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빙기의 영화들(이반의 어린 시절, 한 병사의 발라드, 학이 날다.)-관객은 정화를 느꼈을까?러시아에서 대 조국전쟁을 배경으로 그린 영화는 매우 많다고 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 해빙기의 3대작품은 다른 영화와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영화를 그리면서 관객에게 다가온다. 우선 이 해빙기의 세 작품의 공통점을 생각해보았다. 물론 ‘해빙기’라는 수식어와 관련해서 생각해보았다. 이 세 작품은 스탈린의 문화정책에 저항한 작품들이다. 러시아의 전쟁영화에서 일반인은 등장하지 않았다. 독일과의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은 정부는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고 전쟁의 어두운 면보다는 승리를 강조하여 시민들의 갈등 혹은 슬픔을 억누르려고 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영웅은 등장하지 않으며 지극히 나약하고 감정에 예민한 소년, 청년들이 등장한다. 또한 이들은 모두 죽음으로 영화가 끝난다. 그렇다면 감독은 어째서 이런 민감한 부분을 영화로 그리려 했던 것일까? ‘한 병사의 발라드’의 감독 그레고리 추흐라이는 자신은 직접 전쟁에 참여했었고 많은 부상을 입었다고 말한다. 그는 전쟁을 체험하면서 누구보다 화려한 승리 내면에 감추어진 시민들의 아픔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미국과 영국에 비교하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국가가 러시아인데 정부는 그런 비극을 감추려고만 하였다. 따라서 시민들의 고통은 국가에 의해 그냥 방치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들이 더욱 돋보이는 것 같다. 이 영화들은 구체적으로 자세히 시민들의 아픔을 그린다. 이반은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복수심에 불타 독일군을 혐오하며 어린 나이에 직접 전쟁에 참여한다. 그리고 작전 수행 도중 적군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한다. 소년은 꿈과 현실을 오가며 더욱 현실의 괴로움을 꿈으로 달래려고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꿈속에서 조차 그는 어린 여동생을 잡지 않고 지나쳐 불타는 고목이 있는 곳으로 달린다. 전쟁의 상처는 극복될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한 병사의 발라드’와 ‘학이 날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 병사의 발라드’에서는 많은 커플을 등장시킨다. 상이병사와 동료병사의 바람난 부인 그리고 자신을 비롯해 전쟁 중에 사랑의 희비에 대해 말한다. 러시아의 모든 여성이 군대에 있던 남자를 기다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의 많은 병사들은 자신을 기다려주는 여성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당시 시민들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겠는가? 시민들이 마음 한 구석에 억압받고 있던 슬픔을 터트렸을 것이다. ‘학이 날다’의 커플들은 결국 다시 만나지 못했다. 오히려 동생과 결혼하는 등 ‘있음직한’ 얘기들은 그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계속 전쟁에 출전한 남자친구를 잊지 못하는 모습도 보여줘 더욱 현실에 다가갔다. 또한 당시 부상당한 병사들의 처지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좁은 병동에 빼곡히 모여 치료를 받고 있었으며 계속 발생하는 부상자들을 감당할 수 없어 계속 그들을 다른 병원으로 몰았다. 하지만 감독의 마지막 장면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군대에 갔던 남자를 기다렸는데 어째서 갑자기 꽃을 나누어 주는가? 다른 사람의 말 몇 마디에 눈물이 그칠 수 있는가? 아마 감독은 이제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나야 한다는 메시지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런 방식은 옳지 않다. 몇 년을 기다렸는데 순간의 말 몇 마디에 삶의 방향이 바뀔 수는 없다. 차라리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으로 끝났다면 훨씬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이처럼 영화들은 전쟁의 승리나 영웅의 모습을 그리면서 현실을 감추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전쟁의 아픈 기억을 재현하여 시민들에게 보여준다. 평범한 주인공들의 전쟁 속 비참함과 전쟁 중의 엇갈리는 사랑이야기와 주인공들의 죽음은 그들의 경험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슬픔이나 그리움의 감정이 억눌려있다면 사람들은 더욱 불안하며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 후 관객들은 그동안 쌓여있던 울분과 그리움 등의 감정을 폭발시켰을 것이다. 영화를 보며 울고 공감하는 것을 통해 그들은 한결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게 됐을 것이다. 이러한 점이 이 세 영화를 빛내주는 원인 중 하나 일 것이다. 해빙기의 이 영화들은 시민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주어 과거의 짐을 털고 일어나게 해주었다. 그렇다면 이 세 영화들은 전쟁의 아픔을 얘기하기 위해 어떻게 표현하였는가? 개인적으로 ‘이반의 어린 시절’이 가장 잔인하고 충격적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이반의 어린 시절’은 전쟁 상황을 똑바로 겨눈다. 다른 두 영화는 전쟁이라는 상황은 똑같지만 전쟁 외적 이야기-특히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감정이라는 사랑을 통해서-를 통해서 전쟁의 참혹함을 이야기한다. 이에 비해 ‘이반의 어린 시절’은 전쟁의 비극을 이야기하기 위해 더욱더 전쟁에 몰입한다. 특히 감독은 대조의 방법을 통해 이야기를 전한다. 오프닝에서 이반은 순수한 소년의 얼굴이다. 에덴동산에 있는 듯 한 몽환적인 느낌이다. 하지만 교수형에 처한 이반의 얼굴은 결코 소년의 얼굴이라고 할 수 없다. 게다가 감독은 클로즈업하여 이반의 표정을 보여주어 마치 관객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얘기하는 것 같다. ‘이반의 어린 시절’은 계속 현실과 꿈을 대조하여 보여준다. 이로써 현실의 비극성은 더욱 부각된다. 전쟁에 대해 비극 감을 넘어서 혐오감을 주려는 의도인 것 같다. 안드레이 따르꼬프스키는 파격적으로 영화를 촬영하였다. 전쟁의 슬픔에 대해 이야기한 영화는 많이 있다. 요즈음에도 전쟁의 슬픔을 다룬 영화는 많다. 우리나라 역시 6·25라는 큰 전쟁을 겪었기 때문에 이런 주제를 한 영화는 많이 있다. 하지만 ‘이반의 어린 시절’은 이러한 영화들과 나머지 해빙기의 두 작품과는 다르다. 다른 작품들은 사실 사랑을 이야기하여 오히려 연인이나 가족의 헤어짐이 중점이 되었고 전쟁의 비극은 사랑의 슬픔을 이야기하는 도구로써 쓰이지 않았나 생각해 보았다. 사실 ‘한 병사의 발라드’와 ‘학이 날다’의 주제가 무엇인가? 영화를 흑과 백처럼 이렇게 주제를 나눈다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주제를 구체화시켜 본다면 이 두 영화의 주제는 사랑인가? 전쟁의 슬픔인가? 나는 사랑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물론 당시 현실이 전쟁 후 이며 관객의 공통적인 슬픔이 전쟁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위에 말한 것처럼 이들의 슬픔을 달래주며 감정을 자극하여 그들의 마음을 정화시켜주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주제를 얘기한 것은 전쟁을 똑바로 직시하지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하였다. 비단 전쟁 뿐 아니라도 헤어짐의 아픔은 얘기할 수 있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이반의 어린 시절’은 다른 감정을 통해 전쟁의 아픔을 얘기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전쟁의 슬픔을 파격적으로 얘기하였다. 당연히 감히 내가 ‘어느 작품이 더 훌륭하다’거나 ‘어떠한 방법이 옳고 그르다’라고 판단할 수 없다. 다만 나는 이 해빙기의 세 작품들 중에서 ‘이반의 어린 시절’이 좀 더 직설적이고 과감하게 영화를 제작하였고 이러한 감독의 시도에 충격을 받았다.
full monty!개인적으로 영화 ‘모던타임즈’를 발표했었기 때문에 영화를 보며 이 두 영화를 계속 비교하였다. 두 영화 모두 배경과 촬영방식 등은 다르지만 하나의 주제- 실업에 관한-를 다루고 있다. 직업 소개소도 있고 국가의 강제력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폴 몬티가 더 나은 듯 하지만 실상은 비슷하다. 폴 몬티에 나온 정부의 대책들 역시 미봉책에 불과하다. 남녀의 성역할에 대해서도 기존과 다른 시선을 보여주었지만 그러한 주제보다는 ‘모던 타임즈’와 비교하여 살펴보았다.‘모던 타임즈’의 시대적 배경은 산업혁명과 경제 대 공황이다. 이 시기 노동자는 인간으로서 그리고 개인으로서 존중을 받지 못하고 기계의 부속품이 되어 자아를 찾지 못한다. 심지어 분업으로 인해 자신이 하는 일과 생산품 사이의 소외를 겪는다. 또한 노동자의 파업이나 운동에 대해 국가는 경찰력을 이용하여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등 국가와 노동사회가 적나라하게 직접적인 대결을 하였다. 하지만 영화 ‘폴 몬티’는 ‘모던 타임즈’와 다르게 좀 더 부드럽게 영화를 진행한다. 격한 감정을 표현하기보다는 부정(父情)이나 가장으로서 책임감 혹은 의욕과 자신감을 상실한 남편 등을 그림으로써 관객의 감정을 자극한다. 아마도 찰리 채플린의 영화보다 이 영화를 보며 공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 같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가 코미디 영화였기 때문에 그런 점도 있지만 ‘폴 몬티’는 산업구조의 변경과 이에 따른 ‘신 자유주의’경제체제로 넘어가는 대량 실업 속에서 부정애와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이를 속이는 등은 당시 많은 남성들이 겪는 현실이었을 것이다.산업혁명 속에서 나타나는 자본주의 문제점은 ‘모던 타임즈’가 잘 이야기하고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개인으로서 존엄성상실과 노동과 생산품 사이의 괴리속의 소외감 그리고 강력한 국가의 지배 속에서 점점 노동자는 최소 인간으로서 대우를 받지도 못하며 주체성을 상실해 간다. 주체성 상실과 자신의 삶의 객체화가 당시 사회의 큰 문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폴 몬티’는 자본주의의 또 다른 악(惡)을 그린다. 실업과 이에 대한 정부의 미봉책도 큰 문제이긴 하지만 내가 본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性)과 신체의 상품화이다. 여성의 성 상품화 역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더욱 강력하고 과감해지고 있다. 이는 바로잡아야 하겠지만 사실 개인적으로 여성의 성 상품화를 원천적 혹은 강력하게 변화시킬 없다는 회의적 입장이다. 남성으로서 성 욕구와 가장 오래된 직업이라는 매춘 등은 이를 쉽게 억제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동안 금기시 되었던 남성의 스트립쇼를 다룬 것에 있다. 영화는 마치 남성들이 스트립쇼를 하는 것을 자아를 발견하거나 실직 같은 회의적인 상황 속에서 새로운 탈출구를 찾은 듯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감독이 당시 상황과 자본주의 문제점을 더욱 극대화시켜 표현하기 위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스트립쇼에서 남성이든 여성이든 신체 혹은 성(性)은 10파운드짜리 쇼의 도구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신체를 말초적인 감각을 위한 원료로 둔갑시킨다. 인간의 성과 신체는 개인의 존엄성과도 연결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신체를 자신의 의지가 아닌 자본 때문에 타인 앞에서 벌거벗는 행위는 존엄성의 상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너무 자연스러워져서 우리는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아래는 성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판결을 실은 기사이다. 이와 관련된 뉴스를 읽었는데 과연 이것이 올바른 판단인지 좀 더 생각해봐야 한다.‘김 씨는 정보통신망을 통해 음란물을 배포·전시했다는 이유로 기소됐다. 남녀의 성행위나 자위행위 등을 묘사한 3~5분 분량의 동영상이었다. 김 씨는 정보통신망을 통해 음란물을 배포·전시했다는 이유로 기소됐다. 하지만 재판부는 “김 씨가 제공한 동영상에 성기 및 음모의 직접적인 노출이나 폭력·강제를 수반하는 등의 장면은 보이지 않는다”며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훼손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모던 타임즈’와 다른 점은 자본주의의 이러한 문제에 대한 차이뿐만 아니다. ‘모던 타임즈’가 찰리 채플린 1명의 표정과 그가 겪는 여러 사건과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하나의 주제를 표현하려 했다면 ‘풀 몬티’는 여러 배우, 인물들의 한 명 한 명의 사연을 통하여 주제를 표현하였다. ‘풀 몬티’는 여러 배우들이 실직의 상태에서 겪는 괴로움을 다양하게 보여주며 당시 관객의 공감을 얻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영국뿐 아니라 우리나라도 겪은 IMF시대의 ‘추락한 가장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카메라의 촬영 방식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 ‘모던 타임즈’는 주로 찰리 채플린 1인의 역할과 비중이 컸기 때문에 그의 표정을 잘 표현하기 위하여 인물에 대한 클로즈업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폴 몬티’는 하나의 인물 혹은 표정보다는 사회 속의 가장들을 표현하려 했기 때문에 인물에 대한 클로즈업이 아닌 배경과 풍경을 확대하고 인물을 작게 표현하였다. 특히 제랄드가 가즈일행에 때문에 면접에서 떨어지고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홀로 처량하게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을 통해 이를 잘 파악할 수 있다. 물론 클로즈업을 통해 관객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주는 장면도 있었다. 제랄드의 재물을 가져다준다는 인형이 바닥에서 깨질 때 장면이다. 아내는 그의 속임에 화나가서 인형을 집어던졌는데 그 인형이 깨진 장면을 크게 클로즈업하여 제랄드의 부(富)의 상실을 표현하였다.
영화 10월 감상문이 작품 역시 「전함 포템킨」과 마찬가지로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 촬영기법에 대해 잘 알 수 있었다. 영화를 보면 에이젠슈타인은 몽타주기법을 활용해 자신이 전달하고자하는 바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영화 초반부에 알렉산더3세와 독수리를 이어서 보여준 후 민중들이 이를 철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러시아 ‘2월 혁명’의 결과로 황제가 물러나고 케렌스키의 임시정부가 세워지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 뿐만 아니라 이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이라고 생각되는 반혁명자들이 혁명자들을 탄압하는 장면에서 민중들에게 기관총을 발사하는 병사와 기관총을 계속 겹쳐서 보여주는 장면을 통해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는 민중들의 바라던 혁명의 뜻을 져버렸다는 것을 암시하였다. 또한 백마와 혁명자들이 죽어 길바닥에 누워있는 장면을 대비시키며 관객에게 강렬한 느낌을 전해주었다. 후에 승리자들의 전단지가 강에 뿌려지고 혁명자들의 깃발이 강에 떠내려가는 장면에서 말이 강으로 빠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케렌스키정부가 혁명의 뜻을 잃어버리고 점점 민중과 괴리되고있다는 것을 이 장면을 통해 보여주었다. 이처럼 케렌스키의 임시정부가 계속 혁명의 뜻을 어기고 있다는 것을 후반부 몇몇에도 나온다. 케렌스키가 나폴레옹과 교차되는 장면이라든가 4개의 술병을 하나로 합치고 그 술병마개가 마치 왕관처럼 생겼다는 것을 클로즈업하는 장면에서 케렌스키정부의 반혁명적 성격을 알 수 있다. 동시에 폴란드 역에서 환호하는 시민들이나 볼세비키당을 이끌며 시위를 주도하는 레닌을 보여주며 그를 마치 ‘혁명의 아버지’로 그렸다.이처럼 이 영화는 매우 강한 색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영화내부가 아니라 영화외부에서 확인해야한다. 외부적 환경을 파악함으로써 우리는 이 영화가 역사적 사료로서 가치가 있느냐 파악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스탈린의 명령에 의하여 러시아혁명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영화이다. 하지만 에이젠슈타인은 영화를 제 날짜까지 못 만들었는데 그 이유는 스탈린이 트로츠키가 영화에 나오는 것을 알고 삭제를 요구해서 제작기간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이 이 영화가 가지는 단점이다. 스탈린은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민중들에게 러시아혁명 속에서 볼셰비키의 역할을 강조하여 민중들의 불만을 잠재우려고 하였다.영화를 보면서 몇 장면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혁명 당시 러시아 민중들은 코르닐로프장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힘을 가지고도 2월 혁명이나 7월 혁명에서 임시정부를 타도하거나 정권교체를 하지 않았다. 또한 영화 초반부를 보면 그들은 ‘임시정부여 영원하라’ 라고 외친다. 비록 임시정부가 실정을 하여 민중들의 혁명적인 이상과 멀어지고 있었지만 이러한 점을 미루어 봤을 때 민중들은 볼셰비키당의 독점이나 급진적인 혁명을 원했던 것 같지 않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급진적 혁명이 아니라 빵과 토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10월에서는 혁명을 일으켰다. 왜 2월과 4월, 7월에 혁명을 일으키지 않고 10월에 혁명을 일으킨 것일까?볼셰비키와 레닌의 선동에 의하여 민중들은 ‘얼떨결에’ 혁명을 일으킨 것 같다. 영화에서도 많이 나오듯이 볼셰비키는 선전물을 잘 활용하여 민중들에게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볼세비키당은 2월과 4월 그리고 7월에 쌓여있던 민중들의 분노를 선전물 등을 이용하여 증폭시켰다. 또한 세계 제 1차대전으로 임시정부가 어려움을 겪자 레닌이 이런 혼란을 틈타 혁명을 선동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레닌을 승리자로 묘사하며 혁명을 선도하는 인물로 그렸다. 특히 마지막에 ‘러시아에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해야한다’라고 레닌의 말을 삽입하여 그 효과를 가중시킨다. 혁명후 레닌과 볼세비키당은 다른 세력들을 무력억누르고 1당독재체제를 갖는다. 또한 민중들의 바람이었던 토지소유조차 후에 국유화함으로써 민중들로부터의 혁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11월 25일 선거 결과가 사회혁명당이 40%로 제 1당, 볼세비키당이 24% 제2당의 선거의석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에 불응한 볼셰비키는 의회를 무력으로 해산하고 최대의 소비에트 권력을 손에 넣었다. 이후 레닌과 스탈린 그리고 볼셰비키는 비밀경찰과 공동수용소 등을 이용하여 민중을 억압하고 민중의 혁명정신을 앗아갔다.
영화 을 보고예전에 노엄 촘스키의 「촘스키의 아나키즘」이란 책을 본 적이 있었다. 비록 워낙 기본지식이 없고 이해력이 짧아 책의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는 스페인혁명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무정부주의의 희망적 혁명이라 표현한 것은 확실히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서 본 스페인혁명은 너무나 비극적이고 슬픈 혁명이다. 그리고 전 시간을 통해 공부한 러시아혁명과 레닌주의, 스탈린주의와 연결이 되면서 다시 한번 혁명에 대해 생각해보았다.켄 로치의 이 영화는 한 소녀와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소녀가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며 편지를 읽는 장면에서 영화는 현재에서 과거로 흘러간다. 한 젊은 공산당원은 리버풀에서 혁명전에 참전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무작정 자신의 의협심만 가지고 스페인으로 출발한다. 그곳에서 그는 POUM동지들을 만나 민병대원으로 혁명에 참전한다. 민병대는 진정한 혁명군으로 그려진다. 그곳에서는 거수경례와 계급도 없으며 남녀구분도 없다. 여성은 ‘이쁜이’로 불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오로지 ‘동지’만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다같이 파시스트와 맞서 싸운다. 하지만 영화에서 파시스트군과 민병대군의 대규모전투는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중반부와 후반부로 갈수록 혁명군 내부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제일 처음 발생하는 문제는 토지집단화이다. 그들은 토지사유화는 곧 혁명의 이념을 배신하는 것이며 따라서 어떠한 문제보다 즉각적인 혁명을 위해서 토지는 집단화 되야한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마찰이 발생하지만 곧 다수결에 의해 쉽게 문제는 조절된다. 하지만 중요한 내분은 이것이 아니다. 민병대는 공산주의와 어긋나기 시작한다. 다른 모든 국가가 스페인을 외면할 때 소련은 스페인을 원조해준다. 단 그들의 방식에 어긋나는 군대에겐 무기를 공급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그들은 민병대를 파시스트를 도와주었다는 혐의를 씌워 그들을 체포하고 사살한다. 혁명은 실패로 끝난다. 스페인혁명은 스탈린이 자신의 세력확대를 위해 이용당한 도구처럼 보였다. 촘스키가 어떠한 면에서 스페인혁명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영화장면 중 도시에서 공산주의자들과 민병대들과의 전투에서 한 아주머니가 ‘서로 싸우지말고 파시스트와 싸워야지!’ 라고 외치는 부분이 있다. ‘나의 적의 적은 곧 나의 동료’라는 유명한 말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민병대와 공산주의자들의 적은 파시스트이다. 하지만 민병대와 공산주의자들은 동료가 아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파시스트의 또 다른 가면이다. 그들은 경례를 하고 규율을 만들고 이를 세뇌시킨다. 이에 협조하지 않는 사람에겐 총을 겨눈다. 스탈린주의는 결코 좌파도 아니며 더욱이 혁명군도 아니다. 파시스트와 같은 극우이다. 그들은 또 다른 중앙집권을 만들고 이에 복종을 강요한다. 부르주아와 다른 식으로 불릴 뿐이다. 민병대는 끊임없이 이에 저항하나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인 무장해체씬은 혁명중 발생한 중앙집권권력의 횡포를 낱낱이 밝혀준다. 혁명이란 곧 또다른 권력을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러시아혁명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본 러시아혁명은 결코 성공적이지도 않고 희망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혁명이라기 보단 쿠데타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대중들의 욕망을 일부 세력-볼셰비키-이 이용하여 대중을 선동하여 그들을 중앙에 올려놓았다. 또한 대중은 이러한 선동에 곧 잘 이용당한다. 영화에서 데이빗은 공산당이 옳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당이 하는 일은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점을 이용하여 당은 새로운 지배계층을 만들고 중앙집권을 만든다. 그렇다면 혁명은 과연 성공할 수 없는 것인가?교재에서는 오늘날 사회에서도 파시즘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전쟁기계가 되어 끊임없이 욕망을 억압하고 포획하려는 집단과 투쟁을 벌여야한다고 한다. 특히 유목민의 삶을 예로 들면서 끊임없이 중앙을 파괴하고 탈코드화 삶을 살아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창조적 탈주선을 긋고 매끄러운 공간을 구성하며 그 공간에서 새로운 인민을 구성하는 전쟁기계의 투쟁은 계속되고 또 계속되어야 한다.” 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물론 이러한 해체작업은 중앙권력이나 기존의 잘못된 규범이나 규율에서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의문점이 생긴다. 과연 이러한 삶이 실현될 수 있는가? 유목민의 삶이 현실에서 가능한가? 니체는 이러한 의문이 전쟁을 피곤하게 여기고 쉬고자하는 욕망 때문에 나오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중앙이 없는 삶이란 있을 수 있는가? 또 중앙이 없는 사회가 올바른 사회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한다. 칸트는 ‘악마들도 국가가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Modern Times] 곳곳에서 우리는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알 수 있다. ‘포드식’ 공장에서 노동자들은 각자가 맡은 일을 하고,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이며 파업을 하는 거리의 모습, 그리고 대량 실업. 이로부터 우리는 이 영화가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대공황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경제대공황은 마르크스에 의해 이미 예언되어있었다. 19세기에 산업혁명이 전 유럽과 미국 등지로 확산되면서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착취를 당해야 했다. 이러한 속에서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심화되어갔으며 이는 1차 세계대전 이후 급기야 경제대공황 발생하게 되었다.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생산은 ‘효율적’으로 이루어진다. ‘포드식’공장들처럼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시간 속에서 최대한의 생산을 이루어 낼 것을 강요받는다. 영화 속 노동자들이 분업에 의해 자신에게 주어진 단순 작업만을 빠르게 반복하는 모습은 이러한 방식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그 효율성이라는 개념은 필연적으로 시간과는 뗄 수가 없는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영화의 오프닝은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시계가 돌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첫 장면에서부터 자본주의와 시간 이 양자의 관계를 날카롭게 파고들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한편 영화에서는 대공황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트럭에서 떨어진 깃발을 흔들고 있는 찰리 채플린 뒤에 수많은 사람들이 시위를 벌이고, 찰리 채플린은 경찰로부터 시위주동자라고 오해를 받아 감옥으로 가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많은 장면에서 끊임없이 파업과 대량 실업을 보여준다. 찰리 채플린이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 생각해 보기위해 좀더 이 영화의 배경, 미국 경제대공황과 자본주의의 발전에 본격적인 국면을 가져온 산업혁명에 대해 살펴보자.1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롤링 투웬티’ 즉 번영의 20년대라고 불리는 엄청난 경제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검은 목요일’이라는 주식붕괴가 일어나고, 이를 막기 위해 미국은 유럽의 채무국으로부터 돈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하여 유럽에까지 경제공황의 영향이 미치게 된다. 주식시장의 붕괴를 기점으로 시작된 대공황의 영향은 곧 경제 전체로 파급되었다. 예금 인출 사태가 일어나 은행은 지급불능상태가 되고, 미국에서만 수백만 명에 달하는 농민들이 농장을 잃었다. 1931년 당시 전 세계의 실업자수는 2000만명에 달할 것이라는 보고도 나와 있었다. 당시 이와 같은 대규모의 불황이 닥쳐오리라고 예상했던 경제학자는 한 사람도 없었으며 현재에도 대공황의 원인에 대해서는 케인지언 경제학자들과 통화주의자 경제학자들 간의 의견이 분분하다.다음으로 산업혁명에 대해 살펴보자. 영국에서는 중세 때부터 19세기에 이르기 까지 끊임없이 ‘인클로저’라고 불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농작물을 생산하는 것보다 모직물 생산을 위한 목양이 더 유리함에 따라 농경지를 목양지로 바꾸었던 현상을 이른다. 이런 과정에서 수많은 농민들이 자신의 땅을 잃고 농업노동자로 전락하거나 도시로 이주해 공업노동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노동공급이 풍부해지게 되는데 이는 생산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산업예비군 형성의 기반이 되었고, 이는 자본주의가 발달되고 심화되는 토대가 되었다. 영화 속의 찰리 채플린 역시 집도 없고 돈도 없는 임금노동자이다.그런데 자본주의경제의 심화는 단순히 많은 사람들을 임금노동자로 만들어 노동착취를 당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는데서 끝나지 않는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그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체제 하에서 인간은 어느새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타성에 젖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영화에서 찰리채플린의 모습에서 희화화 되어 드러난다. 컨베이어 벨트 공정에서 찰리 채플린은 나사를 조이는 역할을 맡는데, 공장에서 나사만 조이던 그는 급기야 튀어나온 모든 것을 조이려고 든다. 사람의 코나 단추 등을 계속 해서 조이려드는 그의 모습은 자본주의 아래서 타성에 젖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을 풍자하는 것이다.한편 경찰은 이렇게 비판력을 상실한 인간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등장한다. 영화 속에서 경찰은 계속해서 찰리 채플린과 소녀를 체포하려고 하는데, 이는 찰리 채플린이 계속해서 자본가의 요구대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영화가 끝난 후 나오는 ‘out take'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여기서 찰리 채플린은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계속해서 신호와는 반대로 움직인다. 그러자 반대편에 있던 경찰이 다시 되돌아가서 정해진 신호에 따라 움직이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찰리 채플린은 또다시 남들과는 반대로 움직이고 경찰은 또 그를 돌려보낸다. 그때 화면에서 신호등을 크게 보여주는데 찰리 채플린은 ’go' 신호에 횡단보도를 건너고 ‘stop' 신호에 정지한다. 하지만 사실 이 신호는 사람이 아닌 차에게 보내는 신호였던 것이다. 찰리 채플린은 이를 계속 착각하는 것이다. 이 장면에 찰리 채플린이 하고 싶은 말이 잘 집약되어 있다. 영화 속 찰리 채플린은 사람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 신호등은 이해하고 있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에게 ‘go’라는 신호는 차가 아닌 사람에게 보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채플린은 영화 속에서 ‘미적응자’로 취급된다. 그리고 이러한 ‘미적응자’를 처벌하기위해 경찰이 투입된다.또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시간을 통제한다. 영화 속에서 노동자들은 쉬는 시간에 시간체크기에 시간을 체크하고 쉬며 다시 일할 때 또 체크한다. 그들은 담배 한 개비 피울 여유조차 없다. 자본가의 통제 속에서 그들의 시간은 그들의 것이 아닌 자본가의 것이 되며 이는 노동자들의 의식 속으로 내면화된다. 영화속에서 채플린은 경찰에게 쫒기는 그 다급한 순간에조차 시간을 체크하지 않는가.자본주의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그는 신호를 지키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결국 정신병에 걸리고 만다. 정신병원에서 치료가 끝난 그는 다음과 같은 의사의 처방을 받는다. ‘편하게 마음먹어요. 흥분은 금물입니다.’ 하지만 곧이어 오버랩 되는 장면은 그 의사의 처방이 도저히 실현될 수 없는 사회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바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 수많은 자동차. 이러한 사회 속에서 어떻게 마음을 편하게 먹을 수 있을까.영화는 채플린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여 또다시 정신병에 걸리는 장면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사회에 ‘순응’하여 기계적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그는 이를 그 나름의 방법으로 극복한다. 영화 속에서 채플린은 사회와 현실에 좌절하여 다시 감옥으로 가려고 한다. 순찰차에서 떨어진 그는 자신만 감옥에 가려하고 소녀는 도망치게 하려고 한다. 그러나 소녀가 그를 부르고 그녀의 부름에 망설이던 채플린은 결국 소녀와 함께 도망간다. 소녀와의 사랑으로 그는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다. [Modern Times]에서 소녀는 주인공 채플린에게 삶의 희망을 주고 자본주의에 굴하지 않게 해준다. 여기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녀는 그가 파업으로 또다시 직장을 잃자 그에게 새로운 직업 - 노래와 춤을 추는 - 을 소개시켜주기도 한다. 여기서 찰리 채플린은 망설인다. 하지만 그의 망설였던 모습과 달리 그는 ‘가사’없이도 매우 훌륭히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어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고, 결국 가게 주인과 계약하게 된다. 비록 경찰이 또 개입하여 이 직업을 계속 할 수는 없었지만 찰리 채플린은 새로운 삶을 얻는다. 채플린은 좌절이 찾아온 소녀에게 이번에는 거꾸로 도움을 준다. 웃으면서 우린 할 수 있다고 소녀를 위로한다. 결국 소녀 역시 이 좌절을 극복해내고 찰리 채플린과 가로수 길을 걸어가며 영화 [Modern Times]는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