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가 요청 쿠폰 이벤트
*병*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3
검색어 입력폼
  • 이순지 레포트
    조선 천문학의 수준을 진일보시킨 천문역법학자 ‘이순지’영화 ‘인터스텔라’로 인해 전 세계는 지금 우주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한층 높아져있다. 이런 관심들은 현재에 이르러서 확산 된 것이 아닌 과거에서부터 서서히 지속되었고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보편화되고 일반화 되면서 일반인들도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옛날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주나 블랙홀 등 지구 외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탐색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새로운 세계를 알기 위한 끊임없는 인간의 욕망이었고 그로 인한 천문학에 대한 지식과 기술은 점점 발전해나가고 있다. 우리역사에서도 우주나 천체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진 것을 찾아 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학자가 이순지다. 나는 조선 전기 자주적 역법을 이룩하면서 ‘우리 천문학을 세계 수준으로 올려놓은 천문학자’라는 평가와 함께, ‘명예로운 과학기술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된 조선 전기의 천문학자 이순지를 외국인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내가 이순지를 외국인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이유를 다양한 천문·역법서를 저술한 것과 한양의 북극출지, 즉 위도를 38도로 정확히 계산해낸 것, 그리고 조선의 여러 왕들이 신뢰했던 그의 인성 이렇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첫 번째 이유는 아라비아의 천문계산법을 우리나라에 맞게끔 고쳐 편찬한 을 비롯해 많은 천문·역법서를 저술, 편찬한 것을 꼽을 수 있다. ‘한문으로 펴낸 이슬람 천문 역법서 가운데 가장 훌륭한 책’으로도 평가받는 은 아랍 천문학의 성과에 바탕을 두고 있다. 1442년에 정인지, 정흠지, 정초 등이 편찬한 은 원나라에서 만든 수시력을 한양의 위치에 맞게 수정, 보완한 것이다. ‘내편’을 통해 한양을 기준으로 한 정확한 천문 계산이 가능해졌으며 ‘외편’을 통해 발달된 아랍 천문학의 성과를 우리 실정에 맞게 수용함으로써 조선의 천문학은 아랍, 중국과 함께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수준에 도달했다. 우리의 하늘을 정확하게 관측하고 그 운행을 계산하며 예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의 하늘을 정확히 계산한 칠정산이 중요한 이유는 농업 생산이 경제 활동의 핵심이었던 당시에 천체의 규칙적인 운행 주기와 질서를 측정하고 계산하여 만드는 달력은, 단순한 시간표나 일정표를 뛰어넘는 막대한 중요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또한 왕조국가 시대의 달력은 왕조와 국가의 안위를 내다보기 위한 점성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도 매우 중시되었다. 천문의 이러한 중요성과 필요성에 따라 기상학과 점성학을 포함한 천문학을 중시하면서 보다 정확한 천문 관측과 계산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다가 세종 때에 마침내 큰 업적을 이룰 수 있었고, 그 업적을 이룩한 중심에 이순지가 있었던 것이다. 이순지는 이외에도 이천·장영실과 함께 천문의상들을 교정, 제작하였으며, 1445년에는 그 때까지 조사, 정리된 모든 천문관계 문헌과 이론을 체계화하여 을 펴내었다. 일월식 계산법을 알기 쉽게 하기 위해 법칙을 쉽게 외울 수 있는 산법가시를 짓고 사용법을 덧붙여 을 완성하였다. 이 책은 후에 천문분야 관리채용 시험인 음양과에 시험교재로 쓰일 만큼 일반화되었다. 이처럼 다양한 천문, 역법 책들을 저술하고 편찬한 것이 이순지의 대표적인 업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두 번째는 한양의 위도를 38도로 정확히 계산해낸 것이다. 당시는 위도의 개념보다는 지면에서 북극성을 바라본 각도인 북극출지 또는 북극고도라고 칭했다. 세종대왕은 역법이 정밀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선발하여 역법에 필요한 산법을 익히게 했는데, 이순지가 가장 뛰어났다. 특히 이순지가 세종대왕의 눈에 들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사건이었다. 한반도의 가운데가 북위 38도라는 보고를 받은 세종대왕은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들여 온 역서를 통해 이순지가 계산한 결과가 정확하다는 것을 알고 크게 기뻐하며 1431년부터 이순지에게 천문 관측과 역법에 관한 일을 맡겼다.마지막으로는 세종부터 성종까지 조선 전기의 왕들 측근에서 다양한 방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고 왕들의 큰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이순지의 성품이다. 이순지는 세종 때 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시묘살이를 하기 위해 낙향하였는데 이에 세종은 “이순지를 대신할 만한 사람이 없으면 나는 마땅히 그 사람을 기복(상을 당해 휴직 중인 관리를 복상 기간 중에도 직무를 보게 함) 시킬 것이다.”라고 하며 이순지를 다시 관리로 기복하는 등 그의 능력을 크게 신뢰하였고 항상 곁에 두려고 하였다. 또 이순지는 청탁사건에 휘말려 의금부에서는 이순지를 비롯한 관련자 모두를 처형할 것을 주장했지만, 세종은 파면으로 마무리 짓도록 했고 이후 관련자들에게 다시 직첩을 내려 관리로 삼았다. 이렇듯 세종 때에 이순지는 많은 고초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지의 올곧은 성품과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꾸준히 관리로서, 학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이후 몇 번의 곤경이 있기는 했지만 이순지는 세종, 문종, 단종, 세조대를 거치는 동안 여러 관직들을 역임하며 대체로 평탄한 관직 생활을 했다. 이순지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463년 세조는 이순지가 지리서를 바치자 이순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이렇게 말했다. “이와 같은 일은 이순지 처럼 정교하게 할 사람이 없다. 나는 음양과 지리 등의 일은 반드시 이 사람과 의논하겠다.” 라고 했으며 또 세조실록에선 “이순지의 성품은 정교하며 산학, 천문, 음양, 풍수에 매우 밝았다. 몸을 공손히 하고 말이 드물고, 모든 일에 임할 때 절제가 있다.”라고 평가하며 세조 또한 이순지에 관한 신뢰를 나타냈다. 이후 이순지가 죽은 후 즉위한 성종 때에도 이순지와 같은 능력을 가진 자가 없다는 것을 안타까워했던 기록으로 보아 이순지는 그만큼 본인의 분야에 충실했고 그 능력도 뛰어나 왕들의 총애를 받던 인물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인문/어학| 2015.05.22| 2페이지| 1,000원| 조회(95)
    미리보기
  • 조선과 중국, 근세 500년을 가다
    1. 서론『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라는 책 제목은 평범하면서도 낯선 느낌을 던져준다. 흔히 조선왕조 오백년이라고 귀에 익은 우리에게, 한 왕조가 100~200년 이상을 넘기면 장수했다고 평해지는 중국과의 엮임은 새롭고도 기묘한 위화감을 들게 한다. 하지만 이런 제목보다도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이 책을 만든 지은이다. 『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는 두 명의 일본 역사학자가 펴낸 책으로, 긴밀한 역사관계를 맺고 있는, 또는 서로 얽혀 있는 한국과 중국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을 위해 집필된 책이다. 이 책은 동아시아의 격변기 중 하나였던 13세기, 즉 중국 대륙의 원·명 교체기와 조선의 고려·조선 왕조의 교체기부터 청나라와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고 몰락했던 때까지의 역사를 담고 있다. 이 시기는 시간적으로는 500년에 가깝고 그 사이에 크고 작은 여러 가지 변동이 일어났었는데, 두 저자는 양국의 근세사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서술해냈다. 또한 이 시기를 한국과 중국의 ‘전통 형성의 시대’라고 정의내리며 이 책이 집필된 의의를 찾고 있다.그러나 객관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데 치중한 나머지 각국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한 한계도 보인다. 저자는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사를 하나의 큰 틀로 묶어 해석했으며, 이것이 두 나라의 특수성이나 개별적인 발전을 배제하게 된 배경으로 작용했다. 이는 저자들이 책을 펴낸 의도와는 상통할지 모르겠으나, 한국과 중국이 오랜 역사를 지나면서 나름의 특징을 만들어낸 것을 간과했다는 점이 또 다른 문제점을 파생시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존재한다.저자가 말하는 근세 오백년 최대의 특징은 오늘날 한국이나 중국의 전통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이 시대에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문화, 전통적인 생활습관, 가족·친족제도 등등이 모두 이 시대에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한국과 중국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시대라는 것이다.본론에서는 이 책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고 비판한 이후지도를 통해 그 시기 동아시아 세계의 세계관을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중국에서는 송 멸망으로 세워진 원나라도 기력이 쇠하고 원 말기 주원장이 등장하였다. 그는 명 왕조를 세우고 홍무제로 즉위하였다. 한반도에서는 공민왕의 죽음으로 인해 고려가 흔들렸다.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을 격파한 이성계가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왕씨 고려로부터 이씨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었다. 그 후 왕자의 난으로 태종이, 한글을 만든 세종이 차례로 즉위했으며, 세종의 아들 문종과 그 아들 단종이 즉위했으나 조카를 죽이고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했다. 필자는 『해동제국기』를 제시하여 조선의 외교관계에 대해서도 서술했다.「2장 명 제국의 확대」는 본격적으로 명나라에 대해 서술한다. 홍무제의 아들 중 가장 유능한 아들은 연왕 주체朱?였다. 그는 건문제를 이기고 3대 영락제로 즉위했다. 그는 북경으로 천도하였고, 북으로는 몽골리아 원정을, 남으로는 정화가 이끄는 대항해를 단행했다. 또한 그는 환관을 기용하기 시작했는데, 환관의 정치 활동은 명대 정치체제의 특징으로 남았다. 2장에서는 정통제가 오이라트의 포로가 되는 ‘토목의 변’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이때 만리장성이 세워졌다. 그 후 성화제·홍치제 연간에는 세절이 태평했으며, 명의 통치체제, 지방 행정제도, 과거제도에 대해서도 덧붙였다.「3장 양반의 세기 - 16세기 조선」은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통해 조선 전기를 조명한다. 그의 일기에는 다양한 사람들에 대해 언급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친족 개념, 족보, 향촌 지배 등 조선의 양반 생활상에 대해 잘 알 수 있다. 미야지마 히로시는 조선과거제가 중국에 비해 특정한 소수 가문에서 많은 합격자들을 배출했다며 서술했고, 이의 연장선에서 조선의 ‘양반’이라는 개념을 신분이 아닌 사회계층이라 주장했다. 조선 중기로 달려감에 이러한 양반 관료들의 당쟁이 확산되는데, 이때 희춘 일가는 몰락했다.「4장 후기 명 제국의 빛과 그림자」에서는 명말이라는 시대는 혼란 그 자체였다고 설명한다.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위협을 극복했으며, 만력제 시기 재상 장거정은 재정 상황을 개선하는 공을 세웠으나 사익 추구로 정계에서 쫓겨났다. 천계제 때에는 환관 위충현이 실권을 잡았고 그에 대항하는 주순창의 개독의 변이 일어났다.「5장 화이변태」는 명에서 청으로 왕조 교체를 주로 이야기 한다. 조선에서는 일본의 침략으로 임진·정유재란이 있었다. 중국에서도 왜구의 침략이 있었고 방위를 위해 파견된 군인이 군벌로 성장했다. 대표적 인물이 요동의 이성량과 해상 군벌 정지룡이다. 이성량의 비호 하에 누르하치는 후금을 세웠고, 2대 혼타이지가 몽골도 정복하면서 국호를 청으로 바꿨다. 명나라에서는 이자성의 농민반란군이 흥하면서 북경을 압박해 숭정제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남경에서 홍광제 중심으로 남명 정권이 수립됐지만 이내 후금에 패하여 청이 중국대륙을 정복하게 되었다. 1673년 평서번, 평남번, 정남번의 한인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지만(삼번의 난) 실패하고, 타이완이 청에 점령되면서 청 왕조 지배가 확립되었다.「6장 조선 전통사회의 성립」에서는 병자호란 때 포로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이야기로 시작한다. 소현세자는 귀국 후 급사했고, 봉림대군은 효종이 되어 북벌론을 일으켰다. 병자호란은 광해군은 균형 외교 노선을 반정의 명분으로 삼았던 인조로 인해 발발한 것이었다. 인조반정은 또한 당쟁의 시작이기도 했다. 당쟁의 주도권은 현종대까지는 왕위 교체시 이동이 일어났지만 숙종대에는 여러 번의 정권 이동이 있었다. 16세기 말 조선은 대동법, 균역법 등이 시행되었으며 장시와 상업이 발달하였고, 우리나라 전통이 형성된 시기이다.「7장 청 왕조의 평화」는 강희제, 옹정제의 시기가 평화로웠음을 말하고 있다. 강희제는 문무에 능했으며 유학과 서양과학 모두 상당한 소양을 보였다. 옹정제는 종족에 구애받지 않고 실력주의적 입장을 취했다.「8장 새로운 도전자들 - 왕조 말기의 조선」에서는 향리와 재지사족의 향촌사회 지배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실학이 등장하는데, 본문에서는 대표적인 실학사상혁의 꿈을 실현해나갔다. 정조 이후 조선 후기는 신분제가 동요하고 노비제가 해체되었으며 민란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9장 성세에서 위기로」는 마지막으로 건륭제와 가경제 때 사회상을 보여준다. 청대 중기 장편소설 『홍루몽』과 그 배경에 대한 논쟁과, 홍루몽과 함께 청대 중기를 대표하는 소설 『유림외사』에 대해서도 소개한다. 명말 양명학이 흥했던 것에 비해 청조에서는 고증학이 등장하였다. 청 왕조의 최전성기는 건륭제 시기였는데, 그는 중국의 영토를 확장하여 스스로를 십전노인이라 칭했다. 18세기 중반은 물가가 폭등하고 폭동이 빈발했다. 이는 공급이 감소한 것이 아니라 인구급증 등으로 수요가 대폭 늘어난 호황기였던 탓이었다. 건륭제 치세 후 즉위한 가경제는 백련교의 반란이라는 위기를 겪었다.마지막으로 「10장 사람과 사회 - 비교 전통 사회론」은 중국의 ‘가家’와 문중조직이나 양반, 향리의 자치조직 등 조선의 중간단체를 일본과 비교하며 중국과 조선의 사회를 설명하였다.3. 몇 가지 비판점들먼저 나는 양반을 사회계층이라 정한 미야지마 히로시의 주장이 흥미로웠다. 그는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조선의 양반은 지배신분이지만, 한번 획득한 양반으로서의 사회적 인지가 시간 경과에 따라 소멸되는 경우가 있으며 양반으로 인지되는 것은 향안이 작성되는 단위인 읍 안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에 양반은 사회계층의 하나라고 주장한다.그러나 나는 양반이라는 개념이 사회계층으로만 작용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에서 양반이라는 지위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다. 물론 조선 후기에 가서는 족보를 사서 양반 행세를 하는 중인이나 평민도 생겨나고, 공명첩 발급처럼 국가에서 아예 양반 신분을 인정해 주는 등 신분 변동이 크게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공명첩은 국가의 재정이 곤란한 상황 등 위급할 때 만들어진 특수한 제도였고, 족보를 사는 것은 공정한 방도가 아니었다. 이처럼 다들 양반이 되려 하는 데에는 양반이라는 계층이 특수한 어떤 권한을 쥐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는 바로 지배와리 잡고 있었던 집단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16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서 전국의 장시망이 형성되었지만, 상업의 발전이라는 면에서 보면 조선왕조 사회는 같은 시기의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할 때 빛을 잃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저자는 상업 부진의 근본적인 문제로 지배층의 존재 형태를 언급하는데, 양반들은 스스로가 소유하는 농지나 노비로부터 물자를 조달하고, 기본적으로 시장 교환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하지만 조선시대 상업의 부진을 단지 지배층의 존재 형태로 설명할 수 있을까? 저자 역시 국가가 상업 정책에 대해 매우 소극적이었다는 점을 중요한 이유로 언급하고는 있지만, 책에서 언급했듯이 상설 점포의 결여와 화폐의 미발달은 지배층의 존재 형태와는 그 연결고리가 미약하다.우선 상설 점포보다 5일장과 같은 주기적인 점포가 열렸던 것은 조선의 사회와 지형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과거 대부분의 사회가 그러했듯이 당시 하나의 마을에서는 거의 같은 종류의 물품을 생산했다. 농업이면 농업, 어업이면 어업인 식이었다. 따라서 하나의 마을에서는 자급자족이 힘든 측면이 있었는데 이러한 요구에 따라 발생한 것이 일정 구역에서 주기적으로 열리는 장시였다. 거래되는 상품은 곡물이나 면포 등 지역 내에서 생산된 물품과 소금이나 해산물 등 지역 내에서 생산이 불가은한 물품과의 거래가 주류였다. 또한 보부상이 와서 지역 밖으로부터 상품을 가져오기도 했는데 이것이 조선 사회의 거래 형태였으며 지배층의 존재 형태와는 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한반도의 지형 또한 상업의 부진에 영향을 미쳤다. 중국은 광활한 대륙을 통치하기 위해서 도로 및 수레 이용이 활발했는데 이는 상업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으며, 일본은 척박한 지형으로 인해 해적(왜구)질이 성행했을 만큼 먹고 사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돈을 벌기 위한 수단, 필요한 물품을 얻기 위한 상업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조선은 열하 박지원이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지적했듯이 도로
    독후감/창작| 2015.05.22| 5페이지| 1,500원| 조회(191)
    미리보기
  • 십자군원정과 유럽정치질서의 변화
    십자군 원정과 유럽질서의 변화목차1. 서론2. 십자군 원정1) 십자군 원정의 배경2) 십자군 원정의 과정3. 십자군 원정이 유럽 정치질서에 미친 영향4. 결론1. 서론기독교는 탄생 초기에 로마제국 황제들에게 박해를 받으면서도 교세를 확장해왔다. 그러다가 4세기 초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종식되고, 313년에 밀라노칙령을 통해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29년 포고령을 통해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했고, 기독교는 정통 기독 교리 정립, 많은 수도원 창설 등 여러 분야에서 크게 성장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5세기 중반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로마제국이 멸망하자, 기독교 자체도 붕괴될 위기에 처하게 되지만, 선교의 열의를 잃지 않고 유럽의 새 주인으로 등장한 게르만족을 개종시키고 유럽의 역사에 새로운 중세문화를 탄생시켰다. 새로운 문화란 유럽의 각 국가들이 민족적 특성을 지니면서 같은 신앙을 갖게 됨을 의미하는데, 이로 인해 중세 시대의 유럽은 기독교로 하나가 되어 기독 문화를 공유하게 된다.교황의 말 한마디면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가졌던 기독교는 점차 세속적 욕망으로 타락하게 되었고 11세기에 들어서면서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바로 십자군 원정의 시작이었는데, 이 원정길이 기독교 중심의 유럽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길이 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200여년이나 이어진 기나긴 원정길이 유럽 사회에 전반적으로 미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았지만, 전쟁 이후에 시작된 백년전쟁(1337∼1453)이나 14세기에 시작된 르네상스 운동으로 인해 그 영향이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적게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십자군 원정은 단순히 광적인 신앙심이나 교황청의 욕심으로 인한 소득 없는 전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따라서 본론에서는 십자군 원정의 배경과 과정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본 후, 십자군 원정이 이후 유럽 정치질서의 변화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도록 하겠다.2. 십자군 원정1) 십주들의 지휘 하에 동유럽과 중동에서 막강한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1025년에 바실리우스 2세가 죽은 후 약 반세기 동안 13명의 황제가 난립하며 혼란과 쇠퇴를 가져왔고, 동쪽에서 셀주크 투르크가 노도처럼 밀려오면서 제국은 위기에 처했다. 비잔틴 제국의 저항을 물리치고, 셀주크 투르크는 이집트를 제외한 중동을 장악하게 된다.카노사의 굴욕은 로마 교황과 독일(신성로마 제국) 황제의 극한 대립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독일 지역 사제들의 서임권이 황제에게 있느냐, 교황에게 있느냐를 놓고 하인리히 4세 황제와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이 서로를 부정하면서 빚어진 충돌에 따라, 일단 하인리히 4세가 카노사에서 교황에게 머리를 숙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교황권이 최종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어서, 1088년에 선출된 우르바누스 2세도 클레멘스 3세와 대립하는 한편 하인리히 7세 황제와 프랑스 왕 필립 1세를 파문하는 등 세속군주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이처럼 동과 서의 로마가 모두 위기에 처한 가운데, 서로 힘을 합쳐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미 1073년에 그레고리오 교황이 비잔틴에 사절을 파견하여 ‘이교도들을 몰아내는 일에 협력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 뒤 1095년, 비잔틴에서 알렉시우스가 보낸 사절이 피아첸차 공의회에 참석하여 ‘이교도와의 전쟁에 힘을 빌려주기 바란다’는 뜻을 전하자,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은 이를 기회로 판단했다. 자신이 치켜든 깃발 아래 전 유럽의 봉건영주와 기사들이 움직인다면, 교황의 입지를 굳건히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8개월 뒤의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마침내 ‘십자군’을 제창한다. 만약 비잔틴이 이슬람 제국에게 속수무책으로 밀리지 않았다면 굳이 유럽을 끌어들이려 하지 않았을 것이고, 교황이 독일 황제와 대립하고 있지 않았다면 비잔틴의 요청을 무시하거나 황제에게 일임했을 것이다. 200여년 동안 이어진 십자군 전쟁은 동서 양 교회의 서로의 이익을 위한 발상에서 시작된 것이다.2) 십자군 원정의 과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십자군 원정의 첫 번째 원정대는 바로 ‘민중 십자군’이었다. 일반 농민과 유랑민 위주로 구성된 민중 십자군은 변변한 무기와 식량도 없고, 지도나 정보도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예루살렘을 찾아갈 수 없었다. 헝가리에서 현지인들과 충돌을 일으켜 ‘십자군 사상 첫 싸움’을 같은 유럽 기독교도들과 치렀다는 불명예도 남겼다. 먼 길을 돌아 비잔틴에 도착한 민중 십자군은 1096년에 허무하게 격파된다. 하지만 정식으로 출병한 십자군은 힘을 합쳐 진군하면서 이슬람 세력을 차례로 격파했고 1099년, 예루살렘을 함락하기에 이른다.여기까지만 보면 십자군 원정은 성공적으로 보이고, 한동안 중동에서도 십자군 국가의 기독교인과 군소 도시에 거주하는 무슬림이 공존하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십자군 국가가 다시 공격을 받는 상황이 발생하고, 2차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2차 십자군은 별다른 소득이 없이 이슬람군에게 패배하고 귀환하였다.1187년에는 이슬람 제국의 살라딘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이슬람 제국에게 점령되자, 예루살렘의 탈환을 위한 3차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보통 십자군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3차 십자군인데,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처드 1세는 예루살렘을 점령해봤자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이슬람교도들에게 빼앗길 것으로 여기고 살라딘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면서 예루살렘 탈환 작전은 또다시 실패로 끝났다.4차 십자군 원정은 예루살렘이 아닌 이슬람교의 본거지인 이집트 공략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지중해를 건너는 데 필요한 수송 자금이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십자군의 수송을 하청 받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수송 자금의 부족분을 지불하기 위해 헝가리 왕국을 공략하였다. 같은 기독교 국가를 공격하였기 때문에 4차 십자군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한다. 그럼에도 베네치아는 헝가리를 공략한 다음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를 점령하고 라틴 제국을 건국했다. 하는 수 없이 교황청은 라틴 제국을 승인하고, 그 대신리히 2세가 이를 이행하려 하지 않자 그를 파문하였다. 1228년이 되어서야 프리드리히 2세는 파문된 채로 십자군을 일으켰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집트를 상대로 교묘한 외교 정책을 펼쳐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고,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이양 받았다. 그러나 1239년에 맘루크 왕조가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하면서 휴전은 유명무실해졌다.7차, 8차 십자군 원정은 프랑스의 성왕이라고 평가를 받던 루이 9세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1244년, 예루살렘이 이슬람교 측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고, 2천 명 남짓한 그리스도인들이 학살되었다. 그리하여 1248년 오랫동안 십자군 원정을 준비한 루이가 원정에 나섰지만, 1250년 그 자신도 포로가 되어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석방되었다.8차 십자군 원정에서는 프랑스의 성왕 루이 9세가 재차 출병하여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공격했다. 이때 시칠리아 왕인 루이의 동생 샤를도 형을 도와 출병하였으나 루이는 1270년 튀니스에서 사망하였고, 샤를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와 함께 십자군 원정을 계속했으나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한편 맘루크의 바이바르스는 계속 전진하여 트리폴리를 차지하고, 1291년에는 팔레스타인에 마지막 남은 십자군 지역인 아크레마저 점령하여 사실상 십자군 원정은 막을 내렸다.3. 십자군 원정이 유럽 정치질서에 미친 영향성지 탈환과 비잔틴 제국의 구원이라는 목표로 시작된 십자군 원정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지만, 200여년의 원정이 유럽 사회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정치질서의 변화를 중심으로 얘기하자면 교황권의 추락과 왕권의 강화를 빼놓을 수가 없다.유럽 대륙 내의 교황권 강화와 동서 교회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목적으로 제창되고 결성된 십자군 원정의 실패는 부메랑처럼 로마 교황을 향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유럽에서 세속군주들과 세력 다툼을 하면서도 어쨌든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교황이었지만, 십자군 원정의 실패는 민중들이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고, 군주들과는 더욱 거리가 멀어지는 결과를 낳았다다. 반면, 교황권의 추락에 상대적으로 왕권은 강화되었다. 십자군 원정 동안 교황은 실질적인 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군주들은 교황의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게 되었고, 따라서 왕권이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또한 십자군 원정은 군주뿐만 아니라 영주들도 많이 참전했는데, 장원의 농민들이 그들의 군대로 이용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십자군이 거듭 실패하며 많은 농민들이 죽자, 노동력이 감소하여 토지 생산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십자군의 병력이 유럽 경제의 뿌리를 뽑을 만큼 많은 병력은 아니었으나 분명히 유럽 내의 경제 상황에는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원정로를 따라 동방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며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등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이 번성하게 되었고, 이는 토지 중심의 장원 제도를 무너뜨리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한편, 장원 제도의 근본이자 영주들의 경제적 수입의 중요한 축이었던 농민들이 줄어들자, 영주의 세력도 약해지게 되었고 이에 영주들은 군주들에게 다시 영토를 바치고 권력을 포기하게 된다. 이에 따라 권력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물론 이는 십자군 원정 직후에 발생한 현상은 아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에서 국가의 총운을 걸었던 큰 전쟁을 각각 방어할 수 없었던 프랑스의 영주들은 왕을 중심으로 군을 결성하게 되었고, 전쟁을 위한 세금을 바치며 토지는 황폐화되었기에 영주들이 몰락하고 왕권이 강화된 것이다. 하지만 십자군 원정을 겪으면서 중앙통치의 필요성을 절감했으며, 십자군 원정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군을 보유하기 힘든 상황으로 인해 백년전쟁에서의 프랑스의 중앙집권화가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본다. 즉, 영주의 몰락은 십자군 원정 이후 천천히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마지막으로 십자군 원정이 서양의 정치질서에 미친 영향으로 세금제도의 발달과 그 과정에서 있었던 아비뇽 유수(1309∼1377)를 꼽을 수 있다. 십자군 원정 당시 왕은 제한적이나마 귀족과 중산층에게서 세금
    인문/어학| 2015.05.22| 6페이지| 1,500원| 조회(179)
    미리보기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4월 18일 토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9:34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