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굿의 의미무속의 행위로 불행을 예방하고 평안을 유지하고자 무당에 의해 행해지는 종교적 의식모두 인간존재의 영구지속으로 집약될 수 있는데, 짧은 명을 길 게, 약한 것을 강한 것으로,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등, 곧 유한한 존재를 무한의 영원한 존재로 바꾸어 놓으려는 행동적 실천현상인 것이다.2. 굿의 기능- 집안, 마을 ,국가의 안전과 태평기능- 치병기능- 영혼천도기능- 조상 신령 접대기능- 놀이기능- 전통문화 전승기능3. 굿의 유형3.1. 개인이 하는 사가(私家)의 굿- 개인이 자신과 자신의 집의 안녕과 복락(福樂)을 위해 하는 굿- 가정굿이나 집굿이라 부름- 동기나 목적에 따라 재수굿, 우환굿, 치병굿, 망자(亡者)굿(흔히 오구굿이라고 한다) 등으로 분류3.2.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하는 마을굿- 마을의 수호신을 비롯한 여러 무속신들에 마을의 안전과 번영,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안녕과 복락을 비는 제의a.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유지하는 마을에서 주민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 살아 움직이는 굿들 (동해안 별신굿, 제주도의 해녀들이 하는 영등굿)b. 자생적으로 존속하되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극히 일부 주민들에 의해 집행되는 굿 (서울 대도시 한복판에서 행해지는 부군당굿, 도당굿 등)c.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마을굿 (강릉 단오굿, 은산 별신굿, 광산 고싸움, 위도 띠뱃놀이 등)3.3. 강신무들이 무당 자신을 위해서 하는 신굿-신굿 : 무병을 앓고 나서 정식 무당이 되기 위해서 신어머니를 모시고 하는 입무식. 일반인들에게 거의 공개하지 않음- 진적굿a. 정식 무당이 된 후에 자신이 모시는 몸주신을 위해서 하는 굿b. 강신무 자신의 재수굿c. 모시고 있는 신들을 위한 계절적인 축제d. 무당과 단골 신자들이 모여서 함4. 굿의 절차- 굿은 통상적으로 12개로 구성된다.ㆍ12거리의 예 (오구굿)1. 주당풀이7. 대감, 불사2. 부정풀이8. 말미3. 산발원9. 조상4. 장군10. 성주5. 병상11. 길갈음6. 신장12. 뒷전5. 각 지역별 굿의 종류와 특징구분대표 굿특징함경도망묵굿굿거리에 서사무가가 많이 들어감.평안도다리굿?14거리로 구성. 이틀 또는 사흘이상 행함.황해도배연신굿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전승.서울새남굿다른 굿과는 달리 엄숙하고 장중하다.경기도경기도당굿16거리로 구성.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충청도 앉은굿 가무를 행하기보다 독경위주의 굿.전라도 씻김굿 연극적인 요소가 짙은 굿.남해안 별신굿 14거리로 구성. 일정한 주기로 행해짐.동해안 별신굿 를 연행.제주도 큰굿 정형성에 있어 매우 엄격하여 굿절차를임의로 바꿀 수 없다.6. 한국 문화속의 굿- 한국 문화속의 굿의 의미ㆍ굿을 하는 목적과 대상은 대체적으로 2가지로 나뉜다.a. 개인을 위한 굿 - 일신의 안위를 목적으로 하는 주술이나 개인의 신앙적인 역할b. 공동체를 위한 굿 - 마을의 번영과 발전을 목적으로 하는 공동체의 규범적인 역할1. 재수굿무속신앙인 굿이 가지고 있는 자료가 너무 방대하여 구체적으로 굿에 대해 밝혀보기 위하여 재수굿을 빌어 설명을 하도록 한다.먼저 재수굿의 사전적 의미는 ‘집안에 재수가 형통하기를 비는 굿’이라 정의되어있다. 즉, 다른 말로 무에서 복을 비는 굿을 재수굿이라고 보면 되겠다. 재수굿은 정기적으로 해마다 또는 3년에 한 번씩 정월이나 10월 상달에 햇곡식과 과일을 차려놓고 신들을 대접하면서 감사드리는 일종의 추수감사제 형식의 경사굿이다. 정기적인 재수굿은 집안굿과 마을굿으로 구별된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던 시절에는 의도적으로 마을굿을 해서 부잣집 곳간에서 나온 식량으로 이 마을 저 마을 사람들을 다 풀어먹이기도 했다고 한다.옛날에는 가을 추수가 끝나면 집안 어른들을 모시고 굿할 것을 상의하고 마을 어른을 찾아 굿하는 날을 정하고 여주인은 목욕재계한 뒤, 세 군데의 물을 길어다 술빚을 밥을 짓고 조라술을 큰항아리에 담아 놓았다고 한다. 또 집안의 부정을 물리기 위해, 산에 올라가동쪽으로 향한 소나무가지를 꺾어다가 추녀 끝에 꽂아 놓고, 대문 한쪽 옆에 황토를 깔아 잡인의 출입을 금하였다. 굿하는 날이 정해지면 가족들은 집안에서 큰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고, 가을에 농사지은 가장 좋은 곡식과 최상품의 목화송이로 무명을 짜서 바쳤다. 재수굿이 벌어지는 굿판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굿하기 전 마을 아낙들은 목욕재계하고 굿하는 집에 와서 수건을 쓰고 앞치마를 두르고, 말을 조심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굿 음식을 준비했다고 한다. 이전에는 이웃이나 친척집이 상을 당해도 굿을 우선으로 준비하고 처신했다고 한다.)집안굿을 해도 마을굿처럼 마을 모든 사람들이 모여 울고 웃고 한데 어울렸다. 마을의 의논할 거리가 있어도 농사일로 의논할 시간이 없으면, 누구네 집 굿하는 날까지 미루어 두었다가 그때가 되면 크고 작은 일을 의논했다고 한다. 굿장에 모여든 아낙네들은 밤을 지새우면서 그 동안 못 다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축하도 하고 위로도 했다고 한다. 싸웠던 사람들도 그 날만은 금방 화해가 되어서 마음을 터놓고 웃을 수 있었다고 한다.)굿은 젯장을 성스러운 공간으로 정화하는 준비 과정과 무속의 제신들을 춤과 노래로 청하여 굿장에 좌정시키는 청신(請神), 신을 즐겁게 놀리는 오신(娛神), 신을 본래의 위치로 돌려보내는 송신(送神), 의례가 행해지는 본 과정 그리고 굿을 마무리하는 뒷전으로 이루어진다. 또 청신, 오신, 송신에 따라 춤의 구조가 다르다. 즉 청신에서는 춤이 없고, 오신때에는 ㆍ막춤ㆍ굿거리춤 등 춤이 화려하며 신에서는 무복(巫服)을 벗어 손에 받치고 한바퀴 돌며 절을 하고 끝낸다.인간은 굿을 통해서 삶의 마디마디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고 복도 받고 명도 받고자 한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은 단순한 기복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화의 회복을 통해서만이 가능해진다.굿의 구조와 원리는 조화이다. 단골은 굿을 통해서 무당의 중재로 신령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는 체험을 한다. 여기에서 신령과 만나 天·地·人 합일의 조화를 이룬다. 부조화를 天·地·人 합일을 통하여 조화로 회복하는 것, 여기에 굿의 목적이 있다."'재수'라는 말이 항간에서 뜻하듯이, 단순히 '금전이나 건강, 장수를 위한 좋은 운수'를 나타내는 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재수'는 바로 '잃어버린 조화' 내지는 부조화를 제거하여 새로 얻는 조화로 말미암아 실현되는 궁극적인 구원을 뜻하지 않을까.")라고 박일영씨의 논문에서 말하고 있다. 굿에서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마디마디에서 얽히고 설킨 문제들은 부조화로 말미암은 것이다. 따라서 복도 명도 풍요도 신령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깨어진 조화의 회복을 통해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굿의 노래와 공수(무당이 신령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말) 내용 곳곳에서 이러한 사실들을 접할 수 있다.제석 굿에서 무당이 제가집 여주네에게 복을 쏟아주면서 내리는 공수의 내용은 "마나님의 마음씨가 어질어서 물을 아껴 쓰니 용왕님이 돌보겠고, 나무를 아껴 때니 산신님이 굽어보고, 이웃을 사촌처럼 사랑하니 자손이 복이 되고, 부모 공경을 잘하니 자손 만대 부귀 공명하리라.")이다. 단순한 기복이 아니고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그리고 신령과의 조화로운 관계 회복 속에서만 '재수'는 가능해지는 것이다.
한국 문화 속의 굿*목차1. 굿의 의미 2. 굿의 기능 3. 굿의 유형과 절차 4. 각 지역별 굿의 종류와 특징 5. 무속신의 종류 5. 한국 문화 속의 굿*1. 굿의 의미굿 이란? 무속의 행위로 불행을 예방하고 평안을 유지하고자 무당에 의해 행해지는 종교적의식.**/122. 굿의 기능집안, 마을, 국가의 안전과 태평 기능 치병기능 영혼천도기능 조상, 신령접대기능 놀이기능 전통문화 전승기능*3. 굿의 유형과 절차(1) 굿의 유형 ① 개인이 하는 사가(私家)의 굿 - 개인이 자신과 자신의 집의 안녕과 복락(福樂)을 위해 하는 굿 - 가정굿이나 집굿이라 부름 - 동기나 목적에 따라 재수굿, 우환굿, 치병굿, 망자(亡者)굿(흔히 오구굿이라고 한다) 등으로 분류*②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하는 마을굿 마을의 수호신을 비롯한 여러 무속신들에 마을의 안전과 번영,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안녕과 복락을 비는 제의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유지하는 마을에서 주민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 살아 움직이는 굿들 (동해안 별신굿, 제주도의 해녀들이 하는 영등굿)3. 굿의 유형과 절차*b. 자생적으로 존속하되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극히 일부 주민들에 의해 집행되는 굿 (서울 대도시 한복판에서 행해지는 부군당굿, 도당굿 등) c.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마을굿 (강릉 단오굿, 은산 별신굿, 광산 고싸움, 위도 띠뱃놀이 등)3. 굿의 유형과 절차*③ 강신무들이 무당 자신을 위해서 하는 신굿 -신굿 : 무병을 앓고 나서 정식 무당이 되기 위해서 신어머니를 모시고 하는 입무식. 일반인들에게 거의 공개하지 않음3. 굿의 유형과 절차*- 진적굿 a. 정식 무당이 된 후에 자신이 모시는 몸주신을 위해서 하는 굿 b. 강신무 자신의 재수굿 c. 모시고 있는 신들을 위한 계절적인 축제 d. 무당과 단골 신자들이 모여서 함3. 굿의 유형과 절차*3. 굿의 유형과 절차(2) 굿의 절차 - 굿은 통상적으로 12개로 구성된다. ㆍ12거리의 예 (오구굿)1. 주당풀이7. 대감, 불사2. 부정풀이8. 말미3. 산발원9. 조상4. 장군10. 성주5. 병상11. 길갈음6. 신장12. 뒷전*4. 각 지역별 굿의 종류와 특징구분대표 굿특징함경도망묵굿굿거리에 서사무가가 많이 들어감평안도다리굿14거리로 구성. 이틀 또는 사흘이상 행함황해도배연신굿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전승서울새남굿다른 굿과는 달리 엄숙하고 장중하다경기도경기도당굿16거리로 구성.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4. 각 지역별 굿의 종류와 특징구분대표 굿특징충정도앉은굿가무를 행하기 보다 독경위주의 굿.전라도씻김굿연극적인 요소가 짙은 굿.남해안별신굿일정한 주기로 행해지며 14거리로 구성동해안별신굿심청굿 무가 를 연행.제주도큰굿정형성에 있어 매우 엄격하여 굿절차를 임의로 바꿀수 없다.옥황상제백마신장둔갑신장검무신장작두신장삼신영등할멈칠성신삼태성산신용왕팔만사천 제대신장일직 사자월직 사자월직 사자삼태육성 제대신장산신군웅 신장서낭신당산지신성주신사해조정 용궁신장풍우 신장안당 불사외양 간신조왕신무속신의 종류무속의 종류옥황상제백마신장둔갑신장검무신장작두신장창부대신천왕대신지하대신호구별상천복대감선관도사천하대신홍역귀맹인귀정신귀살귀진광대왕초강대왕송제대왕오관대왕염라대왕변성대왕태산대왕평등대왕도시대왕전륜대왕*6. 한국 문화속의 굿ㆍ 한국 문화속의 굿의 의미굿을 하는 목적과 대상은 대체적으로 2가지로 나뉜다.a. 개인을 위한 굿 - 일신의 안위를 목적으로 하는 주술 이나 개인의 신앙적인 역할b. 공동체를 위한 굿 - 마을의 번영과 발전을 목적으로 하는 공동체의 규범적인 역할*감사합니다.{nameOfApplication=Show}
(1) 병자호란의 발생원인1)정묘호란 (丁卯胡亂)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된 가장 큰 영향은 정묘호란이라고 할 수 있다. 인조반정 후 친명배금정책을 표방하던 조선에 후금이 3만 명의 대군을 파견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후금의 누르하치가 '7대한'(七大恨)을 내세우며 명의 변경요지(邊境要地)를 공격하여 점령하자, 명은 양호(楊鎬)를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삼아 10만 명의 원정군을 일으키고 조선에도 군대를 파견할 것을 요구하여 조선은 1619년 강홍립(姜弘立) 등이 이끄는 1만 여 명의 군사를 파견했다.하지만 광해군은 당시 명이 쇠퇴하고 후금이 흥기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변화에 따라 강홍립에게 형세가 불리하면 후금에 투항하는 것도 주저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강홍립은 조?명연합군이 심하전투에서 패배한 뒤 후금군에게 투항하고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해준 명의 출병요구에 부득이 응했다고 해명했다. 1627년 1월 아민이 이끄는 3만의 후금군은 앞서 항복한 강홍립 등 조선인을 길잡이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공략하고 이어 용천 ? 선천을 거쳐 청천강을 넘었다. 조선에서는 장만을 도원수로 삼아 싸웠으나 평산에서부터 후퇴를 거듭, 그 본진이 개성으로 후퇴하였고 인조 이하 조신들은 강화도로 피하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하였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의 배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후금군은 후방의 위협을 염려한 나머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평산에 머무르며 조선에 화의를 제의하였다.후금은 화의를 제의하는 서신에 일곱 가지 침략이유를 대며 세 가지의 요구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후금에 압록강이남 변경지역 땅을 차지할 것, 둘째, 명의 장수 모문룡을 잡아 보낼 것 셋째, 명나라 토벌에 조선 군사 3만 명을 지원 할 것 등이었다. 후금은 2월 9일 후금의 부장 유해와 후금에 항복해 있던 조선 장수 강홍립을 보내 이 서신을 전달하고 화친의 뜻이 있음을 전했다. 조선 대신들은 이 서신을 받고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론자와 척화론자로 갈려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더 이상 후금군을 상대할 여력이 없음을 실감한 대신들은 최명길 등 주화론자의 주장에 따라 그들과 화의 교섭을 하기에 이른다.조선은 화의 조건을 첫째, 후금군이 평산을 넘지 않을 것, 둘째, 맹약 후 후금군이 즉시 철군할 것, 셋째, 후금군은 철병후에 다시는 압록강을 넘어서지 않을 것, 넷째, 양국은 형제국으로 칭할 것, 다섯째, 조선은 후금과 맹약을 맺되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는 것을 인정할 것 등이었다. 조선의 화친 조약은 한마디로 명과 후금군 사이에서 중립을 지킬 테니 더 이상 조선의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후금은 조선의 이 제의를 받아들여 철군하였다. 이때 조선과 후금군이 맺은 조약을 정묘조약이라 한다. 조선과 후금의 이 조약은 양쪽 모두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것 이였다. 조선은 그동안 야인으로 배척해 오던 여진족과 형제관계를 맺은 것은 힘에 밀려 패전한 입장에서 취한 치욕적인 조치였을 뿐 아니라 후금에 대해 공물을 바쳐야 한다는 경제적 부담마저 안게 되었고, 후금 역시 비록 조선과의 조약으로 공물을 통해 물자 조달을 약속 받았지만 모문룡의 세력을 궤멸하지 못한 상태에서 배금 경향이 더욱 고조되어 여전히 배후에 불안의 씨앗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선은 후금은 형제의 맹약을 하고 두 나라의 관계는 일단락되었다.2) 후금(청)의 팽창 정책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요구를 들어 1928년 (인조6) 이후 중강(中江)과 회령(會寧)에서 각각 무역을 하여 조선의 예폐(고마움과 공경의 뜻으로 보내는 물건) 외에도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하여 주었음에도, 그들은 당초의 맹약을 위반하고 식량을 강청하고 병선(전쟁에 필요한 장비를 갖춘 배)을 요구하는 등 온갖 압박을 가해왔다. 그 뿐만 아니라 후금군은 민가에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아 척화배금(斥和非金)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격증하게 되었다. 당시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부근까지 공격하면서 기세를 떨쳤다.3)후금(청)의 군신의 의(義) 강요, 명 정벌을 위한 군수물자 요구 거절.정묘호란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君臣)의 의(義)’로 개약(改約)하자고 요청을 해올 뿐 아니라, 황금 ? 백금 1만냥 ,전마(전쟁에 쓰는 말)3000필 등 종전보다 무리한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까지 요구해왔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그들의 요구에 응하려 하지 않고 화의조약을 무시하고 후금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려는 움직임까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4)청의 사신 “용골대” 추방1936년 2월에는 용골대 ? 마부태 등이 후금 태종의 존호(尊號)를 조선에 알림과 동시에 인조비 한씨의 문상(問喪)차 조선에 사신으로 왔는데, 그들이 군신의 의를 강요하여 조선의 분노는 폭발하게 되었다. 조정 신하들 가운데 척화(斥和)를 극간(極諫)하는 이가 많아 인조도 이에 동조하여 사신의 접견을 거절하고 국서(國書)를 받지 않았으며 후금 사신을 감시 하게 하였다. 조선의 동정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린 그들은 일이 낭패하였음을 간파하고 민가의 말을 빼앗아 도주하였는데, 공교롭게도 도망치던 도중에 평안도 관찰사에서 유문(諭文)을 빼앗아 본국으로 가져갔다. 이로 인해 조선이 후금에 대한 태도가 무엇인지를 그들도 비로소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고 재차 침입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심양(瀋陽)에 간 조선사신에게 그들은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주창하는 자를 압송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내왔으나 조선에서는 그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조선에 재차 침입해왔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이다.(2)병자호란에 대한 국내의 대응1)척화파(주전론): 홍익한, 윤집, 김상헌을 중심으로 중화국가인 명과 이적국가인 청을 동등하게 종주국으로 대우할 수 없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무력으로 청을 응징하자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성리학자들이 중시했다.2)주화파(주화론): 최명길, 김욱, 홍서봉, 이민구를 중심으로 명분보다는 실리를 앞세워 외교 담판으로 청의 침략을 저지한 다음에 국력을 강화시키자는 주장이었다. 여기에는 최명길등 양명학자들이 가담하였다.(3)병자호란 경과36년 12월 청군 ? 몽골군 ? 한군 도합 12만의 대군을 심양에 모은 청태종은 스스로 조선침입에 나섰다. 마부대의 부대는 곧바로 서울로 진격하였는데 의주부윤 임경업이 백마산성을 굳게 수비함을 알고 이를 피하여 밤낮을 달려 10여일 만에 서울에 육박하였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침입한 것을 안 조선조정은 계속 도착하는 보고에 형세가 급박함을 알고 급히 관제를 전시체제로 전환하여 도성을 수비하게 하였다. 종묘사직의 신주와 왕손들을 강화도로 피난시킨 후 인조도 강화도로 향했으나 산성을 떠나서 강화로 향했으나 산길이 얼어 미끄러웠으므로 산성으로 돌아갔다. 이때 성 안에 있던 군사는 1만 3000이었는데 이들에게 성첩을 지키게 하는 한편 명나라에 원군을 청하였다. 당시 성안의 양곡은 겨우 50여 일을 견딜 수 있는 양에 불과하였다. 청군의 선봉부대는 심양을 출발한 지 보름 만에 이미 남한산성에 이르고 청태종은 다음해 1월 1일 20만의 군사로 성을 포위하였다. 포위된 성안의 조선군은 성을 빠져나가 적을 죽여 사기를 올리기도 하고, 각도의 관찰사와 병사들이 관군을 이끌고 올라오기도 했으나 목적지에 이르기도 전에 청군의 역습으로 패배하여 중도에서 좌절되자 남한산성은 절망적 상태가 되었다.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명나라는 나라 안의 유적 때문에 원병을 보낼 처지가 아니었다. 이때 경기 ? 호남 ? 경상도 등지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나 큰 전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남한산성으로 오는 군사가 붕괴되고 성과 외부와의 연락이 끊기자 강화론이 일어났다. 주화파와 주전파는 논쟁을 거듭하였으나 주전파 역시 난국을 타개할 방도가 있던 것이 아니어서 대세는 강화론으로 기울었다. 인조는 청군진영에 화호를 청하는 국서를 보냈으나 청태종은 국왕이 직접 성에서 나와 청군의 군문에 항복하고 척화주모자를 결박 지어 보내라고 하였다. 조선은 이에 응하지 않았으나 이때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강화수비를 맡은 김경징은 청군에 강화도에는 침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기습을 받자 그제서야 화약과 총탄을 나누어 주었다. 청의 대군이 들어오자 김경징과 수비를 맡은 관료들이 도망가고 남은 사람들은 빈궁과 왕자, 싸움에 익숙하지 못한 대신들이었다. 청군은 성으로 들어와 대군과 대군부인 등을 잡고 약탈을 자행하였다. 강화도 함락이 확인되자 인조는 출성을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홍서봉 ? 최명길 ? 김신국등 주화파는 적진을 오가며 항복조건을 제시하고, 청군 진영에서도 용골대 ? 마부대 등의 사신이 성안에 들어와 조건을 제시한 끝에 청과 강화협약이 이루어졌다. 협약내용은 조선은 청에 대하여 신?의?예를 행할 것, 명과의 교호를 끊을 것, 조선왕의 장자와 차자 그리고 대신의 아들을 볼모로 청에 보낼 것, 청이 명을 정벌할 때 조선은 원군을 보낼 것, 사신의 파견은 명과의 구례대로 할 것 등의 11개 조문 이었는데 조선으로서는 힘겨운 부담이었다. 그러나 63년 1월30일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성하의 맹의 예를 행하고 한강을 건너 서울로 돌아왔다. 청은 볼모들을 데리고 군사를 거두어 심양으로 돌아갔다. 청군은 철하는 도중에 동강진을 공격하였는데 항복조건에 따라 조선은 유림 ? 임경업을 보내 청군을 도와 싸우게 하였다. 이로써 동강진의 명나라 군대는 17년 만에 붕괴되고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 ? 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게 패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병자호란은 비록 한 달 남짓한 짧은 전쟁이었으나, 그 피해는 상당하였다.
노오(能)1. 노오(能)란?가마쿠라 시대 후기에 발원하여 무로마치 시대 초기에 완성된 일본의 가무극이다. 일본의 전통 예능인 노가쿠의 하나로, 원래 이름은 사루가쿠 노(猿樂能)이다. 가면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인데, 배우는 주연격인 '시테'와 조연격인 '와키'가 있고, 많은 역을 노멘이라는 탈을 바꿔가며 연기한다. 2009년, 현재 세계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어있다.2. 노오의 역사6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무대예술이며 세계적으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일종의 가면극이다. 노오가 예능으로 일본에 정착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의 일이지만, 1200년 전인 나라시대 때, 노오의 시초로 생각되어지는 산가꾸(散樂)라는 극이 중국·한국으로부터 전래 되었다. 이것이 원악이 되고 여러 가지 예능을 흡수하여 노오의 원형 사루가꾸(猿樂)가 되고, 이것과 뎅가꾸(田樂)에서 노오(能)가 생겼다.헤이안시대의 사루가쿠는 골계스러운 흉내내기가 중심이었으며, 여기에 곡예, 환술, 요술 따위가 가해져 있었다. 가마쿠라 시대가 되면서 사루가쿠의 내용이 차차 변화하여 익살스런 흉내내기와 종교적인 색채가 짙어지게 된다. 남북조시대 칸아미가 흉내 본위에 사루가쿠에 음악성, 가무성의 요소를 가미해 그 아들 제아미가 유현성을 추구하게 된다. 에도시대가 되자 노오는 무가의 시키가쿠(식악)로서 막부에 보존 되고 사루가쿠 노오만을 단순히 노오라고 부르게 되고 사루가쿠라는 호칭과 함께 사용되어 오다가 에도시대 이후로는 그저 노오라고 부르게 되었다. 칸아미, 제아미 부자가 대성하기 이전의 사루가쿠노오에 관해서는, 실제로는 그다지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노의 대본을 요쿄쿠(謠曲)라 하는 데, 그 대부분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고 현재는 240여 종만이 상연되고 있다. 현재 연기되고 있는 노오는 제아미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 제아미는 노오에 대한 많은 주해서를 남겼는데, 그의 주해서는 현재에도 노오를 연구하고 이해하는데 좋은 지침서가 되고 있다.3. 노오의 구성노오의 연희곡목이 보통 신(神),남(男),여(女),귀(鬼),광(狂)의 다섯 종류로 분류되어 상연 순서가 규정되어 있다. 첫 번째 거리 와키노모노는 '신 노오(神能)'라 할 수 있는 품격있고 당당한 구성이며 희극적 곡절이 적다. 두번째 거리는 무사의 이야기인 슈라모노라고 한다, 무사들은 생전에 많은 사람을 죽이기 때문에 죽어서는 말로 다하지 못할 고통을 겪는 곳 슈라도에 빠져 업보를 치르게 된다고 한다. 이런 슈라도에서 고초를 당하는 무사의 이야기를 다룬 곡을 슈라 모노라고 한다. 세번째 거리는 미남,미녀를 주인공으로 하는데, 보통 가쓰라모노라고 한다. 노에서 여자로 분장할 때는 전통적으로 가발을 쓰기 때문에 여성의 우아한 가무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곡목을 통틀어 가쓰라모노라고 한다. 가쓰라 모노는 우아하며 유현하게 전개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시 되는 세 번째 곡목으로 편성하여 '노 중의 노'라고 한다. 네번째 거리는 광란과 집착을 그리는 자쓰노 모노라 한다. 남녀 주인공이 겪는 가지가지 인간사를 주제로 삼는다. 마지막으로 다섯번째는 하루의 상연곡 중 마지막 거리인 이것을 기리노 또는 오니노라고 한다.4. 노오의 인물노오는 시테를 중심으로 행해지는데, 와키, 하야시 쿄오겐을 총칭해서 산야쿠라 부른다.① 시테노오 등장인물 중에서, 중심이 되는 주인공을 ‘시테’라고 한다. 시테는 배우라는 의미이 며, 기본적으로 가면을 쓰고 춤을 춘다. 시테는 레퍼토리에 따라 주인공의 생전과 사후 의 모습, 일상적인 모습과 꿈속의 모습 둘로 나뉜다. 극을 전 후 2장으로 구분하며, 전 반의 주인공을 마에시테, 노찌시테라고 부른다. 시테와 관련있는 등장인물 중, 주요한 인 물을 ‘츠레’라 하고 내용의 줄거리에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 단역적인 인물을 ‘토모’라고 하고 어린이 역을 ‘코카타’라고 한다.② 와키와키는 시테의 주장(망령의 현세에 대한 집념과 해탈에 대한 동경이 대다수)을 듣고, 또 주장을 구현하는 것으로, 시테의 춤을 형이상학적으로 받아들이는 역이다. 승려, 무사, 신하 등 남자역만 등장한다. 시테(주인공)의 상대역(조연)이며, 인간의 배역으로 가면을 쓰지 않는다.③ 쿄오겐카타노오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눠지는데, 그 사이 시테가 복장을 바꾸는 경우에 연결하는 목적의 배우이다. 주로 노오의 이야기에 얽힌 전승담이나 내력을 읊는다. 노오가 연출 중에는 무대 후방에 앉아,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여 무대 진행을 맡는 역이다.④ 하야시카타하야시카타는 악기를 연주하는 배역이다. 하야시카타에는 후에(피리), 코츠즈미(소북), 오오츠즈미(대북), 타이고(북)등 4개의 파트가 있고, 각각 자신의 악기를 전문으로 연주한다. 노오의 연출에서는 각 한명씩 총 4명으로 편성된다. 악기 연주뿐 아니라 하야시카타의 장단을 맞추는 소리도 노오의 중요한 요소이다.⑤ 지우타이지우타이는 시테, 와키, 하야시카타와 함께 이야기를 읊고, 춤의 반주를 한다. 제창을 담당하는 역으로, 정경 묘사를 하거나 등장인물의 심정을 대변한다. 6~10명으로 편성하 고 뒷줄 중앙에 앉는다.⑥ 쿄오겐주인공인 시테의 대역 역할과 등장인물의 뒤치다꺼리를 맡는 무대 조수역5. 노오멘노오멘이란, 노오가꾸에서 사용하는 가면을 말한다. 노오멘은 노오 배우의 혼이며, 연출에 서 옷, 연기의 모든 것을 통괄하는 이념이기도 하다. 노오멘은 기본적으로 60가지 정도가 있는데, 발생원인에 관해서는 분명하지가 않다. 노오멘은 크게 6종류로 대별된다.
◎남인 VS 서인 을 중심으로○서인과 남인의 공존 (붕당 공존기)서인과 남인의 50년에 걸친 붕당정치 시대 - 정치적 평화를 유지한 제도개혁의 시대인조반정(1623년)에 의해서 대북은 제대로 말살, 도살. 소북은 얼마간 근근히 명맥 유지하다가 자연소멸(북인 몰락) 남인과 서인은 한동안 평화적으로 공존했으나 인조반정을 일으킨 세력이 서인이었으니만큼 실권은 서인에게 있었다. 서인과 남인의 비율은 6:4정도였고 서인과 남인 학통을 이끈 산림들도 거의 대등하게 등용되었다. 이후 인조, 효종, 현종에 이르기까지도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붕당간의 조화로운 공존이 계속되었다. 서인이 주도적인 위치를 지키는 가운데 남인이 이를 견제하는 양당체제, 즉 정치적 평화시대였던 것이다.○환국(換換)의 발생 (대립기)1) 개념환국이란 바뀔 환(換), 판 국(換), 즉 국면이 크게 바뀐다는 뜻정국을 주도하는 붕당과 견제하는 붕당이 서로 교체됨으로써 정국이 급격하게 전환하는 상황을 말한다.1674년 왕실에서 공복을 입는 기간 문제로 일어난 갑인년 복제논쟁을 군주권 강화에 이용한 숙종 즉위년부터, 1729년 영조가 일당전제 정치를 끝장내겠다고 선언한 기유대처분 이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는 보통 일진일퇴 정국, 환국에 의한 일당독재, 역모조작과 정탐정치 등으로 표현되는 격렬한 당파싸움의 시기다. 전후 여덟 차례 정도 일진일퇴하는 환국정치에 의해 일당독재가 반복되었다.2)내용①갑인환국(甲寅換局) - 숙종즉위년(1674)현종 연간의 두 차례에 걸친 예송 논쟁의 결과 남인이 주도 붕당의 자리를 차지하고 서인이 견제 붕당의 위치로 떨어지는 변화가 있었다. 이것이 첫번째 환국으로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하는 1674년 갑인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갑인환국(甲寅換局)이라고 부른다.㉠내용: 효종이 승하하자 자의대비의 상복문제로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였다. 서인은 효종이 적통이 아니었기에 그 비인 인선대비 역시 적통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6개월간 상복 입기를 주장(대공설)하였고, 남인은 왕비의 승하이므로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기년설)하였는데, 그 주장의 근거는 1차 예송논쟁 때와는 다르게 남인이 승리를 하였다. 이것은 왕실과 사대부의 차이를 명확히 함으로써 왕권이 강화된 것을 의미한다.㉡결과: 서인의 거두 송시열은 유배를 가게된다. 그리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서인과 남인은 서로가 정책을 겨루는 붕당정치로 본질을 흐리지 않고 잘 흘러갔다.남인>서인②경신환국(庚申換局) - 숙종6(1680)㉠내용: 갑인환국 이후 정권을 유지하고 있던 남인 일당정권이 서인에 의해 대규모로 숙청된 사건이다. 남인이 정권을 주도하게 되자 숙종은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동생 김석주를 기용해 남인 세력을 견제해나갔다.(김석주는 원래 서인이었지만 송시열을 제거하고 서인 정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제2차 예송 때 남인 쪽을 응수한 인물이었다.) 이로 인해 남인 정권이 무너지고 서인 일당정권으로 급격히 정권이 교체되었다. 이 정권교체는 남인정권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북벌을 위한 새로운 군대인 체부를 설치함으로써, 당시 숙종의 신임을 받던 서인계 외척 김석주의 군사권을 약화시켜가는 과정에서 일어났다.갑인환국으로 집권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정권이 다시 수립되었다.㉡결과: 붕당정치의 원리가 무너지고, 본질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상대세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일당전제화의 추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서인 김석주와 김익훈 등이 남인 허견과 왕족 복선군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숙종에 고하여 남인 세력을 제거하였다.서인>남인③기사환국(己巳換局) - 숙종15(1689)㉠내용: 서인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남인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를 말한다. 이 정권교체는 장희빈이 아들을 (후일의 경종) 낳자, 곧바로 왕위계승권자로 정하려는 것을 서인들이 반대함으로써 일어났다. 이로써 서인 영수 송시열은 사사당하였고, 많은 서인들이 유배되었다. 숙종은 그 후 서인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를 폐비시키고 장희빈을 왕비로 올렸는데 이에 반대하며 상소를 올린 많은 서인을 숙청시켰다.이렇게 서인은 정치 일선에서 제거되자 힘을 상실하게 되었고, 조정에 남인이 대거 등용되어 정국의 주도 권은 민암, 이의징 등의 남인에게 돌아가게 된다.㉡결과: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반대하는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을 죽이거나 파직 유배 시킴으로써,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한다.남인>서인④갑술환국(甲戌換局) - 숙종 20(1694)㉠내용:이 정권교체는 서인계와 남인계 일부 집단의 정탐정치 시도에서 발단되었다.소론의 김춘택, 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운동을 전개했는데, 집권파인 남인은 이를 계기로 반대당인 소론 일파를 축출할 목적으로 김춘택 등 수십 명을 체포하여 국문하였다. 폐비사건을 뉘우치고 있던 숙종은 이 일을 기화로 남인을 숙청하고 소론을 등용하였는데 이 사건을 갑술환국이라 한다. 폐비되었던 인현왕후가 다시 중전으로 복위되었고, 반면에 장희빈은 왕후에서 빈으로 강등되었다. 기사환국 때 사사된 송시열, 민정중, 김익훈 등이 복권되었으며 남인은 이 사건 이후 중앙정계로 진출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