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황금기, 그리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 HYPERLINK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a/af/Elizabeth_I_of_England_-_coronation_portrait.jpg" 2008-05-17제 1 장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왕첫 번째두 번째세 번째네 번째다섯 번째여섯 번째이름헨리 8세카탈리나 데아라곤앤 불린제인 시모어안나 폰 클레페캐더린 하워드캐더린 파자녀메리 1세엘리자베스1세에드워드 6세표 1)엘리자베스 1세는 1533년 HYPERLINK "http://ko.wikipedia.org/wiki/9%EC%9B%94_7%EC%9D%BC" t "_blank" o "9월 7일"9월 7일 HYPERLINK "http://ko.wikipedia.org/wiki/%EA%B7%B8%EB%A6%AC%EB%8B%88%EC%B9%98" t "_blank" o "그리니치"그리니치에서 ‘HYPERLINK "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cs=bz&p=%C7%EE%B8%AE+8%BC%BC" t "_blank"헨리 8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앤 불린’의 딸로 태어 났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 앤 불린은 오빠인 ‘조지 불린’과의 간통 및 근친상간의 죄목으로 처형을 당하 게 되고 그녀 나이 세 살에 어머니를 잃게 된 뒤, 엘리자 베스는 궁중에서 늘 불안하고 위험하기만 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복 언니이자 헨리 8세의 첫째 딸인 HYPERLINK "http://ko.wikipedia.org/wiki/%EC%9E%89%EA%B8%80%EB%9E%9C%EB%93%9C%EC%9D%98_%EB%A9%94%EB%A6%AC_1%EC%84%B8" t "_blank" o "잉글랜드의 메리 1세"메리 공주 가 항상 종교개혁은 신학과 교리에서는 개혁에 가깝고 의식과 제도에 있어서는 로마 카톨릭과 같다. 개혁의 원인은 국왕, 헨리 8세(1509-1547)의 결혼 문제였는데, 형의 미망인 캐드린 과의 결혼 생활에서 메리라고 하는 딸이 하나 있었지만 왕자를 얻기 위해서 인지, 아니면 새로운 여인을 사랑해서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케드린 과의 결혼 무효를 꿈꾸는 헨리의 요구를 교황청이 거부하자 헨리는 자기가 “영국교회의 유일한 최고의 주”라고 하는 “최고 수령권”을 선언(1531)하고 교황청에 대항한다. 그리고 토마스 크랜머를 감독으로 취임시켜 캐드린 과의 결혼을 무효로 선언하게 하고 그 해에 새 여인, 앤볼린과 결혼하여 엘리자베스를 낳는다. 로마 교황청에서 헨리에게 파문교서를 보내자 헨리는 최고 주권 법령인 ‘수장령’을 국회에서 통과시키고(1534) 안수, 성례, 집회 등 정신면을 제외한 교황권을 왕에게 주는 것으로 하여 로마와 완전히 단교를 하였다. 1536년 1월, 캐드린이 죽고 5월 19일에 앤볼린도 혼인 무효 선고로 처형당한다. 11일 후에 헨리는 제인시모어와 결혼을 하여 1537년에 아들 에드워드를 낳지만 산모는 12일 만에 죽는다. 헨리의 로마에 대한 반대는 민간에게도 개신교 사상이 전달되도록 하였고 헨리 자신도 교리와 의식을 다루고 있는 10개 조항(1536)을 초안하여 신교에 최대의 양보를 하였는데, 후에 교황청의 위협 증가로 그는 자신의 본래 사상인 6개 신조 법령(1539)을 통과시켜서 자신이 교황 외에는 카톨릭의 정통임을 고수하였다. 1547년 헨리가 죽자 에드워드 6세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고 신교파의 소머셋이 수반이 되어 실권을 갖게 되는데, 소머셋은 평신도에게 성만찬을 허락하고 성상제거, 교직자 결혼을 허가 하는 등 종교개혁을 진행시킨다. 혼란이 심해지자 1549년 공중 예배식의 통일 법령을 발표 해 영문 공동 기도서를 사용, 이것을 에드워드 6세의 제1 기도서라 한다. 노덤벌랜드 공을 수반으로 하는 유산 계급의 반동으로 소머셋이 실각된 후, 노덤벌랜드는 여왕 이래의 프랑스와의 전쟁을 종결지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칼뱅주의자의 선동으로 일어난 반란에 무력으로 개입하여 에든버러조악을 성립시킴으로써 프랑스세력을 일소하고 브리튼섬 통일의 기초를 쌓았다. 내정면에서도 1560년에 은화 개주(改鑄)를 단행하고, 63년에는 을 제정, 과격한 변혁을 억제하고 경제·사회의 안정을 꾀하였다. 69년에는 이 일어나 엘리자베스 체제에 대한 공공연한 적의를 드러내었다. 70년 2월에는 결국 여왕에 대한 파문장이 공표되었고, 이를 틈타 리돌피의 음모가 발생했으나 모두 타개하여 그 치세가 견고함을 실증하였다.2. 체제안정기(1572∼85년)1560년대 말 이후의 위기는 체제의 안정과 그에 따르는 평화를 가져오는 역할을 하였는데, 72년 4월에 에스파냐를 가상(假想)의 적으로 여겨 프랑스와 맺은 블루아 조약은 하나의 지표라 할 수 있다. 그 동안 여왕은 국민에게 경모(敬慕)의 대상이 되었으며, 매년 11월 17일에는 그 즉위를 기념하여 성대한 식전이 거행되었다. 내란이 일어날 염려가 없어졌고 내외전쟁의 어려운 사태도 없어져 73∼78년의 5년간은 특히 안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교회에 대한 신구 양파의 공격은 차츰 격화되었는데, 메리 스튜어트의 존재도 화근이 되었다. 외부에서는 에스파냐의 위협이 커지고 있었으며 여왕의 후계자는 정해지지도 않은 상황이었다.3. 체제고난기(1585년 이후)여왕 암살 음모와 관련된 배빙턴 사건이 드러나게 되어 1587년 2월 메리 스튜어트는 처형되었다. 영국은 네덜란드의 독립을 지원하기 위해 보병과 기병을 네덜란드로 파병하였는데, 그것이 그때까지의 해상에서의 각축을 가중시켰고 드디어 영국과 에스파냐는 전쟁상태로 돌입하였다. 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격퇴시켜 여왕의 명예는 크게 높아졌으나 전쟁은 장기화되었으며, 재정도 부족해졌다. 또한 94년부터 5년간이나 흉년이 들어 곡물가격이 크게 인상되었고 극도로 곤궁해진 서민에게 부과된 과중한 조세 및 징병 등으로 여러 곳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여, 1609)을 썼다.·번역물: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국 시인들은 다른 나라의 문학 작품을 많이 번역했다. 서리 백작 은 고대 로마의 작가 베르길리우스가 쓴 서사시 의 일부를 번역했다. 한 편 운이 없는 2행 5음보의 시인 무운시도 번역을 통해서 영국문학에 소개되었다.2) 엘리자베스 시대의 희곡1576년에 버비지(James Burbage)는 런던 근교에 `극장'이라고 이름 붙인 공연장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그 때까지 연극은 길거리와 가정, 왕궁과 대학에서 공연되었는데 버비지가 극장을 세운 이후로 다른 공연장들이 생겨나 희곡의 인기는 급속도로 높아졌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희곡은 열 정과 생동감으로 유명하다. 키드(Thomas Kyd)의 (1580년 대)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첫 희곡으로 폭력과 광란의 장면이 가득하며, 살인과 복수극의 전형으로 서 비슷한 경향의 작품이 연달아 나타나는 현상을 빚었다.이 시기에 옥스포드 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을 다녀서 '대학 재주꾼들(University Wits)'로 부른 한 무리의 뛰어난 극작가들이 있었다. 그린(Robert Greene), 말로, 필(George Peele)등이 그들인데, 그 중에서도 말로가 가장 뛰어난 극작가로 손꼽힌다. 말로는 개성이 강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 여 비극을 썼다. 대표작으로는 (1587)과 (1588)이 있다.엘리자베스 시대의 가장 위대한 극작가는 셰익스피어로 그의 시와 인물 형상화 능력은 동시대 작가들보다 훨씬 뛰어났다.3) 엘리자베스 시대의 소설초기의 소설은 대다수가 엘리자베스 시대에 쓰여졌는데, 독자들은 특히 상상력이 풍부하고 사 랑과 모험이 정교하게 얽힌 이야기를 좋아했다.릴리(Hohn Lily)는 (1578)라는 작품을 통해 매우 정교하고 고상한 문체를 유행시켰다. 시드니 경(Sir Philip Sidney)은 릴리의 문체로 (1580)를 썼다. 두 작품은 모두 목가적 로맨스(목동들의 낭만적인 모험을 담은 이 야기)이다. 내시(Thomas Nash)는 좀더 현실적인 문체로 글을 썼는데, 토 특유의 후렴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효과적인 반음계와 불협화음의 사용에 의해 어두운 탄식의 세계를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 외 소박한 민요풍의 작풍을 보이는 파머, 필킹턴이 있고, 폴리포닉한 처리에 훌륭한 톰킨스, 윌비 등은 각각 독자적인 매력을 가진 가작을 많이 작곡했다.2) 가곡영국은 중세 이전에 이미 존재하던 유럽대륙의 음유시인의 음악과 관계되는 가곡의 전통을 갖고 있지 않다. 영국왕실은 프랑스 궁전과 보다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마치 포도주를 수 입하듯이 프랑스의 세속 음악을 수입하였다. 자연히 영국왕실에는 외국의 음악가들이 넘쳐나고 헨리 8세(Henry VIII, 1491 ~ 1547) 의 재위 기간에는 80여명의 외국인 성악가와 작곡가가 그의 궁정에 상주하며 왕실음악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중세의 후반기와 르네상스의 초기까지 영국의 세속 성악곡을 주도하였다. 이 시기의 영국 작곡가는 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어의 시에 음악을 부쳤으며 이러한 시도는 당연항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버드(William Byrd, 1546 ~ 1623) 의 작품으로 대표되는 비얼(Viol) 가곡은 르네상스 시대에 후반 에 그 정점을 이룬다. 탈리스(Thomas Tallis, 1505 ~ 1585)의 제자인 버드는 27세에 왕실 교회의 작곡가로 임명되면서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다. 주로 비얼 반주의 성악곡과 초기 건 반악기의 일종인 버지날(Virginal)을 위한 다양한 변주형식의 작품을 남겼다. 헨리8세의 재위 동안에 나타나기 시작한 류트(Lute) 반주에 의한 가곡은 엘리자베스 여왕(1533 ~ 1603) 시대에 그 꽃을 피운다. 류트는 원래 6줄이 각각 다시 2줄로 되어 있으며 손가락으로 퉁겨서 소리를 냈다. 후에 12줄로 발전한다. 초기에는 비얼 반주부가 류트나 버지날로 대신하기도 하였으며 베이스 부만 담당하는 악기도 고정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음향상의 변화는 당시 이탈리아의 단선율 (모 노디, Monody) 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음을 증명하다.
소설[비명을 찾아서-복거일]과 영화[2009 로스트 메모리즈]의 저작권 법적공방에 관한 연구1. 줄거리〈비명을 찾아서〉소설 [비명을 찾아서]의 역사적 배경은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 공작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있었던 안중근의사의 암살 기도에서 부상만을 입었다는 가정 아래 시작된다.평범한 회사원인 기노시다 히데요는 해외투자회사를 다니는 능력 있는 인물이다. 딸 하나를 둔 단란한 가정의 가장이고 같은 회사의 능력 있는 여 사원을 맘에 두고 있지만 희생적인 아내를 두었고, 무리해서 괜찮은 아파트에 사는 아주 평범한 일본인 아닌 조선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조선인의 피를 안고 살고 있지만 조선이라는 나라에 관해서는 알 수 있는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없었지만 우연한 기회에 숙부와의 만남으로 '족보'라는 것을 접하게 된다. 알수 없는 충격에 휩싸이면서 자신의 진정한 조국인 조선에 대한 깊은 갈증을 느끼게 되면서 일부 금서로 남아 있는 조불 사전과 조선역사에 관한 책을 구하게 된다.그는 밤마다 불어를 읽히고 조금씩 조선어에 눈뜨게 되는데 나름대로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그리움과 조선을 무참히 왜곡해 버리는 일본 사회에 반감을 갖게 된다. 어느 날 내지로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공항 검문에서 책을 소지했다는 것을 들키게 되는데 여기서 그는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사상범이라는 죄목으로 몇 달을 감방에서 보내게 되는데 아내의 친구 남편에 의해 쉽게 풀려 나오긴 하지만 아내와 그 남자의 불륜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무력함으로 아내를 용서하지만 결국 술자리에서 딸에게 손을 댄 그 남자를 살인함으로 이야기는 막바지에 다다른다. 아내와 딸을 남겨둔 채 상해 조선임시정부를 찾아 나서결국은 자신의 정체성과 조선역사에 대한 갈증으로 마지막 도피처를 찾아간다.〈2009 로스트 메모리즈〉서울에서 후레이센진(반정부 레지스탕트, 즉 독립운동 단체)들이 정계의 거물급 인사 이노우에가 주최하는 유물 전시장에 침투, 파티장을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만든다. 이 테러를 진압하기 위해 JBI 특수 수사 요원 사카모토 마사유키(장동건 분)와 그의 절친한 친구 사이고 쇼지로(나카무라 토루 분)가 투입된다. 테러는 발생 10분 만에 완전 진압되지만, 사카모토는 비정치적 전시 행사를 습격한 이들의 불분명한 테러 목적과 단 한명의 민간인 희생자도 없는 절묘한 테러 방식에 의문을 품게 된다. 이 테러 사건의 면밀한 재조사를 주장하는 사카모토는 사건을 축소 은폐시키려는 JBI 수뇌부들과 갈등 하게 된다. 사카모토는 독단적으로 수사를 감행하고, 후레이센진들이 지속적으로 이노우에 재단과 관련된 테러를 벌여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이 사건들의 배후에는 거물급 정계인사 이노우에의 음모가 숨어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혼자서 후레이센진들의 조직을 파헤쳐나가던 사카모토는 급기야 JBI의 조작극에 의해 동료 경찰 살해라는 누명까지 쓴 채 체포되고 사이고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탈출을 감행하지만 심한 부상을 입고 만다. 부상을 입고 거리를 헤매던 사카모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후레이센진들의 아지트까지 흘러 들어가고 마침내 후레이센진과 이노우에 재단을 둘러싼 거대한 음모의 진상을 알게 된다.일본은 우연히 한 유물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유물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즉, 타임머신과 같은 존재이다. 일본은 세계2차 대전 실패 이후 이 유물을 발견하여 역사를 다시 되돌리기 위해 자객 1명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할 당시로 보낸다. 그래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전에 그 자객이 안중근을 암살함으로서 역사를 바꾸어 버린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후레이센진 조직은 다시 역사를 되살리려고 한다. 결국, 음모를 알게 된 장동건은 그 유물을 통해 다시 과거로 돌아가 안중근을 죽으려고 하는 그 암살범을 먼저 죽임으로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하고 역사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2. 유사점①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암살작전에 실패했다는 역사적 배경②조선인이 일본인으로 살아간다는 전재③조선인 주인공으로 조선역사에 대한 깊은 갈증④조선을 들춰내는 주인공들과 묵살하는 사회⑤결국 조선을 찾아가는 주인공들3. 차이점①소설 [비명을 찾아서]에서는 무능력한 회사원으로 조선을 찾아가는 범위가 좁고 내성적이지만 [2009 로스트메모리즈]에서는 수사원으로써 사회적으로 능력있는 인물로 직접적으로 조선에 대해 알아가고 또 역사를 되돌리려는 시도를 한다.4. 결론영화가 개봉되면서 [비명의 찾아서]의 저자 복거일씨는 [2009 로스트 메모리즈]가 자신의 소설의 표절했다면서 법적공방을 벌인바 있다.하지만 법원은 역사적 배경이나 주제, 소재가 유사하지만 구체적인 인물 설정관계나 사전의 전개와 결말, 해결방식 등에서 차이가 있고 구체적인 표현방식이 달라 실질적인 표절이나 종속관계에 있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역사적 배경이나 기법이 비슷하지만 그것은 단지 아이디어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저작권에 보호될 수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