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인류가 사라진 세상’감상문학과000학과학번성명홍길동담당교수000교수님제출일201X.X.X서울과학기술대학교-‘인류가 사라진 세상’ 감상문-000학과 000000 홍 길 동어느날 갑자기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이 사라졌다. 인류가 사라진 불과 6시간뒤에는 세상의 전력이 끊기고 암흑의 시대로 변한다. 전력 부족으로 인해 발전기의 가스 냉각수단이 없어 누출이되어 동물원에서 탈출한 동물들 마저도 가스로 인한 죽임을 당하며, 폭발성 가스 분출로 인해 전세계의 화력 발전소들이 파괴 된다. 집안에 있는 애견들이 먹이를 주는 사람이 없어 점점 죽어가고 집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애완동물들도 먹이를 찾아 나서다 서로 잡아먹고 먹히며 다른 육식동물의 먹이가 되어 멸종한다. 7일 뒤에는 전력공급 중단으로 인한 원자력 발전소들의 디젤 발전기 비상연료의 공급이 소모되고, 이마저도 10일뒤에는 디젤발전기 마저도 작동을 멈춰 냉각수가 증발하기 시작하여 최악의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500배가 넘는 위력을 내며 원자력 발전소들이 폭발을 시작한다. 30년 후 구조물들의 콘크리트가 부식하여 이산화 탄소가 콘크리트를 뚫어 금속까지 닿아 이산화탄소에 의해 철근이 10배 팽창한다. 그뒤 강화, 교체되어야할 것들이 인류가 없어 보수가 불가능하여 동결융해를 반복하여 100년뒤에는 균열이 최고 조에 달하고 120년 뒤에는 모든 건물이 부서진다. 날씨도 바뀌에 태양열을 90% 흡수하게 되지만 모든 대지가 풀로 덮여있어 기온이 뚝 떨어지게 되어 지구 온난화가 없어 지고, 대기가스도 사라진다. 불과 500년만에 지구는 완전히 회복한다.이 모든게 지구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도 끔찍할 것이 없다는 점이 이 다큐멘터리의 흥미로운 점이다. 고층빌딩이 수도 없이 무너져 내리고 인류가 이룬 모든 문명이 사라지고, 모든 위대한 문화유산이 사라져도 아무의미가 없다.통제하고 관리할 사람이 사라져도 지구에게는 문제가 없다. 자연파괴의 주범이 사라진 지구는 오히려 평화롭다. 문명을 자연에 대한 폭력으로만 생각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문명이 남긴 상처를 회복하는 지구의 모습을 보면 정말 지구는 살아있는 존재라는 걸 실감하게 된다. 인간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서 바라보는 자연에서 느끼는 점도 많고 반성할 점도 많고 현실적인 의미를 따지기에 앞서서 이런 상상자체가 흥미롭기도 했다. 끝으로 마지막 나레이션이 내머리속에서 두고두고 기억이 남는다. "지구는 인류없이 살아갈 수있지만, 인류는 지구가 없으면 살 수 없다."라는..
문 자 의 문 화 사과 목 :교수명 :학 과 :학 번 :이 름 :종이 발명의 이전에 문자는 동, 뼈, 대나무, 나무등의 경질의 재료뿐 아니라 견포 위에도 쓰였다. 하지만 비단은 부드럽고 부패하기 쉬워서 유물은 얼마 남아 있지 않다.종이는 기원후 100년경에 채륜(蔡倫)이라는 환관이 발명했다. 중국의 옛 기록에 의하면 채륜이 궁정의 용구 제조소에 근무하고 있을때 종이를 발명했다고 한다. 고마(古麻)를 재료로 한 마지(麻紙), 나무껍질을 재료로한 곡지(?紙), 낡은 어망(魚網)을 재료로 한 망지(網地)를 만들었다고 한다.종이 유물이 발견된 장소로는 누란, 투루판, 돈황 등으로 누란의 유물군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서기 265년부터 330년에 걸쳐서 날짜가 기입되어 있다.누란이란 로프놀 후소 부근의 마을이다(원지명 : 크로라이나)누란은 동서를 잇는 실크로드의 요충지, 서쪽으로 400킬로미터에 있는 니야가지, 서역 남도의 동쪽지역 절반을 지배하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누란의 수도에 가까운 로프 호수는 서쪽에서 불어오는 계절풍을 타고 날아드는 모래로 점점 얕아졌고, 결국에는 말라 버렸다. 330년 정도를 하한선으로 누란국은 자취를 감추었고, 후에 버려진 옛 성터 옆 사막 쓰레기장의 퇴적장 안에서 한자로 쓰인 목간이나 종이 유품이 스웨덴의 헤딘, 영국의 스타인, 일본의 오타니와 각국 탐험대에의해 발견 되었다.누란의 유적에는 날짜가 기입된 상당한 양의 목간과 종이, 두종류의 문서가 발견되었다. 누란 사람들은 종이와 목간을 동시에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종이가 있지만 목간을 사용된 것은, 짐에 붙이는 패찰, 명찰 통행증, 관청으로부터의 호출장, 그 외의 습자나 낙서, 식료품 지급 명세서 같이 수는 많지만 내용은 극히 단순하였다.누란문서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일본의‘오타니 탐험대’가 발견한‘이백문서’라고 불리는 고문서군이다. 그들의 제2차 탐험때 1909년 3월에서 4월경에 다치바나즈이쵸 스님이 포프놀호반의 누란국 유적에서 얻은 것인데 지금은 료코쿠대학에 소장되 있다.이백문서는 주요 문서 2장으로 되어있다.(A:23cmx27cm, B:23x39cm)각각 다른 사람의 필적이며 비슷한 내용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작은 단편 39편으로, 내용은 다양하다.종이 발명 이전의 책은 목간 다발이었다. 한 장의 목간마다 한 행의 문장을 쓰고 이것을 몇 십 조각 혹은 몇 백 조각을 연결하여 끈으로 묶었다. 쓸모가 없어지면 접어서 끈으로 둘둘 말아둔다.그러나 목간다발은 부피가 컸고, 한 행씩 적힌 팻말을 묶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종이가 목간을 대신하게 되자 여러 행을 한 장의 종이에 쓸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풀로 붙여 연결하는 것도 가능해 졌다. 그리하여 목간보다는 훨씬 가볍고 용량이 적은 형식의 책인 ‘권자본(卷子本)’,즉 두루마리가 생겨났다.종이가 생겨서 서책이 두루마리의 형태를 띠게 된 후 7,8백년 동안 그 형태를 유지하였지만, 서체면에서는 현저한 변화가 있어서 해서(楷書)라고 불리는 서체가 출연했다. 목간을 쓰기위해서 예서(隸書)가 있었던 것에 비해서, 종이 위에 쓰기 위한 서체로서 해서가 생겼다.돈황이나 투르판에서 출토된 수만 점의 사본을 시대순으로 놓고 보면, 초기(3~4세기)것은 예서의 필치를 나타낸다. 점차 필체가 부드러워져서 대체로 600년경(수나라)무렵에 지금의 해서(楷書)가 완성된다.종이가 사용되면서 갑자기 해서가 생긴 것이 아니라 예(隸)에서 해(楷)로 점차 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5~6세기 사본에 보이는 서체는 과도적인 것으로, 소위 예(隸)와 해(楷)의 중간이라고 해야 한다.수당시대에 해서는 완성의 극치에 달했다. 지금도 해서를 배우는 사람은 7세기의 우세남(虞世南)에서 8세기경 안진경(顔眞卿)에 이르는 서체를 모델로 삼는다. 그 이상 훌륭한 해서는 이후 천몇백년간 나타나지 않았다.당나라시대의 사경소에서는 적지 않은 양의 두루마리를 제조하였는데, 이 사경소에서는 수십, 수백의 사자생(寫字生)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어떤 책의 표준 텍스트를 전국에 배포하기 위해 궁정 도서관에서는 수 백명의 사자생(寫字生)들이 동원되어 수 백, 수 천 부나 되는 사본을 제조했다고 한다. 여기서 한걸음 더 앞서 갈 수 있게 만든 것이 인쇄이다.인쇄술의 선조는‘도장’으로서, 도장은 문자보다 몇 천 년 이전부터 존재하였다.진나라 시황제가 도량형 표준기를 배포할 때 ‘조서’전체를 토기 위에 도장으로 찍었다. 이는 기원전 3세기, 종이 발명보다 몇 백 년이나 앞선 일로, 물론 인쇄는 아니지만, 그 원리와 생각은 인쇄와 다름 없다.초기의 인쇄물 유품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760년대에 쇼토쿠천황이 호류지 등에 시주한‘백만탑다라니’이다. 소형 목제탑의 안쪽을 비우고, 그안에 폭 6센티미터 가량의 작은 두루마리가 안치되었고, 거기에 ‘무구정광다라니’가 인쇄되 있다.중국 내지에는 인쇄 초기 유품이 아무것도 없지만, 돈황 석실에는 수십점의 인쇄물이 발견되었다. 적지만 9~10세기의 것으로 여러 단계의 초기 인쇄법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가장 원시적인 단계의 것은‘인사불’이라고 불리는 것으로,‘항하사수의 부처님 인을 찍는다’라는 의미의 종교행사이다. 소원을 이루기 위해 일정한 행사를 하고 그것이 끝날 때마다 좌불 형태의 도장을 하나씩 찍어가느 것이다.‘인사불’에 가까운 단계의 것은‘불명경’으로, 몇 천, 몇 만이나 되는 부처님의 이름을 나열한 불경이며, 책에 따라서는 하나하나의 부처님 이름 위에 ‘좌불인’을 하나씩 찍었다.다음은 한 장씩 찍는 부적류이다. 한 장씩 찍어낸 것을 이어 붙이면 정규 형태의 책, 즉 권자본(卷子本)이 되며, 이어 붙이는 방법에따라 책자본(冊子本)이 되기도 한다.석각과 석각의 탁본(拓本)은 인쇄의 간접적인 선조에 해당한다. 진의 시황제가 공적을 과시하기위해 대기념비를 세웠다. 장소는 태산(泰山)의 정상 등, 소위 성지로서, 일반 대중을 쉽게 볼 수 없었지만, 문자가 본래 신과 왕, 왕과 대신 사이에서만 사용하다가 대중에게 노출된 것은 중대한 변혁이었다.진나라 멸망 후 한나라에서는 말단 관리까지도 걸핏하면 기념비를 세우고 싶어 하였고, 그리하여 한 대에만 수 천, 수만의 석비가 만들어졌다. 석비는 당시의 상용 서체인 예서(禮書)로 쓰였다. 그리고 제액(題額)은 전서(篆書)로 쓰는 것이 관례였다. 황제만의 위엄있는 한자가 장식문자로 전락한 것이다.한 대에는 공공사업뿐 아니라 개인의 전기를 돌에 새기는 일도 시작 되엇다. 묘의 내부에 묻는 방형(方形)의 돌을‘묘지명(墓誌銘)’이라고 부르며 묘 앞에 세우는 큰 돌을‘신도비(神道碑)’라고 부른다.석각은 문장의 영구전달의 목적을 달성했으며, 문자의 감상이나 연구에 제공되는 효용까지 발휘하였다. 그러나 실물의 감상이나 연구를 할 수 없었고, 그리하여‘탁본술(拓本術)’이 발명 되었다.아마추어의 탁본인 건식(乾式)은 대상물 위에 종이를 대고 범종으로 문지르는 방법인데, 이 방법으로는 깨끗한 탁본이 불가능 하다. 하지만, 전문가가 쓰는 습식(濕式)탁본은 대상물 위에 댄 종이에 물을 뿌려 적시고 그 위에 무명을 대고 나무망치로 두드려서 종이와 대상물 사이의 기포를 완전히 제거한 후 젖은 종이가 마르기 직전에 솜방망이에 먹을 묻혀서 박으면 완성된다.탁본의 결점은 입체적인 석면에서 평면화된 흑백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감상이나 연구 모두 자형(字形)에 치중하게 된다.석경은 유교의 경전에서 시작하였으며, 모두 국책사업으로 행해졌다. 최초의 석경은 후한(後漢)희평(熹平)4년(175)부터 8년(179)에 걸쳐서‘역경’이하 9개의 경전을 새겨서 수도 낙양(洛陽)에 있는 태학(太學)의 문 앞에 세웠다.
술이, 태백, 자한, 향당, 선진 후기과 목 :교수명 :학 과 :학 번 :이 름 :술이 [제7-181]子疾病. 子路請禱. 子曰. 有諸. 子路對曰. 有之. ?曰. 禱爾于上下神祇.자질병. 자로청도. 자왈. 유제. 자로대왈. 유지. 뢰왈. 도이우상하신기.子曰. 丘之禱久矣.자왈. 구지도구의.천지신명에게 늘 기도를 하는 그런 삶을 살아오신 공자의 모습이 느껴지는 구절이다. 자신의 위기에 처하여 기도만이 절시히 필요할 때만 기도를 해서 될 것이 아니라 평소의 삶이 기도하는 삶이 되어야 함을 느끼게 한다.술이 [제7-179]子曰. 文莫吾猶人也. 躬行君子. 則吾未之有得.자왈. 문막오유인야. 궁행군자. 칙오미지유득.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의 차이는 참 큰 것이다. 이 글은 공자께서도 아는 것을 실천하는 일에 있어서는 다 득하지 못했음을 실토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도 있지만, 그 겸손한 자세를 느껴볼 수 있는 부분이다. 정말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엔, 끝없이 아는 것의 실천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할 것 같다. 살아있는 것도 그러함 때문일 것이다.술이 [제7-174]子曰. 蓋有不知而作之者. 我無是也. 多聞. 擇其善者而從之. 多見而識之.자왈. 개유불지이작지자. 아무시야. 다문. 택기선자이종지. 다견이식지.知之. 次也.지지. 차야.알지도 못하면서 일 벌리면 나중에 자기뿐만 아니라 엄한사람까지 함께 골탕 먹을 것이다. 잘 모르면 열심히 묻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 참 중요한 것이다. 많이 보아서 깨닫고 아는 것은 그 다음 이라는 것, 참으로 명심해야할 말이다.태백 [제8-196]子曰. 三年學. 不至於穀. 不易得也.자왈. 삼년학. 불지어곡. 불역득야.3년 정도 어떠한 학문에 뜻을 두고 공부한 수준은, 이제 기초수준으로 들어선 수준이라 생각한다. 깨어날 수준은 못되고‘이런 저런 요런 것들이 있구나’하고 알면서 자신만만해지는 정도가되는데, 그래서 젤 먼저 능력을 내세우거나 실력발휘하여 벌어들일 궁리를 하게되곤 하는 것 같다. 학문의 목적이 깨우침을 통해서 성장하고, 성숙해나가는 것일터인데, 3년쯤 배워 어느정도 틀을 잡아갈 무렵이면 본래 갖고 있는 욕망에 불을 댕겨, 세상을 향해 활활 타오르게 되는 것같다. 근데 바로 그 때가 진짜 공부하게되는 시기인데 말이다. 근데 그런 시기에 진정 학문본래의 뜻을 잃지 않고 배워가는 사람을 만나기란 참 쉽지 않은 것 같다. 나 역시, 이와 같은 위치에 있다. 나는 알고 있다, 이제야 말로 진짜 시작이다!!자한 [제9-223]子曰. 譬如爲山. 未成一?. 止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 進吾往也.자왈. 비여위산. 미성일궤. 지오지야. 비여평지. 수복일궤. 진오왕야.학문을 하며 실패와 성공은 자신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말이다. 즉 한 삼태기의 흙만 있으면 산이 되는데 그것을 구하지 못해 중간에 포기한 것은 자신이 행동을 중단한 것으로, 학문도 마찬가지로 실패의 원인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말아야 한다. 또한 땅을 고를때도 한 삼태기의 흙을 땅 위에 덮었으면 그만큼 일이 진척되듯이 학문도 실천하고 일보 일보 전진하는 것이 학문성취의 길임을 강조한 구절이다.이는 지금 살아가는 사람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공부에 있어서 태도에 대해 뼈있는 한마디가 아닐 수 없다. 이 구절을 보게 되면 단기간 벼락치기나 조금 해보고 안된다고 포기하는 그런 태도가 아닌 꾸준하고 목표를 가지고 한발한발 나아가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자한 [제9-227]子曰. 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자왈. 후생가외. 언지래자지불여금야. 사십오십이무문언. 사역부족외야이.젊다는 것은 그만큼 미래가 있다는 것이며, 미래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가능성이 무한대로 있다는 것이다. 즉 노력을 하면 얼마든지 미래에 발전될 수 있는 것이다. 살면서 성공과 실패를 떠나 모든 웃어른들은 젊어서 좋겠다는 말을 자주 하신다. 바로 미래의 가능성의 부러움과, 한편의 그 당시 자신의 선택에 대한 후회나 회상을 느끼며 하는 말임을 이 구절을 통해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향당 [제10-236,237]孔子於鄕黨. 恂恂如也. 似不能言者. 其在宗廟朝廷. 便便言. 唯謹爾.공자어향당. 순순여야. 사불능언자. 기재종묘조정. 편편언. 유근이.與下大夫言. 侃侃如也. 與上大夫言. 誾誾如也. 君在. ??如也. 與與如也.여하대부언. 간간여야. 여상대부언. 은은여야. 군재. 축적여야. 여여여야.요즘 공직자의 태도 및 역할에 대해 말이 많아지면서 이 향당편이 마음에 많이 와 닿았던 것 같다. 국가를 안정적이고 발전적으로 이끌어 나가야 하는 공직자의 윤리에 대한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논어는 그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슨 일이든지 신중하게 처리하며, 공식적인 자리와 사적인 자리를 구분해서 행동하며 공적인 자리에서는 성심 성의껏 예를 다해 행동하고 사적으로 한치 부끄럼 없이 행동했던 공자의 생활이야 말로 요즘 정치인들이 마음속에 새겨둬야 할 최우선의 덕목일 것이다.향당 [제10-247]?焚. 子退朝曰傷人乎. 不問馬.구분. 자퇴조왈상인호. 불문마.지금도 말의 가치는 상당하지만 당시의 재산의 가치는 엄청났을 터인데, 마굿간에 불이 나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꾸짖기는 커녕 말의 대한 언급도 없이, 오로지 사람의 안위를 묻는 것을 보니, 얼마나 사람을 위하셨는지 알 수 있었다.향당 [제10-250]朋友死. 無所歸. 曰. 於我殯.붕우사. 무소귀. 왈. 어아빈.고대는 지금과는 달리 장례절차가 엄청 복잡하고, 번거로웠을 것이다. 장례절차를 감수할 만큼, 벗과 이웃을 마지 자신의 가족처럼 생각했다고 볼 수 있었다. 이러한 공자의 자세는 현대 우리사회에서 만연하는 왕따문제나 이웃간의 갈등에 매우 필요한 덕목같았다. 요즘 뉴스를 보면 초등학생이 수업시간에 친구를 흉기로 찌르거나, 예전부터 있었던 왕따로 인한 자살같은 안타까운 일들이 생기고 있다. 이런 안타까운 일들을 줄이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가족을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것과 같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