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over(애인) 을 보고내가 두 번째 보게 되는 연극 The lover(애인) 이 연극은 나에게 너무 어렵고,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공연인 것 같다. 확실히 그 전에 보았던 뮤지컬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의 진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애인이라는 연극은 그 어떤 한 것도 확실치 않으며, 부부의 갈등이 어디서부터, 왜 시작되는지도 불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연극의 작품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으며,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는지 잘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이 작품에는 남녀 간의 이야기 이며 실제로 리처드와 사라 두 인물만 나온다. 그러나 연극의 많은 부분에서 이들은 각기 자신의 분신(즉, 이중생활) 이라 할까 아니면 환상 극 속의 인물이라 할까를 포함 총 네 명의 캐릭터가 등장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또한 무대는 둘로 나뉘어져 있고, 단아하게 잘 꾸며진 거실과 현관으로 나가는 작은 홀은 아래층에, 침실은 층계 몇 개 위 있다. 두 가지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할 수 있다. 연극은 이해심 많고 자상한 남편 리처드는 정숙하고 아름다운 아내 사라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다 이해한다는 듯 그녀의 정부 맥스가 집에 오는 날, 그 자신도 시간을 보내기 위해 시간제로 뛰는 창녀 들 로리스를 만난다. 부부로 맺어진 둘은 만들어진 이중생활로 억눌린 욕구에 다른 이름과 성질을 부여하고 자신의 마을을 표출해줄 수 있는 캐릭터를 상대방의 몸속에서 찾는다. 바깥에서 열심히 일하며 아내를 위하는 리처드는 낮에 부드럽고 분위기 있으며 자신의 성적 욕구를 채우기 위한 사라의 맥스가 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외모와 집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부인으로서 품위를 갖춘 사라는 리처드를 만족시킬만한 기교를 갖춘 들 로리스로 변한다. 이 생활을 계속 해오다가 맥스는 어느 날 이중생활이 이젠 불필요하다가 생각해서 그는 그만 두려고 한다. 리처드는 자신을 인식시키기 위해 사라에게 약간은 거북스러운 말들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라는 익숙한 그녀의 이중적 생활과 그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와의 소통을 거부하고 리처드와 똑같이 거북스러운 말들로 리처드에게 질문을 한다.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리처드와 계속해서 이중생활을 유지하길 바라는 사라 이 부부는 어느새 정해진 결말로 진행이 되어가고, 리처드는 자신의 일부 맥스를 죽이게 되고 사라는 이중생활이 하나였단 걸 끝내 외면하게 된다. 이 부부는 이중생활을 버리지 못한 채 그냥 공존할 것을 선택하면서 막을 내린다. 이 연극은 끝내 이중생활을 버리지 못하고 또 다른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들의 부부 생활을 어떻게 생각해야하고 보아야 할지 의문이다. 사라라는 인물은 과연 점잖은 여인일까? 아니면 하나의 창녀인 것인가? 알 수 없다. 다만 다른 사람들의 눈초리와 사회의 강요에 의해 점잖은 여인인 척을 하는 것 일수도 있고 자기의 성적 욕구를 발산시키는 창녀 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리처드 또한 점잖은 여자와는 성적 만족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욕정의 모든 기교와 경험을 지닌 대상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아니면 불필요하다가 생각하면서도 차마 자기 자신의 모습을 버릴 수 없는 것인가? 리처드는 정말로 자기의 분신인 맥스를 질투하는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죽음(혹은 아님) 을 보고마지막 세 번째로 이라는 연극을 보게 되었다. 이름에서부터 약간은 호러스럽고 무엇인가 뭔가 남다른 연극인줄 알았는데, 연극을 보고 나니 호러가 아닌 진지한 블랙코미디 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연극은 각각의 독립적인 에피소드로서 뮤지컬처럼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첫 번째 이야기는 갑작스런 죽음인데 시나리오 작가가 아내에게 구상중인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다 억 하고 호흡곤란으로 쓰러져 죽는데, 전체 이야기의 문을 열어주는 중요한 장면이었다. 두 번째는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약에 찌들어 살던 남자, 결국 환각 속에서 헤매다가 죽는다. 이 장면에서 누나가 동생을 때리는데 정말 내가다 놀랐었다. 너무 세게 때려서 아 진짜 실감나게 때리는 구나 생각했고 내가 다 아픈 것 같았고, 눈빛 연기가 좋았던 것 같다. 세 번째는 좀 어이없는 죽음 이였는데, 저녁 식사하던 엄마와 딸은 말다툼 벌이다 열 뻗친 딸이 화를 참지 못해 음식을 꾸역꾸역 입으로 밀어 넣다가 기도에 음식이 걸려 질식사하는데, 엄마는 소리만 지르고 도와달라고 외치기만 할뿐 정작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한다. 그런 엄가가 지켜보는 가운데 딸은 숨을 멎는 장면이었고, 죽기 전에 모녀가 말다툼을 할 때 엄청 웃었다 너무 웃겨서 진짜 코미디를 보는 것처럼 계속 웃었다. 나는 이 엄마가 참 한심해 보였다 딸이 죽어 가는데도 아무것도 못하는걸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또한 이렇게도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도 해봤다.네 번째는 불쌍하게 홀로 병실에서 혼자 환자가 갑작스런 통증으로 외롭게 죽는다. 간호사와 환자의 환상호흡과 환자의 얄미운 말투가 간호사의 하나하나의 행동이 참 재밌게 보았다. 다섯 번째는 한 아줌마가 가족에게 버림받고 약물을 복용하면서 전화기에 대고 악 쓰고 울고 웃는데, 그러다가 아들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고 충격과 약물로 인해 죽는다. 이 때 배우가 연기하는데 계속 나랑 눈이 마주쳐서 나는 살짝 무섭다고 느꼈고, 배우의 조용하게 말할 때 말투가 너무 웃겨서 계속 웃었다. 이 때 참 아쉽고 맘 아픈 게 연극이 길었던 거와 가족에게 버림받아서 고통스러웠을 거란 생각에 죽을 때 조금 짠했다. 여섯 번째 이야기는 사건현장을 향해 광란의 질주를 하던 경찰차, 지나가던 오토바이를 치다. 환자를 함부로 움직이게 하면 안 된다는 동료 경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경은 계속 말을 안 듣고 환자를 도와주려다가 결국 오토바이 운전자는 죽는 장면인데, 이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여경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가 벗을 때 순간 너무 웃겼고,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못 알아들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이야기는 일을 마치고 귀가한 남자,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킬러와 마주친다. 그는 죽음을 막고 싶다면 그가 믿는 신에게 간청하라 말한다. 4분 안에 나타나 자신의 살인을 막게 해보라고 그러나 신은 나타나지 않았고, 남자는 킬러에게 자기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애원을 했지만 남자는 총에 맞고 죽는다. 연극에서 희생자 하신 분이 말하는 억양이나 연기가 독특한데, 웃기다. 근데 가발은 조금 안쓰러웠고 남자가 말하다가 긴장해서 바지에다가 응가를 보는 장면도 있었다.
1970년대 초 우리 사회는 삼선개헌의 여파와 유신 체제에 의한 공화당의 장기집권 야욕으로 정치적 불안과 긴장이 고조되었다. 4·19에 의해 점화되고 5·16에 의해 좌절되었던 민주화의 열망이 유신 체제에 대한 대항으로 전개되었고, 1970년대는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산업화의 여파가 사회전반에 영향을 미치면서 경제적 모순과 인간의 소외를 가중시켰으며, 자유와 민주화의 과제로 연견된다면, 경제적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대항은 인간의 평등과 인간성 회복에 대한 과제로 연결된다. 1970년대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민주화의 문제와 사회·경제적 측면에서의 평등의 문제로 서로 부딪히면서 갈등을 빚는데, 이것이 시대적 상황을 규정하게 되고, 시의 영역에 있어서도 인간의 자유와 민주화를 위한 실천적인 저항 운동과, 산업화에 따른 제반 모순에 대항하려는 미적 응전이 뒤따르게 된다. 즉 1970년대 시는 민주화와 산업화의 두 가지 추세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그 시대적 변별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며, 1970년대 시가 보여주는 일반적인 경향은 1960년대의 그것이 어떻게 발전되며 변증법적으로 지향되는가라는 측면에서도 민중적 감수성의 시와 도시적 감수성의 시를 민중적 감수성의시는 주로 억압적인 정치 체제와 그 폭력에 맞서 민주화와 인간의 해방을 추구하였고, 도시적 감수성의 시는 산업화의 여파로 파생된 사회적 부조리의 인간의 소외를 문제 삼았다.이 외에도 1960년대 이전부터 지속되었던 경향으로 전통적 서정시와 언어를 통한 내면 탐구의 시를 들 수 있다. 전통적 서정시는 자연과 생명의 근원에 대한 탐구를 통해 서정성을 추구하였고, 내면 탐구의 시는 언어 실험을 통해 현대인의 복잡한 내면의식을 천착하였다. 1970년대에 큰 흐름으로 보여주기 시작한 민중시, 혹은 리얼리즘 시는 민중문학의 한 장르 의 개념이며, 1960년대의 참여시를 계승한 지점에서 당대의 민족적 요구에 적극 부응해 나가는 실천적 의식을 토대로 한다. 시인들은 대부분 신인들로서 김지하, 김준태, 이시영, 정의성, 양성우있듯, 이 경향의 시들은 특이한 개성으로 언어에 대한 실험을 시도하여 1980년대 들어 더욱 본격적으로 전개 양상을 보여주게 된다.1970년대의 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우리시의 영역이 서정의 세계에서 현실을 세계로 확장되는 흐름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전제적 특징으로, 서정에서 현실로 옮겨왔다는 관점이 있으나, 우리시가 서정성을 그 내면적 뿌리로 굳건히 지켜왔다고 볼 때 그것은 전이가 아닌 확대의 움직임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이 확대는 1960년대 시의 경향을 더 깊이 있게 밀고 나가는 심화의 특징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1970년대 시의 특징을 우선 1970년대 시의 심화와 확대라고 간주할 수 있다. 1970년대의 시와 문학이 지닌 특징으로 계몽주의적 태도로, 1960년대 문학의 특징을 개인의 자아 확인과 주체성 확립에서 찾을 수 있다면, 1970년대 문학은 그 개인의 자유와 정체성을 위협하는 사회적 제반 현상에 대한 대응으로서 계몽주의적 특징을 지닌다. 즉 정치적 억압과 사회, 경제적 모순에 맞서는 문학적 대응에 있어 그 원동력을 제공해 준 것은 인간의 양심과 사회 정의 대한 믿음이고, 1960년대 문학의 원동력이 자율성에 있었다면, 1970년대 문학의 원동력은 계몽적 이성에 토대한 현실비판 가능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급격하고 다양하게 변모되어 가는 시대적 흐름을 예의 주시 하면서 우리 문학에 창조적 동력을 마련해 줄 계기를 포착해야 한다. 이를 우해서 1970년대 문학이 보여주었던 계몽주의적 특징에 대해서도 재평가와 비판적 수용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우리 시대의 문화적 양상을 지배하는 특징 중의 하나는, 문학도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원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상업주의의 대세를 견제하면서 우리 문학과 시의 본질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팽팽한 균형과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또한 인간의 주체성과 합리성, 그리고 이성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세계와 인간의 복잡하고 중층적인 정체에 대해서도 깊이 사유해야 할 위선과 막힌 현실에 대한 부정 의식을 드러낸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에 대두된 이 형식파괴시는 시대적 상황의 전개 과정에 그 충격성을 유지하기 어려운 측면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1980년대 중반 이후 이들의 시적 지향은 새로운 과제에 봉착하게 되며, 그들은 각각 작기 변모와 갱신을 추구하게 된다.민중문학의 논리는 시의 현실 변혁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농촌 현실과 노동 현장에 토대를 둔 새로운 현실인식과 역사의식을 고취한다. 민중시는 소박하고 쉬운 시, 현장성을 갖춘 시, 현실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 리얼리즘 시 등을 요구하며, 시의 문학성과 시적 형상화 방식보다는 운동성과 민중의식의 고취라는 내용성에 치중하게 되어, 구호주의의 도식성과 상투성을 노출하게 된다. 그 예로서 김정환, 김준태, 김명수 등의 시적 여정을 살펴볼 수 있다. 김정환은 [지울 수 없는 노래]에서 신선한 긴장과 아름다운 감성을 보여 주었으나, 후 기시로 전개 될수록 민중 해방을 위한 전투적 열정에 치우쳐 도식적 구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김준태는 광주에 대한 사랑을 절실히 노래하였으나, 직설적 감정의 표출로 인해 주관성에 함몰되는 우를 범했으며, 김명수는 초기시의 서정적이고 세련된 언어의 세계에서 현실의 어둠에 대한 분노로 시세계를 변화시킴으로써 시적 긴장과 감동을 감소시켰다. 결국 1980년대 억압적 체제에 대항하는 민중시의 지향은 김지하, 신경림, 이성부 등의 민중 지향적 시를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형식 실험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중시는 서정성의 도입, 전통양식의 재현, 서사구조의 도임 등의 형식 실험을 시도 서정성의 도입을 시도한 대표적인 경우로 곽재구를 들 수 있다. 그는 민중시의 건강한 뼈대에 서정성의 숨결을 불어넣어 일상적 삶 속의 작은 사물들로부터 슬픔과 희망을 불러일으키며 시대적 아픔을 실감하게 형상화 한다. 한편서정성의 도입과 전통양식의 재현을 시도한 경우로 하종오, 김용택이 있는데, 하종오는 현실성에 서정성을 결합하면서 민요나 동요의 3음보히려 신화와 현실의 역동적 관계를 더 깊이 천착하지 못하고 신화적 세계의 정형화된 상징성 속으로 귀속되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1990년대의 시는 1987년 6월 항쟁과 사회주의권의 변혁이라는 역사적 계기를 통해 변별성의 토대를 마련한다. 그리하여 1990년대는 정보매체의 영향력 증대로 인해 소비 대중문화의 암초에 막혀 문학까지도 상품화, 대중화되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고, 문학의 영역도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편입되면서 1990면대 문학은 대중적 인기 영합하는 문학의 상업주의에 맞서 문학적 진정성을 지키는 새로운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문화적 상황은 문학의 자율성과 신성성, 그리고 대사회적 비판성을 희석시키고 문학의 세속 성을 가속화 시킨다. 세기말적 혼돈이라는 시기에 우리는 이러한 1990년대를 반성과 성찰의 즉 ‘전환적 모색기’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수용된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논의는 생산적인 대화를 끌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이 논의 그것이 지닌 본질적 측면, 즉 타락한 도구적 이성과 이간 중심의 주체에 대한 비판으로 전개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긍정적 측면이 현대와 탈현대, 주체와 탈 주체의 경계에서 그 동시적 진전을 통해 문학에 주어지나, 결국 1990년대 문학과 시는 세기말적 혼란과 환멸을 견디고 고뇌와 방황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자기 성찰이 창조적 모험의 전위성으로 전화되는 계기를 모색하고 이런 위상을 지닌 1990년대의 시는 1980년대 첨예화되었던 민중시, 노동시의 영향력이 감소하면서 전반적으로 탈 역사, 탈 정치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역사 현실과 사회에 대한 거시적 담론에서 개인의 내면과 일상적 경험에 대한 미시적 담론으로 중심이 옮겨오면서, 시의 경향도 미세화 되고 다양화되고 있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서정성의 회복이라는 공통된 축을 1990년대 시의 전체적 특징으로 일단 ‘서정성의 회복’과 ‘다양성의 확산’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이 다양성을 가중시키는 것은 중진 시인인과 30, 4을 새로운 언 감각으로 형상화한다. 한편 ‘대중문화 패러디’를 통해 자본주의적 소비문화에 대한 매혹과 반성을 도시에 보여주는 시도는 유하, 장정일, 함성호, 장경린 등을 찾을 수 있으며, 장정일은 대중문화의 상품체계에서 탈출하려는 욕망과 그 발목을 붙드는 도시의 욕망 사이에서 길항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유하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분출구인 압구정동과 순수 자연의 원형적 공간인 하나대를 넘나들면서, 대중문화의 패러디를 통해 그 매혹과 반성을 동시 보여준다.함민복은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에 침식당한 개인의 욕망과 그 좌절을 통해 자본주의적 삶의 양태를 비판하고, 함성호는 현대산업사회의 실상을 예리하게 주시하면서 무의식의 풍경을 요설의 어법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경향의 시들은 유희와 비판 사이의 긴장을 상실할 때, 타락한 대중문화와 결탁하여 상업성을 드러낼 위험을 지니고 있다. 대중문화의 패러디는 두 번째 전략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첫 시집을 상재한 젊은 시인들의 작업에 의해 급진 화되어 ‘테크놀러지적 상상력’으로 나타난다. 시는 대중문화에 대한 매혹과 반성을 통과하면서 더 나아가 자본과 권력과 욕망에 오염된 주체로부터의 이탈을 추구한다. 이 경향은 시인은 김태형은 록음악이 지닌 비트적 요소를 도입하여 이성과 인과율로 근접살 수 없는 감각의 확장과 질수하는 발산의 상식을, 서정학은 후기자본주의 사회를 구속하는 테크놀로지의 회로를 따라가면서 가상주체를 매개로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열린 알레고리 기법을 보여주고, 이철성은 사물들에게 주인의 자리를 넘겨주는 전도된 시선의 기법을 통해 무수한 자아를 받아들이는 새로운 시적 시도를 보여준다. 성기완은 록음악을 통한 환각과 물리학적 사유를 통한 각성을 동시에 밀고 나가면서, 자의식과 이중자의 감옥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이원은 자아와 사물이 상호 교섭하는 독특한 시선을 통해 세계의 실상을 움직임 속의 정지된 장면으로 포착되는 형상화 이다. 이들의 시는 기존 시의 중핵을 이루었던 서정적 자아와 그것이 지닌 주체의다.
우아미, 숭고미, 비장미, 골계미는 흔히 미학의 기본 범주들로 일컬어진다. 이 중 숭고미와 골계미는 서로 대립되는 미적 범주이다. 주체가 개체보다 높은 위치에 있을 때 그 객체가 비소하고 유한한 것으로 부정되는 골계미가 탄생되는 반면, 낮은 위치에 있을 때 그 객체가 위대하고 무한한 것으로 긍정되는 숭고미가 탄생된다. 이 골계의 하위 범주로서 해학과 풍자가 존재한다. 해학과 풍자의 차이는 부정된 대상 속에 주체가 포함되느냐의 여부에 있다. 해학은 자기 부정을 포함하는 주관적 골계이나, 풍자는 자기 부정을 포함하지 않는 주관적 골계이다. 해학은 본래적 자아가 경험적 자아를 향해서 짓는 웃음이며, 부정을 통해 보다 높은 긍정의 세계를 지향한다. 반면 풍자는 주체와 대상을 분리시키고 대상을 부정함으로써 인간의 어리석음과 악덕을 폭로하고 공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해학은 성격적, 기질적인 것인 반면, 기지는 지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해학은 태도, 동작, 표정, 말씨 등에 광범위하게 나타나지만, 기지는 언어적 표현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해학은 즐겁게 시인하는 공감적인 태도이며, 기지는 남이 보지 못하는 유사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경구나 격언 같은 압축되고 정리된 말로 능숙히 표현하는 지적 능력이다.아이러니는 언어적 아이러니와 극적인 아이러니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언어적 아이러니는 겉으로 하는 말이 내용적으로 의도된 끗과 다른 경우에 생기는 것이고, 극적 아이러니는 작품 자체가 전체적으로 아이러니를 담고 잇은 경우를 말한다. 여기서 풍자, 아이러니, 기지는 부정적인 것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은 반면, 해학은 이것을 완화한다. 전자의 웃음은 비정한 쾌감을 주는 반면, 후자의 웃음은 부드러우며 동정적 쾌감을 느끼게 한고 있다. 김수영의 시는 풀과 바람의 정체이다. 풀을 민중의 상징으로, 바람을 외세의 상징으로 간주하여 이것을 대립적 상징으로 보고 있으며, ‘눕는다.’ 와 ‘일어난다.’ ‘운다.’ 와 ‘웃는다.’를 대립 개념으로 보는 공통된 이해에서 출발하여 이상이며 목표가 된다. 폐쇄된 자아의 외로움은 3연에서 “생각하고 생각하다”라는 내면 성찰의 과정과 발상의 근본적인 전환을 거쳐 4연에서 생명의 재발견에 도달한다. [무슨]의 4연에서 김지하는 생명에 대한 성찰을 개체적 자아의 폐쇄된 테두리를 넘어서서 우주적 공간으로 확장하고, 주체로서의 자신의 생명이 고갈된 연후에 그 공간에서 다시 태어나는 새 생명은, 주체의 자기중심적 한계를 벗어버린 자리에서 싹트는 것이다. 초기 시에서 이원론적 대립의 세계인식을 통해 독자적인 개체로 인식했던 주체와 자아가, 스스로 독자성을 지니면서도 인간, 자연, 우주와 무한히 연결되는 유기체적 본성을 지닌 것임을 깨닫게 되고 “쓴웃음”과 “미소”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쓴웃음’은 4연의 “다 살아 뜀뛰는”과 “허허한 우주”의 상된 이미지로부터 생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시인이 발견한 우주와 상통하는 생명은 역동성과 충만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손에 잡히지 않는 광대한 허무의 공간이기도 하다.‘쓴웃음’은 이러한 충만과 공허 역동성과 무한성의 간극으로부터 생겨나는 상황적 아이러니의 함축된 표현이며 ‘미서’를 통해 이 아이러니의 상황을 새로운 성찰로 역전시킨다. ‘미소’의 성격은 7, 8연의 상황을 통해 유추될 존재의 독자성을 지니면서 상호 교류하고 화답하는 혈연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인간 주체와 대상, 자아와 자연이 함께 우주 만물의 공동체적 운명에 처해 있음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미소’는 “무슨 종교처럼” 종교적 각성의 차원과도 맞닿아 있는 것이며. ‘미소’는 일반적인 해학의 차원을 넘어서는 종교적 해학, 혹은 우주적 해학의 차원으로 해학과 풍자가 복합적으로 결합된 양상으로부터 후기시의 우주적 해학의 차원으로 전개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김기택의 이 시는 원자 폭탄으로 대표되는 첨단의 과학문명이 인류를 파멸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을 것이라는 경고와 비판의 주제를 담고 있는 듯이 보인다. 방사선에 의해 뼈가 노출되는 상황은 방법적 투시의 시선과도 관련성을 지니색하는 시인은 딸꾹질이라는 단절과 막힘을 거쳐 현실의 어둠에 갇힌 현대인의 폐허를 직시함으로써 ‘웃음’이 지닌 아이러니의 정신을 내면화하는 방식을 보여준다.계몽주의는 봉건질서를 지탱했던 형이상학적, 신학적 세계관을 깨뜨리고 이성적 주체에 의한 인간해방, 자연의 수학화에 따른 자연 지배, 일직선적, 합목적 시간관에 의한 진보의 개념 등을 그 이념으로 하고 있다. 미적 현대성은 현대 세계 밖으로 도피하며 원시적이고 능동적인 상상의 힘과 자기표현, 감정 및 감각의 영역과 신비적 영역을 중시하는 경향과 관련된다. 계몽주의 적을 역사철학적 현대성이라고 말하는데, 역사철학적 현대성은 가치적 합리성과 도구적 합리성의 양면성을 지니는데, 미적 현대성은 다시 이 현대성의 경험을 반영하면서 반발하고 수용하면서 저항하므로 한층 복잡한 양상을 지니게 된다.미적현대성은 역사철학적 현대성과 단순한 대립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철학적 현대성의 측면과 그것에 저항하는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미적 현대성’은 현대 세계의 비인간성에 대한 거부와 저항의 자세에서 역사의식이 한 표현 형태로 성립된 경우가 있는 반면, 단지 현실과의 단절 속에서 과거의 이상향으로 도피하거나 신비적인 세계로 초월하려는 폐쇄적이고 자족적인 자세에서 성립된 겨우도 있다. 이런 전제하에서 이글이 주로 관심을 갖는 것은 미적 현대성의 한 측면인 ‘감각’이다. 감각은 합리적 이성에 저항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감정과 구별되고 영감 및 상상력과도 구별된다. 역사철학적 현대성의 원리인 주체의 이성 중심주의에 저항하면서 반응하는 미적 현대성의 원리는 무엇보다도 서정시에 나타나는 감각적 요소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일반적으로 미적 현대성은 낭만주의 , 상징주의, 심미주의와 이미지즘, 아방가르드 등을 들 수 있고, 이미지즘의 목표는 견고하고 건조한 이미지 제시에 의한 사물시의 창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감정을 배격하고 그것에 상응하는 객관적 사물로서 감각적 형상물인 이미지를 중시한다. 엘리어트는 ‘객관성 상관물 이 박목월이다. 「윤사월」전문에서 어느 산 속의 봄날 풍경과 눈먼 처녀의 그리움이 절묘한 감각적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있다. 봄날의 아름다움은 “송화 가루”가 지닌 시각 및 후각에 의해 화사하게 노출되지만, “외딴 봉우리”의 “외딴집”에 사는 “눈 먼 처녀”에게는 단지 “귀 대이고/엿듣” 는 행위만이 허용된다. 따라서 “꾀꼬리”의 울음이 지닌 청각적 이미지는 봄날의 싱싱한 생명력을 봄 내부에서 느끼면서도 외롭게 격리된 채 그것을 엿보는 처녀의 안타까움을 함께 표현하고 있다. 한국시에 있어서 전형적인 서정 시인으로 손꼽히는 박목월은, 이처럼 담수채(淡水彩)의 동양화와 같은 느낌을 주는 묘사의 기법을 보여준다. 이 묘사의 장면에 생기를 북돋우는 것은 시각, 청각, 후각 등의 감각을 복합적으로 교직하는 이미지 구사법이다. 1950년대 시인인 김종길도 이러한 이미지의 감각적 형상화를 중요한 시적 특징으로 보여준다.“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라는 첫 문장은 감각을 일깨우는 동시에 이 시 전체를 떠받치는 시적 장력을 형성한다. 눈 내린 아침의 숲길에서 만나는 순은의 시각적 이미지는, 이 청각적 이미지를 매개로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깊이를 얻게 된다. 눈 밟는 ‘소리’는 2연에서 “원시림(原始林)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로 환치되고, 다시 천년 동안 “딴딴한 석탄(石炭)으로 변모되는 소리”로 전이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리는 다시 3연에 이르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타오르는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石炭)의 발언(發言)”으로 연결되고, 그 뜨거운 기운이 연통을 빠져나가 “은빛 날개가 작은 새”가 된다. 이 청각적 이미지의 연쇄는 작품 전체를 통해 시각적 이미지와 긴밀히 결부되어 이미지의 그물망을 이룬다. 그것은 결국 시의 후반부에서 “아득한 세계(世界)가 운반(運搬)되는/은빛 새들의 무수한 비상(飛翔) 가운데/겨울 아침으로 밝아 가는 불씨를 분다.” 에 집약된다. 석탄이 지닌 ‘검은 색’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 소리”가 결합되어 첫 구절을 낳고, 새가 대 초까지의 정치적, 사회적 진행 과정과 상호 연관성을 지니고 전개되었다. 4·19혁명을 통해 기치를 내건 ‘민주주의 정책’에 의해 억압되면서 ‘근대화’ 혹은 ‘산업화’의 과제로 대치되었다. ‘민주주의’와 ‘산업화’라는 이 모순된 두 과제는 중첩되고 혼재하면서 1960년대 이후 1970년대까지 우리 사회와 문화의 제반 양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한다. 분단 체지의 심화와 더불어 진행된 이데올로기적 대립 양상은 민주주의와 근대화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을 가증시켰고,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규명하고 해결하려는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담론들이 산출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좌, 우 이데올로기의 격심한 대립으로부터 혼란을 겪었던 해방공간과 6·25의 비극적 체험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증폭되면서 새로운 사회 역사적 현실로 전환된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그것을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대응 방식으로 극복해 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이러한 관점은 문학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다. 1920년대 종반 이후 카프를 중심으로 형성된 목적주의 문학은 1930년대 들어 리얼리즘 문학으로 발전되어가고, 이 시기에 서구 모더니즘의 수용으로 현대성의 인식과 방법론을 중시한 모더니즘 문학이 대두한다. 따라서 한국문학에서 1930년대는 리얼리즘, 모더니즘, 낭만주의(혹은 전통주의 문학)라는 세 가지 대립적 유파가 형성된 시기이고, 이후 이 세 유파는 현대 문학사에 있어서 유력한 계보를 형성하면서 당대의 사회 역사적 상황에 맞게 변형과 발전을 거듭해 간다. 리얼리즘, 모더니즘, 낭만주의(전통주의 문학)의 세 계보는 사실 ‘리얼리즘/모더니즘’의 이분법적 대립 구도로부터 유발되는 것인데, 이 대립 구도는 식민지 시대의 카프 문학/민족주의 문학, 해방공간의 좌/우의 논쟁, 1960년대의 참여/순수 문학 논쟁, 1970년대 민족문학 논쟁을 거치면서 변형과 발전을 거듭하며 정착되어 왔다. 그러나 ‘리얼리즘/모더니즘’의 가짜 대립에서 오는 이분법적(혹은 삼분법적) 사고는 우리에게 거시적 안목을 가져다 준 반하다.
뮤지컬 를 보고뮤지컬 빨래는 재밌고 감동적인 것 같다. 뮤지컬 는 공연 시작 전 어수선한 공연장?분위기를 공연 관람수칙을 알려주시던 분의?그저 웃지?않고는 못 버틸 재치로 공연은 시작을 했고 관객 모두는 기대와 함께 몰입했다.연극의 내용은 서울, 하늘과 맞닿은 작은 동네(달동네)에 새로 이사 온 꿈이 많은 27살의 나영이가 오고 나서부터 겪는 일이다. 빨래를 널러 올라간 옥상에서 우연히 이웃집 몽골청년 ‘솔롱고’를 만나게 되고 어색한 첫 인사로 시작 된 둘의 만남은 바람에 날려 넘어가 빨래로 인해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사회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좌절하고, 그러다 다시 씩씩하게 일어나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 주변의 장애인 딸을 두고 사시는 주인집할머니, 애 딸린 구씨와 반 동거하며 동대문에서 옷 장사하는 희정엄마 욕을 제일먼저 배운 불법체류자 낫심, 힘겹지만 서로 정붙이며 살아가는 이들의 서울 살이 이야기이다. 연극을 보면서 한 장면 한 장면 모두다 마음에 와 닿았고 정말 좋았다. 또한 무대가 변신하는 게 신기했다. 작은 무대에서 주인집 마당이 되었다가 슈퍼가 있는 동네 골목으로 변신했다가, 옥상 그리고 불이 꺼지는 사이 나영이가 직장 생활을 하는 서점으로 변하기도 했다. 재밌었던 것은 좌석 옆에 계단이 사람들이 탑승 한 버스로 변신해서 재밌었고, 솔롱고가 나영에게 ‘참 예뻐요’ 노래 부를 때 같이 술 마시고 있던 슈퍼아저씨, 마이클 등이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이는 장면은 정말 재미있는 설정이었고, 상심에 빠져 술에 취한 나영을 골목에서 우연히 만난 솔롱고는 나영을 집까지 바래다주던 길에 취객들의 시비에 휘말려 나영을 구하는 두들겨 맞는 장면이 있는데 진짜 그렇게 세게 때릴 줄은 몰랐고 정말 리얼하게 연극이 아닌 실제 장면 같이 때려서 기억에 남으며, 내가 너무 안타까웠고 내가 막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1인 다 역이 생각이 나고 아쉽다면 주인공들을 빼고 다른 분들은 너무 분장을 잘하셔서 구분하기 가 어려웠다. 특히 주인 할머니 하셨던 분이 가장 찾기 힘들고 구분하기 힘들었다.빨래라는 것이 옷이 더러우니까 깨끗하게 입기 위해서 귀찮고 하찮게 여기고 그냥 하는 것 인줄로만 알았는데 연극을 보고 나서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연극에서는 지친 삶속에서 인식하지 못한 남이라는 존재의 개인적인 사정을 무시하고 상처를 주는 모습을 빨래라는 소재로 표현하였으며, 솔롱고와 나영이의 사랑의 메신저가 되기도 했고, 다른 곳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같은 이웃과 함께 빨래를 하면서 기쁨과 즐거움을 나눌 수 있기도 했고, 우리들의 인생이 더럽고 고단하지만, 빨래처럼 빨면 얼마든지 깨끗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으며, 또한 인종차별, 성별, 직급 등 긴?삶의 과정에서 얻게 되는 먼지 같은 존재들 을 털어 주기도 하며 가장 좋은 것은 자기 자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했다. 빨래라는 것이 참 소중한 존재이며, 또 다른 중요성을 알게 되어서 좋았고, 연극을 보면서 메시지가 가슴으로 전달되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찡했고, 가슴깊이 세 기게 되었으며, 사람과 사람의 인간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지를 나에게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 알게 해주어서 참 좋았던 것 같다.