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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르뛰르 랭보라는 인물에 대한 소개와 평가
    아르뛰르 랭보Ⅰ. 이 인물을 선택하게 된 이유인류 문명에 한 획을 그을 전쟁이나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획기적인 발명처럼 명백해 보이는 역사적 사실일지라도, 개인적인 사상과 경험 그리고 후대의 가치관에 따라 여러 각도의 해석이 가능하다. 더구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창조력을 행사하는 문인이나 예술가의 경우, 그에 대한 평가는 그 분야에 대해 명확한 개인의 철학과 지식이 없다면 다수의 의견에 휩쓸릴 수밖에 없으며 ('모나리자의 미소'가 세기의 명화라고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는 있지만 나에게는 그 그림과 무명 화가의 그림과의 구별이 무의미하다. 사람들이 명화라고 떠들어 대니까 나도 명화라고 인식할 뿐), 또한 그러한 예술을 탄생시킨 '인간' 이 아닌 그의 창조품인 '작품' 자체만으로 평가받기 마련이다. 그의 작품이 걸작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창조자의 사생활이 도덕적으로 용서받지 못할 정도라도, 그의 인품이 비열하더라도 '천재니까' 라는 타이틀 아래 용인되거나 묵인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나는 평소 이런 '예술가들'에 대한 후대의 평가 기준에 대해 흥미가 있었으며, 과제가 나왔을 때 이러한 '예술가' 방면의 인물로 과제를 해 보리라 마음 먹고 있었다.그 중에서도 어째서 랭보인가? '쟝 니꼴라 아르뛰르 랭보'. 그 이름만이 막연히 나의 머릿속에서 떠돌고 있다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라는 시의 한 구절처럼, 이 프랑스 천재 시인이 분명한 형상을 지니고 나와 '의미 있게' 대면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인식의 계기는, 막연하게는 사람들의 의식 기저에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천재'라는 존재에 대한 뿌리깊은 흥미와, 구체적으로는 랭보가 당시의 시인이었던 연상의 '폴 베를렌느'와 '동성애 관계'였다는 역사적 사실이었으며, 동성애라는 타락적인 코드에 매료된 나는 랭보와 폴 베를렌느가 등장한다는 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이렇듯 그다지 건전하다고는 할 수 없는 계기로 영화를 접했지만, 영화 속의 랭보를 바라보면서 어느덧 이 시고 마르셀 꿀롱이 언급했을 정도로 그녀는 평화롭고 진력나는 시골 생활과 더불어 랭보의 세 번에 걸친 가출의 원인이 되었다.유년 시절 랭보는 로사 학원, 샤를르빌의 꼴레쥬에 다녔다. 랭보는 어린 시절부터 문학, 특히 라틴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나 동전의 양면처럼 수학에는 도무지 재주가 없었으며 틀에 박힌 학교의 수업을 싫어했다.(알렉산드라가 유명했었다는 사실이/내게 뭐 중요한가? 라틴 민족이 존재했는지/ 안 했는지 아는 것이 내게 대체 왜 중요하단 말이야?) 그의 문학성은 선생들에게 인정받아 중등 3학년 과정을 면제받고 곧바로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도 했으며, 1869년에 그의 라틴어 시 세 편 중 한 편이 학술 대회에서 1등 상을 받기도 했다. 1870년 랭보는 그의 학교에 부임해온 '죠르주 이장바르' 라는, 랭보의 재능을 인정해주고 적지 않은 작품들을 빌려준 수사학 선생에게서 문학적 영향을 받아 여러 편의 시를 쓰기 시작한다. 이 바로 이 시기에 쓰여진 작품이며, 오늘날 남아 있는 작품들은 유년 시절의 습작부터 포함해서 15세부터 20세 사이에 씌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자식의 문학적 재능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으며, 16세 때 랭보는 스스로 학업의 길을 중단한다. 1870년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서 일어난 보불전쟁의 와중에도 문학과 혁명에 매혹된 랭보는, 전쟁결에 떠난 이장바르의 뒤를 쫓아 '문학의 소용돌이'로서 동경하던 파리로 떠난다. 이것이 '바람 발창을 단 사나이' 랭보의 역사적인 첫 가출이었다. 첫 번째 가출에서 랭보는 가차삯 부족으로 체포되어 이장바르의 도움으로 무사히 샤를르빌로 돌아갔으나, 이후 두 번에 걸쳐 다시금 가출을 감행했다.1871년 18세의 랭보는 보불전쟁의 패배로 나폴레옹 3세 전제왕권의 몰락하자 시작된 파리꼬뮌혁명에 동참하기 위해 파리로 떠났으나, 당시 꼬뮌군에게 환멸을 느끼고(전기 작가들은 성폭행이 있었을 것으로 유추하고 있다) 샤를르빌로 돌아온다. 이 즈음 '투시자' 라는 랭보의 독특한 사상이 완성되었으며, 자신이 투시자때이며, 이것이 랭보 생전에 출판된 유일한 그의 작품이다. 1874년 랭보는 제르맹 누보와 함께 런던에 머물며 그의 시경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산문 시집 을 썼으나, 1875년 경부터 어린 시절 이래로 그를 구원해 주었던 문학에조차 흥미를 잃어버리고 써놓은 시들을 불 속에 던져 버린다. 이 때부터 랭보의 끊임없는 도보가 시작된다.이후 랭보의 생활은 네덜란드 용병으로 지원하거나 곡마단에 취직하는 등 거액의 부를 얻는 일에만 초점이 맞춰지게 되며, 결국 이집트 하라에서 무기 매매와 마약 거래, 인신 매매 등 생의 밑바닥을 전전하게 된다. 그 후, 아프리카에서의 무리한 생활로 인해 관절염이 악화되어 암으로 발전하게 되고, 1891년 결국 마르세이유로 돌아와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게 된다. 인간의 한계를 자극하는 고통 속에서 이 때의 랭보는 여동생인 이자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며, 1891년 11월 10일 3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Ⅲ. 랭보의 사상랭보는 시인의 임무이자 시를 쓰는 목적을, 시를 쓰고, 투시가 즉 견자가 되어 내세를 보는데 두었다. 다시 말해서 랭보의 시인으로서의 사상은 한 마디로 '투시자'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투시자' 사상이야말로 랭보가 걸은 '십자가의 길' 이었다. 자신을 억압하는 어머니의 독실한 신앙과 자그마한 시골인 샤를르빌에서의 지적인 협소함으로, 랭보는 자기 자신을 타인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 내용은 네 개의 명제로 나뉘어질 수 있다. Ⅰ. 운명이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Ⅱ. 시인이 된다는 것, 그것은 투시자가 되는 것이다. Ⅲ. 투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각을 착란시켜야 하고 스스로 추해져야 한다. Ⅳ. 여태까지, 어떤 시인도 완전한 투시자가 되기 위한 실험을 시도해보지 않았다.시인은 이미 '운명'지워진 것이며, 시인이 되는 것은 타인의 육체 속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도 모르게 도구가 되는 것으로, 나무가 바이올린으로 깨어나고, 구리가 나팔로 깨어나는 것처럼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랭보리는 이지도르 뒤카스 그리고 아르뛰르 랭보(1854~91)가 등장하면서, 프랑스 낭만주의 역사의 새로운 에피소드는 만들어 졌다. 상징주의라는 것은 불명확한 많은 갈망들을 응집하였을 뿐인데, 이 갈망의 방향은 누보, 코르비에르, 로트레아몽 등에 의해 이미 제시되어져 있었다. 독일 낭만주의, 헤겔과 쇼펜하우어의 철학, 바그너의 음악, 스윈번, 라파엘 이전의 화풍을 다루는 영국 화가들 역시 프랑스 상징주의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점점 더 추상적인 합리주의로 향하는 사회적 변화에 대해 그들은 본능적으로 적대감을 지녔던데다, 상징주의란 용어가 뜻하는 바가 그들에게는 상당히 막연하였다.이러한 상황에서 랭보는 '나는 체계를 찾아냈다' 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글쓰는 방법 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에도 적용될 수 있었다. 즉 그의 글쓰기 방식은 자동기술과 콜라주 기법, 그리고 개인적 사건이나 읽은 문구를 밝히지 않고 참조하는 기법을 동시에 포함할 수 있는 한편, 비밀스런 그의 형이상학적이고 실존적인 관념은 시대와 환경과는 이질적인 것이었다. '나는 모든 자음의 움직임과 형태를 결정했고, 언젠가는 모든 감각에 다다를 수 있는 시어를 본능적인 리듬으로 발명했음을 자랑했다.' 밀러는 '우리들 가운에 아직 감수성이 있고 미래를 구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저 다른 기슭을 향한 욕망의 화살로 변모하였던 것은 랭보가 나타난 덕분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랭보는 현대 프랑스 시의 주창자이며, 그의 영향을 받은 여러 시인들의 작품으로 인한 파급효과로 생전과는 달리 프랑스에 국한되지 않고, 바다 건너 전 세계 시인의 정신에 그의 흔적을 남겼다.Ⅴ. 랭보에 대한 평가생전 랭보의 평가는 문학적으로는 극히 소수의 문인들에게 인정을 받았을 뿐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투시자의 길을 지향하던 랭보는 자본주의라는 시대에 휩쓸려 안락하게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는 문인들을 혐오했으며, 비상식적일 정도로 그의 혐오감을 솔직하게 드러냈기 때문에 문인들에게 그다지 환영받는 존재는 아니었다. 거기다 신의 오빠의 반종교적인 시들을 읽고 충격을 받은 그녀는(이자벨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누구보다도 랭보를 잘 알고 있는' 자신이 진실을 밝히겠다고 결심한다.이자벨이 이야기하는 랭보 이야기는 이자벨 본인의 주관이 크게 개입되어 있었고, 여기서 아돌프 르뗴가 '모험가 아르뛰르 랭보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아르뛰르 랭보는 하나의 신화이다.' 라고 언급할 정도의 50∼60년 대에 성행했던 '랭보 신화'가 탄생했던 것이다. 절필 이후 물질적인 길을 걸었던 랭보의 삶은 때로는 의도적으로 외면받았으며 그의 반항아 적인 기질, 혁명적인 양상만이 주목받았다.현재에는 이러한 신화가 많이 완화된 듯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시인 랭보'만을 기억하고 알고 싶어한다.Ⅵ. 나의 평가 및 맺음말'인간은 다른 사람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 사람과 같은 경험과 같은 생각을 하며 같은 세월을 살아보지 않는 한, 즉 그 사람 자체가 되어 보지 않는 한 사람은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 유전자 적으로 동일한 쌍둥이라 할지라도, 타인보다는 이해의 강도가 강할지는 모르겠지만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사람의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그의 반영인 작품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어떻게 그의 인생의 한 조각을 이해할 수 있을까? 가까운 친구의 생각조차 알 수 없는 나는 랭보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고, 랭보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를 돕고자 평전이나 논문을 써대는 사람들 역시 랭보가 남긴 시나 지인들의 편지들을 통해서 랭보의 일생을 추적해 갈 수는 있겠으나, 그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보았는지 이해할 수는 없다.랭보의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시인으로서의 랭보를 평가한다는 사실은 어불성설이다. 그렇다고 해서, 랭보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도 못한 처지에 '인간 랭보'를 평가할 수도 없으며, '시인 랭보'와 '모험가 랭보'를 나누어 평가할 생각 역시 없다. 이러한 이유로 랭보에 대해 기준을 가지고 나름의 평가를 내리기가 상당히 다.
    인문/어학| 2007.11.19| 7페이지| 2,000원| 조회(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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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어
    논어1. ≪논어(論語)≫의 편찬- 공자 : 공자는 기원전 551~479년경에 살았고, 산동 출신이다. 고대에는 청춘 남녀의 집단 미팅 습속이 있었는데, 주로 들판에서 벌어진다고 하여 이를 '야합'이라 불렀다. 공자의 어머니는 이 난장판에서 한 사내를 만났고, 공자를 낳았다. 낳고 보니 머리가 심한 짱구인지라 그 이름을 울퉁불퉁한 언덕이라는 뜻의 구(丘)로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공자의 어머니는 공자가 자라는 동안 아버지에 관해 함구했고, 무덤조차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러한 가정형편으로 인해 공자는 교육 한번 제대로 못 받았으며, 당연히 벼슬도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공자는 선천적으로 영리하여 사람을 볼 줄 알고, 세상사를 꿰뚫어보았다. 결국 공자는 유교라는 동양의 가치관을 창시한 위대한 인물이 되었고, 후세까지 길이 존경받는 성인으로 불렸다.- 편찬자 : ≪논어≫는 2,500년 전에 편찬된 공자의 언행록(言行錄)으로, ≪논어(論語)≫라는 서명(書名)은 공자의 말을 모아 간추려서 일정한 순서로 편집한 것이라는 뜻인데, 누가 지은 이름인지는 분명치 않고, 편자에 관해서도 숭작참(崇爵讖)의 자하(子夏) 등 64제자설(六四弟子說), 정현(鄭玄)의 중궁(仲弓) ·자유(子游) ·자하(子夏)설, 정자(程子)의 증자(曾子) ·유자(有子)의 제자설, 그 밖에 많은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편찬시기 : 논어의 텍스트 성립시기 역시 그 저자문제와 함께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다. 다만, 논어라는 명칭은 ≪예기(禮記)≫ 에 최초로 나타났다는 점을 볼 때, 이 책의 이름이 한무제 이전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논어≫라는 책 이름이 일반적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더 오랜 후일의 일이다. 맹자나 순자, 또는 다른 사람들도 ≪논어≫ 안에 있는 말을 인용할 적마다 ‘자왈(子曰)’, ‘공자왈(孔子曰)’, ‘전왈(傳曰)’이라 했을 뿐, ’논어왈’ 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미루어보더라도 서한(西漢) 이전에는 ≪논어≫가 책이름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書)≫에는 ≪논어≫ 12가(家)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현재 우리가 이야기하는 ≪논어≫와 관계되는 것은 7가이며, 그7가는 다시 ≪노(魯)≫≪제(齊)≫≪고(古)≫의 삼론으로 나누어진다. 현재 우리에게 읽혀지고 있는 ≪논어≫가 한 대의 세 가지 ≪논어≫와 내용이나 문장에 있어 얼마나 다른 것인가 확실히 알 길은 없으나 그 중에서도 ≪노론≫이 지금 전하는 ≪논어≫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된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3. 역대 논어 주석지금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오래된 주석은 위나라 때 하안 등이 쓴 ≪논어집해(論語集解)≫이다. 이는 그들이 서문에서 논하고 있는 후한의 포함(包咸)?주씨(周氏)?마융(馬融)?정현(鄭玄)과 위나라 진군(陳?)?왕숙(王肅)?주생렬(周生烈)의 일곱 사람의 주석과 ≪고론≫의 공안국 주(注)라 전해지는 것들을 모두 종합하여 집대성한 것이다. 이후 양나라 때 황간(皇侃)이 이를 바탕으로 하여 ≪논어의소(論語義疏)≫를 집필하였다. 송나라 진종 함평 3년(1000)에 칙명으로 형병 등이 하안의 ≪집해≫를 다시 풀이하여 ≪논어주소(論語注疎)≫ 20권을 지었으며, 이 형병의 ≪논어주소≫를 바탕으로 하여 주자가 ≪논어집주(論語集註)≫ 10권을 집필하였다. 이후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을 통해 ≪논어≫에 관한 주해서가 송대에는 10여 종이나 되고, 원대에도 다시 10여 종이 나왔으며, 명대에 와서는 30여종이 넘는 것을 알 수 있다.4. 전체적 내용현존본은 에서 에 이르는 20편, 약 480장으로 이루어졌으며, 각기 편 중의 말을 따서 그 편명(篇名)을 붙였다. 따라서 대체로 각 편의 제명은 그 편의 내용과 큰 관련이 없는데. 이것은 ≪논어≫ 이외에도 ≪시경≫ 등 중국의 옛전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명제법이다. 은 인간의 종신(終身)의 업(業)인 학문과 덕행을, 은 역대 성인의 정치 이상을 주제로 하였다. 이처럼 각 편마다 주제가 있기는 하나, 용어가 통일되지 않았고, 같은 문장의 중복도 있다. 한 마디로 ≪논어≫의 편찬에는 아무런 체계가 없다 될 수 있음을 밝히기 위해서다.” 라고 말했다. 주자(朱子)는 ‘배우는 사람이 힘써야 할 글이 많다. 이는 곧 도에 들어가는 관문이고 덕을 쌓는 바탕이다. 배우는 사람이 먼저 힘써야 할 글들이다’ 라고 주를 달았다. 제1편 은 총16장으로 되어 있다.- 제 2편 위정편(爲政篇) : 형병(邢昺)은 소(疏)에서 ‘배운 다음에 정치에 들어간다(學而後入政)’는 ≪좌전(左傳≫의 말을 인용하고 ‘고로 다음에 이 있다.(故次前篇也)’라고 말했다. 또 그는 ‘이 에서 논한 바 효(孝)?경(敬)?신(信)?용(勇)은 백성을 다스리는 덕이다. 성현과 군자는 다스리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위정을 첫 장에 내세웠고 편명으로 삼았다’라고 했다. 황간(皇侃)은 ‘군자가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높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움을 바탕으로 한다.’는 ≪예기≫의 말을 인용하고 ‘그러므로 을 다음에 두었다.(故以爲政次於學而也)’라고 주에서 말했다.- 제 3편 팔일편(八佾篇) : 편명(篇名)으로 내세운 팔일(八佾)은 ‘천자(天子)가 종묘에서 제사지낼 때 연주하는 무악(舞樂)의 이름’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예악(禮樂)을 가지고 정치를 바로잡고 백성을 교화했으므로 다음에 을 놓았다. 형병은 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치를 잘하기 위해서는 예약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예는 임금을 안정되게 하고 백성을 다스린다. 악은 기풍이나 풍속을 향상 변화하게 한다. 그러므로 예악을 잘 활용하면 나라가 안정되고, 예악을 다스리지 못하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 그러므로 이 편에서는 예악의 득실을 논했다.” 주자는 말했다. “제3편은 모두 26장이다. 전편 끝의 두 장과 함께 다 예악에 관한 것들을 논했다. (凡二十六章 通前篇末二章 皆論禮樂之事).”-제4편 이인편(理仁篇) : 형병은 “제4편 은 인(仁)을 밝혔다. 인은 가장 큰 선행을 일컬은 말이다. 군자가 인을 체득하면 필연적으로 예악을 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제3편 다음에 놓았다.(此篇明仁 仁者善行之大明也 君子禮仁必能行禮藥 故以次前也)”고 말했다. 제4. 이 편도 앞의 과 같이 인물을 평한 구절이 많다. 그러나 전반부는 대체로 폄책(貶責)하는 말이 많고, 후반부는 대체로 칭찬하는 말이 많다. 특히 후반부에서는 인(仁), 지(知) 및 군자(君子) 등에 대한 구절이 많으므로 공자의 사상을 연구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십삼경주소본≫에서는 30장 주자의 ≪사서집주≫에는 이 편을 총 28장으로 나누었다.- 제7편 술이편(述而篇) : 술이편은 총 37장으로서, 주로 공자의 생각이나 언행을 적은 글이 많다. 아울러 현인?군자 및 인자들의 덕행을 논술했다. 주자는 ‘성인들이 겸손한 태도로 남을 잘 가르치고 또 점잖은 몸가짐과 행적에 대한 글들이 많이 추려져 있다’고 했다. ≪논어≫ 중에서도 정채(精彩)로운 글귀들이 가장 많이 추려져 있다.- 제8편 태백편(泰伯篇) : 형병은 8편 의 특성을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말했다. “예양(禮讓)하고, 인효의 덕행을 실천한 현인 및 군자들에 관한 구절이 많다. 아울러 배움을 권장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며, 도를 지키고 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를 논한 글들이 많다. 첫 장의 태백을 위시하여 요(堯)?순(舜)?우(禹) 등 성왕(聖王)이나 현인(賢人)들을 칭찬했으며, 예악(禮樂)에 관해서도 말을 했다.” 21장까지 있다.- 제9편 자한편(子罕篇) : 은 주로 공자의 덕행을 기술한 글이 많다. 그래서 고대 성현들의 덕을 기술한 다음에 놓았다고 형병은 말했다. 30장까지 있다.- 제10편 향당편(鄕黨篇) : 제10편 향당편(鄕黨篇) 은 ≪논어≫ 중에서도 특수한 편이다. 주로 공자의 일상생활에 관한 여러 가지 사항을 자세히 기술했다. 즉 공(公)과 사(私)에 걸쳐 예(禮)와 악(樂)을 실천한 공자의 성실하고 근엄한 생활의 여러 면모를 문인들이 적은 기록들을 추린 것이다. 이러한 기록 속에서 공자가 예악을 어떻게 해석하고 행동화했는가도 알 수 있다. ≪고주(古注)≫는 25장, ≪신주(新注)≫는 17장으로 분류했다.- 제11편 선진편(先進篇) : 공자가 제자들을 평한 말이 많다. 직설적으로 되었다. 형병은 대략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 편에는 논한 바 내용이 많다. 우선 인정(人政)의 도리를 밝히고 아울러 그 인정을 달성하는 길을 말했다. 그리고 군신과 부자가 지켜야 할 예, 미혹을 분멸하고 옥사를 처결하는 일, 군자의 학문과 덕행 등이 다 언급되었으며, 이들 가르침은 다 성현의 격언이며 동시에 벼슬에 나가는 기본 단계이다. 그러므로 뒤에 이 편을 엮었다.” 여기서도 공자는 제자들의 인품이나 정도에 따라 대답을 달리하고 있다.- 제13편 자로편(子路篇) : 총 30장으로 되어 있다. 전반에는 주로 정치에 관한 문답이 많고, 후반에는 정치와 가정 도덕 및 위정자와 정치에 참여하는 선비들이 지켜야 할 도덕에 관한 내용이 많다. 형병은 대략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인이나 군자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교화하는 인정(人政)과 효제(孝悌)에 대한 글들이 많다. 특히 중용의 도를 지키고 윤리 도덕을 실천하는 것이 수신(修身)과 치국(治國)의 기본임을 밝혔다.”- 제14편 헌문편(憲問篇) : 형병은 대략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이 편에서는 주로 삼황(三황(皇)과 이패(二覇)의 역사적 흔적과, 여러 제후?대부들의 행적을 논했다. 아울러 ‘인을 실천하고 염치를 아는 것[爲仁知恥]’과, ‘자신을 수양하고 백성을 편하게 해주는 것[修己安民]’이 정치의 대절(大節)임을 밝혔다. 고로 자로가 문정(問政)한 제13편 다음에 편찬했다.” 주자의 집주에는 “이 편은 혹 원헌이 기술한 것일 거다”라는 호씨의 말을 주로 달았다. 총 46장으로 나눈다.- 제15편 위령공편(衛靈公篇) : 본편은 주로 공자가 겪은 여러 가지 불우한 일들에 관한 기술 및 쇠퇴한 세상을 한탄하는 감회를 적은 글이 많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수신과 처세의 바른 길과 법을 논한 짧은 말들이 섞여 있다. 총 42장으로 나눈다.- 제16편 계씨편(季氏篇) : 이 편은 ≪논어≫ 중에서도 체재가 특이하다. 그러므로 남송의 홍흥조(洪興祖)는 제론(齊論)이라는 설을 지지했다. 다른 편과 같지 않은 특이다.
    인문/어학| 2007.11.19| 7페이지| 2,000원| 조회(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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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최대의 연애사건 -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금단의 사랑 서평
    중세 최대의 연애사건-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금단의 사랑「중세 최대의 연애사건-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금단의 사랑」의 저자는 에버하르트 호르스트이며, (주) 생각의 나무에서 2005년에 출판된 310페이지의 약간은 두툼한 분량의 책이다. 저자인 에버하르트 호르트스(Eberhard Horst)는 1924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나, 뮌헨 근교의 그뢰벤첼에서 살고 있다. 저서에는 『슈타우퍼가의 프리드리히』 『콘스탄티누스 대제』 『테오파누』 『빙엔의 힐데가르트』 등이 있다. 그는 역사적 인물, 특히 중세사의 인물에 전기 집필에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으며, 펜(P.E.N) 클럽 회원이자, 유럽과학예술아카데미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책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이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겪는 사랑 이야기가 있다. 물론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허구적 문학 작품이 아닌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로, 이미 전설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 두 연인들 중 남자 주인공의 이름은 중세의 유명한 신학자 중 한 명이자 논쟁적인 지성인 아벨라르이고, 여자 주인공의 이름은 아벨라르보다 20년은 연하인 아름답고 총명한 엘로이즈이다.중세사람들은 저 너머의 세상을 알 수 있는 세 가지의 길이 있다고 믿었다. 그 세 가지 길은 존재의 길과 논리의 길, 사랑의 길을 이르는데, 아벨라르는 그 중 논리의 길을 제창한 인물로, 엘로이즈가 태어났을 때에는 스물 내지는 스물 한 살이었고 젊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이미 철학자로서의 성공을 거듭하고 있었던 자신만만하고 매력적인 남성이었다. 참사회원 퓔베르의 조카딸인 엘로이즈의 나이가 열 여섯, 혹은 열 아홉 살 정도가 되었을 때 아벨라르는 아름다운 용모와 당시의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박식한 지성을 지니고 있었던 엘로이즈에게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명성과 지위를 이용하여 엘로이즈의 개인 과외 선생님이 되었고, 철학 공부보다는 몰래하는 사랑놀음에 빠져들어갔다. 하지만 그들의 연애와 엘로이즈의 임신은 곧 엘로이즈의 숙부인 퓔베르에게 들키게 되고, 엘은 지켜질 수 없었고, 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아벨라르는 엘로이즈를 퓔베르의 집에서 몰래 데리고 나온다. 분노한 퓔베르는 아벨라르에게 '세상 사람들이 놀라 몸이 굳어질 정도로 잔인하면서도 치욕적인 복수를' 행했다. 아벨라르를 밤 중에 몰래 거세해버린 것이다.이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그의 생각과 태도, 그리고 엘로이즈에게 취하는 행동이 극단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아벨라르는 '마치 한 번 뒤쪽을 돌아본 롯의 아내를 생각하듯' 엘로이즈를 아르장퇴유 수녀원에 입회시키고, 뒤따라 자신도 생드니 수도원에 입회하게 된다. 엘로이즈로서는 이 일은 후에 아벨라르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회상하듯이, 자기 자신의 의지와 깊은 신앙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지나칠 정도로 아벨라르에게 속박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아벨라르에게 복종한 결과였다. 이후 엘로이즈와 연락을 끊고 아벨라르는 자신의 철학과 이성에 바탕한 강의를 펼치게 되는데, 그의 신학논문인 「신의 일체성과 삼위일체」가 이단 혐의를 받게 되어 1121년 수아송 공의회에서 유죄판결을 받게 되었다. 아벨라르는 수도원에서 잠시 금고형을 산 후 생드니로 돌아오게 되지만, 수도자들과의 의견차이로 인해 생드니에서 도망쳐서, 노장슈르센에서 가까운 아르뒤쏭의 황무지에 예베당을 세우고 파라클레에 봉헌하게 된다. 이 곳은 아벨라르의 은신처와 같은 곳이 되어 수많은 학생들이 아벨라르의 가르침을 청하여 몰려들게 되었는데, 이것이 중세 유럽 최초의 교회나 국가의 감독을 받을 의무가 없는 자유로운 대학이었다. 그러는 사이 엘로이즈는 아르장퇴유의 분원장이 되고, 아벨라르는 끊임없는 멸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매우 좋아했던 아르뒤쏭의 예배당을 떠나 대서양의 절벽 가까이 있는 반도 뤼에 세워진 브르타뉴에서 가장 오래된 생길다스드뤼 수도원에 수도원장으로 가게 된다.그러나 두 사람의 운명은 모두 순탄치 않았다. 아벨라르는 수도사들의 의견 차이로 인해 몇 번이나 독살당할 위기를 넘기고, 엘로이즈는 생드니 수도원의 새로운 수도원장이 되었으나, 엘로이즈와 10년 이상이 걸려 이루어진 첫 번째 재회에서 감정적인 행동이나 대화를 행하지 않았다. 아벨라르는 자신이 건립하고 확장한 피라클레를 수녀들에게 양도하고 그녀들의 생활을 위해 구걸조차 저어하지 않았으며, 양도에 대해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의 승인을 정식으로 받는다. 1131년 파라클레 수도원은 교황의 승인을 받아 대수도원이 되고, 엘로이즈도 수녀원장이 되어 평생 수녀원장의 지위를 받게 된다. 처음 수녀원에 입회할 때의 엘로이즈는 아벨라르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며 눈물 흘리던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수녀원 분원장이자 파라클레 수녀원장으로서 단호하게 행동한다. 10년이 넘게 엘로이즈를 소홀히 한 죄책감 때문에 아벨라르는 파라클레를 자주 찾게 되는데, 계속되는 수도사들의 독살 시도에 마침내는 생길다스드뤼 수도원을 도망치다시피 떠나게 되고, 인기리에 생즈느비에브에서 강의를 시작하게 된다.아벨라르는 생즈느비에브에서 강의를 시작한 첫 해에, 엘로이즈와의 관계를 비롯하여 자신의 내밀한 경험들을 누설하는 「나의 불행한 이야기」를 집필한다. 그것은 특별히 엘로이즈만을 독자로 생각하여 쓴 책이 아니었지만, 그 책을 입수하게 된 엘로이즈는 그 책의 내용에 대해 완곡하면서도 격렬한 감정을 담은 편지를 쓰게 되고 두 사람의 편지 교환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편지에서 엘로이즈는 아벨라르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대담하고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원망을 쏟아내는데, 아벨라르의 종교적인 질책에 이후부터는 감정을 자제하고 신학적인 내용의 편지만을 교환하게 된다.그러는 사이 다시금 아벨라르에게 이단 혐의가 돌아갔다. 과거 아벨라르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생티에리의 기욤이 고발장을 작성하여 주교인 샤르트르의 고트프리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에게 아벨라르의 이단적인 진술들의 목록을 넘겨준 것이다. 이에 아벨라르는 자신을 변호하는 글인 「베르나르에 대한 변명」을 쓴다. 결국 공개 토론회인 상스 공의회가 열리게 되는데, 논리적인 아벨라르와 공적인 논쟁을 꺼려한 기욤이 편법을 사용하여 아못하고 클뤼니 수도원에 잠시 머물게 되는데, 가경자 페트루스가 아벨라르를 호의적으로 보호함으로써 아벨라르는 평안하게 클뤼니 수도원에서 숨을 거둔다. 아벨라르의 시신은 엘로이즈가 있는 파라클레에 묻히고 되고, 엘로이즈는 아벨라르보다 22년을 더 살다가 숨을 거둔다. 두 사람의 시신은 처음에는 나란히 묻혔다가, 다음에는 파라클레의 중앙 제단 아래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파리의 페르라셰즈 공동묘지에 최종적으로 함께 묻혀 있다.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는 시, 소설, 회화, 영화, 연극 등 여러 예술 작품의 모태가 되며 시대를 초월하여 계승되고 있다.저자는 이 책에서, 거의 전설적인 연인이라고 할 수 있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치밀하게 재구성해 가면서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고 있다. 특히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기독교적 색채가 짙었던 중세 시대에서 수도원장과 수녀원장이라는 직책을 가진 두 사람의 인간적인 감정과 종교적 사명 사이의 갈등으로서 당시의 종교관과 결혼관을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다.이를 위해 저자가 사용한 자료는 주로 아벨라르가 생즈느비에브에서 저술한「나의 불행한 이야기」와 두 사람이 교환한 편지들 중 현존하는 것들, 그리고 두 사람에 관련된 각종 문서 및 편지와 드물게 두 사람에 대해 읊은 노래 가사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이야기를 증언해 줄 수 있는 것은 (클뤼니회 대수도원장 가경자 페트루스를 제외하고는) 두 사람 이외에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중에서도 특히 중점적으로 사용하며 인용하는 것은 개인적인 자료인 아벨라르의「나의 불행한 이야기」와 두 사람이 주고 받은 편지이다. 아벨라르의 「나의 불행한 이야기」는 가상의 친구에게 자신의 실패를 이야기를 형식의 기록으로, 아벨라르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그 스스로 명백하게 고백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거짓말'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투명한 신뢰성을 획득하고 있다. 편지의 경우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중세의한 위작이라고 의심되는 것들도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두 사람의 문학적 소양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이들이 주고받은 편지 자체가 초기 서간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그들만의 독특한 어법이나 분위기를 완벽하게 모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볼 때 상당히 신뢰성이 있는 자료라고 생각된다.이 책은 역사적인 인물에 대해 다룬 것인 만큼 시간 순서대로 크게 6개의 단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 시작부마다 「나의 불행한 이야기」와 두 사람의 편지에서 해당 부분을 간략히 설명할 수 있는 한 문장을 발췌하고, 어울리는 그림 및 사진을 수록하여 다음 장에 대한 대략적인 예감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예를 들면,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첫 만남을 다루는 장에 들어가기 전에 「나의 불행한 이야기」에서 "책은 펼쳐져 있었지만, 철학 공부보다는 사랑에 관한 질문과 대답이 줄기차게 오갔으며, 학문에 관한 말보다는 입맞춤이 더 많았네" 라는 한 문장을 발췌하는 식이다. 서술 스타일은 시간 순서대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나의 불행한 이야기」와 그들의 편지에서 적절한 부분을 인용하고 그 글이 씌어진 그 당시의 상황과, 특히 거기에 담긴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감정을 치밀하게 해석하고 해설하는 방식이며, 역사적 사실을 조명하는 내용인만큼 딱딱하고 평이한 어투이다. 이러한 서술 스타일은 분명 책의 성격에는 맞는 방식이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자극적이기까지 한 서명에 현혹되어 이 책을 선택한 독자에게는 예상치 못한 지루함을 안겨줄 것이 분명하다. 글의 중간 중간에는 그림을 삽입하지 않았지만, 앞서 언급하였다시피 각 장의 시작 부분에 관련되는 사진을 수록하고 있다. (수록된 남자와 여자의 그림이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시각적 서비스는 그다지 풍족하다고는 할 수가 없으며 이것이 독자를 심심하게 만들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라고 본다. 하지만 제목에 현혹되지 않고 꾸준히 책을 읽어나가는 독자라면 분명 의도했던 것보다 많은 것을 이 책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용다.
    독후감/창작| 2007.11.19| 4페이지| 1,000원| 조회(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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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왕조실록/고종,순종실록
    Ⅰ. 조선왕조실록1. 조선왕조실록이란?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의 시조인 태조로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책으로 총 1,893권 888책으로 되어 있는 가장 오래되고 방대한 양의 역사서이다. 한사람이 하루 100쪽씩 읽어도 4년 3개월이 걸리고 200자 원고지로 적어서 쌓으면 그 높이가 63빌딩의 세배나 되는 엄청난 분량이다. 국역하는데만도 학자 3,000여명이 동원되어 25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1973년 12월 31일 국보 제 151호로 지정되었다. 1413년 (태종13)에 《태조실록》이 처음 편찬되고, 25대 《철종실록》은 1865년 (고종 2)에 완성되었다. 《실록》의 편찬은 대개 전왕이 죽은 후 다음 왕의 즉위 초기에 이루어지는데, 춘추관 내에 임시로 설치된 실록청 (또는 선수청, 일기청)에서 담당하였다.2. 조선왕조실록의 편찬2.1 편찬의 유래실록(實錄)은 황제나 국왕과 같은 제왕이 조정에서 일어나거나 보고되는 일들을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한 역사서로서, 일종의 연대기(年代記)에 해당한다. 그 기원은 황제의 측근에서 매사를 기록하던 한 대(漢代)의 기거주(起居注)에서 시작되지만, ‘실록’이라는 명칭이 생긴 것은 6세기 중엽 양(梁) 무제(武帝) 때 주흥사(周興嗣)가 편찬한《황제실록(皇帝實錄)》이 처음이다. 이후 당(唐)·송(宋) 시대를 지나면서 그 체제가 정비되었다.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는 지속적으로 실록을 편찬하였으나, 중세 이전의 것으로는 당대에 한유(韓愈)가 편찬한 《순종실록(順宗實錄)》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전하지 않는다. 다만 근세의 실록인 《명실록(明實錄: 大明實錄 혹은 皇明實錄)》 2,909권과 《청실록(淸實錄: 大淸歷代實錄)》3,000여권이 전하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처럼 내용이 풍부하지 않다.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초기(연대 미상)부터 사관(史館: 후에 예문춘추관으로 개칭)을 설치하고 실록을 편찬하였다. 태조∼목종의 7대에 걸친 실정을 망라하여 학문과 문장에 조예가 있는 관원들이 수찬관·기사관 등으로 임명되었다.① 실록청(實錄廳)의 설치도청(都廳)과 3∼6개의 방(房)으로 구성된다. 최고책임자는 총재관(總裁官), 도청과 방에는 당상(堂上)과 낭청(郎廳)이 있다.② 초초(初草)의 작성각 방에서 시정기와 사초를 요약하여 작성한다.③ 중초(中草)의 작성도청에서 초초를 바탕으로 추가, 삭제, 수정, 편찬한다.④ 정초(正草)의 작성총재관과 도청당상이 모여 중초를 교정한 후 정본으로 인쇄한다.⑤ 춘추관(春秋館)에 봉안인쇄가 완료된 실록을 춘추관에 봉안한다.⑥ 세초(洗草) 및 세초연(洗草宴)사초, 시정기, 초초, 중초는 세검정 시내에서 물에 씻어 종이를 재생시키고, 차일암(遮日巖)에서 세초연을 열어 편찬에 참여한 관원의 품계를 높이고 시상을 한다.2.3 편찬자 - 사관삼국시대부터 역사 편찬에 따라 사관이 있었겠지만 명확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고, 고려 때는 국초에 왕의 언행·정치·백관(百官)의 행적 등 모든 시정(時政)을 기록하는 관아로 사관(史館)을 설치, 여기에 시중(侍中)이 겸직하는 감수국사(監修國史), 2품관 이상이 겸직하는 수국사(修國史)와 동수국사(同修國史), 한림원(翰林院)의 3품관 이하가 겸직하는 수찬관(修撰官)·직사관(直史館)을 두었는데, 직접 실무를 맡은 수찬관·직사관을 주로 사관(史官)이라 하였다.1308년(충렬왕 34) 사관(史館)을 문한서(文翰署)와 병합하여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을 설치하였을 때는 타관이 겸직하는 대사백(大詞伯:종2품) 3명, 사백(詞伯:정3품) 2명, 직사백(直詞伯:정4품) 2명, 응교(應敎:정5품) 2명, 공봉(供奉:정6품) 2명과 전속관원인 수찬(修撰:정7품)·주부(注簿:정8품)·검열(檢閱:정9품) 각 2명을 두었다. 이 중 특히 공봉·수찬·주부·검열 등 8명을 사관(史官)이라 하였는데, 1325년(충숙왕 12)에는 춘추관을 독립 관청으로 하여 여기에 사관을 두었고, 1356년(공민왕 5)에는 춘추관을 사관(史館)이라 다시 개칭하면서 편수관(編修官:정7판서를 비롯한 국가의 중신과 대간(臺諫)·홍문관(弘文館)의 관원 등은 직접 임금과 면대(面對)하여 국사를 논의할 수 있었으나 단독으로 면담하지 못하고 반드시 승지와 함께 사관을 대동(帶同)하고 면담하였다. 이는 단독으로 면대하면 사사로운 일을 청하거나 다른 사람을 모함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처음에는 한 명만 입시하게 하여 기록하였는데 불편이 있어 1425년(세종 7)부터 사관 2명이 좌우에 입시하여 말하는 바를 직접 받아썼으며, 지방에서 올라오는 장계(狀啓)나 왕이 내리는 교서(敎書)는 반드시 사관을 거쳐 이를 초록(抄錄)한 뒤에 육조(六曹)·대간에 넘기게 하였다. 사관제도는 정확한 직필(直筆)로써 국가적인 사건, 왕의 언행, 백관의 잘잘못, 사회상 등을 기록하여 후세에 정치를 하는 데 거울로 삼게 하려는 것으로 사관이 기록한 사초는 시비를 가리지 못하고 또한 수정도 가하지 못하며 사관의 기록 행위도 일종의 면책권이 있어 신분이 보장되었다.1498년(연산군 4)에는 사초가 원인이 된 무오사화(戊午史禍)가 발생하였으니, 이는 김종직(金宗直)이 단종(端宗)을 항우(項羽)에게 죽은 초(楚)나라 회왕(懷王) 의제(義帝)에 비기어 그 죽음을 슬퍼하고 세조(世祖)의 찬탈을 비난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그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勳舊派)의 불미스러운 행위와 함께 사장(史章)에 올린 것을 이극돈이 발견, 연산군을 충동하여 김일손 등 사림파(士林派)를 죽이거나 귀양을 보낸 일이다. 또 1547년(명종 2)에는 을사사화(乙巳士禍)가 발생한 을사년(1545)의 시정기(時政記)를 집필한 안명세(安名世)를 죽이고 시정기를 고친 일이 있으나, 이렇게 사관을 죽이거나 사관이 쓴 기록을 고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2.4 편찬에 이용된 자료실록청의 총재관은 재상이 맡았으며, 대재학 등 문필이 뛰어난 인물이 도청 및 각방당상으로 임명되었다. 시정기와 사관이 개인적으로 작성한 《사초》, 《각사 등록》, 《승정원 일기》가 실록편찬의 기본 자료였논평을 세주에 기록한 경우도 많다.⑥ 당해 왕의 홍서로 실록이 끝난 후에는 부록을 기록하였다. 그 부록으로 그 왕의 행록(行錄)·행장(行狀)·시장(諡狀)·애책문(哀冊文)·능지문(陵誌文) 등의 전기류 자료들을 수록하였다.3.2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실록에 수록되는 내용은 매우 다양하다. 국왕과 신하들의 인물 정보, 외교·군사 관계, 국정의 논의 과정, 의례(儀禮)의 진행, 천문 관측 자료, 천재지변 기록, 법령과 전례 자료, 호구와 부세(賦稅)·요역(役)의 통계자료, 지방정보와 민간 동향, 계문(啓聞)·차자(箚子)·상소(上疏)와 비답(批答)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실록의 찬수 때마다 일정한 범례를 만들어 기사의 취사선택에 관한 기준을 정하기는 하지만, 국정의 운영이나 사회의 동향에 관한 거의 모든 정보들이 실록에 수록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선초기의 실록에는 유교적 규범의 관점에서 수록하기 곤란한 내용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후기로 갈수록 실록의 기사가 정치적 내용에 치우쳐 다양성을 잃게 되고 기록이 빈약하게 되었다.3.3 조선왕조실록의 구성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은 크게 본문, 세주, 사론(本文, 細註, 史論)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은 실록편찬 원칙(實錄編纂 原則)에 따라 간략(簡略)하게 기술(記述)하고, 세주(細註)는 본문의 기사만으로 미진한 경우 그 내용을 보완하여 후세에 구체적으로 알 수 있도록 첨기(添記)한 것이다. 사론(史論)은 사관이나 실록 편찬관이 서두에 사관왈(史臣曰)을 붙이고 사건이나 인물에 대하여 쓴 주관적인 평론(論評)이다. 이 가운데 사론은 사관이나 실록편찬의 견해가 가장 잘 반영된 것으로, 실록편찬의 목적이 인군(人君)의 언동(言動)이 정사(政事)를 기록함으로써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논하고, 풍속(風俗)의 미악(美惡)과 사정(邪正)을 가려서 후세에 귀감이 될만한 것을 전하는데 있었음을 고려할 때 실록의 내용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사론은 다른 사서의 사론과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춘추관과 충주·성주 사고의 실록은 모두 병화(兵火)에 소실되었다. 다행히 전주사고의 실록만은 전주의 선비인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이 1592년 6월에 일본군이 금산에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재(私財)를 털어서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13대의 실록 804권과 기타 소장 도서들을 모두 정읍의 내장산으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이듬해 7월에 정부에 넘겨줄 때까지 1년여 동안 번갈아가며 지켜 후세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1593년 7월에 내장산에서 실록을 넘겨받은 정부는 이를 해주와 강화도를 거쳐 묘향산으로 옮겨 보관하였다. 그러다가 왜란이 평정된 뒤, 국가의 재정이 궁핍하고 물자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실록의 재출판 사업을 일으켜, 1603년 7월부터 1606년 3월까지 2년 9개월 동안에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13대의 실록 804권을 인쇄, 출판하였다. 이 때 출판한 실록은 3부였으나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 원본과 재출판시의 교정본(校正本)을 합하여 5부의 실록이 갖추어졌다. 그래서 1부는 국가의 참고를 위하여 옛날과 같이 서울의 춘추관에 두었다.다른 4부는 병화를 면할 수 있는 깊은 산속이나 섬을 선택하여 강화도 마니산,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에 사고를 새로 설치하고 각각 1부씩 나누어 보관하였다. 춘추관·태백산·묘향산에는 신인본(新印本)을, 마니산에는 전주사고에 있던 원본을, 오대산에는 교정본을 보관하였는데, 춘추관실록은 이괄(李适)의 난(1624)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그리고 그 뒤 다시 복구되지 않아 춘추관에서는 실록을 보관하지 않게 되었다. 마니산 사고의 실록은 1636년 병자호란의 피해를 입어 현종 때 보수하여 1678년(숙종 4)에 가까운 정족산(鼎足山) 사고로 옮겨졌으며, 묘향산 사고본은 1633년에 전라도 적상산(赤裳山) 사고로 옮겨졌다.이후 각 사고의 모든 《실록》은 조선 말까지 완전히 보관되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들어 다시 큰 변화를 겪었다. 일제는 정족산?태백것이다.
    인문/어학| 2007.11.19| 13페이지| 2,000원| 조회(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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