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는 누가 시해했나‥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을 밀어내고 정권을 장악하다명성황후는 1866년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천거와 세도정치 폐단을 없애고 왕실과 정권 안정을 도모하려 한 대원군의 뜻으로 고종의 비가 되었다. 그러나 민비는 궁녀 이씨 소생인 왕자 완화군의 세자책립공작 문제로 흥선대원군과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고, 이후 정치적 대립으로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민비는 최익현의 대원군 규탄상소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을 실각시키고 고종을 움직이는 한편 민씨 척족을 내세워 정권을 장악하였다.‥ 누가 시해를 주모했나민비시해는 이노우에의 주도하에 일본 이토 내각의 정책 결정에 따라 미우라가 실행에 옮긴 것으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조선보호국화를 실행하기 위해 갑오경장 이후 친러정책을 추진하며 자국에 대항하던 민비를 시해한 사건이다. 일본은 민비시해 계획을 세운 후, 1895년 7월 박영효 친일내각이 붕괴하자 새로운 정책을 담당할 인물로 우익적이고 무단적인 미우라를 조선공사로 내정했다. 또 이노우에 공사를 통해 조선왕실에 기증금을 제공할 것이라는 낭설을 공언하고, 조선의 위급 상황시 일본이 조선 왕실을 보호할 것이라는 말로 고종과 민비의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완화시킨 후, 민비가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을 면죄 특사하도록 해 민비제거에 대원군을 끌어들이려 하였다. 미우라는 9월 1일 부임 후 민비시해를 위한 치밀한 실행계획을 짰고, 어느 정도 사전계획이 마무리되자 10월 3일에 공사관 무관인 사치히코, 오카모토, 쓰토모토 등과 민비 제거의 행동방침을 마련했다. 모든 준비 후 미우라는 10월 10일을 결행일로 정했다. 하지만 군부대신 안경수의 갑작스런 훈련대 해산 통고에 결행일은 8일 새벽으로 수정되었다. 훈련대가 해산되면 이들을 동원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사건의 책임을 전가하려던 미우라의 계획에 차질을 빚기 때문이었다.미우라는 8일 새벽, 일본 낭인들의 일부는 직접 궁으로, 다른 일부는 오카모토와 합류해 대원군을 호위하여 궁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오카모토는 대원군을 강제로 가마에 태워 궁궐로 향했고, 일본군은 광화문과 춘생문, 추성문 등 세 방향에서 궁궐에 침입했다. 또 일본군은 만약을 대비하여 대포를 가진 일본군을 궁궐이 내려다보이는 북한산의 중간 부분에 배치하게 하였다. 폭도들은 홍계훈이 거느리는 훈련대와 총격전을 벌여 그를 살해하고 궁궐의 시위대 까지 물리친 후 국왕의 침전과 왕비의 침전인 옥호루를 침범하였다. 궁녀들과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왕비를 보호하려 했으나 희생되었고 왕비는 처참하게 폭도들의 칼에 맞아 쓰러졌다. 낭인들은 궁녀와 왕태자 이탁을 통해 왕비의 시신을 확인한 뒤 시신을 근처 숲으로 옮겨 석유를 뿌려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후 고종을 알현한 미우라는 고종에게 정부개조안을 제시하고, 친일파를 대거 참여시킨 김홍집 내각을 성립시켰다.
- 차 례 -사회보장제도의 개념 역사 탄생 내용 - 사회보장제도, 보충적 제도, 사회부조 제도 - 연금제도 노동제도 문제점과 해결책▣ 사회보장제도의 개념사회의 구성원인 개인이 부상, 질병, 출산, 실업, 노쇠 등의 원인에 의해 생활이 곤궁에 처하게 될 경우 공공의 재원으로 그 최저생활을 보장하여 주는 제도 사회(공적)부조 사회보험▣ 사회보장제도의 역사기독교문화의 정착 후 가톨릭교회 주체로 빈민 구제 시작 → 절대왕권 대두 후 빈민 구제 및 보호기능이 국가로 이전 → 프랑스대혁명 후 빈민의 생존권을 보호하는 부조개념의 사회 정책이 만들어짐 → 부르주아계급이 급부상하면서 퇴조 → 19C말 빈민들에 대한 국가의 의무 입법화, 노사간의 갈등의 심화로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자 변화하기 시작▣ 사회보장제도의 탄생 (사회보험에서 사회보장으로)▶ 사회보험제도의 출발 - 1910년 프랑스 최초 사회 보험인 노동자 및 농민의 퇴직에 관한 법률 제정 → 가입자 수 감소, 대상자들의 가입 거부로 실패 - 제 1차 세계대전 후 인구 감소, 출산율 저하 - 1929년 경제 공황으로 경제 위기 → 빈곤과 실업률 증대 - 알자스로렌 지방의 프랑스 합병 → 독일 치하에 있던 이 지역의 노동자들이 누리던 사회보험혜택을 모든 프랑스 노동자들에게 일반화 시켜야 한다고 주장1930년 사회보험법 제정, 공포 - 질병, 출산, 장애, 노령, 사망이 사회보험 대상 - 1932년 가족수당법 제정▶ 프랑스의 사회보장제도 확립 - 제 2차 세계대전 종결 후 사회보험법의 단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1945년 10월 4일 사회보험을 사회보장의 개념으로 대체 - 1946년 기존의 사회보험제도 통합, 수당 확대로 현대적 의미의 사회보장제도 제정 - 초기에는 봉급 생활자들만을 위한 제도였으나 1978년 이후 프랑스 모든 국민에게 확대 적용 → 보건국에서 감독▶ 프랑스의 사회보장제도'사회보호제도'라고도 함 근본적으로 사보험에 토대를 둔 비스마르크식 제도 채택 사회보장제도, 보충적 제도, 사회부조제도로 나뉨 다소 늦은 출발이었지만 현재 세계 4위▣ 사회보장제도의 내용▶ 사회보장제도 여러 제도들이 혼재되어 있는 모자이크 양상 노동자와 고용주 양측의 분담금과 정부에 의 한 기여금으로 재원 마련 → 근본적으로 보험 원리에 충실. 최저·최소 분야에서 는 연대성의 원리 적용 일반제도, 특별제도, 농업부문 자영업자제도, 비농업부문 자영업자제도가 있음◈ 의료보험- 일반제도에 속함 - 수익에 관계없이 건강과 의학 치료의 권리가 있다는 원칙에 근거. 전국민의 의료보험 가입 의무화 - 분담금은 봉급에 따라 차등적이지만, 의료수 당은 모두에게 동일 - 특히, 출산 비용은 전액 국가 부담▶ 보충적 제도◈보충연금제도 퇴직보조금제도;퇴직금제도가 없고 연금제도만 있는 프랑스에서 이를 보완하고자 만든 절충적 제도 ◈ 실업보험제도;실업을 당했을 경우 일정 기간 동안 소득을 보장. 최대기간 5년 ◈ 공제조합제도; 공동의 이해 관계를 가진 사람들끼리 자유롭게 조합 설립, 가입. 근로자의 생활상의 사고에 대비 일정액의 부금을 각출해 두었다가 사고가 발생하면 적립금에서 일정금액을 급여하여 사고로 인한 곤란을 덜어주는 제도▶ 사회부조제도◈ 알로카시옹(allocation)제도 - 국가보조금제도로 가족수당, 주거비보조금, 장애인보조금, 실업에 따른 사회적응최소수 당 - 국가가 전 국민의 최소 생계를 부양 하고자 하는 프랑스 특유의 제도▶ 연금제도- 세대간의 연대에 기초 사회적 기여 분배제와 공공연대제도 채택 1) 사회적 기여 분배제 : 국가가 주도하는 공공성, 노동 자와 고용주 사이의 합의에 의거한 임금 체계 → 기 업체가 실적이 부진하거나 도산했을 때 퇴직자들이 연금을 수령하지 못하는 위험을 국가차원에서 방지 : 프랑스 연금제도의 핵심 2) 공공연대제도 : 극빈층을 대상으로 최저노후연금의 형태▶ 노동제도- 1970년대 경제 침체기에 최소임금제도 확립 - 1975년 장애인들에 대한 보조금 정책 - 주 35시간 근무제 도입 - 1984년 공익사업제도 도입 - 1997년 청년고용제도 도입▣프랑스 사회보장제도의 문제점1) 재정 적자 ☞ 수지불균형의 원인 - 사회보장수당은 급속히 증가하는 반면, 재원 확보는 지출 증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함 - 인구의 노령화로 인한 노령 보험수당의 지출 증대 - 의료 소비 폭발적 증가 - 1970년대 중반 이후 계속되는 경기 침체 → 장기 실업 발생2) 제도 자체의 결함 - 직종 및 직업 연대성에 토대를 둔 모자이크식 양상 → 사회 계층간 거리 심화 - 보충연금제도의 부정적 기능 → 빈익빈부익부 현상 초래 = 이후,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각 시기의 집권당들이 여러 차례 수정개혁안을 내놓았으나 국민들의 반발로 실패. 2003년 라파랭 개혁안만이 총파업 시위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통과. 그러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난제로 남아있음.{nameOfApplication=Show}
『설득의 심리학』을 읽고..로버트 치알디니 지음, 이현우 옮김, 21세기북스, 2002.사람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다.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도 많고 오히려 대부분은 우리가 남을 설득하기보다는 설득을 당하면서 살아간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설득’에 관함 심리학 책인데, 앞으로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한번쯤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 같아 선택하게 되었다. 저자는 본인이 살아오면서 겪었던 사례와 다양한 이야기들을 예로 들어 6가지의 설득의 법칙에 대하여 정리·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에 그치지 않고 매 법칙의 마지막에는 우리가 그러한 법칙에 방어할 수 있는 전략과 함께 실전문제도 제시해 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그 법칙에 더욱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하였다. 사실 제목만 봤을 때는 마치 전공 서적처럼 보이기도 하고, 따분해 보이기도 해서 읽기 시작하는 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그러나 저자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 상대를 설득시켜 내 요구를 관철시키는 비결 등 각양각색의 설득전략에 대하여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여 따분하지 않고 재밌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서 나 또한 금방 책과 친해질 수 있었다.우선, 저자는 본문의 6가지 설득의 법칙을 설명하기에 앞서 설득 법칙의 기본 근거로서 인간의 자동화되고 고정관념화 된 행동에 대하여 설명해주어 본문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해주고 있다. 새끼 칠면조의 ‘칩칩’ 소리에만 어미노릇을 하는 어미 칠면조나 가슴에 꽂힌 빨간 깃털 때문에 공격을 개시하는 수컷 참새처럼 인간에게도 자동적인 행동을 유발시킬 수 있는 심리원칙이 있으며 그것만을 적절히 이용하면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근거로는 ‘대조효과’이다. 저자는 어느 양복판매점 이야기를 예로 들고 있는데, 우습게도 이 이야기는 우리가 물건을 살 때 항상 마주치게 되는 상황 중 하나이다. 대부분 이런 경우 나는 ‘뭐 이정도 차이인데, 이왕 사는거 조금 더 내지. 아무래도 비싼 게 낫지 않겠어?’라는 생각과 함께 점원의 꾀임에 홀랑 넘어가곤 한다. 이 경우에는 대조효과와 더불어 ‘비싸면 비싼 값을 하겠지’라는 사람들의 고정관념화 된 행동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알게 모르게 나오는 이러한 심리들은 정말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같다.이제 본문에 나오는 설득의 6가지 법칙에 대하여 보도록 하겠다.첫 번째는 상호성의 법칙이다. 저자가 말한 예를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정말 악한 사람이 아니고는 사람들 대부분 ‘보은’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또한 상대방이 나에게 뜻밖의 혹은 원치 않았던 작은 호의를 베풀면 나는 별거 아닌 일에도 불구하고, 어쩜 당연해 보이는 일인데도 두 배로 감동하거나 고마워하게 되며, 나도 모르게 언젠가 나도 저 사람에게 오늘의 호의를 되갚아 줘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 내가 지금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의도하는바 없이 작은 친절과 호의를 베푼다면, 그것은 언제가 됐든 나에게 꼭 돌아온다. 이것이 바로 상호성 법칙의 핵심이다. 내가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호의를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은 그 상황에서 나에게 자동으로 빚진 마음을 갖게 되는 것. 이것은 정치와 공짜 샘플 마케팅, 대인관계 등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나며 사람을 설득하는 데 기본이 되는 법칙이 된다.두 번째 법칙은 일관성의 법칙이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거나 입장을 취하게 되면 그러한 선택이나 입장과 일치되게 행동해야 한다는 의식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부담감을 주기도 하며, 우리가 원하든 원치않았든 그것으로 끌고 간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타인에게 (그것이 억지든, 마음에서 우러나든) 한 말에 대하여 책임감 비슷한 심리를 가지게 되는 것 같다. 불로소득자들이나 기부금 등을 모금하는 사회단체의 임원들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그들을 설득하고 이익을 취하거나 혹은 기부금을 모금 한다. 이러한 일관성의 법칙은 ‘개입’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개입을 통해 나는 안 그럴 것 같지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이러한 설득의 법칙에 말려드는 것이다. 이 법칙의 장점이자 단점은 사람들로 하여금 잘못된 결정에 대해서도 기뻐하게 만드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내가 상대방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을 낮추어서 요구를 한 후, 상대방이 승낙을 하면 그 때 옵션을 붙여 그 사람이 나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게 만드는 법칙이 바로 이 일관성의 법칙이라 할 수 있겠다.세 번째는 사회적 증거의 법칙이다. 이는 일종의 군중 심리를 이용한 것이란 생각도 드는데, 개인이 어떤 결정을 하고자 할 때 다른 사람들이 나와 행동을 같이 하느냐에 의해 결정하는 것이다. 저자가 말한 사례와 비슷하게, 나 또한 이 법칙을 요즘 유행하는 개그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느낄 수 있었다. 프로그램 중간에 자주 사람들의 웃는 모습을 카메라가 비춰주고는 하는데 이것이 시청자들에게 재밌다고 느끼게끔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증거의 법칙은 상황이 불확실할 때 그리고 우리가 우리와 비슷한 사람의 행동을 관찰할 때 그 영향력이 더 커진다.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한 사람이 나서야 그제서 하나둘 개입을 한다. 이러한 사회적 증거의 법칙을 이용하면 설득할 때 상대방과 나의 동질성을 인식시키며 상황이나 조건에 등에 대하여 공감대를 형성하면 그렇지 않을 때보다 설득의 성공률이 두 배는 더 높아질 것이다.네 번째 법칙은 호감의 법칙이다. 호감의 법칙은 말 그대로 어떤 외적인 모습이나 개인적 친분 등을 내세워 상대방과 교감하고 상대방이 나에게 호감을 갖게 하여 설득하는 법칙이다. 이 호감의 법칙에는 이외에 칭찬과 익숙함, 협동심 유발 등의 방법이 존재하는데, 칭찬의 경우 칭찬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듯이 상대방에 대한 긍정적 발언은 설득의 기본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국제 어린이 도서관-매주 토요일 및 일요일에는 1층의 ‘이야기 방’에서 어린이들에게 스토리텔링(storytelling)과 북 토크(book talk)를 들려주는 행사가 열린다. 오후 2시에는 4세부터 초등학교 1학년까지를 대상으로, 오후 3시부터는 초등학교 2학년 이상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 보따리가 각각 20∼30분씩 열린다. 이야기는 다른 도서관에서 파견 나온 어린이 도서관 전문사서와 국제어린이도서관의 사서 8명이 교대로 돌아가며 들려준다.북 토크는 산더미 같은 책 가운데에서 무엇을 고를지 헤매는 아이나, 책 따위는 싫다고 하는 아이에게 '책이란 재미있는 거구나'라며 흥미와 독서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목적이다. 북 토크의 방법은, 한 가지 테마를 정해―예컨대 '친구'나 '가족' 같은―즐겁게 이야기하면서 책을 몇 권 소개하는 것이다. 책 소개는 대상에 따라 가지각색이겠지만, 간단한 내용 소개, 저자의 약력 따위를, 흥미를 돋우도록 소개한다든지, 이야기의 중간까지만 말하고 클라이막스는 숨기는 등의 기술이 있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책을 알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이 도서관의 특징은 가장 좋은 책만이 선정 열람되는 것이라고 자랑을 하는데 1년에 5천 권의 책을 사와서 도서선정위원들이 충분히 검토해서 200권 정도를 선별해서 어린이 열람실에 비치한다. 실제로 2층에서는 많은 선정위원들이 책상 위에 수북히 책을 쌓아 놓고 열심히 책을 읽고 고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어린이 열람실 옆에는 자그만 이야기 방이 있는데 벽난로 앞에 선생님이 앉는 의자가 있고 그 옆에 작은 탁자가 있다. 그 탁자에는 촛대가 있는데 선생님이 촛불을 켜면 아이들은 작은 방석(폐품으로 만들어 제각기 색이 다르다)을 가지고 선생님 앞에 와서 앉는다.이야기는 토요일에 2번 나누어 하는데 6세 미만의 어린이와 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로 분류된다. 때때로 밤이야기 시간도 갖는데 이때는 어머니들도 같이 와서 듣는다.어린이 열람실 곳곳에는 동화에 나오는 주인들의 인형을 정겹게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매달 두 번씩 열리는 즐거운 공방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라고 한다. 이 인형들은 모았다가 12월 바자회 때 팔아 역시 운영비에 보태어진다고 한다.-새로운 독서운동, 일본판 '북 스타트'-북 스타트는 생후4~6개월 사이에 건강진단을 받는 모든 신생아와 부모들에게 보건소 등에서 그림책 1~2권이 든 북 스타트 가방을 안내문과 함께 선물하는 운동이다. 안내문에는 아기와 함께 책 읽는 방법, 책 읽어주기를 시작하는 방법 등 젊은 엄마들을 위한 독서법이 실려 있다. 갓난아기 때부터 독서습관이 몸에 배게 하자는 이야기다. 아기의 육체 발달을 위해 모유가 필수적이듯 아기의 언어력과 감수성을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엄마 품에서 사랑을 느끼고 만족하며 타인을 신뢰하는 마음의 성장 역시 불가결하다. 북 스타트는 바로 책을 매개로 아이들에게 이런 즐거움과 정신의 영양소가 공유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이 운동의 전범이 된 것은 1992년 영국의 버밍햄에서 시작돼 현재는 영국 전역에서 실시되고 있는 유아 독서운동이다. 이 운동에 관심을 보인 일본문화계가 현지 시찰후 지난 11월 '북 스타트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했고 도쿄의 스기나미구에서 시범적 운영에 들어갔다.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행해진 북스타트 운동의 배경에는 보호자들의 활자문화에 대한 이탈현상, 부모와 아이 관계의 소원 그리고 일본의 장기적인 경제불황과 자녀를 적게 나으려는 사회현상, 출산, 육아에 대한 불안과 스트레스가 과거의 부모들에 비해 상당히 크다는 것 등을 이유로 들 수 있다.-어린이 책의 날매월 넷째주 토요일을 '어린이 책의 날'로 정하고 전국 서점(현재 156개) 매장에서 책 읽어주기 행사를 펼쳤다. 이 행사는 대개 지역별 이야기 모임에 소속된 주부들이 한시간 정도 종이연극과 동화책 읽어주기를 병행하는 형식이다. 행사 때마다 엄마 손을 잡고 온 아이들로 서점은 북새통이 된다.-아침독서운동-아침독서란 오전 수업시간 전 10분간 학생 스스로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것이다. 강제적인 독후감도 없고 읽는 분량도 자유다. 때문에 책을 싫어하던 학생들도 차츰 책을 좋아하게 됐다. 이 성공적인 사례가 알려지면서 전국 초중고 학교에 급속히 전파됐고, 이제 이 운동을 실시하는 학교가 약 5천개로 늘었다.집단 따돌림이나 지각생이 줄고, 학생들이 차분해졌으며, 어려운 한자를 잘 읽을 수 있게 됐다는 등의 사례보고가 각 학교에서 이어졌다. 독서를 통해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서로간의 차이를 인정하고 소외감에서 벗어나 자율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게 된 것이다.-이야기 마라톤 행사-일본 최대의 출판도매회사인 닛판(日販)에서도 지난 1978년부터 개최된 아동도서전시회 그림책 읽어주기 행사를 발전시켜 창립 5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1999년부터 거래처 서점들과 함께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이야기 마라톤' 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현재는 전국 112개 서점에서 월 1~2회씩 정기적으로 진행중이며 점차 이 행사에 동참하는 서점이 늘고 있다.
고려시대 화엄종과 법상종< 목 차>1. 머리말2. 고려 초 화엄종의 전개3. 문벌귀족시기의 화엄종과 법상종의 대두4. 무신집권기 교종의 쇠퇴5. 원나라간섭기와 고려 말 화엄종과 법상종의 동향6. 맺음말※ 화엄종과 법상종의 사상1. 머리말통일신라 말 선종이 새로 성립되면서 시작된 교종과 선종의 사상적 대립은 고려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고려 초기에서의 불교계의 일차적인 문제는 난립된 불교 교단의 정비와 함께 그 사상의 통일이었다. 이러한 때에 불교계의 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한 사람은 고려 4대 왕인 광종이었다. 광종은 당시의 불교계를 교종과 선종으로 양립시켜 교종은 화엄종 중심으로 정리하고, 선종은 새로 중국에서 법안종을 도입하여 난립된 선종 각파를 정리하려고 하였다. 먼저 화엄종에서는 개경에 귀법사를 새로 세우고 균여를 주지로 앉혀서 그를 통하여 후삼국시대 이래 남악파와 북악파로 분열되었던 화엄종단을 통합하고 아울러 화엄종의 교리체계를 재정리하게 하였다. 그 뒤 현종대 이후에 가서는 교종 계통의 법상종이 새로 대두하여 화엄종과 함께 불교계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이 두 종파는 각기 왕실과 귀족세력에 연결되어 대립하게 되었다.여기서는 이러한 화엄종과 법상종의 등장부터 고려 말까지 어떠한 행보를 했는지에 대하여 사상적 측면보다는 역사와 정치·사회에서의 역할에 대하여 각 시기별로 알아보고자 한다.2. 고려 초 화엄종의 전개고려 초에 태조 왕건은 중앙집권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어지럽게 세워진 불교교단을 정비하려고 하였다. 태조 왕건은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민심을 얻기 위해서 종파를 따지지 않고 승려를 후원하였고, 그 중 태조와 연결된 승려 중에서는 선종의 승려가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당시의 선종이 지방 세력과 연결되어 불교계를 주도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포섭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지, 선종에만 특별히 태조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아니었다. 이때의 화엄종은 태조의 후원 아래 그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고, 화엄종을 제외한 나머지 융회적(融會的)이어서 이질 집단의 통합사상으로 나타날 수 있게 된다. 신라 이래 그것은 전통적으로 중앙왕실에 의해 수용되었고 지방 세력을 포함한 모든 사회체제를 중앙왕실 속에 통합시키는 데 유리한 사상체계였기 때문이다. 이 절을 지은 것을 기념하는 글을 직접 지은 태조는 화엄경을 강의하는 법회의 공덕으로 백성이 편안하고 정치가 원만하게 이루어지기를 빌고 있다.이후 화엄종은 광종대에 이르러서 나라의 중심 사상으로 떠오르게 된다. 당시 태조의 불교정책과 불교교단의 정비작업은 완료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광종은 이를 구체적으로 시행하였다. 그는 왕권강화를 추진하였고, 그와 동시에 불교계에 대해서도 대규모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우선 승과제도를 실시하여 승려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는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불교계를 국가가 관리하고, 일정한 자격을 가진 승려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또한 광종은 불교교단을 교종과 선종으로 나누어서 정비하려고 하였는데, 교종을 정비하는 데는 화엄종을 중심에 두었고, 그 중에서도 북악파에 비중을 두었다. 후삼국 시기 화엄종은 견훤을 지지하는 관혜의 남악파와 왕건을 지지하는 희랑의 북악파로 나누어졌는데, 이것이 북악파의 균여(均如)에 의해서 정비되었다는 것이다.균여는 황주 출신으로 일찍부터 불교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그는 자연스레 그 지역의 강호였던 황보씨와 연결되었다. 정종 4년(949)에 균여는 대목황후(大穆皇后)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이후 균여는 광종과도 연결되었다. 광종 4년(993)에 당시의 국사 겸신(謙信)의 천거로 기정제(祈睛祭;비가 그치기를 바라는 제)를 주관하였다. 후주(後周)가 사신을 파견하여 광종을 책봉하려 할 때 마침 비가 오자, 균여가 원음(圓音)으로 강연하니 하늘이 맑아졌다고 한다. 광종 4년경이면 화엄종 승려인 겸신이 국사에 봉해질 정도로 광종의 화엄사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있을 때였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균여는 광종과 가까워졌고, 광종은 그를 종교 외의 정치적의 탄문이 왕사로 임명되었고, 광종이 죽은 바로 뒤에 국사로 책봉되었다. 이는 화엄종이 왕사와 국사를 낼 수 있는 힘있는 종단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광종 14년(963)에 세워진 귀법사는 광종이 세운 여러 사찰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큰 사찰이었다. 균여가 북악파와 남악파를 통합했다고 했는데 이런 사상의 통일을 종단의 통일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 귀법사가 세워졌을 것이며, 그만큼 화엄종의 힘이 성장하였다는 것을 보여는 예이기도 했다.한편 성종 대에 들어서는 화엄종을 포함한 불교세력이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 경주 6두품 귀족 출신인 최승로의 강력한 불교비판과 함께 유교통치를 주장하였고 이로 인해 이 시기 불교 활동은 왕성하지 못하였다. 팔관회와 연등회 또한 경종 6년(981)에 폐지되고, 성종 4년에는 집을 함부로 절로 만드는 것이 금지되었다.3. 문벌귀족시기의 화엄종과 법상종의 대두문종의 통치기간 중반과 후반에 이르러서 불교교단의 성격도 바뀌었다. 특히 문벌귀족들이 강력하게 부상하면서 당시의 대표적인 불교교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에 따라 불교교단도 문벌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면서 이시기 불교교단의 지도층도 대체로 문벌귀족 출신이었다. 그리고 고려 초에는 화엄종과 선종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었다면, 이 시기에 접어들면서 화엄종과 법상종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위치로 바뀌었다.이 시기 화엄종은 흥왕사를 본거지로 왕실 및 인주 이씨 이외의 문벌 가문과 연결되었고, 현화사를 본거지로 인주 이씨 가문과 연결되어 있던 법상종과 서로 대립 경쟁하였다. 이에 문종의 왕자로 화엄종 승려인 의천은 천태종(天台宗)을 창립하여 화엄과 천태, 양 교단을 주도함으로써 법상종 세력을 견제하려 하였다.한편, 법상종은 현종 대에 현화사(玄化寺)가 개창되면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통일신라 시기 유식사상(唯識思想)과 미륵신앙(彌勒信仰)을 기반으로 성립된 법상종은 신라 중대에 경주를 중심으로 한 태현계(太賢系)와 지방을 중심으로 한 진표계(眞表系)로 나뉘어져 융성하였으나 신라 . 고려 법상종이 법맥을 갖추면서 융성하게 된 것은 혜덕왕사(慧德王師) 소현(韶顯)에 의해서이다. 선종이 즉위하자 현화사의 주지가 된 그는 유식학의 장소 등을 간행하여 유통케 하였는데 이는 신라 말 이래 침체되었던 법상종을 선양한 데 큰 의의가 있는 것으로 의천이 화엄종 입장에서 장소를 수집하여 속장경을 간행한 것과 비교될 만하다. 소현은 현화사에 주석하면서 전국의 법상종 사찰을 보다 잘 통어하였고, 석가여래 및 법상종의 법맥으로서 해동 6조 등을 그려서 각 사찰에 봉안하게 했다.그러나 후에 법상종은 왕실이 의천 이후 화엄종과 천태종에 후원하고, 이자겸의 난으로 인주 이씨가 몰락하는 것과 함께 그 세력도 약화된다. 그렇지만 인종대에 승통으로 현화사 주지를 지낸 천상(闡祥)과 현화사 승려로서 예종 즉위년에 왕사가 된 덕창(德昌)이 있고, 정혜왕사(正慧王師) 담휴(曇休)에게 출가한 정각수좌(正覺首座) 의광(義光), 덕겸에게 출가한 등관승통 각관(覺觀) 등이 있어서 현화사의 명맥은 계속 유지되었다.4. 무신집권기 교종의 쇠퇴무신정권과 기득권을 누렸던 교종 쪽의 불교사원은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불교 쪽에서는 무인들을 정권의 쟁탈자로 보았고, 그에 따라 직접 무인정권에 반발하여 싸우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무인들의 갈등에 참여하기도 하고, 왕과 귀족들이 왕권회복을 시도할 때 힘을 빌리는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사원이 무신정권에 대항 투쟁한 것은 최충헌의 집권초기에까지 이르렀다. 당시에는 무인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 사원이었다. 최충헌은 자신에게 대항하는 세력이 주로 교종 쪽의 승려들을 중심으로 한 무리라고 판단하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불교세력의 힘을 빼기 위해 그동안 불교계에서 비주류이고 정치와 관련이 적었던 선종 쪽에 눈을 돌리게 된다. 따라서 선종 인물들을 국사에 올리고 희종 7년(1211) 개경에 자신의 원당인 창복사(昌福寺)를 세우고 그것을 선종의 사원으로 삼았다. 후에는 특히 지눌의 수선사 같은 경우 무신들의 적극적인 후원을법상종이 이 시기에는 다시 어느 정도 그 세력을 만회하고 있었다. 많은 법상종 승려들이 조정에서 경전을 필사하는 데 종사하였다. 더구나 중국에 건너가서 필사에 종사한 승려들도 있었다. 경전을 필사하는 사경(寫經)은 종교의 보급과 공덕의 두 가지가 있는 것인데, 이 시기에는 원나라 황실과 귀족, 고려의 왕실과 귀족들이 공덕을 쌓는 방법으로 사경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이시기에 법상종에서는 2명의 국존이 배출되었다. 그 사람은 홍진국존 혜영(惠永)과 자정국존 미수(彌授)이다.고려 말 혜영이 국존에 책봉되면서 법상종의 지위도 상당히 상승되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배경으로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충렬왕의 후원과 같은 국내적인 요인을 빼놓을 수가 없었다. 계율을 중시하는 법상종의 특성에 의지하여 자신을 중심으로 한 집권체제를 확립하려는 목적 아래 충렬왕은 법상종을 후원하였던 것이다. 또한 당시 법상종은 현세기복적(現世祈福的), 귀족주의적(貴族主義的)인 경향을 보이고 있었는데, 이 역시 충렬왕과 그의 측근 및 귀족 지식인들의 호감을 끌어 그들로부터 지지를 획득할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14세기 초반에 법상종은 승정(僧正)을 장악하는 등 불교계를 이끄는 핵심 교단으로 떠올랐다. 당시 원에서 행해지던 승정에 관한 전권 위임의 방법을 잘 알던 충선왕은 고려에서도 그러한 제도를 원용하여 불교계를 장악하려 하였다. 자신의 안배에 의해 다양한 구성을 보이던 고려 불교계를 계율을 중시하는 법상종 고승 미수(彌授)를 앞세워 통제하려들었던 것이다. 아울러 그러한 정책을 통하여 자신의 고려에 대한 통치력을 반석 위에 올려놓으려 하였음은 이를 나위가 없었다. 고려후기에 법상종이 부각되고, 나아가 승정을 장악하는 등 지도적인 종파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정치권과의 관계로부터 영향을 입은 바가 컸다. 법상종의 사상적 특징을 이용하여 통치권을 공고히 하려던 충렬왕과 충선왕의 정치적 의도에 따른 일이었다. 하지만 그 같은 세속권력과의 친밀한 관계는 반대로 법상종의 쇠퇴를 재촉하는 쪽으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