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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일본경제 불황과 현 실태 평가A좋아요
    - 일본경제 불황과 현 실태-목차Ⅰ. 서론Ⅱ. 일본경제의 장기불황1. 일본경제의 장기불황 전개 과정(1) 플라자 합의(2) 일본 은행의 공격적인 금리인하(3) 자산 버블의 발생(4) 버블붕괴, 금융부실 발생(5) 금융부실의 누적(6) 금융위기의 발생2. 장기불황의 원인(1) 금융규제완화로 인한 문제(2) 내수부진에 관한 문제(3) 유동성 함정(4) 금융부실에 대한 뒤늦은 정책대응(5) 부동산 관련 제도의 문제Ⅲ. 장기불황 이후의 일본경제1. 장기불황에서 회복중인 일본경제(1) 개설(2) 지속적인 경상수지 흑자(3) 기업부문의 강화2. 경제회복을 가로막는 장애물(1) 정부부문의 재정적자(2) 엔고Ⅳ. 결론※ 참고문헌Ⅰ.서론일본경제가 최근까지 “잃어버린 10년” 이라 일컬어지는 장기불황을 겪어 온 것은 굳이 일본경제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도 알 수 있듯이 굉장히 많이 이슈화되었고, 이에 따라 많은 연구 결과들이 쏟아져 왔다. 실제로 일본경제를 조사함에 있어서 가장 많은 서적과 논문을 접할 수 있었던 내용이 바로 일본경제의 장기불황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일본경제가 무엇 때문에 1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연평균 성장률이 0.9%밖에 안 되는 장기불황을 겪게 되었는지는 굉장히 흥미로운 주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더 놀랍고 흥미로운 것은 계속 될 것만 같았던 일본의 장기불황이 2003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회복 중에 있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일본경제는 과연 장기불황에서 벗어난 것인가? 사실 타국의 학부생들이 일본이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경제를 이해하고, 일본경제에 대해 평가한다는 것은 쥐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 만큼이나 어렵고 또 우스꽝스러운 시도일지도 모른다. 또한 최근 미국의 서브프라임 쇼크와 엔고현상과 관련하여 일본의 국내외 상황이 급변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경제에 대해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대한 관련서적과 논문, 그리고 언론매체 등을이용하여 최대한 양질의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먼저 이를 이어가고, 엔화가치 급등으로 인해 일본경제의 대외적인 위상도 한층 높아졌다. 일본의 거시경제 지표자료: 일본은행(3) 자산 버블의 발생하지만 일본정부가 내수부양을 위해 공격적으로 금리를 인하하는 과정에서 주식 및 부동산 등 자산시장에서 버블이 만들어졌다. 1987년부터 M2+CD)의 증가율이 서서히 높아지기 시작하였고, 자산가격의 급격한 상승세가 나타나 1987년 하반기에는 도쿄의 토지가격 상승률이 전년대비 80%를 기록하게 되었다. 자산 버블의 규모를 살펴보면, 주식가격의 정점은 1989년 말 이었는데, 이 시점에서 Nikkei225는 38,915포인트로 1985년 9월 플라자협정 당시의 3.1배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지대의 경우 전 도시 토지가격지수 기준으로 1990년 9월이 정점이었는데, 이는 1985년 9월과 비교하여 4배 정도 높아진 상태였다. 이러한 자산버블이 꼭 금리인하 때문 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공격적인 금리 인하가 자산 버블을 가속화시켰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4) 버블붕괴, 금융부실 발생일본은행은 1989년 5월을 기점으로 금리를 인상하기 시작했다. 1989년 5월의 공정 재할인율은 2.5%에서 3.25%로 75bp 인상되었는데, 그 뒤에도 1989년 10월 50bp, 1989년 12월 50bp, 1990년 3월 100bp, 1990년 8월 75bp 등 15개월 동안 5회에 걸쳐 총 350bp가 인상되었다. 1년 3개월 동안 정책금리가 2.5%에서 6.0%로 두 배 이상 인상된 것이었다.당시의 물가가 별로 불안하지 않던 상황에서 일본은행이 급격하게 금리를 인상하였던 배경은 그동안의 부동산 버블이 경제문제를 넘어 사회적인 문제로 비화되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물가는 극도로 안정되어 있다고 하지만 부동산 가격이 너무 올라 청년층과 서민, 중산층이 집을 마련하기는 어려워졌고 그에 따른 사회적 불만이 극도로 고조되었던 것이다. (박종규, 2007)급격한 금리인상에 의해 가장 먼저 영향을 받은 것은 주가였다. 1989년의 세 차한 부실채권 문제가 해결이 계속 지연되면서 점점 심각성을 더해 가다가 급기야 1997년말에 이르러 일본에 금융위기가 발생한다. 이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1995년 중반에 이르러서는 두 개의 대형 신용조합과 지방은행이 부실채권 문제로 파산하였다. 가을에는 Daiwa와 주센에 대해 문제가 발생하였고, 이를 처리하기 위해 민간 및 공적자금이 투입되었다. 이와 같이 금융권이 어려움을 겪게 되자 신용평가기관들은 일본은행들의 신용등급을 낮추기 시작하였다. 장기신용은행, 일본채권은행, 북해도 척식은행, 그리고 Daiwa 등은 A에서 BBB까지 내려갔다.1997년에는 급기야 금융기관들이 파산하기 시작했는데, 1997년 11월 3일 산요증권이 은행간 대출시장에서 채무를 불이행한 것을 시작으로 11월 중순에는 북해도척식은행이 붕괴되었고, 11월 말에는 4대 증권회사이던 야마이치 증권이 붕괴되었다. 이에 따라 일부 대형 은행의 신용등급이 BBB또는 BB까지 하락하였다.이렇게 금융기관이 줄지어 파산하기 직전이던 1997년 5월부터 일본경제는 하강기에 접어들고 있었는데 이 경기침체는 1999년 1월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의 경기침체는 일본국내의 금융위기와 함께 아시아 외환위기까지 겹치면서 전후 최악의 상태가 되었다. 금융위기와 함께 찾아온 침체기 동안에는 5개 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하여야 했으며 1998년부터는 소비자물가지수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이 찾아왔다. 일본의 부동산 지수 추이자료: Bloomberg1997년 이후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해왔던 일본은 1999년에 전세계적인 IT붐에 편승하여 2000년에 설비투자가 회복되고 경제성장률이 빨라지면서 잠시 경기회복을 하지만 2000년 하반기부터 IT산업의 버블이 붕괴하면서 1년 만에 다시 불황으로 접어들게 된다. 결국 일본은 1992년부터 2001년까지 10년 동안 불황이 지속됨으로서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불명예를 얻게 된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의 일인당 GDP 성장률이 평균 2.6% 이었던데 비해 일본의 일인당는 60대 이상의 세대가 보유하고 있었다. 이렇게 소비지출의 주 대상이 소비성향이 낮은 노년층이므로 금융자산규모는 막대하지만 이것이 소비증가로 이어지길 기대하기는 어려웠다.또한 일본 소비자들의 소득여건을 살펴보면 활발한 소비증가를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장기침체의 기간 동안 일본의 임금상승률은 과잉고용이 있었던 버블기에 비해 대폭 둔화될 수밖에 없었으며 특히 금융위기로 심각한 경기침체와 함께 디플레이션이 나타났던 1980년부터는 명목임금이 감소세로 접어들어, 경기가 회복을 시작한 2002년은 물론 2004년 상반기에 이르기까지 무려 약 7년 동안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 1998년 이후의 디플레이션으로 명목임금 하락에도 불구하고 실질임금은 오히려 늘어났을 것으로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실제로 실질임금이 증가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전 산업 임금을 소비자물가지수로 나누어 실질화하여 볼 때, 1998년에서 2004년까지의 기간 동안 2000년 한 해를 제외하면 실질임금은 명목임금과 함께 지속적으로 하락한 것이다.소득의 범위를 좀더 넓혀 임금소득과 재산소득 등을 포함하는 실질 가처분소득의 증가추이를 살펴보면, 1970년대에는 매년 평균 6.0%씩 증가하였다가 1980년대에는 2.8%의 증가로 둔화되고 있었다. 그 뒤 1990년대 들어 1998년까지는 평균 2.0% 증가를 지속하였지만 1999년에는 최초로 음의 값인 -0.9%를 기록하였다. 실질 가처분소득 가운데 순자산소득은 저금리 기조로 인해 1992년까지 빠르게 증가하다가 세금감면이 없어지고 건강보험지급금이 삭감되기 시작한 1997년에는 감소하였다. 이 가운데 근로소득은 1998년에서 데이터가 가용한 2004년까지의 기간 중 2000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크게 줄어들어 가장 두드러진 소득감소 요인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의 전 산업 실질임금 연도별 상승률 추이자료: 일본 통계국또한 고령화와 임금하락 문제와 더불어 민간 소비가 증가하기 힘들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일본 소비자들의 성향 문제라 할 수 있다. 장기침체 되었고 최종적인 문제해결비용도 점점 늘어났다.일본정부가 공적자금을 가급적 동원하지 않으려고 한 데에는 부동산 버블 붕괴에 따른 경기침체를 일시적 또는 순화적인 침체로 판단한 것도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즉, 좀 더 시간이 지나 경기가 회복되면 지가와 주가 등이 회복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부실채권 문제도 자연히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부실채권문제 처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4) 부동산 관련 제도의 문제일본의 조세제도는 부동산 버블의 확장이 용이하도록 짜여져 있었다. 토지 보유에 대한 실효세율은 토지거래에 대한 실효세율보다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러한 인센티브 구조는 지가상승이 지속되고 있는 여건과 더불어 미래의 추가적 가격상승에 대한 기대로 토지를 계속 보유하도록 함으로써 토지공급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토지공급의 부족은 토지가격 상승을 유발하였고, 이는 다시 토지공급을 억제하는 악순환이 정착되었다. 그러나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부동산 보유에 부담을 늘리는 방향의 세제개편은,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정책과제였다.또한 부동산 관련 행정정책도 부동산 버블의 형성 및 팽창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1987년 일본정부는 수도권 인구집중을 막고 국토 균형발전을 위해 수도의 기능을 동경 이외의 지역으로 이전하는 방안을 마련했다고 한다. 동경을 비롯한 대도시의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이전하고 지방도시에 소프트웨어 중심의 산업도시 육성계획도 마련하였다. 이러한 정책들을 통해 일본의 정책당국자들은 지가상승이 수도 및 대도시에 편중되는 현상을 억제하는 효과를 기대했었지만 결과적으로 부동산 버블확대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예를 들어, 리조트 법을 만든 이후 대규모 리조트 유치경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국토면적의 20%가 넘는 초대형 리조트 건설계획이 쏟아졌다고 한다. 이러한 정책들은 지방의 부동산 가격의 상승기대를 높임으로써 수도권에서 시작된 버블이 지방으로 퍼져나가도록 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판단된다(박종규, 2007작했다.
    경영/경제| 2011.04.08| 25페이지| 2,000원| 조회(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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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미국이 패권국으로서 위상을 다지게 된 과정
    ..PAGE:1미국이 패권국으로서 위상을 다지게 된 과정..PAGE:2미국이 패권국으로서 위상을 다지게 된 과정미국이 여전히 패권국 주도 가능한 이유?파탄 난 미국경제가 여전히 굴러가는 이유는?목차..PAGE:3미국이 패권국으로서 위상을 다지게 된 과정영국은 IMF가 국제통화의 발권력을 보유해야한다고 주장미국이 국제통화의 발권력을 독점금환본위제도 채택(달러화의 발행을 금 보유와 연계)..PAGE:4제 2차 세계 대전을 치른 후 이미 미국의 총생산은 세계 총생산의 절반 이상을 상회군사적으로는 공산주의를 봉쇄경제적으로는 국제경제관계를 그들의 이해에 맞게 전면 재조정자본주의 진영의 결속의 다지는 것이 패권의 요체..PAGE:5제 2차 세계대천 후,마샬플랜 단행 서유럽 경제가 부흥미국의 대유럽 수출이 증대되어 미국이 투여한 자금이 회수 될 것임서유럽은 다른 지역에 대한 무역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낮음기술적으로도 상당한 수준을 견지국내경제의 활성화만으로도 재건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판단..PAGE:6일본경제는 수출의존경제체제즉 방대한 수출시장이 없이는 일본의 부흥이 어렵다고 판단일본의 경우는 대미 수출증대로 미국의 자본이 일본으로 유출될 것임으로 전체적으로는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판단쌍무적인 안보조약을 통해 공산 중국과 소련에 대한 안전을 보장해줌방대한 미국시장을 일본의 수출 증진을 위해 개방시켰다.수출주도형 경제성장정책이 실행..PAGE:7미국이 월남전에 장기적으로 묶이며미국은 일본은 물론 서유럽에 대해서도 무역적자를 기록하게 되었고,이를 메우기 위한 달러화의 남발에 대해 유럽이 항의달러화의 금태환 금지 조치를 전격 단행했던 것이다.그것은 금과 등가의 가치를 지닌 기존의 달러화가 단순 지폐(paper money)로 전락하는 것을 의미했다...PAGE:8미국이 여전히 패권국 주도 가능한 이유?서유럽 경제의 중심축인 독일은 2005년 약 9,800억 달러의 수출을 기록한 세계 최대의 수출 국가나아가 미국 및 일본과는 비교도 안 되게 무역의존도가 높은 나라이다(2005년, 미국: 18%, 일본: 22%, 독일:61%).2005년, 약 2,000억 달러)결국 대규모의 무역흑자를 즐기며 그것을 먹고 살아온 나라인데, 갑자기 엄청난 적자를 감수하며 세계패권을 추구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PAGE:9미국 달러화의 위상추락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중국,일본,독일을 비롯한 여러나라에서 대규모 무역흑자로 축적된 자본이 미국으로 역수출 되었음그 이유는 미국의 자본시장은 가장 안전했으며투자에 대한 이익을 보장했고 나아가 현금화가 가능한 좋은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PAGE:10미국의 대외무역 의존도는 약 18%로 OECD 국가 중 최저이다.내수 중심으로오래 동안 성장한 국가이므로석유와 같은 전략물자를 제외하곤 무역 없이도 큰 문제가 없는 나라인 셈이다.개발도상 국가들의 수출주도형 정책을 가능하게 했던 미국의 방대한 무역적자정책이 한계에 이르렀다
    경영/경제| 2011.04.08| 13페이지| 2,000원| 조회(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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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미국 경제의 변화와 현주소
    제목: 미국 경제의 변화와 현주소목 차I. 서론II. 본론1. 국가현황1.1 미국의 개요1.2 미국의 독립2. 미국의 경제적 변화2-1 19세기 현황2-2 제1차 세계대전 (1914~1917년) 이후2-3 대공황의 영향 - 미국2-4 대공황의 영향 - 세계2-5 뉴딜정책2-6 제2차 세계대전2-7 제2차 세계대전 이후2-8 급속한 경제성장과 냉전의 시작 (1950년대)2-9 1960년대 빈곤의 퇴치와 그 한계 - 베트남 전쟁2-10 닉슨시대 - 오일쇼크 및 경제 불황2-11 포드, 지미 카터, 레이건 정부 - 극복기2-12 부시정부와 걸프전2-13 클린턴 정부와 부시 Jr 정부3.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3-1 서브프라임 개요3-2 서브프라임 사태의 경위와 배경3-3 서브프라임 사태의 심화요인3-4 서브프라임 사태의 파급현상3-5 미국 서브프라임과 한국 IMF 외환위기 비교3-6 서브프라임 사태에 대한 평가4. 미국경제의 현주소4.1 미국경제와 세계경제와의 상관관계4.2 현재의 미국경기 지표4.3 미국경제의 나비효과4.4 미국경제 전망 및 평가4.5 미 당국의 정책대응5. 미국경기 후퇴에 따른 시사점III. 결론I. 서론광활한 대지, 철강-석탄-석유와 같은 무궁한 자원, 대서양과 태평양을 접하고 있는 지리적인 위치 그리고독보적인 첨단과학과 기술의 진보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탄생된 미국은 대략 200년의 짧은 역사를 가졌지만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강대국이며 세계의 중심에 서 있다.이렇게 막강한 권력과 경제력으로 세계 최강대국이라는 말이 전혀 무색치 않은 나라 미국에 지금 어두운 먹구름이드리워져 있고, 이로 인해 세계경제의 주름살이 더욱 깊어가고 있다.이러한 문제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의 제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이란 나라의 지나온 경제적 변화가 어떠한지를심층적으로 진단하여 나의 세계경제에 대한 이해를 보다 폭넓게 가지고자, 아래와 같이 조사.연구 하였으며, 이에대한 교수님의 좋은 평가를 기대하고 싶다.II. 본론1. 국가 현황1.1 미국의 개요- 위치 : 북토지를 잃었으며, 역사상 최대의 가뭄 중 하나인 대가뭄까지 겹쳐 이중삼중으로 고통을 겪었다.2.4 대공황의 영향 - 세계대공황의 영향은 1931년에 세계공황으로 번졌으며, 세계적인 공황의 주요 원인은 미국이 유럽 국가들에게수십억의 자금을 대부해 주었던 제1차 세계대전 후 나타난 채무구조에 기원한다고 볼 수 있다.미국의 금융가 찰스 도스는 1924년 프랑스, 영국, 독일, 미국이 협정을 맺어 미국은행이 대규모의 대부를 해주어독일이 전쟁배상금을 지불할 수 있도록 하였고,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배상금 삭감에 동의하였다.- 도스안 : 미국은 독일에 대부 -> 독일은 이 대부금으로 영국과 프랑스에 배상금 지불 -> 영국과 프랑스는 이 자금으로미국에 빌린 채무 상환 (독일과 다른 유럽 국가들이 미국은행과 기업에 대규모 채무상태)- 1931년 미국금융 붕괴 -> 뉴욕의 거대은행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로부터 대부금 회수 -> 독일과 오스트리아 최대은행붕괴 -> 중부유럽 공황상태 ->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영국과 프랑스에 배상금 지불 불능 ->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에채무상환 불능그리고 이 도스안은 독일, 프랑스, 영국이 자국의 통화정책을 안정시켜 금본위제로 돌아가도록 유도하였으며,이로 인해 고정환율제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영국은 자국 물가수준이 미국보다 많이 상승했음에도 불구하고1914년 결정된 대로 파운드와 달러의 환율이 일 대 일에 묶임으로써 큰 타격을 받게 된다.미국 의회는 1930년 6월 자국 산업의 보호를 위하여 스무트-홀리법(Smoot-Hawley Act)을 통과시켜미국의 높은 무역 관세를 더욱 높여 세계경제에 악영향을 끼쳤으며, 무역상대국들도 똑같이 높은 관세로보복하여 1929년에서 1933년까지 전 세계의 무역규모는 3분의 2가 축소되어 10억 달러 이하로 줄어들게 된다.또한 전 세계적 과잉생산의 결과 농산물 가격이 하락한 것도 경제하강에 기여하였고, 1932년 세계의 산업생산은3분의 1이상 감소했고, 국제간 교역은 거의 3분의 2로 축소되었으며, 1933년에 린이나 노년층, 소수인종 등의 인력으로 부족한 노동력을 채웠으며,이로 인해 민간 노동력은 거의 20%나 증가했다.제2차 대전기의 인플레이션은 1차 대전의 인플레이션보다 덜 심각했다.- 연방정부 총 지출 (1941년~1945년) : 총 3,210억 달러(정부수립 때부터 1945년까지 약150년간 지출한 비용의 2배 + 제1차 세계대전 투입비용의 10배)- 미국 국가채무 : 1941년 490억 달러 -> 1945년 2,500억 달러 증가(채무의 절반은 1,000억 달러 채권 판매하여 차용 + 나머지는 소득세법으로 소득세율 상승조치)전쟁 중 미국은 연합국의 군수물자를 담당하여, 민간 기업은 군수산업으로 전환하여 급속한 생산성의 향상으로미국경제는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고, 또한 전쟁이 끝날 무렵 1945년 연합국 대표들을 샌프란시스코로초청하여 국제연합헌장에 서명하는 것을 주도하여 세계에서 경제의 주축을 담당하는 제국주의 길로 접어들며세계질서를 주도하기에 이르렀다.또한,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이 수행한 이전의 그 어떤 전쟁보다도 기술과 과학의 혁신이 뛰어났다.이것은 1940년 시작된 연구와 개발에 미국정부가 상당액을 투자한 결과였고, 미국은 전쟁이 종료될 때까지연구를 위해 1억 달러 이상을 사용했으며, 전쟁에 참가한 다른 국가들의 기술의 혁신도 매우 우수했다.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당시 기술과 과학의 진보의 결과를 유감없이 보여줄 수 있는 전쟁이 되었다.2.7 제2차 세계대전 이후 - 한국전쟁 발발 및 미국의 경제성장미국의 경제적 성장은 전후에도 계속되었다.전시동안 실질적인 저축액을 쌓아온 노동자들의 억눌려졌던 소비수요가 호경기를 자극했고, 60억 달러의세금감면도 한 몫을 하였으며, 퇴역 군인들에게는 군인 재정착 법으로 인해 주택, 교육, 직업, 훈련 보조금이제공되었고 이로 인해 지출이 더욱 늘어났다.- 소비자 수요 급증 -> 물가 14~15% 증가 -> 심각한 인플레이션 발생 (2년 이상)- 노동계 소요 급증 -> 주요산업 파업 -> 경제적 고통 증가이 시점에서 또는 ‘레이거노믹스’라 불리는 정책을 시도하게 된다.- 감세(Tax cut) : 감세 -> 수입증가 -> 저축+소비 증가 -> 투자+생산 증가 -> GDP 증가- 강한 달러, 높은 금리(High $, r) : 높은 달러가치+고금리 -> 자본유입(capital inflow) -> 투자증가 -> GDP 증가공급중시 경제학은 과도한 세금 감축과 신규 투자 확대를 추구하는 것으로, 이 이론에 근거하여 과감한 세율감축이 이루어졌고 경제활동에서는 정부역할을 축소시키는데 전념하게 된다.1982년 초 미국은 1930년대 이후 가장 심각한 경기후퇴기를 맞았고, 레이건은 신속한 해법을 제시하지못한 채 1982년 실업률은 11%에 달해 지난 40년 동안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하게 된다.이후, 연방 지불 준비위원회가 여러 해 동안 통화긴축 전쟁을 시행하여 인플레이션과 이자율이 낮아지게 되고OPEC의 붕괴로 인해, 소비자 지출과 기업 투자가 증가하고 증권시장은 1970년대 침체에서 벗어나 지속적이고역사적인 호경기를 시작하게 된다.그러나, 1980년대 중반 재정적 위기(=연방정부 예산적자+ 국가 부채증가)가 심화되는 현상이 발생되었다.- 예산적자 : 1980년도 이전 미국 역사상 1년 단위 최고 예산적자 660억 달러 (1976년) ->1980년도 이후 1000억 달러 이상 증가- 국가부채 : 1980년 9,070억 달러 -> 1991년 약 3조 5,000억 달러 증가또한, 미국인들의 저축률이 오르지 않아 미국은 수십억 달러의 외국 자본을 국내에 유치해야만 했다.- 미국의 외국자본 유치 -> 전 세계의 이자율 급등 -> 미 달러의 고공행진(강한달러) -> 미국의 무역적자 초래이러한 적자는 의료비용 증가, 사회보장 빈민 의료보조 프로그램 발생, 세금 감면 그리고 레이건 행정부의국방비 지출액으로 발생하였으며, 이로 인해 다시 세율의 인상과 국내 지출 감소가 시행되었다.2.12 부시정부와 걸프전부시 행정부는 막대한 부채와 연방 적자의 부담을 떠안았고 더욱 어려워진 경제에 행정부는 해결책을 강세 현황이 발생되고 있다.가) 주가는 선진국과 신흥시장에서 동반 급락- 미국(1.17, -2.5%), 영국(1.21, -5.5%), 일본(1.21~22, -10.2%), 중국(-13.6%), 한국(-7.8%)나) 금리는 안전자산 선호경향 강화로 하락세 지속- 미 국채( 2년물) : 3.05%(‘07말) → 2.35%(’08.1.18)- 미 국채(10년물) : 4.02%(‘07말) → 3.63%(’08.1.18)다) 환율은 주가 하락 등 금융시장 불안으로 엔캐리 트레이드가 청산됨에 따라 엔화 강세- 엔/달러 : 111.65(‘07말) → 105.97(’08.1.21)- 달러/유로 : 1.4593(‘07말) → 1.4455(’08.1.21)3) 투자은행들은 2007년 3/4분기에 이어 4/4분기에도 부실자산의 대규모 상각으로 손실규모가 확대되고 있다.가) 미국, 유럽, 일본의 21개 주요 금융기관의 손실규모 : 1,078억 달러로 집계 (일본 요미우리신문)- Citi Group : 181억 달러 상각 → 98억 달러 손실- Merrill Lynch : 146억 달러 상각 → 98억 달러 손실나) OECD 등은 서브프라임 관련 금융기관들의 총 손실규모로 약 2,000~4,000억 달러 추정- OECD(‘07.11.21) : 2,000~3,000억 달러- Deutsche Bank('07.11.12) : 3,000~4,000억 달러4) 자금시장의 신용경색으로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은 대형 투자은행들이 중동 및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의국부펀드 자금을 조달하고 있으며, 이는 서브프라임 사태에 따른 자금경색이 심화된 2007년11월 이후 크게증가하였다.- ‘07.11월 : Citi Group(75억 달러) ← ADIA(UAE)- ‘07.12월 : UBS(97.5억 달러) ← GIC(싱가포르)Merrill Lynch(62억 달러) ← Temasek(싱가포르)Morgan Stanley(50억 달러) ← CIC(중국)- ‘08. 1월 : Citi Group(145억 달러)←GI
    경영/경제| 2011.04.08| 29페이지| 2,000원| 조회(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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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두바이 쇼크의 발생원인과 발전방향
    REPORT제목 : 두바이 쇼크의 발생원인과 발전방향목차1.아랍에미레이트2.두바이3.두바이 쇼크 발생 원인4.추후 방향5.두바이 쇼크의 교훈1. 아랍에미레이트아라비아반도 동부 페르시아만 남쪽 연안의 7개의 토후국으로 구성되어 있는 연방국가, 정식이름은 아랍에미레이트연합.1)국가개요일반사항 (2005)국명: United Arab Emirates)위치: 중동(아라비안 걸프해 연안, 사우디 , 카타르 및 오만과 접경)면적: 83,600㎢ (남한보다 약간 작음, 99% 사막지대)기후: 고온다습 아열대성기후 및 사막성기후(최고 53℃)수도: 아부다비(Abu Dabi)인구: 약 404 만명주요도시: 아부다비(Abu Dabi), 두바이(Dubai), 샤르쟈(Sarhjah)민족: 아랍족 (33.5%), 서남아(인더, 파키스탄,방글라데시 등 63%), 기타(3.5%)언어: 공용어(아랍어) 상용어(영어)종교: 회교(수님파 70%, 시아파 30%)건국(독립)일: 1971년 12월 2일 (영국으로부터 독립)정부형태: 7개 에미레이트로 구성된 연방대통령제(아부다비, 두바이, 샤르자, 아지만, 움알카이와인, 라스알하이마, 푸자이라의 토후국으로 이루어짐)국가원수: 대통령, 췌이크 칼리파 빈 자예드 알 나하얀2)자연국토의 대부분은 사막지대이고, 페르시아만연안부는 평탄하고 염분이 많으며,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국경지역인 알아인(샘이라는 뜻)지방은 풍요로운 오아시스지대이다.북동부의 무산덤반도 동부에는 남북 80Km에 이르는 알 아흐다르산맥이 이TSmsep 최고봉의 높이는 약 3000m이다. 페르시아만 연안의 해안선은 복잡하게 뒤얽혀있는데 바다는 멀리까지 수심이 얕고 먼바다에는 많은 섬과 산호초가 점점이 EJ 있다.두바이항은 활 모양으로 굽은, 천연의 좋은 항구이다. 인구가 집중된 페르시아만연안지역은 겨울철의 몇 주일을 제외하고는 1월평균기온 18℃의 고온다습한 기후이며, 여름에는 45℃를 넘는 경우도 있다. 내륙은 덥고 건조한 사막기후이다.3)경제 환경경제의 중심은 석유이며, 전형적 아랍산유국형게 기여했다. 원유확인매장략은 978억 배럴로서 현재 생산량을 지속한다면 100년 가략 산출할 수 있는 규모이다. 경제협력기구(OCED)를 제외하면 세계최고수준의 소득을 자랑하나 국제유가변동에 따름 심한 경제부침이 문제이다. 정부는 석유의존형 경제를 탈피하기 위해 제조업을 적극 육성한다는 방침인데 이를 위해 두바이 남서쪽에 외국기업 유치를 위한 주베리알리자유무역지구를 설치하고 세계 약 70개국 약 700여 회사를 유치하였다.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이기 때문에 경작 가능면적은 0.4% 정도이며, 농업은 사막의 오아시스지대와 무산덤반도의 일부로 한정되어 있다. 주요 생한물은 밀, 보리, 잡곡류, 대추야자, 망고, 사료작물, 담배 등이다. 연안에는 어류가 많으며, 20세기 초에는 천연진주산업도 번성했다.오늘날의 어업중심지는 무산덤반도 동부이며, 특히 아지만은 직업인구의 약 1/3이 어업과 관련을 맺고 있다.제조업은 공업화계획을 달성하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주요산업인 정유소,석유관련산업,제분,건설자재,시멘트,청량음료 등은 2대 산유수장국 아부다비와 두바이에 집중되어 있다.2. 두바이1) 국가 소개 및 정치 경제적 환경세계에서 가장 큰 인공 섬, 가장 비싼 호텔, 가장 높은 빌딩, 가장 고급스런 리조트들과 함께 천지개벽, 상상창고 중동의 중심 등의 말은 두바이의 하나같이 따라다니는 수식어들이다. 1970년대 두바이는 모든 경제력이 석유에 의존하고 있는 평범한 아랍국가 중의 하나로서 사막지역의 한 도시에 불과했다. 이 무렵 라시드 국왕과 후계자의 셰이크 모하메드 왕세자는 2016년 석유 고갈을 예상하여 국가의 생존전략차원에서 두바이를 체계제일의 초호화 관광지로 변모시키는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은 현재까지지 진행 중에 있으며 국가경영의 대표적 성공사례로서 평가받고 있다.문제는 섭씨 50도의 더위와 모래뿐인 사막도시에 어떠한 방법으로 관광자원을 창출하느냐는 것이며, 이를 위해 기상천외한 발상들을 시도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달에서도 보인다는 야자수 잎 모양의 세계 최대 인공 지향한 노력을 경주해 왔다. 이를 바탕으로 최근에는 중동의 중계 무역항을 넘어서 산업 및 관광의 세계적 거점을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높이 800m의 세계 최고층 빌딩, 파리 시 크기의 인공 섬을 건설 중이며, 각종 스포츠 및 쇼핑 이벤트를 개최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두바이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2005년 5월 1일 서울 - 두바이 간 직항 노선(에미리트 항공)이 개설 되었고, 언론의 ‘두바이’ 관련 보도 건수도 급증하고 있다.그리고 두바이는 세계 3대 산유국인 UAE의 경제 수도 연할을 수행하고 있다. 두바이는 UAE 내 7개 토호국 중 하나로 면적은 3,885㎢(서울의 약 6.4배), 인구는 120만 명에 불과하지만, GDP는 UAE 전체 GDP의 25%를 차지하고 있다. UAE는 세계 3위의 산유국(매장량 982억 배럴)이면서 세계 4위의 가스 보유국(매장량 204조 Cubicfeet)이지만, 대부분 자원이 아부다비에 집중되어 있고 두바이는 부족자원이 빈약하다. 실제로 두바이는 GDP 중 비석유부문의 비중이 93%에 달할 정도로 석유에 대한 의존도가 낮다. 그 때문에 두바이는 석유자원 고갈에 대비하여 허브화 전략을 채택하게 된다.이러한 두바이의 발전은 석유경제 정책과 지리적 이점을 잘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1996년 두바이 정부는 2011년까지 석유의존 경제구조에서 완전 탈피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장기 계획을 수립했다.실제로, 두바이는 걸프지역에서 대형 선박이 정박할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며, 유럽과 아시아, 태평양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발전 잠재력이 크다.두바이가 다른 UAE국가와 다른 점은 개방외교와 정치리더십이다.바로, 절제된 아랍민족주의가 그것이다.앞에서도 언급되어 있듯이 UAE는 197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온건하면서 균형된 외교노선을 견지해왔다. 특정 세력이나 국가에 편향되지 않고 실용적 외교를 펄쳐 왔다. 이는 이란-이라크전(1980년~88년) 당시 아부다비는 이라크를, 두바이는 이중심도시로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보호막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왜곡되어 있는 아랍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를 위해 두바이는 2005년 4월 24일 마이크로 소프트사와 공동으로 120여명의 아랍 고위층 지도자를 대상으로 한 포럼을 개회하였으며, 또 한 가지는 정치리더십이 발휘 됐다는 점이다.UAE는 아부다비, 두바이 등의 토호세력 지도자들이 역할을 분담하여 통치하는 형태를 취한다. 바로, 건국 당시 토호세력 지도자들이 아부다비 중심의 대통령제에 합의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건국 지도자들이 사망한 이후에도 안정된 통치체제를 유지해왔다.이러한 두바이의 정치 리더십은 국제경험이 풍부한 두바이의 셰이크 모하메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영국 군사학교를 졸업했으며 독립 직후부터 UAE 국방장관직을 수행했다. 또한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상당수 개발사업 아이디어들을 내놓고 추진도 주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뿐 아니라 인공섬개발, 인터넷 시티 등을 왕세자가 주도했다고 한다.2)두바이의 과거와 미래두바이는 1833년 아부다비에서 독립하였으며, 1833년부터 1852년까지 지배한 Maktoumbin Buti가 통치하면서 Maktoum가의 지배가 시작됐다. 1966년 원유가 발견되고 다른 중동국가들과 달리 두바이는 원유로부터의 수입으로 항만, 도로, 산업단지 등 기반 시설에 중점적으로 투자한다.1967년에는 영국의 수에즈 운하 철수 후 아부다, 두바이 등 7개의 토호국 UAE를 결성하게 된다.1980년_88년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으로 이란에 소비재와 설비를 공급하면서 두바이는 경제호황으로 1990년대 발전의 기틀을 다진다. 이를 기반으로 1990년 대 초 ‘두바이 전략 발전계획(1996~2010)’수립하고 석유 중심의 경제를 다각화하는 전략을 추진하게 된다. 그리고 1999년 버즈 알 아랍 호텔을 오픈하고, 2001년 팜 주메이라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2006년 Maktoun 국왕이 사망하고 Mohammed가 두바이의 통치자 겸 UAE의 국무총인모하메드는 연일 새로운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두바이 남부 사막지역에 연간 1억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항이 건설되기 시작했고 팜 주메이라 8배 크기의 ‘팜 데이라’도 추진됐다. 두바이 부동산 가격이 2005년 이후 분기당 20~30%씩 폭등했기 때문에 개발업체들은 빚을 얻어 사업을 진행한 후 자금을 회수하는 데 익숙해졌다.2008년말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두바이의 거품도 꺼지기 시작했다. HSBC은행은 최근 보고서에서 두바이 부동산 시장이 직격탄을 맞으면서 자산가치가 금융위기 이전의 50% 수준까지 추락했다고 진단했다.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던 투자자들은 대출금을 갚을 길이 요원해졌고 자금 확보가 어려워진 개발사들은 잇따라 프로젝트를 축소했다.그동안 두바이 채권 발행에 참여해 온 바클레이즈, 도이체방크, 로열뱅크오브스코틀랜드, BNP파리바, ING그룹, 로이드, 스탠더드차터드, HSBC 등의 은행들이 두바이에 채권이 물려있을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두바이월드가 실제로 채무불이행을 하게 되면 이 충격이 세계 금융시스템에 그대로 전달되게 된다. 독일 은행 분데스방크는 금융위기가 완전히 마무리되기 전에 악성부채로 인한 대손충당이 추가로 900억유로 정도 발생할 것이라고 최근 경고한 바 있다.두바이월드가 최종적으로 채무불이행 선언을 할 것인지, 돈을 빌려준 은행들이 얼마나 대출금을 회수할 수 있을지 등 두바이를 둘러싼 금융권의 불확실성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두바이는 이슬람권 명절 ‘이드 알 아드하’와 UAE 건국기념일(다음달 2일)을 맞아 26일부터 다음달 5일까 연휴에 들어가고, 다른 중동 이슬람 국가도 명절을 맞아 29일까지 휴일이어서 당장 이 지역의 시장 반응을 확인할 수 없다.시장의 우려가 커지자 두바이 최고재정위원회 셰이크 아흐메드 빈 사이드 알 막툼 위원장은 이날 성명을 발표하고 “두바이 정부는 시장이 어떻게 반응할지 충분히 파악하며 두바이월드의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있다”며 진화에 나섰다. 또 “채무유예 요청은 신중하영향.
    경영/경제| 2011.04.08| 12페이지| 2,000원| 조회(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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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아세안의 발전과정과 한국과의 관계
    아세안의 발전과정과 한국과의 관계목차I. ASEAN의 성립배경과 구성II. ASEAN의 발전과정Ⅲ. ASEAN + 3(한,중,일)국 정상회의Ⅳ. ASEAN의 경제 개요Ⅴ. AFTA의 내용과 문제점Ⅵ. 한국·ASEAN 관계전망Ⅶ. ASEAN 지역안보포럼(ARF: ASEAN Regional Forum)I. ASEAN의 성립배경과 구성1. ASEAN의 성립배경동남아국가연합, 즉 ASEAN(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싱가포르(1967년 창설국가), 브루네이(1984년 가입), 베트남(1995년가입), 미얀마, 라오스(1997년 가입) 및 캄보디아 (1999년 가입)의 지역협력기구로서 베트남이 공산화되고, 미국의 아세아로부터의 후퇴, 중국과 소련의 각축 등으로 동남아에 새로이 조성된 위기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1976년과 1977년에 각각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서 정상회담을 개최하여 정치적 중립과 경제협력을 강화함으로써 국제정치 무대에 등장하였다. 동남아는 1975년 인도차이나의 공산화로 불안의 한해를 보냈고, 1976년부터 ASEAN은 회원국자체정비와 지역 내 결속을 다짐하는 부산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 하나의 결실로 ASEAN국가는 'ASEAN의 강화'라는 기치를 높이 내걸고 1967년 ASEAN창설 당시 방콕선언으로 발표했던 동남아 지역의 평화, 자유, 중립을 재천명하기에 이르렀다.1967년에 창설된 ASEAN은 인도차이나의 공산화 이전까지는 별다른 움직임도 구실도 하지 못하였다. 회원국은 모두가 국내 문제 해결에만 급급했고, 태국, 필리핀 등 일부 국가는 미국의 베트남전 병참기지 역할을 하느라고 준 전쟁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10년 이상을 끈 인도차이나 전쟁이 공산주의자의 승리로 끝나면서 이 지역의 상황은 급변하였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3개국이 공산화된 후 인접 태국은 특히 안보의 위협을 직접 받게 되었다. 태국과 국경을 맞댄 말레이시아도 국경일대의역 내 군사기지는 일시적이라는 것 그리고 ASEAN의 목적과 원칙에 동의하는 동남아 모든 나라에 문호를 개방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방콕선언에 나타난 바와 같이 ASEAN은 그 모체인 ASA의 반공적 기구를 잠재적으로 그 밑바탕에 깔고 있으면서 MAPHILINDO의 반식민지주의, 중립주의 및 비동맹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ASEAN은 지역 내셔널리즘을 기본 원동력으로 하여 지역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반외세적 자위(自衛)의식을 그 중요한 특징으로 하고 있다.또한 ASEAN의 정체성(Identity)을 보여주는 협약들로는 ASEAN 협약선언, ASEAN 우호협력조약, 동남아시아 평화·자유·중립지대(ZOPFAN), 동남아시아 비핵무기지대조약, ASEAN 사무국협국 등이 있다.II. ASEAN의 발전과정◎ 발전과정의 특징적 양상1975년의 베트남과 인도차이나 국가들의 공산화에 자극된 ASEAN의 발전은 그 과정에서 대내외적인 여건과 국제환경이 변화로 많은 진통을 겪었다. 창립 당시 ASEAN은 경제, 사회, 문화 등 주로 비정치적·비군사적인 문제만을 다루어 왔다. 회원국들은 당시 국내경제 개발문제와 정국안정에만 주력했으며, 필리핀을 위시하여 태국 등 ASEAN 회원국은 미국 등 서방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던 터였으므로 대외적인 정치, 외교적 문제나 안보문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이 공산주의자의 승리로 끝나자 ASEAN은 크게 동요하였다. 그것은 자국의 안보를 위한 미국의 역할의 한계를 베트남 공산화로 명확하게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둘러서 ASEAN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ASEAN이 군사동맹이나 정치 블록도 아니며 어느 세력에 대해서도 적대적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당시 ASEAN이 당면한 가장 중요한 것은 창립 당시와 같이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문제가 아니라 자국의 공산화에 대한 위협을 최소한으로 감소시키는 정치, 안보적 차원의 문제였다. 따라서 ASEAN 회원국들은 발리 정상회담에서 인도차이나반도 공산화에 고무되어 반정신을 바탕으로 평화의 안정을 도모할 것이며 넷째, 이 협약은 1971년에 체결된 동남아의 평화, 자유, 중립화(ZOPFAN)선언과 1993년 ASEAN각료회의(AMM)에서 채택된 구체적인 행동프로그램을 바탕으로 한다. 다섯째, 이 협약으로 ASEAN회원국들을 세계평화와 안정을 위하여 핵확산금지조약(NPT)을 지지한다.이외에도 방콕 정상회의에서는 ASEAN 협력의 기능적 역할을 더욱 확대함으로써 정치, 경제, 사회분야에 대한 전반적인 협력을 강화하기로 하였다.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하기 위해서 매 3년마다 개최하기로 한 정상회의와는 별도로 매년 1회의 비공식 정상회의를 갖기로 합의하였다.이 합의에 따른 첫 번째 비공식정상회의는 1996년 11월 자카르타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제5차 ASEAN 정상회의에서 합의한 내용에 대한 진행상황을 검토하고 보완하기 위한 목적으로 열렸다. 이 회의에는 ASEAN 회원국 정상들을 비롯하여 비회원국인 당시 캄보디아의 제1수상 라나리드와, 제2수상 훈센을 비롯하여 라오스의 시판돈총리, 미얀마의 땅쉬에 의장도 참석하였다. 제1차 비공식 정상회의에서는 ASEAN재단의 설립을 통해서 ASEAN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을 증진시키고, 이를 위한 역내의 인적교류를 활발히 추진하기로 합의하였다. ASEAN정상들은 이러한 인적자원 교류를 통해서 협력의 질을 더욱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회의의 주요한 성과의 하나는 동남아 10개국 모두가 '하나의 ASEAN(ASEAN 10)'을 조속히 이루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이 회의에서 말레이시아 정부의 강력한 제안으로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등 아세안에 미 가입한 3개국을 1997년 중 동시에 정회원국으로 받아들이자는 합의를 이끌어 내었다. ASEAN은 유럽연합(EU)에 대한 협력도 강화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EU가 인권문제를 거론하여 내세우는 동티모르 문제에 대해서는 인도네시아의 입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함을 재천명하며 향후의 ASEAN회의에서 이 문제가 의제로 상정되지 않도록 공동로 초청, 회의를 갖는 모양새가 유지되어 왔다. 즉, ASEAN이 회의 개최의 주도권을 갖고 회의일정, 의제설정에 있어서 ASEAN 국가들이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공동 협력사업 추진에 있어서도 주로 ASEAN 측의 요청사업에 대한 한·중·일 3개국이 협력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즉, ASEAN 국가들은 ASEAN의 정상회의의 일부로 동북아 국가 정상들을 초청, 협력사업을 논의하는 장으로 ASEAN+3 정상회의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ASEAN 중심의 논의 체제를 개선하기 위해 동북아 국가들은 ASEAN+3 정상회의를 동아시아정상회의(EAS)로 전환하자는 입장인데 비해, ASEAN 국가들은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현재는 ASEAN+3 회원국간에 협의채널이 빈약하고, 협력사업들이 시행초기 단계에 있어 소규모 다수 사업이 중복적으로 실시되고 있어 당분간은 본격적인 동아시아 지역협력보다는 느슨한 형태의 ASEAN+3 협의체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급속한 경제통합체 논의도 전개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동아시아 협력의 구심점이 없는 상태이다. 중국이 ASEAN과의 FTA 및 동북아 FTA를 통해 동아시아 경제통합을 주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ASEAN과의 FTA뿐만 아니라 한·일 FTA 및 한·중·일 FTA를 검토하고, 동아시아 내 지역주의 움직임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전략의 수립이 요청된다.Ⅳ. ASEAN의 경제 개요1. ASEAN 경제의 위상ASEAN국가들은 세계에서 가장 급속한 성장을 하고 있는 지역으로 지금 전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으며, 성장 잠재력이 가장 높은 지역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에 따라 세계 각국 기업들은 이 지역을 무역 및 투자 대상지로 많은 관심을 보이면서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이 지역의 정치·경제적 안정, 시장개방 확대, 풍부한 천연자원과 양질의 노동력, 그리고 외국자본 투자유치정책과 공동유효특혜관세것이다.ASEAN 경제협력의 발전 가능성은 다음의 몇 가지로 분류해서 설명 할 수 있다.첫째로 여러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ASEAN의 경제협력은 회원국 지도자들의 높은 정치적 의지가 가장 큰 성공의 근원이 되고 있다. 1992년 제4차 정상회의에서 합의한 AFTA와 CEPT협정체결은 회원국 정치 지도자들이 역내 경제협력을 확대하려는 강력한 의지가 크게 작용하였다. 또한 ASEAN을 둘러싼 국제 환경이 역내 경제협력의 필요성을 증대시키고 있기 때문에 많은 지엽적인 문제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통합의 분위기가 우세할 것으로 전망된다.둘째로는 풍부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점차 외부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여 산업기반을 확보하게 됨으로서 향후 가속적인 경제발전이 가능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외부의 자본과 기술을 얼마만큼 안정적으로 공급받는가 하는 점이 관건으로 남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과도하게 도입되어 일본에 대한 종속의 심화가 또 다른 문제로 예견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은 최근 엔고와 무역마찰을 피하고 기존의 해외시장을 유지·발전시키기 위해서 동남아의 생산기지화를 강화하고 있다.셋째로는 ASEAN의 회원국 확대에 따른 변화이다. 1999년 캄보디아가 가입함으로써 ASEAN의 경제발전 단계가 한발 앞선 기존 회원국들과 상호보완성을 가지는 4억 8천만의 거대한 경제권이 탄생한 것이다. 따라서 최근 급속히 진전되고 있는 ASEAN 국가들의 공업화 추세와 인도차이나 국가의 개발잠재력을 감안할 때, 동남아공동체가 계획대로 추진될 경우 동남아 경제는 무역과 투자의 확대를 통한 실질적인 협력증대로 역내 경제협력을 크게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한편, 현재 인도차이나 국가의 전력, 항만, 도로, 용수, 통신 등 사회간접 자본이 크게 부족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외국인 투자를 우대하는 외국인 투자법을 제정하였지만, 세부적인 운용지침이 불충분하거나 불명확한 상태로 있어 문제점의 하나로 지적되고 있다. 또한 인도차이나 국가 모두 외화부족였다.
    경영/경제| 2011.04.08| 23페이지| 2,000원| 조회(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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