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잊지 말아야할 우리들의 처음으로 -박완서 『그 가을의 사흘 동안』「그 가을의 사흘 동안」은 읽는 내내 속이 불편했던 작품이었다. 우단의자와 동부의원 간의 이질감처럼, 이름 모를 화자의 속내는 나로 하여금 속을 꽤나 불쾌하게 만드는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 글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화자의 속마음을 알아차렸고, 이내 화자에게서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난 이 글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이 짧은 소설에서 주제와 직결되는 소재를 꼽으라면 단연 우단의자일 것이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는 것부터 어울리지 않았던 쟂빛과 녹두빛의 우단의자. 왜 화자에게 이 우단의자는 ‘버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천덕꾸러기 취급도 못하고 여지껏 남으로 난 창가에 모셔놓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을까. 개업 당시 화자의 아버지는 화자를 찾아와 우단의자에 앉아 있다가 의술은 인술임을 말하고서 떠났다. 화자는 이 우단의자가 자신의 또 다른 넋을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또 다른 넋은 무엇일까. 바로 여기 이 작품의 넋이 담겨있다.화자는 일평생을 말 그대로 모지게 살았다. 어렸을 적 겁탈당한 이후 남자는 쳐다보지도 않았고, 그 뒤 산부인과라는 간판을 내걸고 창녀를 주 고객으로 삼고 소파수술과 성병치료로써만 돈을 벌어왔다. 일반적인 삶, 도덕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런 그녀에게 내외적 요인들의 합의로 55번째 생일에 동부의원이 문을 닫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시기에 그녀는 살아있는 아기를 받아보고 싶은 강렬한 소망이 생긴다.그녀는 왜 살아있는 아기를 받고 싶을까. 나는 이 소망이 생명에의 사랑을 표어로 내건 ‘인간 본래의 인간미로의 회귀’라고 생각한다. 살아있는 아기를 받음은 그 동안 자행했던 태아살인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보다 인간적인 성질의 것이다. 즉, 화자는 자신의 역할 중 가장 대표되는 산부인과 의사라는 직업을 통해 자신의 인간미를 회복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소망은 마지막 날 받은 미숙아에 대한 열정으로 정점에 달하게 된다.이 인간미 회복에 대한 열망은 애초에 화자 스스로가 갖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말했던 우단의자가 이를 대표한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인 일말의 양심. 이 양심을 무의식적으로 지탱해주던 우단의자는 아버지의 말씀을 안고서 어울리지 않게 그 자리에 온전히 있어왔다. 물역가게집 아줌마가 우단의자에 앉으려하는 것을 애써 막은 것도, 비인간적인 행위를 하려는 그녀와 화자의 또 다른 넋을 같이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아닌 엄마에게- 엄마라는 단어, 그 소중함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엄마.사람들은 말을 배우고, 말로써 소통하고, 말로써 교감한다. 그 말이 어떤 단어인지는 전혀 관계없이, 사람들은 말을 한다. 그리고 세상에 태어난 우리가 가장 먼저 내뱉은 말, 최초의 단어는 바로 ‘엄마’다.이 책의 주인공, ‘엄마’는 박소녀 씨다. 피에타 상과 장미 묵주의 주인공 박소녀 씨. 그녀를 소설의 인물로 보기에는, 그녀가 시사하는 바가 너무 크다. 『엄마를 부탁해』는 어떤 다른 가족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가족의 이야기다. 세상 모든 자식들의 어머니, 그녀가 바로 박소녀 씨다.‘당연한 일을 왜 그제야 깨달았는지. 너에게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였다. … 너는 처음부터 엄마를 엄마로만 여겼다.’ -p.36이 땅의 아버지들이 늘 아쉬워하면서도, 차마 자식들에게 언급할 수 없는 속내가 있다. 자식들은, 그 자식의 성별이 남자건 여자건 간에, 무슨 일이든 엄마를 먼저 찾는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요?’라는 물음에서, 가장 많은 응답이 무엇일지 예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성장 환경과 주변 사람들로 인해 개인차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엄마는 늘 최우선순위에 올라있는 우리의 수호신이다. 우리에게 온몸으로 사랑을 베풀고, 우리를 위해 기꺼이 거친 세상의 바람막이가 되어주는 자다. 그렇게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떨리는 울림을 온전히 독차지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욕심쟁이다.‘너와 눈이 엄마와 마주치자 엄마가 머리의 수건을 벗어 흔들며 환하게 웃었다. 엄마의 유일한 패물인 왼손 중지에 끼여 있던 노란 반지. 중학교 입학금을 낼 때쯤 엄마의 왼손 중지엔 반지가 사라지고 너무 오래 껴 깊이 팬 자국만 남아있었다.’ -p.51엄마를 잃어버림으로써 시작하게 되는 이 소설은 총 다섯 마당. 그 중에 ‘나’라는 호칭, 혹은 단어는 넷째 마당에서야 비로소 그 본래 용도로 사용된다. ‘너’, ‘그’, ‘당신’으로 표현되는 화자들. 그렇다. 작가가 굳이 일반적인 기법으로 소설을 쓰지 않고 이런 피아(彼我)적인 단어를 사용한 이유가 여기 있다. 이 표현들은 소설의 불효자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소설적 장치였던 것이다. 아랫마을 철수네 엄마도 윗마을 영희네 엄마도 아닌 바로 우리 엄마의 이야기라는 것이다.‘엄마는 부엌이었고, 부엌은 엄마였다. 엄마가 과연 부엌을 좋아했을까하는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p.68남편이 새 여자를 데려와, 버림받고 쫓겨난 박소녀 씨. 그러나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절망하기보다는, 자식을 위해, 가족을 위해 다시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이 결심은 첫째가 혹은 누군가 부추겼다기보다는 그녀 스스로가 부여한 사명감에 근거한 것이다. 그녀는 새 여자를 내쫓고 버젓이 남편을 마주한다. 돌아온 남편에게도 군말 없이 새 저녁상을 내어주는 모습은 억울하기도 하지만, 눈시울이 붉어지는 애틋함이 묻어난다. 세상의 엄마들은 어떻게, 대체 어떻게 이런 삶을 견디어냈을까. 끊임없이 구수한, 그리고 그리운 냄새를 풍기는 옛 추억들. 눈시울이 촉촉해진다. 엄마는 참 가엾다. 그녀들은 모진 삶을 살아오면서 그토록 많은 것을 내어준다.“니가 그 집에 있는디 내가 왜 나와……. 내가 그 생각을 어째 못했으까. 니가 거기 있는디.”“언능 업혀라, 집에 가자…….” -p.105굳이 누구를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요즈음의 엄마들은 옛날의 엄마들과는 참 다르다. 그녀들은 자기 삶을 알며, 주체성을 가지고 새로운 ‘엄마’를 만들어 나간다. 그녀들은 더 이상 우매하지도, 주눅들어있지도 않다. 이전의 엄마들이 해왔던 ‘엄마 역(役)’과는 분명 다르다. 요즘의 엄마들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터이다. 어쩌면 이전의 엄마들은, 알 수 없는 외부의 압력과 어렸을 적부터 키워진 내면의 목소리로부터 끊임없는 희생을 강요받았던 셈이기도 하다. 그랬던 그녀들이었기에 그들의 ‘엄마’를 자기 딸이 답습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약사를 꿈꿨던 딸이 세 자식을 낳고 평범한 주부가 된 모습에 슬퍼하는 박소녀 씨가 공감 가는 이유도 그 때문일 터이다.‘나는 내 아이들에게 엄마가 내게 해준 것처럼 할 수 있나. 한 가지는 알아. 나는 엄마같이 못해.’ -p.261가족들도 모르는 박소녀 씨의 이야기가 넷째 마당에서 들려온다. 그녀도 어린 시절이 있었고, 사랑하는 엄마와, 연정을 품었던 남정네가 있었다. 하지만 작품 전반에서 그녀의 과거를 묻는 사람은 없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박소녀 씨의 병과, 그녀의 트라우마를 알고 있었던 사람도 없다. 박소녀 씨는 철저히 가족에게 관심을 가졌지만, 가족들은 철저히 관심 갖지 않았다. 남편과 같이 걷는 것이 소원이라는 그녀는 그렇게 소소한 관심을 원했던 것인데. 그렇게 박소녀 씨는 외면 받은 것이다.우리는 왜 그렇게 엄마에게 소홀했을까. 그녀 엄마라는 존재는 그저 엄마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로 끝없는 희생을 강요받았을까. 자발적인 희생이었다손 치더라도 어떻게 해낼 수 있었을까. 그네도 자기 이름이 있었는데. 자기 꿈과, 사랑과, 추억과, 그네 엄마의 엄마도 있었는데 말이다.‘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 -p.254
우리가 아는 미국은 없다- 지금 미국을 다시 읽어야 할 이유 52 -1. 도서 선정 이유 및 동기이 책은 사실 사회학자의 입장에서 정리한 책이다. 때문에 경제학과 분명한 연결고리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나라의 경제와 그 경제의 사회·문화는 절대 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또한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바는 당장 눈앞의 가시적인 경제지표를 넘어 그 이면의 사회 시스템적인 부분은 엿볼 수 있는 바가 크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상당하다고 생각한다.우리나라는 그동안, 적어도 지난 2000년까지는 미국을 롤모델로서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독일과 일본 등 많은 후발 선진국 형 모델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미국을 그 최종 모델로 삼아 글로벌화가 아닌 미국화를 외치며 성장해왔다. 미국의 자유로움을 찬사하고, 미국의 인권 보호를 부르짖고, 미국의 민주주의를 이상향으로 생각했다. 이런 문화에서 뿐만 아니라 산업과 산업 체제, 그리고 교육과 언론, 법체제 등 모든 부분에 대해서 미국을 이데아로 여기고 배우자는 자세로 임해왔다.하지만 이 책에서는 글로벌 경제위기를 넘기고 난 후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한 미국에 대해서 ‘예견’이 아닌 이미 닥친 ‘현실’로서의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아는 미국은 없다.한미 FTA 비준이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되고, 일본의 TPP 참가와 더불어 국제 무역이 완전한 자유 무역으로 나아가고 있는 가운데, 미국에 대한 올바른 접근과 그 리스크 관리라는 측면에서 이 책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된다. 특히, 이 책이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검토해볼 만한 비관론이라는 점에서 리스크 관리라는 본 강의와 연계성이 있다고 생각한다.2. 간략한 저자의 소개김광기 (경북대학교 일반사회교육과 교수)성균관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보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경북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학술 저작의 ㄸ닥딱함과 밋밋함에 염증을 갖고 다르게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애쓰는 중견 사회학자이다. 숫자와 면을 분석, 큰 틀을 만들어 나간다. 1부에서는 그동안의 미국에 대한 긍정적 인식들이 사회 여러 면에서 무너지고 있다는 점을 들어, 더 이상 아메리칸 드림으로 가득 찼던 미국은 사라졌음을 설파한다. 잘 갖추어진 사회 시스템 체계와 기회 균등의 보장, 그리고 어느 나라보다도 자유를 부르짖는 나라로서 미국의 위상은 곧바로 외연적인 아름다움, 체계화로 나타났다. 두터운 중산층과 이들의 정원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교외, 그리고 전국 각지로 연결되는 자랑스러운 프리웨이까지 모두, 마치 인류 국가의 종착역으로 보이는 미국의 성공을 상징하는 듯 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이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중산층의 붕괴와 실업률의 증가, 주정부와 연방정부의 위기, 소비왕국 미국이 지금까지 누려왔던 영화가 모든 것의 원인으로 내려앉게 되는 부채 문화까지, 우리가 아는 미국은 없다.2부에서는 좀 더 사회학적 접근법으로 미국의 위기를 냉철하게 분석한다. 미국 사회는 더 이상 자유와 인권이 보장받지 못한다.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 아니 그 어느 나라보다도 자유와 인권이 핍박받는 나라라 할 수 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오늘날까지도 우리 언론은 미국을 자유와 인권의 나라, 상식과 윤리가 통하는 나라로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철저히 미국의 언론이 보도하는 바와 같이, 미 정부의 언론 플레이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논의를 종합해 보면 미국의 정계는 이미 썩을 대로 썩었다는 것으로 압축된다.1장부터 훑어보자면, 먼저 미국을 방문했을 때 가장 크게 보이는 외연적인 변화, 또는 ‘퇴보’는 미국의 프리웨이다. 값비싼 아스팔트가 우리나라의 몇 십 배에 달하는 미국 온 전역을 뒤덮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세계 최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의 면모를 엿볼 수 있었던 과거. 그러나 지금 그 자랑스러웠던 미국의 아스팔트 프리웨이는 더 이상 없다. 이전의 아스팔트는 곳곳이 무너져 군데군데 위험한 구덩이가 있지만, 주정부는 이를 고칠 돈이 없어,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 이 상태가 지속되자 이나 그와 동시에 미국의 우수한 교육제도와 사회체제를 본받자고 앞 다투어 보도한다. 과연? 진실은 미국의 교육제도와 이들의 사회로의 진출, 즉 취직이 어려워지는 현 미국 경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영미권 대학생들의 한국으로의 유학/취업이다.LA 타임스에서 한 UCLA 법학전문대학원생을 인터뷰했다. UCLA는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미 서부권의 명문대학이고, 그것도 대학원생이라면 미국에서도 충분히 고급인력으로 분류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인터뷰이는 아프리카로 인턴을 떠났다. 그것도 무급 인력으로. 향후 취업을 위한 스펙으로서 이 고급인력이 아프리카로 무급 인턴을 간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는가.미국의 대학가에서는 지금 ‘한국서 스펙 쌓자’ 붐이 일고 있다. 미국 노동시장은 꾸준히 악화일로를 걸어왔고, 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이미 기성세대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로 앞서 말한 노숙자의 증가와 맥을 같이 한다. 미국의 중산층은 무너지고 있다.이런 일반인들에게 보이는 미국의 쇠퇴는 여기까지로 접어두고, 정부의 관점에서 바라보자. 일단 주정부의 재정상황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 보인다. 주 정부의 돌려막기 재정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지방채는 더 이상 안전한 채권이라 보기 힘들다. 지난 2009년 캘리포니아 교도관 연합은 주지사에게 보내는 항의 광고를 LA타임지에 전면 광고로 실었다. 이유는 즉, 캘리포니아 주가 재정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엄청난 재정을 붇고 있었던 교도소 수감자들을 줄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웃기지 않은가. 범죄자는 계속 늘어나는데, 재소자는 줄기 시작했다. 물론 미국의 교도소는 우리나라의 교도소보다 그 시설 상황이 훨씬 좋고 훨씬 많은 교화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재소자 수가 줄기 시작한 것은 분명 이례적이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 뿐이 아니다. 주정부의 건물들은 이미 다 팔아치워 임대료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공교육은 이미 무너졌다. 교육의 질이 문제도 되겠서 선택하기 쉽지 않다. 극단적인 선택까지 생각해보자면 디폴트를 선언하고 모라토리엄을 공표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안정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방법은 성장판을 키우는 것, 즉 세수 대상을 늘리고 해외 자본을 유치하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어느 선택도 쉽지만은 않다. 일단 미국 경제에서 핑크빛 미래를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논의를 종합해서, 미국의 현 경제의 구조적 특징은 한마디로 가불(假拂) 경제에서 유래했다. 미리 당겨쓰는 소비와 지출 형태.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 소비 형태는, 미국의 중산층을 전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중산층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었던 전제이었지만, 지금은 연쇄적으로 모든 붕괴를 낳을 수 있는 불안한 경제 구조라 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이런 소비 구조가 가능했는가? 이유는 경제가 안정적이어서 구직을 하는데 큰 어려움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수입이 안정적일 것이라는 믿음, 경제가 안정적일 것이라는 믿음이 미국의 가불 경제를 가능케 했다. 하지만 3년 전 서브프라임모기지 사건 이후, 이러한 믿음은 산산조각이 났다.한번 정해진 풍토는 바꾸기 힘들다. 사회 문화 현상은 관성이 있어서 쉽게 바뀌거나 할 수 없다. 미국의 오랜 소비 형태는 아직까지도 진행 중이며, 많은 사람들이 부분적으로 수정, 바꾸려는 시도를 하지만 전체적인 시야를 가지고 접근하지 않는 한 뿌리 깊은 미국의 소비문화는 변하기 어려울 것이다.2부에서는 이런 미국의 미시적·거시적 경제 위기를 분석하는 것을 넘어, 미국 시스템적인 문제를 짚는다. 6장의 첫 번째 챕터의 제목처럼, ‘쇠퇴는 경제만이 아니다.’20세기 한국에서 미제란 곧 신뢰의 상징이었다. 미제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만든 가장 값비싼 상품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혹은 이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세계에서 가장 믿음이 가는 상품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21세기 미제는 좀 더 신중하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 쉬운 상품으로 변모했다. 저자는 이를 ‘신뢰의 증발’이라 명명한다. 자, 사립학교는 우리나라의 사립학교와는 차원이 다르다. 일단 등록금부터 갖가지 학비까지 여간 비싼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수많은 사립학교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이들 학교가 소위 명문대, 나아가 월가 입성 등으로 대표되는 성공적인 취업의 첫 단추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립학교들이니 명문 사립고교에 입학하는 것은 마치 대학교 입시처럼 경쟁이 치열하다. 그런데 이들 명문고 입학이 청탁으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나라의 경우 난리가 났음이 분명하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빗대면, 명문 사립대에 단순히 청탁만으로(물론 뒷돈이 오갔음이 분명하지만) 입학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이런 현상은 사립고교에만 있지 않다. 실제로 일리노이 주 최고 명문(한국으로 치면 서울대)대학인 일리노이대학교 어바나 샴페인 캠퍼스에 무려 800명이 부정 입학 의혹을 치렀다. 물론 일리노이 주 유력 인사들의 자녀들이었다. 그럼 이 의혹은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반응은 없었다. 유야무야 사라진 것이다.그렇다면 학교의 성적은? 최근 2년간 미국의 뉴욕대, 조지타운대, 골든게이트대, 툴레인대 등 적어도 10개 이상의 로스쿨이 최근 2년간 후한 점수를 주는 것으로 학교 성적 부여 체계를 변경했고, LA의 로욜라 로스쿨은 아예 모든 학생들에게 0.333점을 덧붙여 학점 세탁을 시행했다. 이런 학점은 오히려 고등학교에서 전국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학점 인플레는 우리 한국에서만의 문제가 아니었던 셈이다.어떤 현상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미국은 더 이상 기회 균등의 사회가 아니다. 철저히 능력위주 사회에서 학벌중심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 더 이상 스펙이 필요 없이 능력을 보여주고 그 능력을 평가받는 사회가 아니다. 나눠먹을 파이 자체가 작아져 내 것 챙기기에 급급한 상황이 오자, 이런저런 차별점을 강조하다 못해 드디어 학벌을 강조하는 사회가 온 것이다. 특히 아이비리그와 월가, 이 두 점에서 미국 사회의 변화를 짚을 수 있다.미국은 승자 독점 사회로 나아가고 있고, 이는 갈수록 기득권이 모든 것을 빼앗는 사회로.
2020 Wealth War in Asia- 2020 부의 전쟁 in 아시아 -1. 도서 선정 이유 및 동기미래학 연구소에 다니고 있는 친구가 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이는 친구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별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바로 미래를 이야기하는 모습이었다. 한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할 때도, 그 친구 입에서는 ‘2015년에는…’, ‘2020년에는…’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디서 주워들어왔나 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여길 수도 있었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한두 가지 단편적인 지식이 아니었다. 캐물어 보니 아시아미래인재연구소라는 곳에서 수학하고 있는 학생이었다.이 친구가 소개해준 책이 바로 이 ‘2020 부의 전쟁 in 아시아’다. 미래를 준비하는 청년으로서, 곧 인생에서 중요한 방향성을 결정할 20대로서 필독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며 생일 선물로 건네준 책이다. 감사히 받았지만, 아직까지 학업에, 대외 활동에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읽지 않다가, 이번 추가 보고서를 계기로 읽어보게 되었다.‘미래는 어떻게 될 것이다’라는 이야기는 뉴스, 신문, 잡지 등등 여러 군데에서 떠들어댄다. 하지만 이런 분석은 모두 단편적이고 낮은 확률 모형을 확신해서 오류를 범할 가능성도 있다. 이 책 역시 그러한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시각에서 비교적 좁은 주제를 중심으로 분석했다는 면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변화와 혁신의 패러다임과 헤게모니 축 간의 전쟁 한복판에 놓인 한국에서, 20대로서 반드시 고려하고 살펴야할 미래를 얕게나마 알고자 이 책을 선정했다.2. 간략한 저자의 소개배동철 (아시아미래인재연구소 공동소장)블랙다이아몬드클럽 대표일본 최대 미디어 유통그룹 (주)CCC 최고위 전략기술 고문(주)동서여행사, (주)동서개발, (주)L&S Media 대표이사2007년부터 팍스아시아나 시대를 주도할 리더들의 네트워크인 블랙다이아몬드클럽을 준비해 온 배동철 소장은 특히 아시아 정상급 리더들과 쌓아온 인맥과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외 경영 코칭 및 비즈니스 컨미나, 강의하며 Futures Solution Provider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 유일의 경제경영과 미래학을 접목시킨 정규과정인 휴스턴 대학원 미래학부에서 세계적인 미래학자인 Peter C. Bishop(세계미래전문가협회 창립이사), Christopher Burr Jones(세계미래학회 사무총장 역임), Wendy Schultz(미래전문가협회 회장)들에게 사사 받았다.3. 책의 주요 내용이 책의 내용은 한국의 2020년을 ‘한국판 잃어버린 10년’으로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조중동에서 떠들어대는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일본이 겪었던, 혹은 그 이상의 시련을 한국이 겪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세계 변화, 역사, 현 한국의 산업, 금융, 문화, 시스템의 문제, 그리고 고령화 사회 등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을 통해 분석하면서 최악의 시나리오로서의 외환위기를 언급하며 2020년에 대한 비관적인 관점을 주지한다.다음으로는 아시아의 위기, 즉 전 세계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국이 위치한 아시아의 위기에 대한 생각을 펼쳐놓는다. 다소 투박한 어조로 왜 미국이 아닌가, 그리고 미국이 그대로 몰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 이를 바탕으로 EU와 아시아, 그 중에서도 중국의 미래 변화를 예측하면서, 세계 변화의 흐름을 중심으로 아시아의 위기를 살펴본다. 이는 단순히 산업적인 측면이 아니라 전 사회적인 패러다임의 문제로 접근하며 아시아가 왜 비즈니스 전쟁터가 되는 지를 역설한다.마지막으로 단순히 비관론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미래를 오지 않게 하기 위하여, 혹은 이런 미래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는가. 즉 이 책이 오지 않을 미래를 노래하는 책으로 전락시키기 위한 ‘대안’을 제시한다. 챕터 3의 제목 ‘지속가능한 미래전략을 찾아라.’처럼 한국과 인류의 미래 해법을 단계적으로 제시한다.“한국은 미래의 기회와 위기를 함께 보여 주는 곳이다. 한국이 현재 처한 위치는 역사적인 면에서 아주 대단하고 부유하게 성장할 수 있는 전환점에 있다.”짐 위기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는 미래 전망을 내 놓는다. 저자는 이에 대해 월드스패즘(World-Spasm)이라는 용어를 내놓으며, 이 단어는 모든 면에서 패러다임의 큰 축이 변화하면서 크고 작은 위기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경련적인 세계변화를 일컫는다고 말한다. 즉,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에 대한 강한 확신이다.특히 저자는 ‘한국은 넛크래커에 빠졌다’고 평가한다. 넛크래커란 호두까는 기계를 말하는 것으로 호두를 위아래서 압력을 가해 깨는 것을 한국 산업의 현재 환경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현재 한국 산업의 현실은, 신산업은 선진국에서 미리 선점하여 진입하기 어렵고, 후발주자들은 원가 절감을 통한 가격경쟁력을 바탕으로 무섭게 치고 올라오며 아래에서 압력을 가해오고 있는 위기에 속해있다는 것이다.이미 유명한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의 원인인 기존 산업의 성장 한계, 종신고용 붕괴, 저출산, 고령화, 재정적자 위기, 경제성장률 저하, 부동산 거품 붕괴, 정부의 뒤늦은 정책까지 총 8개의 원인에다가, 한국만의 특수한 2개의 원인, 격심한 사회적 분열과 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자본의 취약성,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남북한의 통일 문제까지 덧붙여, 총 10개의 원인이 한국판 ‘잃어버린 10년’을 가져올 수 있다. 이는 철저히 시스템의 위기라 볼 수 있으며, 한국은 그동안 이머징마켓에서 최적화 된 시스템으로 버텨왔고 앞으로는 선진국형 시스템의 도입이 절실하다는 점을 짚는다.이 중에서도 가장 먼저 짚어야할 2가지 테마로서 저출산과 고령화가 야기한 고령화 사회, 그리고 부채위기로부터 야기되는 부동산 버블 붕괴가 주 논의 대상이다. 고령화 사회는 이미 10년 전부터, 아니 그 훨씬 이전부터 예견되어 왔지만, 한국 사회는 시스템적으로 이를 보완, 대비하지 못했다. 이는 아무리 과거지만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부분으로 프랑스가 고령화 사회를 대비하기 위해 연간 우리나라의 22배가 넘는 예산을 배정해왔다는 점과 대조하여 설명한다. 우리나라의 육아여건은 이미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도 열악위기로부터 출발하여 아시아가 뒤집어쓰는 형국이라 할 수 있다. 저자가 지적하기로 이산화탄소와 지구온난화보다 더 심각한 문제로서의 물 부족 문제를 짚는다. 이는 더 이상 신문과 뉴스에서 떠들어대는 물 부족 문제가 아니라 진정한 재앙, 즉 세계 제 3차 대전까지 이어질 수도 있는 정말 ‘심각한 수준’의 위기라는 것이다. 실제로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지금도 진행 중인 ‘전쟁’이기도 하다. 이 뿐만 아니라 신종 플루에서 보았듯이 신종 바이러스의 위기가 이미 염려할만한 수준까지 대두되었다는 점까지 세계 경제의 월드스패즘 현상을 부추기는 사건은 부지기수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국 경제의 위상이 추락하고 달러의 가치도 폭락하게 되는 ‘달러 몰락 시나리오’를 주장한다. 이 안에서 유의미한 분석은 기축통화의 이전이 아닌 ‘기축통화 없는 세계’로의 진입이다. 미국의 위상은 추락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무너질 수 있는 ‘환경’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미국과 EU의 반격을 예견한다. 세계 경제의 위기를 발생시켰던 나라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이기도 한 미국으로서는 이제 총구를 바깥으로 겨누어 경제적 부담을 세계에 분산시키겠다는 의도이다. 이는 어디로 향하는 가. 바로 아시아, 그 중에서도 중국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이 하다. 더불어 일본과 동남아, 그리고 한국까지 아시아는 세계 경제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놓이게 된다.그럼 대안은 무엇인가? Part 3.에서는 지속가능한 미래전략을 찾는데 초점을 맞춘다. 10가지 원인이 될 수 있는 변수는 이미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 그럼 이 변수들을 어떻게 관리하여 ‘잃어버린 10년’을 막을 수 있을까.저자는 앞에서도 계속 언급해왔듯이, ‘시스템적인 문제’를 해결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 10가지 문제들은 상호 유기적으로 얽혀있으며, 총체적 난국으로 향할 수 있는 길을 걷고 있다. 어느 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달려들었다간 오히려 재앙으로 가는 길을 부추길 수도 있다. 때문에 전체적인 시야를 가지고 접근하면서 동시에 개별적인 문제에 대찰력과 감성, 그리고 관계·집단지성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기술을 가진 인재를 육성하고 나아가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시스템적인 지성, 즉 스마트형 정부가 필요함을 역설한다.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해결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전제는 ‘국민적 공감대’임을 저자는 잊지 않는다. 저자는 한국의 9번째 위험 요소이기도 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면서 ‘희생 나눔’을 토대로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진행해야함을 부르짖으며 책을 마친다.4. 흥미 있는 에피소드P.34 한계에 봉착한 시스템의 위기, P.43 넛크래커에 빠진 기존 산업그동안 우리나라는 고속성장의 관성에 힘입어, 힘이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꾸준히 성장을 해오긴 했다는 오해를 해오고 있음을 알았다. 우리나라의 GDP 순위는 2003년 11위에서 2009년 15위, 1인당 총소득에서는 54위까지 밀려났다는 사실은, 그동안 뉴스로부터 접하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1996년 OECD 가입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2,000달러였는데, 2007년 2만 1,653달러를 기록한 후 2009년 다시 1만 6,000달러 선으로 후퇴하였다. 즉 한국은 1994년 9,457달러로 1만 달러에 근접한 이후 지금까지 16년 동안 2만 달러를 못 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근면성실하지 못한 국민성일리는 없다. 한마디로 ‘2만 달러 시스템의 한계’라 할 수 있다. 위에 언급되었던 10가지 한계를 극복하는 것만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P.114 부동선 버블 붕괴 시나리오부동산 버블이야 수많은 언론 매체가 떠들어대고 있으니 이미 익숙한 주제지만, 중요한 것은 ‘언제 터지는 가’가 아니라 ‘어떻게 충격을 완화하는 가’이다. 부동산 버블이 곧 올 것이라는 예언은 하이먼 민스키의 “버블이 붕괴할 때는, 통화량이 감소하지 않고 통화량 증가율만 감소해도 버블의 붕괴가 시작될 수 있다.”고 한 말을 토대로 설명할 수 있다. 정부가 신용창조 속도를 높여서 부동산 규제를 완화하여 버블 붕괴를 막으려는 조치는 결국 일시적족
네 안의 휴머니즘-옐레나와 흐루쇼프의 의미 해석으로 본 숲귀신의 메시지-안톤 체홉의 숨겨진 명작 ‘숲귀신’ 관람 후기한국에서 안톤 체홉은 ‘숲귀신’보다 ‘갈매기’, ‘바냐아저씨’로 더 유명한 극작가다. 안톤 체홉의 4대 희곡이라 함은 ‘갈매기’, ‘벚꽃동산’, ‘세자매’, ‘바냐아저씨’를 일컫는데, 그 중 ‘바냐아저씨’가 ‘숲귀신’과 그 맥락 및 등장인물이 비슷하다. 사실 ‘바냐아저씨’는 안톤 체홉이 ‘숲귀신’을 각색해서 다시 무대에 올린 작품인데, ‘숲귀신’은 별 호응을 얻지 못하고 초연에 끝난 비운의 작품인 반면 ‘바냐아저씨’는 큰 호응과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등장인물과 줄거리가 상당히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이 이런 상반된 평가를 받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숲귀신이라는 제목은 극에서 의사이자 숲에서 기거하는 괴짜 흐루쇼프의 별명에서 나왔다. 하지만 사실 극의 중심에 서있는 인물은 숲귀신 흐루쇼프가 아니다. 자의든 타의든 무대 한가운데서 모든 사건을 일으키고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옐레나다. 옐레나는 세례브라꼬프 교수의 아내로 우아하고 세련된 젊은 여성이다. 옐레나는 언제나 예의바르고 상냥해서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지만, 이런 매력이 오히려 그녀를 구설수에 오르게 한다. 남편 세례브라꼬프 교수는 자신의 나이와 아름다운 둘째 아내 옐레나의 매력과의 괴리를 슬퍼한다. 전부인의 오빠인 이고르는 옐레나와 친족관계임에도 옐레나를 사모하여 끊임없이 그녀에게 구애한다. 게다가 마을의 이름난 지주 이반의 아들 효도르도 그녀를 희롱하며 가만히 두지 않는다. 마을의 주민들은 어렴풋이 이런 관계들을 눈치 채고 있어서, 옐레나와 주변인들을 그들의 이야깃거리로 삼는다.극을 보는 관객들은 옐레나의 고결함과 아름다움에 반하지만, 그녀를 욕되게 하는 주변 남자들과 이런 그녀를 몰라보는 마을 주민들을 한심하게 여긴다. 남자들은 옐레나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늘 그녀를 괴롭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그녀를 사랑한다는 남자들이다. 그럼에도 차마 이들에게 모질게 대하지 못하는 옐레나는 이들의 애타는 마음을 더 부채질할 뿐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울화통이 터지게 하는 교수의 짜증 섞인 투정을 옐레나는 꾸역꾸역 받아낸다. 효도르가 도를 넘어선 농을 던져도 옐레나는 담담히 받아넘기며 그가 비집고 들어올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다. 이고르의 경우는 조금 다른데, 옐레나는 그의 진심어린 마음만은 인정하고 다독여준다. 하지만 그 역시도 결국은 옐레나의 곧은 심정을 흩뜨리지 못한다.잠깐 극의 줄거리를 더듬어보면, 교수 내외 주변 사람들이 옐레나를 중심으로 갖은 갈등과 고뇌를 겪는다. 그러다 교수가 가문의 영지인 숲을 팔아버리자고 제안하자 그동안 영지를 가꾸어오던 이고르가 격분하여 한바탕 소란을 일으키고는 자살한다. 지쳐버린 옐레나는 교수를 떠나 숲 속 쟈진의 집에서 거주하다가 다시 사람들과 화해하고 그들과 새 삶을 출발한다.그럼 이 줄거리에 숲귀신은 어디에 있는가. 물론 숲귀신은 극 중 내내 등장하여 새로운 화제를 만들고, 교수와 전처 사이에서 태어난 쏘냐와 맺어지는 등 중요 인물로서 등장한다. 그러나 그는 결코 옐레나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의 역할은 고작 옐레나 다음이거나, 혹은 그저 그런 다른 인물과 같은 위치에 서있는 것만 같다. 그럼 희곡 ‘숲귀신’의 제목은 그저 하나의 소재로부터 나온 단어일 뿐일까.그리스 신화에서 숲의 신인 판(Pan)은 ‘모든’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어느 곳에서나 나타나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거나 무섭게 하는 등 공포를 주는 ‘판’이었기에 공황, 혼란을 뜻하는 ‘panic’의 어원이기도 하다. 이는 단순히 재밌는 신화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내포하고 있는 이야기는 분명 어떤 심오함을 갖고 있다. 그리스인들이 그들의 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들은 그것으로써 현실의 바탕에 깔려 있는 심오함을 의미하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실재는 신적인 것 안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말하려 했다. 즉 숲의 신 ‘판’은 그 스스로 숲을 대변하며, 숲의 가장 핵심적인 성격을 품고 있다는 말이다.돌아와서, 러시아의 숲귀신 레쉬(Leshi)도 단순한 이야깃거리가 아니다. 레쉬도 러시아인들이 느끼는 숲의 이미지를 대변하고 있다. 레쉬는 쉽게 화를 내고 변덕스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다. 레쉬는 이웃 사람들의 땅을 침범하지 않지만 자신의 왕국에 대해서만큼은 추호의 양보도 없다. 이런 레쉬의 성격은 희곡 ‘숲귀신’에도 잘 나타난다.‘숲귀신’의 숲귀신 의사 흐루쇼프는 거칠고 변덕스러운 성격을 지녔다. 그는 쏘냐를 사랑하면서 그녀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자리가 마련되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덜컥 사랑을 고백하고 만다. 물론 처음에는 쏘냐에게 거절당했지만, 후에 다시 쏘냐로부터 승낙 혹은 프로포즈를 받고 사랑을 시작한다. 레쉬와 흐루쇼프의 닮은 것은 성격만이 아니다. 흐루쇼프는 그가 기거하는 숲을 사랑하고 가꾸며 늘 나무묘목을 들고 다닌다. 그는 숲을 파괴하는 일을 멈추라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다니며 숲의 진정한 대변자임을 자청한다. 관객은 별 어려움 없이 흐루쇼프와 레쉬를 동일시할 수 있다.그러나 숲귀신 흐루쇼프의 진정한 상징은 숲의 대변인이 아니다. 흐루쇼프는 숲을 제일 먼저 내세우지만, 그가 부르짖는 것은 ‘휴머니즘의 회복’이다. 숲귀신 레쉬는 숲의 재건을 부르짖지만, 인간 숲귀신 흐루쇼프는 인간성의 재건을 부르짖는다. 극 중 흐루쇼프는 쏘냐에게 고백하는 자리에서 ‘우리 내면의 휴머니즘을 찾아야 해!’라고 강하게 소리친다. 물론 극의 전개 측면에서 볼 때 앞뒤 맥락과는 다소 떨어진 뜬금없는 대사지만, 흐루쇼프의 진정한 상징이 숨어있다고 볼 수 있다. 또 극의 초반 흐루쇼프는 이고르에게 숲의 보존 혹은 재건을 통해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심적 여유를 역설하고, 나아가 그로부터 잊혀져왔던 인간성을 찾자고 부르짖는다. 이는 지금, 현재는 인간성이 부재해있음을 반증하는 대사이기도 하다.이런 측면에서 옐레나와 그녀의 주변인들의 ‘관계’ 자체는 인간성의 부재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교수의 자격지심은 옐레나와 교수 간의 그들의 실질적이고 진실한 부부관계를 왜곡하고 있다. 옐레나를 바로보지 못하고 늘 그가 가진 세계에 갖혀 그녀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효도르의 일방적인 구애도 그의 삐뚤어진 가치관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또한 이고르의 금지된 사랑은 그나마 그 진정성만은 받아들어질 수는 있지만, 결국 이 역시 그의 책임과 의무를 저버린 채 그 자신만을 위해 기존의 가치관이나 신념을 무너뜨리는 이기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즉, 옐레나의 주변 사람들은 그들의 인간성을 모조리 훼손시키고 있으며 그 본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흐루쇼프의 역할은 여기에 있다. 비록 그가 옐레나를 오해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흐루쇼프는 그가 설자리를 잘 알고 있었으며, 어떤 비난이나 유혹에도 흐트러지지 않으며, 고귀한 이상을 놓지 않는다. 그는 자칫 위험할 수도 있던 옐레나의 우정 고백에도 그 자신의 신념에 따라 그녀를 비난한다. 그는 여전히 숲을 위시한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관객들은 극의 진행 도중 등장하는 흐루쇼프의 역할과 그 뜻을 저도 모르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