으며 해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있을 수 있다. 그렇기에 톰은 해티가 왜 정원을 싫어하게 되었고, 왜 정원에서 나가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어린 해티를 만나면서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된다.‘난 죽지 않았어. 정말이야, 톰. 난 죽지 않았어.’유령이라는 말로 언쟁을 벌이다가, 해티가 우는 장면을 보면 해티 스스로 자신이 정원 안에서 죽은 존재임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해티와 톰은 나무 위에 놀이집을 짓는다. 하지만, 해티가 놀이집에 완전히 몰두해 있는 것에 비해서, 톰은 별로 열성적이지 않다. 이점 또한 재미같은 방을 썼지만, 결국 톰이 자고 일어난 침대는 해티의 침대가 아니라 자기 참대라는 걸, 방도 해티의 침실이 아니라 자기 침실이라는 걸, 창살쳐진 창문이 하나밖에 없는 반쪽짜리 방이라는 걸 톰은 알게 된다.아벨은 무슨 역할을 하는 걸까“한밤중 톰의 정원에서”에서 제일 기분 나쁜 인물은 아벨이었다. 몇 번 읽다보니 아벨이야말로 해티의 감시자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언제나 고립된 해티의 편에 서서 해티를 보호하는 모습이 그를 선한 인물로 생각하게 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하고 계속 생각하다보니 정원을 관리하고 가꾸는 아벨이야말로 해티가 정원을 나가는 걸 막는 방해자가 아닐까 싶었다. 해티 외에 유일하게 톰을 볼 수 있는 것은, 유일하게 해티의 욕망(정원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활과 화살이야. 하지만 톰, 그것들을 태우고 싶어한 건 아벨 아저씨였어.’‘그리고 아벨 아저씨는 더 이상 부엌에서 칼을 갖고 나오지 않겠다고 약속하랬어. 부엌칼은 너무 날카로워서 다칠지도 모른대. 그리고 내가 활과 화살을 태우고 다시는 부엌칼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나한테 작은 칼을 주겠다고 했어.’‘그런데 왜 아벨 아저씨는 왜 느닷없이 네가 담벼락 위로 올라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까?’해티에게 절대로 담벼락 위로 올라가지 않겠다고, 대답하라는 아벨의 모습을 해티는 겁이 났던 것 같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담벼락이란 게 경계를 뜻하기 때문이다. 즉, 담벼락만 넘으면 정원 밖의 세계가 나오기 때문이다. 화살을 만들고, 놀이집을 만드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했던 아벨이 유독 담벼락에서만큼은 달려왔던 이유는 아마 그것일 것이다.하지만, 이런 해석에도 불구하고 아벨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이 남는다.이모부는 왜 나왔을까“한밤중 톰의 정원에서” 아버지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모네 집에는 이모 말고도 이모부가 있다. 물론, 톰의 이모도 톰의 엄마보다는 엄격해 보인다. 바솔로뮤 부인의 것이라며 괘종시계를 손대지 못하게 하버지를 대신해서 이모부에 대한 적대감으로 드러난다. 또한, 집에 있는 정원은 환상의 정원으로, 어머니에 대한 애정은 해티에 대한 애정으로 옮겨간다.숫자 13의 의미를 찾아서77번 버스를 타고 중앙역으로 가다 보면, 안산시 ‘25시 시청’이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 즉, 여분의 시간을 말한다면 13보다는 25가 먼저 떠오른다는 거다.또, 25는 게오르규의 소설에서도 나온다. 물론 게오르규의 25시는 마지막 시간이 지나가 버린 후의 폐허의 시간, 메시아가 와도 구원해 줄 수 없는 절망의 시간의 뜻을 품고 있다. 하지만, 25시와 13시는 같은 의미로서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며, 혼돈의 시간이며, 내면의 시간인 것도 사실이다.“한밤중 톰의 정원에서”의 13은 분명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13일까?서양에서의 13은 불길한 숫자다. 서양의 많은 건물들은 13층을 표시하지 않으며, 일부 비행기 좌석에도 13번이 없고, 호텔 등의 객실에 13호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마구간 등 연속된 숫자를 표기하는 곳에 13을 제외한 경우가 많다.과거 세계의 여러 문화권에서는 12를 ‘과잉수(어떤 수의 약수의 합이 그 수의 두 배보다 큰 수)’로 인식하여 12를 초과하는 13을 안 좋게 인식하고 있었다. 시계, 달력 등이 12를 끝으로 하는 논리는 이런 배경에 있으며, 종교학자들은 ‘예수’가 ‘12제자’를 둔것도 오래전부터 ‘12’라는 숫자를 완성이라고 인식하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과거 ‘태음태양력’에는 ‘13월’이 존재하는 연도가 있었는데, 이를 불길하다고 인식하여 결국 폐지되기도 했다.북유럽에 널리 퍼져있는 신화에 등장하는 ‘로키’는 장난꾼, 변덕쟁이에 간사하고 나쁜 지혜에 능통하며 거짓말에 능한 나쁜 신으로 인식되어 있는데, ‘로키’는 ‘13번째 신(神)’이다. 또한, ‘사탄(Satan)’이 13번째 천사였다는 설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미성년인 톰에게 있어 자유의 시간 즉 13시는 두려움의 숫자일 수 있다.하지만, 나는 13이라는 숫자가 청소년기가 된다.
이런 시인과 연애하고 싶다- 진은영 두 번째 시집 『우리는 매일매일』을 읽고아름답고 정치적인 이야기‘멜랑멜랑한 우울한 꼬리를 가진 염소 한 마리’(「대학시절 中」)가 ‘낙관주의자’(「멜랑콜리아」中)가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아마도 ‘얼어가는 물고기’가 ‘불타는 지느러미’(「Summer Snow 中」)가 될 확률과 비슷할 것이다.진은영은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에서 태어난 ‘염소 한 마리’를 『우리는 매일매일』에서 낙관적인 멜랑콜리자로 만든다. 진은영은 정반대의 자리에 있는 단어들의 간격을 단숨에 뛰어넘어 ‘은유가 없다’라고 외치는 세상에 ‘나는 시인입니다.’라고 외친다.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을 무너뜨리고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애틋한 은유들을 쏟아낸다.『우리는 매일매일』에서 매일매일 들을 수밖에 없는 ‘낯선 비밀들’(「메피스토 왈츠」中)과 ‘내가 모르는 일들’(「물속에서 中」)은 이제 더 이상 남의 것이 아니다. ‘타인의 텍스트(아름다운 것이건 정치적인 것이건 상관없이 )’들은 ‘진은영’에게로 흘러들어와 ‘진은영’ 안의 시인을 더욱 넓고 길게 만든다. 몸속으로 뛰어든 이런 것들은 시인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만들어 주고, 더 나아가 ‘폐허’와 ‘부서진 벽’, ‘지뢰’와 ‘탱크’, ‘구멍난 얼굴 위에’서 조차 ‘진동의 발명가’(「나에게 中」)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이동’시키고 ‘세계의 변화’를 촉발 할 힘을 준다.또 ‘진은영’은 비평가들에게는 ‘고장의 이름을 여러 나라 알파벳으로 외우’지 말고 ‘긴 이름들에 타’(「비평가에게 中」)서 시 그 자체를 감응하라고 충고하며, 자신에게는 ‘무엇인가 점’치고 ‘우연을 사랑하라’(「나에게 中」)고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그녀의 이런 채찍질은 ‘고통과 비명의 자유로운 확산과 교역을 위해’(「문학적인 삶 中」)같은 쓸쓸하면서도 통쾌한 은유로서 ‘세상에 개입’하게 만든다. 비록 ‘갇힌 사람들의 피로 젖은 빵’같은 아프지만 익숙한 지점을 보여주는 한계를 보이지만 진은영의 시를 읽고 있으면 ‘우리는 세계의 배꼽 위를’ 걸으며 ‘서로를 포옹’(「연애의 법칙 中」)할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는 ‘노오란 땀을 흘리며 주저앉는 권투선수처럼’(「연애의 법칙 中」) ‘충만’과 ‘허망’을 느끼며 세계 바깥으로 나가게 된다.앤솔러지‘나에게는 다섯 명의 시인이 있지’(「앤솔러지 中」)진은영은 왜 다섯 명의 시인으로 몸을 바꾼 걸까. 그것은 아마 ‘시가 무엇일까’라는 질문과 질문 사이에 놓인 어떤 질문으로부터 나왔을지 모른다. ‘교훈을 싫어’「집시의 시간 中」하고, ‘슬리퍼 한 짝’「신발장수의 노래 中」만을 신은 채 진은영은 끊임없이 넘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상의 분열을 보다가 진은영 자신이 분열된 건지도 모르고, 분열된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스스로를 분열시킨 건지도 모른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쓴다지만 우리에게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다.’「70년대産 中」는 비극이 그렇게 만든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건 단순한 우연의 의한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어야 한다는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아무튼 ‘앤솔러지’를 읽다 보면 뭔가 ‘야릇한 것이 시작’「어떤 노래의 시작 中」된다.첫 번째 시인은 아프다. 그는 ‘눈먼 시간들이 부딪치는 어느 모서리’에서 아프고 그의 통증은 ‘모두가 떠나간 검은 빌딩의 한 층처럼 밤새’ 빛난다. 빛난다는 것은 무언가가 타고 있다는 것이다. 모두가 떠나갔기에 그는 자신을 태울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의 통증이 쓸쓸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건 밤새 빛나기 때문이다. 그는 통증으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다. ‘불타버린 지느러미를 휘젓’(「Summmer Snow 中」)는 시인처럼. ‘푸른 얼음(Summer Snow 中)’처럼 빛나며 충만한 상태를 이룬다.두 번째 시인은 용감하다. 용감한 이유는 부서지는 지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너는 곧 죽을거야’라는 걸 알면서도 ‘맛있게 씹’을 수 있다는 것은 ‘그런 일이 너무 춥고 지루할 때 내 몸에 구멍이 났다고 상상해볼까?’(「물속에서」中)처럼 자신을 개방해야만 이루어 질 수 있는 일이다.세 번째 시인은 의사다. 뭐 정확히 말하면 가짜 의사다. 하필 ‘암살자 태양이 뜨는 백야에’ 즉, 밤 같지 않은 밤에 의사 흉내를 낸다. 자신이 ‘아무도 없는 어두운 대성당’ 이라고 말한다. ‘수요일의 텅 빈 체육관’에 있던 ‘권투선수’(「연애의 법칙 中」)처럼 가짜 의사는 혼자서는 절대 하지 못하는 연애의 반작용을 권투선수가 안고 갔듯이 ‘자신의 그림자’로 안고 가려 한다.
‘슬픔과 우울증’1. 국경을 넘는 일국경을 넘는 일은 크게 두 가지 사건으로 나뉜다. 첫째는 박이 캄보디아와 태국의 국경을 넘으며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경험하는 사건이다. 둘째는 코사멧에서 이루어지는 나오꼬와의 하룻밤이다.먼저 첫 번째 사건에서 국경에 걸친 조그만 다리를 건너던 박은 아이가 장난으로 분 호각소리를 듣고 알 수 없는 공포를 경험한다. 분단이란 이데올로기가 박의 마음속에 벗어버릴 수 없는 부담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애도는 보통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에 대신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조국, 자유, 이상 등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박은 3년 전 여자친구와 함께 왔던 여행지를 홀로 왔다. 박은 사랑하는 대상이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성 검사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이 이루어 진 다음에야 그 대상에 부과되었던 모든 리비도를 다 철회시켜 다른 대상에게 부어 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박은 완벽한 애도를 하지 못한다. 박이 가졌던 사랑의 상실의 자리에 바로 분단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들어온 것이다. 분단국가의 국민인 박은 동독 출신의 얀을 만날 때는 분단국가의 한 대표로 그와 마주해야 했고, 일본 여자 나오꼬를 만날 때조차도 알 수 없는 서걱거림으로 그와의 이질감을 느껴야 했다. 슬픔의 작용이 완결된 뒤, 자아는 다시 자유롭게 되고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게 되지만 박은 그러지 못했다. 박은 낯선 여행지에서 안구건조증에 시달리며 자신의 불안하고 착잡한 내면을 내내 들여다보아야 하는 상황에 다다른다.코사멧으로 가기 전까지의 박은 애도의 실패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코사멧에서 박은 멜랑꼴리의 지점으로 들어가게 된다.박은 다시금 자신에게 찾아온 혼돈을 생각했다. 이 갑작스런 행위를 그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이 상황을 이성적으로 판단하려는 자신이 우습기도 했다. 한편으로 우울함과 고독이 귀국한 뒤에까지 이어질까 두려웠다. 157p박은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없어진다. 멜랑꼴리 측면에서 접근해보면 박은 분명 자애심의 급격한 저하를 보인다. 상당한 정도 자아의 빈곤을 내보인다.'국경을 넘는 일‘에서 박 말고도 고바야시나 나오꼬 또한 멜랑꼴리한 인물들이다.고바야시는 고향에서 오퍼상을 하다가 사업이 망해 방콕에서 일 년째 도피생활중이다. 나오꼬의 말에 따르면 그는 ‘영혼이 망가진 가엾은 사람이’다.“가끔 그가 자학할 때는 솔직히 제가 진짜 복수를 하는 것 같아 두려웠어요.” p162이런 고바야시의 모습은 멜랑꼴리의 지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멜랑꼴리 환자의 자기 평가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아가 빈곤해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또 그것을 스스로 단정적으로 인정하는 발언이다. 정말 조금만 달리 보면 그런 비난의 말이 다른 사람, 그 환자가 현재 사랑하고 있거나(나오꼬) 아니면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 (나오꼬의 어머니). 혹은 그가 꼭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다른 사람을 향한 비난의 목소리임을 알 수 있다. 즉 고바야시의 자기 비난이라는 것이 사랑의 대상에 대한 비난인데, 그것이 환자 자신의 자아로 들려진 것이라는 사실이다.이런 멜랑꼴리는 자기 비하의 단계를 넘어 나르시시즘적인 동일시의 과정으로 흘러간다. 나르시시즘적인 모습은 나오꼬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나오꼬가 애초에 박에게 접근했던 것은 고바야시를 아프게 하기 위해서였다. 박은 박과 운명을 같이 할 것이냐를 놓고 고민하던 자아가 나르시시즘적인 만족 속에 이제는 나오꼬에 대한 집착을 끊어야 할 때가 찾아오지만 그러지 못한다. 박과 나오꼬 사이에는 개별적인 갈등들이 일어난다. 혹은 앞에서 박과 얀 박과 사카모토 사이에서도 동일하게.“내가 한국인이라서 그래? 나도 네가 무서워.” p165“너는 그냥 어린 계집아이일 뿐이야.” p167선착장에서 나오꼬와 헤어지기 직전 박이 하는 이 말은 일본어도 영어도 아닌 한국어다. 박은 나르시시즘적인 동일시 속에서 대체 대상 즉 나오꼬에 증오가 작용하게 되면서 그 대상을 욕하고, 비하시키고, 고통 받게 만들게 된다. 이것은 멜랑꼴리의 애증병존으로 볼 수 있는데 모든 갈등은 대상을 비난하고, 경시하고, 심지어는 대상을 제거함으로써 대상에 대한 리비도의 집착을 느슨하게 한다.박과 나오꼬 고바야시가 겪은 멜랑꼴리의 모습은 마치 아물지 않은 상처와 같이 모든 방향에서 리비도 집중을 끌어 모으다 자아가 완전히 빈곤해질 때까지 자아를 텅 비우게 된다.결국 박은 발걸음을 뗄 수도, 그렇다고 머물러 있을 수도 없어 어정쩡하게 서 있게 된다. 결국 그는 애도의 실패하여 멜랑꼴리의 세계에 남게 된 것이다.2. 내 생의 알리바이내 생의 알리바이는 두 개의 소설(국경을 넘는 일, 국경의 꽃 성승경)과는 애도 완료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은 대상이 자아에게 그렇게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면 그 대상의 상실 또한 슬픔이나 우울증을 일으킬 만한 성질의 것이 되지 못한다는 걸 보여준다.죽은 태림을 향해 ‘나’는 고백한다.‘나는 사랑하지 않았는갑다, 태림아, 나의 친구야!“ p266또한 ‘나’는 쉽게 태림을 제쳐두고 자신을 되돌아본다. 태림의 죽음은 주인공에게 애도 정도로는 다가왔겠지만 멜랑꼴리에 지점까지는 가지 못했다. 소설은 태림이 ‘나’에게 이제 태림이 죽었다고 선언하면서 ‘나’에게는 계속 살아가는 것이 좋다고 부추김으로써 ‘나’로 하여금 태림을 포기하도록 강요한다. 하지만 그 강요 또한 어렵지 않아 보이고 ‘나’가 태림을 상실한 것이 어떤 애증 병존이나 자아로의 리비도 퇴행으로 까지는 이어지지 못한다.그리고 나는 이제 새롭게 살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길은 막다른 길일 것이기에. p266하지만 태림이 ‘나’에게 있어서 아무 존재도 아니었던 건 아닌 듯싶다.명태포 속에 잠복해 있는 가시로서의 태림이 지금 내 속의 어느 한 곳을 찌르고 있음을 내보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던 것이다. 나는 아직 태림을 영영 잊지는 않았다는 뜻인가.p242‘나’는 팔리지 않을 책만 펴내는 출판사를 경영했던 서른셋의 여자다. ‘나’는 자신의 청춘의 한때와 결별했으며 정말이지 간절히 새롭고 싶어 하는 여자다. 그때 ‘나’는 태림을 생각한다. ‘나’는 고등학생 때 열아홉이었는데도 갯바람에 그을린 자국 때문이었는지 마치 산산스런 삶의 한가운데 있는 삼십대 여자처럼 보이는 태림을 생각한다. 남자친구에게 쫓겨 하룻밤을 재워 달라는 태림을 생각하고, 새끼 보증을 해달라는 태림을 생각한다.하지만 결국 ‘나’는 말한다.그렇게 애증의 감정이라든가 기타 다른 감정들이 생겨날 수 없는 선에서 나는 그를 만났다. p249태림이 ‘나’에게 있어서 애도나 멜랑꼴리 이상을 느끼게 하지는 못했지만, 태림의 인생만을 놓고 봤을 때 그녀는 심각한 멜랑꼴리에 시달렸던 것이 분명하다.정신과 질환을 앓았나봐.80년도부터 앓았는데 오래됐나봐. p266‘나’가 마지막에 고백하는 막다른 골목이란 바로 멜랑꼴리의 끝 사디즘으로 이어지는 것 이 아닐까. 교통사고였지만 마치 자살처럼 기록되어진 태림의 삶은 그걸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3. 구국의 꽃, 성승경‘구국의 꽃, 성승경’에는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성승경의 남동생 ‘승진’과 ‘구국의 꽃, 성승경’의 다큐영화를 찍었던 재민이다.이 두 주인공은 모두 성승경의 애도 완료에 실패했다는 공통점이 있다.먼저 성승경의 동생 승진을 살펴보자. 승진은 누나가 죽은 날 이후로 성장이 멈춘다. 162cm의 키에서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승진이 겪는 건 애도 그 이상이다. 사랑하는 대상을 현실에서 잃었다는 것에 대한 반응, 그것 이상의 정상적인 심리 상태에는 없는 무엇이 승진에게서 보여진다. 누나의 까만색 원피스를 입은 그는 누나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바로 나르시시즘적인 동일시 속에 숨어 버리는 것이다. 승진은 남자가 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죽은 누나의 옷을 입고 아버지 몰래 밤마다 밖으로 나가 여자 행세를 한다. 심지어는 아기를 낳고 싶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