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중국사 4권, 中 명?청시대의 국가권력과 신사, 오금성明?淸時代의 國家權力과 紳士Ⅰ. 서언- 신사 : 명대(明代) 중엽 이후부터 청말(淸末)에 이르는 시기에 절대적인 국가의 기능을 가 능케 한 계층- 신사의 다양한 역할과 존재형태는 명?청시대의 통치형태와 사회구조를 포괄적으로 파악하 는데 중요한 지표-즉, 신사란? 관직경력자(체직?퇴직관료, 진사 포함)와 미입사학위소지자(거인?공생?감생?생원 등 관위지망자)를 포함하는, 과거제, 연납제, 학교제 등을 매개로 하여 나타난 정치?사회적 지배층을 총칭하는 개념Ⅱ. 紳士層의 形成1. 학위소지자의 출현(學位所持者의 出現)1) 생원(生員)① 동시(부?주?현학의 입학시험)에 합격한 학생 : 국자감 진학, 향시에 응시 가능② 생원만이 향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학교[養士機關]가 과거체계 내에 포섭③ 학교체계(생원-감생-관료)와 과거체계(생원-거인-진사-관료, 혹은 생원-거인-관료)의 제1단계에 위치하는 학위소지자④ 요역우면특권(?役優免特權) : 생원의 경제적 이익?사회적 지위의 상승효과, 종신(終身) 토록 보장 → 명초부터 생원은 평민층과 다른 특권신분에 포함, 사대부의 일원으로 인정2) 감생(監生)① 명초에는 대부분 생원으로부터 선발된 학위소지자, 그 자격만 가지고도 입사가 가능② 홍무 연간부터 요역우면 등 생원과 유사한 특권을 국가로부터 부여받음, 종신 보장됨→ 사상적?실제적인 면에서 사대부계층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 가능성 가짐3) 거인(擧人)① 송대 : 성시[=진사시]에 단 1회 응시할 자격만을 가지는 한시적(限時的)인 자격② 명초부터 그 자격만으로도 입사 가능해짐, 국자감에서의 학업 허가됨③ 감생과 같은 특권을 국가로부터 부여받음, 그 지위도 종신 보장됨→ 명대 이후 사회적 특권층으로서 사대부계층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었음4) 과거제와 학교제가 가지는 사회적 기능은 명초부터 전시대와는 다르게 변화되었음⇒ 명초에 이미 실질적으로 존재하고 있던 관직경력자와 학위소지자는 중기 이후에 ‘신사(紳士)’로 불리게의 상대적 감소와 감생 수의 배증(倍增)으로 인하여, 명 중기 이후에는 감생의 자격만 가지고는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입사가 거의 불가능하게 되고 말았음→ 현실적으로 생원과 감생의 구분이 희박해져감⑥ 거인도 감생층이 사환(仕宦)의 도(途)에서 경험한 것과 유사한 문제를 경험 ex) 15세기 후반부터 4000~5000명 정도의 거인이 입사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향촌에 정착⑦ 생원?감생?거인 등 미입사 학위층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사회에 옹체(壅滯)되어 가던 15세기 중엽을 고비로 하여 관인을 배출한 가문이 계속해서 관인을 배출하는 경향이 점차 굳어져 감 ⇒ 학위층의 계층상승은 더욱더 어려워짐을 의미!⑧ 명초로부터 과거제와 학교제가 결합되어 제도적?실질적으로 존재하고 있던 광범위한 학 위소지자들은 중기 이후에 점차로 수?양적으로 옹체되어 가면서 하나의 독자적인 사회 계층으로 고정되어 감3. 신사층의 성립(紳士層의 成立)1) 신사층의 형성① 명조 국가권력이 학위층에게 9품관에 준하는 특권을 부여하면서 그들을 통치체제 속으 로 끌어들이려 한 것은, 그들을 통하여 유교이념(儒敎理念)과 통치질서를 유지시키고 관료보급원을 확보하기 위함② 학위층으로서는 사적으로는 ‘보신가’적 행동, 공적으로는 사대부로서의 자아의식과 공의 식을 소유 → 일면에서는 국가의 기대에 부응하는 행동도 전개, 송대 이후의 사대부의 이념적 전통을 학위층이 계승)2) 학위소지자들의 집단행동① 명 중기 이래, 개인의 이해관계 혹은 공통의 이해관계 때문에 생원 등 광범위한 학위소 지자들이 집단행동을 일으킴) → 때로는 ‘사인공의(士人公儀)’로 지칭되기도 함② 명 중기 이후 미입사 학위층은 사대부로서의 자아의식 혹은 공통의 이해관계에서 발로 된 계층 보호의지 등, 그들 사이에 광범한 동류의식(同類意識)이 존재→ 당시에 국가권력, 사회에서는 동류의식에 기초를 두고 활동하는 학위층을 ‘사(士)’라 고 하는 하나의 ‘독립된 사회계층’으로 인식3) 학위층간의 동류의식 형성 계기① 학위층은 유교적 교양과 이념을 층과 학 위층이 교분을 쌓음, 경사나 대도시에서도 동향의 신사간에는 선후배 혹은 사제관계로 협조가 이루어짐㉥ 공적 사적으로 이해가 합치될 때, 관직경력자와 학위층간에는 쉽게 공통점을 찾아 협 동할 수 있었음⑥ ‘신’과 ‘사’가 ‘신사’로 연칭될 수 있었던 배경㉠ 모두 제도에 의해서 우면 등 9품관에 준하는 특권과 종신자격을 보장받은 특권신분㉡ 학교제와 과거제가 결합㉢ 이갑제질서가 점차 해체되어가자 미입사 학위층이 관직경력자층과 함께 향촌의 질서유 지에 점차 지도적 역할을 증진시켜 나감㉣ 국가권력과 일반 평민, 양측 모두로부터 이들 두 계층이 하나의 계층으로 인식됨⑦ 신사가 지방, 중앙정치에 등장하게 된 것은 그들이 하나의 사회계층으로서 자각을 가지 고 계층적으로 확립된 면을 보여주는 것⑧ 동림운동?복사운동?반세감?반위충현운동 등은 내각권?환관권의 극단적인 강화로 인한 통 치권력의 자의적 행사에 대하여 신사층이 공의 내지 사대부적 사명감에서 제약을 가할 것을 시도한 운동⑨ 세?역제도의 개혁, 서원의 폐쇄, 결당금지, 당사운동의 탄압 등 명조 권력이 취한 일련 의 정책은 당시 완전한 사회계층으로 형성되어 있던 신사층에 대한 대응책이었음Ⅲ. 明代의 國家權力과 紳士1. 원말·명초 동난기의 지배층과 주원장집단(元末·明初 動亂期의 支配層과 朱元璋集團)① 1330년대 말부터 중국의 각지역에서 농민의 봉기가 접종하였으나 산발적?고립적?유구성 을 면치 못함 → 1350년대부터 경제적 기반을 가진 세력도 반란에 참가하기 시작하여, 대집단의 봉기도 나타남 ex) 홍건군이 중심세력② 토호나 지주는 의병?민병을 조직하여 자위(自衛)할 수 밖에 없었음③ 지주자위세력들은 일방으로는 자위를 계속, 한편으로는 자기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강력한 권력을 갈구④ 주원장집단㉠ 비밀결사적 폐쇄성과 농민착취 극복㉡ 사대부나 지주세력 포섭, 유교주의 표방, 국가건설을 지향하는 제도 정비㉢ 권농정책을 펴서 농민의 안정을 도모⇒ 주원장은 주변의 선발군웅세력 사이에서 생존하고 발전하기 위해서 사회적인 변화 현저해짐㉠ 대외적으로는 북변과 동남해안이 불안해짐㉡ 대내적으로는 중앙과 지방의 정치질서가 해이해지기 시작③ 농업과 수공업 등 각 분야에서 생산이 증대되어 감, 지역간에 상품생산의 분업 진전각 지역의 상품은 객상에 의해서 전국적인 규모로 형성된 유통망에 의하여 교류됨⇒ 상품?화폐 경제가 농촌 깊숙이 침투, 세?역은 점차 증가, 은납화되어감④ 소수의 신사나 세호가는 농토를 새로 개간하거나 기간지를 겸병하는 등의 방법으로 광 대한 토지를 집적하면서도, 국가가 그들에게 부여한 요역우면특권 등 가능한 모든 수단 을 동원하여 세?역을 탈면함→ 탈면된 부분은 다른 이갑호에게 전가됨⑤ 토지편중과 세?역의 번중, 불균현상에 더하여 각종 재해, 질병, 가내대사(家內大事) 등이 반발, 이갑호, 이장, 양장호 등 대지주마저 몰락하는 사례 증가→ 이장, 이노인을 중심으로 하여 유지되어 오던 향촌의 질서와 재생산유지기능 점점 약화⑥ 농촌의 게층분화 가속화 : 산동?하남?호광?사천 등 일부지방을 제외하면, 거의 전국적으 로 황책에 등재된 호구수가 감소되고 전국적으로 광범한 인구이동 진행, 인구 재배치 선진경제지역→낙후지역, 농촌→금산구역, 농촌→도시·수공업지역으로 인구 재배치⑦ 인구의 대류현상 : 객민은 정착하고 토착인은 도리어 몰락·유산(流散)하는 현상 발생⑧ 지역사회 질서 파괴, 지역에 따라서는 민란이 빈발하는 곳도 있었음⇒ 명 중기 이후에 진행된 인구이동은 순기능과 역기능의 양면적인 결과를 동시에 지님, 이 갑제질서의 해체현상⑨ 명 중기 이후 농민의 세·역부담이 가중되고 요역의 과파와 우면의 기준이 전토를 중시 하게 되자 이갑정역의 일부마저 우면대상이 되었으므로, 신사와 비특권 이갑호간의 부 담의 격차는 더욱 커짐 → 신사의 사회적 지위는 상승- 신사는 그들이 가진 정치·사회적 영향력에 따라 남면(규정 이상의 면제) 가능- 비특권 지주들은 과중한 세·역부담을 회피위해 연납 등 가능한 수단 동원하여 스스로 학위층 이상의 신사가 되려함, 가능치 않을 경우 궤기(詭寄), 담당② 경제적 역할 : 신사의 공의식과 사적인 이해관계가 혼재되어 있는 역할수리용익 장악, 염밀매나 해상밀무역에 참여, 수공업 경영에 간여하는 등 시장이나 상품유통 구조를 지배③ 문화적 역할 : 향촌에서 개인의 영향력 외에도 향약·서원 등의 강학, 일용유서·선서류의 간행을 통하여 향촌의 교화를 담당, 그들 중심의 향촌질서를 유지하려 함, 향론을 주도, 지방관의 유임, 방축운동, 증현운동, 세·역감면운동, 각 종 수리시설의 수축, 수리관행의 개혁운동, 진·양·도로의 수축, 각종 규 제 등 광범한 문제에 대하여 향촌의 여론 주도④ 명 중기 이후에 사회가 훨씬 다양화·복잡화되어 정치질서는 약회되어 감, 관인의 수는 고정되어 있었으며, 이갑제의 질서, 재생산유지기능의 약화, 이에 명조는 약하되어가는 이갑체제를 보완하는 수단으로서 향촌지배기능이 일부를 신사에게 위임, 그 진행과정을 통제함으로써 통지질서를 지속시킴⑤ 신사는 공적인 역할을 자발적으로, 때로는 지방관 혹은 향촌민의 요청에 응해서 수행⑥ 향촌의 이해가 신사의 공의식 혹은 사적 이해와 합치되는 경우에는, 신사는 평민까지 포함하는 광범한 여론을 지배∵ 명 중기 이후 이갑제가 해체되어 가던 시기에, 신사가 이갑제기능의 일부를 대행함으로써 왕조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데 순기능을 함, 동시에 미입사 학위층의 수가 급증하였고 그들이 또한 사리추구 활동을 전개하였으므로, 그 증가된 수의 학위층이 향유하는 특권과 영향력만큼이 농민의 부담과 불안으로 작용, 사회분해를 조장하기도 함⇒ 신사의 존재는 명 중기 이래의 중국 사회에 순기능과 역기능을 동시에 가짐Ⅳ. 청대의 국가권력과 신사(淸代의 國家權力과 紳士)1. 명말·청초 동난기의 신사와 청군(明末·淸初 動亂期의 紳士와 淸軍)1) 17세기 명조의 상황① 중앙에서는 당파싸움과 행정의 부조리로 통치기능이 현저하게 약화됨② 지방에서는 신사의 영향력, 사리추구가 극도에 달하여 중앙정부 통제의 범위에 벗어남③ 경제적으로는 ‘만력삼대정’을 치른 후부터 재정적자가 격증 → 궁중에서는 재정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