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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셸 투르니에의 "지독한 사랑"을 읽고
    “지독한 사랑”을 읽고지독한 사랑이라는 책을 읽기 전에는 나는 로맨스 소설의 종류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책표지에는 낯익은 이름이 보였다. 그 이름은 잔 다르크 이었다. 역사분야에 관심이 많던 나는 이 책을 선택한 것을 만족하였다. 맨 처음의 내용은 잔 다르크와 질의 만남, 잔 다르크의 등장을 다루고 있으며, 질은 점점 잔 다르크에게 빠지게 되고 영원한 충성과 사랑을 맹세하게 된다. 그러나 소설에서도 실제역사와 마찬가지로 잔 다르크는 화형을 당하여 죽게 되었다. 역시 잔 다르크가 죽었을 때에는 너무나도 아쉬웠다. 소설이라는 특성을 잘 살려서 잔 다르크의 극적인 생존이나, 질에 의한 구출 극을 그려봤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역시 잔 다르크 사후 질은 절망과 분노에 휩싸였고, 결국 질은 타락하게 되고 잔 다르크의 뒤를 따르게 된다. 『잔은 그 추억을 회상하며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특히 당신에게 있는 그 순수함, 그 무엇도 더럽힐 수 없는 그 순수함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질은 머리를 숙이고 잔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한 번만이라도 내 키스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그는 몸을 숙이고 한참 동안 입술로 잔의 상처를 눌렀다. 이윽고 다시 몸을 일으켜 혀로 입술을 핥았다. “나는 당신의 피로 영성체를 했습니다. 영원히 당신과 결합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당신이 어디를 가든 쫒아 다닐 것입니다.』이 부분의 상황이 정말 잘 묘사 되어있는 것 같다. 잔 다르크에 대한 질의 충성과 사랑을 증명하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잔 다르크가 여러 전투에서 승리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느끼기에는 뛰어난 전략, 전술보다는 사사로운 것에 얼매히지 않고 오직 나라만을 생각하는 마음이 빠른 상황판단을 이끌어 내었고 그녀의 전투 승리의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잔 다르크도 그녀의 승승장구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관리들 때문에 16가지의 죄목을 물어 결국 화형을 당하게 되었다.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마치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위해 열심히 싸우던 의병장들이 숙청을 당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질은 잔 다르크를 구출하러 가나 실패하고 많다. 이러한 부분에서는 자기의 지위를 이용한 빠른 정보수집과 빠른 상황판단을 하였으면, 잔 다르크를 구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 당시는 사회 문화적으로는 가톨릭이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가톨릭에서의 파문은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이러게 절실한 상황이었다면, 이러한 절망과 자신을 망가트리는 행위는 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 대신에 이러한 상황으로 까지 이끈 인물들에게 모두 복수 하였을 것 같다. 『“만일 내가 당신을 사자와 함께 우리 안에 가둔다면 배부른 사자를 원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굶주린 사자를 원하시겠습니까?” 블랑세가 인정했다. “포식한 사자가 더욱 안전하겠지요.” “그렇습니다. 사람도 자자, 모든 짐승,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입니다. 굶주림은 그들을 사납게 만듭니다. 가난 혹은 일반화된 굶주림이란 무엇입니까?”』이 부분은 너무 현실과 맞는 말 같다. 이러한 상황을 1천 명의 부르주아를 지하실에 가두고 굶기면 그들은 희생정신을 발휘해서 살아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만을 위해 남을 희생시킬 수 있다고 아주 적절하게 비유된 것 같다.『잔이 당한 고통을 몹시 슬퍼하는 질은 마치 짐승처럼 땅바닥에서 기어 다니고 있었다. 프렐라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 하지만 잔이 열여섯 가지 죄목으로 처형된 이후 질이 부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의 악마적인 성향을 부추길 수도 있을 것이다.』이 부분에서는 잔 다르크에 대한 질의 절대적인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인 것 같다. 잔 다르크가 죽자 질은 악마적인 성향을 나타내었으며, 점점 무너져 같다. 그러나 그를 구원하기 위한 블랑세와 프렐라의 노력이 참 많았으나 역시나 그를 구원 할 수는 없었다. 결국에는 질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다가 신앙심마저 잃어버리고 마법과 연금술 동성애에 빠져들고 말았다. 질이 잔 다르크를 얼마나 사랑했기에 모든 것을 포기하였을까? 정말 내가 이정도의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대처했을지 정말 난감 하였을 것이다.이 책에서는 세기를 뛰어넘는 기독교 사회 속에서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고, 잔 다르크에 대하여 질은 절대적으로 믿고 사랑하였는데 시대적 배경에 의해서 죽음을 당하고 결국 의지할 곳이 없어진 질은 악마의 유혹에 빠져들어 파멸해가고 결국에는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 종교적인 측면의 내용만 너무 묘사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는데 그 속에서 종교를 넘어선 질의 순정어린 사랑을 볼 수 있었다.프렐라는 질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하였다고 본다. 책 내용에는 나중에 프렐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내가 느끼기에는 프렐라는 상당한 앞선 의식을 가지고 있는 선구자였으며 그 당시의 사회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단이나 약간의 사이비적으로 몰린 것 같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프렐라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전혀 알 수 없었는데 잔 다르크를 닮았다고 하는 내용이 있어서 여자인줄 확신을 하였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리고 이처럼 옷을 말쑥하게 차려 입었을 뿐만 아니라 두 명의 하인까지 대동한 젊은이가 무일푼처럼 보여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이 구절을 보고 확실히 프렐라가 남자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어떻게 보면 잔의 죽음으로 이미 질의 죽음은 예정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불은 그 당시 더럽고 사악한 것을 태우는 것 이였으며, 연금술을 믿는 프렐라는 그의 사악함을 절정 까지 몰아처서 불로써 정화하여 그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독후감/창작| 2022.03.14| 3페이지| 1,500원| 조회(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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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상업의 부흥과도시의 발생
    Ⅰ. 서론Ⅱ. 상업의 부흥Ⅲ. 도시의 발생Ⅳ. 도시의 발달ⅰ.길드ⅱ.경제와 정치의 발달과 지적 활동 토대의 제공Ⅴ.결론Ⅰ. 서론내가 중세의 역사를 접하게 된 계기는 칭기즈칸에 관한 책을 읽게 되면서 전체적으로 12~13세기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2~13세기에는 참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났었다. 십자군 전쟁과 몽골의 성장 등 세계적인 영웅들도 많이 나오고 근대화의 계기를 마련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 당시 많은 영웅들이 다스리던 유럽의 상업과 도시 발달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농업의 혁명과 농노의 해방, 그리고 세련된 귀족 생활은 상업의 부활, 도시의 발달 등과 뗄 수 없는 관련을 갖는 것이었다. 부활된 상업은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지방 시장에서 이루어진 일상적인 교역이었다. 농노나 자유농민들은 여분의 곡물이나 달걀 몇 꾸러미를 시장에 내다 팔았던 것이다.)」서로마의 몰락이후 서유럽에 등장한 기독교문명과 장원제의 등장을 위시한 중세는 450년간의 ‘성장’을 거쳐, 1050~1300년의 기간 동안 중세의 전성기를 누려왔다. 250여년의 중세 전성기에서 상업의 부흥과 도시의 발생은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중세를 고대와 근대처럼 한 문명으로써 인정할 수 있는 이유의 근거가 되었다. 앞으로의 내용은 서유럽 1050~1300년의 기간에 생긴 상업의 부활과 도시의 혁명에 대하여 논할 것이다.Ⅱ. 상업의 부흥고대 문명의 몰락은 자연스레 상업의 쇠퇴를 가져왔다. 2세기와 3세기의 내란으로 상업은 쇠퇴의 길을 걸어왔으며, 게르만족의 침입과 무슬림의 지중해와 이베리아 반도 장악으로 9세기에 상업의 쇠퇴는 절정에 다다르게 된다. 서유럽은 아드리아 해를 개방한 비잔티움과 간간히 교역만 할 뿐, 고대의 대규모 무역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10세기 이후 베네치아가 콘스탄티노플에 곡물, 포도주, 목재를 수출하고,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의 자체 모직물 제조업이 발생하기 시작하면서 중세 상업이 눈에 띄게 활발해 졌다.중세 유럽에서 상업번영의 은 라인 하구에서 네덜란드 북부에 걸쳐서 정착했던 게르만족의 한 부족으로 민족이동기의 게르만족 가운데 상업에 적응성을 보인 유일한 부족이었다. 그들은 9세기 말까지 캉토뷕과 라인연안의 두루슈테데 두 항구를 거점으로 하여 북해 연안무역에 종사했으나 노르만인의 침입으로 이 북방상업은 완전히 쇠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노르만인은 약탈활동에서 익힌 해운지식을 토대로 평화적인 중개 무역상인으로 전환하여 11세기 전반 덴만크의 카누트 2세(Canute Ⅱ, 1017~1035)가 잉글랜드, 노르웨이를 통합해서 왕국을 건설한 이래 그 전성기를 맞이했다.그러나 본래 발트해에 면한 영토가 없었던 독일은 12세기 전반부터 엘베강 이동의 발트해 남방 연해지와 그 배후지에 식민과 도시건설로 북유럽의 원격지 무역의 기틀을 마련했다. 독일인은 곧 스칸디나이아인에 이어서 발트해 무역을 독점 했다. 독일인의 발트해 무역권은 라인하류 쾰른을 대표한 기존 북해 무역권과 통합하여 북독일 도시들의 상인 연합체인 한자(Hansa)를 탄생시켰다.「한자의 기본정책은 시민의 자유, 특히 상인의 우세에 기초한 자치의 유지, 영방제후의 끊임없는 공격에 대한 방어 외에 시장 및 통상로에서 평화를 확보하고 통상국가로부터 관세경감과 유통상의 특권을 획득하여 상업독점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주요 상품 중계지에 상관을 설치하여 상권을 유지했다.」)독일 한자는 서쪽으로는 잉글랜드와 플랑드르에서 북방으로 스칸디나비아, 동쪽으로는 러시아의 노브고로드에 걸치는 북해와 발트해 연해국으로부터 상업상의 자유와 특권을 획득하여 상업에 독점적인 지위를 확립한 북독일 도시들의 원격지 상인조합 이었다. 독일 한자는 1158년 발트해 서부의 독일 해항도시인 뤼벡의 건설로부터 최후의 한자 회의가 열린 1669년까지 5세기동안 존속하면서 동서로는 러시아의 노브고로드에서 플랑드르의 브뤼주까지, 남북으로는 스칸디나비아에서 독일의 할츠산맥까지 무역을 독점한 무역체계였다.남·북의 양 무역권을 육상으로 연결하는 무역로에 자리 잡고 있어서 1잇는 통상로를 축으로 하는 상파뉴의 대시는 유럽대륙의 상품유통에서 규모가 가장 큰 중계지 역할을 했으나 14세기 이후는 쇠퇴의 길을 걸었다.상파뉴 대시에 대신하여 국제시장의 중심이 된 것은 플랑드르의 브뤼주였다. 브뤼주는 이프르, 헨트와 함께 일찍이 잉글랜드로부터 원모를 수입하여, 유럽 최대의 모직물 산지로서 유럽 전역을 그 시장으로 하고 있었다. 북해와 발트해 상권을 독점한 독일 한자 상인들은 브뤼주에 상관을 설치하여 모직물을 북유럽과 동유럽에 독점 중개하는 동시에 동유럽으로부터 곡물, 조선자재 등 반제품이나 원료상품을 브뤼주 시장에 공급했다. 이리하여 브뤼주는 발트해 무역권의 서방극점이요 지중해 무역권의 북방극점으로서 3세기 동안 국제적인 상업 및 금융도시로 번성했다.Ⅲ. 도시의 발생무역을 활성화시킨 것은 화폐 경제와 신용장치의 확대만이 아니었다. 도시의 급속한 성장 역시 교역의 촉진에 큰 역할을 했다. 도시의 발생은 다른 어느 곳 보다도 특히 이탈리아에 집중되었는데, 유럽 최대 규모의 도시는 대부분 이탈리아에 있었다. 베네치아, 제노바, 밀라노, 볼로냐, 팔레르모, 피렌체, 나폴리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중에서 가장 큰 도시는 베네치아· 제노바· 밀라노였는데, 13세기에 이들 도시의 인구는 10만 명에 달했다.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의 인구 증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1150년경에서 1300년경 사이에 적어도 세 배는 증가했으리라 추정된다. 볼로냐 근방의 소도시 이몰라의 인구가 1210년의 4,200명에서 1312년에 11,500명으로 늘어났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750년과 1050년 사이에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도시 생활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중세 전성기의 도시 발달은 가히 도시 혁명이라고 부를 만한다. 더욱이 중세 전성기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활발한 도시 생활은 서유럽 및 근대 세계 문명의 중요한 특징이었던 것이다.종전에는 중세 도시 혁명의 일차적 원인이 원격지 무역의 부활에도시와 인근 지역은러공생 관계를 유지했다. 도시는 인근 지역들 시장과 수공업자부터 만든 공산각을 제공했던 반면에 인근 지역의 잉여 식량에 의존해서 생활했고, 더 나은 생활을 찾아 나선 잉여 농노나 농민들의 이주와 더불어 성장했다.「도시의 대두와 함께 도시의 영향이 미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장원제에 동요했다. 도시민의 주축인 상공업자들은 식량을 외부에서 조달하거나 농민들로부터 구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때문에 도시는 지금까지 농민들에게는 없었던 판로를 제공했다. 도시는 농민의 마음속에 이윤 관념을 심어주게 되어 농민들에게 부를 축적하려는 욕망을 고취시켰다. 그래서 장원제의 경제적 토대와 함께 정신적 기초까지 무너지기 시작했다.」)이처럼 중세 도시의 성장은 상업 발달에 촉매제로 작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도시의 급격한 인구 유입은 현대의 도시와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대도시에서는 대재앙이 빈번히 발생하였다. 예를 들어 화재가 한번 발생하면 목조 건축물이 많은 대부분의 도시들은 잿더미로 변했다. 게다가 위생 상태도 열악했으며, 전염병의 발발은 치명적이었다. 여기에 매계절마다 여행자와 순례자, 방문자, 상인, 인근 농민들이 수시로 도시를 찾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도시가 번창하기 시작하자 많은 도시들은 각각 전문적인 특성을 갖기 시작했다. 파리와 볼로냐는 일류 대학들을 육성함으로써 부를 획득하게 되었다. 베네치아, 제노바, 쾰른, 런던 등은 원격지 통상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밀라노, 겐트, 브뤼주 등은 제조업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가장 중요한 도시 산업은 직물 제조업이었다. 직물 제조업은 때로 대규모 생산 및 투자 기법을 발달시킴으로써 근대적 공장제와 산업 자본주의의 선구가 되었다. 그러나 대규모의 공업은 중세 경제에서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현상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Ⅳ. 도시의 발달중세의 도시는 농업생활의 기반위에 만들어 졌다. 농산물의 잉여생산물을 판매할 시장이 필요함에 따라서 만들어졌다.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장사를 열심히 하고 그 제도의 특수성은 대부분이 폐지되고 말았다. 8세기 까지 시참사회원, 도시 기록전, 도시수호자도 틤수성어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지중해 세계로 이슬람이 공격해 옴으로써 그때까지 제도시간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유지 시켜 왔던 상거래를 마비시에기 쥌적인 필연적으로 도시의 쇠퇴를 초래케 하였지만 그것이 도시를 파국으로 까지 몰고 가지는 않았다. 비록 이들 도시가 쇠퇴하고 약화되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오랫동안 존속되었으며 또 그 사회까지 능도 틤소는 유지되어 갔던 것이다. 당시의 농업적인 사회질서 속에서도 이들 제도시는 그 기본적인 주요성을 상실하지는 않았다. 그 후 이들 도시에 무슨 일이 발생하였는가를 이해하기위해서는 도시가 작용한 역할을 충분히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이 처럼 로마의 도시들과 같이 주요한 가치가 부여되었는데 이러한 가치들이 도시들을 보호해 주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9세기의 경제 상황 속에서 도시들은 그 존재의 가치를 상실하였으며 또 상거래의 중심지가 단절됨으로써 도시들은 그들 주민의 대부분을 상실하고 말았다. 옛날 그곳에 자주 내왕하였거나 거기에서 살았던 상인들도 또 메로빙거왕조 시대까지 잘 보존해 왔던 도시의 성격마저도 그들과 더불어 사라지고 말았다. 세속사회는 이제 더 이상 도시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순수한 농업을 바탕으로 하여 형성된 국가가 도시의 운명에 도움을 주었다고 하는 확실한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국가는 그 자체로서의 어떤 행정력을 발휘는 하였지만 로마의 제도시에서 볼 수 있었던 실제적인 상황에 결코 한번도 기여할 수는 없었다. 제국의 행정구역을 형성하고 있었던 주에 있어서도 제국 그 자체에 수도가 없었던 것처럼 제속주에도 역시 주요 도회지가 없었다. 제속주의 감독을 위임받은 백작들은 어느 일정지역에 정착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재판을 주재하고 세금을 징수하며 또 군을 징모하기 위하여 그들이 관할하고 있는 행정구역을 항상 순회하였다. 그들의 행정적 중심지는 제후의 대저택이 있는 곳이 아니라 주민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러므로것이다.
    인문/어학| 2010.05.02| 7페이지| 1,000원| 조회(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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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북경북 지역 답사
    이번 2학기 답사는 경북과 충북지역으로 다녀왔다. 처음 가보는 곳이라서 엄청 기대가 되었다. 비록 역사현장학습이라는 과목을 통해서 가는 거였지만 느낀 것도 많았고 졸업 후에 꼭 다시 한 번 오고 싶은 코스였다. 첫째 날 일정으로는 익산 → 군위삼존불 → 의성 탑리 오층 석탑 → 하회마을 이였고 둘째 날 일정은 신세동 7층 전탑 → 제비원 석불 → 봉정사 → 도산서원 → 부석사 → 소수서원 →단양 적성비 였다. 마지막 날 일정은 중원 미륵리 사지 → 중원탑 평리 7층 석탑 → 중원 고구려비 → 청주고인쇄 박물관 이였고 시간관계상 법주가는 가지 못하였다. 이중에 내가 미리 알아 본 것은 중원 미륵리사지 였다. 중원 미륵리 사지는 석조와 목구조를 합성시킨 석굴사원으로 석굴을 금당으로 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향하는 절터라고 한다. 이 석굴 앞쪽에는 석등을 비롯하여 오층석탑·귀부·당간지주·불상대좌 등 석조물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이들은 그 수법으로 보아 고려초기인 10세기경의 유물로 추정되고 있다. 중원 미륵리 사지의 문화제에는 삼층석탑, 석등, 석불 입상, 오층석탑 등이 있었다. 미륵리 석불 입상은 정말 생각한 거와는 다르게 정말 거대하였다. 주요 특징은 둥근 얼굴과 활모양의 눈썹, 긴 살구 씨 모양의 눈, 넓적한 코, 두터운 입술등 고려 초기 커다란 불상의 지방화된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미륵지 오층석탑은 옥개석이 2장이 아니고 4장인 것 같았다. 3층 석탑은 어디에 있는지 볼 수가 없었다.긴 시간을 이동하여 도착한 첫 번째 장소는 군위삼존 석굴이었다. 군위 삼존 석굴은 경상북도 군위군 팔공산 절벽의 자연 동굴에 만들어진 통일신라 초기의 석굴사원이다. 이 석굴에는 700년경에 만들어진 삼존석불이 모셔져 있다. 삼국시대의 불상에서 보이던 친근한 미소는 사라지고 위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석불과 탑이 많았지만 나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군위삼존 석굴 바께 없었다. 교양수업 시간에도 사진으로만 보았었는데 실제로 보니 무언가 경건하고 라고 되어 있었는데, 기록된 연도가 왠지 일본의 연호 같다는 느낌을 주었으며, 자세히 살펴보니 일본인의 이름 또한 있었다. 자세히 읽어보니 大正 15년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시절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이 이 탑을 중수하고 기록을 남긴 것이라고 하는데, 왜 하필 탑에 새겨놓았을까? 차라리 그 근처에 관련 비석이나 하나 세워 놓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그들은 이 일을 후세에게 널리 알리고 싶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다음 우리는 하회마을로 향하였다. 하회마을은 땅모양이 배모양 즉 ‘행주형’ 이라서 마을에 돌을 쌓으면 배에 돌을 가득 싣는 것과 같다고 하여 돌담을 쌓지 않는 관습이 있었다. 마을에 우물을 파지 않고 물을 하천에서 양수기로 끌어다 쓰는데 이 역시 우물을 파면 배에 구멍이 나서 가라앉게 되기 때문이다. 건너 부용대에서 하회를 바라보면 마치 자루가 달린 옛날 다리미 같다고 하여 ‘다리미형’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을에 들어가 보면 중앙을 가로지르는 큰 길을 중심으로 크게 북촌과 남촌으로 나뉜다. 예전엔 남촌 댁을 중심으로 한 남쪽의 ‘웃하회’ 에 집들이 즐비했었다고 한다. 웃하회는 강에서도 비교적 떨어져 있고 화산 자락의 논들에 가까워 살기에 더 편한 곳이다. 남촌 댁의 가세가 약화되자 그 일가와 권속들도 약하게 되어 웃하회가 점차 줄어들었다. 지금은 논밭으로 많이 바뀌었고 교회까지 들어와 있었으나 밭둑의 감나무들이 예전에는 집터였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 집이 마을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하회 류 씨 대종 댁이며 서애 류성룡의 맏형인 겸암 류운룡의 종가인 양진당(兩陣堂)이있다. 하회에서 드문 정남향집이다. 양진당 길 건너에는 서애 류성룡 종가인 충효당(忠孝堂)이 있었다. 양진당과 충효당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고 하지만 정면으로 맞대고 있지 않고 서향하고 있었다. 사랑채를 돌아 뒷마당으로 가니 안쪽에는 유물각인 영모각이 있었다. 단아한 기와집의 뒤뜰에 단을 높인 시멘트 건물이라 다소 어울리지 않았다. 정말 하회 마을은 생각한 것 보다 1487년에 개축되었다. 규모가 장대하고 상승감이 있으면서도 안정감이 있고 비례가 아름다원 국보 제 16 호로 지정되었다. 이 7층 전탑은 안동을 전탑의 고장이라고 부르게 하는 중심역할을 한다. 현재 있는 곳은 법흥동인데 ‘신세동 7층 전탑’ 으로 명명된 것은 1962년 국보로 지정할 때 옆 동네 명칭을 잘못 붙여서 그리되었다고 한다. 탑을 멀리서보니 지붕부분의 기와가 드문드문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기와와 벽돌 사이로는 마른 풀이 듬성듬성 돋아나 있기도 해서 운치를 더했지만 한편으로는 쓸쓸한 느낌을 주었다. 국보로 지정된 후 둘레에 쇠로된 울타리가 쳐지기도 했으나, 안타깝게도 탑 옆에 바로 중앙선 철도가 놓여 있어서 기차가 옆으로 지나다니면서 끼치는 진동과 소음이 탑의 뿌리를 흔들고 있었다. 고목 한 그루를 보전하기 위해 철도를 부설하는데 수백 미터를 우회했다는 어느 이웃 나라의 슬기가 부럽기만 느껴졌다. 그 다음에 간곳은 제비원 석불이었다. 연미사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에 위치하며 근래에 제비원이라는 암자가 새로 들어서 일명 ‘제비원 석불’ 이라고도 불리는 마애석불이라. 자연암붽리는불신을 새기고 그 위에 머리는 따로 제작하여 올려놓은 거구의 불상을 새기쟠러한 형식의 불상은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졌다. 제비원 석불을 보았을 때 정말 높은 곳에 있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얼굴 부분은 비교적 뚜렷철도지만 몸통부분은 자연적으로 그런 것인지 아니면 훼손되어 그런 것인지 수인 등의 형태를 전혀 알아볼 수 가 없었다. 제비원 석불은 봤리는불빛을 맞으면서는 경하면 정말 멋있는 곳일 잃 제비는 생각이라는였다. 다음에 간곳은 봉정사였다. 봉정사의 극락전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지만 건물 규모나 구조 방식 등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다소 알지는 잃 제비새기쟠곳에서 특별 다음본 것은 주심포 양식과 맞배지붕형식기쟠었다. 맞배지붕의 형식은 지붕이라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꺐쟠곳우회을 한 형태을 새기그 다음에 간곳은 내가 제는 고 싶었던 도산서원이었다. 도산서원은樂書齋원, 농운정사(?雲精舍원, 곳에전시관의 옥진각 등라지 굊성되어있었수, 도산서원 맞은편 푸른 호수를 배경으로 그림처럼 외딴 섬이 있었는데, 그곳에 정자가 있었다. 이곳에 조선 정조 16년에 임금이 평소에 흠모하던 퇴계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사람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하여 어명으로 특별과거인 도산별과 를 치른 시사단이 있었다. 도산서원을 둘러싼 울창한 소나무숲, 서원내의 고목들과 잔잔한 앙동호의 경치가 한데 어우러져 그 멋과 서정을 듬뿍 느낄 수 있고 정말 더 많은 곳을 오래 동안 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만 했다. 그다음 간곳은 부석사였다. 부석사는 경상북도 영풍군 부석면 북지리 봉황산(鳳凰山) 중턱에 있는 사찰로서 676년 2월에 의상이 왕명으로 창건한 뒤 화엄종의 중심사찰로 삼았다. 약 20분쯤 길을 따라 올라가니 당간지주가 보였다. 약 1 미터 간격으로 마주한 당간지주는 아무런 조각장식이 없어 단순하고 단단해 보였다. 길을 따라 천왕문을 지나 들어가니 사찰의 중문에 해당하는 범종루가 있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2층으로 된 누각이었고. ‘봉황사 부석사’ 하는 편액이 있을 뿐 범종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누각을 지나니 안양루란 누각이 또 있었다. 부석사의 주불전인 무량수전 바로 앞에 위치한 2층 누각건물이었는데, 여기서 아래를 쳐다보는 광경은 정말 멋졌다. 안양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엎으려 모여 있는 경내 여러 건물들의 지붕과 멀리 펼쳐진 소백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희미하게 보이는 소백산맥의 산과 들이 마치 하나의 정원처럼 보였다. 부석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선비화였다. 무량수전 뒤로 산을 올라가 높다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는 조사당 앞 우측 처마 아래서 자라고 있는 나무였다. 이것은 의상이 사용했던 지팡이를 땅에 꽂아놓았더니 살아난 것이라고 전하는데 「택리지」에 의하면 의상이 죽을 때 “내가 여기를 떠난 뒤 이 지팡이에서 반드시 가지와 잎이 날 것이다. 이 나무가 말라죽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으리라”이곳 백운동에 중종 37년에 영정을 모신 사묘(祠?)를 세웠다. 그리고 이듬해에 중국에서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본떠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 소수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살아남은 47개소에 들었으며 사적 제 55호 이다. 조선시대의 사립대학이랄 수 있는 서원은 그렇게 탄생되었고 조선 중?후기에 걸쳐 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학문과 정치의 요람이 되었다. 이러한 서원의 기능과 역할에는 교육적 기능을 하여 사학의 학풍을 쇄신시켜 교육열을 진작시켰다. 두 번째 학연의 구심점으로 자리 잡았다. 세 번째 서원의 장서는 지방의 도서관과 서적출판소의 역할을 하였다. 두 번째 기능은 선현을 모시는 기능고, 세 번째 기능은 서원은 향촌사회에서 도서관의 역할을 하였다. 서원의 부정적 기능은 시간이 흐른 뒤에 서원이 경쟁적으로 건설되면서 학문과 인격도야의 전당이 아니라 당쟁 논의의 소굴이 되었고, 선현을 존중하는 제사의 일도 가문과 학파의 성세를 자랑하는 짓거리에 지나 않게 되었다. 세금과 부역 등을 면제하는 국가의 지원은 국가재정을 악화 시키는 결과를 빚었고 유생은 향교보다도 서원에 들어가 학문 대신 붕당에 가담하여 당쟁에 골몰하고, 때로는 양인을 토색하는 불량 유생의 협잡소굴이 되기도 하였다. 서원을 역할은 정치적은 역할과 경제적인 역할이 있었다. 정치적 역할로는 지방 사림들의 여론을 수렴하여 중앙 정계에 반영하는 각 붕당의 하부 구조로서 기능을 하였다. 경제적 역할로는 사액서원이 지정되면서 서원전이라는 토지와 많은 노비들을 하사 받았다. 그 다음 목적지는 단양 적성비였다. 단양 적성비는 신라 진흥왕 때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의 적성에 세워진 비석으로 적성비를 세운 목적은 고구려 지역이었던 적성을 공략하고 난 뒤, 그들을 도와 공을 세운 적성 출신의 야이차(也?次)와 가족 등 주변인물을 포상하고 적성지역의 백성들을 위로할 목적에서 세웠다. 또한 대중등(大衆等), 군주(軍主), 당주(幢主), 사인(使人) 등의 명칭을 통해 중앙과 지방의 통치조 났다.
    독후감/창작| 2009.12.25| 5페이지| 1,000원| 조회(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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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대에서 청대까지 간략한 정리
    1. 송송 : 건국자 조광윤은 혼란한 오대 십국 시대를 마감하고 후주의 황제 공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제가 되었다.초기 정책- 군벌을 제거하고 군대의 통수권을 황제가 장악하였다. 이러한 군대는 중앙의 금군과 지방의 상군으로 재편하였다. → 조광윤이 개국 초기에 단행한 중앙집권제의 강화 조치라고 할 수 있다.- 권력이 재상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추밀사, 삼사, 중서성을 두어 각기 군정, 재정, 민정을 나누어 담당하게 하였다.- 모든 단위의 지방관은 문관 출신으로 황제가 직접 임명하였다.지방관료 권한 역시 분산시켰다. 차관 격인 통관을 임명하여 재정권을 담당하게 함으로서 주의 장관인 지주도 주의 모든 권한을 장악할 수 없었다. → 번진 세력의 할거와 장군들의 정치 개입을 막고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는 적절한 조치였다.황제가 직접 우수한 문신관료들을 과거로 선발하였다. 이러한 신흥 사대부들은 전통귀족과 달리 비록 당쟁을 했을망정 황제권은 넘보지 않았다. 이러한 관료들의 보좌 속에 황권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 졌으며, 아울러 학자적 관료가 사회를 주도하는 문치주의가 확립되었다.왕안석의 개혁송나라의 황제 신종이 왕안석을 전격기용 황제의 신뢰 속에 과감한 신법을 발표하였다.왕안석의 신법농업 - 청묘법, 모역법상업 - 균수법, 시역법병제개혁 - 보갑법, 보마법등을 실시하였다.신법의 목적은 대지주, 대상인의 회포로부터 중소농민, 중소상인 등을 보호 육성하여 부국강병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청묘법 - 계절이 바뀌어 묵은 곡식이 떨어지고 새곡식이 나올 무렵 국가가 낮은 이자로 농민에게 곡식과 돈을 꾸어 주어 고리 대금의 착취로부터 구하는 것이었다.모역법 - 돈을 내고 노역을 면제 받는 제도 이었다. 노역이 면제 되었던 관리나 사원의 특권 계급에게도 서도 그에 상응하는 화폐를 징수하여 그 돈으로 노역 희망자를 고용하여 충당하였다. 농민들의 부담이 크게 경감되었다.균수법, 시역법 - 물자유통의 원활화와 물가 조정의 목적으로 한 것으로서 매점매석에 의한 물가조작을 방 전국각지에 시.진 이라고 불리는 중소 상업 도시가 출현하였다.- 양자강 이남의 농업생산력의 발달로 차츰 지방 특산물과 수공업품의 제조를 촉진시키고 상품을 운하와 도로 등을 이용하여 전국적인 규모로 유통시킬 정도가 되자 도시는 크게 번영기 시작하였다.- 각 물품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전문 상점가가 출현하고 상인 조합인 항, 과 수공업자 조합인 작이 조직되었다. 야시장도 활발하게 활동하였고, 새벽에 만 잠깐 나타나는 도깨비 장도 나타났다.- 도시 구조는 개발되고, 서님들의 생활은 더욱 자유스러워 졌다.- 농업 생산의 획기적인 발전과 지역의 분화는 전국적인 유통망 확대를 요구했다. 인구도 놀랄 만큼 증가하여 억대를 돌파하였다.- 상품도 소수지배자의 사치품 보다는 좀 더 일 용적이고 대중적인 것으로 확산되었다.경제와 문화인쇄술이 발달하여 문화와 사회생활에 큰 영향을 끼침 나침판의 발명과 화약제조, 과학기술의 발전, 의학 천문학 수학 등이 발전하였다농업과 수공업의 발전 : 형세호의 등장 - 대토지 소유자로 유력한 지배층으로 성장, 장원과 저택, 창고와 정원소유농업생산량의 확대 : 강남지방(장강유역 대규모 수전개발)쌀과 보리 이모작 시작 그 외 적극적인 개간과 수리시설신축 정비를 통한 경작지확대, 쌀 품종의 다양화와 고성능 쟁기 정지기구인 씨래의 발전소금전매제 : 해염은 정호라는 제염 업자에게 사들이고 육지의 해염은 국가가 염전부근 농민 사역 생산대외무역의 획기적 발달 : 비단길의 교역량과는 비교가 안 되는 고려, 일본, 아리비아, 동남아시와 교역확대수출 - 구리, 철, 곡물, 비단, 자기, 서적수입 - 향료, 상아, 목편, 금, 모피, 말, 양, 약제광주, 천주, 항주, 온주 등이 중심 - 광주와 항주에 시박사 설치 상인의 이동에 따라 교통, 숙박, 창고, 운수업, 중개업, 판매 대리상들이 발달화폐 : 동 본위 - 송원통보, 태평통보 등 생산 동전의 해외유출로(전황 현상발생) 은본위제와 지폐(교자, 회자) 어음(교인) 등이 발달사상 주자학의 성립과 발전 : 신유학, 소멸하여 1279년 몽골에게 정복당함2. 유목민족의 정복왕조유목사회의 특징 : 목축위주 생활, 토지집착성이 미약하고 경제적으로 불안정으로 자원축적이 결여 약탈에 의존 - 생필품이 부족혈연적 결합 강조 = 군사적 지도자가 존재, 사회조직과 군사족의 유사성극단적 재산증식과 극단적 빈곤이 견제 받는 사회 : 재산의 불균등, 계층분화가 농경사회보다 덜 심화유목군주의 역할 - 부족 간의 분쟁조정, 공납의 징수와 병사조달 농업사회로부터의 물자 확보유목국가의 역사적 변천돌궐 (552~744) 수, 당을 위협 - 문자사용위구르 (744~840) 몽골지역에 근거, 상업 활동에 뛰어남 중개무역과 동서 교통로를 이용, 마니교를 국교로 유목도시 문화 형태의 새 문화 건립요 (916~1125) 몽골계 4C 경 등장 9C 경 자립성취 농목복합지대에 거주하여 소금, 철 등을 농업사회에 공급하기도 하였다. 물자약탈보다는 농민과 수공업자 획득에 목적.야율아보기가 건국 - 중국식연호사용, 국호선포, 부족제 개편과 부족해산, 전제왕권을 강화태종, 성종 - 전성기로써 고려를 공격하고 송과 전쟁 1125년 금과 송의 협공으로 멸망 - 중앙아시아로 도주하여 서용건국 (1132~1211) 동서 교류에 공헌이중통치체제북면관(북추밀원) - 6부(군정, 민정장악) - 부족제 - 거란인 통치남면과(남추밀원) - 3성 6부(민정) - 주현제 - 한인거란 문자와 문화 : 위구르 문자 표방, 표음문자, 몽골어의 방언계통, 국사 편찬과 불교장려금 (1115~1234) 여진족(퉁구스계, 반농반목) 요에 예속 숙여진, 오지의 산림지대 생여진 1127년 송 태종 때 변경함락 북송 멸망이중통치체제여진의 발극렬 제도 (도발극렬 : 황제-4-6인의 발극렬 : 부족통솔) 유지 + 중국의 삼성 육부제 와 과거제 채택 - 여진의 국수주의 약화, 한화정책, 수도를 회녕에서 북경으로 천도맹안모극제(여진, 거란, 유목민) : 부족적 군사조직으로 한인들의 주현제와 별도의 촌락생활, 삼성 육부와 주현제맹안 : 천, 천부장 모극: 부족장 1. → 문서왕복이 빈번하고 시간을 많이 허비원대의 동서 문화 교류- 당시의 국제어는 페르시아어- 몽골제국의 세계제국과 교통로 확대 : 역참제 - 실크로드, 초원길과 해로 등의 개척 외국인 우대책 → 서방 문물의 전래 : 이란계 소구트인의 활약, 세조때 연경에 교회이슬람 문화의 수용 : 이슬람교, 상인들의 활약 (천문, 역법, 과학기술, 의학, 약학, 악기 등등)전통 문화의 부진과 서민문화의 발달 : 유교적 교양의 지식의 몰락과 관련, 연극발달, 문인 화와 산수화 발달, 새로운 건축양신과 라마교의 발달 - 6~7세기경 티베트의 토속종교와 대승 불교가 혼합원의 멸망 - 재위 계승의 혼란(무종이후 26년간 8명의 황제 교체), 라마교의 신봉으로 재정고갈, 지폐(교초)의 남발과 물가고, 관료의 독직과 가렴주구 성행, 강남의 토지소유에 불균형 심화와 대토지 소유에 대한 모순 → 대규모 농민반란 : 1351년 백련교도와 홍건군의 거병으로 붕괴3. 명 청 시대원 명 교체의 역사적 의의 : 이민족을 타도하고 한족 왕조와 중국 문화를 회복하였다.몽골의 문화적 적응력 부적으로 유목민으로 다시전락명의 건국과정 : 반민족적, 반지주적 성격이 강함명 건국과 주원장 집단의 성격- 몽골의 전호와 중소농민의 박해 : 농업에 대한 이해 부족과 가혹한 세금부과, 강감 중심으로 진행- 원 말의 농민 반란 : 백련교 교주 한산동 반원, 반지주적 성격백련교 : 불교의 일종, 동진의 승려 혜원이 제라르 모아 조직, 한산동 처벌 후에 아들 한림아 추대주원장 - 탁발승으로 가지를 전전 하다가 25세에 반란군에 가담(걸인 - 탁발승 - 백련교 가담 - 반란군 수령 - 유학자의 도움으로 천명기치)이후 자기 고향에서 700명 청년모집 - 명 건국의 핵심 세력, 지지 세력은 주로 지주 혹은 지방 유력자 - 지주세력을 옹호하였다.1356 년 남경점령1364년 오왕즉위1368년 연경함락남경에 도읍 41세 즉위하여 30년 통치 사선생의 보좌 : 송렴, 장일, 엽침, 유기정책중앙집권적인 통제를 유지하는 것이 목표- : 동창설치 - 환관정치의 발전, 군대감독, 세역징수 관리명초에 1만에서 명말 10 만 명 증가 무종 때 서창, 내창 등을 설치하여 정보정치 강화- 성리대전, 영락대전 편찬- 5 회의 몽골정벌, 만주정벌, 안남복속정화의 7차례 원정1차 1405년62척, 2만 7천 8백여 명의 승무원 8천 톤급 배에 해당한다.목적은 명나라의 국위를 외국에 과시하여 종주국으로 받들게 하자는데 있었다. 종주국이라고 해서 내정간섭을 하자는 것이 아니었고 명목상 신종의 관계를 맺고 그 나라에 한하여 무역을 허용하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6차 1423년1천 2백여 명이 각국의 사절과 상인들이 남경에 와서 활발한 교역을 하였다고 한다. 7차 때에는 아프리카 동해안 까지 이르렀다. 교역상품은 중국 것으로는 도자기와 비단 외국 것으로는 후추, 진주, 산호 등 표범, 타조 등 진귀한 짐승도 포함되어 있었다.장거정의 혁신 정치신종 만력제 년 간 - 북로남왜의 화와 리갑제의 붕괴의 원인- 황제권을 강화하고 고정법을 실시하여 관료의 행정능력을 평가- 몽골과의 강화 : 군사비절감, 마시개설- 재정개혁 : 재무행정 정비, 재정절감, 은전색출, 토지측량, 조세공정→일조편법의 실시장거정사후 재정개혁실패 - 신사층과 지방관의 반동 (향촌의 이익대변)- 만력의 3대 대외 원정 중 조선 출병의 과도한 재정지출과 국력소모 또한 환관 등의 회포 등으로 반란- 내각파와 반내각파(동림당)의 대립 = 황태자 책봉, 광세, 상세징수문제복사 운동 : 고학 부흥운동전개, 강남지방 독서인이 중심문인들의 연합, 하급 생원 진사 등이 동림의 정치 운동 계승동림당의 지도자 : 고현성 (동림서원 재건, 정치사회개혁운동, 환관의 전횡 반대, 내각 파벌정치 반대, 분권과 분치를 주장, 비타협 도덕주의 경향이 강함, 장거정의 개혁 저치는 반대함)이자성의 난상업의 발전은 부의 불균등한 분배를 가속화하여 대규모의 토지 겸병 현상이 일어났다. 이에 토지를 잃은 농민은 대부분 유민이 되어 마침내는 여러 곳에서 유민들의 폭동이 일어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인문/어학| 2009.12.25| 13페이지| 1,000원| 조회(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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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말청초의 사회변화에 대하여 평가A+최고예요
    1. 향촌질서의 해체와 재편1. 이갑제 질서의 해체2. 향촌질서의 재편2. 인구의 이동과 그 영향※명대 자본주의 맹아론1. 인구이동의 실상2. 인구이동의 영향1) 농업생산의 제고2) 중소도시의 발달3. 상품생산의 전개와 그 영향1. 상품생산의 전개1) 면직물업의 전개2) 견직물업의 전개3) 상인의 활약4) 은화 유통과 경제구조의 변화2. 명말 민중운동의 성격 변화Ⅰ. 향촌질서(鄕村秩序)의 해체(解體)와 재편(再編)1. 이갑제질서(里甲制秩序)의 해체명조는 향촌지배를 위한 기본조직으로 이갑제를 시행하였다. 이것은 종전부터 형성되어 있던 촌락의 공동체질서를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원칙적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한 110호를 1리(里)로 편성하고, 인정(人丁)과 재산의 다과에 따라 호등(戶等)을 구분하는 제도로 명초에는 이러한 이갑제 질서를 기반으로 하여 사회가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으나 1400년대 중엽, 즉 명대의 중기로부터 말기에 걸쳐서 점차로 이갑제 질서가 변질?해체되어 갔다. 그러나 변화가 가장 단적으로 표면화된 현상이 곧 중국 전역에 걸쳐 일어난 농촌의 계층분화, 호구(戶口)의 격감, 인구이동, 반란의 봉기 등이었다.이갑제 질서 하에서의 공적인 지배층은 이장? 이노인? 양장층으로 이들에게 이갑정역(里甲正役)은 10년 1회의 윤번제였으므로 부?역 징수에 따른 권력이 특정한 호에게 고정화되지는 못하였다. 또한 재산의 제자균분상속(諸子均分相續), 재해, 질병, 전란 등 제도와는 무관한 원인도 향촌사회에서 계층분화 요소로 작용하였고, 부?역의 원액주의(原額主義), 원적발환주의(原籍發還主義) 원칙도 결과적으로 보면 이갑체제의 해체에 순기능을 한 셈이었다. 그런데도 명조의 재정 규모는 계속 확대되었고 국가재정과 관리들은 은에 대한 수요는 증대되어 갔다. 그 때문에 명초에는 비교적 가벼웠던 부?역이 점차 증가하였고 은 납화되어 갔고 농민들에게는 부?역의 증가는 물론 은 납화도 도리어 부담을 가중시키는 경우가 있었으므로 농민의 부담은 갈수록 무거워졌다.한편, 명초부터 향촌에는 관직시하고 하세(夏稅)와 추량(秋糧)을 일괄 징수하며 은납화하고, 신사의 우면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셋째는 향약·보갑제를 통하여 향촌사회에서 교화와 상호부조, 치안유지 등을 유지해 보려 하였고, 또 이와 함께 사창(社倉)·의창(義倉)·의전(義田) 등 광범위한 구제기구를 통하여 향촌질서를 유지하려 노력하기도 하였다. 이런 명조의 노력으로 지역에 따라서는 향촌이 어느 정도 재편성되고, 향촌질서가 진정된 면도 있었으나 이상의 향약·보갑제는 이갑제와 같이 전국에서 획일적으로 시행한 것은 아니었고, 국가존립의 기초인 부·역제도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명목상으로는 아직도 이갑제와 이노인제가 존속하는 상황이어서 서로 상충되는 면도 있었으므로 명초와 같은 사회 안정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청조가 입관(入關)한 후 초기에는 향촌질서 유지에 명 말의 방법을 모방하였으나 이갑제는 일조편법을 시행한 후부터 그 기능이 거의 상실된 상태로 향촌질서 유지의 실효를 거둘 수는 없었으므로, 강희 47년(1708)에는 10호를 패(牌), 10패를 갑(甲), 10갑을 보(保)로 하는 보갑제를 전국적으로 실시하여 연대책임을 지고 호구관리, 치안유지, 조세징수의 보조 등을 도모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치안유지 목적은 여전히 실효가 적었으며 그 실시도 지방관의 의지에 맡기는 정도였다. 따라서 지역에 따라, 시대에 따라 그 내용이 각기 달랐으므로, 지방의 질서유지에는 명대와 같이 여전히 신사의 협조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신사는 명말·청조의 격심한 동란기를 거치는 동안에 몰락한 경우도 많았지만 그러한 정치권력의 공백기에 극심한 사회혼란을 틈타서 토지를 겸병하고 사회지배력을 오히려 더욱 강화시킨 경우도 많았다. 그 결과 사회계층으로서의 신사층은 명대보다도 오히려 더욱 비대해졌다. 신사는 부·역의 체납, 포람(包攬), 서리와 결탁한 부정과 횡포 등 명대와 다름없는 지배형태를 재현하였다. 그 때문에 청초부터 국가재정의 궁핍을 초래케 했을 뿐 아니라 국가권력의 기반인 소 농민층의 몰락을 더 하는 정치적 변천만이 아니고 사회와 경제 전반에 걸친 구조적 변혁이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상품경제의 발달에 따르는 농촌사회의 변화, 이에 따른 지주?전호제의 개편, 이갑제 질서의 해체와 부역제도의 개혁, 그리고 전국적인 민중운동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와 함께 사상의 다양화 및 경세실용학의 발달 등도 지적되고 있다.이와 같은 총체적 사회변화를 염두에 두고 역사학계{에서는 자본주의의 맹아가 이 시대에 나타났다고 주장하여 역사연구의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배경에는 식민지사관에 의한 중국사회 정체론을 극복하고 중국의 역사 속에도 세계사의 법칙성[역사발전성]이 존재함을 밝히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여기에는 아편전쟁 이전의 중국사에 있어서도 주체적이고 자생적인 자본주의의 싹이 내재한다는 인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명말 청초의 시기를 송에서 청에 이르는 장기간(19세기 중엽~19세기 중엽)의 역사발전과정 중에서 하나의 중요한 단락이 마련되는 시기로 인식하게 되었고, 그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곧 자본주의의 맹아론으로 나타난 것이다.자본주의 맹아의 대표적인 지표는 명 중기 이후의 생산력의 증가와 은 경제의 보급, 그리고 상품경제의 발달에 나타나고 있다. 구체적인 예로서는 소주의 비단직물업, 송강의 면포업, 절강성 석문진의 착유업, 경덕진의 미영도자기업, 불산진의 야철업과 휘주의 광산?야철업 등을 들고 있다. 이 중에서도 소주의 경우는 이미 기호가 자본을 투자하고 기공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매뉴팩쳐(manufacture)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중국의 여러 지역과 다양한 산업에서 상인자본의 전대생산, 매뉴팩쳐의 존재가능성이 지적되었고 도 생산관계의 변동 속에서 시민계층의 출현과 사회의식의 변화 등도 지적되고 있다.한편, 일본학계에서도 상품(면업)생산의 발전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16?17세기를 분기점으로 하여 영세과소농은 가계보조를 위하여 적극적인 상품생산에 나서게 되었으나, 그 증가율로 볼 때 청대에 특징적인 인구이동 지역의 하나로 대만을 들 수 있다. 대만에는 복건·광둥 성 등 동남 연해지방인이 주로 이동했다. 그러나 청 일대를 통해 가장 괄목할 만한 인구이동은 만주로의 이동이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산동·하북성 인을 중심으로 만주로의 이동이 본격화 되었다. 그 결과 만주개발도 점진적으로 진척되었는데, 청 일대를 통해서 보면, 중국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보인 곳이 만주, 그 중에서도 성경(盛京:奉天)지방이었다. 오늘날과 같은 중국의 경제지역이 틀이 잡힌 것은, 이렇게 명·청시 대에 걸쳐 인구분포가 재편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2. 인구이동의 영향1) 농업생산의 제고(提高)명 중엽에서 청대의 중기에 이르는 3~400여 년 동안에 양차에 걸친 대대적인 인구이동과 재편이 있었다. 그 결과 나타난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농업생산력의 향상이었다.경제적으로 낙후된 관향지역이나 정치적 통제력이 크게 미치지 못하는 금산구역으로 유입한 인구 중에는 고향에서 몰락한 후에 이동해, 유입지역에 용공(傭工)이나 노복의 지위로 정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상인이나 각종 기능인, 혹은 고향에서 몰락 직전의 이갑호가 상당한 재력을 지닌 채 이동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은 유입 당초에는 그 지역 토착의 신사나 지주로부터 전토나 가옥을 임차했다. 그 후 이들 객민들은 자신의 기능에 따라 각종 직업에 종사했다. 객민이 이주지역에서 경제적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은 자기 당대에 달성한 경우도 있었으나 수대가 걸리는 경우도 있었고, 여전히 빈궁호로 남는 경우도 많았다.외지에서 들어온 객민의 이주지역에서 보여준 역할은 크게 2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긍정적인 측면의 경우, 첫째, 명대 200여 년 동안 중국의 경제적 중심지가 분화되었다. 명대에 양자강 유역의 토지는 급속도로 개간되었는데 그 결과 중국의 경제적 중심지가 분화되었다. 송 대에서 명초까지는 양자강 하류의 소(蘇)·절(浙)지방이 경제적·문화적 중심지였다. 그런데 명 중기에서 명 말에 다. 이 지역은 송 대 이래로 중국의 경제·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명초 홍무제(1368~1398)가 상(桑)·마(麻)·목면(木棉)의 재배를 권장하고 조세의 일부를 그 생산물로 납부토록 하면서부터, 이 지방의 경제구조가 변화되기 시작했다. 소주·호주·항주 등 대도시에서는 일찍부터 견직 업이 발달했으므로, 우수한 기술이 전수되고 있었다. 농촌의 소농민도 점차 선진기술을 익혔는데 면화를 원료로 하는 면직 업에도 견직업의 발달된 기술이 도입되어 면포를 생산할 수 있었다. 견포·면포의 생산이 미곡을 생산하는 것보다 수입이 월등히 좋았기 때문에 명 말에 이를수록, 종래 곡창지로 이름이 나 있던 지역들이 오히려 다른 지방에서 미곡을 수입할 필요가 점차 증대되어 갔다. 이렇게 소·절지방의 농촌지역에서 발달해 간 직물업과 외래 인구의 유입으로 나타난 현상이 곧 대도시의 발달 외에 무수한 중·소도시의 발달이었다.강서지방에서도 인구이동의 결과로 도시가 발달했다. 경덕진(景德鎭)의 경우 송 대이래 중국 제일의 도자기 생산지로서, 명대에도 그 명성은 여전했다. 이곳은 도자기 반출을 위해 모여드는 성 내외의 상인·객민들이 만여 명이나 되었고, 만력 연간(1573~1619)의 말기에 이르면 그 수가 매일 수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한편, 호광에서도 명대의 인구이동의 영향으로 형주부의 강릉(江陵)과 사시(沙市), 한양부(漢陽府)의 한천현(漢川縣)의 유가격(劉家隔), 한양현의 한구진(漢口鎭), 승천부(承天府)의 조각시(?角市) 등이 발전했다.Ⅲ. 상품생산과 화폐경제의 발달 및 그 영향1. 상품생산의 전개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명말)의 농촌사회는 농업생산의 괄목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화폐경제의 농촌침투, 이갑제의 해체, 영세농에 대한 지주·향신의 수탈로 농가경제는 위기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이러한 농촌가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면업·견직업이 농가의 부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1) 면직물업의 발달15, 16세기경에 면포가 대중적인 의류로 급속히 보급됨에 따라 전국적인.
    인문/어학| 2009.12.25| 9페이지| 1,000원| 조회(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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