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욕망의 다양한 면모파트리크 쥐스킨트가 말하는 욕망의 세계, 그리고 그의 영상화향수는 아름다운 향기로 맡는 사람의 기분을 고취시키고 뿌린 사람의 이미지를 고양시키는 에만 의존하는 인간이 그 눈으로 본 것을 맹신한 나머지 함정에 쉽게 빠지듯 말이다. 소설은 그르누이의 내면세계를 독자들에게 공감시키는데 영화보다 더 뛰어났다. 충격적인 소재와 결말의 여운은 영화화하기에 좋았고 관기능성이 있다. 사람의 오감 중 후각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향수, 그 형태도, 느낌도 묘사할 수 없는 물건을 소재로 삼아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창조한 세계는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나는 그의 작품을 영화로 먼저 접했다. 영화 개봉 소식을 듣고, ‘좀머씨 이야기’ 이후로 한동안 잊고 지내던 그를 스크린으로 만나볼 수 있다는 마음에 반갑게 찾아갔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난 뒤의 감상은 그다지 좋은 쪽에 속하지 못했다. 작가의 명성을 생각했을 때, 이 느낌은 내게 의외였다. 그러나 그것은 소설을 접한 뒤 곧바로 풀리게 되었다. 내가 눈으로 본 것들은 그가 소설 속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을 느끼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시각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도 더할 나위 없었지만, 문제는 원작의 효과를 재현하는 데에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화가 책보다 못했다는 평을 한 것도 원작을 가능한 그대로 옮기려던 시도가 결과적 측면에서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소설 속 장면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충실한 재현은 자연히 원작이 영화적 기법으로 어떻게 표현됐는지에 주목하게 만든다. 그르누이가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향기에 도취되고 그것에 감동하는 장면은 몽환적인 음악과 슬로우 모션 기법, 그리고 클로즈 업 등으로 표현되었다. 관객이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상상하게 하고 자신의 상상에 몰입하게 하는 데에는 효과적인 기법이었다고 생각한다. 관객은 쉽게 눈치 채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만 노란 자두를 파는 소녀의 향기를 상상하는 데에는 새콤하고 달콤한 향기의 노란 자두가, 로라 리쉬의 아름다운 향기를 상상하는 데에는 흰 장미가 동원되었다. 영화의 시각적 표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관객이 이미 경험해 본 향기를 떠올리도록 했다는 점에서 이 방법에 큰 점수를 주고 싶다. 단, 세계를 냄새로 감지하는 그르누이의 시점을 따라가는 데 관객이 계속해서 동참하기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냄새를 맡는다는 행위는 작가의 말 그대로 숨을 쉬는 것과 동일한 것이므로 어떤 특별한 모션을 취하기가 까다로운 것이다. 그래서 배우의 연기는 어쩔 수 없이 난관에 봉착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부분적인 지루함이라는 한계를 보여주게 되었다. 그러나 상황적 장치, 즉 살인이라는 소재 자체가 스릴이 넘치는 상황을 만들어 내기에 충분했기에 긴박한 장면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첫 살인 후 여자를 증류기 안에 넣어둔 장면이나 창녀의 살해 장면이 영화적인 긴박감을 위해 설정된 그런 장면들 중 하나이다. 시점에서는 전지적 작가의 시점을 따르는데 영화에서는 내레이션을 택해 영화의 진행에 따라 설명을 하며 사건의 전말을 짚어나가는 방식을 따랐다. 영화로 그려낼 수 없는 부분이 어쩔 수 없이 있다는 한계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소설과 영화 모두 마지막 부분에 상당히 강조되어 끝을 마무리 짓는 문구가 있다. ‘그들이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라는 문구인데, 왜 난데없이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왔을까. 그르누이가 평생에 걸쳐서 완성한 향수의 목적은 세상을 지배하려는 것도,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것도 되겠지만 그 기저에는 타인에게 사랑받고 싶어 했던 안타까움이 서려있었던 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그는 탯줄이 끊길 때부터 죽임을 당할 때 까지 단 한 번도 사랑을 받아본 일도, 해본 일도 없었다. 그러나 광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그루누이가 아닌 손수건을 쫒아 열광하는 모습을 보고 그는 자신이 평생을 바친 것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처형대 위에서 자두를 파는 소녀와 포옹을 하는 환상을 보게 되는 장면은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영미 비평 과제] 영문과 20020085 박빛나왜 실패하면서도 유토피아를 추구하는가-오쇼 라즈니쉬의 Will Utopia Ever Happen? 을 읽고-유토피아의 형성은 인간의 오랜 염원이었다. 오쇼 라즈니쉬의 말대로 이미 수 천년동안 유토피아를 이루기 위한 시도는 계속되어왔고 지금도 그것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하나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결코 작지 않은 시도가 여러 번 있어왔는데도 변변한 성공모델이 없다는 것은 유토피아가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일 수도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매우 어려운 몽상적 이론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실일 수도 있다. 혹은 유토피아의 필요조건을 실천하기에 인간이 턱없이 모자라는 존재일 수도 있다.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회를 이루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이왕 속해있을 사회라면 너도 나도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인간이 고안해 내온 다양한 종류의 사회는 저마다 갈등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방법이 이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공산주의는 모든 인간의 물질적, 정신적 평등을 이념으로 삼고 있다. 기독교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이 공산주의의 사회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현재 기독교 포교가 금지되어 있다. 계급적 평등을 추구했던 이 사회는 여러 계급들이 생겨나게 되고 지도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게 됨으로 그 빛을 잃었다. 무정부주의는 말 그대로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모였을 때라야 가능한 이론이다. 권력을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이 이론은 개인의 도덕적, 사회적 양심을 지나치게 신뢰했다. 불행히도 이 세상은 법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이다. 이와 반대인 파시즘은 가장 최선의 방책이라는 측면에서 엘리트에 의한 사회통치를 주창했고 불평등의 논리를 당연히 받아들인 전체주의이다. 즉 수뇌부의 지시에 믿고 잘 따르면 사회가 가장 좋은 길로 나아가게 되리라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파시즘은 극단적 우익으로 치닫는 결과를 낳았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능력의 계발을 보장하는 대신 모든 자유로운 활동은 헌법 하에서 자본이 바탕이 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부의 독점현상과 빈익빈 부익부와 같은 현상에 대한 대책이 없다. 이러한 실패, 결점에 관련한 여러 가지 사회의 사례를 보았을 때 그 근본적인 이유는 굳이 오쇼 라즈니쉬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개인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도 비록 가상의 사회이긴 했지만 개인의 존재 무시라는 결점을 안고 있었다. 개인의 욕망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억제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오쇼 라즈니쉬는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개인의 분리된 내면이 합해지면서 동시에 욕망이나 노여움, 질투심등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개인이 명상을 함으로써 이런 것들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붓다와 같은 정신적 경지에 도달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해탈을 통해서든 다른 방법으로든 개인이 욕망을 버리는 것만이 유토피아에 이르는 길인 것은 명백히 옳은 말이다. 지금까지의 사회의 부조리는 개인의 욕망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석하고 박식한 사람들을 뛰어넘을 수 있는 지혜가 단지 명상으로써 얻어질 수 있느냐는 점에는 의문이 가는 바이다. 물론, 이 글에서 명상에 관한 깊은 설명과 단계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명상은 스스로 깊은 생각을 하는 단순한 정신적 활동이 아닌 체계적이며 고차원 적인 활동이다. 그런데 이러한 복잡하고 수준 높은 정신적 활동을 사회에 속한 모든 개인들이 수행하고, 그로 인해 일정한 경지에 올라 아무런 사심 없는 부처와 같은 마음이 되어 유토피아를 이루게 된다는 논리는 유토피아가 가능한 일이라는 저자의 말이 다른 이론들과 다름없이 다소 추상적이라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게다가 명상의 가치를 모두가 이해하면 수백만의 사람들이라 해도 그들이 해탈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논리는 오쇼 라즈니쉬의 가설, 즉 개인 내면의 분리된 4개의 구조가 갈등의 원인이며 이것이 명상으로 합해질 수 있다는 그의 가설이 진실로 전제된 상태에서만 내려질 수 있는 결론인 것이다. 열길 물속보다 더 모호한 사람의 내면이 하나 둘도 아닌 수백만인데, 이것이 쉽다고 이야기 하는 저자는 극단적 낙천주의자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